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명 깊은 사진과 글이다. 시대가 바뀌고 세월흘러, 있던것 그대로 좀 두면 좋으련만 그렇게 모두 사라지니 추억을 되 살릴 길 아득 하구나,
소우형의 이런 수고는 그래도 옛 추억 살리기에는 더 없이 좋은 자료가 되어 감사하다.
하기사 최익현 선생이 단발령을 반대하며 고집하던 상투가 사라지듯 시대 추세에 밀려 이런 저런 이유로 대구국민학교 개성있던 혹불도 사라지고 학생수는 줄어 들어 옛 모습 보기는 영 글럿다 .
동쪽 편 강당을 보니 문득 2학년 때 밀양서 전학온 예쁜 소녀 양민애 생각이 난다.
쌍까풀 진 눈과 웃음이 귀여웠던 그네, 그리고 약갼의 곱슬머리,
단임 선생님의 소개가 끝나고 그네의 앉을 자리를 찾을때 마침 내 자리 옆 짝이 없었다.
우리 교실은 제일 서쪽 1층 이었고 내 자리는 뒤에서 두 번째 자리였다. 내가 벽쪽이고 빈자리가 바로 그 옆이라 그 옆자리에 양민애를 앉혔다 .
그때 그의 노트는 흰종이를 모아 그네의 아버지가 만들어 주었노라고 하면서 실로 꿰매어 만든 노트였다. 해방후 넉넉한 학용품이 없을 때 가끔 집에서 학부형 들이 그렇게 만들어 주기도 했던 시절의 일이다.
그 노트에 짓굳게 내가 낙서를 할라치면
"샘예 김재일이 보이소. 내 공책에 장난 했으예"
하던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그리고 그 강당에서 학예회가 있을때 막간 쉬는시간에 내 옆에 앉았던 민애가
"나 우리 선생님 이름안다"
라고 하기에 뭐냐고 물었더니 "허봉열"이라고 했다.
뒤에 안 일이지만 그 선생님 성함은 허목열 이었고 마침 41회 허봉열 이라는 서울대 병원 의사가 집안 아우라고 하셨다.
그 선생님은 6.25때 육군 장교로 입대 하시었고 수십년 후에 인근 우리 동네에 살고 계시어 가끔 찾아 뵙기도 했다. 뒤에 알고보니 동기 박치준형과 동서지간이 되어 퍽 반가워 했던일도 있었다. 근년에 작고 하시었다.
그 대구 초등이 경북중학 우리동기 82명을 입학 시킨 명문교 였건만 이처럼 초라(?)한 지경이 되었다니 안타깝다.
복명국민 학교로 이르자면 인근에 밀집 해있던 정태산. 장항재.김재홍. 이상일 .전만기. 계성나온 남산병원 아들 최동조. 백철수. 육동언. 등 은 오히려 복명 국민학교가 더 가까웠는데 백철수만 빼고 전부 대구 국민학교다. 내 경우는 가끔 휴일 같은날 동네 아이들과 공놀이나 하러 갈라치면 가까운 복명하교 교정으로 같다.
그 때 본 흉상의 울산 할매는 그저 기생 출신의 할머니가 번 돈으로 육영사업에 기부 했다는 정도의 상식 밖에 없었다. 제주도 만덕 할머니 못지 않은 그의 일대기를 드라마화 시킬것을 대구시에 건의해 봄즉하다.
82명의 경중 입학의 대구초등에 비해 10명도 안 되던 복명의 인재들의 돈독한 모임을 보면서 석포를 위시한 복명 동문들에 대해 다른 국민학교 동문들 보다 더 친밀감을 느낀다면 복명에 대한 아부일까?
가끔 귀한 자료 올려주는 소우형의 노력이감사해서 그냥 간단한 댓글만 쓰기에는 미안하여 긴 사설 늘어 놓았다. 용서하시고....
소우형! 감사하고요. 문득 떠 오른 양민애도 이제 할머니 되었을 터이고 그의 오빠 36회 양병탁 형도 년 전에 잠간 뵈었더니 그 꽃 미남 같던 얼굴도 많이 상 했더라. 급우들이 민애를 괴롭히면 내가 막아주고 가끔 상급생 들에게 내가 당하면 병탁형이 돌봐주던 기억도그립다.
거듭 소우형 수고 감사하고 그 수고 높이 삽니다.
검농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아무도 기억못하는 복명을 기억해주어서 고맙고요. 검농이 외길 검도를 하지않고 문학을 했더랬으면 하는 아쉬움을 또 한번 피부로 느낍니다. 그 어릴때의 이야기이지만 기억력은 솔직히 감탄합니다. 계속 젊게 사세요. 인기직업이 아니면서도 외길을 파온 삼구동창들의 몇안되는 분들을 늘 삼구의 보배들이라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느놈이 그러데요.한 우물만 파다가 그 우물에 함몰 되어 죽는수도 있다고요. 그러한데 석포는 계속 격려를 해주시니 몸 둘바를 모르겠네요. 석포야 말로 한길 걸어 오면서 인생요리 전문가 답게 잘 살고 계심에 경복 하오이다. 건강 건강 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