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동석동호회 단톡방에서]
[채동석회장님제공]
● 졸업식 노래의 탄생 - 1946년 6월 6일
해방된지 겨우 1년.
중앙청에 성조기가 나부끼고 미군 육군 중장이
38도선 이하의 조선 땅을 통치하던 무렵, 군정청 편수국장 직함을
갖고 있던 외솔 최현배가 한 아동문학가를 찾았다.
“여보 석동. 노래 하나 지어 주시게.”
석동이라는 아호를 가진 이 사람의 이름은 윤석중(尹石重)이었다.
석동이라는 아호는 어느 신문에선가 그를 소개하면서 윤석동(童)이라고 잘못 쓴 걸 보고 춘원 이광수가
“석동이라는 아호가 좋네. 누가 지어 준 거요?”
라고 칭찬하면서 그대로 아호가 돼 버렸다고 한다..
“졸업식 때 쓸 노래가 마땅하지 않소. 그래서 외국 곡을 이것저것 가져다 쓰는 형편이니 석동이 하나 지어 줘야겠소.”
윤석중은 해방 직후
“새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 잠꾸러기 없는 나라 우리 나라 좋은 나라”
를 작사하여 해방된 조선의 어린이들이 목청껏 ‘새나라 우리나라’를 부르게 해 주었던 그 사람이었다.
최현배가 보기에 일제 때부터 동요 작사가로 이름을 날린 윤석중은 졸업식 노래를 만들 최적임자였을 것이다.
윤석중이 누구시더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분들을 위해서 노래 몇 개만 흥얼거려 보겠다.
“달 밝은 밤에 기러기들이.....”
“엄마 앞에서 짝자꿍 아빠 앞에서 짝자꿍”
“기찻길 옆 오막살이 아기 아기 잘도 잔다.”
그리고 어린이날만 되면 울려퍼지는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이쯤되면 아아아 하면서 고개를 상하로 크게 흔드는 분이 많으실 것이다.
최현배가 졸업식 노래를 의뢰한 게 1946년 6월 5일이었다.
최현배의 부탁을 받자마자 윤석중의 머리 속에는 시상(詩想)이 번득인 것 같다.
원래 악상(樂想)이나 시상은 배차 시간 쫓기는 기사가 모는 버스 같아서 제때 손 들지 않으면 휙 지나가 버리는 법.
윤석중은 그날이 가기 전에 가사를 완성한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 물려받은 책으로 공부를 하며 우리들도 언니 뒤를 따르렵니다.”
윤석중이 또 급히 찾은 것은 작곡가 정순철이었다.
바로 <새나라의 어린이> <엄마 앞에서 짝짜꿍>의 작곡가.
정순철 작곡가의 아드님의 회고에 따르면 정순철 또한 가사를 받고 악상이 번개같이 스치고 지나간 것 같다.
허겁지겁 피아노를 두들기다가 악보에 콩나물을 급하게 그려 뛰어나가던 모습을 회상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성미 급한 작사가와 작곡가는 설렁탕집에서 만났다.
“비이이잋 나는 조오올업장을 타신 언니께~~~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원래 흥에 겨운 예술가들의 얼굴 두께는 빙산처럼 두터워지는 법.
설렁탕집에서 때아닌 고성방가는
“거 조용히 합시다!”
라는 지청구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졸업식 노래는 그렇게 엉겁결에 탄생했다. 하지만 그 가사와 가락은 결코 엉성하지 않았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아름 선사합니다. 물려받은 책으로 공부를 하며 우리들도 언니 뒤를 따르렵니다.”
하는 1절은 교과서도 제대로 없어 선배들 것을 물려받아 공부해야 했던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그래서 요즘 시대와는 좀 맞지 않는다)
그런데 뭉클한 것은 2절이고, 사실 2절을 부를 때 졸업식은 눈물바다가 되기 일쑤였다.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
그리고 또 나오는 ‘새나라’
”부지런히 더 배우고 얼른 자라서 새 나라의 새 일꾼이 되겠습니다.”
3절은 졸업이 아닌 다짐의 합창.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우리나라 짊어지고 나갈 우리들 강물이 바다에서 다시 만나듯 우리들도 이 다음에 다시 만나세.”
