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16일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하느님께서 택하신 백성이 밤낮 부르짖는데도
올바르게 판결해 주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그대로 내버려 두실 것 같으냐?
사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루가 18,1-8)
Will not God then secure the rights of his chosen ones who call out to him day and night? Will he be slow to answer them? I tell you, he will see to it
that justice is done for them speedily.
말씀의 초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에 하느님께서 지혜의 말씀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셨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이들을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얼마나 우리에게 관대하게 판결을 내리실지를 알려 주신다. 그러나 우리도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사랑에 맞갖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개신교 복음 성가의 좋은 노랫말을 짓는 사람들 가운데 송명희 시인이 있습니다. 그녀는 뇌성 마비의 장애인으로 태어나 가난한 가정 형편으로 말미암아 제대로 치료받지 못했고, 학교의 정규 교육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한 그녀는 자신이 너무나 불행하다고 느껴 사춘기에는 자살까지도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신앙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체험하게 되며, 이를 바탕으로 삶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녀는 이러한 자신의 신앙을 시와 노랫말로 표현하였고, 이것이 많은 이에게 큰 감동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녀가 지은 ‘나’라는 노랫말입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에게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느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나 남이 없는 것을 갖게 하셨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드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공평하신 분이시며, 우리를 그렇게 대해 주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이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요?
얼마 전 텔레비전의 어떤 프로를 보다가 상추가 미백효과에 좋다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방송에 등장한 한 자매님은 상추가 미백효과에 좋기 때문에 이를 이용해서 양치질을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상추를 어떻게 이용하느냐는 것이었지요. 그 방법은 생각보다 아주 쉬웠는데요. 상추를 전자레인지에 넣고 3분만 돌리면 바삭바삭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삭바삭해진 상추를 잘게 부순 뒤에, 이 상추 가루를 칫솔에 묻혀서 양치하면 된다고 합니다. 어렵지 않은 방법이지요?
마침 제 냉장고에는 며칠 전 야식 때 시켜 먹고 남은 상추가 있었습니다. 저는 얼른 그 상추를 냉장고에서 꺼내서 전자레인지에 돌렸습니다. 물기가 많이 묻어 있었기 때문에, 3분이 부족할 것 같아 4분 예약에 맞춰서 돌렸지요. 그리고 다른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무엇인가가 터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깜짝 놀라서 전자레인지를 보니 상추에 불이 붙은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너무 긴 시간 동안 돌려서 바싹 마른 상추에 불이 붙은 것이었지요. 다행히 얼른 불을 꺼서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았지만, 만약 먼 곳에 제가 가 있었다면 큰일 날 뻔했었습니다.
물기가 많았기 때문에 4분 정도는 해야 된다고 생각했지만, 방송에 나왔듯이 사실은 3분이 맞았던 것이지요. 더군다나 쉽게 탈 수도 있기 때문에 근처에서 지켜봐야만 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생각과 판단을 내세워 위험한 상황을 연출했던 것이지요.
우리의 생각과 판단, 사실 부족함 투성입니다. 심지어는 경험하지 않았으며 또 잘 알지 못하는 것조차 내 생각과 판단을 내세우면서 잘못된 길로 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우리들은 혼자서 살 수 없습니다. 우리와 늘 함께 하시려는 주님 곁에 있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고 하시지요. 그런 의미로 불의한 재판관에게 끝까지 매달리는 과부의 비유 말씀을 해주십니다. 비록 불의한 재판관이지만 끝까지 매달려서 부탁하는 과부의 청에 귀찮아서라도 들어줄 수밖에 없다고 하시지요. 이렇게 불의한 재판관도 이런데,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께서는 어떠하시겠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기도 전에 이미 필요한 것을 모두 알고 계신 주님이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내 생각과 판단만을 내세워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당신이 선택한 이들의 간절한 부르짖음을 절대로 외면하시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간직하고 끝까지 매달려야 합니다. 나의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생각과 판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은 주님께 대한 믿음이 제일 중요합니다.
성공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며, 행복은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데이브 가드너).
믿음과 희망의 기도
-안승태신부-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고 의지하는 하느님께 우리의 현실을 말씀드리고 필요한 은총을 청하는 사람들이 신앙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앙인에게 있어서 믿음의 정도는 다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비유 말씀에 등장하는 과부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청하는 이들의 기도’가 받아들여짐을 보여 준 인물입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불의한 재판관처럼 우리의 기도가 귀찮거나 괴로워서 들어주시는 분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우리의 필요를 먼저 아시고 섭리하시는 사랑의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온전한 믿음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온전한 믿음은 실망을 전제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믿는 대상에게 기대를 거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두기 때문입니다. 기대는 상대방의 뜻에 자유를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희망은 상대방에 대한 온전한 신뢰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청하면서도 기다리는 자유로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믿음을 지니고 기도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청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보다 훨씬 더 풍성히 이루어 주실 수 있는 분”(에페 3,20)이신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위대한 비약
-이대훈-
절망은 희망을 꺾는다는 부정적인 뜻을 갖고 있지만, 오히려 그런 꺾임을 경험하지 않은 희망은 비누거품 같을 수 있다. 배고픔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배고프면 케이크를 먹으면 된다고 쉽게 말하며 웃을 수 있는데 그런 낙관은 사람들을 낙담하게 만든다. 절망의 바다를 거치지 않은 희망은 희망이라고 할 수 없다. 이 위대한 비약에는 사건이 필요하다. 카이로스적 사건인데 오랜 문명의 지혜가 말하고 있듯 그 사건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 일이 필요하다. 곧 카이로스의 때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 사건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다. 현재 지구촌은 인류 역사상 가장 극단적인 빈부격차와 부의 독점 상태에 처해 있다. 지금까지 경제부국의 소수가 이렇게 많은 자산과 자원과 지식과 권력을 독점한 예가 없었다. 20대 80은 이미 옛날 얘기이고 지금은 그 격차가 더 심해지고 있다. 상위 1퍼센트의 인구가 생각을 조금만 바꿔도 지구촌 기아와 빈곤과 저소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어떤 법체계도 어떤 정의감도 이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지 못하고 있다. 풍요로운 사람들은 밤낮으로 부르짖고 있는 다수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그 모습을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 위에서 수많은 희망의 메시지가 비눗방울처럼 터진다. 현재의 카이로스는 그 절망의 바다에 빠져들고 있다.
진정 지성이면 감천인가?
-김찬선신부-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정성을 다하면 하늘도 감동하여 인간의 청을 들어준다는 거지요. 그런데 이 말을 잘못 이해하면 들어줄 마음이 없는데도 인간이 하는 것이 지극정성이면 들어준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도 비슷한 맥락이 있습니다.
비유에서 재판관은 과부의 청을 들어줄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과부가 하도 끈질기게 요청을 하니 그 재판관은 귀찮아서라도 들어준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과부처럼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여기서 문제는 하느님은 인간의 요청을 들어줄 마음이 없는 분, 그러므로 사랑이 없는 분이라는 점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무엇을 해주시고 안 해주시는 그 주도권이 하느님에게 있지 않고 인간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라면 이 비유의 가르침은 큰 문제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아무리 졸라도, 그것이 사랑의 이유에서건 정의의 이유에서건, 들어주지 않으실 거라면 들어주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비유를 그렇게 이해하지 않고, 하느님은 당신 사랑의 주도권에 따라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무엇을 해주시기도 하고 안 해주신다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비유의 가르침은 어떻게 이해해야겠습니까?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그 사랑만큼 우리의 믿음과 갈망이 강해야 한다는 뜻이지요.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과 갈망이 작을 때 청하지 않거나, 청하더라도 하느님께서 빨리 들어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그 사랑을 의심하며, 쉽게 낙심하고, 그래서 더 이상 청하는 것을 포기하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끈질기게 기도하는 것은 철석같이 믿는다는 표시이고 지성을 다한다는 것은 하느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예의요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사랑에 대한 우리 사랑의 표시이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느님 사랑을 끝까지 믿는다는 표시이며, 우리가 어떤 짓을 해도 포기치 않으시는 하느님 사랑에 대한 우리의 끊임없는 신뢰의 표시이고, 한시도 우리에게 눈길을 거두지 않으시는 하느님 사랑에 대한 우리의 항구한 갈망의 표시입니다.
