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又山) 손경석의 『韓國登山史』 읽어보기 9
백령회의 금강산 집선봉 동북릉(S1~S7) 역종주와
1351m봉 서북릉 종주 초등반
조장빈(근대등반사팀)
“그해 10월에는 박상현(朴商顯), 김정태 등이 금강산 1,351m봉 서북릉 암벽을 초등정 했다.”
-「5)1942년에서 광복까지의 기록들」, 『韓國登山史』, 82쪽
-『韓國山岳Ⅹ』 9쪽
손경석은 『韓國登山史』에서 한국인의 금강산 등반에 대해, 1935년 2월 김정태, 엄흥섭의 동계 비로봉 등반 이후 1941년 10월 금강산 집선봉 동북릉 제2봉 등반까지 중요 등반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이후 해방 전까지 금강산 집선봉 등반 기록은 위와 같이 한 줄로 언급하고 있다. 같은 책 92쪽의 표 <금강산 동계 및 암벽 등반기록>의 29번에서 30번 항목에서, 1942년 1월의 집선봉 C2 꿀루와르(유재선, 엄흥섭, 채숙 외 8명) 등반과 그해 10월 집선봉 C1~C4 전연봉 역등(김정태, 박상현 외2명) 그리고 1943년 10월 집선봉 1351 서북주릉 초등(박상현, 김정태), 1945년 4월 비로봉 스키등정(구성동코스, 김정태, 엄흥섭 외 2명)이라고 김정태의 『登山 50年』을 참고하여 기록하고 있다. 이 표의 기록에서 ”C"는 집선봉의 중앙봉이 아닌 동북릉 봉우리를 말하며, 일제강점기에는 "S"로 표기했고 또한 동북릉은 7개 봉우리가 있어 이는 "C1~C7"의 단순한 오기임을 참조바란다.
그리고 부록 <연대표> 577쪽의 287항목을 보면, 집선봉 동북릉 역종주 기록의 결과란에 ‘초등’이 아니라 ‘종주등정’ 이라고 적고 있으며, 비고란에 ‘집선봉 동북릉 7연봉을 역으로 종주한다는 것이 의문시 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 대해 등반 당사자인 김정태가 남긴 기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출처 / 연월 | 내 용 |
『韓國山岳Ⅹ』 1974 | 金剛山 冬期 및 岩壁 登攀抄錄 ㉙1942년 10월, 集仙峰 CⅠ~CⅦ 全連峰逆登, 초등, 金鼎泰, 朴商顯 外 2名(2人組隊) ㉚1943년 10월, 1,351峰 西北主稜, 초등, 朴商顯, 金鼎泰 |
월간 <산> 1983. 11. | 1942년10월 : 「金剛山 集仙峰동북롱 7連峰역종주 초등반」 朴商顯(故), 朱亭烈(故), 金鼎泰 (리더) 3 명(기록 : <등산50년> 「金剛山 岩壁登攀 抄録」) 이 7연봉은 38년10월(注 본고 ①)朱亨烈, 金鼎泰 2명이 위의 제1봉(1, 220m)에서 아래순으로 7봉(732m)까지 종주등반 했는데 이번에는 아래 7봉에서 1봉까지 역으로의 종주초등반 이었다. 이 역벽면의 노출면이 훨씬 높아서 루계 도합 2, 450m쯤 되어 또하나 빅 클라이밍이 되었다. 이는 海外에 못나가는 韓人 클라이머로서 32년 슈미트형제가 초등반 성공한 마터호른 북벽 노출면급에 접근하려는... |
월간 <山> 1983. 12. | 「8·15 해방직전」 1944. 10: 「금강산 집선봉 1,351m 서북능선 초등반」 백령회 朴商顯 등 2명(登山 50年) |
이와 같이 김정태는 금강산 집선봉 동북릉(S1~S7)의 역종주와 금강산 집선봉 1,351m봉 서북능선 종주등반을 서로 다른 해에 등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금강산 집선봉 동북릉(S1~S7)의 역종주는 1942년 10월 등반을 일관되게 적고 있으나 집선봉 1,351m봉 및 서북능선 등반은 1943년 또는 1944년 10월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김정태 유고집의 자필 일기에는 아래와 같이 1943년 10월 동시에 등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정태가 연도를 달리하여 적은 이유는 짐작키 어렵다. 등반 기록을 보면 집선봉 동북릉(S1~S7)의 역종주를 마치고 법기암에 모인 후 다른 대원들은 하산을 하고 이어서 엄흥섭 회장은 암자에 남고 김정태와 박상현 2명이 1,351m봉의 서북능선 등반을 하였다. (세부 등산 기록은 동북릉과 1,351m봉 서북주능을 나눠 언급할 예정이다.)
