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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후~ 웃지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게 웬 시츄에이션인지...
날 낳아주신 엄마는 낳아준것도 모자라서 60여년을 날이믄 날마다 걱정과 근심으로 지키며 바라보시기를 지금까지. 어릴땐 열살 먹도록 까지는 수수팥떡과 송편을 해주면 좋댄다고 열살이 될때까지 생일날이면 꼭 두가지 떡을 해서 생일상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엄마랑 나 단 두식구이니 요하나에 둘이 꼭 붙어자다 말고 엄마는 새벽이면 혼자 일어나시어 부엌에 나가 호야불을 밝혀 바람벽에 걸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안마당 우물물을 길어 무쇠가마솥을 채워 데우고 양은 냄비에 조금 끓인 물로 찰수수가루 익반죽을 해 부뚜막에 올라앉아 수수경단을 만들곤 하셨습니다.
송편은 쌀 한되를 가루내어 생일 전날밤에 미리 만들어 소반에 받쳐 베보자기를 씌워 부엌에 내어 놓았습니다. 수수는 여차하면 쉬는 바람에 미리 미리가 어려워 꼭 꼭두새벽에 만들어야만 했구요. 덜그덕 소리에 짬이 깨 엄만 뭐하냐고 눈을 비비며 부엌으로 난 창호 여닫이 문을 밀면 엄마는 어서 더 자라고 문을 도로 닫아 주셨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세수부터 하라 이르시고 당신은 질화로에 이글거리는 불을 가득 담아 방에 들이고 솔잎으로 들기름을 발라 윤이 잘잘 흐르게 구운 김이랑 들기름에 볶아 뽀얗게 우러난 쇠고기 미역국에 쌀밥을 주발에 고봉으로 담아 송편과 수수떡을 접시에 올리고 언제적 비석거리 장날에 사다가 절인 어른 손바닥만 하니 두툼하게 살이오른 조기를 소금항아리에 갈무리 했다가 꺼내어 석쇠에 얹어 아궁이에서 굽다 마지막엔 석쇠째 들고 들어와 화로에서 살점을 발라내 밥 숟가락에 얹어 주시곤 했습니다.
동네엔 집안에 남자들이 풀풀하게 있어도 때론 밥을 굶는 집들이 더러 있었는데 나의 어머니는 참으로 대찬 분이어서 스물 아홉에 혼자 되시고 서른에 유복녀로 나를 낳아 기르시다가 나 다섯살 되던 해에 그 시골에 날 데리고 들어가 전방으로 오가는 캄보이 차량 군수물자 수송차량들이 쉬어가는 길목에 지금으로 말하면 휴게소 같은 형태지만 규모는 아주 작은 가게 전방을 열어 장사를 시작했고 두식구가 밥 먹고 살기엔 부족함이 없었드랬습니다.
지금도 이렇게 멍충이인 딸년하곤 다르게 울 엄마는 경제관념도 확실하시고 장사도 잘 하셨습니다. 일요일마다 일주일에 한번씩 꼭 서울 나들이를 하셨고 동대문 시장에 들러 물건을 보따리 보따리 해 오곤 하셨습니다. 장사밑천도 불고 이득금도 불어나니, 농삿일 하는 남정네가 있는 집들도 사서 기르기 어려운 황소를 울 엄마는 일년에 한마리씩 불려갔습니다. 황소를 사서 남을 주고 그집은 소를 키워 농사도 짓고 살을 찌워 팔면 소 살때의 원금을 뺀 나마지를 반반씩 나누는 그런 방식이었습니다.
우리동네 위 아래로 여덟배미에서 서파까지 한 사십여리 근동에서 울엄마의 소를 매겠다고 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고 나중엔 외가댁 식구들 배 곯게 하는 일은 없게 하라고 외가에 농토를 마련해 주고 또 다른 논에서 나는 양식은 장례쌀을 놓아 늘이고 소가 여나믄 마리로 늘어나니까 한달에 한 번 꼴로 소를 팔고 사고 광릉내 우시장 나들이도 빈번했습니다.
우라부락하게 생긴. 그렇지만 마음씨는 비단결 같이 고왔던 소장수 최금성 아저씨가 우리엄마의 단골이었습니다. 나중엔 중고등학교때 친구였던 부순이 아버지도 소장수로 우리엄마의 단골이었지요. 나중에는 소사러 가는 것도 다 생략하고 소 맬사람보고 장에 가서 우량한 놈으로 고르라 이르고 느즈막히 돈만 가지고 가서 치뤄주곤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시장이 열리는 날에도 우리 엄마는 여전히 가게를 보아야 했으니까 말입니다. 하긴 장사하시느라 초등학교때 소풍길 한 번을 따라오신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그 일이 못내 걸린다고 하실 정도이니까. 우리 엄마는 남자로 태어났어야 하는게 딱 맞는 분입니다. 키는 작으셔도 미모는 정말 그 옛날에 한 미모 하셨지만 치마를 입어 여자지 장부였습니다.
