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자 비문엔 5~6세기 신라 지방통치, 생활상 한눈에
1989년 3월 포항시 북구 신광면의 한마을, 밭을 갈던 농부의 눈에 큰 돌이 하나가 눈에 띄었다. 자연석 화강암에 너비 73cm, 높이 66cm 부정형의 이 돌엔 총 231자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었다.
발견자 이상운 씨는 비문 글자를 한자씩 해독해 모사본을 만든 다음 비문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 씨의 눈에 ‘갈문왕’(葛文王) ‘계미년’(癸未年) ‘내지왕’(乃智王) 같은 낱말이 눈에 들어왔다. 이 돌이 심상치 않은 자료임을 한눈에 알아챈 이 씨는 급히 행정관청에 신고했고, 이 사실이 지역 언론에 보도되면서 이 비석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비는 또 1년 전(1988년)에 발견된 울진 봉평리신라비와도 역사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돼 5~6세기 신라의 정치, 경제, 사회, 제도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 받고 있다.
1500여년 전 포항 신광면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냉수리비문의 행간(行間) 속으로 들어가 보자.
◆장수왕 남하 정책 당시엔 고구려의 영토=이 비가 발견된 신광면에 주목해보자. 신광면과 인접해 있는 흥해, 영일 지역은 신라가 동해로 진출하는데 있어 전초기지로 기능했으며, 장수왕의 남하(南下)정책 시기에는 고구려의 영향 하에 놓이기도 했다.
이런 사실은 1992년에 발견된 냉수리고분에서 잘 드러난다. 6세기 전반에 조성된 이 고분에선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흔적들이 잘 나타나있다. 고구려 토기의 대표 양식 중 하나인 ‘부뚜막형 토기’와 고구려계 무덤 양식인 ‘돌방무덤’(橫穴式石室)이 대표적이다.(냉수리고분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서 다루기로 한다.)
또 신광면은 안강, 청하, 흥해를 잇는 교통의 요지로 기능하고 있으며 특히 냉수리는 곡강천과 향산강 지류의 분수령을 이루고 있어 수상 교통과 치수(治水)에서도 요충지로 기능하고 있다.
이웃한 흥곡리에서는 80여기의 고분이 산재해 있고, 이곳에서 중요 유물들이 출토됐다. 지금은 면(面) 단위 지방 소도시로 초라하게 나아있지만 신광지역은 한 때 신라와 고구려가 국경을 마주하며 외교·군사적 긴장관계를 유지했던 곳이었다.
◆촌락에서 일어난 재산 분쟁에 대한 판결문=과연 이 비문엔 어떤 글들이 들어있을까. 24행, 231자엔 어떤 내용이 포함되었기에 국보로까지 지정되었을까. 일단 비문의 내용으로 봐서는 크게 특별한 것이 없는 것 같다.
이 지역(珍而麻村)에 절거리(節居利)라는 인물이 살았는데 어느 날 재산과 관련한 분쟁이 발생하며 비문의 내용이 시작된다. 본래 절거리는 국가에 의해 재산에 대한 권리와 상속을 인정 받았는데 이에 대해 촌민인 말추(末鄒)와 사진지(斯申支)가 이의를 제기하면서 갈등이 시작된다.
이에 대해 지도로 갈문왕(至都盧 葛文王)을 비롯한 7명의 중앙정부 유력자는 그 재산의 소유권이 절거리에게 있음을 확인하고, 그가 죽은 뒤에는 동생의 아들에게 그 권리가 상속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요즘으로 치면 공문서인 재판 판결문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소한 재산 다툼이 요지로 내용 면에서 크게 특별할 게 없어 보이지만 이 비문엔 당시 신라의 관직, 품계, 중앙과 지방과의 관계 뿐 아니라, 당시의 개인 재산 소유, 상속 문제가 처리되는 과정이 상세하게 묘사돼있다. 비문을 따라 재판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5~6세기 신라 사회의 사회상, 생활상을 상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5~6세기 신라 지방 통치 연구에 중요 자료=학자들 사이 많은 논쟁이 있지만 여러 사료들과 역사적 정황을 들여다보면 이 비는 503년(계미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비문에 분쟁 해결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지도로 갈문왕(지증왕)의 즉위, 통치 시기와 대략 일치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입하면 본문에 나오는 사부지왕은 ‘실성 마립간’(實聖 麻立干)으로, 내지왕은 ‘눌지 마립간’(訥祇麻立干)으로 비정된다.
비문에 나타난 내용을 들여다보면 첫째 개인의 재산 분쟁 때 이를 해결하는 절차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 둘째 촌주(村主), 도사(道使), 갈문왕(葛文王), 사라(斯羅), 관등 등 지방 관직 제도가 기록돼 지방 통치 조직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 셋째 신라 지방제 기원과 지방관 파견 시점을 5세기로(종전엔 6세기) 소급했다는 점, 넷째 소를 잡아 하늘의 뜻을 묻는 제천의식 등 당시 풍속이 잘 나타나 있다는 점, 다섯째 신라 초기 왕명을 다룬 율령 체제의 형태를 잘 보여준다는 점, 여섯째 국어학적으로 이두의 형성 시기와 성립 과정의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 등에서 중요한 자료로 여겨지고 있다.
현재의 관점으로 볼 때 지방에서 벌어진 개인 간 재산 분쟁에 경주의 육부(六部) 고위 관리 7명이 신라의 변방까지 달려간 과정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사실을 뒤집으면 당시(503년) 신라 사회는 지방 변방에 대해 직접 통치, 지배 기반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뜻이 된다. 신라 전체 영역에 직접적인 지배를 실현하지 못했고 왕도와 가까운 인접지역에 한하여 지방관을 파견했던 것이다.
특히 이 비는 1988년 4월에 발견된 울진 봉평리 신라비(524)와 포항 중성리신라비(441, 501)의 사이에 세워져 5~6세기 신라의 정치·경제·제도사를 들여다보는 데 중요 자료로서 평가받고 있다.
◆전제왕권 체제 완성 후 삼국 통일 과업 이뤄=신라의 중앙집권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이 비문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지증왕은 ‘왕’(王)이라는 중국식 왕호를 사용하고, 주군(州郡)제도를 시행하는 등 고대국가 통치 기반을 완성한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비문엔 그를 ‘갈문왕’(왕의 친척 어른)이라고 칭하는 등 전제왕권과는 거리가 먼 표현들이 등장하고 있다. 신라 기틀을 놓았다는 지증왕 대에도 이렇게 왕권 강화는 왕실의 숙제이자 과제였던 것이다.
비슷한 내용은 1988년에 발견된 봉평신라비에서도 발견된다. 법흥왕 524년에 울진에서 소요사태가 일어나자 경주 중앙군이 동원돼 민요(民擾)를 평정했다는 내용이다.(6부의 귀족들이 동원되고, 소를 잡아 제천의식을 지냈다는 내용까지 같다.)
중앙집권 체제의 완성은 신라 정부의 긴급한 현안이었는데, 이 전제(專制) 왕권은 법흥왕을 거쳐 진흥왕 대를 걸쳐서 비로소 완성되게 된다. 신라는 강력한 중앙집권을 완성한 후 그 기반을 바탕으로 삼국통일을 이루었던 것이다.
국보 264호 냉수리신라비.
포항 냉수리신라비-사진출처 경북매일
냉수리신라비. 사진 출처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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