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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09월07일(토요일)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탐방일정
탐방지 :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서울시립미술관 본관 건물은 한국 최초의 재판소가 있던 자리에 일제가 1928년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은 것으로 해방 후 대법원 청사로 쓰였다. 1995년 대법원이 서초동으로 옮겨가면서 옛 대법원 건물의 현관·전면부는 보존하고, 현대식 건물의 후면부를 증축해 2002년부터 미술관으로 활용 중이다.]
탐방일 : 2024년09월07일(토요일)
탐방코스 : [시청역 11번 출구~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2층 가나아트컬렉션전시실에서 김인순 컬렉션 [일어서는 삶]을 관람~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3층 전시실과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3층 크리스탈 갤러리에서 기획전시 중인 [천경자 탄생 100주년 기념《격변의 시대, 여성 삶 예술》]을 관람~시청역 10번 출구]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2시간26분 소요)
11:59~12:30 연신내역에서 지하철 3호선을 타고 을지로3가역으로 가서 2호선으로 환승하여 시청역으로 이동한 후 시청역 11번 출구로 나옴 [31분 소요]
12:30~12:37 서울 중구 서소문동 1-9 번지에 있는 시청역 11번 출구에서 탐방출발하여 덕수궁길 61 번지에 있는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으로 이동 [7분 소요]
[서울시립미술관(서소문본관)은 시대와 미술의 변화에 부응하고 서로를 채우며 성장해 가는 네트워크 미술관이다.
서울 도심 한복판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자리 잡은 서울시립미술관은 1920년대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옛 대법원 건물을 전면부만 그대로 보존한 채 신축하였다. 미술작품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보존하여 다양한 기획전을 통해 일반 시민들에게 미술을 알리고, 현대미술의 발전을 위해 이와 관련된 출판 활동과 작가 지원 프로그램을 시행하며 다양한 교육 강좌를 운영하여 미술 문화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미술관 본관 1, 2, 3층에는 총 6개의 전시실이 있는데, 이 중 1개는 상설전시실로 [천경자의 혼]을 상시 전시하고 있다. 지하에는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강의실과 세미나실이 자리하고 있다. 각 예술 분야의 자료를 소장한 자료실도 갖추고 있으며, 전시용 도록과 아트상품을 판매하는 뮤지엄샵과 카페테리아 등의 편의시설도 운영하고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정동극장, 정동제일교회가 있는 고전미 넘치는 장소를 품은 정동길 옆에 있어 미술관 관람의 여운을 이어갈 수 있다.
소재지 : 서울 중구 덕수궁길 61
이용시간
하절기(3~10월) 10:00~20:00 (토·일·공휴일 19:00까지)
동절기(11~2월) 10:00~20:00 (토·일·공휴일 18:00까지)
※ 뮤지엄나이트 운영 : 매월 둘째주 수요일, 마지막 주 수요일) 22:00까지 연장 개관
※ 관람종료 1시간 전까지 입장 가능 (평일 19시 / 주말, 공휴일 17시)
매주 월요일 휴무]
[덕수궁 돌담길에서 정동길로 접어들면 고풍스러운 건물 한 채가 우뚝 서 있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이다. 전시보다 먼저 미술관 건물 자체의 건축미가 두드러진다. 미술관 측은 르네상스 양식인 옛 대법원 건물의 전면부는 그대로 보존하고 후면부에 현대식 건물을 신축했다. 미술관에 들어섰을 때 가장 처음 만나는 공간이 바로 옛 건물의 전면부와 새 건물의 벽면을 유리로 연결한 매개 공간이다.
특히 유리 천장으로 쏟아지는 자연광은 정말 매력적이다. 서울시립미술관의 전시회는 전문성과 대중성을 적절히 조화시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샤갈, 피카소, 마티스, 마그리트, 고흐 등 미술에 문외한인 사람도 익히 알 만한 세계 유명 화가들의 전시회는 물론 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 미술관 봄나들이전 등 특색 있는 기획 전시를 선보인다.]
12:37~13:35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2층 가나아트컬렉션전시실에서 김인순 컬렉션 [일어서는 삶]을 관람
[김인순 컬렉션 ≪일어서는 삶≫
전시장소 :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2층 가나아트컬렉션전시실
전시기간 : 2024.08.29~2025.02.23
관람시간 : 평일(화–금) 오전 10시–오후 8시
토·일·공휴일 : 하절기(3–10월), 오전 10시–오후 7시
동절기(11–2월), 오전 10시–오후 6시
《서울 문화의 밤》 운영: 매주 금요일 오전 10시–오후 9시
입장시간 : 관람 종료 1시간 전까지 입장
휴관일 : 1월1일, 매주 월요일(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정상 개관)
관람료 : 무료
도슨트안내 : 매주 화~일 15시 운영
전시장르 : 상설
참여작가 : 김인순, 그림패 둥지
작품수 : 20
전시문의 : 최지나 02-2124-8954
관람 문의 : 안내 데스크 02-2124-8868
전시 안내
김인순 컬렉션 ≪일어서는 삶≫
작가 김인순(金仁順, 1941– )은 한국 여성주의 미술가이다. 사회를 반영하는 리얼리즘 미학과 현실주의 태도를 중요하게 여긴 작가는 한국 여성의 사회적 현실을 예술로 표현했다. 여성해방운동을 실천하면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건강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여성의 시대적 가치를 탐색했다. 더욱이 여성이 가진 긍정의 힘과 생명성을 중요하게 여기며 한국의 자생적 여성미술을 민족적 조형언어로 구축하고자 했다. 2020년 작가는 한국 여성주의 미술 연구와 미술사적 기록 보존을 위해 양평 작업실에 있는 작품 106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했다. 기증 작품은 작가 본인의 작품 96점과 1980 – 90년대 여성미술 운동을 실천한 여성미술연구회(여성미술분과, 1986 – 95), 그림패 둥지(1987– 89), 노동미술위원회(1990 – ) 등이 공동 제작한 걸개그림 10점으로 구성된다.
김인순 컬렉션은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흐름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여성 작가들은 1980년대 한국 여성운동의 영향을 받아 여성의 현실에 대해 발언하는 작품 활동을 펼쳤다. 김인순 작가는 최초의 페미니즘 전시로 기록되는 제2회 《시월모임 – 반에서 하나로》(1986)를 기획했다. 여성미술연구회와 그림패 둥지를 조직하고 한국여성단체연합과 교류하며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현실을 작품으로 그렸다. 나아가 여성의 고유한 경험 가치를 고민했다. ‘모성’을 중요하게 여긴 작가는 척박한 환경에서도 생명을 낳고 길러내는 여성의 존재를 ‘뿌리’에 비유한다. 시대 상황을 예술로 반영하고자 한 민족미술협의회(1985)의 발기인으로 참여한 김인순은 민족주의 여성미술가이기도 하다. 여성민중의 계급 현실을 비롯한 노동과 육아에 관심을 뒀고, 노동미술위원회를 구성해 노동자의 삶을 공감하는 회화를 제작했다. 또한 여성의 관점으로 ‘역사’ ‘통일’ ‘산하(山河)’ 등의 주제를 그렸다. 김인순 컬렉션에는 여성미술연구회 연례전 《여성과 현실》(1987 – 94)의 출품작이 포함되어 한국 여성사를 아우르는 한국 여성미술의 맥락을 보여주고 있다.
전시 구성
이번 전시 《일어서는 삶》은 김인순이 천착했던 ‘여성’이란 주제의 예술적 실천을 들여다본다. 작가의 여성주의 태도는 여성 존재의 애환에서 시작한다. 그는 여성의 건강한 의지와 생명 에너지가 인류의 평등하고 밝은 미래를 이끈다고 믿었다. 전시는 세 개의 섹션으로 구성되며 총 20점의 작품과 아카이브가 출품된다.
[1] 첫 번째 섹션 ‘여성이란 이름으로’는 현실과 역사에서 소외되고 희생된 여성들의 서사를 작가가 어떻게 재현하고 있는지 들여다본다.
[2] 두 번째 섹션 ‘움켜쥐는 아름다움’은 역경에 맞서며 결실을 이룬 여성들의 굳건한 모습과 척박한 환경에서 생명을 피우는 자연의 근원적 여성성을 살핀다.
[3] 세 번째 섹션 ‘생명, 빛의 여정으로’는 인류의 축복인 잉태의 기쁨을 민족미술 형식으로 담아낸 작품에서 여성의 우주 창조적 가치에 대한 작가의 메시지를 살펴본다.
김인순 컬렉션 《일어서는 삶》을 통해 한국 여성미술에 관한 관심을 제고하고 다양한 연구와 논의들이 풍성해지기를 기대한다.]
[김인순 컬렉션 ≪일어서는 삶≫ 작품 소개
<여와 남>
김인순은 남성의 권위주의를 고발하고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작품을 선보이며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단초를 마련했습니다. <여와 남>은 나체의 여성과 남성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담은 작품입니다. 여성이 남성보다 다소 크고 어깨도 더 넓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경직된 자세로 불편한 심기가 드러나는 남성과 그를 뻣뻣한 자세로 곁눈질하며 노려보는 여성 사이에 긴장감이 느껴집니다. 김인순은 “근본적으로 여자를 앞세워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남성이 우선시되는 현실을 반전시켜 여성이 앞서 있는 모습을 그렸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남성과 여성 간 위계질서에 도전하고 주체적인 여성을 재현하고자 했습니다.
<일어서는 여자>
<일어서는 여자>는 한 명의 여성주의 미술가로서 세상에 꿋꿋이 맞선 작가의 현실 인식을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커다란 나무조차 쓰러뜨릴 것 같은 강풍에도 불구하고 곡괭이를 든 채 맨발로 언덕에 서 있는 위태로운 여성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언덕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과 굴뚝이 있는 공장은 이 여성의 삶의 터전을 암시합니다. 휘몰아치는 역경에 당당히 맞서며 묵묵히 자신의 삶을 일구는 여성에게서 생의 의지와 강인함이 느껴집니다. 화면을 가로지르는 과감한 구도와 작은 소재들을 구성하여 하나의 전체 이야기를 조직해 나가는 서사 방식이 돋보입니다. 이후 김인순의 작품에 주요 소재로 등장하는 ‘가정과 노동’ ‘여성의 건강한 아름다움’ ‘나무와 땅 ‘생명과 생산’ 등의 개념을 살펴볼 수 있는 초기작입니다.
<엄마의 대지>
<엄마의 대지>는 울산 공업단지를 배경으로 힘겹게 일하는 여성노동자의 모습을 그린 작품입니다. 뿌연 연기를 뿜어내는 거대한 공업단지와 그 아래로 연결된 지하 배관은 산업화로 훼손된 대지 모습을 드러냅니다. 검붉게 묘사된 땅 밑에서 아이에게 젖을 먹이며 힘겹게 버티는 여성의 모습은 ‘엄마 노동자’의 강인한 모성애와 고된 삶의 현실을 동시에 환기하며, 강인한 눈빛은 여성의 힘과 의지를 드러냅니다. 지하 배관에서 흘러나와 여성 앞쪽까지 이어진 노란 불꽃은 척박한 땅에서 산업화의 불꽃을 키워낸 여성노동자들의 생명력을 은유합니다. 불꽃 끝에서 피어난 푸른 새싹은 대지의 생명력과 여성이 탄생시킨 생명으로 변화할 미래 희망의 상징을 나타냅니다. 김인순은 이 작품을 <뿌리> 시리즈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생명을 키워내는 여성의 능력과 모든 생명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순리를 연결한 작품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새싹을 피워내는 대지의 자정 능력과 고된 삶 속에서도 아이를 길러내는 모성이 갖는 힘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긴 이야기>
생명을 생산하는 주체로서 여성의 힘에 주목해온 김인순은 1990년대 중반부터 생명을 잉태하고 길러내는 여성의 잠재적 능력을 ‘나무’ ‘뿌리’ ‘대지’에 비유했습니다. 초기 <뿌리> 시리즈가 여성과의 존재적 일체감에 집중했다면, 2000년대는 메마른 환경에서도 영양분을 찾아내는 실뿌리를 강조하며 황톳빛과 초록빛이 채워진 물기 가득한 숲 풍경을 제시합니다. <긴 이야기>는 폭우로 흙이 쓸려 내려 밑동과 뿌리가 밖으로 노출된 나무가 비탈 귀퉁이에서 간신히 대지를 움켜쥐고 위태롭게 있는 모습을 그린 작품입니다. 오랜 고초 속에서 생명을 지탱하기 위해 뿌리는 흙덩이를 부여잡고 길게 뻗어나갑니다. 푸른 들풀이 자라난 물기 머금은 대지는 뿌리와 함께 숨 쉬며 잠재적 생명력을 보여줍니다. 김인순은 땅을 식물 뿌리와 줄기, 잎, 꽃이 숨 쉴 수 있게 하는 생명의 어머니로 인식했고, 여성은 자연의 리듬과 질서를 몸에 담아 생명을 길러낸다고 보았습니다. 이 작품은 무너진 언덕에서 흙덩이를 부여잡고 다시 풀이 자라 새롭게 뿌리내리는 유기체의 순환을 통해 한 생명의 굴곡진 긴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합니다.
<엄마! 엄마!>
사회적 약자로서 여성이 현실에서 겪는 문제를 살펴본 김인순은 도시 빈민층 여성의 삶과 노동에도 관심을 뒀습니다. <엄마! 엄마!>는 젊은 어머니가 불안한 표정으로 어린 두 자녀를 품에 안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검붉은 공간에서 날아오르는 집기들은 위기감을 조성합니다. 미술평론가 민혜숙은 이 작품을 “생계 대책으로 꾸려가던 자신의 노점상이 철거시책으로 압수당하자 망연자실해 있는 엄마와 아이들을 그린 작품”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실제 1992년 강경한 노점상 관리정책이 시행되었습니다. 김인순은 급격한 도시화가 초래한 빈민계층의 증가 속에서 불완전한 상황에 부닥친 빈민층 여성의 고충을 공론화하고자 했습니다. 겁먹은 아이들을 끌어안고 달래면서 앞으로 생계를 어떻게 꾸려나갈지 걱정 근심하는 여성을 포착한 이 작품은 여성의 이중 노동의 고충뿐만 아니라 사회 시스템에서조차 보호받지 못하는 빈민층 여성과 가정의 불안한 환경조건을 이야기합니다.