거저 주신 은총의 선물
- 김수만 신부-
우리는 종종 하느님께 이런 의문을 품기도 합니다. ‘오늘도 지구의 수많은 사람이 기도하고 있을 텐데, 과연 하느님께서는 내 기도 소리를 들으시기는 할까?’ 하고 말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하느님께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목소리를 분명히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진실하지 않고 믿음 없이 하는 기도에는 열매도 열지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결코 낙심하는 일 없이,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끈질기게 청하는 과부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끊임없이 기도한다면 하느님은 반드시 거기에 응답해 주신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를 되돌아보게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과연 우리 믿음 상태를 점검해보면 어떨까요? 매우 양호일까요? 아니면 양호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매우 불량일까요?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기도라는 끈으로 대화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쪽에서는 계속해서 말을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침묵을 지키고 계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무척 조바심을 내거나 낙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인내와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은총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하느님과의 대화인 기도의 끈을 놓지 않을 때, 하느님은 믿음의 은총을 선물로 주십니다. 제1독서에도 당신 손길의 보호를 받는 이들은 그 놀라운 기적을 보고 온 민족이 그곳을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을 구해 내신 당신을 찬양했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기도하고 싶습니다.
‘믿음의 원천이신 주님, 기도에 대한 대답이 너무 늦어지더라도 주님을 변함없이 믿고 따를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하느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믿고 지켜보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 믿음의 기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과부의 간청
- 안문기 신부-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말이 있습니다. 재판정에서조차 돈 없는 사람보다는 돈 많은 사람이 유리하다는 뜻이지요. 이런 현상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게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한 과부가 억울한 일을 당하여 여러 차례 재판관을 찾아갔지만 그 사건을 다룰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과부는 힘써줄 배경이나 돈이 없었기에 끈질기게 간청하는 수밖에 없었고, 불의한 재판관이지만 결국 그 과부의 간청을 들어주고 맙니다. 그 과부의 집념이 응답을 받은 셈입니다. 불의한 재판관도 과부의 간청을 들어주거늘 하물며 의로우신 하느님께서 자신이 선택한 이들의 간청을 물리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끈질기게 기도해야 할 이유를 설명해주신 것입니다. 기도를 시작하는 사람은 많지만 끝까지 계속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 말씀의 참 뜻은 과부의 의로움이나, 재판관의 불의가 아닙니다. 과부의 끈기 있는 행동입니다. 우리도 언제나 굳건한 믿음과 항구한 기도로 살아간다면 하느님께서 종말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落心.
-김찬선신부-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고 오늘 주님은 가르치십니다.
落心. 떨어질 落, 마음 心. 마음이 떨어진다는 것은 어떤 뜻인가? 마음을 놓는 것과는 다른 뜻인 것 같습니다. 마음을 놓는 것은 긴장을 푸는 뜻이 있기에 좋은 면도 있지만 낙심을 하는 것은 희망과 용기를 잃어버려 무엇을 할 의지가 전혀 없는 것이기에 100% 나쁜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때 우리는 낙심을 합니까? 우선 너무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닥칠 때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헤쳐 나갈 나의 힘이 부칠 때입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봐도 도와 줄 사람이 없을 때입니다. 한 마디로 인간적인 상황은 어디에도 희망이 없을 때입니다. 그러니 낙심한다는 것은 자신이든 남이든 인간을 바라볼 때입니다. 정말 인간만 보면 상심이 되고 낙심이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무런 희망도 없는 절망의 때가 진정한 희망의 때입니다. 밤이 깊어지면 새벽이 오고 밤이 깊으면 별이 빛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별이 빛나고 새벽이 오기 위해서는 밤이 깊어져야 합니다.
옛날 등화관제 훈련이 있을 때입니다. 싸이렌이 울리고 그래서 모든 불이 꺼져 서울이 캄캄해졌습니다. 방에 있어봤자 아무 것도 할 수 없기에 서울이 얼마나 캄캄한지 보려고 옥상에 올라갔습니다. 그때 참으로 신기한 것은 서울 하늘에도 별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불이 휘황찬란했을 때는 하늘의 별이 보이지도 않았고 하늘의 별을 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때 깨달은 것이 인간이 만들어 놓고 켜놓은 불들이 다 꺼져야 하느님의 빛을 볼 수 있겠구나 하는 점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빛을 볼 때라야 낙심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들볶다
-전삼용신부-
로마에서 공부하면 손님이 참 많이 찾아옵니다. 바쁘기는 하지만 연락을 하고 오는 손님을 그냥 보낼 수는 없습니다. 지금은 좀 한가한 편이지만 바쁠 때 손님이 많이 오면 힘들어지기도 합니다.
손님이 오면 거의 하루 종일 걸어야 하고 공부도 할 수 없기에 몸도 마음도 힘이 드는데 언제 한 번은 새끼발가락 옆에 난 티눈 때문에 걷기가 더 힘든 것이었습니다. 걷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티눈이 있어도 뺄 생각을 잘 하지 않았는데 꼭 많이 걸어야 하는 날 더 아파오는 것이었습니다.
다니면서 계속 빨리 티눈을 빼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집에 들어와서는 피곤해서 쓰러져 잤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학교에 가려고 하는데 티눈이 또 생각났습니다. 아침에 바쁜 와중에도 불구하고 티눈을 빼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학교 갈 때 또 괴롭힐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아침을 먹지 않는 한이 있어도 티눈부터 빼야겠다고 생각했고 앉아서 손톱깎이로 티눈을 뜯어냈습니다. 결국 아침은 먹지 못했지만 티눈을 떼내니 속이 시원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꾸준한 기도의 필요성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재판관은 하느님도 안 무서워하는 사람이었지만 과부가 자꾸 괴롭히니 귀찮아서라도 그의 청을 들어주어야겠다고 결심합니다. 재판관은 마치 발에 난 티눈처럼 과부의 청원이 귀찮고 싫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귀찮더라도 빨리 해결을 짓고 싶었을 것입니다. 저도 티눈때문에 재판관의 마음을 구체적으로 이해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마치시며 이렇게 결론을 지으십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창세기 32장엔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불리게 된 경위가 나옵니다.
야곱이 하란에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 올 때의 이야기입니다. 야곱은 야뽁강을 건너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느닷없이 어떤 사람이 나타납니다. 야곱은 밤새 그 사람과 씨름을 합니다. 야곱을 이기고 빨리 가려던 그 사람은 야곱이 끈질기게 축복을 청하자 야곱의 엉덩이를 쳐서 환도뼈를 부러뜨립니다. 날이 밝아오는데도 야곱이 쩔뚝거리며 끈질기게 축복을 청합니다. 그 사람은 결국 야곱에게 져 축복을 해 주시고 이름도 이스라엘로 바꾸어주시고 떠납니다. 야곱과 씨름을 했던 사람은 하느님이십니다.
