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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는 그 내용의 고유성과 분량의 방대함으로 말미암아(정작 내용자체는 블룸과 아내, 디덜러스라는 인물들이 벌이는 단 하루의 에피소드이죠) 읽기에 적지 않은 인내를 요하는 작품이지만 , 그의 또다른 자전적 작품인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분량도 적당하고 그의 작품세계의 단초를 알 수 있는 훌륭한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예술과 자유의 상관관계에 대한 가치를 생각해 본다는 의미에서 추천하고픈 도서입니다. 미술이든 문학이든 음악이든 예술가에게 있어서 예술이라는 것과 그 속박 혹은 자유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끊임없는 화두로 작용할 수도 있겠죠. 이것은 그의 성장과 깨달음의 과정에 있어서 꼭 필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작품이란 결국 자기 삶의 진정어린 투영일 수 밖에 없으니까요. 이전에 쓴 글이지만 음악감상과 예술에 대한 언급을 하기 전에, 말러카페 여러분께도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어서 남겨봅니다.
예술적 순교를 감내하고 날아오른 이카루스
-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
(이미지: 낙소스에서 나온 <젊은 예술가의 초상> 오디오 북)
예술가에게 있어서 자신이 자라온 곳의 환경과 제도는 그 자신의 작품과 분리될 수 없는 동인으로 작용한다. 이 점은 예술가가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극복했든 갇혀있든 그것들로 인해 작품을 낳는 하나의 기제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했듯이 예술가는 모방의 형식을 통해서 하나의 작품을, 자신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 모방의 원천은 환경과 제도로부터 작용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환경이, 제도가 그 작품의 창조성을, 완성도를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같은 시공간에 놓여진 모든 예술가가 걸출한 예술가로 살아남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인문적으로 풍부하고 예술적으로 뛰어난 작품을 양산할 토양을 제공할 가능성이 높은, 혹은 그 결과를 보여주었던 역사적 사례를 알고 있다. 페르시아 전쟁 이후의 아테네를 중심으로 하는 그리스문명, 중국의 제가백가 시대, 14세기의 이태리 르네상스의 시기, 조선 후기의 실학 시기 등은 모두 특정한 시공간에서의 환경과 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 시절의 유형과 양상은 모두 다르지만 그것들은 정치적, 예술적 혹은 철학적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꽃피우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이들의 공통된 키워드는 '공통된 관심들의 풍부함과 그 충돌'이라 볼 수 있다. 아마도 가장 집중적인 시간이자 공간의 단적인 예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인 비엔나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아놀드 쇤베르크, 지그문트 프로이트, 구스타프 말러, 아돌프 로스, 구스타프 클림트에서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까지, 음악, 심리학, 건축, 미술, 철학 등 다방면에 걸쳐 우리가 오늘날 모더니즘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속출했던 그 시절은 그 환경이 어떠했는지의 호기심을 증폭시킨다. 정치적으로는 합스부르크 왕정과 자유주의가 섞이고, 사상적으로 반유대주의와 시온주의가 공존하고, 경제적으로는 산업화와 도시문제가 속출했던 이 시기는 온갖 가치들의 경연장, 모순들의 충돌점이라고 할 만하다. 또한 앨런 재닉과 스티븐 툴민이 잘 묘사한 것처럼 세기말의 비엔나는 이전 서구 인문의 총합적 상징이었으며 1차 세계대전 후에 나타날 사조의 기원이었다. 예술적 작품이든 학문적 성취이든,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열정을 잃지 않는 인간이 그 성취도가 높은 것은 달리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것처럼, 이 시절의 비엔나는 환경이 인간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일 것이다.
