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조던은 제 2의 줄리어스 어빙이었다.
NOWI츠키™ (홈페이지) 2004-09-20 20:51:50 | 추천 : 9 | 조회 : 1,944
이 사이트에서 나름대로 영역을 만들기 위해 어빙에 대한 칼럼을 준비해 봤습니다. 정말 준비하기 힘들더군요.
1988년 마이클 조던은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자유투 라인 덩크슛을 성공시켰습니다. 그는 이 덩크로 일약 슈퍼스타의 자리를 확실하게 굳히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이 자유투 라인 덩크가 조던 이전에도 있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줄리어스 어빙은 조던이 전 세계를 경악시키기 12년 전, 이미 자유투라인 덩크슛을 성공시켰습니다. 당시 ABA 뉴욕 네츠 소속이었던 어빙은 네 명의 경쟁자를 제치고 이 대회의 우승자가 되는 영광을 누립니다. 어빙은 자유투 라인 덩크 외에도 정말 기상천외한(초코우유 군 발명 동아리 이름이군요!!! 전 참고로 기상천외 아닙니다...ㅡㅡ;) 동작들을 많이 성공시키며 농구 역사의 한 획을 그었습니다. 어빙은 놀라운 운동능력의 소유자였을 뿐 아니라, 팀을 이끌 줄도 아는 리더였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줄리어스 어빙에 대해 알아봅시다.
줄리어스 윈필드 어빙 2세는(어빙의 본명) 1950년 2월 22일 뉴욕 주의 루즈벨트라는 곳에서 출생합니다. 그는 루즈벨트 고교 재학 시 Dr.J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어빙의 친구였던 모니커라는 사람을 어빙이 프로페서라고 부르자, 모니커는 어빙보고 닥터 제이라고 해서 붙여졌다는군요...어빙은 이후 농구코트에서 닥터가 돼서 코트를 수술시켜 버립니다.
메사추세츠 대학에 어빙은 1968년에 입학했는데, 이 당시 그는 평균 26.3점-20.2리바운드를 거두며 일약 최고의 선수로 떠오르게 됩니다. 어빙은 1971년 대학을 떠나서 ABA의 버지니아 스콰이어스에 입단하게 됩니다. 어빙이 데뷔했던 71-72 시즌, 어빙은 그 화려한 커리어의 서막을 미국 전역에 알리게 됩니다. 루키 시즌 어빙은 27.3점을 기록하고 ALL-ABA SECOND TEAM에 선정됐으며, 그 해의 신인상까지 거머쥐게 됩니다. 이런 어빙의 활약에 힘입어 버지니아 팀은 45승 39패라는 준수한 성적을 거둬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됩니다. 어빙은 플레이오프 동안 33.3득점을 올리며 역시 또 다른 전설인 릭 배리가 이끌던 뉴욕 네츠에게 동부 디비전 결승에서 무너지고 맙니다.
(여기서 ABA에 대해 아주 대략적으로 말하고 넘어가겠습니다. AMERICAN BASKETBALL ASSOCIATION의 약자인 ABA는 60년대부터 70년대까지 NBA와 경쟁하던 리그였으며, 1976년 재정난 등의 이유로 인해 NBA에 흡수 합병되게 됩니다. ABA에 소속돼 있던 팀들 중 아직까지 남아 있는 팀들은 샌안토니오 스퍼스, 인디애나 페이서스, 덴버 너게츠, 그리고 뉴저지 네츠 네 팀입니다. ABA에서 뛰던‘전설’들은 어빙을 비롯해 릭 배리, 빌리 커닝햄등이 있습니다. 