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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각 소리
채 희 문
동주는 저녁 여섯시가 넘어서야 포스터에 실을 두 장의 사진을 찾아 왔다. 내 사진은 제법 근사하게 나온 천연색 사진이었으나 그 사진 옆에 나란히 붙여야 할 동주의 사진은 고둥학교 졸업 앨범에서 도려내어 확대한, 망이 형편없이 굵은 혹백 사진이었다. 화상도 선명치 않고 여백도 누렇게 변색되었지만 동주가 그 사진을 굳이 고집한 이유는 빡빡 삭발한 모습이 아주 맘에 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촬영할 때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입도 야무지게 앙다물고 고개를 빳빳하게 세운 채 찍은 고둥학교 졸업 당시의 사진이었다.
급하게 달려온 듯 숨을 헐떡이는 동주의 어깨를 냅다 후려치면서 나는 그 사진의 표정이며 모습이 어쩌면 이렇게도 내가 연출할 이 연극의 분위기와 홉사하냐며 맘껏 좋아했었다. 아무리 점수를 나쁘게 매기려고 해도 그 사진이야말로 확실히 100점짜리임에 틀림없었다.
우악스런 턱뼈로 인해 역오각형의 모습이 되어 버린 얼굴 형태, 가늘게 찢어진 눈, 무엇보다도 처항의 의지가 강력히 담겨 있는 듯한 빡빡머리.
동주는 그 사진을 나의 천연색 사진 옆에 대놓고는 그것 보라는 듯이 투덜댔다.
“이거 봐요. 형 사진두 흑백에 빡빡머리였다면 얼마나 좋았겠수?”
사실 그가 포스터에 붙일 사진을 빡빡머리로 선택한 데에는 나름대로의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며칠 전부터 해왔던―내가 연출을 맡아 온 이번 연극의 분위기야말로 어딘지 모르게 우울하고 섬뜩해야 할 것이라는―생각에 딱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사실 그 희곡의 분위기는 섬뜩하고 우울했지만 나로서는 그 사실이 더없이 맘에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대학 동문이며 둘도 없는 후배인 동주가 쓴 희곡을 일차 검토하던 중에 나는 그만 무릎을 세 번씩이나 치며 감탄사만 연발했었는데 그 까닭은 희곡의 내용이 너무나도 우리의 현실을 통렬히 비난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내 마음을 홀랑 빼앗아간 부분은 마지막 대목이었는데 동주 역시 극의 효과를 살리기 위해서 그 끝부분에 무명의 스페인 시인이 쓴 노랫글을 인용했던 것이다. 그 노랫글 뒤에는 ‘공산당계의 어떤 정기 간행물에 실린 시로서 파시스트요, 히틀러의 도당이었던 아쥐르 군단의 병사들을 규탄할 목적으로 씌어진 시를 발췌함’이란 토가 명확히 달려 있어 약간 부담스럽긴 했지만.
그러나 내가 동주의 희곡을 보다가 단숨에, “좋아. 이걸 무대에 올리자구!”라고 한 이유는 어쨌거나 이 끝부분의 노랫말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으며 적어도 내 상상으론 이 연극이 무대에 올려지고 난 뒤면 세상 천지에 이 노래가 유행되어 모든 사람들이 흥얼거리고 다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빠져서였다.
“하긴 네 발이 맞다. 포스터에 이렇게 붙여 보니까 천연색 사진이 영 안 어울리는구나. 마치 화장 잘못한 갈보 같다.”
나는 이렇게 말하며 내 모습이 담긴 천연색 사진을 포스터에 대었다 떼었다 하면서 한참을 망설이고 있었으나 그는 내 말에 전연 아랑곳하지 않고 이내 두 장의 사진에 척척 풀을 발라 포스터의 노랫글 위에 붙여 버리고 말았다.
나는 그렇게 완성된 포스터의 시안을 한쪽 벽에 걸어 놓고 지그시 감상하기 시작했다. 우악스럽게 생긴 빡빡머리의 어린 녀석 하나와 제법 예쁘장하게 생긴 대학생 녀석의 보습이 나란히 걸려 있었으며 그 사진 위로는 ‘아쥐르 군단의 노래’란 제목이 커다란 활자로 걸려 있었고 그 아랫부분엔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노랫말이 잔잔한 글씨로 실려 있었다.
우리는 선량한 가톨릭 교도/ 우리는 모범적인 살인자/ 스페인 이야기는 질색이야 / 차라리 몽등이 이야기나 하고 / 아주까리꽃이나 이야기하자 / 카스틸라에 눈이 내린다 / 겨울 바람이 울부짖을 때 /우리는 철십자 훈장을 받으리 / 우리에게 푸른 옷을 입혀 다오/ 우리는 철십자 훈장을 받으리 / 모든 아가씨의 입술과 함께/ 카스틸라에 눈이 내린다
그러나 내가 그토록 좋아하던 노랫말이었건만 막상 포스터로 제작하기 위해 시안을 만들어 벽에 걸어 놓고 보니 서너 군데가 영 께름칙해서 견딜 수 없었다. 모범적인 살인자라니, 게다가 철십자 훈장을 받을 것이라니.
