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文亨淳(보훈처 관리번호 70229호)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오등동 산 11-1번지 평안도민공동묘지 북쪽 울타리 안
시대 ; 대한민국
유형 ; 묘
문형순(독립운동 당시 異名 文時映) 경찰서장은 1897년 1월 4일 평안남도 안주에서 출생하고, 일제 때 만주 등지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했다. 그는 1930년대 만주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인 국민부(만주 한인사회 준 자치정부)의 중앙호위대장으로 활동했으며, 동시에 조선혁명군 집행위원이었다. 만주 일대에 흩어져 활동하던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 등 3개 독립운동단체가 합쳐 만들어진 국민부는 교육활동으로 인재를 양성하고 일제 앞잡이 제거, 군자금 모집, 독립군 모병을 위한 군사활동 등을 벌였다.
해방 후 단신 월남했는데 자세한 과정은 알려지지 않았다. 동향이며 경찰 동지였던 전정택(평안도민회장 역임)씨는 해방직후 미군정은 상해임시정부나 광복군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 서장도 아마 북을 거치지 않고 서울로 바로 내려왔을 거라고 추정했다. 당시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도 그런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가 아는 이들의 도움으로 서울에서 경찰에 받을 디딘 후 제주에 내려온 것으로 추정했다.(제주의소리) 한편, 연합뉴스(150812)에서는 고향인 평안북도로 귀향했으나 공산주의에 염증을 느껴 월남했다고 했다.
이러한 내용은 독립운동사, 만주벌의 이름 없는 전사들,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 한국독립사, 만주한인민족운동사연구, 제주항일인사실기 등 여러 책에 간략히 소개돼 있다.
1947년 5월 8일 제주경찰감찰청 경위로 경찰에 투신했다. 1948년 4·3이 발발하자 군과 경찰 그리고 서청(서북청년단)은 '빨갱이' 의혹을 받아온 '산(山)사람'들과 연루된 주민들을 대대적으로 색출하고 학살해 나가기 시작한다. 군과 경찰은 "자수하면 살려준다"며 주민들의 자수를 강요했으나 그 결과는 죽음이었다. 11월 17일에는 대통령령 31호로 제주도에 한정된 계엄령이 선포되어, 이후 군경의 토벌은 점점 무차별 학살로 변해갔다. 특히 국군 제9연대와 2연대의 교체시기 였던 1948년 12월과 1949년 1월, 2월의 잔인한 토벌에 따른 도민들의 희생은 엄청나던 시절이었다.
이 광풍은 모슬포에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군과 경찰의 탄압을 피해 산으로 올라간 '산사람'들이 부모요 형제요, 이웃인 탓에 그들에게 쌀 한 줌, 옷 한 벌 안 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1948년 12월 10일 남제주군 대정읍 하모리 좌익총책을 검거하고 4.3에 관련된 백여 명의 좌익명단 서류를 압수하였다. 다음은 고춘언(80·대정읍 하모리)씨의 증언이다.
“모슬포가 온통 난리가 났습니다. 집 식구 중에 산에 올라간 사람, 산사람에게 식량이나 옷을 갖다 준 사람들은 자수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자수를 하지 않았습니다. 자수하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어느 누가 앞장서 자수하겠습니까. 그러나 군과 경찰은 '명단'이 있다며 주민들을 협박했습니다. 자수할 수도,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죽음만을 기다릴 수도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상황으로 보아 이들은 전원 처형될 위기에 놓였으나 남제주군 대정읍 하모리 민보단장 김남원 이장과 모슬포교회 조남수 목사가 앞장서서 당시 문형순 지서장에게 사정하였다. “주민들은 아무 잘못도 없다. 이들은 빨갱이가 아니다. 자수시킬 테니 살려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문 서장은 두 분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문 지서장은 이들에게 자수할 것을 권하였고, 김남원 이장과 조남수 목사는 이들을 설득하여 전원 자수토록하고 선처를 바랐다. 문형순 지서장은 자수자들에게 차후 산사람들과 일체 접촉을 금하고 경찰에 협조할 것을 지시하면서 이들 전원을 훈방하여 백여 명의 귀중한 생명을 구해 주었다. 다음은 고춘언씨의 증언이다.