그렇다면 서구문학에 있어서 모더니즘의 상징으로 자리잡은 제임스 조이스에게 그가 자란 아일랜드 혹은 그 안의 더블린은 그에게 어떤 환경적 동인으로 작용했을까? 정치적으로는 영국에 편입되었으나 끊임없는 독립 시도로 투쟁하는, 종교적으로 보수적인 가톨릭이 대부분인 아일랜드는 비엔나라는 도시만큼 정치적으로 모순적이고, 문화적으로 풍부하고, 유희적으로 타락한, 그런 복잡한 양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정치와 종교라는 두가지 축의 단순 구도속에서 인문적이고 예술적인 소양을 길러주는 토양을 마련해 주고 있었다.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한 젊은이가 20세기 초의 아일랜드에서 자랐지만 그곳을 벗어나며 보여주는 예술적 망명이자 독립선언이다. 그는 아일랜드 국민 혹은 더블린 시민으로서의 작가로 남기를 원한 것이 아니라 세계 시민으로 태어나기를 바랬다. 더 정확한 표현을 하자면 제임스 조이스는 세계의 예술 시민으로 귀화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술 시민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그것은 쉽지 않은 길이고, 좁은 문으로 가는 길이다. 그러나 제임스 조이스의 페르소나이자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주인공인 스티븐 디덜러스는 예술적 망명의 길을, 타고난 예술적 감성으로 자신이 인식하고 판단하는 예술의 이정표를 통해 몇단계의 국면을 통과하면서 서서히 걸어 들어간다.
진정으로 자신의 길을 걷는 존재에게 있어서, 특히 예술가에게 있어서 대상(예술,비예술 구분없이 모든 대상)의 인식은 온전히 자기 소화적인 과정을 거치게 된다. 타자로부터 이미 소화된 것을 먹는 것은 자신에게 구토만을 낳을 뿐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인식되어진 대상이 아닌 인식이전의 대상을 받아들임으로써 인식의 소화를 거친다. 이것은 내적으로 타고난 용기와 자아를 이루려는 선험적인 측면에서의 자세에 가까운 것이기에 단시간 교육적으로 습득할 기회를 가지기란 쉽지 않다. 드물게도 스티븐 디덜러스는 이런 원천적 자세를 어린 시절에 습득하고 있었다.
디덜러스는 클론고우즈 우드 칼리지에서 학교 급우들에 비해 작고 외소한 존재였지만 '카더라'하는 것에 맹목적으로 동의하지도 않았으며, 권위에 휩싸인 교사에게 잘못 판단했다고 생각한 것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는 자신의 가치판단으로 생각뿐 아니라 실천을 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생각대로 판단하고 움직인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이란 자신의 생각없이 수용된 타인의 생각이며 자신의 움직임이란 자신의 움직임이 아닌 타인의 움직임을 베낀, 무비판의 생각과 행동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해없이 이해했다는 착각과 무의식의 세계속에서, 온갖 선입견과 제도의 틀안에 갇힌채 자기 세계도 아닌 것을 붙들고 자기 세계라고 착각하고 하소연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살기 위해선 어떻게든 살수 있지만 자기 세계를 이루면서 살기 위해선 몇가지의 비상한 면이 요구된다. 외부로부터 주어진 권위에 무비판적으로 순응하지 않고, 대중의 판단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물론 이 두가지는 사실상 같은 것이다. 권위는 대중으로부터 주어지고 대중은 권위에 복종한다. 권위의 판단을 스스로 내리거나 대중의 가치에 무조건적으로 협력하지 않는 존재는 소외로부터 멀어지기 쉽지 않다. 그러함에도 그를 존재케 하는 힘은 단연코 내적 의지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순전히 몰이해적인 대중으로부터 거리를 둔채, 내적 의지를 가진 존재는 많지는 않지만 적지 않게 존재한다. 자기답게 살겠다는 의지를 갖춘 존재라면 사실상 모두 이 유형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디덜러스형 내적 의지의 인간은 궤의 단계를 달리 한다. 이를테면 디덜러스는 내적 의지의 단계를 인문적인 측면, 종교적인 측면, 예술적인 측면에서의 역사적 궤를 통과하면서 시대의 산물로서, 그러나 시대에 얽매이지 않는 존재로서 상승시킨다. 디덜러스는 서구의 인문적 지성의 도정 위에서, 가능하다면 맨 앞줄에 서서 가겠다는 예술가로서의 자기 선언을 하고 있는 셈이다.
