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17일 연중 제33주일(평신도 주일)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루가 21,5-19)
By your perseverance
you will secure your lives."
![](https://t1.daumcdn.net/cfile/blog/25295C4052875EF108)
말씀의 초대
말라키 예언자는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와 공동체 재건을 위하여 고군분투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지막 날에 대한 예언으로 힘과 용기를 준다. 지금은 악한 자들이 권세를 누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국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무력하게 할 것이며, 오히려 당신을 믿는 자들을 일으켜 세우실 것이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자신과 동료들의 사례를 들며 테살로니카의 신자들에게 성실한 삶을 살라고 권고한다. 바오로와 동료들은 그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수고와 고생을 하며 밤낮으로 일하였던 것이다(제2독서). 많은 사람이 예루살렘 성전의 아름다움을 보고 감탄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것의 멸망을 선포하신다. 그리고 뒤이어 세상의 모든 것이 이처럼 허무하게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알려 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종말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이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게 된다. ② 거짓 그리스도가 나타난다. ③ 전쟁, 큰 지진, 기근, 전염병이 생기고, 하늘에서 무서운 징조가 일어날 것이다. ④ 믿는 이들은 박해를 당하는데, 심지어는 사랑하는 이들에게서조차 미움과 위협을 받을 것이다. 종말에 관한 이러한 표현을 두고 학자들은 ‘묵시 문학’이라고 합니다. 묵시 문학은 구약에서부터 이어져 온 독특한 표현 양식입니다. 묵시 문학이 번성하던 시대는 한마디로 박해의 시대였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사는데도 축복보다는 고통을 받는 현실, 오히려 세상의 권력자들은 악과 타협해 가며 승승장구하는 현실에서 탄생된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이러한 맥락을 염두에 두신 말씀입니다. 곧, 성전이 무너질 만큼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할 수 없고, 거짓 그리스도로 혼란을 겪게 되며, 악의 세력으로 말미암아 세상과 자연이 무너질 뿐만 아니라 많은 이에게 박해받는 최악의 상황이 오더라도 인내를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한 아기가 태어나기 직전에는 온갖 불안함에 시달리겠지만, 막상 태어나면 새로운 세상을 만납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최악의 상황을 인내하고 이겨 낸다면 전혀 다른 세상을 만날 것입니다. 모든 것에는 마지막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이라는 것이 결코 우리를 절망케 하지 못하는 것은, 그 마지막으로 말미암아 모든 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세상으로 이어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376D0355009A8941D)
복음을 읽고 지키는 일
서울대교구 사무처 홍보실
1. 성서이야기 제1독서인 말라기는 서기전 515년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된 후부터 에즈라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전반적인 개혁사업을 일으키기 전까지의 극도로 혼란한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은 점차 해이해지고 지도층과 사제들은 부패했습니다. 이에 예언자는 그들 사이에 만연된 부패와 타락상을 질책하면서 종교적·사회적으로 엄격한 규율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3,19-20a에서 심판의 날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제2독서 데살로니카 후서 3,7-12은 질서와 근면에 관한 훈계입니다. 바울로는 자신이 돈을 목적으로 전도한다는 오해를 받고 싶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교우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스스로 일을 해서 생계비를 벌었다고 말하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무질서한 행동을 하지 말라고 명합니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는 말씀은 노동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가르침이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 루가 21,5-19에서 예수께서는 성전 파괴를 예고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예수께 언제 성전이 파괴되는 일이 발생하는 지, 그러한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무슨 표징이 나타나는 지에 대해서 묻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거짓 그리스도를 조심하고 전쟁과 반란 소문을 듣더라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큰 지진과 곳곳에 흑사병과 기근이 닥칠 것이고 하늘에서는 큰 표징이 나타날 것이며 더욱이 많은 사람들이 이런 재난이 오기 전에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려가 박해를 받게 된다고 합니다. 여기 임금들과 총독들은 헤로데 대왕의 후손과 이스라엘을 다스린 로마 총독들을 가리킵니다. 이어서 예수는 가족끼리 고발하여 죽이는 가정 파탄을 언급하면서 끝까지 참고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2. 우리의 이해 예수 그리스도는 왜 다시 오지 않는 것일까?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온다는 약속은 어찌된 것인가? 이는 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지녔던 의문입니다. 복음서 작가들은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당시 유행하던 묵시문학의 표현들을 빌려서 나름대로 종말 설교를 엮었습니다. 묵시문학은 수난의 역사가 계속되면서 역사에 절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의로움을 알리는 방편으로 생겨난 것으로 서기전 200년경부터 서기 100년경 사이에 이스라엘에서 성행한 종교문학입니다. 이 사관에 의하면 현재의 역사는 악의 세력이 지배하기 때문에 의인이 박해를 받지만 앞으로 올 시대는 하느님께서 다스리는 빛의 시대로서 의인이 해와 같이 빛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시기는 이미 하느님께서 정해 놓으셨으며 임박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묵시문학은 하느님의 침묵이 계속되는 듯한 수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신앙의 한 유형을 제시한 점에서는 순기능이 있지만 여기에 얽매이게 되면 예수님의 귀중한 가르침을 놓치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예수님 역시 묵시문학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종말의 날과 시간, 종말 도래의 장소, 종말에 구원받을 사람들의 숫자에 대하여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모름지기 묵시문학에 담겨 있는 표현들보다는 그 표현들이 지니고 있는 의미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이 적겠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여러분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애쓰시오" 라고 말합니다. 이는 언제·어디서·어떤 식으로 종말이 올 지 그리고 누가 구원받을 지 따지지 말고 하느님의 미래를 맞이할 준비를 갖추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읽고 지키는 일이야말로 하느님의 미래를 준비하는 확실한 길이라 하겠습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376D0355009A8941D)
한 여름밤의 꿈
-김재욱 신부-
저는 해마다 여름이면 모기와 전쟁을 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남들에 비해 특히 모기를 잘 타는 편이라 방마다 몸에도 안 좋은 액체 전기 모기향을 켜놓고 잠자리에 들게 됩니다. 그런데 요즘 모기들은 계절을 가리지 않고 아직까지 기승을 부려 매우 곤혹스럽게 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요즘에는 모기향이 좋아져서 무척 편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애써 모기장을 칠 필요도 없고 옷이나 방에 냄새가 많이 배는 모기향이나 기름기가 많이 생기는 모기약을 뿌리지 않아도 되니 말입니다. 한 번 꽂아놓으면 45일이고 60일이고 스위치만 켰다가 껐다가 하면 되니까.
또한 여름 신앙학교를 하기 위해 수련시설에 가보면 모기나 날벌레를 형광등 빛으로 유인해 전기 충격으로 처리하는 살충기를 보게 됩니다.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방금 앞에서 전기 충격으로 다른 날벌레가 타죽었건만, 쉬지 않고 날벌레들이 날아듭니다. 그래서 아침이 되면 그 주위는 온통 전기 충격에 죽어 떨어진 날벌레가 수북합니다.
그것을 보면서 '저 모습이 오늘을 살아가는 나와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썩어 없어질 현세적인 욕심인줄을 알면서도 재물이나 명예, 권력에 집착하고 연연하여 영적으로 죽어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
오늘 복음을 보면 사람들은 아름답고 화려하게 꾸며진 성전을 보고 감탄하며 좋아합니다. 사실 그들에게 있어서 성전은 하느님이 계신 전(殿)이며 기도하는 집이지만, 사람들은 그런 의미보다는 그저 아름답고 화려한 겉모습에 현혹되어 눈이 휘둥그래질 뿐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그토록 아름답고 화려한 성전도 파괴되고 말 것이라는 예언을 하십니다. 바로 그런 외적인 것들은 영원한 생명에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함을 말씀하시는 것이죠.