과연 하느님께서 인간과 씨름을 해서 질 수 있을까요? 이는 축복을 얻어내기 위한 야곱의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었습니다. 뼈가 부러지는 아픔으로 이젠 포기해 버릴까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에 반해 우리는 기도를 드리다가도 안 될 듯싶으면 금방 포기해버립니다. 그러나 청원은 마치 티눈처럼 하느님을 괴롭혀 은총을 얻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금방 포기해버리는 것은 어쩌면 믿음이 약해서일지도 모릅니다. 나무에 달린 사과가 가만히 밑에서 기다린다고 떨어지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은총도 쟁취해 내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무엇을 사달라고 할 때 부모가 응답이 없으면 사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끝까지 조릅니다. 몇 대 맞고서 절대 안 된다는 것을 부모가 보여주기 전까지는 끝까지 달려듭니다. 우리도 하느님께 그런 믿음을 보여야합니다.
성당에 안 나오는 남편, 사업의 어려움, 공부 등 우리가 기도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성경에 열두 해씩이나 하혈 병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께서 원하지도 않았는데 그 분의 옷자락에 손을 댐으로써 병을 치유합니다. 하느님은 그런 믿음으로 들볶임을 당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미국에서 금광을 찾던 한 사람이 버려진 광산 하나를 싼 값에 샀습니다. 그 사람은 그 폐광을 더 파 들어가면 반드시 금맥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금맥을 발견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다시 그 폐광을 팔아버렸습니다. 새로 그 탄광을 산 사람이 곡괭이질을 해서 1미터 정도 더 파 들어가자 누런 금광이 발견되었습니다. 만약 처음 사람이 한 번만 더 휘둘렀다면 평생의 노고가 보상받았을 텐데 마지막에 포기했기 때문에 평생 고생해서 남 좋은 일만 시키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면 한 번만 더 하면 들어주려고 준비하고 계실 수 있음을 기억하며 절대 포기하지 말아야합니다.
물은 100도에 이르지 않으면 결코 끓지 않습니다. 단 1도 차이로 물이 끓지 않는 것처럼, 혹은 단 1점 차이로 시험에서 떨어집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도도 100도까지 완전히 도달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도 그 기도가 완전해질 때까지 기다립니다. 99도까지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지금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포기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지향으로 기도를 하던 마치 하느님 발의 티눈처럼 기어코 빼내지 않고는 못 배기실 정도의 집념으로 청원을 드려야겠습니다.
<주님, 에헴!>
-양승국신부-
아이들과 함께 기도하는 시간은 참으로 의미 있는 시간인 동시에 재미있는 순간입니다. 언젠가 한 아이의 간절한 청원기도를 듣고 다들 뒤집어졌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너무도 단순하고 순수한 아이였기에 기도 역시 너무나 솔직했습니다. 이런 저런 청원 기도들이 대충 끝난 후 마무리 기도인 주님의 기도가 언제 시작되나 기다리고 있는데, 그 아이가 큰 목소리로 자신의 간절한 바램을 솔직하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장가, 에헴, 제발 저 장가들게 좀 해주십시오."
아이들은 사감수사님의 심각해진 얼굴 때문에 대놓고 웃지는 못하고 속으로 웃느라고 다들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 와중에도 다들 "주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를 빼먹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아이는 기도시간이 끝난 후 사감수사님에게 불려가 장시간에 걸친 정신교육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요즘 저희와 살고 있는 아이 가운데 역시 대단히 단순하고 솔직한 한 아이가 있습니다. 때로 오바도 많이 하지만 천사 같은 마음을 지닌 아이입니다. 이 아이의 특기는 청원기도입니다.
이 아이는 전체 아이들이 하는 7-8개의 청원기도의 절반을 도맡아서 하는 게 보통입니다. 그리고 더욱 기특한 것은 아이가 바치는 청원기도의 내용입니다. 언제나 나가서 고생하고 있는 친구들, 병원에 입원해 있는 형, 아픈 동생들, 재판을 앞두고 초조해있는 아이들을 위해서 아주 간절히 기도하곤 합니다.
어디서 그런 정보를 입수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아이는 언제나 기도거리들을 잔뜩 가지고 있습니다. 그 아이의 간절한 기도 덕분인지 나간 아이들이 별탈 없이 귀가하곤 합니다. 그 아이의 "기도빨"은 상당한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해봤을 때, 모든 기도가 다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아이를 생각하면서 "나는 과연 무엇을 청하고 있는가?" 하고 반성해봤습니다.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부끄럽게도 너무나 이기적인 기도를 바쳐왔습니다. 내 한 몸 고통이 없기를, 내가 행하는 사목이 무난히 돌아가도록, 만사형통하기를, 건강 잃지 않기를, 나와 연관된 사람들의 일이 잘 풀리기를 등등. 정말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기도였습니다.
다시 한번 한 차원 높은 기도를 바쳐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 그 기도는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바치셨던 기도입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라고 간구하셨던 예수님의 기도를 바쳐야 하겠습니다. 보다 보편적이고 크며 이타적인 기도 말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고통을 보다 적극적이고 진취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힘을 청하는 기도를 바치고 싶습니다.
나 자신의 사리사욕이 아니라 이웃의 선익을 위한 간절한 기도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기꺼이 들어주신다는 것을 늘 체험하며 삽니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 투자에 도움을 청할 때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여러 천사들을 보내시어 간단하게 해결해 주셨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바치는 모든 기도가 이웃의 결핍과 고통에로 향하는 이타적인 기도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한 평생을 두고 천천히 흘러가야 할>
-양승국신부-
절실한 정도를 너머 처절한 기도를 드려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가끔씩 삶의 기로에 서서, 또는 절박한 상황 앞에서 간절히 하느님의 도움을 청한다든지 그분의 뜻을 찾는 분들을 만납니다.
그분들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느끼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진정으로 드리는 간곡한 기도는 절대 허공을 맴돌다가 사라진다든지,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비록 모든 상황이 순식간에 우리가 뜻하는 모습으로 뒤바뀌는 기적이 일어나지는 않지만, 간절한 기도는 한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절실히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는 자신의 나약함을 인식합니다. 끊임없이 기도하는 가운데 어렴풋이 나마 하느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진실로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가 바치는 기도의 취약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의 기도가 지나치게 이기적인 기도, 너무도 허무맹랑한 기도였음을 자각하게 됩니다.
간절하게 기도하는 사람의 삶은 정직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간절한 기도를 바치는 사람은 서서히 자신의 기도를 정화시켜나갑니다. 정화의 과정을 거친 우리의 기도야말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기도입니다. 결국 그 기도는 보다 순수한 기도, 지극히 이기적인 바램이 배제된 기도, 세상을 위한 기도,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들을 위한 기도이기에 100% 이루어질 기도입니다.
우리가 바치는 기도가 진정 올바른 기도인지 아닌지는 열매를 맺는가 맺지 못하는가를 통해 식별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기도의 열매는 다름 아닌 희생입니다. 봉사입니다. 자기 낮춤입니다. 자기 비움입니다. 겸손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걷는 삶입니다. 한 인간의 삶이 총체적으로 바뀌는 긍정적 변화입니다.
간절한 기도란 꾸준한 기도입니다. 진지한 기도입니다. 자신의 인격 전체를 동원해서 하느님께 바치는 정성스런 봉헌입니다. 자신의 삶 전체를 하느님을 향해 높이 들어올리는 절실한 부르짖음입니다.
기도란 것은 속전속결로 끝낼 성질의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단기간에 해치울 일도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한 계속되어야 할 하느님과의 일상적인 대화입니다. 기도란 강물이 유유히 흘러가듯이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서 한 평생을 두고 천천히 흘러가야 할 그 무엇입니다.