디덜러스는 성장하면서 집에서, 학교에서, 거리에서 가족관을, 종교를, 정치를, 사회를 남의 의견이나 생각보다 스스로 인식하고 판단한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범주들과 내용은 그를 인문적 지성으로 키우기에 풍부한 양식을 제공하고 있다. 그가 아리스토텔레스를, 토마스 아퀴나스를, 바이런을, 예이츠를, 온갖 신화와 문학을 풍부하게 섭취할 수 있었던 아일랜드의 인문적 토양은, 그를 예술 시민으로 선언케 하기 위한 사전적 충분조건이다. 디덜러스가 그런 토양에서 성장하지 못했더라면 그의 타고난 심성에 비추어 볼때 극심한 우울증에 빠졌거나 내적인 자기 넋두리에 빠진, 신경예민증 환자로 살아야 했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적 의지의 스스로 갖춘 자가 걷는 길은, 더군다나 예술가가 걸어야 하는 길은 그 토양에서 자랐으되 그곳을 탈출해야 하는 존재이다. 그는 아일랜드가 함유해 온 인문적 토양의 사다리를 딛고 올라갔으나 다시는 내려올 필요가 없다. 특히 예술에 있어서 그 사다리는 올라간 후에는 가차없이 버려야 하는 대상이다.
특히 아일랜드에 있어서 그 사다리는 화석화되어 있고 심지어는 썩어 있기까지 하다. 디덜러스가 클론고우즈 우드 칼리지에서 신부들을 통해서 교육받는 장면을 살펴보자. 신부이자 선생인 그들은 학생들에게 신앙의 고양을 위한 내용의 주제를 죽음의 불안을 중심으로 심판과 그 결과의 끔찍함을 그 어떤 공포영화보다 극심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점은 예수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중심적인 계명보다는 한참 먼, 가장 저급한 형태의 신앙교육의 하나로 삼을만 하다. 또한 이런 방식이 그 제도를 존속시키기 위한 근거이자 자기증명으로 작용한다.
디덜러스는 토마스 아퀴나스 등을 통해 예술관의 긍정적 영향을 받고 자랐지만 학교에서의 이런 직접적 수업을 통해 제도적 종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가지게 된다. 학문이든 종교이든 그것이 제도와 조직을 통해 오랫동안 전수되어 온 것이라면 그것은 타락이 불가피하다. 끊임없는 자기쇄신만이 이것을 극복할 가능성을 열어두지만, 그것이 내적인 순수와 충만함으로 전수되지 않는 것이라면 불가피한 것이다. 모든 출발은 순수하고 부드러우나 모든 종점은 딱딱하고 타락함으로 가는 길을 예비하고 있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새로운 열매를 낳을 가능성을 잉태한다.
스티븐 디덜러스는 그 이름의 원천의 의미가 주는대로, 예술적인 희생을 무릅쓰고 자유로 가는 길을 걷기 위해서, 아일랜드가 낳고 수입하고 길러온 예술, 종교, 학문, 정치 등의 미로 속을 헤메이는 것이 아니라 예술의 이름으로, 그곳을 수직상승하여 한단계 높은 차원의 방법을 통해서 벗어나고자 하는 존재이다. 그것은 그 미로 속을 충분히 헤매었기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때가 되어 예술적 자유를 선포하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다. 그가 이카루스의 날개를 달고 높이 날고 멀리 날아가는 것은 태양이 그의 예술적 순교를 허락하는 곳까지이다.
또한 스티븐 디덜러스의 이 문학적 선언은 예술적 선지자로서 후에 나타날 또다른 스티븐 디덜러스의 부활을 예고하는 선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나중에 올 스티븐 디덜러스 2세여. 그의 미로속을 돌아보되 그 미로안에 갇혀서는 길이 없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과감히 버리고 날아 오르기를...
늙으신 아버지시여, 늙으신 공장(工匠)이시여,
지금 그리고 영원토록 변함없이 저를 도와 주옵소서.
Old father, old artificer,
stand me now and ever in good stead.