“여봐, 동주야. 저게 도대체 뭘 뜻하는 말이냐?”
나는 그저 연극의 내용에만 도취되었을 뿐 사실은 이 노랫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 기회에 알아 두어야겠다 싶어서 큰 소리로 동주에게 물어 보았다.
“형님은 연출하시는 분이긴 하지만 굳이 저 시에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아쥐르 군단이란, 히틀러를 원조하기 위해서 소련으로 파견된 살인부대였다는 것만 알아 두시면 됩니다. 아쥐르란 바로 하늘빚이란 뜻이구요. 그러므로 아쥐르란 악마를 돕는 하늘빛이란 뜻도 되지요. 그 정도만 아시고 형님 마음대로 연극을 만들어 보세요.”
동주는 대단치 않다는 듯 바닥에 벌렁 드러누우며 이렇게 말했으나 어떻게 된 셈인지 나는 그의 말을 듣고부터 더욱 불안해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쥐르 군단의 노래. 나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동주가 썼다는 이 희곡을 무대에 올리기로 작정하지 않았던가. 더구나 이 연극반에서는 내가 가장 선배였으며 또한 내가 이 연극을 책임지는 연출가가 아니었던가.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하기 시작했다. 어째서 아쥐르라는 아름다운단어 속에 그다지도 무자비하고 흉포했던 히틀러의 이름이 담겨 있는 것이며, 입에 담기도 두려운 살인부대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는 말인가.
나는 의자를 넘어뜨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바로 그 순간 요 며칠째 신문을 장식하고 있는 모 대학 연극단원들에 대한 기사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야, 동주야. 이거 대단히 미안한 질문이지만 혹시 네가 표현하고자 했던 아쥐르에 또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닐까?”
“그게 무슨 소리유? 형.”
“글쎄 뭐랄까. 이 노랫말을 자꾸 읽어 보니까 왠지 모르게 여러 가지 테마를 간직한 말인 것만 같아서 그래.”
“성모 마리아를 생각하세요. 혹뇬 시베리아로 떠나는 창녀 카츄샤를 생각하세요. 이 희곡은 그 이상의 것도 그 이하의 것도 아네요.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가장 갈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 역시 푸른 하늘 이상의 것도 이하의 것도 아니잖아요?”
동주는 이렇게 말하며 누운 채로 담배만을 피워 대었다.
“미친 자식, 도무지 무슨 소린지 알아먹을 수가 없구나.”
동주가 이렇다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나도 더 이상 질문을 계속하지 않고 그의 옆에 길게 드러누웠다. 히틀러든 철십자든 간에 나는 그 몇 개의 위험한 낱말들이 어떤 중대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어서 내가 만들 연극을 망치리라고는 상상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다만 무대로 쓰일 창고의 벽에 달라붙어 째깍째깍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시계 바늘 소리를 귀담아 들으며 앞으로 나의 참다운 연극을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해 줄 주인공들의 대사만을 머릿속으로 열심히 외고 있을 따름이었다.
저녁식사 때가 지나서인지 배가 약간 출출하다고 느껴질 무렵이 되어서야 연극반원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마에 시커먼 점이 달린 성수는 언제나처럼 콧구멍으로 담배 연기를 뿜으며 들어왔고, 동료들로부터 성수와 연애중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경미가 뜨겁게 구워진 오징어 한 마리를 신문지에 싸들고 뒤따라 들어왔다. 그 뒤를 이어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나머지 네 명의 연극반원들도 들이닥쳤는데 그들은 동주와 내가 벽에 붙여 놓은 포스터를 보자마자 저마다 멋있군, 멋있어!를 연발하며 사진 속의 빡빡머리에 저마다 입을 맞추곤
했다.
