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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식회장님의 카톡에서]
인간 노무현~
진보, 보수 모두가 읽어보시길...
노무현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남긴 글
유서입니다. 마음을 울립니다.
★연일 제 가족과 측근들에 대한 의혹으로
나라가 어지럽습니다.
부끄럽고 민망합니다.
-- 몰랐다고, 모함이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지냐고 따져 묻지도 않겠습니다.
'노무현'답게 하겠습니다
-- 잘못이 있으면 누구든 벌을 받아야 하며,
전직 대통령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 다만 이제 제가 할 선택으로 상처받을 이들을 떠올리면,
마음이 천근만근 무겁습니다.
-- 어떤 꾸중과 질책도 달게 받겠습니다.
-- 그 서운하고 노여운 마음,
부디 저의 마지막 진심을 담은 이 편지로
조금이라도 달래지기를 빕니다.
-- 누군가 저의 인생을 '싸움'이라는 한마디로 정의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 정말로, 싸움의 연속이었습니다.
-- 정치인이 되기 전 인간 '노무현'의 삶도 그랬습니다.
-- 그 최초의 상대는 '가난'이라는 녀석이었던 것 같습니다.
--'가난'은 단지 불편한게 아니라,
사람을 비겁하고 치졸하게 만드는 고약한 놈이었습니다.
-- 어쩌다 먹을거리가 하나 생기면, 형제들이 볼새라
저만의 비밀 장소에 감춰두고 먹던 기억이 납니다.
-- 어린 마음에도 그게 옳지 않다는 걸 알았지만,
너무나 배가 고파 나눠 먹을 엄두를 낼 수 없었습니다.
-- 집이 풍족하여, 화기애애 식탁에 둘러 앉아.. 음식을 나눠
먹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어린 저의 꿈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 그 가난과의 긴 싸움을 끝냈을 때,
저는 어느새 처자식을 거느린 한 집안의 가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 세무 전문 변호사로 돈을 좀 만지고 있었습니다.
-- 무엇보다 기뻤던 건, 제 아이들이 어린 날의 저처럼
먹을걸 숨겨두고 먹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 양보해라, 나눠 먹어라, 힘주어 말할 수 있게 됐습니다.
-- 성공한 사람들과 어울려 요트도 타고 멋도 좀 부렸습니다.
-- 안사람은 그 시절을 가장 행복했던 시간으로 종종 추억하곤
합니다.
-- 정말로 이제 행복할 일만 남은 것 같았습니다.
--- 그 행복은... 그러나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 부끄럽게도, 저는 그 나이가 되도록
사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 눈앞에서 나와 내 가족의 목을 죄는 가난과 싸우느라...
그럴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 그러나 점점 그런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 몸은 풍요와 여유에 취해갔지만,
눈에는 자꾸 그런 것들이 밟히기 시작했습니다.
-- 곧, 세상엔 수없이 많은.. ‘노무현’들이 있음을 알게 됐습니다.
--- 죽어라 이 악물고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래서 먹을걸 숨길 수 밖에 없는 건.. 예전의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 왜 그럴까.
왜 나라는 성장하는데, 가난한 이들은 왜 학교에조차 갈수 없는
가난을 자식에게까지 대물림하게 되는가.
--- 점차 사회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경제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왜곡된 역사가, 도처에 널린 반칙과 특권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 뒤늦은 깨달음은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 그것들을 외면하고,
저 혼자 소시민적 행복을 느끼며 살 수는 없었습니다.
---그 후 저의 삶은 아시는 대로입니다.
--- 인권변호사가 되었고, 국회의원이 되었고,
청문회에 나가 이름도 얻었고, 그리고,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 늘 예전의 그 마음을 잊지 않으려 했습니다.
--- 돈이 없고 힘이 없어 세상으로부터 매맞고 짓밟히는 이들
편에 서고자 했습니다.
-- 그 눈물을 멈추게 할 힘이 내게 없다면,
최소한 내 손등으로 닦아주기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모두들 ‘대세’니 ‘주류’니 하는 것에 우루루 몰려갈 때,
원칙을 지키며 버티려 했습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비웃음 살때도,
그 바위가 잘못된 것이라면 내 몸이 박살나더라도
부딪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그래야 그 바위가 잘못되었다는 표시라도 나지 않겠습니까.
---저를 굉장한 '싸움꾼'처럼 보는 시선이 있습니다.
-- 저도 그랬으면 좋았겠다 싶습니다.