내가 중학교때쯤 부터는 우리집을 드나드는 군인은 모두 싸잡아 이놈 저놈이었고 그들의 이름이 오사리 줄 잡놈이었습니다. 그래도 뭐라 달려드는 사람 하나 없고 울엄마한테 등짝을 그렇게 얻어 맞고도 싫다하는이 하나 없었습니다. 요즘 당신의 말씀대로 그 욕에는 그래도 인정이 들어 있었기 때문인가 봅니다. 솥단지에 밥이 남아나질 않았고 고추장을 퍼가다 퍼가다 어느날은 고추장 항아리가 통째로 종적을 감추고 후딱하믄 울타리 그늘밑에 함지박 물에 담가 놓은 열무김치 항아리도 간 곳이 없고 툇마루 기둥에 매어둔 강아지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럼 울엄마가 수소문을 시작하고 다음날이면 19중대에 고추장 단지는 가 있고 강아지는 퇴계원 어느 술집에 가 있다고 통지가 들어 옵니다. 어떤 땐 퇴게원까지 쫓아가 강아지를 찾아오고 훔쳐간 고추장 단지는 다 쳐먹었으면 빈 항아리라도 가져와야 될거 아니냐 그 항아리에 다시 고추장을 담가야 니놈들이 또 다시 갖다 쳐먹을게 있지 안겠느냐 염병땀병 할 놈들아 별별 욕을 다 쳐도 시뜻도 안하고 실실거리고 드나 듭니다.
그렇게 모진 세월을 살면서도 인정은 참 많이 베푸시기도 했습니다. 제대한 후에 저 경상도 강원도 등지 전국에서 고마웠다고 심심찮게 찾아오는 이들이 참 많았으니까요. 하사관 이상 장교들도 이곳저곳으로 전출을 다녀도 우리집 앞을 오갈일이 있으면 차를 세우고 꼭 들러 인사를 하고 갔습니다. 대위 계급장 달았던 중대장이 대령이 되어 오기도 하고 하사 계급장이 상사가 되어 오기도 하고. 노란별 준위는 죽을때까지 노란별로 변함없이 주름만 는 얼굴로 오는 사람도 있고... 이런 일들이 도 우리 엄마에겐 다시 살아갈 힘 이자 활력소가 되기도 하고.
233대대장 차만 빼고 중대장들의 찦차부터 하다못래 헌병대 찦차까지 모두 울 엄마의 자가용이었습니다. 급한 일 있으면 중대장 붙들어 놓고 좀 쉬고 집 보라 이르고 장에 들러 오시고 암튼 울엄마는 대단했습니다. 대대장이 빠뀌면 자기네 부대원들 쉬어가고 냉수라도 마시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우정 오는 이도 있고 233대대 휴게소라고 팻말도 큼직하게 써다 박아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그야말로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고 인간성도 다 다르니 어떤 대대장은 또 새로 부임해 부정한 일 없애고 군기 잡는다고 우리집 앞에 자대원들 차도 못 세우게 하고 저 후미진 곳에서 쉬라고 엄명을 내려 그 뜨거운 때 냉수 한모금도 못마시고 그 추울때 아궁이불에 엉덩이 한번 화롯불에 손 한번 못 녹이고 칼바람 한번 피하지도 못하고 지나가는 시기가 더러있기도 합니다. 본인은 똘똘하다고 하는 짓이겠지만 그 많은 부대원들은 고생고생 생 곤욕을 치루는 거지요.
어떤 대대장은 부임 첫 날 부터 얼마나 못되게 구는지 대대장이 탑승한 차량이 위병소를 지날때면 위병대원들이 차량을 보고 거수경례를 부치며 충성! 하고 구호를 외쳐야 하는데 미친개!! 하고 소리를 친답니다, 찦차타고 쌩하니 달려 들어가니 미친개 소리가 제대로 들릴리 없고 충성으로만 들리겼지요.ㅎㅎ 스토리를 풀자면 한이 없는데 어려서 내가 어쩌다 아플때도 노상 찦차에 실려 병원엘 다니고 등하교 길에 군인차도 많이 타고 다녔습니다. 우리동네 친구들은 내 덕도 가끔 보고~.
이러이러 살며 내촌에 농협이 생기자 조합장 조합 직원들의 권유로 출자도 빨리했고 예금하는데는 일등이었습니다. 소 불리고 통장불리는 일이 무척 재미있어 하셨지요 . 우리 엄마의 살림살이는 결벽에 가까울만큼 깔끔함이 이때나 그때나여서 방 두칸에 부엌 한칸으로 세칸짜리 초가집일지언정 어느 한군데 반짜반짝 윤이 나지 않는 곳이 없었는데 흙마당에 비질 자국이 지워지면 큰 일 나는 분이었으니까요.
47번 국도엔 정말 차들도 많이 다녔어요. 옛날엔 도로포장도 안되었던 터라 차 한 대만 지나가면 뽀얀 흙먼지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타라 농장에 부는 흙바람을 방불케 하곤 했는데 거의 마당이 행길이요 행길이 마당이나 진배없는 집에서 그 깨끗함을 유지하기란 정말~ 안마당에 놓여있던 장독대에는 차 한 대만 지나가면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뿌리고 닦아내는 일을 하루에도 수십차례씩 쓰다보니 그래도 그때가 그립습니다.