<울음도 서러워라>
<울음도 서러워라>는 동학혁명 100주년을 맞아 그 역사적 의의를 재조명한 《갑오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전: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위해 제작한 작품입니다. 붉은 땅 위로 온갖 수탈에 시달리는 힘겨운 삶을 참고 견디다 봉기한 동학군이 일본군에게 학살된 처참한 모습이 재현되어 있습니다. 상처로 일그러진 비통한 표정의 여성은 넋을 잃은 채 황량한 산을 맨발로 헤매는 것 같습니다. 그 모습은 혁명에서 목숨을 잃은 수많은 농민군과 남겨진 가족의 비통함을 마주하게 합니다. 여성 민초가 흘린 눈물은 굵은 빗방울이 되어 산 능선을 타고 오른쪽 끝으로 이어집니다. 그곳에는 죽임당한 흰옷의 농민군이 누워있습니다. 그 위로 불꽃 형상의 영혼이 승천하고 들꽃이 태양을 뚫고 피어나 사방으로 광채를 발산합니다. 동학혁명 횃불을 들고 일어난 민초들의 희생을 기리는 이 작품은 기록되지 않은 여성 민초가 견뎌온 힘겨운 삶을 증언하는 역사화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분단의 눈물>
<분단의 눈물>은 남북 군사분계선을 따라 흐르는 사천강 위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소재로 한 작품입니다. 이곳은 한국전쟁의 포로 교환 이후 남북한 분단 현실을 상징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1993년 8월 《비무장지대 예술문화운동 작업전》을 개최하기 위해 김인순은 작가들과 6월 강원도 철원군 비무장지대를 사전 답사하며 장소에 새겨진 비극적 역사를 담아냈습니다. 7월에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이 장소를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다리 입구를 지키는 총을 든 미군 보초들과 안내판의 성조기는 강대국 주도로 정전협정을 맺은 분단된 한반도의 상황과 여전히 휴전 종식이나 통일 문제에서 주체적일 수 없는 민족의 비극적 현실을 드러냅니다. 젊은 여성 사진이 놓인 관을 끌어안고 눈물 흘리는 나이 든 여성은 오랜 분단으로 겪는 이산가족의 가슴 아픈 현실을 떠올리게 합니다. 왼쪽에는 이기형의 시 <잔인한 세월>의 시구가 쓰여 있습니다. 김인순은 남북 분단 상황을 미국 대 한국 또는 남성 대 여성이라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분법적 이미지로 제시하는 동시에 통일을 향한 간절한 염원을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정열은 이어지고>
사회적 생산의 주체이자 생명을 생산하는 여성의 힘에 주목한 김인순은 1990년대 중반부터 여성의 모성 능력과 거대한 자궁으로서 ‘어머니 대지’의 원형적인 생명 창조력 사이의 유사성에 이끌렸습니다. 그로부터 여성과 자연의 연관성을 더욱 강화한 본질주의적 여성미학을 발전시켰습니다. <뿌리>와 <생명> 시리즈는 생명을 잉태하고 길러내는 여성의 잠재적 능력을 ‘뿌리’와 ‘대지’에 비유했습니다. <정열은 이어지고>는 낙엽과 마른 식물이 수북이 쌓인 땅 위에 메마른 줄기에서 작은 연둣빛 새싹이 잎을 틔우고 붉은 실뿌리 한 덩이가 슬며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화면의 가운데로 모여진 형상은 대지, 나무, 뿌리, 자궁의 모티브가 점진적인 합일 단계로 이미지화되며 수많은 생명을 잉태하고 길러내는 여성의 역동적 힘과 대지의 생명력을 담은 공간을 함축합니다. 척박한 환경에도 축축한 흙에서 영양분을 찾아 생명을 이어가는 실뿌리의 강인하고 끈질긴 생명력은 역경과 시련 속에서도 민주화운동과 여성해방운동의 정열 또한 사그라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음을 은유합니다.
<생산의 땅>
여성민중의 삶에 관심을 둔 김인순은 1980년대 농축산물 수입개방을 반대하는 농성을 보며 여성농민의 삶에 주목했습니다. 모내기 장면과 잠시 쉬고 있는 여성농민의 모습을 담은 <생산의 땅>은 여성미술연구회의 주요 관심사인 ‘일하는 여성의 건강함’을 여성농민의 생산하는 노동에서 찾고자 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여성농민을 주체로 부각하고, 힘들지만 강건하게 노동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그려 기층 여성의 힘과 가치를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모내기로 채워지는 초록색 논과 노란색 머릿수건의 강하고 밝은 색감은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도 농작물 생산을 위해 힘쓰는 여성 노동의 긍정적 가치와 생명력을 보여줍니다. 당대 민중미술 계열 작가들은 한국의 급속한 산업화로 불거진 농촌 문제와 농경 가치를 공유했습니다. 그러나 김인순은 주체가 ‘여성’이고 ‘여성의 구체적인 현실’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그 결을 달리합니다. ‘생산’과 ‘땅’ 이미지는 1993년 이후 여성 고유의 생명성과 대지의 생명력을 연결하는 작업 흐름에서 중요하게 자리 잡았습니다.
그림패 둥지, <맥스테크 민주노조>
<맥스테크 민주노조>는 그림패 둥지의 구선회, 김인순, 최경숙이 맥스테크 노동조합의 투쟁 과정을 바탕으로 공동 제작한 걸개그림입니다. 노동자들의 임금투쟁을 위장폐업으로 대응했던 사건을 발단으로 여성노동자들이 54일간 전개한 농성 과정과 폐업철폐 모습을 담았습니다. 그림패 둥지는 노동자들에게 투쟁 상황을 직접 듣고 현장을 파악하고자 농성장을 찾아갔습니다. 김인순은 혹한의 날씨와 열악한 환경에서 결연하게 투쟁하는 여성노동자들을 보며 그들이 사회를 변화시키고 여성운동을 발전시킬 힘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성노동자들이 직면한 냉혹한 현실과 더불어 현장에서 느낀 감동을 전달하기 위해 둥지 작가들은 사건 전개 과정을 이야기 형식으로 묘사했습니다. 여성노동자 대다수가 안경을 낀 모습은 하루 열 시간 이상 컴퓨터 작업을 하며 시력 감퇴라는 직업병을 얻은 노동 현실을 반영한 것입니다. 이 작품은 1988년 3월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하며 한국여성단체연합이 맥스테크 노동자들에게 수여한 ‘올해의 여성상’ 수상 기념식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림패 둥지, <숨쉬며 살고 싶다>
<숨쉬며 살고 싶다>는 그림패 둥지의 구선회, 김영미, 김인순, 최경숙이 1988년 6월 4일 명동성당 문화관에서 개최된 ‘공해추방을 위한 시민 한마당’을 위해 공동 제작한 걸개그림입니다. ‘숨쉬며 살고 싶다’는 슬로건을 내세운 당시 행사에서는 공해 피해자들의 증언과 공해 실태에 대한 미온적인 대응을 비판하는 문화 행사가 펼쳐졌습니다. 둥지는 경제성장이라는 명목하에 무분별하게 수입된 공해산업이 초래한 심각한 도시 오염과 그로 인해 고통받는 민중들의 현실을 재현하고자 했습니다. 나아가 제3세계 국가들이 GNP성장을 위해 선진국의 공해산업을 수입하게 되는 글로벌 산업구조의 자본주의 이면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흰 머리띠에 마스크를 쓰고 공해산업으로 인한 대기오염의 심각성을 외치는 여성 시위대와 “진폐증 진단서”를 들고 있는 의사의 모습은 공해 문제를 둘러싼 시민의 적극적 행동을 촉구합니다. 또한 가족의 건강을 책임지는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고, 환경을 둘러싼 여성들의 행동을 조직화하기 위해 여성들의 적극적인 투쟁 모습을 강조했습니다. 이 작품은 1988년 10월 공해추방운동연합이 발행한 잡지 『생존과 평화』의 창간호 표지로 사용되었습니다.
<땅에는 천의 여성이>
<땅에는 천의 여성이>는 수북이 쌓인 마른 낙엽 위에 다양한 여성상이 등장하고, 그 사이로 작은 야생화와 풀들이 움튼 모습을 그려낸 작품입니다. 중앙에는 작가가 관매도에서 만난 할머니가 있습니다. 작가는 밭을 일구며 자식을 걱정하는 그 모습에서 생명을 생산하고 길러내는 인류의 어머니를 느꼈습니다. 왼쪽 방향으로는 민주화운동 현장에서 해방춤을 추었던 무용가 이애주, 엄마 노동자 홍성애, 전통복을 입고 춤추는 인물, 위안부 피해 여성 모습이 보입니다. 김인순은 이들의 모습을 땅 위에 중첩함으로써, 수많은 여성의 희생과 헌신이 터가 되어 메마른 땅에서 새로운 생명이 싹트고 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2004년 ‘땅·물·살-중심의 동요’를 주제로 개최된 《조국의 산하》 전시에 출품되었습니다. 중심을 동요하게 하는 주변 존재에 대한 탐구를 보여준 이 전시에서 김인순은 중심의 바깥에 위치하지만, 생명을 생산하는 강인한 힘을 지닌 여성들의 아름다움을 땅과 함께 제시하고자 했습니다. 척박했던 대지는 여성들이 가진 생명력으로 회복한 듯, <뿌리> 시리즈는 이후 작품에서 야생화와 초록빛 생명이 약동하는 숲속 대지로 변화합니다.
<일기>
여성의 삶과 노동 문제에 집중한 김인순은 집에서는 어머니이자 아내로서 육아와 가사를 전담하고 일터에서 고된 노동을 병행하는 ‘엄마 노동자’의 현실을 주제로 작업했습니다. <일기>는 피코노동조합 사무장 홍성애의 이야기를 담은 초상화입니다. 어머니를 기다리는 두 아이 모습과 “한 아내로, 어머니로 세상 걱정, 집안 걱정, 자식 걱정, 남편 걱정”과 같은 구절은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가사노동을 전담하면서도, 임금노동을 하며 현실과 맞서는 여성노동자의 고된 삶을 말해줍니다. 푸른 눈의 외국인은 임금을 지급하지 않고 철수했던 한국피코의 지사장이며, “농성장” 팻말은 사측을 상대로 한 여성노동자의 농성을 상징합니다. 노동과 육아라는 고단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굳건하게 서 있는 여성은 다부지고 강인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해도 우리의 생활은 밑에서 맴돌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길을 계속 걸어야 한다.”라는 말처럼 현실을 묵묵히 견디며 살아가는 여성노동자의 일상 모습과 조응합니다.
<태몽 09-3>
김인순은 2008년부터 여성의 생명력을 우주 에너지로 확장해 <태몽> 시리즈에 담아냈습니다. <태몽 09-3>은 거대한 나무를 중심으로 새로 탄생할 생명의 희망찬 미래를 염원한 작품입니다. 탱화의 군도식 구도와 민화의 대칭구도를 결합하여 화면을 구성한 균형미가 돋보입니다. 당산나무처럼 신성하고 영험한 기운을 뿜어내는 나무는 땅 밑으로 수많은 뿌리를 내려 대지를 지탱하고, 땅 위의 짙은 녹음은 하늘을 향해 뻗어나가며 우주적인 생명력을 보여줍니다. 나무뿌리와 함께 누워있는 여성은 대지의 자궁 안에 누워있고, 만물을 생성하는 어머니인 대지의 근원적 힘을 상기시킵니다. 화면 하단에는 고대 중국 모계신화의 창조신인 복희와 여와가 등장합니다. 두 신 가운데에는 민속의례에서 액막이용으로 사용되는 쌀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여성의 몸을 통해 태어나는 생명의 액운을 막고 복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은 것으로 보입니다. 하늘의 해와 달은 음양의 조화로운 기운을, 주변의 나비와 새, 구름 도상은 길상적 의미를 전달합니다.
<태몽 09-5>
<태몽 09-5>는 수목이 우거진 초원에 모인 군중이 해방과 생명의 춤을 추는 모습을 담고 있는 작품입니다. 밤과 낮이 공존하는 듯한 풍경 속에 서로 손을 부여잡고 환희에 찬 몸짓을 보여주는 사람들의 형상은 밤과 낮 구분 없이 발산되는 본질적이고 원초적인 생명 에너지를 전달합니다. 작가에 따르면, 남녀의 춤추는 장면은 “내가 생각하는 이상사회의 기쁨이 뭔가를 형태로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 해에서 나와 하늘로 퍼져가는 오방색 무지개는 생명 탄생이 우주를 뒤흔드는 사건이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쁨임을 보여줍니다. 하늘에 놓인 무수히 많은 별자리는 우주 기운이 땅 기운과 맞닿아 있음을 느끼게 합니다. 흐드러지게 피어난 야생화가 초원을 가득 채우면서 자연의 에너지를 증폭시키며, 풀숲에 자리 잡은 원앙 한 쌍은 생명을 위한 화합과 조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생명 생산의 우주적 힘과 인류의 원초적 에너지를 태몽으로 연결했습니다. 1980년대부터 민화를 수집하고 민족의 정체성을 담은 미 형식을 고민해온 김인순은 <태몽> 시리즈에서 우주 기운과 결합한 생명의 원초적인 아름다움을 민족적 조형언어로 완성했습니다.]
13:35~14:50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3층 전시실과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3층 크리스탈 갤러리에서 전시 중인 [천경자 탄생 100주년 기념 《격변의 시대, 여성 삶 예술》]을 관람
[천경자 탄생 100주년 기념 《격변의 시대, 여성 삶 예술》
전시기간 : 2024.08.08~2024.11.17
전시장소 :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3층 전시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3층 크리스탈 갤러리
관람시간 평일(화–금) : 오전 10시–오후 8시
관람시간 토 · 일 · 공휴일 : 하절기(3–10월), 오전 10시–오후 7시, 동절기(11–2월), 오전 10시–오후 6시
《서울 문화의 밤》 운영 : 매주 금요일 오전 10시–오후 9시
입장시간 : 관람 종료 1시간 전까지 입장
휴관일 : 1월1일 , 매주 월요일(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정상 개관)
관람료 : 무료
도슨트 안내 : 매일 오후 2시 (※휴관일, 추석 연휴 기간 제외)
ㅇ 서울시립미술관 도슨팅 어플리케이션을 다운 받으시면 무료 전시 해설 서비스를 상시 이용 가능합니다.
※ 구글플레이 또는 애플 앱스토어에서 "서울시립미술관 전시 도슨팅” 앱을 다운 받으실 수 있습니다.