그러나 그 중의 누구인지는 몰라도, 야! 포스터에까지 반골끼가 잔뜩 담겨 있구만,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기 때문에 나는 소스라치듯이 놀라 벌떡 일어나야만 했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는 아마 내 마음을 꿰뚫고 있는 듯했다. 이미 그때의 내 마음속에는 비록 내가 연출한 것이라 하더라도 이 연극이 순수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사실이지 벌써부터 고백했어야 했지만 나는 이 연극을 연출해서 무대에 올릴 자신이 점점 없어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며칠 전 신문에서 모 대학의 학생들이 북한 가극인 피바다를 공연하다가 단체로 구속되었다는 기사를 읽고부터는 은근히 이 연극의 내용에 대해서도 걱정이 되곤 했었는데 급기야 동주에 의해 만들어진 포스터를 본 순간부터는 그 걱정이 피상적인 두러움으로 변하여 나를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피상적인 두려움이란, 내가 이 연극의 내용을 불순하다고 느끼게 되면서부터 상상하게 되었던 나름대로의 또 다른 각본이나 다름없었다. 그 상상의 각본대로라면 나는 불순한 연극을 연출했다는 죄명으로 모 기관에 연행되어 가서 샅샅이 조사를 받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 나는 진정으로 반국가적인 불순한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조사원의 질문에 아무런 시인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었으며 오히려 그 점으로 인해 더욱 지독한 반국가세력으로 몰리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따라서 나는 졸업을 두 달 남겨 놓고 퇴학을 당하게 될 지도 모르는 것이었으며 그 순간부터 아버님이나 큰형님에게 따돌림을 당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무엇보다도 취직 시험마다 낙방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찌 생각하면 내가 느끼는 피상적인 두려움이란 매우 유치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으나 졸업을 앞둔, 그리고 약혼을 앞둔 나에게는 그 유치한 두려움 자체가 매우 큰 걱정거리로 바뀌기도 하는 것이었다.
연극반원들은 저마다 대본을 한 권씩 나눠 들고 대사 연습에 몰두하고 있었다. 연극이란 것이 도대체 사람들의 마음을 얼마나 깊이 홀리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은 벌써 며칠 동안을 거의 밤까지 새워 가며 대사를 외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었다. 사실 연극에 매료되기는 쉬운 일이었다. 어여쁜 여자애를 꼬여서 애무하듯이 연극의 대사를 샅샅이 애무하노라면 어느새 모든 종류의 방탕에서 느끼는 기훈처럼 일견 단순하면서도 극치감을 맛볼 수 있는 쾌락 속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었다. 지금 내 앞에서 대사를 외고 있는 연극반원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매력 때문에 대학 4년간을 연극 연출에 바쳐 왔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무려 4년간이나 연극에 미쳐 있긴 했어도 그 연극을 통하여 투사나 지사가 되고자 하는 생각은 정말이지 추호도 없었다. 따라서 내가 연출했던 연극은 거의 모두가 고전극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아름다운 사랑 노래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던 중에 졸업을 두 달 남겨 놓고 마지막으로 택한 연극이 바로 동주가 쓴 ‘아쥐르 군단의 노래’였는데 연극 연습을 하며 동주를 겪어보니 그야말로 보통 반골이 아니었던 것이다. 동주에게서 그런 점을 발견하고부터 나는 약간씩 불안함을 느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어제까지만 해도 그 불안함은 지극히 미미하게 여겨지던 정도였는데 갑자기 오늘 저녁, 희곡 끝마무리의 노랫글이 인쇄된 포스터를 보면서부터 불현듯 두려움으로 다가서는 것이 아니었던가.
나는 갑자기 안절부절못할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사람이 살다 보면 아무런 잘못도 없이 어떤 죄명을 뒤집어쓰기도 하는 법이지만 적어도 대학을 졸업할 정도의 나이와 수준이라면 죄명을 덮어쓸 것이라는 조짐은 미리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지금 내가 연출하고 있는 연극에 대하여 내가 스스로 유죄하다고 인정하면 나는 이 연극에 매료되어 밤잠을 설치며 연습하는 후배들에게 비겁자라든가 겁쟁이로 불리게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어쨌든 나는 두려웠다. 포스터를 본 그 누군가가 단적으로 반골이라고 했듯이 정말로 이 연극이 철저하게 반골 기질을 담고 있다면 이 연극을 책임져야 하는 나야말로 뻬도 박도 못 하는 선동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리라.
마침 오늘은 연극의 대사 연습보다도 어떻게 무대를 꾸밀 것인가에 대하여 의논하기로 되어 있던 날이었다. 어느새 동주는 무대 장치에 대해 설명한 글을 날렵한 용지에 타이핑해서 내게 들이밀고는 손가락으로 한 줄 한 줄 짚어 가며 자기의 의도를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동주의 말을 한마디도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이미 자라 보고 놀란 가슴이라서일까. 하필이면 동주가 꾸미고자 했던 무대는 좀전까지만 해도 내가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있었던 감방, 즉 죄인을 가두어 놓는 교도소였던 것이다.