- <젊은 예술가의 초상> 중에서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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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며칠 전에 생애 처음으로 완독했습니다. 지금 <율리시즈> 읽는 중입니다.
<더블린 사람들>에는 디덜러스가 등장하지 않지요? 무식한 질문입니다만 ^^;
얼마전에 읽으셨다니 기막힌 타이밍이네요^^ 디덜러스라는 이름을 조이스는 유별나게 좋아한것 같습니다. 시간이 되면 영화 <율리시즈의 시선>도 한번 보시길. 오랜 여정을 지나 고향 혹은 근원을 찾아간다는 서사적 캐릭터는 너무 매력적이라 호머의 오디세이아 이후 많은 예술가들에 의해 작품등으로 재조명받는 것 같습니다.
Thanks for posting the wonderful writing. OMG, I gotta go back and dig the novel out. It's been so long since I first tackled this novel. A masterpiece, no doubt!
역시 읽으셨군요. 걸작의 매력은 후일 다시 봐도 새롭게 느껴진다는 거죠. 마치 클래식 음악처럼요.
아일랜드와 우리 한반도는 닮은꼴같아요..영화를 보아도 쨘한 그 무언가를 공감하죠..^^
십 년 전 쯤 학원생 중 한 명이,재수를 하게 되었는데, 서점에서 우연히 만났었죠..재수학원 수업시간에 갑자기 뛰쳐나와 서점으로 왔었대요..문학을 공부(수능)하다보니, 예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예술의 근원이 무엇일까 찾다가 철학이 궁금해졌다고요..그 청년 철학책을 뒤적여서 서점문을 나오는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어요.^^이 청년학도는 지금 어떤 일을 하고있을까 궁금해집니다.
율리시즈님 덕분에 옛추억을 열게되었네요.그리고 율리시즈님의 인문적 소양에 깊은 존경을 표합니다.저는 지금하고있는 일도 넘 벅차기만하거든요^^
저도 지리적으로 가까운 일본보다는 상당히 먼 곳인데도 아일랜드가 심정적으로 가까이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문학도 영화도 음악도 감상할 때마다 공감대가 큼을 느낍니다. 아일랜드는 언젠가 한번은 갈곳 같습니다.
그리고 상대장의 단점보다는 장점을 잘 봐주고 일이 바쁠텐데도 긴거리 마다않고 감상활동의 열정을 보이는 자유고독님께는 제가 오히려 더 많이 배웁니다. 적지 않은 분들도 저랑 같은 생각일 겁니다. 그 열정 변치 마시길~
율리시즈님도 참 별말씀을요..장점을 보고싶은 것은 그래야 내맘이 편해서이고, 먼길 마다않고 찾아다니는 일은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어서 그렇죠..뭐..부끄럽사옵니다.^^
아일랜드엔 초록을 나타내는 말이 수십가지라지요. 그 많은 초록이 일어나는 계절에 가고 싶은 곳 입니다.
조성진님의 피아노에 혼과 몸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고서 집에가는 기차에서 꼼꼼이 읽었습니다.
독서욕을 활활 불러 일으키시는군요.
추천하시죠. 예술가와 율리시즈 누구의 번역을 젤 좋아하시나요.
사다리는 더이상 필요치 않다.
전율을 느낍니다.
한편으론 성에 차지 않는다면 욕심인가요? 율리시즈님의 글은 고양감을 주네요.
저는 지금 이곳에 있을뿐이지만 상상은 멀리 높이 날아가고 싶어합니다.
우와~!!하늘나리님도 광주시향공연장에 오신 거구나~^^저도 갔었어요~~다샘님도 오셨다고 페이스북에 올리셨던데요?ㅎㅎ
다샘님도 다샘님어머님도 만났어요. 급히 오느라 못만나서 서운하네요.