전시부문 : 드로잉, 회화, 아카이브 등
전시장르 : 기획, 국내
참여작가 : 정찬영, 이현옥, 정용희, 배정례, 박래현, 천경자, 박인경, 금동원, 문은희, 이인실, 이경자, 장상의, 류민자,이숙자, 오낭자, 윤애근, 이화자, 심경자, 원문자, 송수련, 주민숙, 김춘옥, 차명희
작품수 : 86점
전시 문의 : 한희진 학예연구사 02-2124-8970
관람문의 : 안내 데스크 02-2124-8868
전시 안내
[전시 구성] 23명의 작가가 살아온 시대의 정치·사회적 변화와 미술제도가 작가의 삶과 작품에 미친 영향을 파악할 수 있도록 구성
1전시실: 격변의 시대
2전시실: 사회와 미술제도 I
일제강점기, 미술교육과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조선 미전)》(1922–1944)
청전화숙, 낙청헌, 여자미술전문대학(일본 도쿄) 연혁
《조선 미전》 연혁, 수상 작품
3전시실: 사회와 미술제도 II
광복 이후, 미술교육과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1949–1981)
고암화숙, 이화여자대학교, 홍익대학교, 서울대학교, 서라벌예술대학, 수도여자사범대학 연혁
《국전》 연혁, 수상 작품
창경궁과 예술
기사로 보는 동양화의 흐름
4전시실: 동양화 단체
5전시실: 여성, 삶, 예술
6 복도: 작가 연보, 자료
[전시 설명]
서울시립미술관은 2024년 천경자(1924–2015)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여성 작가 22명의 작품과 자료로 전시 《격변의 시대, 여성 삶 예술》을 개최합니다. 천경자 작가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자랐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당시 정규 미술학교가 없던 조선을 떠나 미술 공부를 하고자 1941년 일본 도쿄에 있는 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는 재학 중인 1943년 제22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조부상(祖父像)〉으로 입선했고, 태평양 전쟁(1941–1945)으로 수업 연한이 단축되면서 그해 가을 졸업했습니다. 일본에 남아 활동하고자 했으나 전쟁이 막바지에 달하면서 귀국해 1944년 제23회 마지막 《조선 미전》에서 〈노부(老婦)〉로 입선했습니다.
1945년 봄, 천경자는 귀국 시 도움을 준 이형식과 결혼하고 8월 고향 전라남도 고흥에서 광복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학력과 집안 사정을 사실과 다르게 말하고 결혼해 가장 역할을 하지 않던 이형식으로 인해 그는 모교에서 미술 교사를 하면서 어머니의 도움으로 학교에서 젖을 먹이며 아이를 키웠습니다. 그러다가 학교에서 조촐하게 마련한 개인전을 자축하는 의미에서 셋방에 기자들을 초청했는데, 여기서 김남중을 만나 오랫동안 일방적이고 고통스러운 사랑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던 중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이형식은 소식이 끊겼고, 못 먹는 나날이 계속되면서 영양부족으로 여동생 옥희가 폐병이 재발해 결국 사망하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처절하게 슬프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디기 위해 〈생태〉(1951)를 그렸고, 생계를 위해 그림을 그렸으며, 이를 전남 곳곳을 돌아다니며 팔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1953년 7월 휴전 협정이 되면서 정부의 서울 환도를 앞두고 당시 학부장이던 윤효중의 권유로 1954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전임강사가 되었습니다. 다음 해 그는 6월 제7회 《대한미협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았고, 10월 제4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특선하면서 작가로서 입지를 다졌습니다.
당시 동양 화단은 한국 고유의 특성을 반영한 ‘한국화’ 형성이 당면 과제였습니다. 조선 시대 이래로 동양화는 남화 양식의 산수화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일본이 일제강점기에 문화정치 일환으로 시행한 《조선 미전》에서 사실적인 사생(寫生)을 강조하면서 이는 일본화의 영향을 받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광복 이후 왜색을 탈피하고 한국 고유의 회화, 한국화 수립이라는 정답 없는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한국적인 재료, 소재, 기법 등을 추구해야만 한다는 틀에 얽매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천경자는 다른 작가와 달리 처음부터 자기 작품을 동양화, 한국화라는 틀에 가두지 않았습니다. 채색화는 곧 일본화라는 편견으로 대부분 작가가 수묵화를 그릴 때도 꿋꿋하게 채색화에 정진했습니다.
천경자는 학교에서 제자들을 가르칠 때도 어떤 틀을 제시하거나 강요하지 않았고, 제자들의 성향과 작업 방식을 존중했습니다. 그의 자유로운 태도와 교육 방식은 그가 제자 류민자, 이숙자, 오낭자, 이화자 작가가 어떤 틀에 갇히지 않고 그림을 배우고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밑받침이 되었습니다. 이들만이 아니라 전시에 참여한 많은 작가가 그의 작가적 태도에 큰 감화를 받았다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천경자는 1961년 11월 9일 자 『조선일보』 기사 「한국화는 형성될 수 있을까」에서 이상범, 고희동, 박노수와 달리 동양화에 관해 “세계 조류상으로 보아 모든 것이 변해가고 있다. 동양화 역시 변해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유행성(流行性)만 찬양하거나 시대 조류에 아부해서도 안 되지만 역사의 흐름에서 얼굴을 돌려서는 안 된다. 나는 원칙적으로 ‘한국화’를 반대한다. 왜냐하면 ‘일본화’란 것이 국수주의적 경향을 가지고 대두된 것인데 한국화를 운운한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쇄국적이고 협소한 굴레에 매어 달리는 격밖에 안 되는 것이다. 화가가 자기 나라에 사는 이상 성격이나 감정도 물론 자기 나라의 생태를 나타내게 마련인 데 ‘한국화’해가지고 담을 쌓아 놓으면 작가의 자유로운 개성이 오히려 죽어 버리기 마련이다. 현대에서 동양화나 서양화의 구분이 재료로써 갈라놓게 되는데 지금 ‘한국화’ 운운한 것은 난센스다. 그리고 동양화를 묵화로 그려야 한다는 그릇된 생각을 버려야 한다. 강서벽화만 보더라도 색채가 있었고 인도화도 그렇다. 동양화에서 묵화도 있을 수 있고 채색화도 있을 수 있다. 자유로운 창작적 개성 속에서 한국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표현한다면 그것이 곧 한국의 독특한 미가 생기는 것이지 굳이 ‘한국화’라고 이름 붙여 좁은 울안에다 집어넣을 필요가 없다.”라고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생각을 밝혔습니다. 천경자는 이러한 확고한 신념을 갖고 남다른 감수성과 감각으로 유년기의 기억, 음악, 문학, 영화에서 받은 영감, 연인과의 사랑과 거기에서 오는 고통, 그리고 모정(母情)을 자기만의 개성적 필치로 작품에 담았습니다. 1963년 미술사학자이자 전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이던 최순우(崔淳雨, 1916–1984)가 신문화랑에서 개최된 그의 여섯 번째 개인전 작품을 보고 난 뒤 말했듯이, 그는 “현대(現代)를 멋있게 걸어가는 작가”였습니다.
본 전시는 그간의 전시나 연구와 달리 천경자 작가의 이런 현대적 사고방식을 부각하고 그가 미친 영향, 그리고 당시 그와 동시대를 살았지만, 천경자와 달리 일제강점기로 인해 동양화에 씌워진 굴레를 벗어나기 쉽지 않았던 여성 작가들을 조망하고자 했습니다. 이들은 자기가 전공한 동양화에 부과된 의무만이 아니라,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게 없듯이 가사와 양육의 의무를 다해야만 했습니다. 가정과 작업 사이에서 늘 죄책감을 느꼈고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시간이 부족해 실컷, 마음껏 그림을 그리는 게 유일한 바람이었습니다. 작가로서 진보적 사고를 지녔던 천경자 작가 역시 여성으로서 당시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살아가기 쉽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을 자신의 호적에 올리지 못했고 당장 먹고살게 없는데 작품을 판매할 기회를 남성 작가에게 빼앗겨 아이를 데리고 간 그 자리에서 통곡한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예술을 파괴하지 못했던 것처럼, 시대적 난관과 가정적 어려움이 이들의 열정을 식히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림을 그렸고, 단체활동으로 전시를 이어갔고, 보수적이고 정형화된 《국전》 양식에서 벗어나 결국 각기 다른 조형언어로 자기 삶과 긴밀하게 연결된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이들은 공통으로 일제강점기(1909–1945), 8·15광복(1945), 한국전쟁(1950–1953), 4·19혁명(1960), 5·16군사정변(1961), 군사독재(1961–1979), 12·12군사반란(1979), 5·18 광주민주화운동(1980), 신군부 정권(1980–1993),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계속된 민주화 운동 등으로 이어지는 격변의 시대를 살아냈습니다. 사회, 개인의 삶, 예술은 결코 분리될 수 없기에 본 전시는 일제강점기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정치 사회적 흐름과 미술의 흐름을 한데 묶고 그 연관성을 찾아 당시 동양 화단 전체를 조망하고자 했습니다. 따라서 일제강점기 교육기관, 《조선 미전》의 전개, 광복 이후 교육기관, 《국전》의 전개와 그사이에 이루어진 정치, 사회적인 개입, 동양화의 흐름, 단체활동과 업적 등 많은 자료와 각 작가의 연보를 객관적 시각으로 체계를 잡고 상세히 정리해 이들의 작품 세계를 정확히 이해하고, 이들이 어떻게 비슷한 소재와 기법으로 그림을 그리던 ‘여류 동양화가’에서 지금의 ‘작가’로 성장해 왔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특히, 천경자 작가의 진솔한 자서전, 각종 기사와 글, 작품 등 다양한 자료를 심도 있게 연구, 이를 토대로 그의 삶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을 찾고 이들과의 관계를 탐색해 상세히 정리한 연보를 통해 그간 그에 대한 오해와 오류를 바로잡고 향후 보다 심화한 연구가 진행될 수 있을 거라 기대합니다.
본 전시를 통해, 한국 현대미술의 선구자인 천경자 작가를 기리는 동시에 '격변의 시대'를 살아내고 다양한 작품으로 한국 현대미술의 발전에 이바지한 정찬영, 이현옥, 정용희, 배정례, 박래현, 천경자, 박인경, 금동원, 문은희, 이인실, 이경자, 장상의, 류민자, 이숙자, 오낭자, 윤애근, 이화자, 심경자, 원문자, 송수련, 주민숙, 김춘옥, 차명희 작가의 작품세계를 어떤 경계도 제한도 없는 동시대 미술 흐름 속에서 재조명하고자 합니다.
관람 포인트
- 최초 대중 공개! 천경자 작가의 170호 대작 〈꽃과 병사와 포성〉(1972)
천경자의 170호 크기(가로 185cm, 세로 284cm) 대작 '꽃과 병사와 포성'이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개된다. 천경자가 1972년 베트남 전쟁 중인 베트남에 종군 화가로 가서 스케치해 완성한 작품으로, 국방부에 걸려 있다가 처음 일반 공개한다.
천경자의 1950년대 초 작품 〈옷감 집 나들이〉
- 《조선미술전람회》와 정찬영, 정용희 작가를 아시나요? 《조선미술전람회》 입선작과 자료 관람
- 당시 언론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수백만 관람객을 모은 블록버스터 전시를 아시나요?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입선작과 자료 관람
- 정찬영, 이현옥, 정용희, 배정례, 박래현, 천경자, 박인경, 금동원, 문은희, 이인실, 이경자, 장상의, 류민자, 이숙자, 오낭자, 윤애근, 이화자, 심경자, 원문자, 송수련, 김춘옥, 주민숙, 차명희의 대표작품 관람]
[틀을 깼던 화가 천경자…서울시립미술관 탄생 100주년 기념전
연합뉴스 기사 송고시간 : 2024-08-08 14:19
서소문본관 '격변의 시대, 여성 삶 예술'展…동시대 여성 작가 22명 함께 조명
(서울=연합뉴스) 황희경 기자 = 고(故) 천경자(1924∼2015) 화백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이를 기념하는 전시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다.
서울시립미술관은 8일부터 서소문본관에서 천경자 작가와 동시대를 살았던 여성 작가 22명의 작품과 자료를 전시하는 '격변의 시대, 여성 삶 예술'전을 연다.
천경자가 활동하던 시기 동양화단은 왜색을 탈피하기 위해 한국 고유의 특성을 반영한 '한국화'를 형성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주류를 이뤘다. 그러나 천경자는 자기 작품을 '한국화'라는 틀에 가두지 않았다. '채색화 = 일본화'라는 생각에 대부분 작가가 수묵화를 그릴 때도 그는 채색화를 그렸다.
"나는 원칙적으로 '한국화'를 반대한다. 왜냐하면 '일본화'란 것이 국수주의적 경향을 가지고 대두된 것인데 한국화를 운운한 것도 따지고 보면 쇄국적이고 협소한 굴레에 메어 달리는 격밖에 안 되는 것이다. (중략) 동양화를 묵화로 그려야 한다는 그릇된 생각을 버려야 한다. 강서 벽화만 보더라도 색채가 있었고 인도화도 그렇다. 동양화에서 묵화도 있을 수 있고 채색화도 있을 수 있다. 자유로운 창작적 개성 속에서 한국의 아름다움을 표현한다면 그것이 곧 한국의 독특한 미가 생기는 것이지 굳이 '한국화'라고 이름 붙여 좁은 울 안에 집어넣을 필요가 없다."(1961년 11월9일 조선일보)
스스로 틀을 벗어났던 천경자는 학교(홍익대)에서 가르칠 때도 제자들의 성향과 작업 방식을 존중했다. 이런 교육방식은 류민자, 이숙자, 오낭자, 이화자 등 제자들이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밑받침이 됐다.
이번 전시는 이런 천경자의 현대적인 사고방식을 부각하고 그의 영향을 살피며 동시대를 살았던 여성 동양화가들을 조명한다. 천경자와 마찬가지로 왜색 탈피와 전통 계승, 민족 의식 반영 등 당시 동양화 작가들이 짊어졌던 과제에 더해 가사와 양육까지 병행해야 했던 이른바 '여류 동양화가'들이 어떤 식으로 보수적이고 정형화된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 양식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하며 '작가'로 자리매김했는지 과정을 살핀다.
전시에서는 천경자의 170호 크기(가로 185cm, 세로 284cm) 대작 '꽃과 병사와 포성'이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개된다. 천경자가 1972년 베트남 전쟁 중인 베트남에 종군 화가로 가서 스케치해 완성한 작품으로, 국방부에 걸려 있다가 처음 일반 공개한다. 1943년 조선미술전람회 입선작인 '조부상'을 비롯해 역시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개되는 1950년대초 작품 '옷감집 나들이', 뱀을 주제로 한 '사군도'(원제 향미사·1969), 1978년 열흘간 4만명이 몰렸던 서울 현대화랑 개인전 출품작 '초원'(1973) 등 천경자 작품 9점을 볼 수 있다.
동시대 여성화가 작품으로는 격변의 시대를 전통춤의 형상으로 풀어낸 장상의의 '다시래기'와 '번뇌', 4·19 혁명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는 문은희의 '무제(4·19혁명)', 독도를 주제로 한 '공(空)-독도', 군사독재시기 교련 수업을 주제로 한 이숙자의 '캠퍼스 훈련생'(1982), 여성 작가가 그린 첫 정부표준영정인 오낭자의 '김육 표준영정'(1990) 등이 전시된다.
이밖에 조선미술전람회 최다 수상자인 정찬영의 '공작도'(1937)를 비롯해 총 86점이 소개된다.
전시는 11월7일까지. 무료 관람.
서소문본관에서는 이 전시와 함께 천경자 컬렉션 상설전 '영혼을 울리는 바람을 향하여'도 함께 진행된다. 천경자가 1998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한 작품 93점으로 구성된 '천경자 컬렉션' 중 '여행풍물화'로 분류됐던 천경자의 기행 회화를 중심으로 한 전시다.
전시 제목 '영혼을 울리는 바람을 향하여'는 천경자가 1986년 쓴 여행 수필의 제목이다.]