현재 데니스 로드맨이 복귀했다고 하는 ABA는 과거의 ABA와 달리 NBA의 하부리그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듬해 어빙은 ABA에서 31.9득점의 맹활약 속에 득점왕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 해 어빙은 ALL-ABA FIRST TEAM에 들게 되는 영광도 차지하게 됩니다. 버지니아 스콰이어스는 어빙에게 있어서 너무 작은 규모의 팀이었습니다. 다음 시즌, 어빙은 73-74시즌을 앞두고 윌리 소저너와 함께 뉴욕 네츠(현 뉴저지 네츠)로 트레이드됩니다. 이 당시 버지니아가 어빙을 대신해 얻은 것은 조지 카터, 커미트 워싱턴 드래프트 지명권, 그리고 현금이었습니다. 어빙은 뉴욕이라는 대도시에서 (네츠와 닉스 경기자은 뉴욕 시내에 있습니다)집중 조명을 받으며 네츠를 55승 29패의 호성적으로 이끌며 플레이오프에서 버지니아, 켄터키, 유타 등을 꺾고 마침내 1974년 ABA챔피언이 됩니다. 당시 네츠에는 래리 케년, 빌리 폴츠 등의 영건들이 있었고 그들의 네츠는 리그를 지배하게 됩니다. 어빙은 27.4득점으로 다시금 득점왕을 차지하고, 어시스트 6위와 스틸, 블록슛 3위에 드는 올어라운드한 활약을 펼치며 첫 ABA MVP를 거머쥐게 됩니다. 당시 ABA에는 NBA 못지 않을 정도로 기라성같은 선수들이 많았지만, 어빙은 그들 중에서도 가히 지존의 위치에 올라섭니다. 요즘의 샤크나 던컨같이 말이죠. 그는 스몰포워드였음에도 불구하고 리그를 지배했습니다. 당시 리그는 NBA이든 ABA이든 센터가 팀의 중심이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6피트 7인치(대략 201센티미터), 210파운드의 어빙은 이를 바꿔 놓았습니다. 이것이 마이클 조던, 클라이드 드렉슬러 같은 선수들의 활약을 미리 닦아 놓은 어빙의 업적이라 할 수 있겠죠.
1975-76 시즌 ABA는 여러 문제에 봉착하며 리그의 역사를 접고 NBA에 흡수, 통합되게 됩니다. 마지막 시즌 올스타전에서 어빙은 형형색색의 공을 들고서 앞에서 언급한 자유투 라인 덩크를 성공시키면서 슬램덩크 챔피언에 오릅니다. (다시금 말하지만 조던의 자유투 라인 덩크슛은 어빙의 그것보다 더욱 활기차고 멋졌을 뿐이지, 결코 조던만의 창의력에서 나온 결과는 아닙니다) 마지막 시즌 덴버 너게츠와의 파이널에서 어빙은 역시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네츠에서의 세 시즌 동안 두 시즌을 챔피언으로 만들게 됩니다.
어빙은 ABA에서의 5시즌 동안 △세 번의 MVP와 득점왕 △2번의 우승 △세 번의 퍼스트 팀에 드는 기록을 남기며 NBA로 떠나게 됩니다.
어빙이 NBA에 합류한 76-77시즌, 네츠는 시즌이 시작되기 24시간 전, 어빙을 3백만달러에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로 이적시킵니다. 이제부터 어빙의 식서스 시절이 시작됩니다. 어빙은 식서스 이적 첫 해 겨우 21.6점(!)에 그치게 됩니다. 하지만 어빙의 위용은 NBA에서도 여전했습니다. 77년 NBA 올스타전에서 어빙은 당당히 30점, 12리바운드, 그리고 네 개의 스틸을 기록하며 올스타전 MVP에 올랐으며, 그는 시즌 내내 리그에 그의 센세이셔널함을 널리 알렸습니다. 식서스는 어빙과 함께 50승을 거두며 대서양지구 타이틀을 차지하게 됩니다. 플레이오프에서 어빙의 셀틱스는 승승장구하며 보스턴 셀틱스와 휴스턴 로케츠를 꺾고(당시는 팀이 적었던 관계로 휴스턴이 동부 컨퍼런스 소속이었음) 결승전에서 포틀랜드 트레일 블레이저스와 만나게 됩니다. 포틀랜드에는 전설의 센터, 비운의 센터인 빌 월튼이 버티고 있었고, 월튼을 앞세운 포틀랜드는 식서스에게 4-0 스윕을 거두며 그들의 첫 NBA 우승을 거머쥡니다.