『김정태 유고집』의 1943년 10월 등반기록이며, 여기에서 김정태는
동북릉을 S7~S1으로 기록하고 있다.
동북릉 역종주는 초등이나 1,351m봉 서북주능은 1932년 동경대의 1,351m봉 등반과 1933년 3월 이이야마 다츠오(飯山達雄)와 이즈미 세이치(泉靖一)의 서북주능 등반에 이은 등반(한국인 초등)으로 이이야마와 이즈미가 오른 등반코스와는 다른 코스초등인지는 확실치 않다. 1,351m봉의 서북주능 등반 기록은, 이즈미 세이치가 자신의 등반과 탐험기록을 1967년 8월부터 1970년 6월에 산악잡지 <アルプ>에 연재한 후, 『먼 산들(遙かな 山やま)』(1971. 11)이 발간되어서야 이 등반 기록이 알려졌기 때문에, 김정태는 이 기록을 알지 못하여 초등정으로 기록한 듯하다.
좌측의 탁자처럼 평평한 곳이 1,351m봉이고 V자 계곡에 이어서 나이프 릿지로 이어진 능선이 서북릉이다.
(사진 출처: 다음백과 집선봉 사진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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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처럼 집선봉 표기의 오류는 봉우리 명칭의 기록이 일제강점기 통용되던 기록과 김정태의 기록이 다른데다, 이웃한 봉우리를 각기 “C"라는 동일한 표기법으로 기록하는데서 오는 착오에서 비롯된다. 일제강점기에는 집선봉 동북릉의 7봉우리를 표기할 때, “S1"과 같이 영문 S와 숫자로 표기를 했고 집선봉 중앙봉 4봉우리는 ”C"로 표기했으나, 해방 후 김정태 동북릉 봉우리를 "CⅠ“과 같이 영문 ”C"와 로마숫자로"로 표기했고 집선봉 중앙봉은 영문이니셜 표기를 하지 않고 “센타피크 제O봉”으로 표기(韓國山岳Ⅹ, 1974)했으며, 일부 동북릉을 ”S"로 표기한 적(<등산>2월호, 1970)도 있다. 또한 당시에는 집선봉의 주봉(主峰)을 1,351m봉으로 여겼으나 김정태는 1,140m봉(「한국등산사考察11」, 1983) 또는 소반덕 1,482m봉을 주봉으로 기록(韓國山岳Ⅹ, 1974)하기도 했다. 김정태는 집선연봉의 표기를 "C"로 바꾼것에 대해 일본인들이 명명한 표식이라 변경(<등산>3월호, 1970)하였다고 하며, “C"의 의미는 적고 있지 않았고 주봉 위치 설정에 대해서는 설명한 것을 못찾았다. 본 글에서는 초등반대인 동경제대가 보고서와 일제강점기에 통용되던, 동북릉은 ”S"로 중앙릉은 “C"로 표기하였다.
2) 여기서 등반코스는 1, 351m봉(동쪽면으로는 걸어서 올라갈 수 있음)을 제외한 서북쪽 능선인 주능선이다.
3) 이 집선봉 1,351m봉 서북주능에 대해, 이이야마는 초등반 시에 서북주능의 나이프 릿지를 등반하다 주봉인 1,351m봉 V계곡에서 우회하여 집선봉 주능선쪽에서 걸어서 올랐다고 하였으며, 박상현·김정태가 오른 곳은 서북릉 상의 나이프 릿지다. 아마도 이이야마·이즈미와는 코스를 달리하여, 주능선을 종주한 것이 아니라 중앙 릿지를 남서면 쪽으로 오른 것으로 추정되나 확실치 않다. 만일, 중앙 릿지를 남서면에서 오른것이라면 지능선 초등이 된다.
첫댓글 맨위의 사진은 설악산 마등령에서 본 화채봉과 천불동입니다. 저의 부친되신 김근원 선생께서 찍은 작품입니다.
네. 감사드립니다. 흑범, 염라, 석주길을 몰라보다니 제가 참 그렇습니다.
잠시 김근원 선생님과 함께 집필하신 사진집을 꺼내 보고 있습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십시요.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