어제 강의를 마치고 본당으로 운전을 하면서 돌아오다가 깜짝 놀랄만한 일이 있었습니다. 글쎄 3차선에 있었던 봉고차가 제가 운전하는 1차선으로 갑자기 끼어 들어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운전하는 차선으로 진입하겠다는 표시도 없이 말이지요. 저는 깜짝 놀라서 급브레이크를 밟았습니다. 조금만 늦었어도 그대로 충돌이 있을 뻔 했지요. 그런데 그 봉고차를 운전하는 사람은 왼손을 내밀어 흔들고는 그냥 가는 것이 아닙니까? 순간적으로 화가 너무 나서 쫓아갔지요. 그리고 마침 신호등 때문에 선 그 차 옆에 서서 창문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그 운전사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큰 소리로 이렇게 말을 하네요.
“정말로 죄송합니다.”
순간적으로 내가 왜 쫓아갔나 싶었습니다. 차에서 내린 뒤에 그 운전사의 멱살을 잡고 싸워야 했을까요? 아니면 욕을 퍼 부어야 했을까요? 사고가 날 뻔 했던 것이지, 사실 아무런 일도 없었지요. 이 사실에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인데, 싸우기부터 하려고 했던 제 자신이 얼마나 한심하던 지요.
참, 그래서 그 운전자에게 어떻게 했냐고요? 무작정 쫓아간 제 자신에게 한심함을 느끼면서 이렇게 말씀드렸지요.
“운전 조심해서 하세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매일 이렇게 묵상을 하고 묵상 글을 써왔으며, 또한 사람들 앞에 강론하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자고 그렇게 강조했던 저였지요. 또한 저도 그렇게 살라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나오는 나의 행동은 전혀 뜻밖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제 자신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다시금 느끼시는 순간이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또한 늘 주위를 경계하면서 악으로 기울어지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말씀도 깨닫게 됩니다. 그래야 우리가 원하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그 필요성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과부의 청을 결국 들어주는 못된 재판관의 비유 말씀을 해주시지요. 이 재판관이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이유는 과부가 마음에 들어서도 아니었고, 또한 하느님이 두려워서 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끊임없이 재판관에게 매달리는 과부가 귀찮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하지요.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우리 자신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서 우리의 능력만 가지고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역시 비유 말씀에 등장한 과부처럼 주님께 끊임없이 매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는 못된 재판관이 아니라, 우리에게 넘치는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분이 아닙니까? 따라서 약간의 노력만 한다면 분명 우리가 원하는 길로 분명히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최선을 다해 사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싸우지 맙시다.
갈망을 간절하게
-김찬선신부-
끊임없이 기도해야 함을 가르치시기 위해 주님께서 드신 비유를 보면서 불경스럽지만 과연 적절한 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하느님은 비유의 재판관처럼 성가시게 굴어야지만 들어주시는 분인가? 하느님은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아시는 분이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청하지 않아도 들어주실 분이신데 우리가 꼭 필요한 것을 청해야 하고 그것도 성가실 정도로 끈질기게 청해야 하는가?
우리 인간 가운데는 다른 사람의 아픔과 필요에 무감각할 정도로 인간에 대해 불성실한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인간 가운데는 자기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웬만한 자리에는 자리를 같이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인간 가운데는 자기의 호의가 더 드러나게 하기 위해 웬만한 요청은 의도적으로 들어주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느님도 이러한 의도로 우리의 청을 쉬 들어주지 않으시는가? 만일 그러하시다면 하느님도 아닌 좀팽이다. 만일 그러하시다면 하느님 자리 내 놓고 그런 하느님을 떠받드는 좀팽이들의 왕국에로나 가시라!
그러나 하느님은 절대 그러실 리 없다. 하느님은 체면 떨어지게 인간을 상대로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호의를 뽐내실 분이 아니시다. 그러니 하느님이 우리에게 끈질기게 기도하라 하심은 우리의 갈망을 더욱 간절히 하여 하느님의 사랑과 호의가 은총이 되게 하심이다.
갈망이 간절하지 않으면 보석도 짱돌이 되나니! 갈망이 간절하지 아니 하면 하느님의 사랑과 호의도 흘려버리는 물이 되나니!
그래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 임영인 신부-
조그만 회사를 운영하는 어느 교우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최근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한꺼번에 겪고 있습니다. 경기가 나빠져서 집에 생활비를 제대로 갖다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직원 월급도 제대로 주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쉬지 않고 일을 해왔기 때문에 건강도 좋지 않았습니다. 술을 마시고 늦게 귀가하는 날이 많아졌고 부부 싸움도 잦아졌습니다. 게다가 회사 일에 바빠 아이들에게 신경 쓰지 못했더니 아이의 성적이 떨어지고 행동이 빗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성당은 가뭄에 콩 나듯이 다녀 신부님의 얼굴도 잘 몰랐습니다. 그분은 고민 끝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신부님에게 상담을 했습니다.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늘 기도하고 주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을 낙관적으로 생각하라는 말씀은 옳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의 도전적인 질문에 신부님은 웃으며 말했습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기도하세요!” 그 교우는 신부님에게 바짝 다가가며 계속 물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통해 지금 겪는 일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신부님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말했습니다. “비록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고 낙관적으로 생각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최소한 교우님은 그 기도를 통해 분명히 더 ‘아름다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요?”
어떤 과부와 재판관의 이야기 -윤지중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면서 비유를 하나 들어주셨는데, 어떤 과부와 재판관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도시에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아주 고약한 재판관이 한 사람 있었는데, 어느 날 과부가 찾아와 그에게 억울한 일을 호소하며 올바른 판결을 내려달라고 청합니다. 하지만 재판관은 오랫동안 그 여자의 청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 과부는 포기하지 않고 늘 그를 찾아와서 졸라대며 성가시게 합니다. 그러자 재판관은 과부의 소원대로 재판을 해 주어야겠다고 마음먹습니다. 좋은 뜻에서가 아니라 자꾸만 졸라대니까 더 시달리지 않으려고 생각을 바꿔 먹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 말씀을 통해 그렇게 지독한 재판관도 과부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청하니까 성가셔서라도 그 청을 들어주는데,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야 오죽 하시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을 잃지 않고 언제나 기도드리면 하느님은 지체없이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계속 기도하기만 하면, 그것을 무조건 다 들어주실까요? 우리가 원하는 때에 우리가 원하는 방법으로 그렇게 다 이루어 주실까요?.... 글쎄요.