아, 어떻게 다 말할까. 그 이루 말 할수 없이 많고 많은 사연과 우여곡절을....
초등학교를 지나 중학생이 되자 울엄마의 칼 같은 단도리가 시작 되었습니다. 홀어머니의 외딸인 나는 아비없는 후레자식 소릴 들으면 안된다고 하루에도 열두번씩 낮밤이 없이 이르시는 울 엄마의 말씀에 난 중 고교시절 남녀 합반인 학교를 다니며 남자애들과 말만해도 큰일나는 줄 알고 하루같이 입을 닫고 귀를 닫고 눈을 닫고 오직 땅만 보고 다니기를 6년여! 추억이 없습니다.ㅠㅠ
요즘에사 할매 할배가 다 되어 만나는 동창들 얘기는 너는 이쁘고 콧대가 높아 지네들을 무시하고 말도 안하고 다녔다나요.. 참 속 모르는 소리도 많이 합니다,,,,ㅎㅎ 울 엄마 혼자 애쓰시는 모습만 보고자라 철은 우라지게도 일찍들어 엄마말을 거역하면 죽는 줄 알고 뭐든 '네' 소리만 할 줄 알았지 '아니요'는 했다가 벼락맞는줄 알고 한번도 못 해 보고 지금도 못 하는데~
이젠 그런 세상물정 모르는 숙맥인 딸년이 못미더워 마음 놓고 죽을 수도 없다던 울 어머니 저번 주 부터 생일 선물을 사 놓았다고 이르시매 뭐냐고 해도 안가르쳐 주시더만 오늘 5/1 엄마를 뵈러 갔더니 저 물건을 주시기에 손목에 차고 이쁘다 좋아라 했더니 울 엄마도 흡족해 하십니다.
울엄마의 외손녀 신의 한 수를 가진 내 딸 큰 놈 이 순간을 놓칠세라 할머니가 더 오래 즐기시라고 할머니 앞에서 show 연출하기를 날 벽에다 부쳐놓고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고개를 드쇼 떨구쇼 좌로 우로 열 댓번은 외쳐 즈이엄마 한참 가지고 놀다 화보 라며 저 사진 한 장을 날립니다. 이런이런~~~ㅎㅎ
과하게 웃는모습의 사진도 있는데 그건 안되겠습니다. 그것보단 이게 훨 났습니다. 아, 울어머니 보시믄 그렇잖아도 볼때마다 찌그찌글 늙었다 애덜 얼굴이 왜 이모양이냐 허시는데 딸아 딸아 네 온 얼굴에 이주름살이 다 웬일이란 말이더냐 눈물나시겄슈. 나도 많이 놀랐으니까요~ㅎㅎ 아, 그리고 이젠 정말 어디가서 절대 크게 웃지 말아야 겠습니다. 스냅사진의 비감!! 웃을때 내 얼굴이 그리 생기는 줄 나도 전혀 몰랐구먼유,ㅉㅉ
밥 사드린다 했더니 허리가 아파 나다니는 것도 힘드시다고 싫다 하시는데 그말도 핑계란 걸 압니다. 이래저래 울엄마한테 밥한끼도 못사드리고 주변머리 없는 딸년 땜에 우리엄마가 죽을 수도 없다 하시는 이유를 이제 아시겄쥬~ㅠㅠ 엄마, 엄마는 백수하셔야 돼요, 못된 망아지 철들자 망녕이라고도 하지만 누가 아우? 느즈막이 딸년이 환갑도 지나 쬐끔 더 방방뛰는 쪽으로 철이들고 힘이 솟을지. 아무튼 부지런 좀 떨고 엄마 맘에 들게 한번 노력해 볼께여. 우우~ 울 엄마 하늘 만큼 땅 만큼 사랑해!!~~~ 다음 생애에 우리 다시 만나믄 그땐 내가 엄마하고 엄마는 내 딸로 만납시다요. 뭔 말인지 알지 엄마?!
2013.5.2.목 04;08. 연욱
Ocean Fly - Guido Negrasz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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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읽다가 읽다가 배가고플 만큼 읽어내려왔는데...구구절절 참 대단하단 말 밖에 못허것수.
어머니 백수하실거야. 백수하실동안 행복한 추억 많이많이 만들기를.. 빌고 또 빈다.
어머님은 이미 알고 계실겁니다.
내 딸의 깊고 깊은 속을...
구구절절 ~~``어린날의 연욱이가 그려지네
이젠 엄마를 키워야 해 ..
나어릴때 엄마가 나릉애지중지 ~`
이젠내가 엄마를 어린애같이 키워야한다 하던데 ..
그려 백수하시길기원한다네
엄마와 딸 많은 행복한추억들 듬뿍 만들어 먼훗날하나하나거내어볼수있게 말이야
엄마 건강하시길 기원해 ~````
다시 옛날로 돌아간듯, 먼지나는 신작로 옆 가게... 눈에 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