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0404. 묵상글 ( 성주간 화요일. - 배반의 차이, 믿어주실 거라고 믿는 나인가?. 등 )
----------------------------------------------------
230404. 성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배반의 차이, 믿어주실 거라고 믿는 나인가?
주님께서는 오늘 심란하십니다.
그리고 심란하심을 드러내십니다.
당신 죽음 때문에 심란하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마 제자들 때문일 것이고 배반 때문일 겁니다.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 놓고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사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배반 때문에 돌아가신 것은 아니고,
모든 것이 돌아가시게끔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각오하고 계셨고 세 차례나 예고하셨던 바지만
당신 죽음에 제자들도 휩쓸려 배반하게 되어 심란하신 겁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의 배반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유다와 베드로의 배반을 예고하시는데
제 생각에 그 차이는 적극적 배반과 소극적 배신의 차이입니다.
배반과 배신은 같으면서도 차이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배반이 한편이었다가 다른 편이 되는 일반적인 의미라면
배신은 배반 중에서도 믿었던 사람이 배반한다는 의미일 겁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면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겼으니
적극적인 배반이고 주님의 죽음에 적극 가담한 것이긴 하지만
주님의 믿음을 기준으로 보면 베드로의 배신에 더 심란하셨을 겁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유다보다 베드로를 더 믿으셨다고 하면
베드로가 비록 주님의 죽음에 직접 또 적극 가담한 것이 아니더라도
당신 믿음이 배신당한 것이기에 더 마음 아프셨고 더 심란하셨을 겁니다.
‘믿었던 너마저!’라는 말이 딱 이 경우지요.
그래서 여기서 생각게 됩니다.
주님께 나는 베드로일까 유다일까?
나는 주님께서 유다처럼 당신 믿음에서 아예 제쳐놓은 자인가?
그래도 베드로처럼 믿을만한 놈이라고 쳐주시는 존재인가?
나는 주님께서 나를 믿어주신다고 믿는가,
믿음에서 나를 제쳐놓은 존재라고 믿는가?
당신 믿음에서 나를 제쳐놓았다면 저는 실망할 것이고
당신 사랑에서 배제된 것처럼 느껴져 불행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저의 수없는 배신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끝까지 믿어주실 것이고 다시 믿어주실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다시 안 믿어주실 거라고 믿고,
주님 사랑에서 영원히 배제될 것이라고 믿는다면
아마도 유다처럼 절망하여 자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주님을 수없이 배신해도 주님은 나를 믿어주실 거라고,
베드로처럼 언젠가 당신께 돌아올 것을 믿어주실 거라고 믿어야 하고,
그런 믿음을 가진 자라야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음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
230404. 성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새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 13,38)
우리는 <성삼일>을 이틀 앞두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절망과 어둠이 더해가는 이야기입니다. 빛으로부터 떠나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 간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두 개의 밤이 있습니다. 그리고 두 개의 배반이 있습니다. 하나는 유다의 밤이요, 또 하나는 베드로의 밤입니다. 유다의 밤은 캄캄한 어둠이 짙어져가는 밤이요, 베드로의 밤은 닭이 울기 전, 새벽이 밝아져오는 밤입니다.
유다의 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둠이 제자들을 덮치자,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놓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요한 13,21)
사실, 예수님께서는 배반하는 제자를 마지막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빵을 적셔서 그에게 주었습니다. 빵을 적셔서 주는 것은 애정의 표현이었습니다. 당신을 배반할 제자에게 끝까지 베푸는 충실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사랑을 등지고서 밤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택했습니다. 그는 의도적으로 면밀히 계획한 바를 어둠 속에서 행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겠다고 장담하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새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 13,38)
베드로는 주님을 배반할 의향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약한 순간에 그만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닭이 울면, 어둠은 밝아질 것입니다. 베드로는 지나친 자기 과신으로 넘어졌습니다. 사실, 우리가 넘어질 때는 가장 약할 때가 아니라, 가장 강할 때입니다. 반대로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우리가 약할 때 오히려 강해질 것입니다(2고린12,10).