“조 목사는 김 단장과 함께 마을 주민들을 공회당에 모이게 한 후 '마을 사람들이 다 죽게 됐다. 자수해야 산다. 이제 내 말을 안 들으면 하늘이 진동하고 땅이 요동을 치며 핏물이 흐르게 됐다. 명단이 (경찰에) 다 들어갔다'며 주민들을 설득했습니다. 결국 100여 명의 주민이 조 목사와 민보단장의 말을 믿고 경찰서로 줄을 져 자수하러 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저 역시 산사람들에게 쌀을 날라준 경험이 있었고 주민들과 함께 '왓샤(시위 때 외치는 구호)'도 했었기 때문에 죽을 걸로 알고 경찰서로 간 것이죠.”
1백여 명이 경찰서로 가자 그들을 맞이한 사람은 바로 서청 대원들이었다. 총과 죽창으로 마구잡이로 주민들을 죽였던 서청의 극악무도한 행동을 잘 알고 있던 마을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다시 고춘언씨의 증언이다.
“사찰주임이 우리를 보자마자 '전부 다 빨갱이들이다. 다 쏴 죽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서청이 우리들의 조서를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영락없이 죽게 되는구나 생각했죠. 그 때 문 서장이 나타나 서청들에게 호통 쳤습니다. '너희들 지금 뭐하는 거냐. 다 나가라. 자수하러 온 사람들이다. 전부 나가라'며 그들을 내쫓았습니다. 그리고는 조 목사와 문 단장에게 '이들을 민보단으로 데리고 가서 자수서를 써 오도록 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문 서장은 조 목사와 김 단장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마을주민들의 조서를 마을서기에게 쓰도록 했다. 경찰이나 서청대원이 조서를 받는다면 영락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뻔히 알고 있던 그는 재치를 발휘해 마을서기가 자수서를 받도록 한 것이다. 주민들끼리 말을 맞추고 의논해서 아무런 탈이 없도록 쓰도록 한 것이다.
“마을 주민들끼리 공회당에서 모여 의논했습니다. 무엇 무엇은 쓰고 또 무엇 무엇은 쓰지 말자고 했죠. 또 입도 맞췄습니다. 조금이라도 흠이 될 만한 내용들은 전부다 뺐죠. 그렇지 않고는 전부 다 죽게 됐기 때문에 쉽게 입을 맞출 수 있었습니다.”
이 당시 산사람들의 위협 때문에 모슬포경찰서로 피신해 경찰과 함께 생활했던 마을 주민 이병연(89·대정읍 하모리)씨의 이야기다.
“마을주민들이 자수서를 들고 경찰서에 찾아오자 서청단원들이 다시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문 서장이 다시 말했죠. '자수한 주민들이다. 강요하지 말라. 때리지도 말라'고 엄명을 내렸습니다. 그 때문에 아무 탈 없이 주민들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며칠 후 주민들은 다시 계엄사령부로 불려갔으나 민보단 자수서와 경찰의 조서를 본 군인들은 '시시하다. 아무런 내용도 없다'며 전부 주민들을 돌려보냈고, 100여 명의 주민들은 무사히 귀가할 수 있었다. 이것이 소위 '자수사건'이었다. 계엄하에 군의 지휘를 받는 입장에서 일개 경위 지서장이 위와 같은 과감한 결단을 내린 것은 자신의 목숨을 건 것과 다름없는 용단이었다.
