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일하는 직장은 영어를 많이 쓰는 곳이다. 어떨 때는 하루를 지나다보면 한국말보다 영어를 더 많이 쓰일 때도 있다. 얼마전 까지만 해도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쳤지만 최근엔 외국인에게 영어로 안내를 하고 또는 통역을 하는 일을 하게 됐다.
영어를 사용하면 직장에서 받는 혜택(?)도 있지만 남들의 시선과 부러움을 받는 즐거움(?)도 있다. 아무리 영어 사대주의라고 비판을 하지만 막상 본인이 영어를 잘하게 되면 입장이 달라질 것이다. 근데 한국에서 영어 사대주의 현상은 정말 심해도 너무 심하다. 반미를 외치는 야당의 어느 유명한 국회의원조차 자신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수억원을 들여 미국으로 어학연수와 유학을 보낸 걸 보면 영어에 대한 열풍이 어느정도 인지를 이해하는 단적인 예가 될 수 있다.
영어교육에 대한 현상의 이면에는 언어를 가지고 신분상승의 터전을 마련하겠다는 심리가 깔려 있는 것은 너무나 명확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어가 왜 한국인에게 힘든지는 잘 모른다. 여기에는 언어학적인 이유 특히 음성언어학적인 이유가 있다. 우선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그런 취지로 쓰는 것은 아니지만 대충 영어의 리듬과 발성 그리고 조음등이 한국말과 다르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성경 신학적으로 오랫동안 고민해 봤다. 그리고 정답을 찾았다.
왜 하나님이 유독 한국인들과 일본인들에게 영어를 못하게 하셨을까. 그리고 그중에서도 한국인들은 영어에 목을 메면서도 왜 영어가 안되게 하셨을까. 어느정도 나면 뉴욕에서 10년동안 선교사로 외국인에게 선교활동을 한 분도 6개월 외국 경험밖에 없는 나에게 영어를 배웠다. 사실 일본인들도 영어를 못하지만 한국인들 만큼 영어에 과부하가 걸려 있지는 않다.
우리나라는 문화의 흡입력이 굉장히 강하고 독특한 나라이다. 일례로 외국의 유명한 포스트모더니즘(탈근대화-근대화의 모든 가치를 해체한다는 의미) 교수가 진정한 포스트 모더니즘을 찾아 서구의 유명한 대학과 동양의 대학들을 찾아 다녔지만 진정한 포스트 모더니즘의 모델이 될만한 대학을 찾지 못하던중 한국의 대학을 찾았다. 그리고 그 교수는 한국의 대학모습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 이유는 학생들이 대학에서 학문만 하는 것이 아니라 데모도 하고 족구도 하고 또 한쪽에서는 김밥과 도너츠를 파는 아주머니가 있고 마치 시장과 광장속에 대학의 건물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단다. 이것은 한국민의 문화적 흡입력과 그것을 바탕으로 헤체하고 독특하게 통합하는 문화적 역량이 대단하다는 것을 말한다. 요즘 프랑스나 호주 같은 곳에서 한국의 인기 그룹 가수들의 춤을 배우려고 공연시위를 하는 것도 전부 그와 같은 맥락이다. 한국은 문화적 상대성을 수용하기엔 배타성이 강한 민족이라는 말도 근거성이 부족하고 빈약한 말이다. 만일 그렇다면 대한민국 건국이래 몇일 전 노르웨이에서 일어난 총기 테러와 같은 사고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사실 노르웨이는 다민족을 수용하고 복지국가가 최고로 잘 되어 있다는 선진국중의 선진국이다. 우리나라와는 복지차원에서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단일민족국가이면서도 우리 나라 역사에서 다민족이나 이민자들에게 테러 한 번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이 문화적 상대성을 잘 흡수하고 융합한다는 것을 반증한다. 게다가 우리민족은 세계에 인구대비수치로는 중국보다도 이민숫자가 많은 나라이다. 여기에 바로 하나님이 영어를 못하게 한 비밀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몇 페이지 되지 않는 이정도 논거와 근거로서는 그 이유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지만 어쨌든 내가 받은 영감 (Inspiration)은 그렇다!
