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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 항산 김승석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출처_ 국립중앙박물관
가을엔 자연을 벗 삼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떠오르지만 내 삶의 텃밭인 출리산방의 하늘정원에서 가을의 정취를 느껴봅니다.
서녘 하늘의 노을빛에 아름답게 물든 양털 구름이 보이고, 수평선에는 추자도, 보길도, 청산도, 여서도 등등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풀잎이 가을을 만나면 빛을 바꾸고 나무가 가을을 만나면 이파리를 벗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구양수(1007~1072년)의 《추성부秋聲賦》에 실린 산문의 한 구절인데, 사색의 계절인 가을을 잘 표현할 글이 아닐까 합니다.
이렇게 시 한 수를 짓고 읊조릴 수 있다면 몸의 안락함보다 정신적으로 충만한 삶을 사는 인생일 것입니다.
파스칼(Pascal, B.)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왜 하필이면 습지나 물가에서 잡초들과 공생하는 갈대에 인간을 비유했는지 질문을 던져 봅니다.
인간은 갈대와 같은 연약한 존재이나 생각하기 때문에 위대하다는 파스칼의 말대로 자신의 삶과 관련하여 진지하게 물음을 던지며 존재 이유를 성찰할 때 고매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잠언일 것입니다.
이와 달리 전혀 생각을 하지 않거나 피상적으로만 생각한다면 인간은 소슬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나 억새에 지나지 않는 하찮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이겠지요.
생각의 사전적 의미는 헤아리고 판단하고 인식하는 것 따위의 정신 작용이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Thought/Thinking’으로, 중국어로는 ‘思维(사유)’로 표기합니다. 생각이란 우리가 어떤 경험이나 기억, 혹은 사고나 판단, 이해 등을 글과 말로 표현하기 전 마음속에 추상적으로 남아있는 것을 말합니다.
불법에 의지하여 수행하기 전에 생각은 내가 하는 줄 알았습니다. 우리는 통상 ‘내가 생각한다.’라고 쓰기도 하고, 또 ‘내 생각으로는 어떻다.’라는 어법을 씁니다. 이는 생각은 내가 하는 것이라는 사견邪見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경전에서 부처님은 항상 ‘내가 생각했다.’라고 말하지 않고 ‘나에게 그런 생각이 일어났다.’라고 말하셨습니다. 때로는 부처님께서 ‘내가 생각했다.’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는데, 이런 경우는 관습적으로 그렇게 쓰니 나도 그렇게 쓴다고 말씀하십니다.
저가 수심修心을 해보았더니, 눈과 형색,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감촉이 만나면[觸] 생각이 그냥 떠오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떠오르나 하고 살펴봤더니 지금·여기의 현상들과 연관되어 과거의 기억(경험)들이 떠오르고 그것들의 이름과 이미지 등을 파악하면서 느끼고 생각하며 분별하고 취하고 버리는 정신작용들이 찰나적으로 다함께 일어났다가 다른 대상들이 나타나면 앞의 생각이 사라진다는 것을 알고 봤습니다.
이마저도 다른 곳이 아닌 내 속에서 떠오르고 내가 생각한다는 버릇에 익숙하다 보니 나 자신이 한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불교심리학을 공부하면 자연의 조건에 따라 비바람이 불듯이 생각도 조건에 그냥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심리학자 윌리암 제임스(1842∼1910년)는 ‘비가 온다.’를 ‘It rains’로 표현하듯이 생각도 ‘I think, You think’로 표현하면 안 되고 ‘It think’로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생각을 하는 행위자, 그 생각을 경험하는 자”는 공空하고 오로지 생각의 일어남과 사라짐만이 있다는 불교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하는 주장이라고 보여 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어난 생각이 나와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내 책임이 아닌 것도 아닙니다. 좋은 생각이 일어나면 기쁘고 나쁜 생각이 일어나면 괴롭다는 것을 몸과 마음이 느끼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연기와 중도를 설법하신 것입니다.
누구나 괴로움을 피하고 즐거움을 취합니다. 후자에 몰입하게 되면 갈애에 기인한 허황한 생각이 일어나고, 나는 즐거움과 함께 하고 그 즐거움은 영원할 것이라 생각한다면 자만과 사견에 기인한 생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세 가지의 허황된 생각[空想]은 오취온의 뿌리가 되어 우리를 윤회의 사슬에 옥죄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세존께서 「뿌리에 대한 법문 경(M1)」에서 설법하셨습니다.
일상의 삶 속에 종종 우리는 자동비행장치 마냥 쉴 새 없이 수많은 정보와 일을 동시에 처리하기 위해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 중에서 세상사에 대한 근심과 걱정은 궁극적 행복을 추구함에 있어 결코 유익하지 않습니다.
일어나는 일체가 단지 원인과 결과의 자연스런 표현임을 이해한다면 번뇌 심을 줄일 수 있습니다. 남과 나의 생각이 다르고, 과학적 사고와 철학적 사고와 종교적 사고가 다를 수 있습니다. 바른 생각(사유)도 있고 그릇된 생각도 있습니다.
바른 사유[正思惟]는 팔정도의 두 번째 구성요소인데, 「분석 경」(S45:8)에서 말하는 출리(욕망에서 벗어남)에 대한 생각, 악의 없음에 대한 생각, 해코지 않음에 대한 생각의 셋이 톱(top) 클래스의 생각이라고 봅니다.
세상에서 원하는 대상인 오욕을 찾는 것 외에 법과 지혜를 탐구하겠다는 열의(chanda)를 갖고, 초선의 구성요소인 일으킨 생각(尋, vitakka)을 일어나게끔 지혜로운 주의(如理作意, yoniso manasikāra)를 지속적으로 해나간다면 잡초 같은 생각으로부터 마음의 고요함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좋은 생각, 착한 생각은 불자들이 세상과 남에 대해서 항상 지녀야 할 바른 생각입니다. 이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초기경전에서 부처님께서 강조하신 자애·연민·더불어 기뻐함·평온의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四無量心]을 가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첫댓글
.. 세상과 남에 대해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 사무량심을 가지는 것 ..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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