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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진첩
해외여행을 가서 찍은 사진들이 USB메모리(이동식 디스크)라는 아주 작은 칩에 모두 담겨졌다. 두께 3밀리에 세로 큰 길이가 5센티도 채 안 되는 작은 칩에 담긴 것이 무려 이백 개도 넘는 필름 곽의 양에 해당되고 이를 펼칠 것이면 수천 장의 사진이 쏟아진다. 수천의 애쓴 시간이 고작 이것인가. 생각할수록 신기한 일이다. 이를 우리는 디지털이라 부른다. 디지털은 우리를 빠르고 간단하며 편리한 세상에 살도록 하였다.
수동카메라를 대신하는 디카말고도 테이프 대신 MP3 플레이어와 CD로 음악을 듣고 일기장이나 플래너로 시간과 정보를 관리하는 대신 컴퓨터나 PDA 같은 디지털 기기를 활용한다. PC게임이 흔하고 사전도 전자사전이 대신한다. 판타지 소설과 영상의 글이 성행하니 이제 책이나 LP판이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디지털이 홍수를 이루면서 과거 값나가고 그지없이 소중하였던 것들이 귀찮고 쓸모없는 천덕꾸러기로 변하거나 차츰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추억 속으로 파묻히고 말 아날로그.
그런 가긍스런 것들 중에 내가 제일 아쉽고 안타까워하는 것이 사진첩이다. 앨범이 디지털과 직접적인 관계에 있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이것처럼 디지털의 큰 피해를 본 대상도 없다. 한 시절 입학 때나 졸업 때 으레 선물로 받았던 것이 앨범이다. 소중하였던 시간을 따로 담을 보금자리로 그만한 것은 없었다. 사진 찍는 일도 흔하지 않았지만 어쩌다 찍은 사진은 엄선되어 곳에 정중히 모셨다. 그리고는 예쁜 주석을 달거나 네 잎 크로바 토끼풀에 단풍잎까지 끼워 귀중한 순간들을 늘 곱고 새롭도록 비다듬었다.
문득 떠오르는 귀중한 순간들. 그 시간 속으로 향한다. 초라하고 순박한 그때의 모습에 놀라고 청순한 젊은 한때의 모습에 다시 반하고 다정하였던 한때의 모습에 눈물이 나고 즐거웠던 때의 광경에 다시 감격하고 위로를 삼는다. 수더분한 삶의 애틋한 정서가 그 속에 그대로 멈춰서 있다. 과거는 늘 현재의 거울이다. 자랑삼아 꺼내 보여주었던 것도 남몰래 바라보았던 것도 바로 앨범이었다. 사랑의 웨딩드레스나 준수한 학사모는 그곳에서 아늑하였으며 큰 기쁨의 자리였다.
옆집 사는 형은 해군에 입대하여 찍은 사진들을 늘 끼고 다녔다. 뱀을 치켜들고 선 자신의 모습을 무척 자랑스러워했던 형. 세라복을 입고 함정 옆에 서 한껏 폼을 잡았던 형의 모습이 그립기만하다. 빛바랜 사진첩은 단지 시간의 기억만이 아닌 마음의 소중함이 채워진 그리움의 집이다. 단물나는 사진이지만 이쯤이면 열권의 시집과 같으며 자서전과 다를 바 없다. 삶의 본태를 자연 떠올리는 철인이 되고 추억의 오솔길을 다소곳이 밟는 그 시절의 배우가 된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한 정성과 소중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사진은 웹의 이미지로서 컴퓨터 안에서 편한 모습으로 흔하게 굴러다닐 뿐이다.
좋은 기술로 아무리 포토샵으로 미더운 곳을 예쁘게 고치고 전자앨범을 만들고 플래시로 여러 가지 효과를 주어도 과거 앨범이 내게 주었던 기분이 안 난다. `0과 1`을 조합한 신호로 나타낸 디지털에 갇힌 시간은 단지 키 하나로 불쑥 나타난 한 이미지일 뿐 그리움으로 구출이 아니 되는 것이다. 내 몸이 아날로그 형이라 동병상련으로서 그러한지 음영하며 구도가 촌스럽고 아무리 고치고싶어도 고쳐지지 않는 반쯤은 구겨지고 찢겨진 색 바랜 그 시절의 아날로그 사진이 여전히 값지고 소중하게만 느껴진다. 그리움을 실었던 추억의 앨범은 이제 그 자체가 그렇게 아스라한 그리움으로 스스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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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이란 연속적인 아날로그 신호를 `0과 1`의 이진법의 수치에 대응시켜서 개별적인 수량으로 표현한 것이다. 반면에 아날로그란 전압이나 전류처럼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물리량을 표현하는 것으로 사람의 목소리와 같이 연속적으로 변하는 신호가 바로 아날로그 형태이며 그 양을 계량할 수 있다. 이를테면 바늘이 돌아가는 시계를 아날로그시계, 숫자가 나타나는 시계를 디지털시계라고 한다.