어린 아이들은 보통 부모님께 이것저것 많은 것들을 청합니다. 가지고 싶은 곳이 있으면, 온갖 떼를 다 쓰고 울며불며 그것을 사달라고 조르곤 합니다. 그러면 아이의 부모는 어떻게 합니까? 무조건 아이가 사달라고 하는 것을 다 사 줍니까? 솔직히 어느 부모인들 아이가 원하는 것을 해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현명한 부모라면 아이가 아무리 떼를 쓰고 울어대도 그것이 아이에게 맞지 않거나 좋지 않겠다 싶으면, 결코 아이의 요구대로 해주지 않을 것입니다. 부모는 아이의 삶 전체를 보고 아이의 장래까지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이의 요구대로 해주지 않으면, 아이는 섭섭해 하고 부모님을 원망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래도 부모가 생각하기에 그것이 아이에게 적합한 것이 아니라면 절대로 들어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 마음도 부모들의 마음과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아이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해 주고 싶어 하는 부모 마음처럼 우리를 향한 하느님 마음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 아이의 미래와 전체의 삶을 생각해서 때론 마음 아프지만 아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는 부모처럼 하느님도 우리가 청하는 모든 것들을 다 들어 주시고 싶으시지만 때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실 때도 있지 않겠습니까? 더군다나 우리가 청하는 그것이 고작 내 욕심이나 채우고 이기적인 마음에서 나온 것들이라면 어찌 하느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사실 우리는 우리가 청하는 그것이 우리 삶 전체에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얼마나 좋은 것인지조차 제대로 모를 수가 있습니다. 지금은 그것이 당장 필요한 것처럼 보이고 또 그렇게 되면 좋을 것 같아 보이지만, 그것이 하느님께서 보시기에는 우리에게 맞지 않고 결국 나쁜 결과를 빚게 되어 우리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일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어찌 하느님께서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다 들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이가 매일 사탕 한 봉지만 한 봉지만 그러는데 매일 사줄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왜 그런 비유를 드시고, 마치 하느님은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졸라대면 무슨 기도든지 다 들어주실 것처럼 말씀하신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절대 거짓말을 하실 분도 아니고 쓸데없이 빈 말씀을 하실 분도 아니신데,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은 용기를 잃지 않고 믿음을 가지고 언제나 기도를 드리면 하느님께서 올바른 판결을 해주신다는 것이지, 그것이 어떤 기도이든지 무조건 하느님께 매달리고 청하면 우리가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주신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하느님은 아이가 원한다고 해서 무조건 다 해주는 그런 어리석고 무책임한 부모같은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는데도 하느님께서 잘 안 들어주시는 것 같다면, 분명히 무슨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청하는 그것이 하느님 보시기에는 청해서는 안 되는 그런 것이라든지, 하느님 보시기에 아직 때가 안 되었다든지, 혹은 하느님께서 다른 방법으로 이루어 주실 계획을 가지고 계시든지 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기도가 여러분의 욕심이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면 실망하지 마시고 믿음을 가지고 부단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여러분의 기도가 하느님 뜻에 맞지 않는 기도이거나 사욕을 위한 것이라면 먼저 하느님 뜻이 무엇인지부터 생각하시고, 조금 욕심을 줄이시기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이 하는 기도는 어떤 기도입니까? 하느님 뜻에 맞는 합당한 그런 기도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사욕이나 채우려는 그런 어리석은 기도입니까?...........◆
새벽을 열며
병원 응급실에 아기를 안은 여자와 어린아이 하나가 막 뛰어 들어오면서 서로 울고 있었습니다. 간호사는 그 여인에게 다가가 물었지요.
“아니, 무슨 일이세요?”
그러자 여인이 울면서 말합니다.
“엉엉~~ 우리 아기가 동전을 삼켰단 말이에요.”
그런데 간호사가 보니 이 여인의 옆에 있는 어린아이도 펑펑 우는 것이에요. 그래서 어린아이에게 물었습니다.
“네 동생이지? 동생이 동전을 삼켜서 걱정되어서 우니?”
이 어린아이는 더욱 더 서럽게 울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엉엉~~ 그게 내 동전이란 말이에요.”
하나의 상황을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 두 사람의 차이를 볼 수가 있지요. 여인은 동전보다는 아기의 건강을 생각합니다. 반대로 아이는 아기의 건강보다는 동전을 먼저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똑같이 체험하는 하나의 상황에 대해서 이렇게 반대의 해석도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신앙인들도 그렇습니다. 똑같이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인데, 어떤 이는 너무나도 힘들어하면서 주님께 원망의 기도를 바치는 반면에 또 다른 이는 힘들기는 하지만 이것 역시 주님의 큰 뜻이라면서 오히려 감사의 기도를 바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더 행복할까요? 긍정적인 생각과 함께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면서 다가가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행복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쉬운 것은 아닙니다. 바로 주님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그 대화의 통로는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 말씀을 해주십니다. 오만한 재판관이 끈질기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과부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비유 말씀이지요.
이 비유 말씀에서 주의 깊게 봐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즉, 이 여인은 이곳저곳에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돈 많은 사람들과 권력을 잡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판결을 내려서 지금의 상황을 완전히 뒤집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단 한 명의 재판관만을 찾아가서 매달린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이곳저곳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주님께만 매달리라는 하십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그렇지 못합니다. 돈에도 매달리고, 권력에도 매달리고, 때로는 명예에도 매달립니다. 그러다보니 주님의 자리는 항상 맨 마지막 자리가 될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이제는 주님께만 매달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과 깊은 대화의 시간을, 즉 기도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부르짖으면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십니다.
빠다킹신부
기도
-서현승 신부-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 바로 전, 겟세마니 동산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달라고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처절했습니다. 그런데 다음에 바로 이어지는 “하지만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는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 모든 신앙인들의 가장 궁극적인 기도의 원형과도 같습니다. 이를 묵상할수록,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하느님께 대한 예수님의 무한한 신뢰가 느껴집니다. 제자들에게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시며 ‘과부와 고약한 재판관’ 비유를 통해 하느님께서 얼마나 우리의 기도를 잘 들어주는지를 강조하십니다. 평상시 우리의 간절한 바람들조차 잘 안 들어주시는 듯한 하느님을 원망해본 적이 있다면, 어쩌면 ‘고약한 재판관’쯤으로 하느님을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필요와 욕구만을 요청하는 기도에 머무는 것이 아닌 하느님과의 친교를 위한 기도라면 우리는 우리의 삶에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하느님의 눈으로 배워 알게 될 것입니다. 알면 알수록 이미 우리의 삶 안에서 얼마나 많이 그것들을 무상으로 받았는지 깨달아가는 놀라움과 기쁨의 나날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이 부족하여 나약하고 흔들리기 쉬운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더 더욱 우리는 내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청하는 기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기도해야 하는 이유
-이인옥-
아들이 공부를 그만두고 기타를 치겠다고 했을 때, 적성 때문에 선택했다는 확신도 없었거니와 예능 방면으로 뒷받침해 줄 형편도 아니어서 속이 많이 상했다. 말려도 되지 않고, 저 하는 대로 보고 있자니 가슴에 돌을 눌러놓은 것처럼 답답하고 한숨만 나왔다. 성적이 아닌 인간 됨됨이로 평가해 달라고 담임 선생님께 간곡한 편지를 쓰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뿐이었다. 기도는 계속되었지만 응답은 곧바로 나타나지 않았다. 아니 더 나빠졌다. 열심히 하던 기타 연습도 시들해졌고, 지도하던 선생님마저도 무성의해졌다. 매사에 자신이 없고 무력한 채 지내던 아들이 우여곡절 끝에 올해 대학에 들어갔다. 진짜 적성을 찾아 뒤늦게 합류한 아들은 적극적이고 밝은 예전 모습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방황한 만큼 더욱 철이 들었다. 자신감이 살아나고 활기 넘치는 아들을 볼 때마다 감사가 절로 나온다. 낙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드린 결과는 아들한테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나한테도 나타났다. 기도하는 동안 아들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기도하는 동안 나 자신의 욕심을 포기하고 아들의 행복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기도하는 동안 아들이 어떤 상태이건 둘도 없는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매번 느끼게 되었다. 이런 생각과 느낌은 아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져 다시 분발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끊임없이 기도해야 하는 이유다. 기도하는 동안, 기도하는 사람 자신이 옳고 선하고 아름답고 건강한 방향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끊임없이 기도하는 동안, 그 영향이 주위 사람들에게 줄기차게 전달되어 마침내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재판관과 부의 청
-김상균 신부-.