“형님, 무대 왼편에는 말입니다. 가로 세로 각각 3미터에 불과한 감방이 있다 이겁니다. 그 오른편에는 복도가 있구요. 복도와 감방은 철문으로 막혀 있습니다. 사실 무대의 앞면은 트여 있지만 무대의 앞면으로부터 감방의 바닥 전체에 철창의 그림자가 길게 뻗어 나가게 해서 앞면도 철창으로 막혀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거지요. 여기서 생각해야 될 문제가 과연 철창의 그림자를 어떤 방법으로 길게 나타내느냐 하는 거지요.”
동주가 신이 나서 이렇게 얘기하는 동안, 나는 왠지 몰라도 나 나름대로만 알고 있던 감방의 모습을 떠올리고만 있었다. 장기 복역수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험상궂은 사내들, 비루한 장소, 더러운 제복, 치욕감과 복수심에 번들거리는 눈동자들, 경멸, 절망, 그리고 무엇보다도 빡빡 깎은 머리.
나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한참 신이 난 듯 떠벌리는 동주를 향해 눈을 치켜뜬 채 물었다.
“동주, 넌 감방에 갔다 온 적 있어?”
그러나 동주는 아직도 내 마음속의 혼란에 대하여 조금치도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내 물음을 연출가로서 감방을 표현하기 위해 의례적으로 묻는 질문 정도로만 여길 따름이었다.
“감방요? 거기 한 번은 가볼 만한 데라구 그러대요. 친구 녀석이 그러는데 그 녀석은 감방에 있을 때 하룻밤에 빈대를 오십 마리나 잡았다더군요. 형은 빈대 잡아 본 적 있으세요? 빈대는 말이죠, 잡는 즉시 대가리를 손톱으로 까눌러서 죽여야 한대요.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이 죄다 살아나서는…….”
나는 더 이상 동주의 말이 듣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 녀석에게서 등을 돌린 채 타이프 용지에 새겨진 글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 용지에는 무대 설명이 잔잔한 글씨로 나열되어 있었는데 마치 감방을 열 번쯤은 들락거렸던 사람이 쓴 것처럼 무대 설명은 완전무결한 감방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었다.
―무대 : 무대 왼편에 가로 세로가 각각 3미터에 불과한 감방이 있고, 그 오른편에 복도가 있다. 복도와 감방은 철문으로 막혀 있다. 사실 무대의 앞면은 트여 있지만 무대의 앞면으로부터 감방의 바닥 전체에 철창의 그림자가 길게 뻗어 나가게 함으로써 앞면도 철창으로 막혀 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그 나머지 벽은 두꺼운 시멘트벽으로 되어 있다. 뒷면의 시멘트벽 위쪽으로는 서류 가방만한 창문이 달려 있으나 역시 철창으로 가로막혀 있다. 단조로운 시멘트 벽면에는 낙서들이 어지럽게 휘갈겨져 있고 장식물이나 전등은 달려 있지 않다. 특히 좌측의 시멘트벽에는 무더운 여름날, 습기 찬 지하실에서처럼 물이 질질 흐르고 진하게 얼룩이 져 있다. 복도 쪽의 철문에는 식기를 집어넣을 수 있는 작은 구멍이 있지만, 그 구멍은 밖에서만 열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전체적인 조명은 복도에 비해 감방이 훨씬 어두우면 좋겠다. 막이 오르면 무대 밝아 온다.
내가 여기까지 읽었을 때 누가 주문했는지 몰라도 자장면과 군만두가 배달되어 왔다. 사방으로 흩어져서 각자의 배역에 맞춰 대사 연습을 하던 연극반원들은 날파리처럼 빠른 동작으로 자장면 그릇의 주위에 몰려들었다. 물론 거기엔 동주도 끼여 있었다.
그러나 나는 웬일인지. 조금 전까지 출출했던 것과는 딴판으로 영 입맛이 당기지 않았으므로 자장면 그릇으로부터 가능하면 멀찌감치 의자를 빼내어 뒤로 나앉았다. 이제부터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동주가 쓴 희곡을 다시 한번 읽어 볼 요량이었다. 도대체 저 녀석은 무슨 생각으로 하투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무슨 생각을 하기에 히틀러나 나치의 얘기가 화제에 오르기만 하면 눈에 불을 켜고 신바람올 내는 것일까.