그렇습니다. 유다의 밤은 어둠과 악으로부터오는 밤이요, 베드로의 밤은 약함과 과신으로부터오는 밤입니다. 또한 유다의 밤은 죄를 깨닫고서도 더 짙은 어둠으로 빠져들어 멸망으로 가는 밤이요, 베드로의 밤은 죄를 깨닫고서는 어둠을 헤치고 빛으로 나아가는 생명의 밤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베드로같이, 유다같이 곧잘 넘어집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넘어지는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두가 일어서는 존재인 것은 아닙니다. 혹 넘어진 사실을 까달아 알고 뉘우치고 성사를 본다고 해도, 일어선 사람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단지, 넘어진 채로 넘어진 자신을 본 것일 뿐, 비록 용서는 받았다할지라도 일어서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일어서서 넘어졌던 자신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빛속으로 건너와서 어둠을 바라보아야 할 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일어선 자만이 빛나는 새벽을 만날 것이요, 일어선 자만이 빛 속에 들 것입니다. 먼저 베풀어진 그분의 사랑을 만난 자만이 그분의 빛 속을 걷을 것입니다.
하오니, 빛이신 주님! 저를 비추소서! 제가 일어나 빛 속을 걷게 하소서.
오늘 제가 비록 넘어지더라도 일어나 빛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 13,38)
주님!
어둠에 휩싸여 넘어지고 또 넘어집니다.
빛을 비추소서.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넘어지기도 전부터 베풀어진 당신의 사랑을 보게 주소서
일어나 빛 속을 걷게 하소서.
구원의 십자가를 지고 사랑의 길 걷게 하소서.
빛을 받아 빛을 밝히게 하소서. 아멘.
----------------------------------------------------
230404. 성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배신의 죄보다 사랑입니다
배신은 한솥밥을 먹는 사람이 합니다. 멀리 있는 사람은 서로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등질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있는 사람은 서로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고 그것이 채워지지 않았을 때 마음이 상해 차라리 몰랐던 사람만도 못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잘 안다는 것이 오히려 별것도 아닌 것에 서운함을 갖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강한 것 같지만 연약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폭과 깊이, 넓이를 더해야 하겠습니다. 내 마음의 문을 열어 빛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해야 주님께서 우리 삶의 역사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오실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비록 예수님을 팔아넘기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여전히 예수님의 제자였고,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마음을 알고 내내 번민하셨습니다. 속을 다 아시고 그것을 품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 안에서 침묵으로 철저히 고독을 이기셨습니다. 마음이 넓어야 좁은 이를 품을 수 있는 법입니다. 마침내 유다는 스승을 배반하였고 그 자책 때문에 목숨을 끊었습니다.
사실 누구나 유다처럼 약한 마음을 지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양상이 다릅니다. 베드로나 바오로는 주님을 등졌던 사람이지만 회개하여 주님의 도구로 항구하게 살았습니다. 한때 주님을 배반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주님의 자비를 믿고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유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주님의 자비가 심판을 이긴다.’는 진리를 믿지 못한 탓입니다. 우리는 어떤 처지나 상황에서도 주님의 자비 안에 굳건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가장 큰 약점은 어떠한 죄도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용서하는 데 지치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유혹은 나를 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유혹 앞에서 나를 가장 확실하게 알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 의탁할 수밖에 없는 나의 한계성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혹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시험입니다. 하느님 편에서 생각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면 커다란 공로가 될 것이고, 사탄의 편에 서서 그 유혹을 받아들이면 파멸의 길, 죽음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에는 항상 사탄의 말만 있는 것도, 그렇다고 늘 하느님의 말씀만 들리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끊임없는 선택의 길에 서게 됩니다. 단호하게 하느님을 선택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유혹은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요, 나에게 자유가 주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하느님 앞에서의 그만한 책임을 져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심판보다는 자비를 갈망하는 만큼 예수님 곁에 꼭 붙어 그분만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절대 빼앗기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람으로 사랑합니다.
----------------------------------------------------
230404. 성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여명의 눈동자’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제가 첫 보좌신부로 있을 때 방영되었으니 어느덧 32년이 되었습니다. 드라마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철조망이 가로막혀 있고 사랑하는 연인이 헤어지는 모습이었습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아이를 꼭 낳고 살아 있으라고 부탁합니다. 언제 다시 볼지 모르는 남자를 애타게 바라보는 여자는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입맞춤을 합니다. 이 드라마는 기쁨과 희망보다는 슬픔과 절망이 많았습니다. 강자의 힘과 폭력에 희생당하는 약자들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시대를 잘못 태어난 이들의 고난과 역경이 있었습니다. 드라마는 이런 대사로 끝이 납니다. “그해 겨울. 지리산 이름 모를 골짜기에 내가 사랑했던 여인과 내가 결코 미워할 수 없었던 친구를 묻었다. 그들은 가고 난 남았다. 남은 자에겐 남겨진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희망이라 이름 지을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만이 이 무정한 세월을 이겨낼 수 있으므로.”