우리는 매일 매일 종말을 맞이합니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그러나 아직도 현세적인 아름답고 화려함을 쫓으며 살아갑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지금 너희가 세상이라는 허상을 바라보고 있지만 저 돌들이 어느 하나도 자리에 그대로 얹혀 있지 못하고 다 무너지고 말 날이 올 것이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376D0355009A8941D)
-서공석신부-
교회 전례의 주년(週年)은 대림(待臨)시기와 더불어 시작하고, 그리스도 왕 축일로 끝납니다. 다음 주일이 그리스도 왕 축일입니다. 전례주년이 끝날 이 무렵이면, 우리는 복음이 전하는 세상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세상의 종말을 말하기 위해 신약성서는 유대인들의 묵시문학에서 표현들을 빌렸습니다. 묵시문학은 후기유대교가 세상 종말에 대해 상상한 것을 기록으로 남긴 문서들입니다. 예수님시대 유대인들은 그 문서를 잘 알고 있었고, 유대인들이 중심이 된 초기그리스도신앙공동체도 그것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세상 종말을 말하기 위해 자연스레 그 표현들을 사용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세상 종말에 있을 큰 재난도 그 문서들의 영향을 받아 기록되었습니다. 성전의 파괴, 전쟁과 반란, 기근, 전염병, 하늘의 징조, 박해, 이 모든 것이 세상 종말에 있을 것이라고 후기유대교 묵시문학이 상상하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신앙인은 죽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고, 그것을 배워 실천합니다. 신앙은 세상의 미래에 대해 비밀스런 정보를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종말의 “시와 때”(마르 13,32)도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루가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이미 십여 년 전에 파괴되었습니다. 로마제국의 식민지였던 유대아가 기원후 66년 독립전쟁을 일으켰고, 그 전쟁은 4년 후, 곧 기원후 70년에 유대아의 패전으로 끝났습니다. 로마군대는 유대민족의 정신적 중심인 예루살렘과 그 성전을 처참하게 파괴하였습니다. 식민지가 반란을 일으키면, 어떤 비극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보여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유대교 당국으로부터 박해당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복음서들은 유대교묵시문학이 말하는 종말이 이미 왔고,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열리는 새로운 미래를 볼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의 복음도 그런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자기의 미래를 보장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건강한 미래를 위해 운동하고, 건강식품과 보약도 먹습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경받고 대우받는 미래를 얻기 위해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경제적으로 안정된 미래를 위해 저축하고 보험에도 가입합니다. 우리의 지혜와 노력으로 우리의 안정된 미래를 보장하려는 것입니다. 세상에 사는 인간으로 당연한 일이고, 그것을 잘 하는 사람을 우리는 지혜롭다고 말합니다.
신앙은 자기가 설계하는 자기중심적 미래가 아니라, 하느님이 주시는 미래를 살자는 운동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힘으로 당신의 미래를 보장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미래만이 참다운 우리의 미래라고 믿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현재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이 살아 계셔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시면, 우리는 그분의 일을 실천합니다. 사람들의 불행을 퇴치하고, 인명을 소중히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죄를 용서하면서 그것이 하느님의 일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의 실세들과 갈등을 겪고, 당신의 죽음이 다가 올 때도 당신의 노력으로 살아남을 궁리를 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빌었습니다. “아버지,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마르 14,36). 예수님은 하느님이 주실 미래만을 희망하였습니다. 이 세상은 자기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사람을 오래 살려 두지 않습니다. 죽음의 휘장을 넘어 하느님이 그분을 살려 놓으셨다는 것이 부활입니다.
하느님의 일만이 우리가 사는 세상과 시간을 넘어서 존속할 것입니다. 푸르고 싱싱하던 대자연에 단풍이 아름답게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미 길에는 낙엽이 떨어져 우리 발에 밟힙니다. 앙상하고 스산한 겨울의 풍경이 곧 온다고 예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푸르렀다가 단풍이 들고, 또 떨어져 이 세상과 결별한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계절입니다. 우리를 버티어 주던 자존심, 명예, 지위, 재물도 우리의 미래를 보장해 주지 못하는 잠시의 푸름이고 아름다움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생결단하고 덤비는 일이, 우리 자신을 지키고 보존하고 높이기 위함이라면, 하느님의 미래는 우리 안에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면, 우리 자신과 주변을 보는 우리의 시선에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조금 더 선하고, 조금 더 관대하고, 조금 더 자비롭게 주변을 보는 마음의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변한 우리의 삶입니다. 그것이 우리 가운데 있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당신들 가운데 있습니다.”(루가 17,21). 하느님이 동기가 되어 우리의 삶이 변하면,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라는 말씀입니다. 재물과 명예에 대한 우리의 욕심이 우리를 지배하면, 하느님은 우리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계획한 우리의 미래만을 바라보고 사는 우리라면,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축복이나 하면서 하늘 멀리에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신앙은 우리가 하는 일이 더 잘 되도록 하느님의 힘을 빌리는 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신앙은 우리의 길을 바꾸라고 권합니다. 우리의 미래를 우리가 보장하겠다는 환상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미래를 향한 길로 들어서라고 신앙은 권합니다. 하느님보다 우리 자신을 더 소중히 생각한다면, 우리가 실천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인간의 삶은 모험입니다. 남녀가 만나서 하나의 가정을 이루는 것도 모험입니다. 자녀를 낳아서 키우는 일도 아무런 보장이 없는 모험입니다. 인간에게 소중한 일들은 이렇게 보장되지 않은 것들입니다. 그런 일들은 우리가 헌신(獻身)하지 않고, 우리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면, 반드시 실패하는 모험입니다. 그리스도신앙도 모험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과 함께 하는 모험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삶과 죽음으로 이미 하신 모험입니다. 그분의 부활은 그 모험의 결과가 하느님의 생명과 기쁨에로 우리를 인도한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하느님의 미래를 택한 사람은 하느님의 현재를 삽니다. 선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시선으로 자기 주변을 봅니다. 그리고 그 시선 안에 들어온 현실이 요구하는 바를 실천합니다. 그리스도신앙인은 선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이 우리의 삶과 우리의 환경에서 하실 일을 생각하고 실천합니다. ◆
![](https://t1.daumcdn.net/cfile/blog/1376D0355009A8941D)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
-평화신문-
오늘 복음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벌어질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신앙의 삶과 관련된 세상 종말에 대한 사건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종말에 관한 주님 말씀은 신비에 둘러싸인 무엇인가를 드러내어 우리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두려움과 죄로 인해 우리 눈을 가리고 있는 베일을 벗어버리게 도와줍니다. 우리는 수동적 의미에서 세상 종말을 향해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 의미에서 세상 마지막에 실현될 하느님이 원하시는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마음은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결정적 말씀이 담고 있는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시야를 갖도록 해줍니다. 하느님 진리는 우리가 어떤 환난과 고통에 처하더라도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루카 21,19). 우리들은 세상 종말에 대해 두려움과 호기심을 늘 갖고 있기에, 그 날이 언제 올지, 또 어떤 표징들이 나타날지 궁금해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처럼 이렇게 질문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루카 21,7)
이런 두려움과 호기심의 뿌리에는 죽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 은총과 사랑이 악에서 발생하는 모든 근심과 두려움의 굴레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인도합니다. 주님을 향한 굳은 신뢰는 죽음을 포함한 삶의 모든 장애물을 건너가게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런 환난과 역경 속에서도 새로운 삶을 선택하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이 모든 일에 앞서,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루카 21,12-13).
많은 사람들은 고통이 닥치기 전까지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그러나 주님 현존을 체험하지 못하는 고통의 순간이 불어 닥치면 크게 불평하고 낙담하고 절망합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에만 애착을 갖고 자신을 위해서만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기대하지 못한 희망의 여정을 걷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누군가를 기다린다면, 기다리는 그 사람이 없어도 돌아오려니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함께 있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돌아와야 할 시간에 기다리는 사람이 돌아오지 않으면, 그때 그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마찬가지로 고통과 시련에 부딪힌 우리는 주님이 함께 계시지 않다는 의식 속에서 오히려 주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문제는 주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는 의식조차 없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에 걱정하지도 않고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현재 조건이 고통스럽고 암울할지라도, 자신의 삶에서 부대끼는 조건이 어둡게 보이고 불합리해 보일지라도, 그 밑바닥에는 주님이 주시는 놀라운 희망과 기쁨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이 바로 신앙인인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에게서 나와서 하느님에게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윤동주 시인은 '내 인생의 가을이 오면'이라는 시에서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 인생의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몇 가지가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하였는지 물어볼 것입니다. 그때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대답하기 위해 지금 많은 이들을 사랑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나에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도록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야겠습니다. … 내 인생의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을 것입니다. 어떤 열매를 맺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겠습니다."
우리 삶에도 떨어지는 낙엽처럼, 움켜진 모든 것을 놓아야 할 가을이 올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거나 슬퍼하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세상의 가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 가치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 세상의 가치만은 아닙니다. 신앙인은 바로 이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베르나르도 성인이 이런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바라보고 성찰하면, 고통과 슬픔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성찰은 구원을 가져다줍니다. 왜냐하면 그럼에도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바라보게 되고, 이제 자신은 회복되고 성령의 행복과 위로를 받게 되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376D0355009A8941D)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손용환신부-
종말을 기다리며
주님, 종말에 저희는 어떻게 될까요?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은 모두 검불이 되리니, 다가오는 그날이 그들을 불살라 버리리라. 그날은 그들에게 뿌리도, 가지도 남겨 두지 않으리라. 그러나 하느님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라.”(말라키 3,19-20) 주님, 당신께서는 악인들은 화덕의 검불처럼 하나도 남지 않고, 의인들은 떠오르는 태양처럼 치유를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 저희가 악인일까요? 의인일까요? 거만한 자일까요? 당신을 경외하는 자일까요?