당시 필라델피아 팀 수뇌부는 어빙의 능력에 감탄하여 어빙을 위한 팀을 만들게 됩니다.(현재 식서스가 앨런 아이버슨의 원맨팀이 된 것처럼 말이죠) 그 결과, 어빙의 옆에는 수비의 천재 바비 존스, 역시 수비 귀재이며 코트의 리더 모리스 칙스(현 포틀랜드 트레일 블레이저스 감독) 등의 스타들이 존재하게 됩니다. 하지만 1979년 식서스는 워스 언셀드와 얼빈 헤이즈가 이끌던 워싱턴 불리츠(현 워싱턴 위저즈)에게 무너지고 맙니다. (이 해 불리츠는 NBA정상에 오르게 됩니다) 어빙은 이 해 ALL-NBA FIRST TEAM에 이름을 올리며 우승에 대한 아쉬움을 달랩니다. 또 어빙은 35주년 기념 NBA ALL-TIME TEAM에 현역 선수로는 카림 압둘자바와 같이 오르며 그 실력을 인정받습니다.
어빙은 79-80시즌에 26.9득점을 기록하며 리그 4위에 랭크됐고, 식서스는 60승에 가까운 승리를 거두며 플레이오프에 오릅니다. 워싱턴, 애틀랜타, 그리고 루키 래리 버드가 버티던 보스턴을 물리친 식서스의 파이널 상대는 LA 레이커스였습니다. 이 파이널 시리즈는 6차전 카림 압둘 자바가 부상으로 뛰지 못하자 루키였던 매직 존슨이 센터로 뛰며 맹활약한 레이커스의 몫이었지만, 어빙은 NBA 역사에 남을 슈팅을 보여 주며 체면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바셀린 무브"라고 이름붙여진 이 레이업슛은 그야말로 어빙만이 할 수 있는 묘기였으며, 이러한 아크로바틱한 플레이가 현대 NBA의 기초가 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빙의 이 플레이에 모두가 감탄했습니다.
1980-81시즌, 어빙은 MVP에 선정되며 팀을 62승에 올려놓았고,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에 진출시킵니다. 보스턴 셀틱스와의 시리즈에서 어빙의 식서스는 3승 1패로 앞서가다가 다음 세 판을 내리 내 주면서 아쉽게 탈락하고 맙니다. 이듬해에도 어빙은 ALL-NBA FIRST TEAM에 드는 활약을 펼치며 팀을 파이널에 진출시켰지만, 레이커스에게 6차전 끝에 다시 한 번 무릎꿇게 됩니다.(보스턴 셀틱스와의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 7차전은 NBA 역사상 손꼽히는 명승부로 자리잡았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시간을 내서 올리도록 하지요.)
81-82시즌이 시작하기 전, 팀은 리그의 도미넌트 센터였던 압둘-자바를 견제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고, 당시 리그에서 잘나가는 센터였던 모지스 말론을 영입하게 됩니다. 어빙은 말론과 함께 팀을 65승으로 이끌었으며, 마침내 레이커스를 스윕하며 NBA 챔패언에 오르게 됩니다. 어빙은 개인 기록면에서도 변함없는 활약을 보이며(평균 24.5득점, 퍼스트 팀) 이후 어빙은 84년 올스타 게임에서 변함없는 기량을 선보이며 34점을 퍼붓습니다(물론 MVP는 어빙 꺼!) 84년 식서스에 입단한 찰스 바클리와 몇 시즌을 보낸 어빙은 86-87시즌을 끝으로 11년 NBA 생활을 접게 됩니다.
37세에 농구계를 떠난 줄리어스 어빙이 남긴 기록들은 실로 대단합니다. 양 리그를 합쳐서 30000점을 넘겼으며(3만점을 넘긴 선수는 압둘 자바, 말론, 조던, 그리고 체임벌린 뿐입니다. 어빙은 두 리그에서 3만점을 넘겼지만, 그래도 대단한 기록이 아닐 수 없습니다)평균 22점을 기록한 그는 1993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됩니다.