여명의 눈동자와 함께 시작한 저의 사제생활도 32년이 되었습니다. 보좌신부로 8년 있었고, 본당 신부로 8년 있었습니다. 교구청에 8년 있었고, 해외에 8년 째 있습니다. 일부러 그렇게 한 것도 아닌데 사계절이 있는 것처럼 8년씩 4번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여명의 눈동자처럼 시대를 잘못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저는 60년대에 태어났고, 경제성장의 시대를 살았습니다. 가난한 나라였지만 지금은 세계 10위의 경제력으로 풍요를 누리면서 대한민국 국민이 자랑스러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매 10년마다 100만 명씩 신자가 늘어나는 교회에서 사제생활을 하였습니다. 뒤를 보아도 감사할 일이고, 옆을 보아도 고마운 일이고, 2023년 4월의 뉴욕생활도 감사할 일입니다. 호사다마, 새옹지마라고 제게도 한두 번 시련과 아픔은 있었지만 돌아보면 웃음 지을 수 있는 추억입니다. 유행성출혈열로 병원에 입원했었지만 다행히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건강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골절로 발목 수술을 했지만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잘 걷고 있습니다. 저의 부족함 때문에 실수와 잘못이 있었지만 큰 무리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돌아보면 감사의 32년입니다.
오늘은 성주간 화요일입니다.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은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첫 번째 제자들은 그물을 버리고,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 앞에는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마귀들도 예수님을 무서워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 들린 사람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권위도 예수님께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교만을 비난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그들의 말은 따르지만 그들의 행실은 배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계명’의 틀을 넘어서는 새로운 권위를 보여 주셨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나라의 표징을 직접 보여 주셨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눈 먼이, 중풍병자, 나병환자, 귀먹은 이를 치유해 주셨고, 죽은 이까지 되살려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앞에는 ‘꽃길’만 있을 것 같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배반’을 이야기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유다는 은전 서른 닢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것이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던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3번이나 주님을 배반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꽃길처럼 펼쳐졌던 예수님의 앞에 ‘가시밭 길’이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 수난의 길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뿔뿔이 도망갔고, 호산나라고 외쳤던 군중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십자가가 너무 무거워 3번이나 넘어지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주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하셨습니다. 성주간 화요일입니다. 지금 나의 삶은 어떤 모습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하는 모습인지, 뿔뿔이 도망가는 모습인지, 두려워 숨어 있는 모습인지 보면 좋겠습니다. 여명의 눈동자에도 선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둠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지금 나의 삶이 예수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의 모습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 얼굴에 흐르던 피와 땀을 닦아드린 베로니카의 모습이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이 여명의 눈동자가 되어서 찬란한 아침을 맞이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230404. 성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손주를 돌보는 어느 할머니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신부님, 제 손주가 저보다 돈을 더 많이 벌어요.”
무슨 말씀인가 했습니다. 갓난아기가 어떻게 돈을 벌 수 있습니까?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 갓난아기가 돈을 벌고 있었습니다. 자자체에서 출산지원금, 육아지원금 등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 액수도 생각보다 상당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출산율이 전 세계에서 최저라는 사실이 이상했습니다.
그 뒤, 젊은 부부를 만날 일이 있어서 이 부분에 관해 물었습니다. 국가에서 그렇게 많은 지원을 하고 있는데도 왜 아기를 갖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이 부부는 그런 현금성 지원보다 더 근본적인 해결을 해줘야 한다고 이야기하더군요. 출산 이후 육아에 힘을 쏟으면서 직장 생활하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출산 휴가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한데 그렇다고 직장을 그만두면 나중에 경력 단절로 재취업이 어렵다고 말합니다. 또 자녀를 키우는데 예전과 달리 많은 교육이 필요한데, 직장까지 잃게 되면 모두 불행해질 것 같아서 아이를 낳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잘 몰랐음을 인정했습니다. 결혼도 하지 않고 애를 낳고 키운 적도 없기에 그냥 간단하게만 생각했었습니다. 잘 모르면서도 왜 아기를 낳지 않느냐면서 부부들에게 그 탓을 돌렸던 것입니다. 인구 절벽을 만든 것은 저를 포함한 모든 이의 책임일 텐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 당사자 탓을 하면 안 되었습니다.
‘남 탓’에 너무나 익숙한 ‘우리’였습니다. 자신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자신은 그럴 리가 없다면서 착각합니다. 그러나 전혀 책임이 없지 않습니다. 자신도 그 상황에 놓이면 똑같은 모습을 보일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수난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붙잡혀서 수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하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께서는 모두 잘 알고 계셨습니다. 심지어 누가 당신을 팔아넘길 줄도 아셨습니다. 그 사람은 유다 이스카리옷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세 번이나 당신을 모른다고 말할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토록 사랑을 많이 받았던 제자들이 어쩌면 이럴 수 있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 숨 쉬며 사는 것만으로도 큰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의 사랑을 잊어버리고, 주님의 뜻에 반대되는 모습을 취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을 팔아넘기는 것이고,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만이 아닌 수십 번을 말하는 우리가 아닐까요?