오늘 예수님께서 비유 말씀을 한 가지 들려주셨습니다. 어떤 과부가 한 재판관에게 어떤 문제에 대해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기를 청하였는데, 그 재판관은 과부의 청을 들어주지 않다가 과부가 계속해서 귀찮게 하자 그 청을 들어주었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들려주시면서 하느님께서는 지체 없이 당신 백성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라”라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 재판관이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나쁜 사람, 못된 사람이지요? 하느님과 그 재판관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극명한 비교를 통해 하느님께서 얼마나 우리의 청을 잘 들어주실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는, 믿음을 필요로 합니다.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듯이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주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는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길 바라며,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 완전히 의지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죠?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22,42) 이처럼 하느님께 완전한 의탁과 그분의 뜻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지,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마치시며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오늘 복음에 이어서 나오는 내용을 보더라도, 우리의 기도가 믿음을 필요로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이어서 나오는 내용은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에 관한 비유 말씀과 예수님께서 어린이들을 사랑하시는 내용입니다. 바리사이는 하느님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자랑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보다 자신의 공로를 더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세리는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며 하느님의 은총만을 믿고 바랐습니다. 바로 우리의 기도가, 하느님 앞에, 나 자신이 한없이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임을 고백하고 하느님의 자비만을 믿고 바라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나오는 말씀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아이들을 안으시며 “하느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데요, 마찬가지로 어린 아이가 엄마, 아빠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자라듯이, 우리의 기도도 오직 하느님만 바라보고 완전히 의탁하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그 자비하신 마음으로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가 믿음없이 드리는 기도라면, 하느님께서도 받아주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모든 것을 하느님 아버지 뜻에 내어맡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이어야 합니다. 믿는 마음으로 기도드리며,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도드려야 겠습니다.
"절망의 상태이지만 주님 안에서 희망할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홍성만신부-
이따금, 기도에 임하는 제 자신을 뒤돌아보면 나의 기도가 얼마나 편협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예를 들어, 약 35넌 전 신학생 시절에는 남북통일에 대해 기도를 드린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만해도 남북통일에 대해서 일말의 작은 희망도 갖지 못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희미하나마 인간적으로 희망이 감지될 때에만 이를 바탕으로 기도를 드린다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이는 틀림없이 저의 잘못된 믿음의 소치입니다.
그래서인지 이렇게 끝나는 오늘 복음 말씀이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믿음은 궁극적으로 주님 안에서 희망을 하는 것입니다.
절망의 상태이지만 주님 안에서 희망할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은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권세 당당한 재판관이지만,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끈질기게 졸라대는 힘없는 과부에게 백기(白旗)를 들고 맙니다.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계속 이어집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사실 저를 포함해 많은 사람이, 희미하게나마 희망이 보일 때 이를 바탕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물론 이 희망이 기도를 더 적극적으로 드리는 데 매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을 했듯이, 믿음은 궁극적으로 주님 안에서 희망을 하는 것입니다.
절망의 상태이지만 주님 안에서 희망할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을수록 더욱더 주님께 의지하고 희망을 두어야합니다.
희망하고 의지하는 나를 주님께서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방법대로 나를 거두어 주십니다.
결국 나를 거두어 주시는 주님께 의지하고 희망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도우심을 끊임없이 기도하는 사람.
-최금자 -
이탈리아에서 계획했던 공부를 마치기 위해 장학금이 절실히 필요한 때가 있었습니다. 장학금을 주겠다는 독일 장학재단에서 나에게 어려운 조건을 요구했습니다. 소속 교구 주교에게 학업을 마친 후에 일자리를 보장하겠다는 고용계약서를 받아 제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아직 공부를 마치지도 않았으며, 평신도인 나에게 주교님이 고용계약서를 써준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어서 무척 난감했습니다. 나는 주교님께 장학금을 받기 위해 고용계약서가 필요하다는 간곡한 편지를 보냈습니다.
주교님의 소식이 올 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공부가 나 자신은 물론 한국교회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도와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늘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는 지인들에게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한참 후에 장학재단은 주교님의 확답을 받았다며 나에게 장학금을 주겠다고 알려왔습니다. 그 순간 나는 날아갈 듯이 기뻤고 나를 위해 기도해 준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이 길이 내가 가야 할 길이라는 확신이 들면 어떠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끝까지 기도하며 나아가야 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심판도 두려워하지 않는 완고한 재판관이 끈질기게 간청하는 과부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정당한 판결을 해준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서에 등장하는 과부처럼 어려운 가운데서도 희망의 불을 끄지 말고 하느님의 도우심을 끊임없이 기도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비록 원하는 때를 넘겼더라도 그 길만이 자신이 살 길이라면 결코 포기하지 말고 소원이 이루어지는 그 순간까지 항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귀하고 사랑스런 존재
-백광현 신부-
제가 사는 곳은 숲이 우거져서 새들이 많이 날아듭니다. 다람쥐도 살고 있는데 저희와 친숙해져서 겁 없이 다가오곤 합니다. 등산로가 옆에 있어 사람들의 소리, 열심한 개신교 신자가 아침마다 외쳐대는 ‘야훼’소리도 이곳 환경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고민거리가 생겼습니다.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 날아와서 아침의 단잠을 깨우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어떤 사람이 수도원 가까이에서 새벽부터 망치질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동이 트기가 무섭게 시작되는 망치질이 2주째나 되어 그동안 아침잠을 설친 저는 이젠 이야기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충 옷을 걸쳐 입고 나가는데 인기척이 있어 고개를 돌렸더니 제 방 옆에 딱따구리 한 마리가 붙어서 처마에 구멍을 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딱따구리는 인기척을 듣자 곧바로 달아났습니다. 그 뒤에도 딱따구리와의 실랑이는 계속되었습니다. 어느 날 돌을 하나 집어 들고 벽에 붙어 있는 딱따구리에게 던지려고 했는데 딱따구리의 색이 너무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슬그머니 다시 돌을 내려놓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귀찮게 구는 놈이라도 좋아하고 사랑한다면 용서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은 하느님께 이보다 훨씬 더 귀한 존재라는 생각이 저에게 큰 위안이 됩니다.
나만의 기도방
-임종심-
나 같은 외짝교우들은 드러내 놓고 기도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성체조배실은 나에게 끊임없이 기도할 수 있는 나만의 기도방이다. 나는 매주 화요일 성체조배를 한다. 정해놓은 시간에 맞춰 간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바쁜 가운데 용케도 그 시간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은총이었다. 뭔가 해 달라고 졸라대는 기도가 아니라 그냥 그 시간,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지친 육신과 영혼을 어루만져 주시도록 오롯이 맡긴다. 주님 품에 안기는 그 시간이 행복해서 또 찾아오게 된다. 기도는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다고들 하지만 그래도 성체조배실처럼 꾸며져 있는 곳에서는 더 잘 되는 느낌이다. 지금도 나 혼자서는 묵주기도 5단을 제대로 바치지 못한다. 여럿이 함께할 때는 쉽지만 모든 일과를 끝내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마음잡고 묵주기도를 하려고 하면 어느덧 꿈나라로 향한다. 그래서 묵주기도를 하기 전에 시작은 제가 하지만 기도를 마치지 못할 땐 성모님께서 마무리해 주십사고 말씀드린다. 예수께서는 과부의 비유를 들어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과연 이 과부처럼 끊임없이 하느님께 의지하고 기도하는가? 혹 나의 기도는 적당히 핑계를 대면서 기도하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번 반성해 본다. 늘 기도 속에서 제대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과 사랑을 청한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겠느냐?”
-양승국신부-
<신앙생활 안에서 스윗스팟(Sweet Spot)의 체험>
아주 기쁘게, 그리고 열심히 사시는 한 택시기사님을 만나니 하루 온종일 마음이 환해졌습니다. 문을 여는 순간부터 피부에 와 닿는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멋진 백발에 선한 미소가 잘 어울리는 기사님이셨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제가 자리에 앉자마자 저 기분 좋으라고 덕담 한마디를 던지십니다.
