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예는 종친들에 대한 생각이 나름대로 각별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 조비가 종친들, 특히 친족 관계가 가까울 수록 멀리했던 것과는 다소 다르지요. 그 예로 일단 나이가 비슷한 작은아버지인 조우라던가, 친동생인 조림(훗날 임금이 되는 고귀향공 조모의 아버지) 등과 가깝게 지냈으니까요. 물론 그도 작은아버지인 조식을 경계하기도 했습니다만.
조상의 경우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은 듯합니다. 물론 조상의 경우는 아버지 조진이 태조인 조조 맹덕에게 원래 성인 진씨 대신 조씨 성을 하사 받고 종친이 된 경우니까 다소 다르다고는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성격을 보건대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조상이 무능하기만한 인물은 절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데 이 대목을 보면 문득 성공가도를 달리다가 실패한 1세대『삼국지』인물들이 떠오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네, 짐작하신대로 원소와 유표입니다. 이들은 모두 태평세라면 충분히 좋은 승상감이라는 평가를 받은 사람들이지요. 모르기는 해도 조상 역시 이런 유형의 사람이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자치통감』을 보면 그가 과연『삼국지』「조상 열전」전-중반부의 그 사람과 정말 같은 사람인지 의아할 지경입니다. 확인해보도록 하지요.
황제(조 예)가 말하였다.
"누가 이 일(양자인 조 방을 보좌하는 일)을 맡을 수 있겠는가?"
그때 오직 조 상만이 홀로 옆에 있었으므로 유 방과 손 자는 이 때문에 조 상을 추천하였고, 또한 말하였다.
"마땅히 사마 의를 불러서 함께 서로 참여하게 하십시오."
황제가 말하였다.
"조 상은 그 일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조 상은 땀을 흘리면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유 방이 그(조 상)의 발을 밟으면서 귀에 대고 말하였다.
"신이 죽음으로서 사직을 받들겠습니다."
『자치통감』「위기(위나라 본기)」
조상은 나중에 사마씨에 의해 제거되는 만큼 실제에 비해 더 어리석게 그려졌을 개연성은 충분합니다. 다만 그러한 점을 감안해도 조상이 결단력에 있어서 부족하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결단력 부족은 비단 조상만의 문제점은 아닙니다. 나름대로 유능한 인물들이라면 인물들인 원소나 유표도 그러했으니까요. 심지어는 사마 소 같은 인물조차 그의 형인 사마 사보다 소소한(지엽적) 지략에서의 '치밀함'이라는 점에서는 앞섰어도 결정적으로 전체 평가에서 형보다 덜 평가 받는 이유가 바로 '과단성'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사마 의 같이 지략의 치밀함과 뻔뻔스러움을 모두 갖추어 정치가의 고등 테크닉인 '후흑술'에서는 조조 맹덕조차도 능가하는 인물이 전체 종합 능력에서는 조조만 못합니다. 그 까닭은 조조의 지략이 사마 의보다 전반적인 면으로 한 수 위라서 그렇다는 평가도 있지만 결정적인 부분은 역시 과단성에 있어서 조조를 따를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략 있는 사람이 부리는 과단성은 그것만큼 무서운 것이 없지요. 원술처럼 자기 능력도 헤아리지 않고 일 벌이는 '무모함'과는 차원이 전혀 다릅니다.
실제 사마 의가 제갈 량과 전쟁을 할 때 가장 두려워했던 상황이 바로 그런 과단성과 관련된 문제였습니다. 만약 상대가 조조였다면 그것만큼 무서운 경우가 또 없었겠지요. 과단성은 흔히 말하는 잔혹함과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사마 의도 잔혹함에 있어서는 누구에게도(사실 어떤 면에서는 동탁 못지 않을 것입니다.) 지지 않는 사람이지만 과단성에 있어서는 아무래도 조조에 미치지 못하는 구석이 있습니다.
여하간 서기 239년부터 투 톱 체제가 시작되었는데 처음에는 그럭저럭 무난하게 출발한 것으로 보입니다.
처음에 조 상은, 사마 선왕이 나이도 많고 덕망이 두터웠으므로, 항상 부친에게 대하는 것처럼 받들었으며, 감히 함부로 일을 처리하지 않았다.
『삼국지』「위서 조 상 열전」
조상의 기본 성격이 나름대로 신중한 편임은 여기서도 드러납니다. 하기야 아버지인 조진도 그랬지만요. 다만 이 인물도 역시 원소와 비슷한 유형의 사람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인물들의 특징은 나름대로 유능하면서도 중요하거나 결정적인 순간에는 발을 빼고 물러나버린다는 점입니다.
원소도, 유표도 심지어는 중원과는 전혀 관계 없는 공화정 때 호민관 마르쿠스 드루수스나 원수정 로마의 군주인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같은 사람도 이런 결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이런 성향은 차차 나타나겠지만 일단 평시의 통치는 그럭저럭 양호했던 모양입니다. 적어도 자기 주제 파악 정도는 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조상 열전의 주석을 봅시다.
선제(조 예)께서는 신(조 상)을 믿을 만한 사람으로 생각하셔서 유언을 남기셨으며, 특별히 격려하는 마음으로 신을 발탁하셔서 황궁을 지키는 일을 전담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관직에 나아가서는 충성심과 성실함으로 업적을 쌓는 행동을 하지 못하고, 물러나서는 검소하게 지내며 관리로서 모범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습니다. 선제께서 성체가 불편하실 때 신은 공무로 경황이 없었지만, 병석을 지키며 약을 바쳤으나, 정성이 부족하여 사직에 보탬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위 사마 의와 함께 유조(遺詔)를 받게 되었으니 부끄럽고 두려워서 폐하의 앞에서 아뢸 때 그저 손을 비비기만 했습니다.
『삼국지』「위서 조 상 열전」 주석
물론 이 상소문은 후일 조상이 자신의 측근들과 더불어 사마 의를 실권직이 아니라 명예직인 태부로 옮길 때 올린 상소였지만 나름대로 스스로를 정직하게 평가한 것입니다.
한편 서기 237년부터 서기 247년 사이에 사마 사는 잠행이라면 잠행의 시대지만 착실히 승진하고 있는 모습을 보입니다. 서기 237년에서 239년 사이에는 산기상시라는 벼슬을 지냈고 서기 239년에서 247년에는 여러 벼슬을 거쳐 중호군이라는 자리까지 올랐지요. 코스만 보면 대체로 대장군에 취임하기 이전의 조 상과 비슷하게 진행되는 양상입니다.
글이 중언부언한 감이 있어 다음에 계속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