자신을 늘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남 탓이 아닌, 자신이 지금 실천해야 할 주님의 뜻에 집중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제 더 이상 주님께 아픔을 드리지 말아야 합니다.
------------------------
위대한 행동이라는 것은 없다. 위대한 사랑으로 행한 작은 행동들이 있을 뿐이다(테레사 수녀).
------------------------
----------------------------------------------------
230404. 성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 그리스도님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이자 친구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지난 주일 오후 입원중인 분에게 병자성사를 드리려 외출했고 방문명단에 기재했습니다. 환자와의 관계란에 저는 지인知人이라 쓰니 담당 간호사가 친구親舊로 바꿨고 즉시 감탄했고 공감했습니다. 진작 친구라 썼으면 좋았을 것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입원해 계셨다면 저는 지체없이 관계란에 친구라 기재했을 것입니다. 마침 “예수님은 나의 참 친구”라는 개신교 어린이 성가가 좋아 나눕니다. 검색하다 은총처럼 발견하고 참 기뻤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참 친구
항상 나와 함께 동행해
어디서나 어느 때나 나와 함께 해
저기 우주보다 더 넓게
푸른 바다보다 더 깊이 사랑한다 말씀하시네
내게 힘주시네”
요즘 제가 부쩍 자주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말마디는 예수님은 나의 절친이란 표현입니다. 믿는 이들 누구나가 예수님의 절친이 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믿는 모든 이가 주님의 친구이듯 믿는 이들 모두가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요한복음 말씀도 생각납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요한15,12-14)
새삼 제 작은 사랑이 부끄러워 회개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강론은 “예수 그리스도님-우리는 주님의 제자이자 친구이다-”로 정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곤궁중에 있는 모습이 제1독서의 이사야서 둘째 “주님의 종의 노래”에 나오는 주님의 종의 처지와 참 흡사합니다. 그대로 우리 친구 예수님의 심중을 반영하는 듯 하며, 새삼 우리의 신원도 이렇겠구나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예수님은 분명 이 말씀에서 자신의 신원을 참 이스라엘로 확인하셨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원도 마찬가지 똑같습니다. 답답하고 전망이 보이지 않을 때 이스라엘 대신 내 이름을 넣고, 주님의 영광을 발하는 예수님의 친구로서 자신의 고귀하고 존엄한 신분을 새롭게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종이 얼마나 곤궁한 처지인지 잘 드러납니다. 참 마음의 기복이 변화무쌍하지만 곧장 자신의 중심이신 하느님을 붙잡고 분연奮然히 일어납니다. 그대로 복음의 예수님이 이를 닮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말하였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오늘 복음은 유다가 배신할 것을 예고하는 장면이 나오고 이어 베드로의 배반이 예고되고 있습니다. 배신자 유다는 빵을 받고 바로 밖으로 나갔고 때는 밤이었다 합니다. 당신의 측근 제자들중 하나인 유다의 배신으로 예수님의 심중도 그대로 밤처럼 어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둠중에 환한 빛으로 자신의 신원을 드러냅니다. 새삼 예수님은 우리의 빛이자 구원임을 깨닫습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다.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었다. 하느님께서도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어둠속에서 찾아 낸 영광의 하느님, 구원의 하느님입니다. 문득 수도원 정문 바위판에 새겨진 “모든 일에 있어 하느님께 영광”(성규57,9)이란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모토가 생각납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의 영광이 되고 예수님은 하느님의 영광이 된 것처럼 우리 역시 그러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자주 되뇌어 보는 말마디가 있습니다.
“하느님 그대의 자랑이듯 그대 하느님의 자랑이어라.”
“하느님 그대의 영광이듯 그대 하느님의 영광이어라.”