만일 우리나라에서 태어나 최소한 의무교육만 받고도 사람들 대부분이 유창한 영어를 구사한다고 생각해 보라. 아마도 우리는 유대인보다 더 큰 문화적 자질을 가지고 세계를 휩쓸 것이다. 나는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민족에게 수많은 선교사의 피를 흘려 복음의 씨앗을 뿌려서 거두고자 하는 본래의 취지와는 반대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안익태 선생의 애국가처럼 우리나라를 복음으로 보호하고 감추어 두신 것이다. 이것은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국수주의나 민족주의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난 민족주의도 하나님 앞에서 우상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민족을 민족주의로 꽃을 피우자 함이 아니라 복음의 언약으로 거두어 두실 것을 의심치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외국교수가 본 문화적 수용성과 창조성의 능력도 영어와 같은 외국어를 사대주의적 관점에서 사용하게 해서는 안되기 때문일 것이다.
언어학 관점에서 영어는 일반적으로 음률이 아름다운 언어인 프랑스나 거의 노래말 같은 히브리어보다 훨씬 앞선다. 영어는 단순히 억양과 강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장단과 고저 타이밍등이 어우러져 하나의 멜로디 같은 언어이다. 하나님이 영국이나 미국을 영어를 통해 세계를 정복하게 하신 것도 전부 이유가 있는 것이다. 영어가 없었다면 아마 우린 성경을 지금 우리의 손안에 획득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영어만큼 하나의 언어로 성경을 찍어서 다른 언어로 번역하고 보편화 시키는 역할을 할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영어가 이제는 제국주의 영어가 되어 있고 대부분의 약소국가들은 전부 세계화(미국화)란 미명하에 영어를 배우면 세계시민이 될 수 있다는 세뇌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영어열풍을 보라! 혀가 찰 노릇이다. 사실 영어는 대한민국 학부모들의 극성처럼 그렇게 돈을 쳐 들이고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원래 언어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그냥 주신 선물이다. 우리가 어떤 정보를 취득하거나 지식을 획책할 때는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면서 얼마든지 축적이 가능하다. 근데 유독 언어(외국어)만큼은 그렇지가 않다. 아무리 한국에서 날고 기는 영문학 박사라도 미국에서는 미국 거지의 발끝에도 영어는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에는 원래 인간들이 하나의 언어만 사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근데 그 언어가 인간의 교만함으로 수천개의 언어로 나뉘어 지게 된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언어의 생득성을 얻게 된 이유는 딱 한 가지, 창조주 하나님만 섬기고 경배하라는 뜻에서 부여된 것이다. 언어는 원래 창조주만 섬기는 합당한 이유로만 사용되어야 한다. 그것이 이유다. 그 근거로 다음의 성경 구절을 읽어보자.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창 11:1
원래 언어는 하나였다. 이것은 글자를 의미하기 보다 말을 의미한다. 말은 글자보다 1차원 적인 것이다. 즉 의사소통 체계는 말로서 확보가 되는 것이고 그것을 전달하고 보존하는 의미에서 문자를 말의 근본을 통해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 글자를 새겨 넣은 것이 텍스트이다.
인간이 지구상에서 사용하는 여러 언어들은 독창적으로 서로 생긴 것이 아니라 원래 하나의 언어에서 파생된 것에 불과하다. 알브레도 트롬베티 교수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 천개의 언어들이 원래는 한 언어에서 파생되었다고 주장하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 옳다 할 수 있다. 성경에서도 그 이유는 명확하게 밝혀진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창11:7
인간이 자기들의 교만과 탐욕으로 바벨탑을 건설하면서 언어가 흩어졌다. 교만과 탐욕은 원래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한 가인 이후의 인간들이 그 두려움의 근원을 성을 쌓으면서 도피하려는 욕망에서 기인한다. 모든 욕망은 사실 인간의 결핍의 증거이며 두려움의 또 다른 도피처에 불과하다.