어빙에 대해 몇 마디 들어보겠습니다. 마이클 조던은“제가 어빙의 업적들을 볼 수 없었다면 제가 펼쳐보인 모든 버전들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어빙을 칭송했고, 그랜트 힐 역시“제게 있어서 어빙은 NBA의 전부로 여겨졌습니다. 어린 시절 우리들은 운동장으로 뛰어가서 어빙의 덩크를 시도했지만 흉내조차 낼 수 없었죠”라며 어빙에 대해 말했습니다.
줄리어스 어빙.
그는 기존의 농구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으며, 그가 남긴 데이터들과 움직임, 그리고 팀 리딩 능력은 그 누가 NBA에 등장한다 하여도(마이클 조던이든, 샤킬 오닐이든, 르브론 제임스이든)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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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기록들을 보면 코비 이전에 조던이 있었듯이,
조던 이전에 어빙이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조던을 보고 키우기 이전,
조던 이 어린 시절,
모든 사람이 어빙을 보며, 꿈을 키운 거죠......
첫댓글근데 어빙시절까지 본 미국 현지인들도조던을 최고라고 치는데.그건 어떻게 설명하시는지.. 미국 일러스트레이트에서 최근 모든 스포츠 분야별로 최고의 선수에 대해 설문조사를 했는데 무려 74%퍼센트의 표로 1위로 뽑혔습니다. 타 스포츠분야1위는 다들 2위와 격차가 매우 근소하구, 그 조사 결과 후 토론이나논쟁 많았
하는데 조던만큼은 워낙 2위와 압도적인 표차이로 1위를 해서, 아예 논쟁의 여지도 없었다죠.. 모든 스포츠사를 통틀어서 이렇게 현지인에게 압도적인 퍼센티지로 1위를 차지하는건 조던뿐입니다. 신격화가 아니구요.. 단지 우리가 세대적으로 조던과 많이 친숙하게이 무조건 조던이 최고라고 하는게 아니구요
제가 말하고 싶은 요지는 이겁니다...... 조던은 어빙을 보고 자라났고, 코비는 조던을 보고 자라났다, 미래의 어느 위대한 선수는 코비(업적을 남긴 리그 최고의 플레이어로 가정) 를 보고 자라날 것이고, 그의 플레이를 보고 자라날 것이다. 어린 선수가 기존의 선수를 우상으로 삼는 다는 것은, 그 선수가 당대 최고
그리고 위의 스퍼스 님이 말씀하신 투표중에........... 어빙 시절 까지 본 미국 현지인이라 그러셨는데 어빙이 70년대 초반에 나왔을텐데...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어빙 이전과 이후를 분명히 구분 할 수 있는 나이여야 하므로. 대략 55년도 생이여야 겠죠. 예를 들면
그냥 시대가 흐르고.. 시간이 흘러가면서 역사상 최고는 그때 살던 사람들의 인식속에 종인님 말처럼 무슨 연대표 처럼 바뀐다면 지금도 팰래가 최고다 ..베이비루쓰가 최고다..이런말 하는 사람이 어떻게 존재할수 있겠습니다 님 논리라면 다들 90년대때 날라다녔던 선수들을 최고라고 하겠죠..
그 이유는 이게 아닐까요???????? 역사의 차이...... 메이저리그 같은 경우는 100년이 넘었기 때문에, 30년대 선수가 나올 수 있었지만, 농구 같은 경우, 어빙 때 nba 로 통합되는등, nba 농구 자체로써의 역사가 짧기 때문에 그런 거로 생각되는데요. 메이저리그는 역사가 확고 했고, nba 독주체제의 역사는 짧았기때문에
1위인 조던 이외에는 2위부터 10위까지 70년대의 80년대 통틀어서 챔블린, 압둘자바 ..이런선두들도 근소한 차이로 순위다툼을 했죠 유독 조던만 압도적인 차이로 표받은게 90년대 선수라서 ..? 님같은 논리라면 그런 순위는 90년대..80년대..70년대.이런식으로 사람들의 기억이 가까운 순위대로 나열이 되어 있어야겠네요
한가지 더 말씀드리죠 느바 감독과 선수들에게도 직접 최고의 선수가 누구냐는 질문을 한적이 있습니다. 물론 그 대상은 70,80년대때 직점 뛰던 감독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구. 70,80년대 올드스타..현리그 스타들도 포함되어 있었죠 그질문 역시 1위는 큰 격차의 표로 조던이란 대답이 많이 나왔습니다.