후루룩, 짭짭, 후배들이 자장면을 빨아올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차근차근 동주의 희곡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후배들은 아마도 식사를 끝낸 뒤에 커피를 한잔씩 할 것이고 그 후로도 한동안은 노닥거릴 것이다. 그 시간이면 나는 적어도 두 번쯤은 이 희곡을 정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내가 둔한 센스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동주녀석이 문장 사이에 숨겨 놓은 의도쯤은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건대 나는 진작에 이 희곡의 숨은 뜻올 파악했어야만 했다. 적어도 요즘 같은 시국에 한 편의 연극을 책임지고 연출하려면 그 정도의 용의주도함은 있었어야 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나는 이번 연극을 연출함에 있어서 그토록 기본적인 절차를 밟지 않았다는 데에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렇게 된 원인은 희곡의 끝부분에 인용된 노랫글에 매료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어떤 사물이나 행위에 매료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나는 여태껏 한 가지에 매료되어 새롭고 신비한 기쁨에 젖어 있는 상태에서 객관적인 의식을 가지고 상황을 판단하는사람들을 한 명도 만나 보지 못했었다. 내 생각엔 어떤 한 가지에 매료되어 있는 사람이란 전혀 모순덩어리에 불과했었다. 그러나 요 며칠간, 어찌 된 일인지 나 자신이 동주라는 한 후배에게 그만 매료되고 말았으며 그가 인용한 한 편의 노랫글에 정신올 온통 빼앗기지 않았던가. 그로 인해 나쁜 연극을 올리기로 작정했으나 이제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동주라는 후배 자체가 어떤 위험성을 내포한 사상에 매료되어 있는 모순덩어리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모순덩어리에 매료된 또 다른 모순덩어리가 되고 만 셈이다.
동주가 건네 준 종이에는 무려 원고지 300장에 해당하는 수많은 내용의 대사가 담겨 있었으나 나는 찬찬히, 그리고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그것들올 읽어 나갔다. 그 대사 속에 숨겨진 뜻을 밝히는 작업이야말로 지금의 나에게는 의무 사항인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감방 안에 브리가티와 카마린올 비롯한 일곱 명의 복역수들이 있다. 브리가티는 뒷벽의 작은 창문까지 기어올라가 한쪽 다리를 창문 밖으로 내어놓은 채 힘든 모습으로 매달려 있다. 나머지 여섯 명의 복역수들은 서로 넓게 작리를 차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며 살기등등하게 버티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곧 싸움이 터질 듯한 험한 공기와 함께 자포자기한 듯한 기분마저 감돌고 있다. 대부분 여위고 창백한 안색을 지닌 복역수들은 모두 회색 바탕에 붉은 줄이 세록로 그어진 수의를 입고 있으며, 연신 더위로 인해 흐르는 땀을 닦기에 여념이 없다.
여기까지 읽어 내려간 나는 약간 안심할 수 있었다. 아주 생소하게 이질적인 등장 인물들의 이름이 최소한 이 나라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아닐 것이라는 암시를 주기에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둥장 인물들의 이름을 그렇게 생소하게 지은 것도 사실은 우연에 불과했었다. 동주가 둥장 인물들의 이름이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던 날 나는 우연히 스포츠 신문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브라질 축구 선수들의 이름을 그에게 알려주게 되었는데 그 독특한 이름에서 연유되는 신비성으로 인하여 마치 인물들이 펄쩍펄쩍 살아나는 것만 같았으므로 동주는 두말 않고 그 이름들을 사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참으로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등장 인물들의 이름이 브라질 식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무대의 배경도 브라질이 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우리는 세계지도를 펴들고 벨로호리존테라는 브라질의 한 도시를 배경삼았던 것인데 희곡의 내용이 암만 봐도 반골 기질로 가득 차 있던지라 그 배경이나마 외국으로 잡게 되었다는 것이 나에게는 안도의 한숨마저 나오게끔 했던 것이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파요오!”
“쐐주라도 한잔 빨게 해줘요오!”
후배들은 어느새 자장면과 군만두를 해치우고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젓가락으로 냄비 뚜껑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누구 하나가 냄비 뚜껑을 두드리기 시작하면 그들은 서로 질세라 냄비 뚜껑 주위로 몰려들어 힘껏 젓가락을 두드려 댔고, 날이면 날마다 그런 일이 반복되었기 때문에 냄비 뚜껑은 이미 쭈그렁 바가지가 된 지 오래였다.
원래 후배들이 그런 식으로 데먼스트레이션을 하면 연출가요 최고 선배인 나로서는 의당 몇천 원의 식비를 더 꺼내 주어야 하는 게 상책이었다. 그러나 왠지 오늘만큼은 냄비 뚜껑 두드리는 소리가 신경에 잔뜩 거슬리기만 할 뿐이었다. 따라서 나는 눈을 부릅뜨고 그들을 돌아보며 신경질적으로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왜들 그래? 죽을래?”
마치 전등불 아래서 바퀴벌레가 흩어지듯 후배들은 그렇게 각자의 자리로 흩어져 또다시 대사 연습을 시작했다. 그러나 수업시간에도 오징어 다리를 빨 정도의 배짱을 지녔던 경미는 기어코 한마디를 내뱉고야 말았다.
“왜 그래? 형, 나치를 흠모하는 연극에 미치더니 아예 독재자가 돼버린 거야? 이젠 아예 파쇼냐구!”