-- 하지만 저는,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겁도 많고 무서운 것도 많은,
그런 보통 사람입니다.
--- '3당합당'에 반대하고 '재야의 길'을 선택하며 큰소리는 쳤지만,
사실은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 따논 당상이라던 '종로'를 버리고 부산으로 내려갈 때도,
대통령 당선 확정을 통보받고도, 다리가 떨려 의자에서 일어나지
못할만큼 두려웠습니다.
--- 제가 대담한 강골이었다면 안 그랬을 것입니다.
-- 그렇게 겁이 나도, 그런 선택들을 한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 한번 만들어보고 싶어서였습니다.
--힘 없다고 짓밟히지 않는 세상,
한번 가난하면 죽을 때까지 가난한 게 아니라 열심히 노력하면
일어날 수 있는 세상,
명백한 부정에 타협하고 고개 숙여야 살아남는 세상이 아니라
개인의 양심에 따라 '이의 있습니다.!' 라고 외칠 수 있는 세상에
내 아이들을 살게 해 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 아무 것도 아닌 저를 대통령으로 뽑아주신 국민의 뜻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 노무현은 짓밟혀도 됩니다. 무너져도 됩니다.
-- 하지만 노무현을 지지했던 이들과,
그들이 꾼 꿈은 짓밟히고 무너져선, 안 됩니다.
---- 그 꿈은 이 나라의 미래입니다.
-- 우리의 아이들 뿐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그 아이들의 아이들도
살아가야할 나라입니다.
-- 언제까지 대결과 분열을 가르칠 것입니까.
--- 언제까지 증오와 반목을 가르칠 것입니까.
-- 언제까지 특권과 반칙을 가르칠 것입니까.
-- 사실은 모두가 불안하고, 또 불행하지 않습니까.
--- 할아버지가 된지 오래지 않습니다.
-- 자식들보다 더 귀엽습니다.
--- 그애들이 자라나고 시집도 가는 걸 왜 보고싶지 않겠습니까.
- 하지만 저는, 늘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구분해 왔습니다.
-- 변호사 시절의 안락한 삶보다
눈 앞의 부조리에 맞서는 것이,
국회의원 한번 더 하는 것보다.. 지역주의 보스정치에 저항하는 것이,
-- 대통령 되는 것보다 원칙을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 2002년, 저와 여러분이 함께 꾸었던 꿈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지키는 건.. 이 길 뿐입니다.
-- 너무 슬퍼하거나 미안해하지 않기 바랍니다.
--- 누구를 원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저의 운명입니다.
---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이 아니겠습니까.
-- 이제 작별인사 하겠습니다.
-- 대통령이었음보다,
이 아름다운 나라의 국민이었음이
더 큰 영광이었습니다.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사랑합니다.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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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시행됩니다
경찰 5천명 투입하여 집중단속 예정!
*횡단보도 정지선을 넘으면, 6만원 범칙금에 벌점 10점
*혈중알콜농도 0.2%이상
→최고 1천만원.
*혈중알콜농도 0.1%이상
→최고 5백만원.
*혈중알콜농도 0.05%이상
→최고 3백만원.
*속도위반(60km 초과)→12만원(60점)
*속도위반(40km 초과) →9만원(30점)
*속도위반(20km 초과)→6만원(15점)
*속도위반(20km이하) → 3만원.
*중앙선 침범 →6만원(30점)
*신호위반
→6만원 (15점)
*운전중 휴대전화
→6만원(15점)
*횡단보도 정지선 위반 →6만원(10점)
*유턴위반→ (6만원)
*주정차 위반 →(4만원)
*교차로 꼬리물기→ (4만원)
*안전띠 미착용→ (3만원)
*끼어들기 →(3만원)
*보행자 신호위반→ (3만원)
*보행자 무단횡단 →(3만원)
*경범죄업무방해 (16만원)
*장난전화ㆍ스토킹 (8만원)
*무전취식 -- (5만원)
*노상방뇨 -- (5만원)
*음주소란 -- (5만원)
*꽁초투기 -- (3만원)
*공무집행방해
→최고 1천만원
(5년 이하의 징역)
*경찰서ㆍ지구대 주취소란 → (최고 60만원)
*112 허위신고
→ (최고 60만)
잘 숙지하셔서,
손해보는 일이 없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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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石公 이야기🌲
한나라 유방과
초나라 항우가
천하의 패권을 다투며
싸웠다는 초한지에는
당시의 뛰어난 전략가
장량( 장자방)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휘황하게 달이 밝은
추구월 보름달 밤 개명산에서
옥퉁수를 슬피 불어
항우의 정예군
강동의 8천 군사를
흩어 버린 인물로 유명하다.