주님, 그러면 언제 종말이 일어날까요? 주님, 당신께서는 저희에게 종말은 네 가지 표징이 나타난 후에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 종말의 네 가지 표징은 무엇입니까? 또 종말의 네 가지 표징은 무엇 때문에 일어납니까?
주님, 먼저 당신께서는 거짓 그리스도가 나타난다고 이르셨습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루카 21,8)
그렇다면 주님, 거짓 그리스도는 누구입니까? 주님, 가만히 살펴보면 지금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그리스도처럼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당신의 자리를 빼앗아 스스로 주인처럼 살고 있습니다.
주님, 이어서 당신께서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난다.”(루카 21,10)
그런데 주님, 지금 곳곳에서 전쟁과 반란이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민족과 민족이 서로 일어나 싸우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에는 종교와 이념과 이권이 부딪쳐 서로가 서로를 죽이며 싸우고 있습니다.
주님, 다음으로 당신께서는 천재지변이 일어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이 일어날 것이다.”(루카 21,11)
그런데 주님, 지금 세상 곳곳에서 큰 지진이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또 기근과 전염병이 세상을 휩쓸고 홍수가 일어나고 산이 무너지며 화산이 폭발하고 지진 해일이 사람들을 덮쳐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주님, 마지막으로 당신께서는 믿는 사람들이 박해를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루카 21,12.16-17)
그런데 주님, 지금 당신을 믿는 사람들이 바보 취급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돈이란 놈이 당신을 가두고, 당신을 죽이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종말의 네 가지 표징이 지금 저희들 가까이에서 일어나고 있고, 그 원인은 하나같이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입니다. 저희가 당신을 저버리고, 당신 뜻을 따르지 않으니까 당연하겠지요.
그렇다면 주님, 저희가 지금 종말이 가까운 날에 살고 있다는 말입니까? 주님, 저희는 검불처럼 화덕에 태워지는 악인의 운명으로 살지 않고, 태양처럼 떠오르는 의인의 운명으로 살고 싶습니다. 그러하오니 주님, 저희로 하여금 끝까지 참으며 인내로써 생명을 얻게 하소서. 세상 사람들이 스스로 그리스도라 하며 당신을 멀리 하더라도, 저희만은 당신을 그리스도로 겸손하게 받아들이게 하소서.
주님, 당신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당신 때문에 겪게 되는 박해까지도 참아낼 수 있습니다. 또 무질서하게 살지 않고, 아무에게서도 양식을 거저 얻어먹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수고와 고생을 하며 밤낮으로 일하며 삽니다. 그러하오니 주님, 저희로 하여금 묵묵히 일하여 저희 양식을 스스로 벌어먹게 하소서. 그리고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게 하소서. 일은 하지 않고 남의 일에 참견만 하는 자들이 가장 어리석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376D0355009A8941D)
세상의 혼, 하느님의 표지인 그리스도인
박동호신부-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재앙이 아니라 평화를 주려 한다”(입당송). 교황 바오로 6세는 “발전은 평화의 새 이름”(민족들의 발전, 76-80항)이라고 선언하면서, 발전을 ‘비인간적인 삶의 여건을 더욱 인간적인 것으로 이행시키는것’으로 정의합니다.
우리의 지식인과 대중매체는 때로는 경제위기에 관해,때로는 경제성장에 관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정보를 쏟아냅니다. 그런데 경제위기를 말할 때에는 ‘비인간적인 삶의 여건’을 샅샅이 밝히며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불안을 불러일으키지만, 성장과 발전을 노래할 때에는‘비인간적인 삶의 여건이 더욱 얼마나 인간적인 것으로 이행’되었는지를 이야기하지 않으려 합니다. 위기 때에는 허리띠를 졸라매자고 재촉하고, 성장을 노래할 때에는 분배를 실현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가르치기 일쑤입니다. 혹시 모든 이가 아니라 일부 특정 계층에게만 유익한 발전을 생각해서 그런 것은 아닌지요?
사실 ‘양극화’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습니다. 다수의 사회 구성원이 빈곤화 곧 ‘비인간적인 삶의 여건’에 놓여 있거나 놓일 위험에 처해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세상은 발전하고 성장했는데, 사람들 사이의 불균형은 개선되지않고 오히려 점점 더 심각해집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 심각한 불균형과 불평등이 상호불신과 증오, 분쟁과 환난을 일으키며, 인간 자신이 바로 그 원인이 되면서 동시에 희생 제물이 된다고 밝힙니다(사목헌장 8항 참조).
혹시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른 자들”(1독서)이 그들만의 잔치를 위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성전을 꾸미고”(복음) 그 화려함에 넋을 잃도록 세상을 상대로 작업(?)을 건 것은 아닐까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서는 건물들은 위용을 뽐내고 곳곳에 세워진 성전은 화려함을 과시하는데, 그 안의 수많은 사람들은 그만큼 더 초라해지니 말입니다. 게다가 일하고 싶어도 일할 기회를 갖지 못하는 이들에게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먹도록 하라” 거나,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2독서)고 훈계하면서 이미 고되게 일하고 있는 사람에게서 숨 쉴 틈마저 빼앗고, 불균형과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닐까요? 전쟁과 반란,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그 수많은 이웃의 불행이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른 자들이 꾸민 ‘인재’가 아니라, ‘천재’, ‘저개발’ 혹은 ‘운명’ 탓이라고 믿게 만들어 아예 발전(평화)의 의지를 꺾는 것은 아닌지요?
한국 교회는 오늘을 평신도 주일로 기념합니다. 공의회는 “평신도는 저마다 세속에서 주 예수님의 부활과 생명의 증인이 되어야 하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표지가 되어야 한다… 주님께서 복음에서 행복하다고 선언하신 가난한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이 그 생명력을 얻는 바로 그 정신을 세상에 전파하여야 한다. 한 마디로 영혼이 육신 안에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안에서 그 혼이 되어야 한다”(교회헌장38항)고 가르칩니다.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으니,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아멘.__
![](https://t1.daumcdn.net/cfile/blog/1376D0355009A8941D)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임숙희-
시작 기도 하느님, 아빠 아버지, 성령의 이끄심으로 오직 당신만이 우리 삶의 반석이라는 것을 깨닫는 마음의 지혜를 주소서.
독서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종말 설교가 담긴 21장 5???38절의 서두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성전 파괴를 예고하자, ‘그때와 표징’?을 묻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종말에 대한 비밀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제자들이 겪어야 할 시험과 사건들을 하느님에 대한 신뢰로 살아가도록 희망을 주십니다.
먼저 예수님은 때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는 사람에게 속지 말도록 부탁하십니다. 이 사람들은 사람들을 속이는 거짓 예언자들로서 두 부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이름이 큰 영향력을 끼치는 것을 보고, ‘내가 그리스도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루카 공동체가 겪은 체험일 것입니다.(사도 5,?37;?21,?38) 그러나 공동체를 더욱 위협하는 사람들은 ‘종말이 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초대 공동체는 이런 사람들 때문에 많은 혼란을 겪었는데, 제2독서에 바오로가 테살로니카인들에게 하는 권고는 이런 교회 현실을 배경에 둔 실제적인 사목지침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언제 오시든지, 그리스도를 뒤따라가는 사람들이라면, 외적인 표징이나 사건에 매달리거나 현혹되지 않고, ‘자신의 손으로 일하고 일상을 충실히 해나가며 주님과의 결정적인 만남을 기다릴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라들끼리의 갈등, 자연 재앙, 하늘의 표징을 말하지만?(9???11절) 그분의 관심사는 이 모든 일에 앞서 ‘당신의 이름 때문에’ 제자들이 당할 박해를 예고하십니다.?(12???19절)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라는 말은 한 조직이나, 한 대상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 그분에게 자신의 생명을 준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제자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어떤 형태로든 죽음에 이르게 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자신의 상황에서 십자가가 요구된다면 그것을 짊어지고 스승의 길을 따라가게 될 것입니다.?(9,?23???26) 박해에 대한 예고가 담긴 12???19절은 예수님 자신의 체험이자 동시에 70,80년에 루카 공동체가 유다 공동체와 이방인들에게서 박해를 당한 체험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언변과 지혜’?를 주시어 힘 있는 증언을 하도록 도와주십니다.?(14절) 스테파노가 ‘주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체포되어 최고의회에서 고발당할 때 성령은 그에게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유창하게 선포할 수 있는 놀라운 지혜를 주십니다.?(사도행전 7장)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 예루살렘에 묶일 뿐 아니라 죽을 준비까지 되어있던 바오로에게 성령은 대담하게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사도 21,?13)
예수님은 또한 세상 사람들에게서 미움받았던 당신과 똑같이 제자들도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미움받을 것을 예고하십니다.?(21,?17) 그러나 동시에 그들의 삶이 하느님, 아빠 아버지의 보호 안에 있다는 비밀도 알려주십니다.?(18???19절) 이 말씀은 루카의 문맥에서 볼 때, 순교 상황만이 아니라 전반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염두에 두고 하시는 약속입니다. 제자들은 참새 한 마리까지 기억하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벗인 그들의 머리카락 하나까지도 세어 두셨기 때문에 복음을 선포할 때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12,?7) 제자들은 또한 하느님이 현재의 어려움을 이겨내도록 인내라는 무기를 주시어 그들의 삶을 보호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인내’?는 혼자서 어려운 상황을 견뎌내는 내면적인 자세라기보다는 성령이 불어넣어 주시는 종말에 대한 희망에 뿌리를 둡니다. 인내는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특성이자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덕목입니다. 성령이 주시는 인내는 제자들에게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시련 중에서도 열매를 맺도록 도와줄 것입니다.?(8,?15) 제1독서에서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인 말라기가 “그분의 이름을 예배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날에 “정의의 태양처럼 떠오를 것”?이라고 예언할 때?(말라 3,?20) 아마도 그는 현재의 박해와 미움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보호에 신뢰를 두고 일상을 인내롭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
성찰 주님, ‘오늘’ 저에게 머리카락 하나도 세고 계시며 제 삶을 보호하시는 당신 사랑을 체험하게 하시고, 인내의 영을 주시어 제가 하는 일이 주님의 이름을 예배하는 도구가 되게 해주십시오.