문 서장은 또 이 당시 경찰이나 서청단원들이 마을주민들을 함부로 잡아들이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경찰이 '누구누구는 산사람과 내통했다. 또 누구네 자식은 산으로 올라갔다'고 이야기 하면 문 서장은 '왜 말을 함부로 하느냐. 그 말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느냐? 조사해서 사실이 아니면 너를 처벌하겠다'며 오히려 경찰에게 호통을 쳤습니다. 그 때문에 모슬포 주민들은 밀고에 의해 죽은 사람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이병언씨의 증언이다.(제주의소리 2005년 3월 30일)
1948년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사령관 송요찬 중령)가 새로 설치되어 본격적인 초토화 작전이 시작된다. 1948년 12월과 1949년 1월, 2월의 잔인한 토벌이 벌어지던 시절 문형순 경위 지서장은 1949년 1월 18일 모슬포지서가 (제3구)경찰서로 승격하면서 서장서리(초대 서장)로 임명받아 근무하다가 1949년 10월 19일 경감으로 승진하면서 성산포경찰서장으로 전출하였다. 문형순 서장은 당시 국가 시책이었던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교화와 관할 지역 경비에 여념이 없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6·25 당일 오후 3시경, 내무부 치안국장은 각도 경찰국장에게 전통 「전국 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 형무소경계의 건」을 발하고 ‘국민보도연맹 가입자’ 및 ‘요시찰인’들을 예비검속하도록 지시했다. 제주도경찰국은 내무부 치안국의 통첩을 받아 관할 경찰서에 요시찰인 및 불순분자를 일제히 구금할 것을 지시하게 된다. 이른바 예비검속 집단학살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제주도에서는 약 1천 명으로 추산되는 예비검속자들이 해병대 사령부에서 총살 후 암매장되거나 수장되었다.
1950년 8월 20일 제주도에서 새벽 2시와 5시경 2차에 걸친 ‘예비검속자’ 총살집행은 당시 해병대 사령부 소속 모슬포 부대(제3대대)에 의해서 자행되었다. 모슬포 경찰서 관내에서 예비검속됐던 347명 중 253명이 육군본부 제주지구 CIC에 넘겨지고 그 중 252명이 해병대에 의해서 학살되었다. 이런 기록은 제주도 모슬포 경찰서(서장 강문식)의 극비문서 「전 제주지구 예비검속자 명부제출의 건」에 의해서 밝혀졌다.
당시 제주읍에서도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군 트럭 약 13대 분의 예비검속자들이 해병대 사령부 소속부대(제주읍 부대)에 의해서 총살 암매장되었다. 그러나 5·16 쿠데타 이후 이에 관련된 경찰기록 비밀문서들은 거의 모두 파기되어 버렸고, 수많은 유해들은 수습도 못한 채 제주국제공항 확장공사 후 활주로 밑에 깔려 증거인멸되었다. 현재까지 수습된 유해의 숫자는 약 2백10구뿐이다.
이런 학살을 진두지휘한 지휘관들은 육군본부 정보국 제주지구 CIC(대장 조석만, 계급 미상), 해병대 사령부 정보참모 김두찬, 내무부 치안국 정보과 선우종원 등이다. 신현준 당시 사령관도 현재 생존해 있긴 하지만, “군에서 그런 일을 저질렀다면 참말로 유감이다”라고만 할 뿐이다. 김두찬은 자기 명의로 시달된 공문을 보고도 “전연 몰랐다”고 회신했다.(http://cafe.daum.net/allinstamps/우표올인방『죽음의 예비검속』저자 이도영 글)
제주도내 4개의 경찰서는 구금한 예비검속자들의 과거 경력을 조사하고 명부를 작성하였다. 이러한 실무는 각 경찰서 사찰계가 담당하였다. 이들은 예비검속자들을 개인별로 심사하여 종별(種別)로 사정(査定)하고, 전체 D·C·B·A의 4등급으로 분류하였다. 이 가운데 B·A급은 석방 또는 계속 구금되었고, 나머지 D·C급은 1950년 8월 20일경 두 차례에 걸쳐 계엄 당국인 해병대에 송치되었다. 당시 이들 D·C급으로 분류돼 송치된 예비검속자 가운데 일부는 석방되었지만, 대부분 총살되었기 때문에 경찰의 등급 분류는 예비검속자 집단총살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한라일보 2008년 6월 10일)
선량한 마을 주민들의 생명을 살려내기 위한 문 서장의 행동은 여기에서도 그치지 않았다. 1950년 8월 20일 계엄군측으로부터 예비검속자 총살 집행 지시 공문을 접수하였다. 국가기록원에 보관되어 있는 공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해정참 제16호
단기4283년 8월 30일
해병대 정보참모 해군중령 김두찬(직인)
성산포경찰서장 귀하
예비구속자 총살집행 의뢰의 건
수제건에 관하야 본도에 계엄령 실시 이후 현재까지 귀서에 예비구속중인 D급 및 C급에서 총살미집행자에 대하여는 귀서에서 총살집행 후 그 결과를 9월 6일까지 육군본부 정보국 제주지구 CIC 대장에게 보고하도록 자이 의뢰함.