장량이 어린 시절
서당에 다녀오는 길에
시냇물을 건너는 다리 위에서
한 신비로운 노인을 만난다.
그는 장량이 보는 가운데
다리위에서 짚신을
시냇물에 일부러 빠뜨린다.
장량은 그 즉시
시냇물로 뛰어 내려가
그 짚신을 주어다
공손히 그 노인에게 바친다.
그 노인은 또다시
짚신을 물에다 빠뜨린다.
장량은 또다시
시냇물로 뛰어 내려가
짚신을 주어다 그 노인에게
공손하게 바치는데,
그러자 그 노인은 또다시
짚신을 시냇물에 빠뜨린다.
장량은
이번에도 아무 불평 없이
시냇물로 뛰어 내려가
짚신을 주어다
그 노인에게 바친다.
그러자 그 노인은
‘그놈, 쓸만하군!!’ 하더니
장량에게
‘내일 아침 뒷산
느티나무 아래로 오라!!
내 너에게 줄 것이 있다’
하더니 어디론지
가 사라져 버렸다.
장량은
어른을 만나는데
어른 보다 늦게 가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
새벽에
그 느티나무 아래로 갔는데,
그 노인은 벌써
거기에서 기다리시며 이놈!!
어른을 만나는데
어른보다 늦게 오면 되겠나?
하고 호통을 치시며
내일 아침 다시 오라고 하고
하며 사라졌다.
장량은
그 이튿날은 밤중에
그 느티나무 아래로 갔는데,
그 노인은 벌써
그곳에 와 있으면서
장량에게
이놈!! 어른을 만나는데
어른보다 늦게 오면 되겠나?
하고 또 호통을 치고
내일 아침
다시 오라고 호통을 쳤다.
그 다음날 장량은
아예 초저녁부터
그 느티나무 아래에
가서 기다렸다.
그러자 몇 시진 후
그 노인이 나타나
오늘은 일찍 왔군!! 하더니
장량에게
한 권의 책을 주며
다음과 같은 말씀을 했다.
이 책은
내가 일평생 동안 연구하여
治國平天下에
대하여 쓴 책이다.
이 책을 열심히 읽어
훌륭한 인물을 잘 보필하여
그가 천하통일을 하도록
도와드려라.
그리고
그를 황제로 만든 후
권력을 차지할 생각을 하지 말고
표연히 사라 지거라!!
만약 네가 권력을
차지하려 하다가는
큰 화를 입게 된다!!
나는 여태까지
이 책을 줄 사람을
찾지 못했었는데
이제야 책의 임자를
찾을 수 있어 마음이 놓인다.
네가 천하를 통일한 후
심산궁곡으로 은거한 후
너의 집 뜰을 보아라.
그곳에 누런 바위가
하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다!!
라고 한 후
그 노인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장량은
그 노인이 사라진 쪽을 향해
수십번 머리를 조아렸다.
그 노인의
이름은 아무도 모르지만
누런 돌이라 하였기에
후세인들은 그를
황석공(黃石公)이라 부른다.
장량은
그 책을 열심히 탐독한 후,
한나라 유방을 도와
천하통일의
제1공신이 되었으나,
노인의 말에 따라
심산유곡으로 사라지고 만다.
초한지에는 여기까지만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그 심산유곡이
여러분들이
여행을 많이 다녀온
장가계라 합니다.
그곳 사람들은
그 때 장량이 사라진 뒤
정착한 곳이
바로 장가계라는 것을
열심히 설명하고 자랑한다.
그리고 장량이
그곳에 오기 전에는
그곳 사람들이
벼농사 짓는 법을 몰랐었는데
장량이
그곳 사람들에게
모내기 등 벼농사 법을
알려 주었다고 한다.
그곳에는
거의 수직의 바위산이 있고
그 정상에는
산소 비슷하게 생긴
부분이 보이는데
그곳이 바로
장량의 산소라는 것이다.
원래 장가계는
대흥시였는데
장량을 기리기 위해 도시명을
장가계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역사책에는
장량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라고만 되어 있지
장가계로 갔다는
내용은 전혀 없다.
또한 天涯
깎아지른 바위 절벽 위에
장량의 산소를
만들었다는 것도
전혀 신빙성이 없다.