“제가 사주팔자를 조금 공부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손님 참 관상이 특별합니다. 귀인 얼굴입니다.”
“기인(奇人: 기이한 인간) 말씀이십니까? 아니면 귀인(鬼人: 귀신같은 인간) 말씀하십니까?”
“둘 다 아니고요, 귀인(貴人)상이십니다. 손님, 보아하니 스님 되실 상인데, 스님이 되셨더라면 큰스님이 되실 관상입니다.”
직업상 하시는 말씀인줄 알고 있었지만, 듣고 있노라니 너무 기분이 좋았습니다. 속으로 ‘이양반 사람 볼 줄 아시네’하는 ‘교만한’ 생각도 은근히 들었습니다.
할 수 없이 요금을 계산할 때 ‘복채’를 웃돈으로 더 얹어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작별인사도 무척 요란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복 받으실 겁니다.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서비스 만점인 기사님을 뵈면서 ‘고객만족’ ‘고객감동’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과부, 집요함을 넘어 지독하리만치 졸라대는 과부의 전력투구를 높이 평가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졸라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함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모상인 이웃들의 행복을 위해 집요하게 졸라댐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 내게 부여하신 달란트를 발견하고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 효과적으로 활용하려고 노력함이 필요합니다.
스윗스팟(Sweet Spot)이란 말이 있습니다. 골프채를 휘두를 때, 야구장 타석에 들어설 때, 축구시합에서 상대방의 골대 앞에서, 아주 가끔씩 느끼는 감동입니다.
중심 가운데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정중앙을 정확하게 때리는 순간, ‘딱!’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을 높이 날아간 골프공이 정확하게 홀 안으로 들어갔을 때의 그 짜릿한 느낌, 제대로 맞은 야구공이 날개를 단 듯이 날고 날아 펜스를 넘어갈 때의 그 황홀한 기분. 그런 체험을 한 사람만이 진정한 프로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스포츠 경기에서뿐만 아니라 신앙생활 안에서도 우리는 스윗스팟을 체험해야 합니다. 스윗스팟을 맛본 삶이 순풍에 돛단 듯 신나게 나아가듯이 스윗스팟을 찾은 신앙생활 역시 날개를 단 듯 수직상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를 그저 그런 삶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비결은 스윗스팟을 찾는 일입니다. 스윗스팟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이를 찾기 위해 하느님께서 내게 부여하신 장점이 무엇인지 찾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내게 선물로 주신 것 가운데 이 세상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나 혼자만의 고유한 영역을 찾아야 합니다. 나의 강점, 나의 경쟁력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그것을 찾아내는 순간 스윗스팟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자신만이 지닌 독특한 능력으로 하느님을 드러내야 합니다. 자신만이 지닌 특별한 능력을 십분 발휘해서 하느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자신의 강점, 경쟁력을 활용해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온 이유는 하느님을 세상에 증거 하기 위해, 하느님을 위해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스윗스팟은 반드시 하느님과 연관되어야만 합니다.
세상과 이웃들을 위한 우리들의 봉사활동에도 스윗스팟을 맛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봉사가 가치를 발하고 의미를 더해갑니다.
우리가 행하는 사도직이나 봉사활동이 하느님께도 영광을 드리는 일인가 하는 문제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하느님께서 내게 부여하신 달란트를 잘 개발하였는가? 갈고 닦은 나의 전문성이 십분 발휘되고 있는가 하는 문제도 중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이웃을 향한 봉사가 구체적이고 실질적인가 하는 문제도 더없이 중요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충족될 때 우리의 봉사활동은 지속적인 스윗스팟을 체험하는 장이 될 수 있을 것이며, 그 봉사활동이야말로 제대로 된 봉사활동이며 하느님과 이웃들이 기뻐하실 봉사입니다(맥스 루케이도, ‘일상의 치유’ 청림출판 참조).
항구한 기도
-이수철신부-
“하느님, 하신 일들이 얼마나 크옵시며,
생각하심 그 얼마나 깊으시니이까.” “하느님, 내 주시여,
온 땅에 당신 이름 어이 이리 묘하신고.”
측량할 수 없이 깊고 깊은 신비의 하느님이십니다.
비단 하느님뿐 아니라, 사람 또한 얼마나 깊고 깊은지요!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 삶의 무한한 다양성과 깊이에 놀라게 됩니다.
결코 단일한 잣대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하느님만이 아시는 그만의 고유한 깊이를 지닌 사람들임을 봅니다.
새삼 하느님의 신비는 사람의 신비이고,
사람의 신비는 하느님의 신비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을 모르면 사람을 모르고,
사람을 모르면 역시 하느님을 모릅니다.
바로 여기서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게 기도입니다.
항구한 기도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의,
보이는 것 넘어서의 참 사람과의 깊은 신뢰 관계와 내적 탐구를 위해
진실하고 항구한 기도는 필수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든,
사람 간의 관계든 본질적인 것은 형식이전의 신뢰관계입니다.
신뢰관계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형식의 공동체가
진정 생명의 공동체입니다.
한 가정 안에서 남남으로 무관하게 살아가는 부부가 있듯이,
한 수도원 안에서도 하느님과 남남으로
무관하게 살아가는 수도자도 있을 수 있는 법입니다.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깊어지는 신뢰관계가
우리에게 안정과 평화를 주고 자유롭게 합니다.
오늘 복음의 불의한 재판관에게 끈질긴 간청을 통해
그 소원을 관철시키는 과부가 바로 항구한 기도의 모범입니다.
낙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진리를 보여 줍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간절하고 항구히 기도할 때 하느님은 분명코 응답해 주십니다.
들어주시면 들어 주시는 대로,
안 들어 주시면 안 들어 주시는 대로,
당신의 뜻에 따른 응답입니다.
그러니 들어 주셔도 좋고 안 들어 주셔도 좋으니
다 하느님의 뜻에 따른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항구한 기도가 하느님은 물론 이웃 간의 신뢰관계를 깊게 하며
더불어 서로 간의 앎도 깊게 합니다.
이런 항구한 기도와 함께 가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기도에 소홀한, 하여 믿음 부족한 오늘날 사람들을
분발시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
요한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길을 떠난 이들’을 돌보아 줄 때
바로 우리는 ‘진리의 협력자’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협력자’라는 용어가 참 아름답습니다.
진정 항구한 기도의 사람들,
진리의 협력자들이 되어 그리스도를 위해 길을 떠난
모든 믿는 이들을 잘 돌보아 줄 것입니다.
오늘도 이 거룩한 미사 은총이
하느님과 우리와의 신뢰관계를 깊게 해주며
진리의 협력자들 되어 살게 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고
주님의 계명을 큰 즐거움으로 삼는 이들이여!”(시편112,1).
아멘.
당신 백성이기에 보호하시며 구원하시는 하느님 -경규봉 신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하실 때 하느님의 전능하신 말씀이 사나운 전사처럼 멸망한 땅 이집트로 뛰어내렸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상태에서 풀어주지 않으려고 하는 이집트 백성의 모든 장자와 가축의 맏배를 쳤다. 또한 광야로 탈출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하던 이집트 군대를 쳤다. 그리하여 이집트 땅이 멸망한 땅처럼 온 땅을 시체로 채웠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이 해를 입지 않도록 보호하셨다. 하느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계시며 낮에는 시원한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따뜻한 불기둥으로 그들을 보호하시고 이끌어주셨다. 그들이 홍해를 건널 때에는 마른 땅이 드러나게 하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목장에서 풀을 뜯는 말들처럼 배불리 먹고, 양들처럼 뛰놀면서 구원의 주님을 찬양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는 당신 백성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언제나 듣고 계셨다. 때가 이르자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보내시어 당신 백성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오도록 하셨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와 함께 계시며 모세의 힘이 되어주셨다. 그리하여 모세로 하여금 여러 가지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셨다.