날이 파랗게 선, 그러나 새겨들으면 우습기만 한 경미의 말에 성수를 비롯한 연극반 후배들은 저마다 벽면이나 모서리에 머리를 틀어박고 킥킥거리며 웃음을 참았지만 왠지 내 기분은 섬뜩하기 짝이 없었다. 나치를 흠모하는 연극에 미치다니, 독재자가 되다니.
나는 갑자기 더욱 심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마치 나 자신이 깨닫지도 못한 이 연극의 습은 뜻을 그렇다면 다른 후배들은 모두들 알고 있었단 말인가. 만약에 그 뜻올 알고 있었다면 그들은 어째서 순순히 또한 자발적으로 이 연극에 참여하려 했었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기만 했다. 그러나 나는 짐짓 예전부터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었다는 듯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계속해서 동주의 희곡을 읽어 내려갔다.
―때 : 1980년 여름. 곳: 브라질 중동부 지역 벨로호리존테 시의 교도소 특감실. 등장인물 : 브리가티――기존의 복역수, 감방 규율책임자, 체격이 매우 건장하다(35세). 카마린― 기존의 복역수(28세). 올리베이라―주(州) 교도소에서 이감된 살인 전과자, 스페인계 브라질인, 2차 대전 때 소련으로 파견되었던 살인부대 아쥐르 군단의 일원이었음(52세). 실바―올리베이라를 따라 주 교도소에서 이감된 살인 전과자(30세). 그 외의 복역수 1, 2, 3, 4, 5. 간수―교도소를 지키는(50세).
나는 동주의 희극을 읽어 나가면서, 또 한편으로는 경미의 앙칼졌던 말을 떠올리면서 구제서야 이― 희곡의 숨은 뜻을 서서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희곡의 첫머리에 명시되어 있는 1980년 여름이라는 한계상황을 몇 번씩이나 곱씹어 읽어 본 끝에야 희미하게나마 알 수 있었던 복선이었다. 내 추측이 맞는다면 아마도 이 희곡은 광주항쟁을 배경으로 한 것이리라. 그렇다면 과연 이 희곡을 관통하고 있는 아쥐르 군단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파요오!”
“쐐주라도 한잔 빨게 해줘요오!”
후배들은 비록 작은 목소리이긴 했지만 또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내가 눈을 흡뜨고 노려보자 미리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의미심장한 대사―희곡의 내용 속에 담겨 있는―를 통해 항변을 계속했다.
“우리에게 푸른 수의를 입혀 달라!”
“와! 우리에게 푸른 수의를 입혀 달라!”
나는 할 수 없이 주머니를 뒤져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어 경미에게 날려 보냈다. 그러자 후배들은 제비처럼 잽싸게 그 돈을 나꿔채서는 기쁨의 함성을 지르며 우르르 밖으로 몰려나가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사람은 바닥에 점잖게 누워 있는 동주와 나 둘뿐이었다. 나는 새삼스레 동주의 희곡에 대해 깨달은 바가 있었으므로 그를 일으켜 세워 진지하게 토론이라도 벌여 볼까 했으나 애써 그 충동을 참고 말았다. 아직도 나 혼자서 깨우쳐야 할 내용들이 그의 희곡 속에는 산재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웬만하면 나 스스로의 힘으로 그 숨은 내용들을 알아내고 싶었다. 과연 아쥐르 군단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과연 푸른 수의를 입혀 달라고 외치는 등장 인물들은 무엇을 요구하는 것이란 말인가.
동주의 희곡은 첫장면부터가 매우 의미심장했다. 물론 감방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인만큼 어느 정도 비장감이 감돌아야 재미가 있겠지만 동주의 희곡을 새삼 깨닫게 된 뒤로는 대사의 한마디 한마디가 나에게는 많은 두려움을 전해 주기만 할 따름이었다. 그 희곡의 첫장면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브리가티 : (창문의 철창에 매달린 자세를 바로잡으며 창밖을 한동안 웅시한다.) 내 영원한 친구들, 카마린, 바가티니, 배베토, 알베스, 비예라, 그리고 저 친구, 이름이 뭐더라. 그렇지 페레이라. 자네들은 저 아침 햇살에 빛나낟 은빛 강줄기가 보이지 않겠지. 비록 이 굵은 철창 때문에 다섯 조각으로 찢어져 보이긴 하지만 말야.
카마린 : (부릎올 세우고 양무릎 사이에 얼굴을 틀어박으며) 위대한 조국 브라질의 아침 풍경은 감탄할 만하죠. 비록 벨로호리존테 시의 썩은 먼지를 잔뜩 담아 가지고 올지언정.