우리는 지금 하나의 세상을 이러한 두 가지의 형태의 방식으로 반영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나는 아날로그에 대해 무한한 향수를 느낀다. 디지털의 편리함에 만족해하면서도 아날로그는 버리고 싶지가 않다. 아마도 이는 우선 내 몸이 아날로그 성이라 그러할 것이다. 아무리 디지털이 눈치 빠른 신호를 가진다하여도 사람의 촉촉한 감성을 신호화한다는 것은 무리이지 싶다. 비오는 날을 첨단의 기술로서 완벽하게 나타나게 할지 모르지만 비를 맞는 감성을 `0과 1`을 조합한 신호로 표현하기란 어렵다.
디지털은 받아들이는 어느 신호가 단지 중요하고 이에 반응할 뿐이다. 로봇이 목석연함이듯 디지털이 바로 그런 존재물인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음질의 포맷이 있다하여도 LP가 갖는 따스함이 디지털에는 없다. 디지털카메라가 간편하고 편리하지만 제품에 따른 특성이나 아날로그가 가지는 색감에는 못 미친다. 제품이 갖는 고유성을 디지털에서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숫자로 나타내는 시계는 정확하고 편리하지만 녀석은 배터리가 중요할 뿐 주인의 손길이 필요하지가 않다. 그러기에 주인과 같이 호흡을 하지 않는다. 따른 정성이 필요 없는 것이다. 아날로그는 정성을 담은 애틋함이 있으며 그 시절의 그리움이 그대로 배어 있다. 이렇게 대변을 해보지만 아날로그가 디지털처럼 편리하지 못하고 정확성에서도 밀려나 점점 주위에서 사라지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2.추억의 세발자전거
이제 그 자체가 그리움이 되어버린 빛바랜 사진첩. 그 안에는 백옥무하(白玉無瑕)의 작은 내가 예쁘게 들어 있다. 그 시절을 산 누구라도 그러하듯 내게도 가슴 깊이 간직하는 반쯤은 찢겨 나간 그리운 흑백 사진 몇이 있다. 사진은 지나간 때를 기억하지 못하여 멈추었던 시간의 한 모습을 보고 그때를 떠올리는 묘미로서도 괜찮지만 정작 값지고 고마운 것은 정녕 알 수없는 과거로부터 지금을 현실감 있게 바라보는 것이 가능하다는 데 있다.
할머니를 한 번도 뵌 적이 없다. 하지만 바로 보는 듯 모습이 눈에 선하다. 왜 삼촌들이 여동생을 보고 할머니와 어쩌면 그렇게 꼭 빼닮았느냐 하는지 잘 이해한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나 닮았다. 머리에 포마드를 짙게 바르고 두꺼운 오버를 걸치고 트럭을 타고 혼례를 치루기 위해 나타난 아버지. 시발택시는 아닐 줄 알았지만 설마 트럭일 줄은 몰랐다고 어머니는 이를 두고두고 말하였다.
이 또한 본 적이 없지만 나는 잘 알고 있다. 우습지만 그 트럭이 때맞춰 고장 나 애를 먹었다는 사실을 곁들여서 또 안다. 사진엔 당시 정비 일을 하는 고종형의 얼굴이 보이고 형은 공구를 든 채로 서있다. 학교를 들어가기 전의 나는 이상하게 서서 찍은 사진은 하나도 없고 판자로 어설프게 엮은 닭장 옆에서 꼭 세발자전거를 타고나온다. 자전거가 귀하였을 그 무렵 동생은 자전거를 탄 사진이 하나도 없는데 나만 유독 자전거를 타고 두 눈을 찡그리며 미소 짓고 있다.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봄 소풍에서의 나는 타이스를 신고 있으며 엄마는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있다. 양장이 흔하지 않던 시절 그래도 엄마는 엄앵란 스타일의 머리 손질을 한 모습으로 맨 뒤에 나온다. 여동생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일 것인데 여동생은 어쩌고 그 자리에 있었나 싶다. 당시의 마음 환한 엄마의 얼굴이 곱게 보인다. 당시의 배경으로서는 장남이라 당연 열 일 제치고 온 것이련 해야 할 것이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소풍가는 곳 안양유원지는 초등학교에서 꽤 먼 거리였다. 철둑을 건너 안양역을 지나고 기차 길을 따라 한참을 가야 관악산 아래 안양유원지가 나온다. 이름표를 큼지막하게 단 아이들이 앞장서서 가고 엄마들은 둔을 치듯 하며 뒤를 쫓았다. 하지만 엄마는 다른 엄마들하고는 달리 내 옆 가장자리에서 나와 보조를 맞추었다. 나는 엄마가 있다는 것이 든든하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론 꽤 창피하였다. 뒤로 가라고 눈을 흘긴 것도 같고 자꾸 부르지 말라고 하였던 것도 같은데 그 기억은 희미하다.