지금 같으면
헬리콥터로 시신을 운반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BC 200년 경에
헬리콥터가 있었을리 만무하다.
장량이
장가계에 가서 살았다는 사실,
깎아지른 바위산 꼭대기에
장량의 산소를
만들었다는 사실 등은
다 그곳 사람들이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만들어 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된다.
하여튼 장량이 은거한 후
뜰 앞을 보니
누런 바위가 하나 있었고
장량은
그 바위를
자기의 스승이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며
매일 절을 올렸다고 전한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
나쁜 짓을 하려고
눈에 핏발을 세운 유방보다
일생동안 연구한 실적을
뛰어난 영재에게 남기고
표연히 사라진
黃石公이 더욱 위대해 보인다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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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 말씀 ]
세수는 남 보라고 씻는다냐 ?
머리 감으면 모자는 털어서 쓰고 싶고
목욕하면 헌 옷 입기 싫은 것이
사람 마음이다.
그것이 얼마나 가겠냐만은
날마다 새 날로 살아라고
아침마다
낯도 씻고 그런거 아니냐..
안 그러면
내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낮을 왜 만날 씻겠냐 ?
고추 모종은
아카시 핀 뒤에 심어야 되고
배꽃 필 때 한 번은 추위가 더 있다.
뻐꾸기가 처음 울고
세 장날이 지나야
풋보리라도 베서 먹을 수 있는데,
처서 지나면
솔나무 밑이 훤하다 안 하더냐.
그래서
처서 전에 오는 비는 약비고,
처섯비는 사방 십리에 천석을
까먹는다 안 허냐.
나락이 피기 전에
비가 쫌 와야 할텐데....
들깨는 해 뜨기 전에 털어야 꼬타리가
안 부서져서 일이 수월코,
참깨는 해가 나서 이슬이 말라야
꼬타리가 벌어져서 잘 털린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든
살펴봐 감서 해야 한다.
까치가 집 짓는 나무는 베는 것 아니다.
뭐든지 밉다가 곱다가 허제.
밉다고 다 없애면 세상에 뭐가 남겠냐?
낫이나 톱 들었다고
살아 있는 나무를 함부로 찍어 대면
나무가 앙 갚음하고,
괭이나 삽 들었다고
막심으로 땅을 찍으대면
땅도 가만히 있지 않는것이다.
세상에 쓸데 없는 말은 있어도
쓸데없는 사람은 없는것이다.
나뭇가지를 봐라.
곧은 건 괭이자루,
휘어진 건 톱자루,
갈라진 건 멍에,
벌어진 건 지게,
약한 건 빗자루,
곧은 건 울타리로 쓴다.
나무도 큰 놈이 있고 작은 놈이 있는 것이나,
야문 놈이나 무른 것이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사람도 한가지다.
생각해 봐라.
다 글로 잘 나가먼
농사는 누가 짓고,
변소는 누가 푸겠냐?
밥 하는 놈
따로 있고
묵는 놈
따로 있듯이,
말 잘 하는 놈 있고
힘 잘 쓰는 놈 있고,
헛간 짓는 사람 있고,
큰 집 짓는 사람
다 따로 있고,
돼지 잡는 사람,
장사 지낼 때 앞소리 하는 사람도
다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라도 없어봐라.
그 동네가 잘 되겠냐.
내 살아보니 그닥시리
잘난놈도 못난 놈도 없더라
허기사
다 지나고 보니까
잘 배우나 못 배우나
별 다른 거 없더라.
사람이 살고
지난 자리는,
사람마다 손 쓰고 마음 내기 나름이지,
많이 배운 것과는 상관이 없는 갑더라.
거둬감서 산 사람은
지난 자리도 따뜻하고,
모질게 거둬들이기만 한 사람은
그 사람이 죽고 없어지도
까시가 돋니라.
어쩌든지
서로 싸우지 말고
도와 가면서 살아라 해라.
다른 사람 눈에 눈물 빼고 득 본다 싶어도
끝을 맞춰 보면
별 거 없니라.
누구나 눈은
앞에 달렸고,
팔다리는 두개라도
입은 한 개니까
사람이 욕심내 봐야
거기서 거기더라.
갈 때는 두손 두발 다 비었고.
말 못하는 나무나 짐승에게 베푸는 것도 우선 보기에는
어리석다 해도
길게 보면 득이라.