모세는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 표로서 여러 가지 이적을 보였다. 그러나 파라오는 모세의 말을 믿지 않고 하느님을 적대시하였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적대시하고 죄악에 빠져있는 완고한 이집트 백성을 죽음에 빠트리셨다. 이집트 백성의 장자들을 모두 죽게 하셨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하던 이집트 군대를 홍해 바다에 빠져 죽도록 하셨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탈출시키셨다. 홍해 바다를 말리시어 그들이 마른 땅을 밟고 홍해 바다를 건너도록 하셨다.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을 덮어주시어 뜨거운 햇볕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시며 시원하게 해주셨다.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덮어주시어 밤의 차가운 냉기로부터 그들을 보호하시며 따뜻하게 해주셨다. 먹을 것이 없어 고통을 당하던 그들에게 만나를 내려주시어 배불리셨으며(출애 16,14-31), 고기를 그리워하던 그들에게 메추라기를 보내시어 고기를 배불리 먹도록 하셨다(출애 16,13).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불평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언제나 귀여겨 들어주셨다(출애 16,12). 하느님께서는 그처럼 당신 백성을 애지중지하시며 그들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셨던 것이다. 오직 당신의 백성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을 보살피시고 인도하셨던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거부하는 이집트 백성을 벌하시어 죽음에 빠트리시지만, 당신 백성 이스라엘은 구원하시어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실 뿐만 아니라 철저히 보호하시고 지켜주셨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거부하고 적대하는 죄악에 대해서는 철저히 벌하시지만, 당신을 따르고 순명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철저히 보호하시고 지켜주신다.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지음으로써 벌을 받기도 하지만, 오직 당신 백성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불평을 들어주시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시며 그들을 구원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 백성이요 자녀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자. 우리가 하느님 백성이요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들어주신다. 당신 자녀이기 때문에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우리를 보호해주신다. 당신 자녀이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신다. 그러니 하느님 백성이요 자녀임을 자랑스럽고 기쁘게 생각하자....◆
至誠이면 感天
-강영구 신부-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이지만 이 과부가 너무도 성가시게 구니 그 소원대로 판결해 주어야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꾸만 찾아와서 못 견디게 굴 것이 아닌가.
그대에게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습니다. 파렴치하고 뻔뻔스러운 재판관도 과부의 끈기와 인내 앞에서 무너지고 맙니다.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이 단단한 바위에 구멍을 뚫고 부드럽게 흐르는 물이 모난 돌을 깎아 둥글게 만듭니다.
기도란 단순히 자신의 억울함과 아쉬움을 하늘에 호소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기도란 자기를 깎는 일이자 하늘을 감동시키는 일입니다. 가난한 과부는 스스로 한 방물의 물이 되어 꿈쩍도 하지 않던 파렴치한 재판관을 감동시킵니다.
모든 기도가 다 하늘에 가서 닿는 것은 아닙니다. 하늘의 소리를 듣고 하늘을 닮는 사람의 기도가 하늘에 닿습니다. 바위를 깎고 다듬기 위해서는 물이 되어야 하듯이 하늘을 감동시키기 위해서는 하늘을 닮아야 합니다. 하늘을 닮으려면 비어있어야 합니다. 비어있는 사람이 모든 것을 품어주고 감싸 안을 수 있습니다.
기도의 사람 예수는 하늘 닮은 사람입니다. 당신도 하늘 닮은 기도의 사람이 되십시오. 당신의 기도가 하늘에 가 닿기를 바랍니다.(一明)
오늘’내가 드리는 기도는...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의 ‘과부의 끈질긴 간청을 들어주는 거만한 재판관의 비유’는 루가복음에만 있는 고유사료이다. 비유의 소재는 루가가 즐겨 주제로 삼아 보도하는 기도에 관한 것이다. 그것도 인내와 끈기를 동반한 기도의 자세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중요한 점은 비유자체의 이야기에 있다기보다는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라는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격려에 있다. 그것은 오늘 복음이 기도에 대한 단순한 가르침이 아니라 종말(8b절)을 대비한 유비무환의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즉,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비유의 내용처럼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언제나 기도하며 용기를 잃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도하는데 있어서 얼마만큼 인내와 끈기를 가져야 하는 것인가? 오늘 복음에서 과부의 끈질긴 간청을 들어주는 거만한 재판관의 비유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으로 ‘주님의 기도’를 가르치신 후에 성가실 정도로 끈질긴 친구의 청에 빵 세 개를 내어주는 비유(11,1-13)를 상기시킨다. 성가실 정도의 끈질긴 간청을 어제는 친구가 들어주고, 오늘은 거만한 재판관이 들어줄지언정 내일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8b절)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쉽게도 예수께서는 종말을 기다리다 지쳐 이미 믿음을 포기한 사람들을 내다보시고 계신 것이다. 따라서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간청하기를 수도 없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염치 불구하고 끝까지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한다(11,9)는 것이다. 마지막까지 믿음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인내와 끈기를 동반한 기도뿐이다.
이미 지나간 복음에서 인자의 재림과 종말에 관한 표징들이 언급되었다.(17,20-37) 노아의 홍수(창세 6-7장) 때나 소돔과 고모라의 최후(창세 19장)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 그리고 ‘여기’라는 일상(日常) 안으로 종말이 들이닥칠 것이 분명하다. 일상 안으로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종말을 피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더욱이 그 날이 언제가 될지를 모르고 살아간다면 다리를 펴고 잘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잃지 말고, 언제나 기도하되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하라는 것이다. 사실 종말의 ‘그 날’이 언제일지 정확히 안다는 것도 모르고 있는 만큼 불안하고 힘든 일이다. 알고 있다면 그 날을 향하여 한 걸음씩 다가서는 두려움과 각박함, 그야말로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찬 ‘시한부 인생’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고, 모르고 있다면 넉넉함과 막막함의 엇갈린 긴장으로 불안한 인생을, 그래서 지치고 쉽게 포기할 수도 있는 인생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그리고 ‘여기’에서 ‘그 날’을 위해 기도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기뻐하고 감사하며 희망을 가지고 ‘오늘’ 기도하는 사람은 늘 기도하는 사람이다.(로마 12,12; 골로 4,2; 1데살 5,17) 우리들 가운데 고통을 받거나 죄를 지은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위해 ‘오늘’ 기도해 주어야 한다. 올바른 사람의 기도는 ‘오늘’이 가기 전에 바로 효과가 있을 것이다.(야고 5,13.15-16) 성령의 도우심으로 ‘오늘’ 기도하는 사람은 믿음의 터전 위에 스스로를 세우는 것이다.(유다 1,20) 그것은 하늘나라의 원로들이 향이 가득 담긴 금으로 된 대접을 가지고 어린 양 앞에 엎드리기 때문이다. 그 향은 곧 ‘오늘’ 우리가 바친 기도이다. 그 때 대천사가 금향로를 들고 와서 ‘오늘’ 우리가 바친 기도를 향에 섞어 향로에 넣고 황금제단에 태워 올린다. 그러자 대천사의 손으로부터 ‘오늘’ 우리가 바친 기도를 태운 향의 연기가 하느님 앞으로 올라가기 때문이다.(묵시 5,8; 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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