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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없는 연못
법정은 오두막 이름을 수류산방水流山房이라고 지었다. 오두막 옆으로 개울물이 흐르고 있으니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수류산방이라는 당호가 오두막에는 딱 어울렸다. 작년 봄철부터 틈틈이 자잘한 공사를 계속해와 이제는 누구라도 살 만한 오두막이 된 것 같아 이름표를 하나 붙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수류산방이라는 편액을 건 날이었다. 안방에 들어가던 중 낮은 문설주에 정수리를 찧었다.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도 했다. 그러고 보니 이번이 두 번째였다. 몇 년 전에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들어가다가 부딪쳐 정수리를 다쳤던 것이다. 오두막 방문은 허리를 구부려야만 될 정도로 문설주가 낮았다. 법정은 안방 구들장을 뜯고 아궁이와 굴뚝 위치를 바꾸는 대공사를 끝냈던 것이다. 이제는 오두막의 모든 공사가 끝났다고 한시름 놓았는데 또 하나의 일거리가 나타난 셈이었다.
그러나 문짝 공사가 시급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고개만 숙이고 들어 가면 되기 때문이었다. 정신만 차리고 다니면 절대로 다칠 수가 없었다. 방심하고 드나들다가 문설주와 부딪칠 뿐이었다. 결국 법정은 문설주는 뜯지 않고 자신이 적응하기로 했다. 고개를 숙이고 다니기로 했다. '허허 나도 변해가네. 예전 같으면 당장 뜯어버렸을 텐데. 나도 이제 고개를 숙일 줄 아네. 철이 들었네.' 정수리에 난 상처는 곧 아물었다. 몸에 난 상처가 아물면 저절로 그 순간도 잊어버리게 돼 있었다. 과거에 붙들려 있으면 현재를 살고 있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었다.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매달리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지금 어느 자리에 서 있느냐가 중요했다. 법정은 늘 장경각 법보전의 주련을 잊지 못했다.
부처님 계신 곳이 어디인가. 圓覺道場何處 지금 그대가 서 있는 그 자리! 現今生死卽是
지금도 그 주련이 생각나면 몸에 전율이 흘렀다. 부처님도 한 경전에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는 것이다. '고거를 따르지 말라. 미래를 바라지 말라. 한 번 지나가버린 것은 이미 버려진 것. 그리고 미래는 아직 도달되지 않았다. 다만 오늘 해야 할 일에 부지런히 힘쓰라. 그 누가 내일 죽음이 닥칠 것을 알겠는가.'
법정은 밭으로 나갔다. 밭에는 보랏빛 감자꽃이 한창이었다. 감자꽃에서도 은은한 향기가 났다. 법정은 감자꽃에서도 향기가 난다는 것을 오두막에 살면서 알았다. 감자는 꽃향기를 더 맡고 난 뒤에 캐기로 했다. 고랭지 감자는 남도보다 수확이 늦었다. 하지가 넘어 감자 잎이 노릿노릿할 때 캐야 감자가 굵고 맛이 났다.
법정은 하안거 해제를 기다렸다. 이번에는 불일암을 거쳐 연꽃을 보고 올 생각이었다. 전주 덕진공원 연못과 독립기념관 백련못, 경복궁과 창덕궁의 비원으로 연꽃철을 즐겨보기로 했다. 경복궁 큰 연못은 다래헌에 살때 여러 번 가보았는데, 연못에는 향원정이란 정자가 있었다. 송나라 때 한 학자가 연꽃을 노래한 [애련설]에서 따온 이름으로 연꽃 향기가 멀리서 은은하게 풍겨온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었다. 창덕궁 비원의 부용지도 연못인데 부용은 연꽃의 다른 이름이었다. 부용지에는 연못으로 난간을 뻗은 부용정이란 오래된 정자가 있었다.
이윽고 법정은 해제 전날 불일암으로 바로 떠났다. 불일암에서는 사흘 밤만 자고 전주 덕진공원으로 향했다. 그곳에 가서야 연꽃철의 낭만을 흠뻑 누렸다. 비가 부슬부슬 내린 바람에 구경꾼들이 한두 사람뿐이었다. 홀로 호젓하게 향기도 맡고 연잎에 구르는 빗방울도 바라보았다. 연잎에서 떨어진 빗방울은 좁쌀만큼 작았다. 빗방울들이 연잎에 모아져 큰 물방울로 변하면 이리저리 일렁이다가 다른 연잎으로 떨어졌다. 연잎은 모든 빗방울을 머금지 않았다. 자신이 감당할 만큼만 담고 있다가 넘치게 되면 다른 연잎으로 떨어뜨렸다. '아, 욕심대로 받아들인다면 연잎은 찢어지거나 줄기가 꺾이고 말겠구나.' 법정은 연잎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면서 그런 상념에 잠겼다. 비가 오는 날은 향기가 발목께로 깔린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니 비오는 날은 연못가에 앉아야만 연꽃 향기를 좀 더 누릴 수 있었다.
그런데 법정에게 연꽃철의 행복은 그뿐이었다. 독립기념관 백련지에는 아예 연꽃이 없었다. 잉어 떼가 비린내만 풍기고 있었다. 작년에 한 원로화가에게 들은 이야기가 사실이었다. 그 원로화가는 관계자가 자문을 구해왔을 때 독립기념관 연못에 백의민족을 상징하는 백련ㄴ을 심자고 자신이 제의하고 또한 지방에서 백련을 어렵게 구해 심어주고 나서는 어느 날 백련이 잘 크고 있는지 가보았는데 모두 사라지고 없더라는 것이었다. 새로 바뀐 관리 책임자가 왜 이런 곳에 불교의 꽃을 심어놓았느냐고 화를 내면서 당장 치워버리라고 해서 그랬다는 것이었다.
법정은 그래도 반신반의하면서 독립기념관 백련못을 찾았는데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비까지 내려 먼 길을 찾아온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기도 했다. 군부에서 대통령이 나오던 시대를 끝낸 것까지는 좋았지만 개신교 장로 출신의 문민 대통령이 나오더니만 죄 없는 연꽃마저 불교의 꽃이라고 수난을 당하는가 싶어 처음에는 화가 났지만 독립기념관을 빠져나올 때는 슬퍼지기까지 했다.
사정은 경복궁 연못도 마찬가지였다. 모처럼 창덕궁 비원의 부용지를 찾아가던 날 오래 전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글만 쓰는 삶을 살고 싶다며 자신의 진로를 자문하기 위해 불일암에 찾아왔던 작가를 불렀다. 작가는 여전히 직장을 잘 다니고 있었다. 직장에 전화를 하니 밝은 목소리로 받았던 것이다. "스님,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곧 가겠습니다." 비원은 하루 종일 개방하지 않고 매시간 두 번씩만 관람료를 받고 문을 열었다. 비원을 함께 거닐며 설명하게 될 관리자가 개인관람보다는 단체 관람을 권유했다. 비가 오는데도 구경꾼들은 삼삼오오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작가가 왔다. 법정은 작가를 보자마자 자신이 받은 충격을 털어놨다.
"참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소." 원래 어처구니란 말은 맷돌 손잡이를 뜻했다. 맷돌 손잡이가 없다고 상상해보면 어처구니없다라는 표현이 왜 기막힌 표현인지 알 수 있었다. 문이 열리자 법정과 작가는 관리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표지판이 가리키는 대로 먼저 부용지로 갔다. 법정이 차분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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