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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장상인 JSI 미디어 대표
필자는 조선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성녀(聖女)로 추앙받고 있는 ‘오타 줄리아’의 취재관계로 16년 동안 나가사키(長崎)·구마모토(熊本)·교토(京都) 등 여러 성지(聖地)를 다녔다. 하지만, 정작 우리나라의 성지에 대해서는 초보자 수준이다.
언제부터인가? 가톨릭 신자들로부터 ‘배론성지를 한 번 가보세요!’라는 권유가 있었으나, 좀처럼 기회가 없었다. 때마침 충북 제천에 갈 일이 있어서 ‘배론성지’로 향했다. 안내자는 똑똑한 ‘네비게이터.’
박달재 터널·의림지 등 귀에 익은 곳을 지나자 성지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왔다. 4차선 도로를 벗어나 2차선의 좁은 도로를 3Km쯤 달려서 산 아래 넓은 계곡에 자리한 ‘배론성지’에 도착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성지의 도로를 꽉 메우고 있었다.
‘배론성지’의 정확한 의미를 알지 못했던 필자는 관광 안내소에 들러서 팸플릿과 안내 지도를 구했다. 순례의 A코스는 마음을 비우는 연못으로부터 인생미로까지, B코스는 황사영 백서 토굴-성 요셉신학당-최양엽 신부 묘소로 나와 있으나, 시간 관계상 필자가 임의대로 정했다.
안내서에 나와 있는 배론성지에 대한 내용이다.
<배론성지(舟論聖地, Baeron Holy Ground)는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에 있는 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회 성지입니다. 1800년대부터 박해를 피해 숨어들어온 교우들이 모여 형성된 오래된 교우촌입니다. 계곡이 ‘배(舟)의 밑바닥을 닮았다’고 해서 '배론'이라 합니다. 천주교 원주교구 소속으로, 2001년 3월 2일 충청북도의 기념물 제11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배 모양을 하고 있는 최양엽 신부의 기념 성당)
안내의 글을 읽으면서 고개를 들자 지붕이 배(舟)모양인 성당이 눈에 들어왔다. 최양엽 신부의 기념 성당이었다.
단풍이 절정이었다. 특히, 노란 은행나무 단풍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계곡 옆에 서있는 은행나무에서 바람 따라 춤을 추는 낙엽들이 장관이었다. 길목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그레고리안 성가는 어떠한가. 가톨릭 신자가 아닐지라도 저절로 성스러움이 느껴지게 했다.
로사리오는 장미와 관련 있어
필자는 먼저 ‘로사리오 길’을 선택했다.
<이곳은 묵주의 기도 길입니다. 순교자들을 따라 구세주의 어머니 성모님과 함께 구원의 신비를 묵상하며 걸어보지 않으시렵니까. 여기에서 사도신경을 바치며 환희의 신비를 시작합니다…>
가톨릭의 로사리오(rosario, 묵주)는 장미와 관련이 있다. 이는 라틴어 로사리움(rosarium)을 어원으로 하고 있다. 로사리움은 ‘성모님께 영적인 장미 꽃다발을 바친다’는 뜻이다.
묵주는 가느다란 쇠줄에 장미꽃송이 모양의 큰 구슬 1개에 작은 구슬 10개씩을 1단(段)으로 해서 모두 5단을 꿰어 만든 테 모양이다.
성지 곳곳에는 빨간 장미 대신 빨간 단풍이 군데군데 붉게 불타고 있었다. ‘배론성지’에 대한 현지 안내문을 그대로 옮겨본다.
<배론은 우리나라 천주교 성지 가운데 가장 깊은 성지입니다. 1801년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가 박해의 고통 속에서 구원을 요청하고자 백서(비단에 쓴 편지)’를 작성하였고, 1855년에는 우리나라 첫 번째 정식 신학교인 성(聖)요셉신학교가 설립된 곳입니다. 또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로 하느님과 신자들을 사랑하며 신앙과 삶의 모범을 보여주시고, 땀의 순교를 하신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묘소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런 세 가지 보물 외에도 1800년대 초부터 많은 신자들이 이 곳 ‘배론’에 모여 살며 깊은 신앙생활을 하셨고, 그 중 많은 분들은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하셨습니다. ‘배론’과 직접 관계된 순교자 중 이름이 남아 있는 분이 스물다섯 분이고, 그 외에 이름 없이 순교한 분들도 많이 계실 것입니다.>
‘無名殉敎者之墓’
필자는 '마음을 비우는 연못'을 바라보면서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에 머리를 숙였다.
‘배론’의 세 가지 보물에 대하여
‘배론성지’에는 세 가지의 보물이 있다.황사영 백서 토굴과 성 요셉 신학당, 그리고 최양업 토마스 신부 묘지다.
(황사영 백서 토굴)
황사영 백서 토굴은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황사영이 8개월 동안 배론 마을 옹기 굴을 가장한 토굴 속에 머물며, 중국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편지를 썼다. 이 편지의 소재는 명주천이고, 크기는 가로 62cm, 세로 40cm이며, 세필로 쓴 글자 수는 122행, 13,384자다.
이 백서는 첫째, 인사말(1-5행) 둘째, 신유박해의 진행과정(6-32행) 셋째, 순교자 열전(32-90행) 넷째, 교회 재건과 신앙 자유를 얻기 위한 5가지 방안(90-118행) 다섯째, 관면요청과 맺음말(119-122행)로 돼 있다.
백서가 중국으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심부름을 맡았던 황심 토마스가 그 해 9월 15일 배론에서 체포됐고, 10월 24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돼 순교를 당했다.