2위부터는 각 선수나 감독들마다 대답이 많이 다르기도 했구, 차이도 매우 근소했구요. 이런점들은 어떻게 해석하시겠습니까? 뛰던 시대와 상관없이 그들의 대답은 2위부터는 시대별로 많이 분포되어 있섰습니다. 코비를 예로 들면 분명 코비가 지금 현리그에서 과거 조던에 비해 많이 부족한 도미넌트를 보이고 있는
예전에 20세기가 끝날때 20세기를 빛낸 스포츠선수를 주제로 여러곳에서 순위를 선정한적이 있어는데 조던은 거의 다 3위권안에 들었습니다... 이것만 봐도 조던이라는 선수가 농구뿐만 아니라 세계스포츠계에 미친 영향을 알 수 있죠... 그리고 조던이 NBA에 미친 영향력을 따라올수 있는 선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희세대들이 볼 수 없던 시대에 플레이를 했던 펠레를 축구황제라고 하지 우리시대에 믿을 수 없는 플레이를 보여준 호나우두를 축구황제라고 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리고 역대 최고의 복서로 대다수의 사람들이 알리를 뽑듯이 대다수의 사람들이 조던을 농구황제로 뽑고 있습니다...
어차피 누가 최고인지는 꼽는 사람에 따라서 달라질 수 밖에 없는 것 입니다. 하지만 조던은 리그를 지배했던 선수입니다. 쟁쟁한 선수들을 물리치고 정상에서 군림했죠. 그가 스스로 내려오기 전에 그를 쓰러뜨린 선수가 없습니다. 단지 개인기록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솔직히 인정할건 인정해야죠..조던은 신인시절에 제 2의 어빙이라는 소리를 들었고, 조던 또한 어빙을 매우 존경했었죠..그리고 글쓴분 말씀은 조던이 황제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 보다는 이 세대 사람들은 조던을 황제라고 인정하기에 현대에서 뽑은 제 1의 농구선수로는 조던이 뽑혔다는 거죠..만약 체임벌린이라던가
러셀이 현시대에 태어나서 그런 기록을 가지고 있고 조던은 까마득한 50년대 60년대 출신 선수라면 평가는 달라졌을수도 있다라는 얘기겠지요..저는 개인적으로 농구황제는 조던이지만 시대를 압도한 선수는 13년간 11회 우승에 빛나는 러셀이란 생각을 합니다..물론 그의 경기는 보지 못했지만요..
첫댓글 근데 어빙시절까지 본 미국 현지인들도조던을 최고라고 치는데.그건 어떻게 설명하시는지.. 미국 일러스트레이트에서 최근 모든 스포츠 분야별로 최고의 선수에 대해 설문조사를 했는데 무려 74%퍼센트의 표로 1위로 뽑혔습니다. 타 스포츠분야1위는 다들 2위와 격차가 매우 근소하구, 그 조사 결과 후 토론이나논쟁 많았
하는데 조던만큼은 워낙 2위와 압도적인 표차이로 1위를 해서, 아예 논쟁의 여지도 없었다죠.. 모든 스포츠사를 통틀어서 이렇게 현지인에게 압도적인 퍼센티지로 1위를 차지하는건 조던뿐입니다. 신격화가 아니구요.. 단지 우리가 세대적으로 조던과 많이 친숙하게이 무조건 조던이 최고라고 하는게 아니구요
어빙 한손으로 하는 더블클러치 진짜 극강
제가 말하고 싶은 요지는 이겁니다...... 조던은 어빙을 보고 자라났고, 코비는 조던을 보고 자라났다, 미래의 어느 위대한 선수는 코비(업적을 남긴 리그 최고의 플레이어로 가정) 를 보고 자라날 것이고, 그의 플레이를 보고 자라날 것이다. 어린 선수가 기존의 선수를 우상으로 삼는 다는 것은, 그 선수가 당대 최고
인물이라는 것이고, 그런 당대 최고로 평가받는 인물도, 계보를 이어 나갈 것이다. 어빙-조던-르브론,혹은 코비- ______ 이런 겁니다.