[갤러리 산책] 탄생 100주년, 여전히 슬픈 '전설의 이야기'
김희윤 기자
아시아경제 기사 입력 : 2024.08.12. 07:56
천경자 화백 탄생 100주년 기념 기획전
서울시립미술관 '격변의 시대, 여성 삶 예술'展
동시대 여성 작가 22명 작품 함께 선봬
천경자(1924∼2015) 화백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두 전시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연달아 개최된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서소문본관에서 천경자 작가와 동시대를 살았던 여성 작가 22명의 작품과 자료를 전시하는 기획전 '격변의 시대, 여성 삶 예술'전을 선보인다.
천경자 화백은 20세기 한국 화단을 대표하는 작가로 채색화 분야에서 독자적 화풍으로 후대 작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활동 초기부터 ‘자유로운 창작과 개성’을 중시한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동양화, 한국화라는 틀에 가두지 않았다. 채색화는 곧 일본화라는 당시의 편견에서 벗어나, 남다른 감수성과 감각으로 유년기의 기억, 음악, 문학, 영화에서 받은 영감, 연인과의 사랑과 고통, 그리고 모정을 개성적인 필치로 그린 진정한 모더니스트였다는 점에서 다른 작가들과 차별점을 갖는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 슬픈 전설의 이야기는 지워지지 않아요."
1998년 천경자 화백이 기증한 93점의 작품을 토대로 서울시립미술관은 다양한 전시를 개최해왔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현대적 사고방식을 부각하고, 그의 영향을 조명하는 동시에 동시대를 살았던 여성 동양화가들을 함께 살핀다. 왜색 탈피와 전통 계승, 민족의식 반영 등 당대 동양화 작가들이 짊어졌던 과제에 더해 가사와 양육까지 병행해야 했던 '여류 동양화가'들이 어떤 식으로 보수적이고 정형화된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 양식에서 벗어나 독자적 작품세계를 구축하고 '작가'로 성장하는지 그 과정을 주밀히 살펴본다.
대중에 처음 공개되는 작가의 170호 대작 '꽃과 병사와 포성'은 작가가 1972년 베트남 전쟁 중 종군 화가로 베트남에 직접 가서 스케치하며 완성한 작품이다. 당초 국방부 청사 1층 로비에 걸려 있던 것으로, 맹호부대 장병들의 촌락 지역 수색 작전 장면을 화폭에 담은 작품으로 알려졌다.
1943년 조선미술전람회 입선작인 '조부상'과 함께 대중에 역시 처음 공개되는 1950년대 초 작품 '옷감집 나들이', 뱀을 주제로 한 '사군도'(원제 향미사·1969), 1978년 열흘간 4만명이 몰렸던 서울 현대화랑 개인전 출품작 '초원'(1973) 등 천경자 작품 9점을 공개한다.
천경자 작가와 동시대를 살았던 동료, 제자 등 여성 작가 23인의 작품세계를 일제강점기, 한국 전쟁 등 시대적 배경과 함께 살펴보는 전시는 격변의 시대를 전통춤의 형상으로 풀어낸 장상의의 '다시래기'와 '번뇌', 4·19 혁명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는 문은희의 '무제(4·19혁명)', 독도를 주제로 한 '공(空)-독도', 군사독재 시기 교련 수업을 주제로 한 이숙자의 '캠퍼스 훈련생'(1982), 여성 작가가 그린 첫 정부표준영정인 오낭자의 '김육 표준영정'(1990) 를 비롯해 조선미술전람회 최다 수상자인 정찬영의 '공작도'(1937)를 포함 총 86점의 다채로운 작품을 선보인다.
전시는 23명의 작가가 살아온 시대의 정치·사회적 변화와 제도가 작가의 삶과 작품에 미친 영향을 총 5개의 전시실에 걸쳐 펼쳐 보인다.
전시는 11월 17일까지, 예약 없이 관람할 수 있다. 휴관 일을 제외한 매일 오후 2시 도슨팅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기획전과 함께 상설전 '영혼을 울리는 바람을 향하여'도 함께 진행된다. 전시는 천경자 화백이 1998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한 작품 93점으로 구성된 '천경자 컬렉션' 중 여행풍물화로 분류된 작가의 기행 회화를 중심으로 작가의 인생 전반과 작품세계를 조망한다.
전시 제목은 작가가 1986년 저술한 여행 수필의 제목으로, 한곳에 머물지 않고 경계 없이 이동하는 ‘바람’이라는 소재를 통해 심리적, 물리적, 지리적, 문화적으로 경계 없이 넘나들며 자신만의 길을 걸었던 천경자의 인생 전반과 작품세계를 은유한다.]
[영원한 나르시시스트, 천경자 작품 상설전시
“내 그림들이 흩어지지 않고 시민들에게 영원히 남겨지길 바란다.”
1998년, 한국 화단의 대표적인 작가 천경자(千鏡子, 1924-2015) 화백은 시민과 후학들이 자신의 작품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194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60여년에 걸쳐 제작한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였다.
한국화의 채색화 분야에서 독자적인 화풍을 이루어 온 작가의 독특한 작품세계와 그 기증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천경자 상설전시는 ‘영원한 나르시스트, 천경자’라는 이름으로 20여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영원한 나르시시스트, 천경자’는 꿈과 사랑, 환상에서 비롯된 정한(情恨)어린 스스로의 모습을 끊임없이 작품에 투영하는 작가의 작품세계를 은유한다. “그것이 사람의 모습이거나 동식물로 표현되거나 상관없이, 그림은 나의 분신”이라고 말하는 천경자 화백의 작품세계는 마치 자신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다.
전시는 이처럼 자전적(自傳的)인 성격을 가지는 작가의 작품 전반에 대한 자기고백적 측면에서 접근하여, ‘내 슬픈 전설의 이야기’, ‘환상의 드라마’, ‘영혼의 여행자’, ‘자유로운 여자’라는 네 개의 섹션으로 구성하였다.
섹션 1. 내 슬픈 전설의 이야기
“내 온몸 구석구석엔 거부할 수 없는 숙명적인 여인의 한이 서려있나 봐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 슬픈 전설의 이야기는 지워지지 않아요.”
자화상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1977)와 해외여행지에서 본 이국여인의 모습을 그린 〈자마이카의 여인 곡예사〉(1989)와 같은 작품으로 구성된 섹션 ‘내 슬픈 전설의 이야기’에는 작가가 결코 벗어날 수 없었던 “숙명적인 여인의 한”이 서린 다양한 모습의 여인들이 자리한다. 작품의 분위기를 지배하는 짙은 한의 정서는 천경자에게 있어 슬프지만 달콤한, 인생으로서의 매력이었다. 작가의 분신이기도 한 그림 속 여인들의 모습에서 ‘달콤한 한’이 깃든 그녀의 인생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1977)는 고독과 저항, 한을 응축시킨 천경자의 대표적인 자화상이다. 여인은 천경자의 상징인 뱀을 화관처럼 머리에 쓰고, 붉은 장미 한 송이와 함께 우수에 찬 눈빛으로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하얀 동공의 눈동자는 금빛으로 표현했고 푸른빛의 그림자 가득한 눈매는 광기에 찬 매서운 눈초리로 바뀌었다. 더욱 무표정해진 얼굴, 유난히 긴 목의 여인은 강렬하고 섬뜩한 마녀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여인의 눈동자는 우리를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세계를 향하고 있다. 머리 위에 똬리를 틀고 있는 뱀은 고독한 여인을 달래주는 수호신이면서 동시에 천경자 자신이다. 여인은 인생을 체념하고 속죄하는 초월적 태도를 보여주며, 고독과 슬픔, 한을 넘어선 천경자의 모습이다.
<자마이카의 여인 곡예사>(1989)는 이국적 풍정과 극적인 상상력으로 변용시킨 여성인물화이다. 천경자는 1989년과 1993년에 카리브해 연안, 자메이카로 스케치 여행을 다녀왔다. 열대나무와 앤슈리엄, 히비스커스 꽃을 배경으로 표범무늬 옷을 입고 앉아 있는 여인의 모습에서 천경자 자화상 <알라만다의 그늘Ⅱ>(1985)가 연상된다. 천경자는 1980년대 중반 이후 이국 여인의 얼굴과 눈매를 사실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자신이 추구하는 초월적인 여인상으로 규정짓고 정형화시켜 표현했다. 보편적인 여인의 모습이 아니라 이목구비를 지나치게 과장한 모습이다.
섹션 2. 환상의 드라마
“작품은 과거의 추억을 되살리고, 미래세계를 상상하며 오늘의 꿈을 담은 한 폭의 드라마들”
‘환상의 드라마’ 섹션은 작가의 꿈과 환상, 동경의 세계를 표현한 자전적 성격의 채색화 작품으로 구성된다. 젊은 시절의 지독한 가난과 사랑의 상처로 인한 뼈아픈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그렸던 천경자의 대표작 〈생태〉(1951)에서부터 안정된 생활의 행복감이 깃든 화사한 파스텔 색조의 그룹 인물화 〈여인들〉(1964), 그리고 보티첼리의 작품이 중심이 된 〈이탈리아 기행〉(1973)까지. 과거의 추억과 오늘의 꿈, 미래에 대한 상상을 형상화한 작품들로 구성된 이 섹션은 시기에 따른 작가의 감정 변화가 녹아든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다.
<생태>(1951)는 처절한 삶의 현실에 대한 저항을 형상화시킨 작품이다. 얽히고설킨 수십 마리의 뱀이 화면 중앙에 모여 있다. 뱀의 동세, 머리, 눈망울, 표피의 질감 등의 꼼꼼하고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천경자는 광주역 앞 뱀집을 찾아가 유리상자 속에 수십 마리의 뱀을 넣고 직접 관찰하여 스케치했고, 이 작품을 25일 만에 완성했다. 작품의 뱀은 원래 모두 서른세 마리였으나, 사랑했던 뱀띠 연인의 나이를 맞추기 위해 두 마리를 더 그려 넣어 서른다섯 마리가 되었다. 천경자 스스로 뱀을 그린 동기는 ‘오직 인생에 대한 저항을 위해서’라고 했다. 고통과 슬픔, 분노 등의 내면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뱀을 소재로 그림으로써 여동생의 죽음, 사랑, 이혼, 경제적 어려움과 같은 삶의 역경을 극복하려 했다.
<여인들>(1964)은 자전적 요소가 두드러지면서 자유로운 변용과 환상적인 분위기로 전환되는 시기의 작품이다. 1960년대 초중반은 천경자의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으로 작품 속 여인들은 한결같이 면사포를 쓰고 있다. 면사포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신부에 대한 환상과 동시에 욕구불만의 표출이기도 했다. 평면적이고 간결한 형태 해석, 자유롭고 활발한 붓의 율동감, 힘찬 선의 흐름이 화폭을 지배하고 있다. 사람·사물의 흐트러진 윤곽선과 거친 표면질감이 특징이다. 천경자는 당시 한국 화단에서 유행했던 추상미술의 개념을 독자적으로 해석하여 필묵에 의한 선의 개념과 색채를 결합시키고 사실적인 형태를 구현했으며 환상적인 화면을 연출함으로써 자유로운 표현을 추구했다.
<이탈리아 기행>(1973)은 피렌체의 인상을 바탕으로 3년여에 걸쳐 완성한 작품이다. 천경자는 1970년 이탈리아를 여행하였고, 피렌체에서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품을 보면서 깊은 감명과 충격을 받았다. 전통의 맥락에서 새로운 예술을 창조해야 한다는 것을 강하게 인식하였고, 이는 자신의 회화세계에 전환점을 맞이하는 계기가 되었다. 작품에는 여정 중 천경자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던 도상이 등장한다. 화면의 중심에는 보티첼리의 화집, 오른쪽에 프라 안젤리코의 <이집트로의 피신>(1451-52) 엽서와 왼쪽 상단에는 천경자의 기행 스케치화 <베니스 산마르코 사원>(1970)이 놓여있다. 장갑, 매니큐어를 칠한 손, 트럼프, 술병 등 주요 도상들은 이 작품에서 처음 단체로 등장하여 말년 작품까지 지속된다. 트럼프는 자신의 감정 상태, 술병은 고독했던 여정, 손은 신체의 일부를 나타낸다. 천경자는 소재들을 통해서 ‘나’, 자신을 대변한다. <이탈리아 기행>은 1970년대 천경자 회화양식 형성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준 작품이다.
섹션 3. 영혼의 여행자
‘영혼의 여행자’ 섹션은 1969년부터 남태평양에서 시작해 인도, 중남미, 미국, 아프리카 등을 여행하며 그린 기행회화로 구성된다. 작가에게 여행은 타국의 사람들과 자연, 풍물을 발견하는 즐거운 시간이었으며, 원초적인 세계를 경험하는 교감의 현장이었다. 여성의 몸으로 원시의 땅을 찾아 나섰던 작가는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으며 마음껏 이곳저곳을 돌아보고 여행에 집중했다. 여행 초기의 감흥과 풍경을 순간적으로 포착한 〈타히티 고갱 미술관에서〉(1969)와 같은 스케치에서부터 1970년대 후반 이후의 화려한 색채와 화면구성이 돋보이는 〈플라사 메히코〉(1979), 〈푸에블로족〉(1988)까지, 완성도 높은 채색작품들과 살아 움직이는 듯 순간의 강렬함을 간직한 작가만의 독특한 기행회화를 감상할 수 있다.
<타히티 고갱 미술관에서>(1969)는 고갱이 살던 집터에 세워진 기념비(석상)를 스케치한 작품이다. 천경자는 폴 고갱의 흔적을 찾기 위해 타히티 여행을 선택했다. 천경자의 기대와 달리 고갱의 집과 미술관에는 작품은 없고 인쇄물과 유품만 남아 있었다. 고갱 미술관에 도착했을 때 천경자의 시야에 가장 먼저 포착된 것은 야자수 잎으로 씌워 놓은 석상이었다. 빠르게 펜으로 그려나간 야자수 잎과 석상의 형태는 천경자의 필력을 드러낸다. 굵은 펜과 콩테로 기념비에 음영을 주어 형상의 볼륨감을 강조했다.
<플라사 메히코>(1979)는 멕시코에서 투우 경기 장면을 스케치한 작품이다. 천경자는 멕시코에 도착하자마자 투우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플라사 메히코를 찾아갔다. 플라사 메히코는 세계 최대의 투우 경기장으로 멕시코 문화를 상징한다. 지역의 대표적인 풍물과 문화는 놓칠 수 없는 작품의 중요한 소재였기 때문에 투우 경기 일정상 관람을 서둘러야 했다. 전경의 관람객들을 중심으로 시선을 따라가면 원형 경기장 안에 투우사와 소들이 경기를 펼치고 있다. 원근을 강조한 꽉 채워진 관중석 인물들, 날뛰는 소들의 어정쩡한 움직임, 승리를 환호하며 던진 모자들의 표현은 투우 경기의 생동감을 강조해준다.