맛문하였지만 씩씩하게 걸어 보이려 애썼던 기억이 지금도 봄바람에 얼핏 스치는 듯도 하다. 왜 엄마는 그때 내 곁을 떠나지 않았던 것일까. 나는 그해 운동회에서 달리기에 꼴찌를 하여 웬만하면 다 타던 공책을 한 권도 못 탔다. 이후에도 나는 한 번도 운동회에서 상을 탄 적이 없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씩 웃으며 공책보다 더 좋은 두꺼운 대학노트를 내게 주었었다. 동생은 천 미터 달리기 선수로도 뽑히는데 왜 나만 그럴까. 그쯤 나는 남들보다 잘 뛰지 못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아차렸다.
엄마는 내가 평발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내 발은 남들과 달리 바닥이 평평하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또 자연 알게 되었다. 어느 해 겨울 동네 양어장이 꽁꽁 얼어붙던 때 아버지는 동생과 나에게 스케이트를 사주었다.
동생은 배우지도 않은 스케이트를 잘 탔다. 회전할 때만 엉성할 뿐 단숨에 양어장을 한 바퀴 돌았다. 하지만 나는 똑바로 일어서지도 못하였다. 돌아서는 가족의 발걸음은 띄엄띄엄 마냥 숙지근하였다. 나는 실망하였던 당시의 아버지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스케이트를 못 탄다는 사실은 내게는 큰 아픔이었다. 그 비싼 돈 들여 산 스케이트는 한 번도 못 타보고 운 좋은 동네 형이 싼 값에 가져갔다. 엄마는 그때 비로소 말해주었다. 육이오 전쟁 때의 어린 소년소녀들이 서둘러 시집장가를 가서 첫 애를 놓던 시기가 바로 내가 태어날 그 무렵이다. 내 이후로 아이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이 그런 이유이다. 그때는 폐병도 많았지만 소아마비도 많았다. 기억 못하는 나지만 나는 소아마비를 앓았다.
나는 수의사였던 아버지 덕분으로 다리 한쪽이 약간 가늘고 그로 걸음걸이가 표시가 조금 날 뿐이다. 생각해보면 당신은 내 삶의 필연이며 행운이었다. 사지 멀쩡하게 돌아다닌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 하지만 당신은 나로 무연하고 얼룩진 마음을 늘 갖고 살지 않았던가. 아픈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이만큼 행복할 수 있도록 당신이 아팠다. 자전거를 타고 집 주위를 돌면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어렴풋한 기억도, 집에 탁구대를 갖다가 놓고 가르쳐 주었던 것도 못 박힌 당신들의 말 못할 아픈 심중이었다는 것을 이제 나는 절절이 안다.
그렇게 세발자전거를 끼고 살았던 나는 다리가 아팠다는 것에 대해 어느 한 때 육니하고 억색하다 한 적은 있지만 크게 좌절해 본 적은 없다. 심하지도 않았지만 따스한 당신들 앞에서 약해져서는 안 될 것이란 생각이 자연 들었기 때문이다. 사진을 들여다보면 그래서 또 아픔의 질곡을 넘는 그 시절 당신들의 애틋한 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자 여기 쳐다봐, 씩씩하게. 자전거 꽉 잡고 여기! 여기! 반쯤 찢긴 누렇게 변색이 된 다소는 슬퍼 보이는 잊지 못할 그 시절의 나는 그렇게 세발자전거를 타고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닭장 옆에 늡늡하게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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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말타기라고 하지만 이거 땜시 머리 터진 녀석 여럿 보았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