당장 편수국 전 직원들 앞에서 이 노래가 처음 불리워졌고 열화와 같은 호응을 거쳐 졸업식 노래로 공표된 것이 1946년 6월 6일이었다.
이 노래는 역시 커다란 환영을 받으며 각급학교에서 불리워졌다.
때아닌 돈벼락을 맞은 것이 당시로서는 몇 집 안되던 꽃집들이라고 한다.
각급 학교 졸업 때마다 꽃다발 주문 홍수가 일어난 것이다.
원래 윤석중의 의도는 “마음의 꽃다발”이었다고 하는데.....
그런데 이 윤석중 작사가와 정순철 작곡가는 한국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크나큰 상처를 입거나 아예 실종되고 말았다.
윤석중의 아버지와 새어머니, 그리고 이복동생은 충남 서산에 살고 있었는데 새어머니 쪽이 좌익과 관련되었다고 한다.
전쟁 와중에 벌어진 피의 학살극에 윤석중의 가족은 몰살당하고 말았다.
윤석중이 원래 서산으로 피난오려던 것을 아버지가
“전쟁 통에는 떨어져 있어야 누구든 산다.”
고 만류했다고 하는데 그것이 천행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작곡가 정순철의 불행은 본인에게 찾아왔다.
다 피난간 학교(성신여고)를 홀로 지키다가 거의 서울이 수복되던 9월 28일경 인민군에게 납북되고 만 것이다.
이후 그의 생사는 알려지지 않는다.
해월 최시형의 외손자이자 의암 손병희의 사위였던 그의 제삿날은 그래서 수복 다음날인 9월 29일이 됐다.
후일 막사이사이상을 받은 윤석중은 이렇게 연설한다.
“정말로 국경이 없는 것은 동심인 줄 압니다. 동심이란 무엇입니까? 인간의 본심입니다. 인간의 양심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동물이나 목성하고도 자유자재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정을 나눌 수 있는 것이 곧 동심입니다.”
간악한 일제 통치를 받을 제에도, 해방의 혼란과 설렘 와중에서도,
자신의 일가족을 학살하고 절친한 작곡가의 생사를 가린 전쟁의 공포 속에서도,
가난의 무게가 전 국민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을 때에도
윤석중은 그 어둠을 밝힐 빛으로 ‘동심’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졸업식 노래>는 그 중 하나였다.
요즘 졸업식에서는 ‘올드랭사인’을 많이 부른다고 알고 있다.
돌이켜보면 1988년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에도 “오랫 동안 사귀었던.....”을 불렀다.
왜 그렇게 바뀌었을까. 어느 철없는 문교부 당국자가
“요즘 세상에 누가 교과서를 물려 주나? 바꿔!”
한 것인지 아니면 가사가 초딩스러워서 목소리 굵어진 청소년들이 부르기엔 좀 어색해서 그런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정히 시대에 맞지 않는다면 가사를 조금 바꿔서라도 우리나라만의 졸업식 노래로 가꿔 갈 수도 있지 않을까.
제대로 교사(校舍) 하나 갖추지 못한 천막 학교에서 손을 갈퀴로 삼아 일하면서도 자식만은 학교에 보내려던 퀭한 눈의 부모 앞에서 얼키설키 만든 꽃다발을 든 졸업생들이
“잘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
를 부르다가 끝내 엉엉 울고
“냇물이 바다에서 서로 만나듯”
을 젖은 목소리로 함께 하던 졸업식 풍경은 수 세대에 걸쳐 우리 나라 곳곳에서 행해진 살가운 역사의 한 페이지였는데......
윤석중과 정순철 두 사람이 설렁탕집에서 부르며 만든 노래.
흘낏 떠올려도 아련한 추억이 슬라이드처럼 흘러가는 노래 <졸업식 노래>가 1946년 6월 6일 우리 곁으로 왔다.
ㅡ 김형민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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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쉬어가기>
*아내의 나이
거울을 볼때마다 아내는 묻는다
"여보 나 몇살처럼 보여?"
하루 이틀도 아니고 끊임없는 이질문에는 아무리 잘 대답해도 본전이다.
왜냐면 나이를 줄여서 말하면 아부라고 할것이고
제나이를 이야기하면 삐질것이기 때문이다.