<푸에블로족>(1988)은 산 아래 납작하게 늘어서 있는 푸에블로 촌락을 그린 작품이다. 1987년 천경자는 막내 아들과 함께 두 번째 미국 남서부 지역 여행을 했다. 푸에블로는 뉴멕시코주와 애리조나주, 텍사스주에 부락을 이루어 사는 미국 원주민 부족들을 말한다. 원경에는 진흙과 짚을 으깨 만든 벽돌 건물로 이루어진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정착지를 보여준다. 화면 중앙에는 깃털과 장신구로 치장한 인디언 남녀가 서 있고, 전경에는 선인장에 노란 꽃이 가득 피어있다. 천경자는 화폭을 통해서 인디언 문화를 그대로 전달하고 있다.
섹션 4. 자유로운 여자
‘자유로운 여자’ 섹션은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1984)를 포함한 다수의 수필집과 천경자 작품에 대한 대중적인 인기를 불러온 자서전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1979), 해외 스케치 여행의 과정을 그림과 함께 담아낸 『아프리카 기행화문집』(1974) 등의 출판물을 선보인다.
글 쓰는 일은 작가에게 맺힌 한을 풀어내기 위한 일종의 ‘푸닥거리’와도 같은 것이었으며, 그가 남긴 많은 책들은 당시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를 만큼 그림 못지않은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었다. 문학과 미술의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문학예술인 천경자’가 들려주는 감각적이면서도 솔직한 언어 속에 삶과 예술에 대한 작가의 남다른 열정이 녹아난다.
다채로운 이야기로 구성된 이번 전시를 통해 천경자 화백의 작품 기증이 지닌 참뜻이 다시 한 번 빛나길 바라며, 앞으로도 지속적 연구를 통해 다각도로 재조명될 천경자 상설전시에 대한 관람객 여러분의 변함없는 관심과 사랑을 기대한다.]
[천경자(千鏡子)
천경자는 일본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현 도쿄여자미술대학)에서 유학하고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면서 화가의 길에 들어섰다. 자전적인 주제와 화려한 채색기법으로 독자적인 양식을 확립하였고 전통적인 한국화의 범주에서 벗어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였다.
생애
천경자는 1924년 전라남도 고흥에서 천성욱(千性旭)과 박운아(朴雲娥)의 1남 2녀 중 큰딸로 태어났다. 본명은 천옥자(千玉子)이다. 1941년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현 전남여고)를 졸업한 뒤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 일본화과에 입학하였다. 이 무렵 ‘천경자’로 이름을 바꾸었다.
천경자는 인물화가인 고바야가와 기요시(小早川淸, 1899~1948)의 문하에 들어가 인물화를 익혔고, 1943년과 1944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각각 「조부(祖父)」(1943)와 「노부(老婦)」(1943)로 입선하였다. 1943년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이듬해에 귀국하였다. 1946년 모교인 전남여고 미술교사로 부임하여 학교 강당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1949년 서울에서 개인전을 치르면서 장래가 촉망되는 여류화가라는 평가를 받았고 조선대학교 미술과 강사로 임용되었다. 이 무렵 동생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과 삶의 역경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뱀과 인골(人骨)을 소재로 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는데, 수십 마리의 뱀이 뒤엉킨 모습의 「생태(生態)」(1951)는 화단의 큰 주목을 받았다. 1954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임용되어 새로운 한국화를 모색해 나갔고, 1963년 도쿄 개인전을 계기로 일본에도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1974년 홍익대학교 교수직을 사퇴한 뒤 작품 제작에만 전념하였는데, 이 무렵 자전적인 성격의 단독 여인상들을 제작하여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확립하였다.
한편, 1969년 유럽과 남태평양을 여행, 1972년 베트남전 종군화가단 참여, 1974년 아프리카 여행 등 1990년대까지 세계 각국을 여행하면서 이국적인 풍물화를 신문과 잡지에 연재하여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인 「미인도」를 둘러싸고 미술관과 진위 논란이 불거졌고, 이 사건을 계기로 절필을 선언하고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1995년 호암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열었다. 1998년 서울시에 작품 93점을 기증하면서 서울시립미술관에 ‘천경자 상설전시실’이 설치되었고, 2002년 서울시립미술관 신축개관 기념전으로 ‘천경자의 혼’이 개최되었다. 2015년 미국에서 타계하였다.
활동사항
천경자는 초기에는 일본 채색인물화풍의 영향을 받은 인물화를 제작하였고 사생적인 화풍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해방 후 일본화풍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고 수묵화풍이 화단의 주도권을 잡게 되자 국전 참가를 거부하고 새로운 화풍을 모색하였다. 특히, 1957년 전통회화의 다양화를 모색하였던 백양회(白陽會)와 서양화가들의 단체인 모던아트협회 등에 가담하면서 소재, 주제, 기법 면에서 다양한 실험을 하였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현실세계에서 벗어나 설화와 상상의 세계를 초현실적인 분위기로 표현하기 시작하였고, 안료를 두텁게 발라 거친 마티에르 효과를 내는 등 과감한 변화를 시도하였다. 또 해외 여행을 통해 이국적인 풍취를 수용하고 과슈와 같은 새로운 기법을 사용하여 전통적인 한국화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했으며,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여성화가로서의 자의식이 표현된 단독 여인상들을 제작하면서 천경자 특유의 화려하고 낭만적인 여성인물화를 완성하였다.
천경자는 대다수의 한국화가들이 수묵화에 경도될 때에도 채색화 작품을 지속하였고, 추상화가 화단을 장악할 때에도 구상적인 작품세계를 포기하지 않았다. 한국화단에서 강렬한 색감과 문학적 서정을 토대로 독자적인 양식을 완성한 작가로 평가된다.
천경자는 문학에도 관심이 깊어서 신문과 잡지에 꾸준히 글을 발표하였고, 첫 수필집 『여인소묘(女人素描)』(1955)를 비롯하여 『천경자, 남태평양에 가다: 오직 붓과 종이만 의지하고』(1972),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1978), 『탱고가 흐르는 황혼』(1995) 등 총 18권의 수필집을 출간하였다.
상훈과 추모
1955년 제7회 대한미협전에서 「정(靜)」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하였고, 국전에서 「추정(秋庭)」으로 특선상을 수상하였다. 1971년에 서울시 문화상(예술부문), 1975년에 3 · 1문화상(예술부문)을 받았다. 1983년에는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2016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천경자 1주기 추모전: 바람은 불어도 좋다. 어차피 부는 바람이다.’를 전시 개최하였다.]
[천경자 미인도 위작 사건
목차
1. 개요
2. 전개
2.1. 1991년
2.1.1. 미인도 포스터 제작
2.1.2. 작가 반발
2.1.3. 위작시비 점화
2.1.4. 작가 절필 선언
2.2. 1999년
2.2.1. 위작범 자백
2.3. 2002년
2.3.1. 작품 감정
2.4. 2015년
2.4.1. 작가 사망으로 논란 재점화
2.4.2. 2002년 작품 감정에 대한 문제 폭로
2.5. 2016년
2.5.1. SBS스페셜 보도
2.5.2. 위작범의 진술 번복
2.5.3. 위작범의 진술 재번복
2.5.4. 유족 측의 고소
2.5.5. 천경자 미인도 검찰 제출
2.5.6. 천경자 1주기 추모전
2.5.7. 프랑스 감정팀 감정 착수
2.5.8. 프랑스 감정팀 위작 판정
2.5.9. 검찰 측의 진품 주장
2.5.10. 유족 측의 반발과 항고 의사 표시
2.5.11. 뤼미에르 테크놀로지 팀의 반박
2.6. 2017년
2.6.1. 김재규-신군부 연관설 보도
2.6.2. 작가 자필 공증 확인서 사본 공개
2.6.3. 국립현대미술관 미인도 공개
2.6.4. 검찰의 항고 기각
2.6.5. 김어준의 파파이스 출연
2.6.6. 재판 현황
2.6.7. 향후 전개 예상
2.7. 2023년
3. 주장과 반응
3.1. 미술관 측의 주장
3.1.1.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측의 주장
3.2. 천경자 유족 측의 주장
3.2.1. 짜깁기 정황
3.2.2. 뤼미에르 감정팀 측의 주장
3.3. 김재규 옹호 측의 주장
3.3.1. 신군부 연관설
3.4. 대중의 반응
3.4.1. 대중의 반응에 따른 영향
4. 교훈
4.1. 작가들의 입장에서: 체계적인 작품 관리 필요
4.2. 한국 미술계 관계자 입장에서: 부실한 작품 감정 시스템 개선 필요
4.3. 사회 전체의 입장에서: 미술품 비자금 조성 감시 필요
1. 개요
화가 천경자의 그림으로 알려진 '미인도'의 진위 여부를 놓고 벌어졌던 위작시비. 천경자 본인이 위작이라고 주장하는 그림에 대해 소장 국립현대미술관이 진품이라고 반론한 결과 작가의 일시적 절필, 여기서 더 나아가 전두환 정권의 정당성 확보를 위한 공작이 아니었냐는 의혹까지 이어진 사건이다. 대략적인 경위는 다음과 같다.
1977년작으로 기재된 미인도는 본래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소장하고 있던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다. 10.26 사태로 김 전 부장의 재산이 압수되면서 이 미인도도 정부의 소유로 넘어갔고, 우여곡절 끝에 1980년 5월 국립현대미술관 수장고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입고 당시의 사진 기록은 없다. 미인도의 사진이 처음 찍혀 현대미술관에 기록된 것은 1984년이다. 입고 후 10여년 간 잠자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1991년 3월 문화공보부가 '움직이는 미술관' 순회전의 전시작으로 포함시키며 세상에 모습을 나타냈지만, 이 그림을 직접 확인한 작가가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길고 긴 위작 논쟁이 시작되었다.
천경자의 위작 주장에 대해 국립현대미술관은 진위를 가리기 위해 X-ray, 적외선, 자외선 촬영등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하였다 하였으나 당시 강정식 보존과학실장은 진품이라는 증거는 되지 않는다고 말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국립현대미술관의 위촉을 받은 한국화랑협회 미술품감정위원회는 1991년 4월 11일 진품이라고 판정하였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앞으로 위작임을 확증할 수 있는 증거가 밝혀지면 받아들이겠다"는 단서를 붙인 끝에 진품임을 주장하였다. 그후 일부 국립현대미술관 관계자들은 국과수 및 KIST에서 진품으로 감정했다는 허위를 퍼뜨리기도 했다. 작가는 이에 대해 항변하였지만 당시 사람들은 언론에 보도된 '과학적' 감정과 논란 당시 작가의 나이가 67세였던 점이 맞물려 '자기 그림도 몰라보는 정신나간 작가'라는 소리까지 듣게 되었다. 결국 큰 충격을 받은 작가는 사건 직후 예술원 회원직을 사퇴하고 전시회 출품 등 작품공개 활동을 중지하겠다고 선언한 끝에 미국으로 떠난다. 이후 1995년 호암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가진 후 2년 뒤 미국으로 떠났으며, 1998년 말 서울시립미술관에 주요 작품 93점과 화구 등을 기증하였다.
<미인도>에 대한 논란은 1999년 고서화 위조범 권춘식이 자신이 미인도를 위조했다는 증언을 함으로써 다시 재개되었다. 그러나 국립현대미술관은 작품입수 시점과 위조했다고 진술한 시점이 불일치하고, 위조자가 수묵화 위조 전문이어서 천경자의 채색화를 위조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기존 입장을 고수하였다. 검찰에서는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더 이상 수사가 어렵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미인도>를 자신이 그렸다고 주장했던 권춘식은 "미인도는 내가 그리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며 기존의 주장을 번복했다가 다시 자기가 그렸다고 재번복하는 등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 전개
2.1. 1991년
2.1.1. 미인도 포스터 제작
언급한 것처럼 사건은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 중이던 미인도를 아트포스터로 제작해 판매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에 내막을 적은 기사에 따르면, 천경자의 후배 시인이 천경자의 집을 방문했을 때 대화 중에 "선생님 그림 잘 보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후배 시인은 현대그룹 사옥 부근에 살면서 현대그룹 사옥 지하 사우나탕에 자주 들리는데 그 안에 천경자의 미인도가 하나 걸려있다고 했다. 그 미인도는 오리지날 작품이 아니고, 현대미술관에서 당시에 보기 좋은 그림, 유명 작가의 그림을 선택하여 미술관 아트숍에서 대량 프린트하여 미술문화 대중화 차원에서 한 장당 만원씩 받고 팔고 있었는데, 그 중에 인기작가인 천경자의 그림(프린트)이 잘 팔려 나갔다고 한다. 현대사옥의 헬스클럽도 예외는 아니어서 싸고 좋은 천경자의 미인도 프린트를 사다 장식용으로 걸어 놓았던 것이다. 기사에 따르면, "그 말을 전해 들으신 예민하고 자존심 강한 선생님께서 그냥 넘어가실 분이 아님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튿날 아침 일찍 직접 프린트가 걸려 있다는 헬스클럽에 찾아가 확인하신 뒤에 그 그림의 미인도는 진짜가 아니라고 현대미술관 측에 통보했고, 모 신문사에도 정보 제공을 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그 시인을 통해 들은 바 있다."고 한다.
2.1.2. 작가 반발
당시 천경자는 분개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작품은 내 혼이 담겨 있는 핏줄이나 다름 없습니다.
자기 자식인지 아닌지 모르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나는 결코 그 그림을 그린 적이 없습니다.
나는 절대 머릿결을 새카맣게 개칠하듯 그리지 않아요.
머리위의 꽃이나 어깨 위의 나비 모양도 내 것과는 달라요.
작품 사인과 연도 표시도 내 것이 아닙니다.
난 작품 년도를 한자로 적는데, 이 그림에는 아라비아 숫자로 적혀 있어요.
내가 낳은 자식을 내가 몰라 보는 일은 없습니다.
2.1.3. 위작시비 점화
작가 자신이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말했으니 위작을 발견한 단순한 사건으로 결론이 날 것으로 생각 되었으나, 국립현대미술관이 이 작품은 진품이라고 맞서며 국내 미술계 최대의 위작시비가 벌어지게 된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소장품이었다가 국가에 환수되어 재무부, 문공부를 거쳐 미술관으로 넘어온 소장 경위가 확실하다는 근거와, 전문위원이었던 미술평론가 오광수가 이미 진품으로 감정했다는 이유를 들어 진품으로 주장했다.
화랑협회 감정위원회는 1차 감정 실시 후 적어도 가짜는 아니다란 결론을 냈고, 2차 감정에서도 진품이란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이는 생존 작가이고 정신 상태가 정상이라면 작가 의견에 감정의 우선 순위를 둔다는 화랑협의회 내부의 규정에도 어긋난 결론이었다.
결국 이 사건은 재판까지 가게 되었지만 법원에서는 판단 불가를 판정했다.