브리가티 : (창문에 매달린 것이 힘겨운 듯 다시 자세를 바로잡으며) 저 강 표면에 햇살이 비치면 강물은 마치 생선 비늘처럼 번득이지. 이상하단 말야. 한 줄기 빛 때문에 죽어 있던 강물이 살아난다는 사실은.
카마린 : (무릎 사이로 얼굴을 더욱 깊이 틀어박는다.)
복역수들: (저마다 깊은 한숨.)
브리가티 : 아침마다 이곳에 올라서면, 그리고 저렇게 다시 살아나는 강물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모르게 황홀해지지. 마치 오르가슴에 도달하는 것처럼.
카마린 : 조국의 하늘을 상대로 사랑하는 게지요. 지금도 벨로호리존테의 저 하늘을 우러르면 언제인가처럼 마음이 들뜨는 것을 느끼곤 하죠.
브리가디 : 빌어먹을, 사랑 좋아한다. 저기 벨로호리존테 시에 우글대는 놈들 중 우릴 생각하는 놈은 몇이나 될까?
희곡은 계속 이런 식으로 전개되다가 급기야는 감방 안에서 치고 받는 싸움이 벌어지기도 하고, 신발을 던져 가장 많이 뒤집어진 자를 죽은 것으로 간주하고 통곡을 하는 일종의 죽음 유희를 벌이기도 하며, 여럿이 힘을 합쳐 간수를 농락하기도 하지만 끝내는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오로지 푸른색의 수의로 갈아입혀 달라는 상징적인 농성을 벌이는 장면으로 끝나고 있었다. 동주는 그 대목에서 아쥐르 군단의 일원이었던 올리베이라를 강력하게 부각시킨 것이었는데 회색빛 수의를 걸치고 머리를 빡빡 깎은 모습으로 표현된 올리베이라의 대사는 지극히 슬프기까지도 했던 것이다.
후배들이 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들은 아예 인근의 식당으로 몰려가서 술판올 벌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동주는 아까부터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바닥에 길게 누워만 있었으므로 나는 이때가 기피려니 하고 그에게 다가가서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이봐, 작가 선생.”
동주는 가뜩이나 신비스럽게 보이는 큰 눈을 더욱 크게 뜨고는 조용히 나를 올려다보았다.
“도대체 푸른색 수의를 달라고 소리치는 이유가 뭐야?”
“아, 그거요? 별거 아닙니다. 자유를 달라는 거지요.”
동주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가슴 한구석이 바짝 오그라붙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그럼 아쥐르 군단을 강력하게 부각시킨 이유는 뭐야?”
“그거요? 그것도 별거 아녜요. 지금처럼 자유를 박탈하고 감시할 바에는 아예 나치처럼 까놓고 행동하라는 거죠. 그러면 차라리 나 같은 추종자가 생길 수도 있다는 암시예요. 비굴하죠, 지금 정부는.”
동주는 태연자약하게, 그나마 담배도 뻐끔뻐끔 피워 가면서 길게 누운 채로 말을 계속했지만 나는 이제 더 이상 서 있을 기력마저도 빠져 달아난 느낌이었다. 아, 나는 완전히 새까만 후배녀석에게 코를 꿰게 되었던 것이다. 적어도 난 학점 관리를 철저히 하면서 대학 4년올 지내 온 모범생이었다. 동료들이 대다수 반대하던 집체 병영 훈련도 나는 군말 없이 다녀왔으며, 교련 과목도 2학년 때까지 충실히 마쳐서 그로 인해 군복무도 몇 개월이나 단축받고 제대할 수 있었다. 비록 정치 상황에 항거하는 데모대의 강력한 동참 요청을 받고는 한때 심각한 고민에 빠지기도 했었지만 다행히도 복학생이라는 이유로 이리저리 빠져나가게 되어 닭장차 한번도 타보지 못한 처지가 아니었던가. 물론 한때는 꿇는 피를 가누지 못해 화염병도 몇 개 집어던지긴 했지만 나이 탓이었는지 이념이란 곧 유행하는 패션과 같다는 생각이 늘 나를 지배하고 있었기에 여태껏 별탈 없이 졸업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나의 가장 큰 관심사는 무엇보다도 취직이었다. 적어도 내 생각으로는 졸업 후에 방송국 피디 정도는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앞서서 틈틈이 토플이나 토익 같은 공부에 치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동주의 말을 듣는 순간 그런 꿈이 단번에 와그르르 무너지는 것 같은 심정이었다.
“여봐, 동주. 내 말을 곡해하지는 말고 잘 들어 줘. 혹시 말야, 자네의 희곡을 조금만 손질하면 어떨까?”
내 말이 마치 동주의 귀에 전달되기도 전인 듯싶었는데 그는 마치 스프링이 튀듯 벌떡 일어나 앉으며 나를 똑바로 쳐다보는 것이었다.