기도 주님 앞에서 환호하여라. 세상을 다스리러 그분께서 오신다.(시편 98,?9)
![](https://t1.daumcdn.net/cfile/blog/1376D0355009A8941D)
성전 파괴
-염철호 신부-
크고 화려한 도시와 건축물을 즐겨 짓던 헤로데 대왕은 기원전 19년 예루살렘 성전을 증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증축을 통해 예수님 시대의 성전은 매우 아름다운 모습을 갖게 되었는데, 유다인들은 이 아름답고 웅장한 성전을 보고 기뻐하며 하느님께서 이 성전에, 곧 자신들 가운데 머무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 시작 부분에 예수님을 따르던 몇몇 사람이 성전의 아름다움을 보며 찬사를 보내는 것도 이와 같은 분위기를 잘 보여 줍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이 곧 파괴되리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생각에 찬물을 끼얹습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언제 이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 예고하십니다. 곧 이 일이 벌어질 때 그 징조로 큰 지진이 발생하고, 기근과 전염병과 같은 표징이 일어나리라는 것과,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인해 모든 사람에게서 미움을 받고, 감옥에 갇히거나 죽음을 맞기까지 할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어려움을 인내로 잘 이겨 내서 결국 생명을 얻도록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받아 뿔뿔히 흩어졌을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죽음을 맞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64년경 네로로 인해 일어난 박해였는데, 베드로와 바오로가 이때 순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게다가 70년에는 티토가 이끄는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완전히 파괴해 버립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파멸과 아름다운 소멸
-김찬선신부-
우리는 지금 위령성월을 보내고 있고 오늘 주일 독서와 복음은 마지막 날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에 따라서 죽음의 의미가 다르고 마지막 날의 의미가 다릅니다. 죽음이 어떤 사람에게는 파멸이고 이 세상의 끝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새로운 태어남이고 새 세상의 시작입니다. 죽음이 어떤 사람에게는 자기의 소멸이고 사람들과의 이별이지만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탈바꿈이고 하느님과의 만남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살 때 자전거 통학을 하였습니다. 찻길을 따라 가면 빨리 학교에 갈 수 있었지만 저는 공원길로 다녔습니다. 그 공원길은 특히 가을 단풍이 들 때 아름다웠는데 그 단풍을 보는 즐거움 때문에 학교 다니는 것이 즐거웠고 돌아오는 길에는 내일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등교하는 아침에는 보리라는 설레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공원길에 들어서자 설레임이 실망으로 바뀌었습니다. 전날의 강한 비바람에 이파리가 몽땅 떨어져버린 것이었습니다. 빌어먹을 비바람 때문에 아름다운 단풍이 망가져버렸다고 불평하였습니다. 그렇게 투덜거리며 잡친 기분으로 한참을 가다가보니 문득 비바람을 탓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파리가 떨어진 것은 비바람 때문이 아니라 떨어질 때가 되어서 떨어진 것이었습니다.
코헬렛, 전도서가 얘기하듯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때가 있고 그래서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으면 뽑을 때가 있고 나올 때가 있으면 떨어질 때가 있는 법인데 저는 이때를 거부하고 이때의 현상을 담담히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파리 몇 개 남아있으니 아직 가을이라고 고집한다면 이것은 참으로 소멸의 아름다움을 지니지 못한 것이고 심하게 얘기하면 추하고 애처롭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아주 깊이 팬 주름을 감추기 위해 너무도 짙은 화장을 한 할머니 같은 것이지요. 주름과 백발을 추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진짜 추한 것임을 모르는 것입니다. 반면 주름과 백발을 추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여유와 담담함은 마치 단풍이 소멸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아름다움이듯 이것이 진짜 노년의 아름다움이고 소멸의 아름다움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인생을 잘 산 인생의 아름다움입니다.
저는 한 자매를 알고 지냈었습니다. 음악을 하는 분인데 저보다 젊은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암에 걸렸고 한 차례 수술을 하였는데 재발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항암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머리도 다 빠져 보기 민망스러울 정도인데도 이 자매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 어린 아이들이 있는데도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너무 고통스럽고 힘이 없는데도 살아있는 한 자기 재능을 가지고 끝까지 봉사하다가 죽는다고 하면서 음악봉사를 하러 다녔습니다. 음악봉사도 성악으로 하는 봉사이기에 제가 말리고 싶었지만 그것이 그분의 인생을 보람 있게 잘 마무리하는 것이기에 안쓰럽지만 보면서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이 자매에게는 성전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것이 없고 아름다운 돌들이 언제 무너질지에 대한 조바심도 없었습니다. 성전은 돌들로서 성전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계심으로 성전이 되는 것이고 성전이 무너지는 것은 돌들이 흩어져서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안 계실 때 무너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자매의 아름다움과 육신은 결국 작년에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불멸의 하느님을 모신 이 자매는 아름다운 성전으로 영원할 것입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376D0355009A8941D)
새벽을 열며
회사에서 퇴근한 남편이 말합니다. 남편: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어.” 아내: “좋은 소식은 뭔데요?” 남편: “3천만 원이 생겼어.” 아내: “우와~~ 정말로 좋은 소식이네요. 그렇다면 나쁜 소식은요?” 남편: “그게 퇴직금이야.”
또 이러한 상황도 있습니다. 아들이 수학을 50점 맞고 돌아왔어요. 이를 남편에게 보고하는 것입니다. 아내: “여보, 나쁜 소식과 좋은 소식이 있어요.” 남편: “나쁜 소식이라니?” 아내: “철수가 수학 50점 맞았어요.” 남편: “누구를 닮아서 이렇게 공부를 못하는거야? 그렇다면 좋은 소식은 뭐야?” 아내: “대학 등록금 걱정이 없어졌다는 것이죠. 뭐.”
좋은 소식을 나쁜 소식으로 만드는 사람도 있고, 또 반대로 나쁜 소식을 좋은 소식으로 만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더 행복한 사람일까요? 당연히 나쁜 소식을 좋은 소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겠지요? 실제로 나쁜 소식이 다가오는 순간에 이렇게 한 번 외쳐보세요.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몰라.”
그런데 이렇게 마음먹은 사람은 실제로 나쁜 소식이 좋은 소식을 바뀌는 체험을 하게 될 때가 참으로 많다고 합니다. 바로 긍정적인 사고와 주님께서 언제나 나를 지켜주신다는 굳은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쁜 소식을 우리들에게 전해 주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꺼리는 이야기, 듣기 싫어하는 이야기, 바로 종말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십니다. 그것도 아름다운 성전을 바라보면서 감탄하고 있을 때 이렇게 초치는 소리를 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종말에 대한 준비를 제대로 할 수 있도록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종말을 잘 준비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좋은 묘 자리를 알아보라는 것일까요? 아니면 자기 재산을 모두 교회에 봉헌하라는 것일까요? 아니면 직장 모두 때려치우고 성당에 나가서 기도만 열심히 하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나쁜 소식만을 전해주시지 않습니다. 즉, 나쁜 소식이 좋은 소식으로 바뀐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시지요. 그래서 종말에 대한 그림을 보여 주시면서도 이렇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바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 주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과거에만 연연하고 다가올 미래를 걱정만 하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에 긍정적인 마음과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살라는 것입니다.
항상 좋은 것만을 주시는 주님을 떠올리면서 생활해 보세요. 정말로 좋은 것만 주십니다.
긍정적인 마음을 갖도록 하세요.
