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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원 손문 孫文(1866~1925】 " 한국의 독립운동 적극적으로 지지 지원”
1866년 11월 12일 중국 광둥성(廣東省) 샹산현(香山縣) 췌이헝촌(翠亨村)에서 태어났다. 샹산현은 현재의 중산시(中山市)에 속하며, 주강(珠江)의 하구인 홍콩(香港)에서 약 80여 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주강삼각주 농촌마을이다. 중국이 유럽열강의 침략을 본격적으로 받게 되었던 아편전쟁이 일어났던 곳 부근이었으며, 거의 같은 시기에 일어난 대규모 농민운동인 태평천국(太平天國)의 지도자 홍슈취안(洪秀全)의 고향 화현(花縣)과도 멀지 않은 곳이었다.
중농 출신의 부모 아래에서 전통적 사숙 교육을 받던 중 1879년 하와이로 유학을 떠나게 된 것은 성공한 화교로서 하와이에서 사탕수수 농장을 경영하던 큰형 쑨메이(孫眉)의 초청에 의한 것이었다. 훗날 혁명사업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던 쑨메이의 도움으로 하와이에서 교육을 받은 뒤 1884년부터 2년간, 또 1887년부터 5년간 홍콩으로 옮겨가 영국계 의과대학을 다녔다. 이후 마카오에서 개업의로 활동하여 상당한 이름을 얻기도 하였다.
이러한 성장과정과 교육 경력은 동서 문명을 동시에 흡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하는 데 충분하였다. 뿐만 아니라 모국어 수준으로 배우게 된 영어는 후일 국제적 활동을 전개하는 데 가장 유리한 조건을 갖추게 하였다. 타고난 다독가(多讀家)로서 여러 분야의 서적을 탐독하기를 좋아하였기에 동서사상을 융합하는 형태로 독자적인 사상체계인 삼민주의(三民主義)를 창안하고 그것을 정치적 주장으로 내세우게 된 것이다.
청일전쟁(淸日戰爭)이 발발하던 1894년 11월 하와이에서 조직된 비밀결사 흥중회(興中會)는 만주족의 중국지배에 대한 반대라는 종족주의적 한계를 가진 것이기는 하지만 만주족 왕조, 곧 청조의 타도와 민국(民國) 곧 공화국의 건설을 처음으로 내세웠다는 점에서 이른바 공화혁명 운동의 출발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청일전쟁의 패배로 타이완(臺灣)을 비롯한 일부 영토를 할양해야 하는 치욕적인 시모노세키조약을 맺던 1895년, 비밀결사 조직을 기반으로 첫 번째 반청(反淸) 무장기의를 일으켰으나 실패한 후 해외로 망명하였다. 이후 1911년 10월 후베이성(湖北省) 우창(武昌)에서 일어난 반청기의가 성공하면서 최초의 혁명정부가 만들어지기까지 오랜 기간을 유럽, 일본, 동남아를 비롯한 해외에서 활동하였다.
이 무렵 해외의 화교들을 중심으로 반청혁명을 선전하고 혁명자금을 모금하여 국내에서 반청기의를 일으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해외 화교들을 혁명의 지지자로 끌어들이는 일은 결코 성공적이지만은 않았다. 그것은 변법운동의 지도자로 역시 해외에 망명했던 캉유웨이(康有爲) 중심의 개혁운동(입헌운동) 세력과의 경쟁 때문이기도 했지만, 여러 차례 반복되는 무장기의의 실패로 인하여 혁명의 방법을 둘러싸고 일어난 혁명파 내의 내분 또한 심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우창기의가 일어나던 시기 미국에서 화교들을 상대로 혁명을 선전하는 일을 하고 있다가 우창기의 발발 이후 두 달 반이 지난 1911년 12월말에 중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직후 각 성 혁명정부 대표들의 회의에서 초대 임시대총통에 선출되었다.
1912년 1월 1일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의 첫 번째 (임시)대총통에 올랐다. 그러나 뒤이어 청 황제의 퇴위를 조건으로 대총통의 자리를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넘겨주는 정치적 거래를 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당시 혁명세력의 기반은 취약하였다. 이어서 위안스카이가 약속을 어긴 채 국회를 해산하고 임시약법(臨時約法)을 철폐하자 공화국 수호를 위한 전쟁을 일으키지만 위안스카이에게 완패하고 다시 일본으로 망명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1916년 위안스카이가 사망한 이후 일본에서 귀국하였다. 이후 몇 차례 지방군벌들과의 합작을 바탕으로 광둥을 중심으로 혁명정권을 만들지만 사적 군대를 소유한 군벌들 간의 계속된 다툼 가운데 공화국의 명맥을 유지하기는 어려웠다. 혁명정권을 바탕으로 군벌들에 대한 정벌전쟁(북벌)을 통한 전국적 통일을 꾀하였지만, 오히려 한때 혁명정권을 지지하던 군벌들과의 대립과 충돌이 격화되어 혁명정권의 존립마저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0년 무렵부터 시작된 소비에트 러시아의 중국혁명에 대한 지원정책은 새로운 희망이 되기에 족한 것이었다. 러시아의 10월혁명이 성공한 2년 뒤인 1919년에 만들어진 국제공산당[코민테른(Comintern)]은 공산주의혁명의 세계적 확산을 목표로 한 것인데, 특히 식민지 약소국에서의 공산주의운동을 지원하는 전략으로 자본주의 혁명세력과 연합을 통하여 공산주의혁명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는 이른바 연합전선정책을 제기하였다. 중국의 경우 코민테른의 지원은 공산당 창당과 국민당과의 연합이라는 두 가지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1922년부터 본격화된 국민당과 신생 공산당과의 연합, 곧 첫 번째 국공합작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제1차 국공합작의 실제적인 출발은 1924년 1월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를 통하여 이루어진 국민당의 개조(改組)였다. 코민테른 측에서는 국민당에 대한 연합과 지원의 대가로서 볼세비키(Bolshevik) 정당으로 조직을 개편할 것을 요구하였다.
