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제하 자금 수탈의 실상
(1) 오늘날까지도 일본이 끊임없이 주장하는 ‘식민지 지배 합리화론’의 핵심은 식민지 지배 기간
동안 일본은 조선에 상당한 자금을 투여했기 때문에 수탈보다는 한국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논리일
것이다. 실제로 패전까지 공채, 보충금, 일본인 민간 자본 등을 합해 총 70억 엔 정도가 일본에서
들어왔다. 그러나 독립국의 경우와는 달리 자금 유입의 목적과 용도가 식민 모국의 필요에 따라 일
방적으로 결정되는 식민지에서는 이러한 자금 유입이 식민지 내의 보유 또는 ‘개발’된 생산력(물
자, 인력, 자금 등)을 유출 또는 고갈시키는 수탈 기능을 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수탈의 실상을 밝
히는 것이야말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 논리에 대응하기 위한 첫걸음일 것이다.
(2) 일제가 조선 지배를 통해 유출 또는 고갈시켰던 생산력 중 자금의 형태를 띤 부문은 얼마나 되
는가? 이에 대한 전체적인 규모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일제하의 자금의 유출액을 단편적이나마
보여 주는 자료는 1949년까지의 조사를 바탕으로 1954년 외무부에서 펴낸〈대일 배상 요구 조서〉(
제2부 확정 채권)가 있다. 여기에서는 일본에게서 받아 내야 할 채권액을 174여 억 엔으로 집계하
고 있으나, 다음과 같은 한계로 실제 자금 유출액보다 과소 평가된 것이다.
① 지역적으로 남한에만 한정되었다.
② 증빙 서류가 남아 있는 채권만 집계한 것이다.
③ 주로 한‧일 간의 국경을 경계로 일본으로 건너간 부문에만 집계하였다.
(3) 이 글에서는 위의 자료를 바탕으로 새로 입수한 각 금융 기관의 조사 자료와 기존에 연구자들
이 사용해 온 조선 총독부(재무국) 발행 자료를 참조하여 일제하 자금 유출의 실상을 추적하였다.
대상 시기는 원칙적으로 일제 통치하 전 기간으로 하되 자료 및 방법론상의 한계로 일제 말기에 집
중하였으며, 광복 후에도 여전히 일제가 주요 금융 기관을 장악하여 계속 자금 유출을 하였으므로
항목에 따라서는 1945년 말까지도 다루었다.
재정 및 금융에 관한 단편적인 자료를 통해서나마 확인된 자금 유출액을 간략하게 정리하여 표로
나타내 보이면 다음과 같다.
〈표 1〉일제의 자금 수탈액
(단위: 천 엔)
항목
대일 배상 요구 조서
본 조사에 의한 수탈
〈재정 부문〉
전비(戰費) 유출 1,783,310
일본인 관리 봉급액 1,499,670
사법 경찰비 374,442
공채비 750,000
관업(官業) 경영 적자분 396,925
(소계) 4,804,347
〈금융 부문〉
일본계 유가증권액
7,435,103
10,617,000
대출금
847,433
5,803,977
대일 환거래 잔고
3,020,660
3,020,660
일본계 통화
1,514,134
1,514,134
일본 국고금으로 유출액
901,748
1,259,000
보험금
467,336
467,336
기타 미수금
893,245
893,245
체신 관계 유출액
1,868,660
1,924,291
(소계)
25,499,643
총계
17,429,362
30,303,990
(4) 이 글에서 다룬 몇 가지 가시적인 자료만으로도 최소한 303억 엔 이상의 자금이 유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식민지 조선의 1910∼1945년 동안 국내 총생산액(GDP)을 추산해 보면 550억 엔 정도인
데, 결국 이 가운데 55%가 유출된 셈이며, 일본이 식민지 ‘개발’을 위해 들여왔다고 자랑하는 70
억 엔의 4.3배나 된다. 더욱이 이 액수는 대부분 자금 공급 측면에서만 포착한 것으로, 자금 형성
과정의 파행성과 그로 인한 피해액은 집계되지 않았다.
(5) 이렇게 유출된 자금은 광복 후 빨리 보상 받아 독립 국가의 경제 재건을 위해 쓰여야 했다. 그러나 보상은 요원하였으며 당장 자금난에 봉착하여 은행권은 계속 증발되었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남긴 유산인 자금 유출은 다시금 인플레를 초래하였으며 결국 우리의 경제는 출발부터 혼란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민족이 주권을 상실한 채 정책 결정 과정에서 배제된 결과가 무엇인지에 대한 뼈저린 교훈일 것이다. 위의 자금 수탈액은 하루빨리 일본에게서 보상 받아야 하나 그 동안 1965년 한‧일 회담을 통해 ‘경제 협력’이라는 이름하에 받은 무상 3억 달러가 전부였다.
무상 3억 달러조차 자금 수탈로 인해 피해를 본 액수와 비교해도 턱없이 적은 액수이다. 303억 엔을 1945년 당시 달러로 환산하면 20.2억 달러나 된다. 그로부터 20년 후의 인플레를 생각하지 않아도 그 보상액은 자금 수탈액의 15%에도 미치지 못하는 실정이다.