빠다킹신부
![](https://t1.daumcdn.net/cfile/blog/1376D0355009A8941D)
우리는 하느님 나라 지상 일꾼
-배광하 신부 -
착한 교우분들 어느 본당엘 가든 착한 교우분들이 많습니다. 그렇듯 착한 교우분들 때문에 사목생활에 활기가 있고 많은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새벽 추위를 가르고 이른 아침 어두운 성당에서 기도하시는 분들, 성당의 온갖 궂은 일들을 불평 없이 묵묵히 하시는 분들, 사제의 개인 감정에서 폭발한 꾸중도 자신의 부덕인양 참아 받으시는 분들, 자신의 귀한 물건과 선물은 먼저 본당 신부님에게 드려야 마음이 편한 분들, 본당 여러 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석 하시면서도 교우들의 참여도가 영 부족하다 싶으면, 마치 자신의 죄인 양 송구스럽고 안타까워하시는 분들, 감사의 작은 금액을 내 놓으면서 겸연쩍어 하시고 죄스러워 하시는 분들, 이 모든 분들 덕분에 사제가 살아가는 힘을 얻습니다. 때문에 ‘사제를 성인으로 만드는 것은 평신도요, 교우들을 성인으로 만드는 것은 사제이다’라는 말이 설득력을 얻습니다. 또한 ‘사제는 기도를 먹고 사는 사람이다’ 하였습니다. 사제의 양식인 기도는 거의 대부분 교우분들에게서 얻습니다. 세상 그 어떤 종교도 일반 신자들의 도움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종교는 없습니다. 그만큼 자신이 속한 종교에 혼신의 힘을 다하여 희생하며 봉사하여도 제대로 된 대접을 받아보는 경우가 없는 것이 일반 신도들의 불이익이라고 봅니다. 조금만 사랑의 시선을 가지고 돌아보면, 그분들은 겨우 얻은 휴식을 반납하여 교회에 봉사하고 있으며, 목구멍이 포도청인 사회의 치열한 경쟁 속에 살아남으려 발버둥치면서도 교회 일에는 헌신의 봉사를 하며 하느님 나라를 가꾸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진정 사목자들이 그분들의 은혜를 잊지 않는 하루가 되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너무도 많은 위로와 격려, 영적 목마름에 갈망하는 착한 교우분들께 늘 무엇인가를 채워주어야 할 사명이 사목자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인 측은지심의 눈길로 교우분들께 다가가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끝내 용기를 잃지 않도록, 하느님의 기적과 사랑의 승리를 온 몸으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희망의 말씀을 우선 사목자들이 먼저 살아야 합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 17~19).
하느님의 일 본당에서 사목을 하다보면 여러 부류의 교우들을 만나게 됩니다. 진정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여 사목을 돕는 분들, 늘 성당 주변을 맴돌며 사사건건 간섭을 하며 불평을 하는 이들, 주일만 겨우 지키며 무관심으로 일관된 삶을 사는 이들이 그렇습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이라고 합니다. 물론 먹고 사는 일에 바빠 성당 일에 신경을 쓰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냥 관심 없이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말 교회는 평신도들의 열정적인 손을 얼마나 많이 필요로 하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 구원 사업에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하셨기에 사도들을 파견하신 것입니다. 교회가 하고자 하는 선한 일은 하느님의 일이란 자각이 더욱 필요한 때입니다. 그리고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라, 보다 나은 하느님 나라를 위한 따끔한 충고와 격려를 교우들은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초대교회를 가꾸고자 동분서주 바쁘게 뛰었던 사도 성 바오로에게도 여러 교우들의 적극적인 협력 가운데 끊임없는 반대자들의 시달림이 있었습니다. 그 중 바오로 사도의 근심거리는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무리들의 책동이었습니다. 그들은 늘 자신들의 일을 하지 않고 불평불만 속에 사람들을 이간시켜 평화로운 공동체를 분열시키려 하였습니다. “듣자 하니, 여러분 가운데에 무질서하게 살아가면서 일은 하지 않고 남의 일에 참견만 하는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2테살 3, 11). 바오로 사도의 시대나 오늘날에나 본당 일에 협조는 하지 않으면서 끝까지 사목자를 괴롭히며 교우들 간의 분열을 일으키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에 사도 바오로는 따끔한 일침을 놓습니다.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2테살 3, 10). 여기에서의 일은 세상의 일일 수도 있고, 하느님의 일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일에 충실한 이들이 하느님의 일에도 충실하며, 하느님의 일에 충실한 이들이 세상일에도 충실한 법입니다. 그러한 성실한 이들은 영육의 음식을 먹을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이들은 사도의 말씀대로 먹을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나라가 이 지상에서부터 건설 되도록 열심히 일해야 할 하느님 나라의 일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376D0355009A8941D)
순례자의 희망
-서현승 신부-
피정 지도 중에 이따금 좋아하는 성가가 있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하느님을 기리며 부르는 성가는 모두 좋아한다고 준비된 대답을 하곤 하지만, 내심 특별히 좋아하는 성가가 있긴 합니다. 가톨릭 성가 463번 ‘순례자의 노래’는 언제 불러도, 또 언제 들어도 제게 세상의 어느 연가(戀歌) 못지 않은 애틋한 감흥을 마음속에 불러일으킵니다. “인생은 언제나 외로움 속의 한 순례자 찬란한 꿈마저 말없이 사라지고 언젠가 떠나리라 인생은 나뭇잎 바람이 부는 대로 가네 잔잔한 바람아 살며시 불어다오 언젠가 떠나리라.” 예수님은 오늘 세상의 종말에 관하여 말씀하시지만, 왠지 애틋한 희망의 노래처럼 들립니다. 당신 때문에 겪게 될 모든 박해와 고통마저도, 인생의 모든 무거운 짐들마저도 하느님의 크신 섭리 안으로 모든 것이 수렴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약속처럼 여겨지니 말입니다. 아무것도 확언할 수 없는 인생의 순례자로서 신앙인의 삶이란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으시는 사랑을 우리의 유일한 희망으로 삼는 삶입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376D0355009A8941D)
세상 한복판에 사는 평신도
-이기양 신부 -
어느 날부터 낯선 청년이 미사에 나오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보통 본당 신자들의 이름까지는 일일이 기억하지 못해도 얼굴은 대충 알고 있던 터라 말을 붙여 보았지요. "자주 만나지 못한 분 같습니다."... 그랬더니 그 청년은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습니다. "시골에서 올라온 지 꽤 지났는데 이제야 성당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며칠 전에 시골에 계신 청년의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다는 겁니다. "너 요즘 성당은 잘 나가고 있겠지?" "회사 일이 너무 바빠서 아직 나가지 못하고 있는데요."
청년이 머뭇거리며 대답하자 전화를 끊은 아버지가 한달음에 서울로 올라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왜 신앙생활을 해야 되는 지 아들에게 진지하게 설명하고 바로 성당을 찾아 나섰답니다. 그 주일에 청년은 성당을 찾아왔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신앙이 아들에게 영원히 기억되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렇게 자식들에게 신앙을 물려주는 것이 평신도만의 고유 사명중 하나입니다.
오늘은 평신도 주일입니다. 평신도는 성직자와 수도자들과는 달리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훌륭한 평신도의 삶은 성직자와 수도자처럼 신앙이 깊을수록 세속을 떠나서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 한가운데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평신도의 가장 큰 특징은 '세속성'입니다. 제 2차 바티칸공의회는 평신도에 대하여 이렇게 정의 내리고 있습니다.
"평신도들은 본래 현세적인 일에 종사하며 하느님의 뜻대로 관리함으로써 천국을 찾도록 불린 것이다. 그들은 세속에 살고 있다. 세속의 온갖 직무와 일, 가정과 사회의 일상생활 조건들로 그들의 존재 자체가 짜여진 것처럼 그 속에 살고 있다. 그 속에서 그들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복음의 정신으로 스스로의 임무를 수행하며 마치 누룩과도 같이 내부로부터 세계 성화에 이바지하는 것이며 특히 믿음과 바람과 사랑에 빛나는 신앙생활의 증거로써 이웃에게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이다."(「교회헌장」 31장)
세상 안에서 태어나서 세상에서 살고 세상의 소명을 받아 세상을 성화시키는 것, 이것이 평신도의 역할이라는 것이지요. 평신도 활동의 중심지는 가정과 사회이며, 평신도의 사명은 세상을 복음화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안에서 신자답게 살아가기란 그리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복음적이기보다는 너무나 비복음적이고, 약육강식의 논리인 자본주의의 물결이 휩쓸고 있기에 복음 말씀대로 살기가 쉽지 않은 곳이지요. 어설프게 신자임을 드러냈다가는 손해를 보기가 쉽고 자칫 바보가 되기 쉬운 세상입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몸담고 있는 학교나 직장, 사회에서 자신이 신자임을 드러내기를 꺼려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평신도는 몸담고 있는 그 곳에서 세상을 성화시키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이것을 다시 한 번 각성시켜주는 날이 오늘 평신도 주일입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세상의 빛과 소금 역할을 하며 살아가는 분들이 곳곳에 많이 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한 공무원이 있습니다. 주변 사람 모두가 그 분을 알고 있었고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그 과장님만은 믿습니다. 그 분을 존경합니다."