“어떻게 바꾸자구요? 벌써 연습도 거의 끝났잖아요?”
“아, 내 말은 다름이 아니고 대화 중에서 두어 마디만 고치자는 게지.”
“예를 들면?”
“예를 들면, 푸른 수의 대신에 빵을 달란다거나.”
그러나 그 순간 동주가 배꼽을 쥐고 웃기 시작했으므로 나는 더 이상 말을 계속하지 못하고 그의 눈치만을 보아야 했다. 참으로 난처한 일이었다. 곧 죽어도 내로라 하는 대학의 연극반 대표로서 사사로운 문제 때문에 각본을 고치자는 얘기는 사실상 창피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짓이었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나는 조심껏 그 얘기를 작가인 동주에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역시 동주는 생각했던 것처럼 보통 녀석이 아니었다. 그는 내게 더 이상의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냥 킥킥대며 웃기만 하는 것이었다.
나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서 더 이상 그의 곁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내 치부를 새까만 후배인 그 녀석에게 남김없이 드러낸 듯했기 때문이었다.
“까짓 거 연출가가 고치라면 고쳐야지 별수 있나요? 나야 뭐 기성 작가도 아니고, 습작으로 쓴 것이 운 좋게 형님 눈에 들었을 뿐인걸요. 그렇지만 이 희곡의 키포인트가 바로 푸른 수의인데 그걸 기껏 빵으로 바꾸자는 건 말도 안 왜요. 배고프면 냉수라도 먹으면 되지요. 그런데 자유가 고프면 우린 한순간도 살 수 없다 이거 아니겠어요?”
동주는 마치 빈정대기라도 하는 듯 고개를 까딱이며 얘기했지만 나는 그의 건방진 태도를 애써 외면하며 하다못해 히틀러라거나 철십자라는 말만이라도 고치자고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어쩌면 연극을 올리기에 앞서 수정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럼 그러죠, 뭐.”
동주는 심히 못마땅한 투로 대답했다. 나는 그나마라도 다행이라고 여기며 재빠르게 대본을 동주에게 넘겨주었다. 아마도 동주는 나를 매우 한심한 녀석이라고 욕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고 인생의 계획이 있었으므로 그까짓 욕쯤은 못들은 체하기로 했다. 아직 동주는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내 심정을 이해하지 흣할 것이었다. 그러나 동주도 군대를 다녀오고 약혼을 하거나 졸업을 하게 되면 언젠가는 내 심정을 이해할 날이 있을 것으로 믿는다. 그때면 아마 녀석도 빵과 자유와의 무게를 지금처럼 단적으로 가늠할 수는 없을 것이리라.
나는 동주가 대본을 고치는 동안 묵묵히 담배를 피우며 며칠 뒤 상현될 연극 장면올 상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 상상 속의 시선은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배우에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어두컴컴한 관객석에 머물러 있었다. 관객들 틈에 끼여 날카로운 눈초리로 연극 내용을 감시하는 정체 모를 사람들에게 뚜렷이 박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 상상 속의 관심은 과연 그 정체 불명의 사나이가 어느 순간에 벌떡 일어나서 호각을 불어제치며 연극 중단!을 외칠 것인가에 쏠려있었다.
마치 어둠을 가르는 호각 소리처럼 날카로운 경첩 소리와 함께 식사하러 나갔던 후배들이 와르르 몰려들어왔다. 술냄새를 물씬 풍기며 들어온 그들은 눈짓으로 나에게 미안하다는 인사를 보내며 각자 대본을 들고 떠들썩하게 대사를 외기 시작했다.˙
곧 이어 동주가 마지막 노랫글을 수정해서 내게로 가져왔다.
“차라리 끝을 야하게 고쳐 봤어요. 어떨지 모르겠네요.”
동주가 던져 준 노랫글은 어느새 빨간 글씨로 다음처럼 고쳐져 있었다.
우리는 선량한 죄수들 / 우리는 모범적인 민주 시민 / 세상 이야기는 질색이야/ 차라리 니나놋집 얘기나 하고/ 가랑이 사이 몽둥이나 이야기하자/ 벨로호리존테에 눈이 내릴 때 / 겨울 바람이 울부짖으면 / 우리는 빛나는 석방 증명을 받으리 / 우리에게 한 송이 꽃을 다오/ 우리는 빛나는 졸업장을 받으리 / 모든 아가씨의 입술과 함께 / 벨로호리존테에 눈이 내리면
동주가 건네 준 이 노랫글을 읽는 동안 내가 한 일이라곤 고작해야 담배를 한 개비 피웠을 뿐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내 등판은 흥건히 배어 나온 식은땀으로 인해 축축하게 젖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검은 양복』, 현암사, 1991)
2016년 5월 6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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