모든게 제 각각,
베풀면 베푼대로 받고,
해치면 해친 대로 받고 사니라.
그러니
사람한테야
굳이 말해서 뭐하겠냐?
내는
이미 이리 살았지만
너희들는 어쩌든지
눈 똑바로 뜨고 단단이 살펴서,
마르고 다져진 땅만 밟고 살거라.
개는 더워도 털 없이 못 살고,
뱀이 춥다고 옷 입고는 못 사는 것이다.
사람이 한 번 나면,
아아는 두 번 되고
어른은 한 번 된다더니,
어른은 되지도 못하고
아아만 또 됐다.
인자 느그들
아아들 타던 유모차에도
손을 짚어야 걷는다니.
세상에
수월한 일이 어디에 있냐?
하다 보면
손에 익고 또 몸에 익고
그러면
그렇게 용기가 생기는 것이지
다들그렇게 사는 것이지....
/ 옮겨 받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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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불효교(孝不孝橋)
뼈대 있는 가문이라 하여
어린 나이에 시집 왔더니
초가 삼간에 화전밭
몇 마지기가 전 재산 이였다.
정신없이 시집 살이 하는 중에도 아이는 가졌다.
부엌일에 농사일 하랴,
길쌈 삼으랴,
저녁 설거지는 하는 둥 마는 둥 파김치가 돼
안방에 고꾸라져 누우면,
신랑이 치마를 올리는지
고쟁이를 내리는지
비몽 사몽 간에
일을 치른 모양 이다.
아들 여섯 낳고 시부모 상 치르고 또 아이 하나 뱃속에 자리 잡았을 때
시름 시름 앓던 남편이 백약이 무효, 덜컥 저 세상으로 가 버렸다.
유복자 막내 아들을 낳고
유씨댁이 살아 가기는 더 바빠 졌다.
혼자서 아들 일곱을 키우느라 낮엔 농사일, 밤이면 삯바느질로
십여년을 꿈같이 보내고 나니 아들 녀석 일곱이 쑥쑥 자랐다.
열여섯 큰아들이
“어머니! 이젠 손에 흙 묻히지 마세요” 하며
집안 농사일을 시원 시원하게 해치우고,
둘째는 심마니를 따라 다니며
약초를 캐고 가끔씩 산삼도 캐 쏠쏠하게 돈벌이를 하고,
셋째는 형들이 등을 떠밀어 서당에 다니게 됐다.
일곱 아들이 효자라 맛있는 걸 사다 제 어미에게 드리고
농사는 물론 부엌일도 손끝 하나 못 움직이게 했다.
살림은 늘어나고 일을 하지 않으니 유씨댁은 몇달 만에 새 사람이 됐다.
새까맣던 얼굴이 박꽃처럼 훤해지고
나무 뿌리 같던 손이 비단결처럼 고와 졌다.
문제는 밤이 길어진 것 이다.
베개를 부둥켜 안아봐도,
허벅지를 꼬집어 봐도 잠이 오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유씨댁은 바람이 났다.
범골 외딴집에 혼자 사는 홀아비 사냥꾼과 눈이 맞았다.
농익은 40대 후반 유씨댁이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남자의 깊은맛을 알게된 것이다.
일곱 형제가 잠이 들면 유씨댁은 살며시 집을 나와 산허리를 돌아 범골로 갔다.
어느 날 사경녘에 온몸이 물에 젖은
유씨댁이 다리를
절며 집으로 돌아 왔다.
개울을 건너다 넘어져 발을 삔 것이다.
일곱 아들은 제 어미 발이 삐었다고 약방에 가서 고약을 사오고
쇠다리 뼈를 사다 고아 봉양을 다했다.
며칠 후 유씨댁은 발의 부기가 빠지고 걸을수 있게 되자 또다시 아들 일곱이 잠든 후 집을 빠져나와 범골로 향했다,
유씨댁은 깜짝 놀랐다.
개울에 다리가 놓여 있는 것이다.
일곱 아들의 작품 이었다.
사람들은 그다리를
효불효교(孝不孝橋)라 불렀다.
이승에 있는 어미에게는 효요, 저승에 있는 아비에게는 불효인 것이다.
이 이야기는 동국여지승람
(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되어 있으며
경북 경주시 인왕동에 있었던 신라시대의 다리
(경상북도 사적
제 457호 지정)
이다.
일명 칠성교로
불리기도 한다.
요즈음 자식들은
우리들에게 무슨
다리를 놓아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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