황사영도 황심이 체포된 후 9월 29일 배론에서 체포돼 1801년 11월 5일 서울 서소문 밖에서 대역부도의 죄로 능지처사 됐다. 6일 황사영의 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도로, 아내 정난주(정명련)는 제주도로, 두 살 된 아들 황경한은 추자도로 귀양을 갔다. 현재 백서의 원본은 로마 교황청 바티칸 민속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장주기 요셉 성인과 성 요셉 신학당)
성 요셉 신학당은 1855년 프랑스 선교사 메스트로 신부에 의해 설립됐다. 이때 교우촌 회장 장주기 요셉(1803-1866)이 자신의 집을 신학당으로 봉헌했다. 1856년부터 푸르티에 신부(1856-1866)가 교장으로, 프티니콜라 신부(1862-1866)가 교수로 재직했다.
신학 교육은 라틴어과와 신학과로 나뉘어 있었고, 신학과에서는 수사학, 철학, 신학을 가르쳤다. 또한 두 서양 신부는 신학생들을 교육시키면서도 교리서의 번역과 '라틴어·한국어·한문' 사전을 만들었다.
1866년 3월 2일 서울에서 남종삼 요한을 체포하러 온 포졸들이 신학교를 급습해서 두 신부를 체포했고, 3월 11일 서울 새남 터에서 순교했다. 장주기 요셉은 충남 보령 갈매못에서 3월 30일에 순교했다. 사람들은 그 때 ‘흰 무지개 다섯이 하늘을 뚫고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고 전해진다.
성 요셉 신학당은 한국 교회 최초의 신학교임과 동시에 조선 최초의 근대 신학 교육기관이었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묘지/ 사진: 배론성지 HP)
(최양업 토마스 신부 조각공원에 있는 신부의 동상)
‘배론성지’에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사제가 된 최양업 토마스(1821-1861) 신부의 묘지가 있다. 그의 아버지 최경환 프란치스코(1805-1839)는 성인이고,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1801-1840)는 복자다. 그는 1836년 12월 김대건, 최방제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돼 중국 마카오로 유학 가서 신학 공부를 했다. 1849년 4월 15일 중국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귀국 후 11년 6개월 동안 산간 오지에 있는 교우들을 방문하며 목자의 삶을 살았다. 그가 사목하는 구역도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등 5도로서, 6천여 명의 신자들과 127개의 공소가 있었다. 1861년 6월 15일 경상도 전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던 중 과로로 문경에서 선종했다. 그해 11월경 교구장 베르뇌(1814-1866) 주교에 의해 신학교가 있었던 이곳에 묻혔다.
당시 교구장 베르뇌 주교가 한 추도사의 일 부분이다.
“그의 굳건한 신심과 영혼의 구원을 위한 불 같은 열심, 그리고 무한히 귀중한 일로는 훌륭한 판단력으로 우리에게 그렇게도 귀중한 존재였습니다. 그는 12년 동안 거룩한 사제의 모든 본분을 지극히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사람들을 성공적으로 구원에 이끌기 위해 힘쓰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묵묵히, 천천히, 깊게 걷는 ‘님의 길’
(성지 경내의 안내표시와 은행나무 단풍/ 계곡의 물도 조용히 흐르고 있다.)
천주교 원주교구 순례길 ‘님의 길’의 안내문도 읽는 사람을 숙연하게 했다.
<이제 길을 떠납니다. 이제 길을 걷습니다. 나를 떠나기 위해 길을 걷고, 길을 걸으며 나를 만납니다. 묵묵히 걸으며 나를 돌아보고, 천천히 걸으며 사람과 이웃을 돌아봅니다. 깊게 걸으며 나를 떠나고, 깊게 걸으며 나를 만납니다. 하느님이 이끌어 주십니다.>
필자는 성지 내에서 발걸음을 옮기면서 유럽인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영혼의 인도자인 독일의 ‘안젤름 그륀(Anselm Grun)’ 신부가 쓴 에세이 <머물지 말고 흘러라>(서문연 번역)의 한 대목을 떠올렸다.
“길은 곧잘 인생에 비유됩니다. 당신은 길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는 꿈을 꾼 적이 없습니까? 그리고 가던 길이 갑자기 끊겨서 이리저리 악몽에 시달린 적이 없습니까? 인생이라는 길은 험난합니다. 고난이 인생의 길 곳곳에서 당신을 맞이합니다.”
아무리 꿈속이라고 할지라도 가던 길이 끊어진다면 얼마나 황당할까? 꿈은 곧 현실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안젤름 그륀’ 신부는 “사람이 머무르는 순간 희망이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안주하지 말고 새롭게 도전하라는 의미다.
‘안젤름 그륀’ 신부가 책에서 내린 결론이다.
“성숙해지는 것은 두 개의 돌이 서있는 비좁은 통로를 비집고 통과하는 것과 같다. 좁은 통로를 통과하면서 살이 찢기는 고통을 받더라도, 용기를 내어 그 좁은 통로를 통과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결코 새로워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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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평소 자주 통화하는 배기성(66) FM갤러리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그는 “배론성지는 가톨릭 신자라면 꼭 가보고 싶은 곳입니다. 그곳에 가는 것만으로도 성령이 충만해 집니다”면서, “아주 좋은 곳을 가셨네요!” 라고 말했다.
‘종교를 떠나 정신수양에 도움을 주는 곳이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배론성지’를 나섰다. 성지 밖 주변의 산하(山河)도 가을이 무르익고 있었다. 10월의 마지막 날은 이렇게 익어 갔다. 하늘의 하얀 구름들도 무리지어 어디론가 흘러갔다. 마치 순례길을 떠나는 것처럼.
(※참고자료: ‘배론성지’ 안내팸플릿, ‘배론성지’ 홈페이지, 위키피디아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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