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희네 가계 아래에 있는 공터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걸어서
욱성이 집 근처를 지나
봉식이 아내가 전에 알바했던 채플린을 지나서
갤럭시에서 겨울 근무복 체촌을 했습니다.
업무시간에 서귀포 시내를 거니는 것은 아주 이례적인 일이라서
기분이 매우 좋았습니다.
때로는 그냥 도시를 지나쳐서 가는 경우가 허다했는데
오늘은 운이 좋았다고나 할까요?
전 개인적으로 서귀포를 사랑합니다.
이 작은 섬에 제주시를 벗어난 또 하나의 도시여서 좋구요
어렸을 적 산남의 세상이 궁금해서 좋았구요
그 곳 출신의 친구들과 선후배가 있어서
더더욱 서귀포를 사랑하는지도 모릅니다.
일을 끝내고서
이 도시에 혼자오면 으례 그랬듯이 우생당 서점에 갔습니다.
그리고는
"안도현"님의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시집을 한 권 샀습니다.
전에 "류시화"님의 [지금 알고 있는......]을 사고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책 값은 5500 원 이었습니다.
다행히 내 가난한 지갑에 천 원 지패가 7장이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과거 주말에 와서는 나무아래 벤치에 앉거나 1호 광장 하얀 페인트가 칠해져 있는 철제 벤치에 앉아 몇 행 정도 읽다 왔는데
오늘은 일찍 돌아가야 하기에 서문만 읽었습니다.
서. 문.
마루 끝에 쪼그리고 앉아 햇볕 쬐다가 깜빡 잠이 들 때가 있다.
그러다가 화들짝 깨어났을 때,
마구 무안해지던 느낌.
이 세상의 비밀을 훔쳐보다가 왠지 들켰다는 생각.
그 생각의 일부를 여기 더듬더듬 받아 적는다.
시가 나를 홀리는 헛것인 줄 알지만, 오늘도 어쩔 수 없이 시를 따라간다.
2001년 6월
전주에서 안도현
전 이 시인의 시 중에서 바닷가 우체국을 가장 좋아합니다.
내 생각과 시인의 시상이 절묘하게 일치했던
우연이 너무 좋았습니다.
다시 차를 몰고 회사로 돌아오는 길에
오늘 거닐었던
2002 월드컵을 준비하는 그 나무로된 인도를 거닐었던
감흥을 반추하며 옛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는 모두 그 자리에서 만날 수는 없지만
그대들이 남기고 간 향기가
아직도 뉘엿뉘엿 남아있는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