2.1.4. 작가 절필 선언
이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천경자는 사건 직후인 1991년 4월 7일 아래와 같이 절필을 선언하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4월 16일 요양차 둘째 딸 김정희와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
붓을 들기 두렵습니다.
창작자의 증언을 무시한 채 가짜를 진짜로 우기는 풍토에서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4개월간 미국에 머물다 귀국한 천경자는 "절필은 죽음과도 같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붓을 잡기 시작해, 1995년 호암갤러리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개최하게 된다.(대중들에게 알려진 것하곤 달리 절필은 일시적인 것이였다.) 그러다 1998년 건강이 나빠져 9월 큰딸이 머물고 있는 미국 뉴욕으로 이주했고, 11월에 일시 귀국하여 서울시에 채색화와 드로잉 93점과 화구 등을 기증하였다.
2.2. 1999년
2.2.1. 위작범 자백
천경자의 절필 선언으로부터 8년 후인 1999년, 고서화 위작 및 사기판매사건으로 구속된 위조범 권춘식이 검찰 수사과정에서 "화랑을 하는 친구의 요청에 따라 소액을 받고 달력 그림 몇 개를 섞어서 '미인도'를 만들었다"고 말하면서 위작시비는 재연됐다.
이에 대해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당시 "'미인도'는 진짜이며 현대미술관이 현재 소장하고 있다."면서 "한국화 위조범과 현대 미술관 중 어느 쪽을 믿느냐"고 반문했다.
2.3. 2002년
2.3.1. 작품 감정
2002년 국립현대미술관은 후속 조치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한국과학기술원에 작품 감정을 의뢰했고 한국화랑협회에서는 다시 진품이라는 감정을 내렸다. 이에 대한 재수사는 없었으며 수많은 의혹을 간직한 채 이 그림은 여전히 진품으로 소장되고 있다. 2014년 12월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공식사이트에서 소장품 검색을 해 보면 이 작품은 검색되지 않는 상태이다. 참고로 2010년 즈음 공식사이트 개편 이전까지는 검색이 됐다.
2.4. 2015년
2.4.1. 작가 사망으로 논란 재점화
2015년 천경자가 사망한 이후 유족들을 중심으로 재감정 요구가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문화체육관광부 측에서는 재감정은 없다고 못박았다.
2.4.2. 2002년 작품 감정에 대한 문제 폭로
그런데 이런 와중에 그동안 미술관 측이 진작 근거로 제시했던 국립과학수사연구소와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의 미인도 정밀감정이 애초에 없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아마도 2002년에 감정했다는 국립현대미술관 측의 주장에 대해 두 기관 모두 감정했다는 기록이 없다고 밝혔으며, 이로 인해 과학적 증거가 있다던 당초 주장과 달리 감정위원들이 분위기와 색채 등 안목으로만 진품 결론을 내렸다는 의혹이 더 짙어지고 있다.
사실 미술관측의 몇몇 주장에는 신빙성 문제가 있었다. 김재규가 소장했다고 그것이 진작일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위조범으로 지목된 권춘식의 자백이 오락가락 하는 문제 또한 위조범의 기억이 불확실한 것일 탓일 가능성이 있다. 한국근대회화선집에 수록된 사진도 컬러가 아닌 흑백이라는 점에서 원작과 차이가 있을 수 있고, 회화선집에 실린 작품이 작가의 동의를 거친 바로 그 작품이라는 근거도 사실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진작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는 국립과학수사원과 한국과학기술원의 감정 결과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감정이 애초에 없었다는 폭로가 나오면서 이 위작 사건은 더 점입가경의 상황이 된다.
2.5. 2016년
2.5.1. SBS스페셜 보도
이 상황에서 2016년 2월 14일자 'SBS스페셜'(423회)에서 천경자 미인도 위작 사건에 대해 다루었다. 이로 인해 이 사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졌다.
2.5.2. 위작범의 진술 번복
그런데 자신이 위조했다고 자백했던 권춘식이 2016년 3월, 17년 만에 자신이 미인도를 그리지 않았다고 밝히며 기존의 주장을 번복했다. 권춘식은 “당시 수사검사였던 최순용 검사에게 조사받으며 혹시 감형 받을 수도 있다는 기대로 미인도 복사본을 보여주며 확인을 요청했을 때 우물쭈물했고, 그래서 사건이 커진 것 같다”고 말했다. 덕분에 가뜩이나 오리무중인 진위논란이 더 점입가경으로 치닫게 됐다.
2.5.3. 위작범의 진술 재번복
위작범으로 미인도를 자신이 그렸다고 했다가 2015년 말을 번복한 권춘식이란 자가 2016년 4월, 국립현대미술관에 보관된 미인도는 자신이 그린, 위작품이라는 사실을 자필로 다시 고백하면서 논란이 재점화 되었다. 화랑협 임원의 회유로 진술을 번복하게 되었다는 내용인데 사실로 드러날 경우 엄청난 후폭풍이 예상된다.
2.5.4. 유족 측의 고소
2016년 4월 27일 천경자의 차녀 김정희를 대리하고 있는 '위작 미인도 폐기와 작가 인권 옹호를 위한 공동변호인단'은 바르토메우 마리 국립현대미술관장 등 6명을 사자명예훼손, 저작권법 위반, 허위공문서 작성 및 행사 혐의로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고소·고발한 상태이다. 이로 인해 앞으로의 사태 추이는 지리한 법정공방이 끝나야 결과가 나오게 되었다.
2.5.5. 천경자 미인도 검찰 제출
2016년 6월 8일 서울중앙지검 형사6부(배용원 부장검사)는 8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미인도를 제출받았다고 밝혔다. 미인도는 위작 논란이 제기된 1991년 이후 25년 만에 국립현대미술관 수장고에서 나온 것이다. 작품을 받은 검찰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 등에 감정을 맡기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한편 천경자의 차녀 김정희(62)는 국내 기관이 아니라 해외 기관에 감정을 의뢰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2.5.6. 천경자 1주기 추모전
이런 가운데 6월14일부터 8월 7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천경자 1주기 추모전: 바람은 불어도 좋다 어차피 부는 바람이다>가 열렸다. 참고로 천경자는 과거에 서울시에 작품들을 기증한 적이 있다.
2.5.7. 프랑스 감정팀 감정 착수
2016년9월22일 유족 측이 원하던대로 프랑스의 뤼미에르 감정팀이 감정에 착수할 것이라고 한다.
2.5.8. 프랑스 감정팀 위작 판정
2016년 11월 3일, 프랑스 감정팀은 위작이 맞다고 판정을 내렸다. 그림의 눈, 코, 입 등 특정 부분을 1600여 개의 단층으로 쪼갠 뒤 분석해 다른 천경자의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각 요소들이 전혀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판명했다. 수치상으로 미인도가 진품일 확률은 0.0002%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에 대해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미인도'는 도안화된 인물을 그린 작품이 아니라, 천경자의 차녀인 김정희를 보고 그린 것이어서 프랑스 감정단이 제시한 패턴화 분석은 의미가 없으며, 미술품 감정 시 필수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요소인 작가에 대한 전반적 배경지식, 작품에 대한 미술사적 분석자료, 재료 분석자료, 소장 경위 자료, 전문가 의견 등이 배제되어 있어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2.5.9. 검찰 측의 진품 주장
2016년 12월 19일, 서울중앙지방검찰청(수사검사 김덕곤, 양선순, 이치현)은 프랑스 감정팀의 판정과 정반대로 과학감정·소장 이력 및 여러 증거를 통해 진품이라 판단하였다. 검찰은 프랑스팀의 감정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1) '미인도' 감정 보고서에 심층적인 단층분석방법이 제시되지 않은 점, 2) 뤼미에르 팀이 사용한 계산식을 천경자 다른 작품('테레사 수녀')에 사용했더니 진품일 확률이 4.01% 수준으로 나왔던 점, 3) 뤼미에르팀이 미인도의 원본이라고 밝힌 장미와 여인에 대한 비교·분석 자료가 없는 점 4) 국립미술관으로 넘어간 김재규 소유품 목록에 '천경자 작 미인도'라는 항목이 있었던 점 등을 그 근거로 들었다. 서울중앙지검은 이를 근거로 미인도 사건을 불기소처분했다.
2.5.10. 유족 측의 반발과 항고 의사 표시
당연히 유족 측은 이에 반발했다. 유족 측은 미인도를 눈으로 감정한 감정인들 중에 미인도 사건과 이해관계가 있는 인사가 포함됐다며 안목감정위원의 명단을 공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유족측은 검찰의 '4.01%' 주장이 프랑스 감정팀에 대한 명예훼손이라 보았고, 프랑스 감정팀에서 이에 대해 대응을 하기로 하였다고 밝혔다. 인터뷰 기사 유족 측 법률 대리인인 배금자 변호사(해인법률사무소)는 "국제적 명성의 연구소가 한 달 이상 걸려 완성한 치밀한 연구 결과를 검찰이 고의적으로 배제한 것은 충격적인 일"이라며 "항고를 통해 미인도가 위작이란 사실을 과학적으로 밝혀내겠다"고 말했다.
27일에도 유족 측 대변인은 "검찰 발표가 나자 마치 위작 논란이 종식된 것처럼 말하는데 이는 잘못됐다"며 "검찰 수사 발표는 중간 발표고 검찰의 판단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검찰의 결정에 대해 30일 이내에 항고하고 재정신청할 수 있다"며 "바르토메우 마리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등을 비롯한 관련자들에게 개인 손해배상을 청구할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2.5.11. 뤼미에르 테크놀로지 팀의 반박
12월 27일 유족 측의 의뢰로 미인도를 분석했던 뤼미에르 테크놀로지 서울 프레스 센터에서 검찰의 주장을 반박하는 기자 회견을 열었다. 프랑스 뤼미에르 감정단 CEO 장 페니코(Jean Penicaut)는, 천경자의 유족을 통해 발표한 성명에서 "우리는 객관적이고, 수치화가 가능한 범주 안에서 작품 자체 분석에만 집중했고 어떤 주관적 해석이나 논평도 삼갔다"고 밝혔다.
뤼미에르 팀은 다중 스펙트럼, 초고해상도 촬영, 1650층의 층간 분리 기술과 광학적, 물리학적, 수학적 기법을 동원해 미인도를 분석했으며, 이 과정에서 미인도의 출처와 국립 현대 미술관의 소장 경위, 위작 논란의 경과, 육안을 통한 일반적인 안목 감정 결과 등은 감정인의 주관적 판단이 개입될 여지가 있어 모두 차단했다고 밝혔다. 뤼미에르 팀은 그 결과를 63쪽 분량의 분석 보고서에 담아 제출했는데, 검찰이 이를 무시한 것은 "논리적 근거도 없이 과학적 분석 결과를 전적으로 무시한 것"이며, "검찰이 보고서를 묵살하고 왜곡했다"며 반발했다. 페니코 사장은 앞서 검찰이 "뤼미에르 팀의 감정방식대로면 테레사 수녀가 진품일 가능성은 4%다"라고 일축한 것에 대해서, "검찰은 우리의 분석방식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검찰에서 사용한 방법대로면, 미인도가 진품일 가능성은 0.0000000006%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프랑스 감정팀은 2017년에 국제 과학 저널에 이번 감정 결과를 소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국립 현대 미술관 측과 기자 회견에 참석했던 (자칭) 빅데이터 전문가 김진호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교수는 확률의 오류가 있다며 뤼미에르 팀을 비판했다.
2.6. 2017년
2.6.1. 김재규-신군부 연관설 보도
2017년 1월 21일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신군부의 김재규 재산 환수 과정과 천경자 미인도의 연관 관계를 파헤친 내용을 보도했다.
2.6.2. 작가 자필 공증 확인서 사본 공개
2017년 2월 7일 유족측은 작품 '미인도'는 가짜라고 생전에 밝힌 작가 자필 공증 확인서의 1991년 12월 26일자 사본을 공개했다.
2.6.3. 국립현대미술관 미인도 공개
국립현대미술관은 경기도 과천관에서 연 '소장품특별전: 균열'을 통해 2017년 4월 23일부터 2018년 4월 29일까지 미인도를 공개한다.
2.6.4. 검찰의 항고 기각
2017년 5월 24일. 검찰측에서 항고를 기각하며 "기록을 세밀히 검토한 결과 이 항고는 이유 없으므로 기각한다"고 이유를 밝혔다.
유족 및 변호인단 측은 검찰측 통지서에는 단 한 줄 항고를 기각한다는 취지만 기재돼 있을 뿐 판단의 이유가 설명돼있지 않다는 점, 항고인 진술요청을 해달라는 신청을 거부하고 미국에 살고 있는 김 교수가 귀국해 서울고검 앞에서 면담신청을 해도 거부한 점 등을 언급하며 항고기각 결정에 대해 재정신청을 하겠다고 밝혔다.
2.6.5. 김어준의 파파이스 출연
2017년 6월 30일 업로드된 김어준의 파파이스에서 미인도에 대한 내용을 다뤘다. 천경자의 딸 김정희 교수와 배금자 변호사가 출연하여 가짜인 이유에 대해 설명하였다.
2.6.6. 재판 현황
2017년 11월 3일 서울중앙지법 형사25단독 박강민 판사는 '미인도를 진품으로 보기에 타당하다'며 '미인도는 진품이다'라는 주장을 펼친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60)에게 1심 무죄를 선고했다. 피고인이 언론 기고문에 쓴 내용의 전체적인 취지는 미인도가 진품이라는 것이고, 피고인으로서는 이를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타당한 사정이 있었다”며 “기고문 내용도 미술 평론으로서 합리성과 논리성을 갖추고 있다"며 사후명예훼손 1심 무죄를 판결했다.
사자명예훼손의 경우 허위사실유포에 의해서만 구성되는데, 이 사건의 경우 피고인에게 자신이 말한 것이 허위사실이 아니라고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었기에 “사자명예훼손”이 아닌 것만 인정된 것이다. 즉, 미인도 자체의 진위 여부는 본 사건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별개의 일이다.
2.6.7. 향후 전개 예상
프랑스 감정팀의 과학적인 감정 결과가 나왔을 때까진 천경자 유족 측이 판결에서 승소할 가능성이 크다고 예상됐는데,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이 이를 부정하고 '혐의없음'으로 불기소처분하면서 법원에서 재판조차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일부 언론은 서울중앙지검의 불기소처분을 근거로 '검찰이 미인도가 진품이라고 최종 결론을 내렸으니 25년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식으로 보도하고 있는데, 일단 향후 추이를 지켜봐야 하겠으나 상황이 유족 측에게 어려워진 것은 사실이다.
일단 유족 측은 "검찰 수사 발표는 중간 발표고 검찰의 판단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며 항고와 재정신청을 비롯해 정부를 상대로 한 민사소송도 불사하겠다고 선언하긴 했다. 그런데 상황이 쉽지가 않다. 왜냐면 일단 유족측이 검찰측에 항고를 해야 하는데, 검찰에 항고 시, 그 항고장을 받는 곳은 법원이 아니라 검찰이기 때문이다. 지방검찰청의 판단에 오류가 있는 것 같다고 상급검찰청(고등검찰청)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항고이고, 이 항고에 대한 결정은 "항고 기각" 또는 "재기수사명령" 둘 중 하나가 나오게 된다. 만약 재기수사명령이 나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사실상 불기소 처분을 한 바로 그곳에 다시 기소하라고 항의하는 꼴이라서 항고 기각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봐야 한다. 관련 법령 정보에 대한 설명은 다음 글을 참고하라.