그 분은 참으로 신자답게 사는 분이었습니다. 이렇게 참 보기 드문 좋은 사람이라고 주위 사람들이 인정하고 은근히 존경심마저 갖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천주교 신자더라"하면 어떻게 됩니까? 과연 천주교 신자는 다르다는 믿음이 생기고 그 믿음이 세상을 변화시켜 가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살고 있는 사람들 덕분으로 비신자들이 말합니다.
"나중에 종교를 갖게 된다면 천주교 신자가 되겠다." 이것이 바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평신도의 모습입니다.
각자 몸담고 있는 그곳에서 신자답게 살아가면서 세상을 성화시키는 것이 평신도의 사명이며 신자들의 구원이 이뤄지는 곳이 바로 세상입니다. 훌륭한 평신도란 성직자 수도자들처럼 세상을 떠나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 한복판에서 세상을 복음화시키고 구원의 장으로 만드는 몫을 충실히 해내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풍파를 복음의 힘으로 성화 시키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평신도의 삶을 사되시기를 바랍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376D0355009A8941D)
재난의 시작
-홍금표 신부-
“평신도 사도직 활성화에 모두 앞장서자” IQ(지능지수)에 대한 반발로 한동안 우리 사회에는 EQ(감성지수)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감성지수란 자신과 타인의 정서를 평가하고 조절하면서 자신의 삶을 계획하고 성취하기 위해서 그러한 정서를 활용할 줄 아는 능력을 말하는데, 이러한 정서지능이 지능지수보다 더 중요하다 하여 EQ를 계발하기 위해 한동안 열풍이 불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 MQ(도덕지수)라는 개념도 심심치 않게 사용됩니다. 강한 양심의 소유자, 높은 도덕성을 가진 인간을 성공의 요인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비해 사전에는 나오지 않는 말입니다만 최근에는 시대상황 때문인지는 몰라도 AQ라는 말을 사용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마 고통지수 정도로 이해하면 되는 말인데, 고통을 참고 견디는 능력인 고통지수가 높은 사람들이 미래사회에서는 성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겠습니다만 교육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IQ뿐만이 아니라 다른 부분도 계발해야 된다는 정도로 이해할 필요가 있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묵시문학의 형태를 빌어 종말이 오기 직전의 여러가지 전조들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성전 파괴와 거짓 그리스도의 등장, 전쟁 그리고 지진과 기근, 전염병, 박해와 가정의 파국이 바로 장차 올 종말의 징조이고 이러한 일을 겪고 난 후에야 사람의 아들이 오게 된다는 내용으로 마지막 메시지는 루가 복음 21, 19절에 나오듯 참고 견디라는 말씀입니다.
두렵고 고통스런 상황, 내일이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는 불안한 상황에서 참고 견디는 것이 생명을 보증해 준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 참고 견딘다는 것은 말같이 쉽지는 않겠습니다만 하느님에 대한 신뢰와 미래에 대한 희망, 그리고 일상의 삶에서 고통을 참고 견디는 연습이 이같은 덕행을 가져올 것이고 그러한 의미에서 보면 구원도 고통지수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오늘은 연중 제33주일로 평신도 주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평신도란 성직자 수도자를 제외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말하는데 교회가 평신도 주일을 지내는 목적은 분명합니다. 성직자 수도자와 함께 같은 하느님 백성으로서 교회 안에서 맡은 평신도들의 다른 역할과 사명을 뒤돌아보고 자각하기 위함입니다.
물론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 내에서 평신도들의 역할은 미약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때문에 많은 분들이 여기에 대해 나름대로 원인을 찾고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지적이고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책임을 돌려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 제도도 문제고,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의 의식도 문제고, 흔히 지적하듯 평신도 자신의 문제도 그 원인의 하나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 어느 하나의 원인이 오늘의 이 같은 현실을 가져온 직접적 요인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현재의 위치에서 나름의 원인을 찾아 나서는 일은 의미 있는 일이긴 합니다만 그 원인을 찾음이 자칫 책임을 전가하기 위한 어떤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개혁을 부르짖으면서 과거의 일로 혼란을 겪고 있는 것도 그 자체가 나빠서만은 아닙니다. 그 동기가 투명치 못한 것이 첫째 이유요, 또 그럴듯한 논리로 각자의 입장을 설명하지만 결국은 자신들의 욕심과 그럼으로 다음 정권을 위한 노림수와 그리고 잘못된 모든 책임을 상대방에게 덮어씌우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려는 저급한 노림수가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떻든 평신도 문제와 연결하여 이야기하자면 현재 평신도의 역할은 미미하지만 한국교회의 미래는 밝다는 것입니다. 세계 어느 교회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평신도들의 힘으로 세우고 가꾸고 지켜온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진 교회가 우리 교회이고, 거기에 더해 어느 나라보다 더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믿음을 간직한 신자들이 한국의 신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 사회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과 일을 하시는 좋은 자질을 가지신 분들이 바로 우리 평신도들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이러한 환경과 자원을 가지고 있기에 지금 현재 우리 교회에서 평신도들의 역할이 바람직하지 못하다 하더라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이 정말 욕심을 버리고 같은 하느님 백성으로서 하느님의 일을 할 각오만 되어 있다면 언제든지 평신도 사도직이 꽃 필 수 있는 토대는 준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376D0355009A8941D)
하느님의 미래를 택한 사람은 하느님의 현재를 삽니다.
-서공석 신부- I
교회 전례의 주년은 대림시기와 더불어 시작하고 그리스도 왕 축일로 끝납니다. 다음 주일이 그리스도 왕 축일입니다. 전례주년이 끝날 이 무렵이면 우리는 복음이 전하는 세상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세상의 종말을 말하기 위해 신약성서는 유다교 묵시문학에서 빌려온 표현들을 사용합니다.
묵시문학은 세상 종말에 대한 상상을 기록한 후기 유다교 문서들입니다. 이 문서들은 예수님 시대 유다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유다인들이 중심이 된 초기 교회 공동체는 이 문서들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세상 종말에 대해 말할 때, 자연스레 그 표현들을 사용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이 세상 종말에 큰 재난이 있을 것으로 말하는 것도 그 문서들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성전의 파괴, 전쟁과 반란, 기근, 전염병, 하늘의 징조, 박해, 이 모든 것이 세상 종말에 대해 유다인 묵시문학 문서들이 이야기 하는 것들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죽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은 세상의 미래에 대해 비밀스런 정보를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종말의 “시와 때”(마르 13,32)는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루가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이미 십여 년 전에 파괴되었습니다. 로마제국의 식민지였던 유다가 로마를 거슬려 독립전쟁을 일으켰고, 그 전쟁은 4년 만에, 곧 기원후 70년에 유다의 참패로 끝났습니다. 로마 군사들은 유다민족의 정신적 지주인 예루살렘과 그 성전을 처참하게 파괴하였습니다. 식민지의 반란이 어떤 비극을 자초하는 지를 보여 주려 한 것입니다.