제4경찰서(성산포경찰서) 문형순 서장이 예비검속되어 있던 민간인에 대한 처형을 계속 지연하자 군이 총살을 지시하게 된 것이다.
이 문서는 지난 1999년 1월 제주도 대정면 출신의 4·3 연구가 이도영 박사(현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 방문 연구교수)가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내외신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전쟁 발발 직후 군·경에 의해 자행된 소위 '예비검속 학살'을 입증해 주는 경찰자료로서 공개한 것이다.
4·3이라는 엄청난 희생을 치른 후라 마을마다 다시 잡아들일 사람도 없는 상황에서 군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적에게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자’를 검거할 것을 지시했고, 예비검속에 붙잡힌 사람들은 대부분 집단 총살을 당했다. 예비검속으로 읍면마다 수백 명씩 전 도 차원에서 수천 명이 다시 희생됐다. 모슬포〈백조일손〉사건은 대표적인 예비검속 집단 학살사건이었다. 그런데 이도영 박사가 공개한 경찰자료를 보면 계엄사령관의 예비검속자 총살집행 명령을 문 서장이 거부한 것이다.(제주의소리 2005년 3월 30일)
1950년 8월 30일 제주주둔 해병대 정보참모 해군중령 김두찬은 성산포경찰서장에게 〈예비검속자 총살집행 의뢰의 건〉공문을 보낸다. 김두찬은 이 문서에서 "귀서에 예비구속 중인 D급 및 C급에서 총살 미집행자에 대해서는 귀서에서 총살집행 후 그 결과를 9월 6일까지 육군본부 정보국 제주지구CIC 대장에게 보고하도록 이에 의뢰함"이라며 총살집행을 명령했다.(오마이뉴스)
그러나 문형순 서장은 공문의 ‘성산포경찰서장 귀하’ 옆에 “不當하므로 不履行”이라 직접 쓰고 날인해서 끝까지 거부했다. 이 또한 당시 계엄이라는 엄혹한 상황하에서 대단한 결단이었다. 문 서장은 이후 이 경찰서를 마지막으로 제주를 떠났다.(김기진, 끝나지 않은 전쟁 국민보도연맹 331쪽)
1950년 8~9월 경 제주도 전역에서 수천 명이 죽어간 예비검속에서 성산면 지역의 예비검속자들만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부당한 명령을 거부할 수 있었던 문 서장의 '용기' 때문이었다.
당시 성산포경찰서 관할지역에서 예비검속으로 희생당한 사람은 모두 6명이었다. 그러나 이는 문 서장이 불가피하게 내놓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었으며, 읍면별로 수백 명씩 죽음을 당했던 다른 지역의 상황과 비교해 볼 때 성산면 지역은 거의 온전할 수 있었다.(오마이뉴스)
4·3사업소는 이러한 증언과 채록 등을 토대로 제주4·3 평화기념관 2층 특별전시관에 '의로운 사람' 코너를 만들어 〈의인(義人) 문 서장〉의 행적을 전시하고 있다.