다만 2007년 12월 21일 형사소송법이 개정된 뒤로는 모든 당사자 고소 사건에 대해 검찰에 항고 뒤 재정신청이 가능하게 되었다. 즉 일단 항고한 뒤에 서울고등검찰청에서 또 불기소처분을 하면 유족 측은 재정신청을 할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재정신청은 서울고등법원이 받아서 처리하게 된다. 항고 기각이 합당한지를 묻는 재정신청 결과는 "신청 기각"이나 "공소 제기(기소)"의 두 가지 중 하나의 결론이 나오게 된다. 여기서 일단 공소제기가 나오면 법원에서 재판이 시작되는 거지만, 만약 신청 기각이 나오면 유족 측 대리인은 형사재판은 못하고 민사재판으로 가는 쪽으로 대응을 바꿀 가능성이 높다.
결국 가뜩이나 질질 끌어온 사건이 또 질질 끌고 가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말이다. 일단 이번 사건의 향후 처리는 다시 검찰의 몫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형사절차상으로만 따져도 바로 재판부로 넘겨 판결을 내기는 어렵고, 만약 민사소송까지 간다 치면 적어도 몇년은 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설령 재정신청이 받아들여진다 해도 극단적인 경우 형사재판에서 판사들이 프랑스 감정팀의 의견을 배척하고 일반인들의 통념과 반대되는 판결을 내릴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 법적 처리 과정 가운데 뤼미에르 감정팀의 보고서가 나올 것이고, 일단 재판이 열린다면 프랑스 감정팀의 보고서가 재판 증거로 제출될 것이다. 그 뒤에는 계속 증거에 증거를 제시하는 지리한 공방으로 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민사재판의 경우에는 이번 문제와 좀 동떨어져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번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천경자 미인도 위작 여부와 관련된 시시비비를 가려 미인도 작품의 가치를 재확인하고 화가 천경자의 명예를 회복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지, 유족들이 정부측으로부터 금전적인 보상을 얼마나 얻어내느냐가 아니기 때문이다.
2.7. 2023년
사건번호: 서울중앙지방법원 2021가단5158580
재판부: 서울중앙지법 민사214단독 최형준 판사
2023년 7월 21일, 서울중앙지법 민사214단독 최형준 판사는 검찰이 진품이라고 판단한 데 반발한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을 기각했다.(법률신문)
3. 주장과 반응
3.1. 미술관 측의 주장
-미인도는 진짜다.
-천경자 작가는 본인이 작품년도를 한자로 적는다고 하였으나, 천경자의 1973년 작 길례언니에는 아라비아 숫자로 적혀있다
-미인도는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소장품이었다는 확실한 소장 기록이 남아있어 신빙성이 높다.
-해당 작품을 위조했다고 자백한 권춘식은 정선의 금강전도를 위작한 혐의로 수사 중 스스로 천경자의 미인도를 3점 위작하였다고 자백하였다. 자백 당시 위작 의뢰를 84년에 받았다고 말하였으나 현대미술관의 미인도 입수는 80년으로 시기가 맞지 않는다. 이에 권춘식의 위작이 해당 미인도일 가능성은 없다고 검찰은 판단하였다.
-사용된 안료에 대한 국립과학수사원과 한국과학기술원의 여러 감정 결과 기존 천경자가 사용하던 것과 동일한 것으로 밝혀졌다.
-해당 작품은 논란이 일어나기 한참 전인 1990년 1월 출간된 '한국근대회화선집'의 '장우성/천경자'편에 흑백사진으로 수록되었다. 주요작을 엄선한 화집에 작품 이미지가 실린 것은 작가의 동의를 거쳤다는 것, 즉 작가가 인정한 작품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작가는 이미 이전에 인도의 무희라는 작품을 위작이라고 주장했었지만 출처가 분명해서 진품으로 밝혀졌던 적이 있다.
-자신이 그렸다고 말했다가 안그렸다고 말하는 권춘식의 진술은 오락가락해 신빙성이 없다.
-뤼미에르 테크놀로지 측의 주장은 오류와 모순을 '과학'이라 주장하고, 한국 미술계 전문가들의 견해와 검찰의 과학적·종합적 수사 결과를 무시하는 태도일 뿐이다. 명암대조값, 흰자위 두께 수치 차이만으로 진품 확률이 낮다고 했는데 이런 공식이라면 다른 9점은 100% 확률이어야 함에도 그렇지 않은 것은 진품 확률 공식 자체의 오류다. 뤼미에르사는 국립현대미술관 측으로부터 비과학적인 공격을 받는다는 등 피해자인 척, 공정하지 못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
한편 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이었던 미술평론가 정준모는 미인도가 위작이 아니라는 내용의 의견을 기사를 통해 밝혔다. 작가가 자신의 작품이 상업적으로 팔려나가는 것에 분노해서 사태가 이렇게 흘러왔을 가능성을 제기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정준모 학예실장은 천경자의 명예를 훼손한 점이 인정된다며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2016년 12월 27일 기자회견에서 김진호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교수는 "뤼미에르 테크놀로지가 명암대조 분석값을 근거로 대고 있지만, 진품들을 대상으로 해도 진품이란 게 증명되지 않는다"며 분석방법에 문제를 제기했다.
3.1.1.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측의 주장
뤼미에르 테크놀로지 감정팀의 감정은 기소 의견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작품 이력, 재료, 기법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인도' 감정 보고서에는 심층적인 단층분석방법이 제시되지 않았다.
뤼미에르 팀이 사용한 계산식을 천경자의 다른 작품에 사용했더니 진품일 확률이 4.01% 수준으로 나왔다.
뤼미에르팀이 미인도의 원본이라고 밝힌 '장미와 여인'에 대한 비교·분석 자료가 없다.
3.2. 천경자 유족 측의 주장
-미인도는 가짜다.
-미인도 위작 행위를 벌인 주체는 국립현대미술관과 화랑협회 감정 관계자들이다.
-작가가 그린 작품은 작가가 제일 잘 안다. 작가는 미인도를 그린 기억이 없다.
-권춘식이 자신이 미인도를 위작했다고 자백했다.
-검은 머리, 꽃과 나비 장식, 작품 사인과 연도 표시 등이 천경자의 다른 작품과 다르다.
-유족측은 검찰측 감정단 중에 전문가는 단 한 명뿐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X-ray 촬영 정도 수준의 감정은 과학 감정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초보적인 것이라 주장했다. 검찰이 유전자(DNA) 분석을 실시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천경자의 진품 12점을 확보해 대조한 필적 감정에서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검찰이 자체적으로 프랑스 감정팀의 기술을 적용해서 얻어냈다는 '진품끼리의 4%'라는 수치도 믿을 수 없다. 프랑스 감정팀이 적용한 수학 공식을 돌리는 데는 특수 소프트웨어가 필요한데, 이를 검찰이 어떻게 적용한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 또한 날카로운 필기구로 사물의 외곽선을 그리는 건 동양화에서 흔히 사용되는 기법이고, 다른 밑그림의 존재는 권춘식이 원작을 보고 위작에 베끼고 수정하는 과정에서도 나타난다.
-미인도가 김재규의 소장품이므로 신빙성이 높다는 주장에 대해서 김재규의 유족들은 자신들은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다고 천경자 유족측의 변호인 배금자에게 알렸다. 김재규의 소장품이라는 이유만으로 진짜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해당 녹취 내용
3.2.1. 짜깁기 정황
이와 관련해서는 천경자 회고전을 기획하고 천경자 평전을 집필한 최광진 평론가의 글도 참고해 볼 만하다. 자신이 직접 미인도를 보고 감정하여 내린 결론을 정리하고 있다.
먼저 전체 작품의 경우 1981년 천경자의 작품 장미와 여인의 구도와 광원 등 전체적인 틀을 따온 것으로 보인다.
구도의 경우 여인의 어깨선과 목선, 턱선이 일치하며, 광원의 경우 관찰자의 기준으로 턱선을 따라서 왼쪽 목빗근으로 내려가는 그림자와 오른쪽 쇄골에 진 그림자, 볼에 광대뼈를 따라 이어진 그림자, 콧대와 안와를 따라서 진 눈두덩의 그림자가 일치하는걸 볼 때 광원의 방향은 물론 그림자의 형태 까지 모작한 것으로 보인다.
여인의 어깨에 앉은 나비의 경우 1974년 작품 고에 그려진 나비 전체의 윤곽과 날개에 그려진 점, 무늬를 표현한 붓질의 위치가 일치한다.
여인의 화관을 구성하는 이파리의 경우 1974년작인 바리의 처녀에 그려진 이파리의 윤곽과 색채의 구성이 일치한다.
또한 화관의 경우 1975년작 발리 섬의 처녀에 그려진 화관을 오른쪽으로 눕혀 다시 그린 것에 불과하다.
천경자의 전 작품과 일치하는 것이 오히려 진품이라는 근거가 아니냐는 주장이 있지만, 이러한 짜깁기는 오히려 전형적인 위작의 수법이다.
자세한 것은 1995년 천경자 회고전을 기획하고 천경자 평전을 집필하였으며, 감정 과정에도 참여한 최광진 평론가의 글 참조. 쉽게 말해, 미인도는 기존의 작품을 보고 최대한 천경자의 화풍을 똑같이 재현하려 한 모작인데, 그림을 그리는 데 이런 방식을 동원해야 할 사람은 작가보다는 위조범에 훨씬 가까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천경자 화백 본인이 그림을 그리려 했다면 구태여 자기 그림을 보고 소품을 끼워 맞춰 가면서까지 그릴 필요가 없다. 그러나 위조범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천경자 화백 본인이 아닌 이상에야 그냥 그림을 그린다고 천경자 화백의 스타일을 그대로 재현하기 쉽지 않은 노릇이고, 원작가의 스타일을 의도적으로 닮아 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짜깁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3.2.2. 뤼미에르 감정팀 측의 주장
-미인도 위작 판별을 위해 다중스펙트럼, 초고해상도 촬영, 1650층의 층간분리 기술을 동원했다. 분석에 광학, 물리학, 수학 지식을 동원한 결과 검찰에 제출한 분석 보고서가 63쪽에 달할 정도로 충분한 데이터 검증을 마쳤다.
-한국 검찰의 자체 과학수사 결과는 비과학적이고 비객관적이며 임의의 자료를 모아 놓은 것에 불과하다. 우리 연구소의 25년 이상 축적된 첨단기술과 경험을 그렇게 쉽게 흉내낼 수 없다. 검찰 측은 미인도의 출처와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 경위, 위작 논란의 경과, 육안을 통한 일반적인 안목 감정 결과를 배제했다고 지적했는데, 객관적이고 수치화가 가능한 범주 안에서 작품 자체 분석에만 집중하고 어떤 주관적 해석이나 논평도 삼가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일 뿐이다.
-검찰은 심층적 단층분석이 담긴 보고서를 제출하지 않았다고 허위 주장을 했다. 그림 1개당 1천650개의 단층을 촬영해 작품 간의 차이점을 분석했지만 검사는 이 보고서를 참고자료로 사용하지 않았다.
-검찰은 자신들이 뤼미에르 테크놀로지가 사용한 수학적 방법을 자체 실험에서 대입했고 그 결과 진품도 진품으로 나올 가능성이 4%라고 발표했는데 "검찰이 주장하는 바는 존중하고 받아들이고 싶지만, 주장할 때는 근거가 뚜렷해야 한다." "어떤 수식과 방법으로 계산해서 그런 결론에 이르렀는지 알고 싶다."
-화가가 빛을 인식하는 과정은 개개인마다 다르며 이는 쉽게 모방할 수 없다. 광도 편차값을 수학적으로 분석하면 명암 대비(contrast) 자료를 얻을 수 있다. 미인도와 천경자의 동시대 다른 작품 9점을 비교한 결과 다른 작품들의 값은 20~30으로 일정한 반면, 미인도는 45.29로 다른 작품들과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화가가 작품 안에서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을 적절하게 배분하는 방식도 쉽게 모방할 수 없다. 휘도 편차값을 수학적으로 분석하면 빛의 균형(balance)자료를 얻을 수 있다. 천경자의 다른 작품 9점의 은 21~34 사이에 분포하는 반면, 미인도는 45로 높게 나타났다. 이렇게 얻은 데이터를 함수로 계산한 결과 "미인도가 다른 작품들과 동일한 화가(천경자)에 의해 그려졌을 확률이 0.0002%"이다. 11월 3일 제시했던 수치는 이 휘도 편차값에 근거한 것이다.
-화가의 작품들 중 비슷한 대상을 그린 경우 객관적인 비교를 하기에 좋다. 천경자의 경우, 눈동자 흰자위 부위가 객관적인 비교 대상으로 적절했다. 흰자위 두께를 다중층간확대분석방법을 이용해 900나노미터까지 측정했다. 이 분석 결과 미인도의 흰자위는 다른 작품들에 비해 채색이 얇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방법으로 분석한 결과, 미인도가 진품일 확률은 0.0006%에 불과하다.
-눈 주위 곡선의 모양과 코와 입술의 작업방식 등도 천경자의 다른 작품과 달랐다.
-근본적 문제는 작품의 진위는 화가의 판단이 가장 우선이라는 점이다. 대부분 국가에서는 작품의 진위를 결정할 때 화가 본인의 판단을 가장 존중한다. 애초에 프랑스라면 진위여부를 학계에서 다룰 수는 있어도 법정까지 가지도 않는다. 이와 관련된 일화도 있다. 파블로 피카소는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그림을 샀다는 얘기를 듣고 집에 찾아가서 ‘그 그림은 가짜’라고 했고 그 말 때문에 주인은 그 자리에서 그 그림을 찢어버려야 했다. 또 카미유 피사로는 그림이 자기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주인에게 ‘돈을 주면 (내 그림이라고) 얘기해주겠다’며 흥정을 했었다. 물론 이것은 잘못된 행동이지만 그 정도로 화가의 말은 절대적이란 것을 보여준다.
3.3. 김재규 옹호 측의 주장
한편 김재규 옹호 측은 천경자 미인도 위작 사건은 단순히 위작 문제가 아니며, 신군부와 미술계가 결탁한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3.3.1. 신군부 연관설
2017년 1월 21일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김재규 재산 환수 과정 및 천경자 미인도에 관련된 내용을 보도했다.
신군부가 김재규에게 부패했다는 오명을 뒤집어 씌우기 위해 없는 죄를 만드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는 것은 여러 원로 인사들의 증언으로 이미 알려져 있고, 그 과정에서 애꿎은 천경자의 이름이 이용당한 것뿐이다. 또한 그 이후로도 김재규는 여야 막론하고 저평가되어 현재까지 이른 상황이다.
