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카우는 폴란드에서 3번째로 큰 도시다. 그렇지만 크라카우 사람들은 ‘양’보다 ‘질’이 중요하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2차대전 때 폴란드 인구는 25%감소했다. 이 수치는 당시 가장 많은 고통을 받은 국가라는 표시다. 특히 크라쿠프는 인구의 29% (약 64,000명)가 유태인이었기 때문에 가장 비극적인 피해가 컸던 곳이다. 지금은 유태인 수백 명만이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수백 년 동안 세계적으로 명성이 이어져온 이 곳은 경제와 문화적인 면에서 폴란드의 중추적인 역할을 해오는 곳이다. 비스와 강변에 세워진 크라쿠프는 오랜 세월 동안 폴란드의 중심 도시였으며 수천 개의 유적이 있는 도시로서 6세기 이상 전통을 지닌 활기찬 문화의 중심지이다.
중세기 초, 이곳은 “비슬라니에” 종족의 중심지였다. 서기 1,000년에 크라쿠프에 주교구가 설치 되었다. 11세기에 ‘카시미르’왕이 크라쿠프를 폴란드 수도로 정하면서 바벨성 자리에 건물을 세웠다. 타타르족(중앙 아시아 지역에 살던 몽고족)에 의해 파괴(1241년)된 이후 정방형의 광장을 만들고 그 것을 중심으로 한 체스판 모양의 거리구조를 가진 도시가 탄생 되었다. 오늘 날까지 그 형태가 유지되고 있다.
카시미르 대왕이 집권시기인 14세기는 크라쿠프 전성기로 고딕 양식으로 바벨성과 도시를 지었다. 대왕은 또한 폴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인 크라쿠프 아카데미(야기엘론 대학의 전신)를 창설했다. 야기엘론 왕조의 마지막 시기에 ‘지그문트 3세 바자’가 17세기초(1609) 폴란드의 왕궁을 바르샤바로 옮겼다. 그러나 크라쿠프는 여전히 왕국 수도의 명칭을 유지하면서 대관식과 왕실 장례식, 그리고 왕실 묘를 안치하는 도시로 남아 있게 된다.
17세기 중반과 18세기 초에 스웨덴 군대에 의해 크라쿠프는 파괴 되었다. 그 후 폴란드는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그리고 프러시아에 의한 3차례 국가 분열 을 겪게 되는데 제 3차 분할 때 크라쿠프는 오스트리아에 넘어가고 만다. 나폴레옹 패전 이후 빈 회의에서 크라쿠프는 자유도시로 선포하게 된다.
그러나 1864년 크라쿠프 자치시가 폐지되고 바벨성엔 오스트리아 군인들 병영이 설치 되었다. 1차대전이 끝난 1918년 크라쿠프는 자유를 찾게 되었다. 실로 123년 만에 독립회복이었다. 2차 대전 때엔 크라쿠프 남쪽 도시 '카시미르'에 거주하는 유태인 대량 학살 시기였다. 1945년 1월 18일 소련군에 의해 해방 되었다. 전 후 시기에 공업화가 추진되어 많은 공장이 들어서서 심각한 오염을 일으키고 있다. 현재 크라쿠크가 풀어야 할 과제 중 하나다.
1978년 유네스코는 크라쿠프 구시가지를 세계문화 유산으로 선정 했다.
도시 중심부는 크지 않기 때문에 걸어서 다니기에 충분하다. 플로리안스키 문을 통과해서 골목을 빠져나오면 중앙광장에 이른다. 가운데 직물회관이 있고 광장 옆으로 역사적 건물들과 박물관, 교회가 있다. 가장 가볼 만한 박물관 중 하나는 차토리스키(Czartoryski)박물관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담비를 안은 여인' 이라는 불후의 명화가 소장되어 있으며 아시아의 수공예품과 무기뿐만 아니라 인상적인 유럽 예술품도 전시되어 있다.
광장에서 큰길을 따라 계속 가면 웅장한 바벨 성이 나타난다. 바벨 성을 보고 강변으로 가는 것을 잊지 말자. 그곳에서 크라카우의 전설 속의 용을 만날 수 있다.
수 천개의 건축물과 예술품들로 가득 차 있는 크라코프는 폴란드의 옛 수도이자 전쟁으로 인해 파괴되지 않아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도시이다. 특히 구 시가지는 거의 대부분 중세 때 건축된 것으로 유네스코에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있다.
■ 중앙 광장 (Rynek Glowny)
베니스의 산마르코 광장 다음으로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중앙광장은 크라코프의 사교장으로서의 역할을 했던 곳이다. 구시가지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총면적 4만㎡로 주위에는 옛 크라코프 귀족들의 저택이 줄지어 있다.
광장 중앙의 건물은 직물 회관으로 고딕 양식에 르네상스 양식이 혼합된 건물로 직물 회관안에는 관광객들이 기념품을 살 수 있는 많은 잡화점이 있다. 직물 회관에는 18-19세기의 폴란드 조각과 회화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국립박물관의 일부가 있다. 시장옆쪽에 있는 "Bei Noworol"이라는 카페에서는 민속 예술품같은 각 시기의 가구들을 구경할 수 있다.
■ 성모마리아 성당 (Kosciol Najswietszej Panny Marii)
중앙시장 광장 서쪽에 세워진 성모마리아 성당은 크라코프를 방문한 사람이라면 반드시 보아야 하는 고딕 양식의 성당이다. 특히 첨탑이 매우 아름다운데 뉘른베르크 출신의 천재 조각가 Wit Stwosz가 그의 제자들과 함께 12년 동안 만든 것이다. 그리고 성당내부의 조각들은 12세기에서 19세기의 작품들이다.
■ 소금광산 (Wieliczka)
크라코프에서 남동쪽 10㎞ 외곽의 비엘리츠카의 소금광산은 1978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 문화유산 지구로 등록된 곳으로 소금을 캐내는 광산기능은 중단되었지만 세계적인 관광지로 유명하다.
700여년의 오랜 역사를 지나며 많은 시간을 광산 안에서 보내던 광부들에 의해 소금광산 안에 종교적인 믿음들이 새져지기 시작했는데. 지하 100m 깊이의 광산 안에 소금 덩어리로 이루어진 성당을 만들고 제대와 성모상, 샹들리에 등을 조각했다. 오랜 시간과 정성이 들었을 소금 조각상 하나하나를 둘러보다 보면 이것들을 만든 광부들의 종교적 열정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거대한 소금광산이지만 개방된 것은 대략 2.5km정도 개방되어있다.
■ 아우슈비츠 수용소 (Oswiecim)
폴란드의 정치범을 수용하기 위하여 1940년부터 생긴 아우슈비츠는 나치 점령기간인 5년 동안 폴란드의 정치범과 소수민족, 유대인들의 대학살과 공포의 대상으로 악명을 떨치게 된다. 수용소는 제1수용소와, 제2수용소로 나누어져 있는데, 제1수용소가 세워진 이듬해부터 나치는 히틀러에 의해 점령당한 모든 국가의 정치범들을 이곳으로 보내게 된다. 단시간에 감금자의 수는 급속히 늘어났고 세 부분으로 구성된 대학살의 공장으로 역사에 기록된다.
1942년부터 이곳 아우슈비츠는 나치에 의해 유태인 대 말살의 가장 큰 중심이 된다. 현재 제1수용소는 막사를 박물관으로 개조하여 각 막사 마다 자료와 사진들을 전시하고 있다. 또한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주님의 모범을 따라 자신의 목숨을 바쳐 다른이의 생명을 구한 성 말시밀리아노 꼴베 신부님의 순교지로 의미가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