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시크릿 / 손진은
중풍 걸린 늙은이가 잠든 방
밤새 얼어붙지 않으려고
추위 오소소 돋아난 딸들을 데리고
어미는 거기로 들어온다
둥근 아궁이,
그 입구엔 눈을 가리고 숨은
불씨들
온기를 보내는 재이불을
덮고 눕다
홀라당 옷이 다 벗겨진
귀여운 딸들도
노곤한 졸음에 곯아떨어져
재단사 쥐들에게
등과 가슴골을 훤하게 파인
검은 블라우스를 잘 차려입은
소녀도 있었다
블랙 시크릿,
한껏 뽐낼 거울이 없는 게 아쉬운
오골계 아가씨들
건너편엔 소가,
호수가 고인 수정 窓으로
물끄러미 이쪽을 쳐다보는 아침도
아침상엔 때 아닌 죽이 올라오는 날도 있었다
몸을 그렇게 시원하게 드러낸 블라우스를
볼 수 없던 시절이었다
ㅡ웹진 《님Nim》 2023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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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진은 시인
경북 안강 출생. 경북대학교 국문학과 및 동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1987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95 매일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시집 『눈먼 새를 다른 세상으로 풀어놓다』. 『고요 이야기』 『저 눈들을 밤의 창이라 부른다』 등
이론서 『시창작교육론』 외 8권.
금복문화상, 시와경계문학상, 대구시인협회상 등 수상
경주대 교수를 거쳐서 현재 성결대 재직. 동리목월문예창작대학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