그렇게 파괴된 성전은 오늘까지 재건되지 못한 채 남아 있습니다.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유다교 당국으로부터 심한 박해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복음서 저자들은 묵시문학이 말하는 종말이 이미 왔고,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열리는 새로운 미래를 볼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도 그런 의도로 기록되었습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자기의 미래를 보장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건강한 미래를 위해 운동하고, 건강식품과 보약을 즐겨 먹습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경받고 대우받는 미래를 얻기 위해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합니다. 우리는 재물을 저축하고 보험에 가입하여 안정된 미래를 계획합니다. 우리의 지혜와 노력으로 우리의 안정된 미래를 보장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을 잘 하는 사람을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 혹은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은 자기가 설계하는 자기중심적 미래가 아니라, 하느님이 주시는 미래를 살자는 삶의 운동입니다. 신앙은 하느님이 주시는 미래만이 참다운 우리의 미래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힘으로 당신의 미래를 보장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주시는 미래만이 당신의 참다운 미래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현재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이 살아 계셔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시면, 우리는 그분의 일을 실천합니다. 사람들의 불행을 퇴치하고, 인명을 소중히 생각하는 노력을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죄를 용서하면서 그것이 하느님의 일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다교의 실세들과의 갈등으로 당신의 죽음이 다가 올 때도 당신 힘으로 살아남을 궁리를 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빌었습니다. “아버지,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마르 14,36). 예수님은 하느님이 주실 미래만을 희망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자기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사람을 오래 살려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참다운 미래는 하느님 안에 있습니다. 하느님이 죽음의 휘장을 넘어서 그분을 살려 놓으셨다는 것이 예수의 부활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의 일만이 우리가 사는 세상과 시간을 넘어서 존속할 것입니다. 푸르고 싱싱하던 대자연에 단풍이 아름답게 들었습니다. 이미 길에는 낙엽이 떨어져 우리 발밑에 밟히고 있습니다. 앙상하고 스산한 겨울의 풍경이 곧 온다고 예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푸르렀다가 단풍이 들고, 또 떨어져 이 세상과 결별한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버티어 주던 자존심, 명예, 지위, 재물도 우리의 미래를 보장해 주지 못하는 잠시의 푸름이고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사생결단하고 덤비는 일이, 우리 자신을 지키고 보존하고 높이기 위함이라면, 하느님의 미래는 우리 안에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면, 우리 자신과 주변을 보는 우리의 시선에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조금 더 선하고, 조금 더 관대하고, 조금 더 자비롭게 주변을 보는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변한 우리의 삶입니다. 그것이 우리 가운데 있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당신들 가운데 있습니다.”(루가 17,21). 하느님이 동기가 되어 우리의 삶이 변하면,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만이 우리 자신의 주인으로 행세하면, 하느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계획하는 우리의 미래만이 우리 앞에 있다면,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축복이나 하면서 하늘 멀리에 계시지 않습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힘을 빌려서 우리가 하는 일이 더 잘 되게 하는 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우리의 길을 바꾸라고 권합니다. 우리의 미래를 우리가 보장하겠다는 환상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미래를 향한 길로 들어서라고 권합니다. 하느님보다 우리 자신을 더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은 실천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인간의 삶은 모험입니다. 남녀가 만나서 하나의 가정을 이루는 것도 모험입니다. 자녀를 낳아서 키우는 일도 아무런 보장이 없는 모험입니다.
인간에게 소중한 일들은 이렇게 보장되지 않은 것들입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가 헌신하지 않고, 우리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면 반드시 실패하는 모험입니다. 그리스도 신앙도 하나의 모험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과 함께 하는 모험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삶과 죽음으로 이미 하신 모험입니다. 그분의 부활은 그 모험의 결과가 하느님의 생명과 환희에로 우리를 인도한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하느님의 미래를 택한 사람은 하느님의 현재를 삽니다. 선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시선으로 현재의 자기 주변을 봅니다. 그리고 그 시선 안에 들어온 현실이 요구하는 바를 실천합니다. 선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이 우리의 삶과 우리의 환경에서 하실 일을 생각하고 실천합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376D0355009A8941D)
하느님 사랑의 결정적 승리
-조욱현 신부 -
오늘 전례는 영광 중에 오실 그리스도의 마지막 ‘오심’, 즉 야훼의 날, 세상의 마지막 날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분의 오심은 하느님의 사랑의 힘의 결정적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복음: 루카 21,5-19: 너희가 참고 견디면 생명을 얻을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 성전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보고 놀라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예루살렘 성전은 너무나 아름답고 웅장하여 “예루살렘의 찬란한 모습을 다 보지 못한 사람은 아름다운 것을 보았다고 할 수 없고, 그 성소의 눈부신 장식을 보지 못한 사람은 예루살렘이라는 도시의 매력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신다. “지금 너희가 성전을 바라보고 있지만 저 돌들이 어느 하나도 자리에 그대로 얹혀있지 못하고 다 무너지고 말날이 올 것이다”(6절).
그래서 제자들이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나고, 그 ‘징조’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7절), 예수께서는 광신적인 헛된 소리를 조심하라고 하신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을 내세우며 나타나서 ‘내가 바로 그리스도다!’ 혹은 ‘때가 왔다!’하고 떠들더라도 그들을 따라가지 말라”(8절). 오류를 믿게끔 하는 것은 기만이다. 모든 것이 복음인양 떠들어대는 것은 사기이다. !공부 중요!
그러나 그러한 징조를, 위기를 의식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믿는 마음으로 차분하게 기다리는 것이 중요함을 말씀하신다. 마지막 때의 모든 불길한 징조 가운데서 한 가지 독특한 사실은 그 때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박해를 당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바로 이 때가 복음을 ‘증언’할 때라고 하신다.
그리스도인은 참으로 종말론적 삶을 살면 살수록 그만큼 강해질 수 있다. “그 때야말로 너희가 나의 복음을 증언할 때이다. 이 말을 명심하여라. 그 때 어떻게 항변할까하고 미리 걱정하지 말라. 너희의 적수들이 아무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주겠다...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겠지만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참고 견디면 생명을 얻을 것이다”(13-19절).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전쟁과 박해 속에서도 항상 희망을 가져야 한다. 그 때에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참으로 종말론적 기다림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하느님 나라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 건설하기 위해 그들의 불행과 고뇌와 모순에 철저히 파고 들어가 함께 하는 것이다. 그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마지막 때에야 충만히 완성된다는 것을 굳게 믿고 우리 신앙인들이 현재의 삶에 충실해야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현세의 삶의 순간들은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는 구원을 체험하는 구체적인 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 그리고 누룩의 역할을 다 해야 한다.
제2독서: 2데살 3,7-12: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마라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이 오심이 가까웠다고 이 지상의 현실을 멀리하며 계속 불안감 속에서 게으른 생활을 하지 않도록 사람들에게,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10절)고 말하고 있다. 바오로 사도는 이 말을 당시의 신자들에게 자주 하였으며, 자신이 그 모범을 보였다. 정말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기다리는 자세는 모든 사람들이 더욱 그분의 사랑에 마음의 문을 활짝 열 수 있도록 이 세상의 일에 보다 열렬히 참여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자신이 처한 위치와 상황에서 자신이 맡은 책임을 항상 성실히 수행하기를 원하신다. 그러한 삶 속에서 언제나 다가오시는 주님을 그 마음에 맞아드릴 수 있기를 바라신다. 우리는 이러한 깨어있는 삶 속에서 언제나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은총을 구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자.............◆
![](https://t1.daumcdn.net/cfile/blog/1376D0355009A8941D)
교회의 생명력은 평신도에게 있다.
-유영봉 몬시뇰 신부-
묵상길잡이 : 교회의 근본사명은 ?세상을 복음화 하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의 이 사명은 세상 구석구석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평신도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평신도야말로 바로 그 삶의 현장에서 세상을 비출 수 있고, 진리의 소금으로 부패를 막을 수 있다.
1. 누가 평신도인가?
오늘은 평신도 주일이다. 한국교회는 1970년부터 연중 마지막 주일을 ‘평신도 주일’로 지내고 있다. 이 주일의 의의는 세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평신도들의 적극적인 참여 없이는 교회가 그 본연의 사명을 다할 수 없음을 다시 한번 되새기는데 있다.
그런데 ‘평신도’는 누구인가?
바티칸 2차 공의회는 “평신도는 신품(神品)과 교회에서 인정하는 수도 신분에 속하는 이들 이외의 모든 그리스도 신자를 말한다.”(교회헌장,31항)고 그 신분을 규정하고 있다.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는 세례를 받은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면에서는 꼭 같다. 다만 교회 안에서 그 맡은 바 역할이 다를 뿐이다.
일찍이 사도 바오로는 교회의 신비를 설명하시면서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지만 그 지체가 모두 같은 기능을 하지 않듯이, 우리도 수가 많지만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을 이루면서 서로서로 지체가 됩니다.” (로마12,4-5)하셨다. 사실 평신도, 수도자, 성직자는 같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며 맡은바 고유한 사명을 다함으로 교회를 완전하게 해야 한다.
그런데 교회의 현실은 어떤가?
많은 평신도들은 “신부님 수녀님이 계신데 우리가 뭘 어떻게 합니까?” 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런 자세를 취하는 그 밑바탕에는 ‘평신도는 신앙심이 부족해서 세속을 끊지 못하여 수도자도 성직자도 못된 변변치 못한 신자’ 라는 인식이 깔려있는 지도 모른다. 얼핏 보면 이런 태도는 참으로 겸손한 자세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은 “평신도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병신도(病身徒)이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런 생각과 태도야말로 깨끗이 떨쳐버려야 할 낡은 생각인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 스스로 평신도로서 마땅히 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소홀히 하고 무책임하게 살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평신도는 세례로써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고, 하느님의 백성 중에 들고, 그들 나름대로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예언직과 왕직에 참여하며, 교회와 세계 안에서 그리스도 백성 전체의 사명을 각기 분수대로 수행하는 신도들을 말한다”(교회헌장,31항)고 평신도의 직분과 사명을 명시하였다.
2.세속에 살면서 세상을 성화(聖化)하는 평신도.
만일 모든 하느님의 백성이 성직자나 수도자가 된다면, 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에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명은 누가 수행할 것인가?