그리고 위의 스퍼스 님이 말씀하신 투표중에........... 어빙 시절 까지 본 미국 현지인이라 그러셨는데 어빙이 70년대 초반에 나왔을텐데...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어빙 이전과 이후를 분명히 구분 할 수 있는 나이여야 하므로. 대략 55년도 생이여야 겠죠. 예를 들면
13살 때, 어빙 이전의 농구를 보다가, 15살때, 20살인 어빙이 등장하고........ 그 후 때부터 , 17년간 어빙의 농구를 쭉 본다고 가정하면, 55년 생이어야 하고. 그럼 50살이 되야 하는데...... 그런 사람들이 투표에 많이 참여 했을 까요?
미국 성인들을 대상으로 투표한거구 nba외에는 타 스포츠는 70년대는 물론 야구같은 경우는 30년대 선수들도 1위에 뽑히기도 했습니다. ㅡ.ㅡ;; 단지 조던이 뛰던 시대가 현재와 가깝기 때문에 그런 압도적인 표를 받은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세월이 20년이 흘러도 코비가 nba 역사상 최고였다고 하는 사람은 없을겁니다. 왜냐면 20년이 흘러도 사람들은 코비가 뛰던당시 그가 보여줬던 도미넌트가 느바 역사 최고라고 하기엔 부족했다는걸 바보가 아닌이상 알기 때문이죠 .ㅡ.ㅡ
그냥 시대가 흐르고.. 시간이 흘러가면서 역사상 최고는 그때 살던 사람들의 인식속에 종인님 말처럼 무슨 연대표 처럼 바뀐다면 지금도 팰래가 최고다 ..베이비루쓰가 최고다..이런말 하는 사람이 어떻게 존재할수 있겠습니다 님 논리라면 다들 90년대때 날라다녔던 선수들을 최고라고 하겠죠..
그 이유는 이게 아닐까요???????? 역사의 차이...... 메이저리그 같은 경우는 100년이 넘었기 때문에, 30년대 선수가 나올 수 있었지만, 농구 같은 경우, 어빙 때 nba 로 통합되는등, nba 농구 자체로써의 역사가 짧기 때문에 그런 거로 생각되는데요. 메이저리그는 역사가 확고 했고, nba 독주체제의 역사는 짧았기때문에
메이저리그는 30년대 선수가 나온거 같은데요- 베이브 루스 겠죠 뭐
1위인 조던 이외에는 2위부터 10위까지 70년대의 80년대 통틀어서 챔블린, 압둘자바 ..이런선두들도 근소한 차이로 순위다툼을 했죠 유독 조던만 압도적인 차이로 표받은게 90년대 선수라서 ..? 님같은 논리라면 그런 순위는 90년대..80년대..70년대.이런식으로 사람들의 기억이 가까운 순위대로 나열이 되어 있어야겠네요
한가지 더 말씀드리죠 느바 감독과 선수들에게도 직접 최고의 선수가 누구냐는 질문을 한적이 있습니다. 물론 그 대상은 70,80년대때 직점 뛰던 감독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구. 70,80년대 올드스타..현리그 스타들도 포함되어 있었죠 그질문 역시 1위는 큰 격차의 표로 조던이란 대답이 많이 나왔습니다.
2위부터는 각 선수나 감독들마다 대답이 많이 다르기도 했구, 차이도 매우 근소했구요. 이런점들은 어떻게 해석하시겠습니까? 뛰던 시대와 상관없이 그들의 대답은 2위부터는 시대별로 많이 분포되어 있섰습니다. 코비를 예로 들면 분명 코비가 지금 현리그에서 과거 조던에 비해 많이 부족한 도미넌트를 보이고 있는
데 타선수간의 경쟁관계나 리그 장악력,.그런점들은 다 상관없이 그냥 시간이 흘러가면 코비를 더 많이 본 세대는 나중에 코비가 최고라고 할거다..라는 말씀은 님이 보기에도 좀 설득력이 떨어지지 않습니까?
