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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타사 미타사는 지금으로부터 약 1300년전인 630년(진덕왕 8)에 원효스님에 의해 창건된 고찰로, 가섭산의 산명처럼 두타제일의 수행도량으로 알져진 곳이다. 이후 역사는 문헌이나 사적비가 없어 알 수 없으나 구전에 의하면, 원효스님 창건 이후 876년(헌강왕 2)에 도선국사가 중창하고, 1370년에 무학대사가 중창하여 조선시대에는 서산ㆍ사명대사가 상주하는 큰 사찰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사찰은 대덕스님들의 공로로 많은 불사가 있어 대찰로 성장하였으며, 병자호란이 있던 1636년(인조 14)에는 각성대사가 항마군이라 일컫는 의병 3천명을 모집하여 호병을 물리쳐 호국사찰로서 국가의 대대적인 불사를 받는 큰 절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1723년(영조 18)에 가섭산을 태우는 화마로 인해 전각 하나 없이 소실되어 근래까지 폐허로 그 절터만이 전해졌다고 한다. 이는 구전으로 내려오는 미타사의 옛 연혁으로 역사적으로 고증 없이 미타사의 사격을 높이려고 미화된 연혁인 것 같다. 다만 1964년 봄, 절터에서 고려시대 기와편과 분청사기편, 조선시대 백자편 등이 수집되었고, 1979년 대웅전 기초 공사 때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물오리형태의 치미가 발견되어 고려시대까지 사찰이 운영되다가 임진왜란 이후 폐사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0호 미타사로 오르는 길 왼편에 위치한 마애불상으로 자연암벽에 양각된 신라말 고려초기의 여래입상이다. 불상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반원형의 자연암벽에 상호는 물론 신체가 양각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육계는 소발이며, 얼굴과 목은 붙어 약간 움츠리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수인은 두 손을 마주 잡아 가슴에 맞대고, 팔은 짧아 어색해 보이며, 천의는 우견편단으로 간략하게 몇가닥의 선으로 처리하였다. 전반적으로 얼굴만 돋을 새김하고 아래로 내려가면서 신체는 선으로만 표현하고 있어 전혀 양감은 보이지 않으나, 상호에서 풍기는 자애로운 미소는 미타사의 미소로 불릴 만큼 온화한 자태이다. 불상은 이웃 중원지역의 불상 양식을 계승하듯 신라말과 고려초기 불상양식이 혼합된 모습으로 당시 지방색을 보여주는 역사적으로 가치가 뛰어난 불상으로 평가 받고 있다.
명당으로 알려진 백룡희주형의 가람 중앙에 있는 미타사 금당으로, 가섭산을 진산으로 동남향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건물로, 1979년 명안스님이 인법당을 헐고 그 자리에 세운 것이다. 건물은 장방형의 화강재를 짜 맞춘 가구식 기단 위로 원형초석을 두고, 그 위에 두리기둥을 세워 외 7포, 내 9포의 다포를 올린 모습이다. 건물 외부는 여느 법당과 마찬가지로 4분합의 빗꽃살창호와 주련ㆍ편액으로 단장하고, 삼면에 대웅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십우도를 벽화로 단청하였다. 건물 내부는 후면 1칸 앞에 고주를 세워 감실형의 불단을 조성하고 좌우로 신중단과 영단을 가설하였는데, 창방 위에 가설된 내 9포의 공포, 대들보를 가로지르는 용두, 빗천정의 산수화 등에서 불전 내 장엄을 엿 볼 수 있다. 건물 내부에 모셔진 성보로는 중앙 불단 위에 봉안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관음ㆍ대세지보살을 비롯하여 1980년에 조성된 아미타후불탱과 신중탱이 있으며, 불구로는 1965년에 조성된 높이 58㎝, 구경 33.5㎝의 범종이 있다.
미타사 극락전 앞에 있는 삼층 으로된 세존진신사리탑으로, 1992년에 명안스님이 조성하였다. 이 탑은 이중기단 위에 삼층탑신과 옥개가 올라간 모습으로 기단에는 호법신장으로 석사자는 물론 사천왕이 조각되어 있으며, 탑신과 옥개는 서울 탑골공원의 원각사지 구층석탑을 모방하듯 화려한 여래와 보살들이 양각으로 장엄되어 있다. 이외 탑 내부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는데, 1940년에 미얀마의 만다래이힐 사원에 있던 것을 일타 큰스님께서 5과를 분봉 받아 미타사에 3과를 봉안한 것이다.
삼성각 내부에 봉안된 미타사의 원불로 이 부처님께 기도하면 병고액난을 소멸하거나 아들을 얻을 수 있다 하여 음성지역에서 영험 있는 불상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이 불상은 비산리 주민들에게 영험있는 약사불로 알려져 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본래 석불은 명안스님이 미타사로 오기 이전 절에 있던 고불로서 폐허가 된 절터에 봉안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1964년 무렵 충주에 사는 한 무녀가 현몽을 했다면서 미타사 부처님을 모셔가길 원해 어느 날 밤 몰래 장정들을 데리고 불상을 모셔가려 하였다. 무녀는 마을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한밤중에 불상을 옮기기 시작하였는데, 불상이 마을 입구에 이르자 꼼짝 달싹 안하며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이에 지금까지 산길을 잘 내려오던 불상이 움직이지 않자 장정들은 의아해하며 안간힘을 쓰며 불상을 움직였다. 하지만 때마침 해가 뜨자 장정들은 몸이 피곤하다는 이유로 이 일을 내일 다시 하기로 하고 불상을 산속에 숨기고 마을을 떠났다. 그런데 그날 밤 비산리 마을 주민들 꿈에 석불이 현몽하여 도적들이 나를 산 밑에 두고 도망갔으니 다시 절터로 다시 옮겨 달라고 한 것이었다. 이튿날 잠에서 깬 주민들은 전날 밭 꿈 이야기를 하며 혹시 미타사 불상에게 변고가 생기지 않았나 해서 급히 절터로 올라갔다. 절터로 오르던 중 마침 인근 공터에서 무녀와 장정들이 불상이 옮기고 있자 마을 주민들은 합심하여 불상을 지켜 내고 다시 옛 절터에 불상을 안치하고 주변을 정화하여 비산리의 원불로서 봉안하게 된 것이다. 현재 이 불상은 미타사의 원불로서 미타사 삼성각에 봉안되어 있는데, 명안스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향화를 올리고 공양하고 있다. 불상은 고려후기 불상양식을 가진 고불로서 머리는 민머리고, 정수리 부근에 중앙계주가 큼직하게 표현되어 있다. 얼굴과 손은 마모가 심한 것을 약 20년 전 음성읍 소여리에 사는 김경직(金景職)이라는 사람이 시멘트로 복원한 것으로, 상호의 세부표현은 알 수 없지만 둥글고 풍만한 인상이다. 옷은 양쪽 어깨를 모두 감싼 통견의로 옷에는 평행 계단식의 무딘 옷주름이 표현되어있으며, 수인은 후대 보수 한 것으로 오른손은 손을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왼손은 무릎에 받쳐 약 항아리와 같은 보주를 들고 있어 이 불상이 약사여래상임을 알 수 있다. 전반적으로 신체에 비해 상호가 큰 편으로 무릎이 작은 것이 어색하지만 고려시대 석불양식을 계승한 약사여래좌상으로 문화재적 가치가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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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미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