얼마전에도 물어보기에 이렇게 대답해줬다
"응. 피부는 25살. 주름은 27살. 몸매는 한 23살같아"
순식간에 아내의 입이 귀에 걸린다
"아니,내가 그렇게 어려보여? 고마워."
" 내가 그렇게 어리니까....나보다 두살 더 많은
당신 피부는 27살. 주름은 29살. 몸매는 25살..오빠가 되게되네. ㅎ
속으로 나는 말했다
"아니 잠깐만...그걸 다 더해야 되는데...하하하하하"
#주의사항
잘못 따라하신다면 한달동안 라면만 먹어야 하는 재앙에 처해질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칭찬받아 마땅한 존재가 되고자하는 욕망을 갖고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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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초등학생의 한국 수학여행*
어느 가을날, 불국사 앞뜰은 관광객으로 붐비고 있었다.
그많은 사람들 중 내눈에 띄는 것은 초등학교 어린이들의 행렬이었다.
초등학교 교장이란 직업의식이 이렇게 작용하는가 싶었다.
불국사 앞에는 수학여행단으로
보이는 일본 어린이 두 학급과 우리나라 어린이 네 학급 정도가 나란히 모여 있었다.
가만히 두 나라 어린이들이 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일본 어린이들은 질서정연한 반면, 우리나라 어린이들은 김밥, 과자 등을 서로에게 던지고 피하느라 온통 수라장이었다.
어머니가 정성껏 싸준 김밥을 돌멩이처럼 던지고 장난하는 것도 그렇지만
던져서 흩어진 김밥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걱정이 되었다.
그 때 일본 어린이 한 명이 일어나서
"선생님 저 아이들이 왜 저렇게 야단을하는 거예요?"라고 물었다.
선생님은 곁에 있던 내가 일본말을 알아 들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일부러 들으라고 한 말인지
"응, 조선은 옛날 우리의 하인과 같은 나라였는데 지금 조금 잘 살게 되었다고 저 모양이구나. 하는 짓을 보니 저러다가 다시 우리 하인이 되고 말 것 같구나." 라고 했다.
일본 선생님의 얼굴은 진지했다.
순간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진땀을 느꼈다.
우리나라가 다시 일본의 압박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을 아이들 앞에서 저렇게 당당하게 하다니, 어쩜 지금도 저들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우리나라를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서글픔과 걱정이 뒤섞인 채 어린이들을 계속 지켜보았다.
역시 걱정했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우리나라 선생님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아이들을 데리고 그 자리를 떠났다.
아이들이 떠난 자리는
김밥과 과자들로 온통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아이들을 나무라지도 않더니, 어쩜 저렇게 더럽혀진 모습을 보고도 그냥 떠날 수 잇단 말인가?" 하는 원망이 앞섰다.
그렇지만, "당장 청소를 하고 떠나라"고 그 선생님을 꾸짖을 용기는 나지 않았다.
일본 아이들은 선생님의 지시가 없었는데도 음식 부스러기들을 주어서
쓰레기통에 버리기 시작했다.
나는 김밥덩이를 줍는 일본 아이에게 "저 아이들은 함부로 버리고도 그냥 갔는데, 왜 너희들이 이렇게 치우느냐?" 라고 물었다.
그 아이는 내가 일본말로 묻는 것이 이상하였던지 힐끔 쳐다보며 "모두가 이웃이 아닙니까? 우리가 버린 것이 아니라도 더러운 것을 줍는 것이 뭐가 이상합니까?" 라며 되물었다.
나는 너무나 창피해서 귀 밑까지 빨개졌다.
"우리가 이대로 교육하다가는 큰일 나겠군."
혼잣말을 하며 쓰디쓴 얼굴이 됐다.
''하인 같았던 나라---.
다시 우리 하인이 될 것 같구나." 라는 일본 교사의 말이 귓가를 맴돌면서
"왱왱" 하는 불자동차 소리를
내고 있었다.
우리는 잊었는가?
1945년 일본사람들이 패전해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100년후에 다시오겠다"고 하며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뜻이 무엇이겠는가?
🏓2023.3.4일 가슴이 섬뜩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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