그가 모슬포경찰서장을 맡았을 당시 서귀포경찰서장이었던 김호겸(서울시 은평구)씨는 문 서장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문 서장이 제주도민들을 억울한 죽음에서 살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독립군의 정신이 깃들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문형순은 배운 게 없어 경찰 법규조차 몰랐다. 그 때 그의 별명이 '문 도깨비'였다. 그 까닭은 그가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은 일자무식 때문이라기보다는 당시 경찰 중에서는 군대에 맞설 수 있는 드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문형순씨는 나보다 20살은 위로 당시 이미 50대의 중년이었다. 그는 기운이 장사였고 배짱 있고 남자다운 멋진 사람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물론 제주지구 토벌대사령관이던 송요찬·함병선 연대장 그리고 나 역시 일제 때 모두 일본군이나 그 앞잡이인 만주군에 있었지만 그 때 문형순씨는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이었다. 그런 경력 때문에 군대에서도 문 서장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제민일보 1999년 1월 20일)
필자가 보기에 문도깨비 별명은 무식하다고 붙여진 것은 아닐 것이다. 신흥무관학교 출신이고, 정식 학교를 다닌 적이 없다 해도 옛날 어른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마을에서 서당은 다녔을 것이고, 1947. 7. 18. 경찰관 교습소 교두를 겸임한 경력으로 보아도 그렇다. "不當함으로 不履行"이라는 필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충분한 학식을 지녔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의 행동이 일본군 출신들과 전혀 다른 면이 있었기 때문에 상관들이 볼 때 통제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붙인 것이 아닌가 짐작해 본다.
1948년 4월 3일. 4·3사건 발발 직후부터 종료직전까지 제주에 상주하면서 4·3사건 진압의 책임을 맡았던 지휘관 중 김익렬 9연대장을 제외하고는 최경록 11연대장, 송요찬 11연대장, 함병선 2연대장 모두 독립군을 탄압했던 일본군 지원병 출신이었다.
일본군 출신인 이들이 제주에서 선량한 양민들을 상대로 '초토화 작전'을 펼치며 수많은 양민을 학살할 당시 독립군 출신인 문형순 서장은 제주도민들의 억울한 희생을 조금이라도 막기 위해 모슬포 주민들을 보호했고, 성산포경찰서장 당시에는 계엄사령부의 예비검속자 총살명령까지 거부한 것이다.
성산서장 다음에는 경무과 감찰계장, 경찰국 경무과 서무계장 겸 공보실장을 거친 후 1951년 3월에 경상남도로 전출했다가 1952년 4월 다시 제주도로 전입해서 경찰국 보안과 방호계장을 끝으로 1953년 9월 퇴임했다. 그
러나 독립군 출신의 말로가 대부분 그렇듯이 문 서장 역시 비참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경찰을 퇴임하면서 경제적으로 매우 힘들게 살아왔다고 전해진다. 퇴직 후 제주시에서 자그마한 가게를 운영하던 그는 장사가 안 돼 가게를 넘기고 쌀배급소 직원도 했고, 제주의 첫 영화극장이었던 대한극장(현대극장의 전신)에서 매표원으로 일하다가 누구의 보살핌도 없는 상태에서 쓸쓸히 삶을 마감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오마이뉴스, 제주의소리, 한라일보 2008년 6월 10일)
전정택씨의 증언에 따르면 문 서장은 당시 경찰은 물론, 군에서도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했었다. 그 당시 경찰이나 군 간부라는 게 대부분 일제치하에서 일경을 하거나 군에 있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독립군 출신인 문 서장에게는 아무도 함부로 대하지를 못했다. 독립군 출신이 아니었다면 감히 계엄치하 군의 명령을 거부할 수가 없었던 상황이었다.(제주의소리)
문형순 서장은 1953년 9월 15일 경찰을 퇴직하고, 1966년 6월 20일 제주에서 사망하였으나 가족도 하나 없고 가진 것도 빈 손뿐이었으며 아라동 평안도민묘역에 쓸쓸히 묻혀있다.