3. 일제하 인력 수탈의 실상
(1) 노동력 강제 동원
일제의 노동력 강제 동원(일본, 사할린, 남양)은 1939∼1945년 3월까지 일본측 공식 자료(〈제86회 제국의회 설명 자료〉와〈내무성 경보국 자료〉)에 따르면 최소한 767,004명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이 통계는 강제 동원이 가장 심했던 1945년 4월∼8월 15일까지의 통계를 제외한 수치이며, 더구나 일본측 통계 자체도 축소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 단적인 예로 이러한 일본측 공식 통계는 재일 사학자인 박 경식이〈재일 조선인 관계 자료 집성〉에서 추산하고 있는 150만 명(석탄 광산 약 60만, 금속 광산 약 15만, 군수 공장 약 40만, 토건 관계 약 30만, 항만 운수 관계 약 5만 등)에는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표 3〉추계에 의한 강제 동원자의 최소 임금 총액(일본, 사할린, 남양)
(단위: 명)
1939년
1940년
1941년
강제 동원 수
53,120
59,398
67,098
감소율 40%를 제외한 수
1940년
31,872
1941년
19,123
1941년
35,638
1942년
21,382
1942년
40,258
1943년
24,154
합계
50,995
57,020
64,412
1942년
1943년
1944년
1945년 3월
119,851
128,350
286,432
52,755
1943년
71,910
1944년
43,146
1944년
77,010
1945년
46,206
1945년
8월
171,859
1945년
3∼8월
31,653
115,056
123,216
171,859
31,653
* 강제 동원 수는 1939∼1944년은〈제86회 제국의회 설명 자료〉, 1945년 3월까지는 내무성 경보국 자료임.
1939∼1943년까지 임금 총액
(410,699명×100엔×24개월)
985,677,600엔
1944년의 임금 총액
(171,859명×100엔×20개월)
343,718,000엔
1945년의 임금 총액
(31,653명×100엔×5개월)
15,826,500엔
합계
1,345,222,100엔
이 글에서는 일본측 공식 자료에 근거하여 최소한의 강제 동원 수를 밝히고 그에 따른 임금 수탈액을 추산하였다. 즉 강제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가 계약 기간 2년을 채운 것을 전제로, 조선인 노동자의 감소율(도주・송환・사망・만기 귀국으로 인한 감소율)을 40%, 일본인 노동자의 평균 임금을 월 100엔으로 산정하여 계산하였다. 그런데 일제가 임금을 지불했다고는 하나 강제 저축, 보험, 송금, 협회 가입비, 헌납금, 물품 구입대, 식대 등의 각종 명목으로 수탈해 실제로 지불된 임금은 10∼20엔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임금 지불은 사실상 의미가 없다 할 것이다. 한편, 광산・공장・토건 등 업종별로 약간의 임금 차이가 있었다고 생각되나, 여기서는 탄광 노동자를 기준으로 하여 분석하였다.
〈표 3〉의 임금 추계에서 반드시 들어가야 하나 자료상의 한계로 인해 빠진 항목은 다음과 같다.
① 조선 내 노동력 강제 동원(1938∼1944년까지 도내 동원 4,144,098명, 조선 총독부 알선 378,186명).
② 조선 내 ‘현원(現員) 징용’ 수(1944년 8월 현재 147,480명).
③ 일본 내 재일 조선인의 ‘현지 징용’ 수(1942년 10월 당시 징용자 17,138명-월 통계).
(2) 군 관계 강제 동원
전쟁지로 직접 동원된 조선인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육‧해군 특별 지원병, 징병, 학병 등의 군인뿐만 아니라, 군속, 여자 정신대(군 위안부 포함) 등이 모두 포함되어야 한다. 군인・군속을 포함한 총 동원 수에 대해 공안청 조사는 364,186명, 복원국(復員局) 발표는 365,263명 등으로 자료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일본측에서는 36만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분석한 바에 따르면, 최소한 60만 명 정도는 자료상으로 확인된다고 하겠다.
1938∼1943년 육군 특별 지원병 약 17,000명
1944년 징병(제1기) 약 210,000명
학도 지원병 4,385명
해군 특별 지원병 및 해군 동원 수 약 22,000명
군속(군 관계 징용) 약 150,000명
여자 정신대(군 위안부) 약 200,000명
--------------------- 모두 약 603,385명
이렇게 전쟁지로 동원된 조선인 가운데 희생된 숫자를 비교 산출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후생성의 조선인 군인 사망자 수 공식 통계: 6,377명(사망률 2.9%)
군속 사망자 수 공식 통계: 9,963명(사망률 6.64%)
② 최소한의 조선인 군인 사망자 수: 약 25만×4.5/100=약 11,250명(1944년 당시 사망률 4.5% 적용하여 추정 산출, 군속은 추정할 만한 자료가 부족하여 제외)
③ 최소한의 부상자 수: 60만×14/100=약 84,000명(1940년 당시 부상률 14% 적용하여 추정 산출)
따라서 군인・군속 사망자 수는 최소한 약 2만 명 이상, 부상자 수는 8만 4천 명 이상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사망자 수의 경우 대만인과 일본인을 비교하면 일본 정부가 발표한 조선인 사망률이 터무니없이 낮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1987년 일본 법무성 관보(105호)에 따르면 태평양 전쟁 중 대만인 군인, 군속의 사망률은 14.6%이며, 일본인 육군의 사망률은 20.6∼23.2%나 된다. 따라서 조선인 군인, 군속의 사망률은 최소 6만에 최대 9만 3천여 명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