아~그러셨군요..저도 이번엔 동행인이 생겨서요..^^비가 제법 많이 내리던데 오고 가시느라 고생많으셨어요..^^
하늘나리님~'아일랜드'라는 제목으로 페이스북에 올라왔는데
초록의 수십가지 색이 바로 이 모습인거 같아요..^^
예전에 아일랜드 영화 중,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본 적이 있는데
그 초록의 물결 영상이 눈에 훤하게 각인되어 있어요.^^
영화를 좋아하시는 어떤 남자분과 보게 되었는데(내생애 몇 안되는ㅋ)
역시 영화는 혼자 봐야 제맛인거 같아요.ㅋ
영화에 몰입하지 못하고, 괜시리 신경쓰게 되더라구요.^^
아. 초록이네요.
초록을 나타내는 말이 수십가지라고 하니, 우리 말에도 엄청나게 다양한 표현이 있으니, 그것들마저도 비슷한 점이 있네요. 역시 아일랜드는 연구대상(!)입니다. 또, 자유고독님이 올리신 이미지를 보니 그 표현이 조금 실감납니다^^
자유롭지만 고독하다 / 아! 저 초록의 바다... "예술은 경이가 아니라 초록의 영원인 그 이타카"라는 시구가 생각나는군요.
전 김종건 선생의 번역으로 읽었습니다. 조이스의 권위자이긴 한데 문장이 그리 유연한 편은 아닙니다^^. 근데 하늘나리님은 평소의 독서열도 높으신데 불타오르신다하니 좀 새삼스럽습니다 ㅋㅋ
요즘은 일과 공부에 치여서리... 삼월이 가면 절반은 간 것 같으니 좀 읽어보려구요.
저도 김종건 교수의 번역으로 읽는 중입니다만, 너무 직역에 치중했다는 인상을 받게 되네요.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될 텐데... 언젠가 <피네건의 경야>를 읽어보려고 했다가, 이건 뭐... ㅡㅡ; 그런데 김종건 교수 아니면 국내에선 해낼 수 없는 작업이긴 하겠지만, 이 경우엔 번역에 비판이 대단히 많더군요.
저도 도리안님과 생각이 비슷해요. 김종건 선생을 참조할때는 주로 조이스의 작품 연구와 그에 관한 글을 학구적으로 보고자 할때 도움이 될것 같고 문학번역서로 볼때는 민음사에서 나온 것이나 최근에 새로이 번역된 것을 읽는 것이 읽는 재미가 더 있을것 같습니다. 김종건 선생은 조이스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독자의 입장에서는 글이 너무 딱딱하고 권위적이라는 느낌을 지우기가 힘들죠^^
If you want to have a true taste of the Irish stuff, watch David Lean's 'Ryan's Daughter' (1970).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구해지려나 모르겠어요.
디비디로 출시되었습니다. 그런데, '라이안의 딸' 대부분의 평은 별로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믿지 마세요. 뉴욕의 저명한 평론가 Vincet Canby마져도 안좋게 봤는데, 놀라움을 금할수가 없습니다. 도데체, 영화를 안다는 사람들이 모두 짜고 그러는것 처럼 모두가 이 작품을 꼬집었습니다. 영화는 비쥬얼한 예술입니다. 그 시각적인 요소에 모든것을 걸고 찍고 연출한 작품인데, 무슨 '닥터 지바고' 속편이라도 기대했다가 실망한 그런 혹평들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 남의 얘기 듣지 마시고 아무 편견도 없이 감상하세요. It is the MOST MISUNDERSTOOD (unfairly) of all Lean's films.
그렇군요. 푸왕카레님의 의견 적극 참조하겠습니다. 근데, 구자범, 젊은 예술가, 제임스 조이스, 아일랜드, 라이언의 딸, 데이빗 린, 모두 조금씩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구자범, 젊은 예술가, 제임스 조이스, 아일랜드, 라이언의 딸, 데이빗 린, 모두 조금씩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 그래서, 모두가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까요? '라이안의 딸' 불루레이로 나오면 0순위로 구입합니다!
깔끔하고 매력적인 설명들......율리시즈님 이글 복사해서 혼자 낭송해 봐야겠어요.
그 다음 다시 한번 책을 읽어 봐야겠습니다. *^^*
복사해서 따로 볼 정도만큼은 아닌것 같습니다만 삶의단편님께서 잘 봐주셨다면 다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