전 평안도민회장이며 역시 경찰에 근무했던 전정택(79·全晶澤)씨는 “문 서장은 경찰을 그만 둔 후 무근성에서 경찰에게 쌀을 나눠주던 쌀 배급소에서 일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경찰에게 월급을 제대로 주지 못하던 때라 쌀로 봉급을 대신 주기도 했지요. 집은 산지천에서 칠성통으로 들어가는 입구 부근에서 남의 집 단칸방에 살았던 것으로 기억해요. 경찰서장(경감)을 지냈다고는 하지만 지금처럼 퇴직금도 없었고 그 분은 돈을 전혀 모르고 살았기 때문에 상당히 힘들었죠. 그런데 내가 제주를 떠나 육지에서 생활하다 돌아와 보니 그 분이 돌아가셨다는 거예요.”라고 증언했다.
그러나 《제주의소리》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문 서장은 1950년말 성산포경찰서장에서 물러난 후 당시 김호겸 서귀포경찰서장의 권유로 함께 경남경찰국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고 이곳에서 함안경찰서장을 1년 동안 지냈다고 한다. 그리고 함안경찰서장을 그만 둔 후 다시 제주에 내려와 경찰 근무를 하다가 퇴임해서 쌀배급소에서 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경찰에서 “독립운동을 했고 경찰서장이 돌아가셨다”는 내용을 중앙에 보고했더니 박정희 대통령이 하사금을 보내줘 평안도민회가 금일봉을 보태 당시 건입동 공동묘지였던 황세왓에 묻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문 서장의 묘비가 누군가 해머로 내리쳐 두 동강났다. 두 번 내리친 자국이 선명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평안도민회에서는 누군가 문 서장의 묘비를 고의적으로 깨뜨렸다고 생각해서 1976년 4월 5일 평안도민회 공동묘지였던 지금의 제주대학 자리로 옮겼다가 다시 대학이 들어서면서 공동묘지를 옮기게 돼 지금의 자리로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제주의소리 2005년 8월 16일)
그의 묘비에는 '故 南平文公亨淳之墓'라고 뚜렷이 적혀 있다. 또 좌측에는 '西紀 1897년 1월4일 平南 安州 出生. 1966년 6월20일 死. 一平生 抗日 獨立鬪士 大韓民國 樹立 後 摹瑟浦 城山浦 警察署長 歷任' 이라고 새겨져 있다.
- 문형순 서장 경찰 경력
. 1947. 05. 08. 제주경찰감찰청 경위, 기동대장
. 1947. 07. 18. 경찰관 교습소 교두 겸임
. 1947. 10. 03. 제1구경찰서 한림지서장
. 1947. 12. 04. 제1구경찰서 세화지서장
. 1948. 05. 11. 조천지서장
. 1948. 05. 18. 제주감찰청 공안과
. 1948. 09. 24. 한림지서장
. 1948. **. **. 모슬포지서장(조재수 지서장 후임, 48. 12. 10. 이전 발령)
. 1949. 01. 18. 제3구(모슬포)경찰서장 서리
. 1949. 10. 19. 경감 승진 성산포경찰서장
. 1950. 12. 02. 경무과 감찰계장
. 1951. 01. 14. 경찰국 경무과 서무계장 겸 공보실장
. 1951. 03. 31. 경상남도 전출
. 1952. 04. 05. 제주도 전입
. 1952. 04. 06. 경찰국 보안과 방호계장
. 1953. 09. 15. 공무원법 제44조 제3항의 규정에 의거 본직을 면함
2005년에는 모슬포 지역에서 '자수사건'에서 살아난 사람 중에 고춘언씨(문형순 공덕비 건립 추진위원회 위원장)가 중심이 되어 공덕비를 세웠다. 그렇지만 그 때 살아난 사람 중에도 다수는 과거에 대해 자식과 일반인에 비밀에 부친다며 오히려 역정내며 동참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고춘언씨의 자제분 증언) 그리고 일부 주민('문형순 공덕비' 철거 비상대책위원회 제주 4.3 유족회 대정지회) 들은 문서장이 4.3시기 대정지역 학살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해서 공덕비 건립에 반대했고 철거를 주장(2005년 8월 1일 건립추진위원회 측에 공개질의)했는데 사실 관계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겠다.