코민테른의 재정적·군사적 지원을 받는 데 일차적인 관심을 가진 국민당 측에서 여기에 적극 응하여 노동자·농민을 비롯한 대중적 기반을 강조하는 정당조직으로의 대대적인 개편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이른바 소련과의 연합(聯俄), 공산당과의 협력(容共), 노동자·농민운동의 지원(扶助農工)이라는 새로운 정책이 제시되었다.
이후 소련의 군사·정치적 원조 아래 국민당 휘하의 당군(黨軍)인 국민혁명군의 육성과 이를 기반으로 하는 군벌과의 전쟁인 북벌전쟁과 전국통일, 대중운동의 폭발적 성장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국민혁명으로 이어졌다. 국민혁명의 추진과정에서 소련과의 연합이나 공산당과의 협력을 둘러싸고 벌어진 국민당 내부에서의 분파와 대립은 국민혁명의 추진과정이나 성격을 둘러싸고 커다란 논란을 불러 일으켰고 급기야 1927년 4월, 국민혁명군 최고지도자 장제스(蔣介石)의 공산당에 대한 대탄압이라는 이른바 4·12정변을 불러와 국공합작은 결국 결렬되었다.
그러나 1928년 6월 국민혁명군의 베이징(北京) 입성 후, 그해 12월의 이른바 동북역치(東北易幟)라 칭하는 동북군벌 장쉐량(張學良)의 국민당에 대한 복속 선언으로 전국적 통일을 이룩한 국민혁명은 청조 멸망 이래 다각적인 방향에서 모색되어 오던 중국의 국민국가가 그 모습을 드러내는 직접적 과정이 되었다.
국민혁명의 초기 단계인 1925년 3월 군벌들과의 정치적 협상을 위해 베이징에 갔다가 그곳에서 사망하였으나, 그 단초를 놓는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한국독립운동가들과의 관계는 1905년 도쿄에서 만들어진 혁명단체인 중국혁명동맹회 시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일본에 유학했던 조소앙(趙素昻)을 비롯한 한국유학생들과 따이지타오(戴季陶)를 중심으로 하는 중국유학생 간의 긴밀한 교류가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어서 한인들의 중국 망명과 중국에서 이루어진 혁명세력과의 교류는 공화혁명 곧 신해혁명이 발발하기 이전인 1908년경 상하이로 망명하여 중국혁명에 참여했던 김규흥(金奎興)의 경우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본격적인 의미에서 한인 지사들의 중국 망명과 중국 혁명세력과의 교류가 이루어진 것은 1911년 10월 신해혁명 이후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신해혁명의 성공 소식을 들은 직후 중국으로 망명해간 것으로 확인되는 신규식(申圭植)·김규식(金奎植) 등 한인 망명 지사들은 혁명의 중심지인 상하이·난징(南京) 지역에서 중국혁명에 직접 참여하거나 지지를 표명하는 등의 활동을 하면서 중국혁명 지도자들과의 밀접한 교류를 가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만세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만들어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또한 중국 혁명세력과 밀접한 교류를 가지고 있었다. 1921년 9월에서 10월 상하이 임시정부 법무총장 신규식의 광저우호법정부(廣州護法政府) 방문과 회담은 임시정부와 호법정부가 상호간에 외교적 승인을 하면서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적극적 관심과 지원을 보냈다.
그러나 신규식의 광저우방문 일정을 자세하게 추적한 연구에 의하면 당시 광저우의 비상국회(非常國會)에서 다룬 것은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안이 아니라 한국 독립을 지지하는 결의안이었고, 임시정부나 임시의정원에서도 호법정부 승인안을 처리한 흔적이 보이지 않고 있다. 따라서 임시정부와 호법정부 사이의 승인은 구두에 의한 ‘사실상의 승인’ 정도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한편으로 같은 시기 임시정부의 주요 지도자들과 밀접한 교류관계를 맺고 있었음도 확인된다. 특히 당시 상하이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여운형(呂運亨)과의 긴밀한 교류관계를 볼 수 있으니 이는 앞에서 언급한 반제연대의 일환으로서 중국·한국·베트남·인도의 혁명가들 사이에 추진되고 있었던 연대활동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또 중국에서 활동하던 한국 독립운동가들과 중국 혁명세력 인사들과의 연대를 위한 단체의 결성도 나타나고 있었으니, 1912년에 신규식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나 1921년 상하이·광저우·창사(長沙) 등지에서 만들어졌던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 같은 조직이 이에 속한다. 이들 조직을 통하여 중국혁명가들의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에 대한 지원과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중국혁명 참가가 이루어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