주류 미술계 전체가 다 김재규를 적대시하기 할 리가 있냐며 물타기를 하고 계속 반달하는 특정 미술계 관련자가 있는데, 실제로 양심적인 인사들은 이미 당시 미술계에 가해진 압력을 고백했다. 또한 감정업계와 미술관 측은 자신들의 이권을 수호하기 위해 '김재규가 사치스러운 수집벽이 있었고 이를 위해 부정축재를 벌였다.'식의 프레임을 씌워야만 했던 당시의 공작에 가담한 것이다. 그리고 일단 그렇게 양심을 팔고 진품이라고 감정한 이상, 번복하면 한국 미술계 자체가 나락에 떨어지게 될 것 같으니 프랑스 전문가들이 온갖 과학적인 감정 기법을 동원해 아니라고 밝혀도 한국 미술계에서는 계속 진품이라고 우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모든 미술계 전체가 김재규에게 악감정이 있어서 가짜를 진짜라고 우긴다고? 음모론도 정도껏 해라.'라고 하는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단 한 차례라도 조작이 있었더라면 미술계가 본질을 흐리는 주장을 계속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마치 달리는 호랑이의 등에 탄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조작이 가해졌을 시기는 서슬퍼런 군부독재 시절이다. 수 많은 조작, 공작사건이 이미 밝혀졌고 이 사건 역시 비슷한 의심을 받고 있는 것이다.
김재규의 복권을 주장했던 함세웅 신부의 의견도 다음과 같다. 링크 요약하면, 신군부는 12.12 이후 김재규의 죄를 부풀리는 과정에서 김재규에 대한 '파렴치범' 또는 찬탈범의 프레임을 씌우기 위해 김재규가 굉장히 많은 부를 부정축재했으며 그의 집안에서는 고가의 미술품이 쏟아져 나왔다는 식의 여론조작을 행했다. 이 과정에서 입수할 수 있는 모든 미술품 등을 끌어모아 일방적으로 증거라고 세간에 내밀었으며(당시 검찰 조사서에서는 군부가 제시한 자료 내역이 전혀 등재되어 있지 않다.) 이렇게 마구 사치품을 끌어모으는 과정에서 위작이 섞여들어갔다는 것이다. 천경자의 미인도는 그 과정에서 김재규의 부정축재의 증거물이자 환수품으로 세탁되어 기증되었다는 것. 즉, 입수 경로 자체가 근본적으로 신빙성이 매우 떨어지는 상황이다.
결국 천경자의 미인도가 위작으로 판명날 경우, 미술계의 치부가 드러나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위작으로 판명나는 것을 막고 있다고 의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정권에 기생하는 검찰이나 미술관/감정업계나 공동체의 운명이니 발을 뺄 수가 없다. 천경자의 미인도가 진위 여부 논란에서 위작으로 판명나게 되면, 그 입수 경로인 김재규로부터의 환수품이라는 사실에 대한 재조사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게 되고, 보수논객 조갑제조차 '청탁이 전혀 먹히지 않는 사람이고 청렴결백하여 박정희가 매우 아꼈다'고 평가하는 김재규의 재산 환수 과정[28]과 이 과정에서 군부의 정치적 개입과 누명에 대한 검증으로 이어지게 돤다. 나아가 이와 결탁하고 영합하여 신군부에 부역한 미술계 전반의 치부가 크게 드러나게 되므로 이 사실을 우려해 외압을 넣어 '한 정신병 걸린 작가의 발악' 정도로 축소하고 시간에 묻히기를 바라는 것이다.
뤼미에르 테크놀러지는 루브르 박물관과도 감정 계약이 되어 있는 권위 있는 감정팀이다. 페니코 사장은 검찰의 진품 결정과 감정 결과 거부에 대해 검찰이 계산식과 검사 방법을 멋대로 왜곡 적용했고 과학적으로도, 작가 본인도 위작이라고 하는 상황에서도 이런 결정을 내리는 게 이해가 안 간다면서 공개 토론도 가능하다고 밝힌 바 있다. 도대체 왜 검찰은 자신들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분야에 대해 졸속으로 진품 확정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걸까? 이를 밝히기 위해선 10.26 재판과 관련한 김재규 고문과 여론 공작, 검찰과 미술계의 부역, 천경자를 어떻게 정신병자로 몰아갔는지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 물론 정권이 바뀌었지만 역시 달라진 건 없었다. 민주화 인사들과 김재규의 관계 역시 좋은 관계가 아니며 대중의 관심에서도 멀어져 있기 때문이다.
만약 정말로 김재규의 명예회복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처럼, 이 미인도가 위작이거나 김재규의 집으로부터 환수된 것이 아니라면, 이것은 10.26을 역사적으로 깎아내려 자신들의 정권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했던 신군부의 인위적인 조작 행위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로서 작용할 수 있다. 최순실 게이트 이후 공정한 재조사를 청원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3.4. 대중의 반응
2016년 2월 기준으로 대다수 대중의 반응은 '본인이 그렇게 아니라고 억울해 하면서 한국 땅을 떠나기까지 했는데 화가인 본인이 자신의 그림을 못 알아보는 일이 가능한가'라는 반응이 제일 많고, 일부는 '언제부터 국가에서 타인의 미술품을 진품이냐 아니냐를 결정할 권리가 있었느냐', '사실 가짜임이 밝혀지면 그동안 진품이라고 감정을 내린 감정사들과 미술협회 등의 위상이 떨어지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품위유지를 위해 진품이라고 고집을 부리는 게 아니냐'는 의견 등이 있다. 2017년 기준으로 봤을 때 천경자 유족측이 제시한 과학적 근거가 더 신빙성이 있어 이런 대중의 반응이 틀린 것은 아니다.
다만 그렇다고 천경자 유족 측의 의견이 맞았으니 위작 논쟁이 발생하면 무조건 화가가 참말을 하는 것이라고 믿는 태도도 곤란하다. 만든 작품이 수천점이 넘는다면 제아무리 작가라도 혼동할 가능성이 없진 않다. 실제로 2010년 저명한 모 서양화가가 자신의 작품을 '위작'이라고 밝혔다가 3년 만에 '진품'이라고 번복한 적이 있다.
또한 대중이 위작 사건을 판단하는 태도는 선입견이나 감정적인 요소에 휩쓸리기 쉽다. 비슷하게 위작 시비에 말려든 이우환 위작 사건과 비교해보자. 둘 다 작가 자신이 '자기 자식 알아보는 부모'라고 주장하는데도 이우환 위작 사건을 옹호하는 사람은 적은 편이다. 이는 이우환의 작품은 극도로 미니멀리즘을 추구한 추상화였고, 천경자는 표현적인 구상화라는 차이가 크게 작용한 결과긴 하다. 아무래도 추상화는 발상이 어려운 것이지 직접 물질적인 작품을 위조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진 않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고, 실제로 그렇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식으로 작품이 사실적으로 또는 구상적으로 재현되었느냐의 첫인상만 가지고 위작 여부를 판단한다면, 매우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또한 천경자의 경우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근거를 몇가지 자세하게(머리카락을 칠하는 방식, 비슷한 구도와 소품을 다른 작품에서 차용했을 가능성, 서명을 한 방식 등) 제시했고, 사후 유족들이 프랑스 업체로부터 진품이 아니라는 감정까지 받았지만, 이우환 작가의 경우 '나만의 호흡' 같은 모호하고 추상적인 기준을 근거로 제시했고, 실제로 위작으로 명백히 밝혀진 가짜 작품을 자신의 진품이라 주장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서 신뢰성이 떨어진 것 역시 감안해야 한다.
작가 본인의 주장이 작품 감정에선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다. 작가도 사람이므로 실수할 수 있고, 때로는 위에서 예로 든 파블로 피카소처럼 작가가 '가치 파기'를 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위작 논쟁이 벌어지면 섣부른 판단은 삼가고 몇 년 동안 신중하게 법원과 학계가 어떤 판단을 내리는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 사실 전문가들 중에도 문제작을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이 대다수인데 언론 기사로만 잠깐 본 대중에게 신중한 판단을 요구하기란 애초에 무리인 면이 있지만 말이다.
3.4.1. 대중의 반응에 따른 영향
프랑스의 뤼미에르 테크놀로지 감정팀의 과학적 감정 결과 미인도가 진품일 확률은 0.0002%인 것으로 판정을 내렸다. 반면, 미인도가 진품이라고 주장하는 측은 마땅한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부정적으로 변한 대중의 반응을 의식해서인지, 2016년 5월 말 ~ 6월 초 경에 국립현대미술관의 바르토메우 마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미인도 진위를 모르겠으니 일반인·전문가에게 그림을 공개해 널리 의견을 구하려 한다'는 서한을 유족 측에 전달했다. 이에 김정희 교수 측은 "전문가 의견을 구한다는 얘기는 제3자 의견을 빌어 과거처럼 가짜를 진짜로 둔갑시키려는 것"이라며 경계감을 감추지 않았다. 과거 1991년 천경자는 본인 작품으로 전시된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미인도가 위작이라고 주장했으나 작가 견해는 인정되지 않았고, 미술관 감정 의뢰를 받은 한국화랑협회가 진작 판정을 내렸다. 유족들이 '여론몰이'를 우려한 것으로 볼 수 있다.
4. 교훈
4.1. 작가들의 입장에서: 체계적인 작품 관리 필요
예술창작자들, 특히 예술가 지망생들에게 이 사건이 주는 교훈은 자기 작품 관리는 자기가 잘해야 한다는 것이다. 작품에 워터마크 꼼꼼히 넣고 글이나 사진이나 영상으로 기록 남기고 아카이빙, 데이터베이스화 하는 등의 작업에 소홀한 사람들이 많다. 예술가 지망생들이라면 이런 일에 철저하게 공을 들이길 바란다. 자기 작품이 마음에 안든다고 파기하지 말고, 설령 파기하더라도 '나는 x년 x월 x일에 이 작품을 만들었는데, 이 작품은 무슨무슨 재료를 썼고 무슨 기법을 썼으며 이를 통해 이러이러한 것을 의도한 작업이었는데, 마음에 안들어서 x년 x월 x일에 이 작품을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파기한다' 같은 기록을 남겨라. 아예 캔버스에다 머리카락, 침, 피 같이 DNA가 검출되는 것들을 집어넣는 작가도 있다고 한다.
문제는 상당수 예술가 지망생들이 생계 유지에 쫒겨 작업 관리를 제대로 못한다는 것이다. 당장 만든 작품을 전시하기는 커녕 보관할 장소조차 마땅치 않은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다. 관련 연구자들은 지금도 상당수 작품이 먼지 맞고 곰팡이 핀 상태로 어딘가에 방치되어 있을 거라고 말한다. 당연히 이는 장기적으로 보면 미국이나 유럽 같이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다른 국가들과 '문화 자본' 격차가 벌어지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그래도 디지털 기술이 발전해서 과거보다는 자료관리가 편해졌으니 가능한 한 최대로 신경을 써두자. 위에서 거론되었듯 아날로그 방식과 결합하면 효과가 몇 배가 된다.
4.2. 한국 미술계 관계자 입장에서: 부실한 작품 감정 시스템 개선 필요
사실 가장 큰 문제는 앞으로 한국 현대미술계가 얼마만큼의 권위를 유지 할 수 있을지 여부다. 예술가들의 안목을 강조하며 신비한 아우라를 씌운 것은 사실 예술계 종사자 및 관계자들이었는데, 이번 사건으로 이 안목이 불완전하다는 것이 대중에게 알려진 꼴이 됐다. 미술계의 구조적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이를 해결할 근본적인 대책은 한국 미술계의 부실한 작품 감정 시스템을 개선해서 신뢰할 수 있는 미술 작품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것이다. 사태가 이지경이 된건 기본적으로 한국에선 90년대까지도 이렇다할 감정시스템이 없었고 그냥 화랑협회에 감정을 맡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랑협회는 전문가 7명을 모아 눈으로 진품 위작을 가렸을 뿐이다. 과학감정보다는 전문가들의 식견과 기억에 의존하는 안목감정에 의존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데 객관적인 감정이 가능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에 미술품 감정의 특수성 상 단순히 시료분석만 해서는 작품의 진위를 판별하는데 한계가 있다. 분석기계는 그 작품이 어떤 물질로 이루어졌는지를 말해줄 뿐, 누가 그 그림을 그렸는지를 말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만약 위조범이 대상 작품에 사용했던 재료가 뭐였는지를 알아내서 그 재료를 구해다가 사용하든, 아니면 우연히 같은 재료를 쓰든 원작가가 사용한 재료와 같은 재료로 위작을 만든다면, 과학분석은 힘을 쓰지 못한다. 결국, 가장 중요한 건 미술작품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그 자료를 가지고 감정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작가의 화풍이나 제작습관 등을 면밀히 아는 감정전문가나 연구자들이 많아져야 한다. 뤼미에르 테크놀로지 팀의 분석은 이 데이터베이스 분석 면에서 앞서갔지만 외국 감정팀의 한계상 자료 접근에 제한이 있어 표본이 9점에 그쳤다는 점에서 역시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한국전쟁을 거친데다, 산업성장에 치중해 문화 연구 지원이 미비한 한국에서 이런 자료 구축이 제대로 되었을 리가 없다. 게다가 화랑이나 콜렉터들은 작품 가격에만 관심이 있지, 이런 감정이나 데이터베이스화에는 무관심하다. 도리어 작품 가격 떨어질까봐 작품 감정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이번 사건에서는 외국 감정단의 힘을 빌리고 나서야 끝이 날 뻔했으나, 아직도 모두가 납득하는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이다. 앞으로도 이렇게 위작 시비가 붙을 때마다 외국 감정 기관의 힘을 빌리는 일이 반복된다면, 예술가, 예술 시장, 컬렉터, 대중 모두 쓸데없는 소모전을 반복하게 될 것이기에 체계적인 작품 감정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이 더더욱 절실하다 하겠다.
4.3. 사회 전체의 입장에서: 미술품 비자금 조성 감시 필요
만약 김재규와 신군부의 연관 관계가 사실이라면 이 문제는 단순히 작가 개인이 자기 작품을 관리하는 문제, 미술계의 감정 시스템을 개선하는 문제를 넘어 사회 문제의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미술품이 고가에 거래되면서 이를 비자금 조성과 부정축재를 위해 악용하는 폐단이 생기지 않도록 관련 제도를 고칠 필요가 있다.]
14:50~14:56 서울 중구 서소문동에 있는 시청역 10번 출구로 이동하여 탐방을 완료
14:56~15:05 시청역에서 을지로3가역으로 가는 2호선 전철 승차 대기
15:05~15:45 2호선 전철을 타고 시청역에서 을지로3가역으로 가서 3호선으로 1차 환승하여 연신내역으로 간 후 6호선으로 2차 환승하여 구산역으로 이동 [40분 소요]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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