이들이 주장하는 영락리 '양은하 고문치사사건'은 4.3이 일어나기 전인 1948년 3월 14일에 일어난 사건이고 문서장은 세화지서에 근무할 때이다.
제주의 소리(2005년 8월 14일 이재홍 기자)에 의하면
'동일2리 새미 피살'사건은 이경방(하모리), 양군일(신평리), 김우필(영락리) 등 대정지역 공무원과 유지들이 1948년 10월말경 모슬포 군부대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1948년 11월 6일 동일2리 천미동(泉味洞·새미)으로 끌려가 총살당한 사건으로 이 역시 문서장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게 객관적인 견해이다(제민일보 '4.3은 말한다' 제4권 110~112쪽). 학살 주체가 군인인데다 학살 시기도 문형순 모슬포경찰서장이 부임하기 전이기 때문이다.
'일과2리 서림 피살'은 당시 모슬포 주둔군의 중요한 급수원을 둘러싸고 발생한 사건으로, 1948년 7월 2일 수원지를 지키던 경비대원이 탈영을 하고, 10월경엔 도로파괴 등의 사건이 벌어지자 이에 화가난 토벌대(군)가 1948년 10월 26일, 11월 4일, 12월 9일에 주민들을 총살한 사건을 말한다. 또 12월 9일에는 일과2리 이장 문병옥이 총살되기도 했다. (4.3은 말한다 제4권 109~112쪽)
'상모리 이교동 48인 피살 및 대살'은 1948년 12월 13일 상모리 이교동 향사 앞에서 주민 48명이 총살당한 사건으로 학살 주체는 경찰이 아니라 군인들이었다. 이 때는 1948년 11월 17일 선포된 계엄령을 바탕으로 군대가 주도권을 쥐고 초토화작전을 벌이고 있던 시절로 경찰이 개입할 상황이 아님은 물론 이 역시 모슬포 경찰서가 만들어지기 이전이었다. (4.3은 말한다 제5권 318~328쪽)
제주의소리에 따르면 '특공대 피살사건'은 주민들이 무장대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해 특공대(대장 이원하)를 조직하고 무장을 하기 위해 군에 무기를 달라고 요청하자 군이 1949년 1월 10일 특공대원 10여명을 모슬봉 기슭으로 끌고 가 총살한 사건으로 이 역시 학살 주체가 군대인 사건이다. 이 사건과 관련해서는 모슬포 출신으로 4.3연구가인 이도영 박사(University of California, Riverside 방문 연구교수)도 "대정고 옆 탄약고에서의 '모슬포 특공대 학살 사건'은 육군 허욱 대위가 이끄는 부대에서 자행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경찰청은 매년 경찰 정신에 귀감이 되는 전사·순직 경찰관 1~2명을 선정해 추모 흉상을 건립하고 있는데 2018년 8월 23일에는 위원회를 열어 문 전 서장을 '올해의 경찰 영웅'으로 선정하고 추모 흉상을 제작하기로 했으며,(한라일보 180827) 2018년 11월 1일 제주지방경찰청 청사 본관 앞에 문형순 서장의 흉상이 세워졌다.
2020년 12월에는 경찰 주도로 묘에 새로운 비석을 건립했다.
《작성 100908, 보완 160812, 2603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