근데 이런 하나였던 언어가 하나님으로 인해 흩어짐으로 다른 언어를 서로 알아 듣지 못하던 인류 역사에 자유자재로 외국어를 기적적으로 사용하게 된 역사가 바로 사도행전의 사도들이 일시에 지역 방언( 방언이 아니라 원래는 외국어이다.)을 하게 된 것이다.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창11: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2:4
창세기 11:4절과 사도행전 2:절을 자세히 살펴보자. 뭔가 떠오르는 깨달음이 있지 않은가. 그것은 바로 인간의 욕심이다. 결국 외국어를 하는 것도 욕심이 있으면 되지 않는 것이다. 언어는 지식과 정보의 차원이 아니다. 지식과 정보는 전부 불타 버리고 소멸되어 질 것들이지만 언어는 인간이 혀와 입이 있는 이상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도록 만들어 진 것이다. 결국 인간이 욕심을 버리고 성령이 임했을 때 외국어를 잘 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한민국의 영어 열풍이 그것을 증명하지 않는가. 원래 언어는 아기들 처럼 순수하게 아무것도 모르는 새하얀 백지장 처럼 옹알거리기만 하면 터득이 되게 되어 있다. 근데 사람들이 그것을 모른다. 욕심으로 모르다 보니 정반대의 길을 간다. 장님이 장님을 인도한다고 영어를 배우기 위해선 단어를 암기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용기를 내라고 다그치고 열정을 쏟아 부으라고 역설한다. 하지만 그 결과는 전혀 우리가 기대했던 결과치를 얻어내는데는 항상 실패하고 만다. 알베르트 까뮈의 시지프스의 신화에 나오는 형벌처럼 바위를 굴려 위로 올려도 또 바위가 굴러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바위를 굴려 위로 올리는 모습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이젠 영어는 어느새 교육이 아닌 전쟁의 기술이 되었고 형벌이 되었다.
영어를 위해선 욕심을 버리고 편안하고, 두려움 없고 단순해야지만 가능한데 오히려 대한민국의 영어교육은 욕심을 내라하고 용기를 가지라 하고 복잡하게 노력을 하라고 주문하면서 반대노선을 가르친다. 원래 언어를 담당하는 중추 뇌신경계는 우리가 의식의 수준에서 아무리 생각해도 작동하지 않는다. 나는 내 딸아이가 모국어를 배우는 모습을 관찰해 봤는데 처음에 말문이 트이기전에 옹알이의 수준은 전혀 말도 되지도 않는 유치한 수준이지만 그 유치한 옹알이가 나중에 말이 되는 것을 볼 때의 경이로움은 관찰해 보지 않은 사람은 잘 느끼지 못할 것이다.
나는 영어를 가르쳐 달라는 사람들에게 항상 강조한다. 두 눈 딱 감고 1년에서 1년 반정도 영어를 따라 들으면서 입으로 옹알이만 하라고 말이다. 책도 필요없고 노트도 필요없다. 글자는 영어가 트일 때까지 배울 생각도 하지 마라고 말이다. 그리고 아주 유치할 정도로 순수하게 옹알이로 중얼 거리다 보면 영어의 입과 귀가 트일 것이라고 조언한다. 나의 조언대로 영어 옹알이를 한 분들 중에 영어가 트인 분들이 꽤 있다. 재미 있는 현상은 학력이 높고 지식이 높은 사람일 수록 그리고 영어를 오히려 많이 배운 사람일수록 영어의 말문과 귀가 트이는데는 실패 했다는 것이다.
결국 영어와 같은 외국어는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순수하게 하면 반드시 되고야 마는 불변의 법칙인데 사람들이 모르는 셈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오늘도 오만하게 영어를 가지고 창조주의 법칙대로 영어를 사용할 목적을 잊고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고 자신들의 성과 탑을 건설하려는 욕망속에 내버려 두신다는 위대한 뜻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복음의 씨앗을 피우려는 우리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기도 하다.
첫댓글 오... 정말 유익한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문법을 죽어라 하고 단어도 외우고 그랬지만 정작 외국인하고 대화할 때는 소통에 문제가 많고 개선이 잘 안되더군요... 빡빡 숙제하고 문법 외우던거 생각하면 정말 옛날 식의 영어 교육은 영어를 더욱 못할 수밖에 없는 그런 교육이었다 생각되네요... 저도 옹알이식 따라하기를 해보고 싶네요...
욕심없고 단순함이 바로 아기가 부모를 전적으로 의존하는 마음이듯 인간이 하나님을 의존해야 하는 마음이죠.^^ 두 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