얼마나 멋집니까! 예수님이 바로 그러했고 예수님의 친구인 우리가 바로 그러합니다. 유다의 배신에 이어 베드로의 호언장담이 뒤따르지만 예수님은 세 번이나 그가 자신을 배반할 것을 예고합니다. 유다와 베드로는 배신의 가능성을 지닌 우리를 부단한 회개에로 이끄는 우리의 삶에 평생 반면교사가 됩니다. 똑같이 주님을 배반했지만 유다는 자살로 파멸을 자초했고 베드로는 처절한 회개로 주님의 으뜸 수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참으로 어둡고 착잡했을 것이나 흔들림없이 영광의 빛과 힘으로 어둠을 통과해 나갑니다. 예수님의 제자이자 친구인 우리가 평생 배우고 따라야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생략된 주님의 유언같은 새계명입니다. 유다의 배신 예고와 베드로의 배반 예고 사이, 참 절묘한 자리에 위치해 있는 주님의 유언같은 말씀입니다. 바로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의 제자이자 친구인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당신의 간절한 소망이 담긴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13,34-35),
이에 한마디 덧붙인다면,
“너희가 내 친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일 것입니다. 아멘.
----------------------------------------------------
230404. 성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은 욕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시작할까 합니다. '욕' 몇 가지나 알고 계십니까? 또한 모든 나라는 욕 하는 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욕이 있습니다. 한국 사람이나 미국 사람이나 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든 그렇지 않든 모두 알고 있는 욕이 있습니다. 뭘까요?
'너 참…. 유다 같다.'
어떻게 공감하십니까? 이 말을 들으면 뭔지는 몰라도 기분이 좋아요? 나빠요? 나쁘지요. 왠지 배신자 같고, 세상에서 제일 나쁜 짓 한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오늘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깁니다. 왜 유다는 그렇게 했을까요? 유다는 예수님의 기적을 보았고,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알았습니다. 그런 그 유다가 왜 그랬을까요? 잠시 유다와 만나보겠습니다.
"나는 유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나는 그분의 기적을 보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왕이 되실 분이시라는 것을 말입니다. 이제 그분을 왕으로 모셔야겠습니다. 우선 그분을 바리사이들에게 팔게 되면 돈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바리사이들 앞에서 그분의 능력을 보이실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그분을 죽이지 못할 것입니다. 그분은 많은 이들을 살리셨기에 분명 기적을 또 일으키실 것입니다. 그렇게 바리사이들도 그분을 믿고 우리의 왕으로 인정하고 믿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나의 계획을 벌써 알고 있는 눈치입니다. 그래서 말하기도 전에 허락해 주십니다. '그 일을 하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표정이 슬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유다는 몰랐을 것입니다. 아니 누구도 몰랐을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죽어서 우리 인간을 살리려 하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유다는 나중에 알았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예수님을 이용했다는 것을 자신의 욕심에 예수님을 끼워서 맞추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예수님은 왕이 되어야 하고, 그리고 그분의 제자인 나는 부와 명예를 누려야 한다는 그런 욕심 말입니다.
예수님을 내 욕심에 끼워서 맞추어 살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이제 수난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따라갑시다. 우리의 왕이 가시는 길을 그저 따라갑시다. 몸으로 마음으로 느끼며 말입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진정한 구세주로 왕으로 모시는 길입니다.
-------------------
외로움을 떨쳐내고 싶으신가요?
외로움은 왜 우리에게 다가오는 걸까요?
주변에 친구가 없는 것도 아닌데, 우리 옆에 가족이 없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도 외로움은 원하지 않는 불청객처럼 노크도 없이 우리 마음에 찾아듭니다.
외국에서 공부할 때 들었던 어떤 신부님의 강의 내용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외로움을 밀어내고 싶으신가요? 외로움을 떨쳐내고 싶으신가요?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시도해도 외로움을 밀어내거나 떨쳐내는 것은 늘 실패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외로움은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즉 친구가 많아도, 곁에 가족들이 있어도 외로움은 늘 우리 마음 한쪽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안에 있는 외로움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외로움을 어떻게 대할지, 외로움과 내가 어떻게 지내야 할지 그것을 고민해야 합니다. 외로움을 어떻게 안아줄지 그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외로움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살아갑니다. 외로움이 오늘도 우리 마음을 노크한다면 살며시 문을 열고, 배시시 웃으며, 살짝 내가 외로운 나를 안아주세요. 내 따스함으로 나의 외로움을 안아주세요.
----------------------------------------------------
230404. 성주간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우리 가운데 한 사람>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있어
우리가 더 이상
우리일 수 없을 때
그 사람이 누군지
밝혀내기에 앞서
그 사람 있음에
함께 아파하는 겁니다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있어
우리가 더 이상
우리일 수 없을 때
벗들이 그 사람 아닌지
의심하기에 앞서
내가 그 사람 아닌지
먼저 살피는 겁니다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있어
우리가 더 이상
우리일 수 없을 때
내가 그 사람 아닐지라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지 않고
그 한 사람의 몫까지
기꺼이 품는 겁니다
다시금 우리를 이루기 위해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