코비는 지금의 코비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 12년 후 많은 업적을 남겼을 코비. 즉 리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선수를 지칭 한 겁니다
코비는 지금의 코비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 12년 후 많은 업적을 남겼을 코비. 즉 리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선수를 지칭 한 겁니다
제가 보기에는 김종인님이 좋은 글은 써주신것 같은데요..단지 조던전에 조던도 어빙같은 선수를 보고 자랐다고 한느것인데..조던을 폄하는것도 나쁜게 말하는것도 아닌데..스퍼스님은 좀 너무 한쪽으로만 보시네요..
조던이 좀더 사람들 속에 각인이 잡힌것은 3년연속 우승을 2번이나 해서 그런거 아닌가요? 조던이 시인시절 자신의 우상은 어빙이고 어빙을 따라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했지요..코비도 마찬가지 일거고 리브론도 마찬가지 일겁니다..좋은 글 잘봤습니다...
김종인님 억지좀 부리지 맙시다....조던은 농구 황제 입니다...
예전에 20세기가 끝날때 20세기를 빛낸 스포츠선수를 주제로 여러곳에서 순위를 선정한적이 있어는데 조던은 거의 다 3위권안에 들었습니다... 이것만 봐도 조던이라는 선수가 농구뿐만 아니라 세계스포츠계에 미친 영향을 알 수 있죠... 그리고 조던이 NBA에 미친 영향력을 따라올수 있는 선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희세대들이 볼 수 없던 시대에 플레이를 했던 펠레를 축구황제라고 하지 우리시대에 믿을 수 없는 플레이를 보여준 호나우두를 축구황제라고 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리고 역대 최고의 복서로 대다수의 사람들이 알리를 뽑듯이 대다수의 사람들이 조던을 농구황제로 뽑고 있습니다...
스퍼스 v3님 말씀 동감.
농구에 별 관심없는 주위의 어른들을 봐도 어빙이나 체임벌린을 아는 사람들은 없어도 조던을 모르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이건 단순히 저희세대가 조던을보고 자라서 최고라고 하는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누가 최고인지는 꼽는 사람에 따라서 달라질 수 밖에 없는 것 입니다. 하지만 조던은 리그를 지배했던 선수입니다. 쟁쟁한 선수들을 물리치고 정상에서 군림했죠. 그가 스스로 내려오기 전에 그를 쓰러뜨린 선수가 없습니다. 단지 개인기록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솔직히 인정할건 인정해야죠..조던은 신인시절에 제 2의 어빙이라는 소리를 들었고, 조던 또한 어빙을 매우 존경했었죠..그리고 글쓴분 말씀은 조던이 황제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 보다는 이 세대 사람들은 조던을 황제라고 인정하기에 현대에서 뽑은 제 1의 농구선수로는 조던이 뽑혔다는 거죠..만약 체임벌린이라던가
러셀이 현시대에 태어나서 그런 기록을 가지고 있고 조던은 까마득한 50년대 60년대 출신 선수라면 평가는 달라졌을수도 있다라는 얘기겠지요..저는 개인적으로 농구황제는 조던이지만 시대를 압도한 선수는 13년간 11회 우승에 빛나는 러셀이란 생각을 합니다..물론 그의 경기는 보지 못했지만요..
그리고 베이브 루스야 우리나라에서 마찬가지로 위인전에 종종 등장하는 인물이니 MLB를 즐기는 사람들로는 루스가 최강이였구나..그런 생각을 하겠죠..우리나라에서도 루스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체임벌린이나 러셀이나 어빙을 모르는 사람은 매우 많습니다.
하긴 초창기의 메이져 리그와 nba의 인지도 서로 달랐고, 매직-버드가 쌓아 놓은 리그의 미국 내 위상에 조던이 올라탄 모양이니... 듣고 보니 그렇네요. 중심 못 잡는군...
성공이 일어날지는 10년후에 지켜봐야죠..93년도 바클리 타임머신 타고 돌아와라 nba흥행성공과 우승반지를 위해서~~~!!
어빙 대단한 선수죠!! 특히 이 글을 읽고 더욱 대단 하다고 생각 했음!! 지금의 제임스 그거 보다도 대단 했네여!!
결론은 조던은 가장 유명하고 인기가 많은 선수란게 맞는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