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4주간 토요일 (사순 28일) 성모수태고지(3월 25일) (축일 강론 전문)
복음: 루가 1:26-38
“주님,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길 빕니다. 아멘."
3월 25일 오늘은 천사 가브리엘이 갈릴래아 나자렛의 시골 처녀 마리아에게 찾아갔습니다. 천하는 마리아를 안심시키듯이 축복의 말을 건넸습니다.
‘은총을 받은 마리아,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하신다.’
그러나 마리아는 뭔가 불안한 마음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자기처럼 천하고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 그것도 여자에게 하느님의 천사가 나타날 일이 없는데 도대체 무슨 일일까? 혹시 불길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느님의 천사를 만나면 죽는다는데 이게 무슨 일일까?
지금 우리가 상상하는 천사, 특히 가브리엘의 모습은 날개를 단 우아하고 멋진 모습일는지 모릅니다. 이런 상상은 5세기 이후에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살던 시대에 천사는 하느님의 심판을 전하는 무서운 저승사자와 같은 인상이 짙었습니다.
기억하시지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쫓겨나고 그 동산을 칼을 든 천사가 지켰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아마도, 그 천사의 모습은 불교사찰에서 볼 수 있는 우락부락한 사천 왕들과 비슷했겠지요. 그런 저승사자가 나타났으니, 마리아는 두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천사는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 너에게서 새로운 일이 펼쳐진다. 하느님께서 네 안에 새로운 생명을 주셨다. 새로운 삶을 주셨다. 네 몸속에서 새 생명과 새 삶을 키워내거라.”
두려움에 떨었던 마리아는 이 당황스러운 말씀을 듣고, “예, 말씀대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하고 대답합니다.
“말씀대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 이 말이 그전에도 울려 퍼지는 때가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말씀’으로 세상이 창조되었습니다. 바로 그때의 말씀이 “지금 말씀대로 이루어지소서”로 마리아의 입을 통해서 다시 들려옵니다. 세상을 지으시고 인간을 만드셨던 창조의 사건이, 오늘 마리아에게 다시 일어납니다. 성모 마리아의 아기 잉태는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손수 빚어 만드셨다는 창조 사건과 하느님께서 세상에 몸소 들어와 사람이 되셨다는 성육신 사건은 이렇게 연결됩니다. 마리아의 대답은 바로 창조 사건이 다시 일어나고 있다는 점을 알려줍니다.
한편, 3월 25일은 예수님께서 수난당하시고 돌아가신 날입니다. 유대교 사상에서는 사람이 처음 생긴 날과 죽은 날이 같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를 뒤집으면, 사람이 죽는 날은 다시 태어난 날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성인들이 별세한 날짜를 기념하여 천국 생일로 여겨 축일로 정하는 관습도 여기서 나왔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3월 25일에 돌아가셨으니, 생명으로 잉태된 날도 3월 25일이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아홉 달 뒤인 12월 25일에 세상에 태어나셨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준으로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 날짜가 정해졌습니다.
이쯤에서 죽음을 준비하던 예수님께서 고뇌에 차서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내가 이 잔을 피하게 해달라고 청할까?” 하신 고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 주십시오.”
창조와 성육신 때의 말씀이 계속 이어져서 이제는 죽음과 부활을 앞둔 예수님의 입으로도 이어진 것입니다. 창조와 성육신은 이제 부활로 이어집니다.
“말씀대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이것은 창조와 성육신과 부활의 사건을 연결하고 관통하는 거룩한 말입니다.
“말씀대로 이루어지게 하소서”는 또한 우리 신앙의 자세와 실천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마리아는 낯설고 무섭게 보이는 천사의 말을 자기 몸에 품었습니다. 마리아는 ‘말씀’을 품었다는 말입니다. 빈말이 아니라, 몸에 품은 말, 몸에 새긴 말로 마리아는 새 생명과 새 삶을 만들어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요한복음의 선언은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면 더 이해하기 쉽습니다.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자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씀을 품고 새긴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내 몸에 장착하고 산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말씀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삶이 나의 행동으로, 교회의 행동으로 드러나도록 산다는 말입니다. 마리아가 “말씀대로 이루어지게 하소서”하고 한 대답은 “그리스도를 내 몸에 품고 살아가도록 나를 내놓겠습니다”는 뜻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이 수태고지를 통한 예수님 잉태 사건과 부활 사건이 연결되는 말이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예수의 수태를 전하며 그렇게 입을 뗐습니다. 마리아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예수님을 뱃속에 품어 키웠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예수께서는 수난과 죽임을 당하신 후 부활하신 첫 아침에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 말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적인 사건인 성육신과 부활 속에서 계속 울려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두려움과 대결하여 그것을 초월하는 일에서 시작되고 완성되며, 다시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가브리엘을 통해서 마리아에게 전해졌고, 다시 마리아의 자궁에 품었던 예수님에게서 다시 제자에게로 그 말이 이어졌습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제자가 된 우리는 두려움 없이 하느님의 낯선 초대를 받아들이고, 우리의 몸속에 말씀인 예수님을 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품은 사람이 누구였던가요? 마리아 아닌가요? 그렇다면, 우리는 현재를 사는 마리아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이렇게 말하는 사람입니다. “두려워 하지 않겠습니다. 하느님 말씀대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이 고백과 인정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창조와 성육신, 그리고 부활이 다시 거듭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아기를 잉태했다는 수태고지 사건에는 이처럼 하느님께서 펼치시는 모든 일을 낯설고 두려운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 이를 마음 깊이, 몸 깊이 새겨 키워내는 일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이 창조와 성육신, 부활의 본질입니다.
이 일을 받아들여서 실천하는 일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아직 세상은 어둡고 어디로 갈지 모르고 불확실하며, 우리 자신의 꿈과 미래도 어디로 갈지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때 찾아드는 두려움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수태고지 사건의 마리아를 기억합니다.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그 말씀을 제 안에서 키워나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