수도자는 청빈과 정결과 순명의 서원을 통해 현세적 가치들을 뛰어넘어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는 삶을 증거 한다. 그리고 성직자는 말씀의 선포와 성무 집행을 통해 신앙의 씨를 뿌리며 신앙인들을 키우고,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 사이의 다리가 되어 준다.
평신도들은 세속에 그 삶의 바탕을 두고 있는 이들이다. 세상 도처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빛으로 세상을 비추며, 세상의 부패를 막고 새롭게 변화시켜야 할 사명을 구체적으로 실행할 사람들은 바로 평신도들이다. 집을 짓는데 설계도 중요하고 기둥도 중요하지만, 벽돌로 모든 공간을 쌓아 막지 않으면 건물은 완성될 수 없다. 평신도는 바로 건물을 완성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수많은 벽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성직자 수도자가 평신도 가정에서 나온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3. 한국교회의 빛나는 전통
한국교회는 참으로 평신도들이 교회를 세우고 가꾸고 지켜온 빛나는 전통을 지니고 있다. 1784년 이승훈이 영세하고 1836년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할 때까지 두 분의 중국 사제가 잠시 활동했을 뿐, 50여년을 평신도들의 열성적인 활동으로 박해 중에 교회를 이끌고 가꾸었다. 유요한과 이 누갈다 동정부부 순교자의 생애는 우리에게 특별한 감동을 준다.
당시 사회상으로 볼 때 어려운 사회여건 속에서도 맹렬한 활동을 한 여회장 강완숙(골롬바), 선교사를 모시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5천리 북경 길을 아홉 차례나 왕래한 정하상(바오로)성인, 16세에 장원급제하여 임금과 뭇 사람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지만, 하느님을 알고는 세상의 명예와 영광을 쓰레기처럼 버린 황사영(알렉산델) 등 우리 선조 평신도들은 참으로 위대하였다.
교회가 조직이나 구조적으로 아무리 거대하다 하더라도 깨어 활동하는 평신도들이 없다면 교회는 더 이상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없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느님의 백성인 내가 바로 교회이다.”는 자각이 그 어느 때 보다 절실한 때이다. .............◆
![](https://t1.daumcdn.net/cfile/blog/1376D0355009A8941D)
부활을 믿는 사람
- 허영엽 신부-
임종을 앞두고 한 할머니는 자식들에게 자신이 녹음한 테이프를 건네주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들들은 어머니가 주신 테이프를 들었다. 그 테이프 안에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그분은 오랫동안 직접 복음서를 읽어서 녹음했다. 그 할머니는 자녀들에게 좀 더 가치 있는 것을 남겨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분은 세상에 남은 자식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녀들은 떠듬거리며 성경 말씀을 읽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어머니가 왜 그 테이프를 유산으로 남겨 주셨는지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오늘 복음(루카 21,5-19)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대해 말씀하신다. 세상 종말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결론은 한 마디로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다. 11월은 위령성월로 죽은 모든 이들의 영혼을 특별히 기억하며 보내는 은총의 시기이다. 교회는 이 기간 동안 우리보다 세상을 먼저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함과 동시에 죽음을 자주 묵상하도록 권고한다.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분명히 슬픈 일이다. 그러나 역설적이지만 우리는 죽음을 통해 오히려 삶의 가치를 더 깊이 깨달을 수 있다. 어둠 속에서 빛이 더 빛나고 분명해지는 이치이다. 세상 종말과 심판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 하느님의 몫이다. 그래서 우리는 미래를 걱정하지 말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겨야 한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최선을 다해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가는 것이다.
예수님 시대에 유다인들은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메시아를 고대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다인들만을 위한 구세주가 아니셨다. 또한 유다인의 기대처럼 예수님은 결코 세속적인 왕이 아니셨다. 예수님은 스스로 고난의 잔을 받아 마시고 죄인들의 발을 씻겨 주셨던 겸손의 왕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예수님에게 열광했던 유다인들이 실망해서 예수님을 배척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신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하느님의 구원을 이루셨다. 주님의 부활은 정의가 불의를, 생명이 죽음을, 선이 악을 결국 이긴다는 것을 보여 준 사건이다. 이처럼 죽음을 넘어서는 믿음이 바로 부활 신앙이다. 부활신앙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다.
주님은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7-19).
![](https://t1.daumcdn.net/cfile/blog/1376D0355009A8941D)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정 세라피아 수녀-
예루살렘과 성전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현존이 머무르는 곳이며 유다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구심점 역할을 하는 중요한 장소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성인 남자들은 일 년에 세 번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가야 했습니다(탈출 23,14; 34,23; 신명 16,16).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2,41)고 루카 복음사가는 전합니다. 예수님은 해마다 명절을 지내러 예루살렘에 오르내리시면서 성전이 변질되어 가는 모습과 그 안에서 빚어지는 죄악을 보셨고, 어느 날은 성전이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고 격노하시며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셨습니다(루카 19,45-46).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후 예수님은 줄곧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고 그분의 말씀을 선포하는 성전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지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성전이 참된 예배를 하는 장소로 제 구실을 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웅장하고 화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미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루카 19,41-44).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 군대에 의해 완전히 파괴당합니다만 예수님은 성전 파괴의 이유가 ‘하느님께서 찾아오신 때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19,44)이라 하셨습니다. 곧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였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솔로몬이 다윗의 유언대로 첫 번째 성전을 지어 봉헌하였을 때 하느님께서는 “나는 네 기도를 듣고 이곳을 나의 것으로 선택하여 제사의 집으로 삼았다.”(2역대 7,12)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너희 마음이 돌아서서, 내가 너희 앞에 내놓은 계명과 규정을 저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가서 그들을 섬기고 경배하면 나는 내가 준 땅에서 너희를 뽑아버리고, 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별한 이 집을 내 앞에서 내버려 모든 민족들 사이에서 속담거리와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리겠다.”(2역대 7,19-20) 예루살렘 성전은 이민족의 침입으로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성전이 파괴된 근본 원인은 하느님을 저버리고 우상을 섬긴 탓이었기에 예수님도 이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시카르에 있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예배를 드리는 장소로 어디가 맞는지 예수께 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산(그리짐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요한 4,21)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습니다(마태 27,51). 또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는 말씀을 당신 부활로 성취하셨습니다. 마침내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제는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요한 4,23)가 오게 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사실 집을 인간이 짓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하늘이 당신의 옥좌며 땅이 발판인 그분은 어디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표현대로 이제는 주님의 살과 피를 모시는 우리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전’(2코린 6,16)입니다. 이제 우리가 영과 진리 안에서 하느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내가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드리는 그곳은 하느님께 산 예물을 드리는 제단이 됩니다.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치는 거룩한 사제단이 되십시오.”(1베드 2,5)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루카 21,7) 예수님은 여기에 대해 직접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당부의 말씀만 하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세상 종말설을 운운하며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이들이 있습니다.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신흥 사이비 종교에 빠지거나 근래에 일어나고 있는 온갖 영성 운동에 심취하여 신앙을 저버리기도 합니다. 기후 변화로 인한 자연재해, 희귀병의 출현, 전쟁과 테러 위험 등을 생각하면 참 무서운 세상에 살고 있고 이러다 세상의 종말이 올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지난 봄 황사가 심해 한낮인데도 어두워진 것을 보고는 탈출기에 나오는 ‘어둠의 재앙’이 떠올랐습니다. 죽음의 문화가 만연한 이 시대에 교회는 원칙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한 예로써 낙태와 피임을 반대하고, 배아 줄기세포 연구를 반대합니다. 시대의 흐름에 역류한다고 교회를 비난하거나 반발하는 것이 또 하나의 박해라면 우리는 교회의 신념에 동참함으로써 피 흘림 없는 순교를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형리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조리 있게 변론할 수 있도록 작용하신 성령의 역사를 우리는 보았습니다. 그 성령께서 지금도 양심을 지키며 제대로 살려고 애쓰는 모든 사람들 안에 작용하심을 믿는다면 좀 더 소신 있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이 되고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을 바치는 것은 이러한 일련의 것들로서 이루어집니다.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처럼 차리고’(묵시 21,2) 있는 천상 새 예루살렘 성전을 갈망하며, 항구하게 십자가의 길을 가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야겠습니다. “보라, 내가 곧 간다. 나의 상도 가져가서 각 사람에게 자기 행실대로 갚아주겠다.”(묵시 22,12)
오직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하여 -박상대신부-
떨어지는 낙엽의 계절과 더불어 교회의 전례력도 이제 그 막바지에 이르렀다. 오늘 주일과 다음 주일인 그리스도의 왕 대축일을 지내고 나면, 교회의 전례력은 올해에 이별을 고하고 대림절의 시작과 함께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할 것이다. 이렇게 한 해의 마지막에 다다른 교회의 전례력에 발맞추어 평일 미사와 주일 미사에서 선포되는 독서와 복음 말씀은 종말론적이고 묵시(?示) 문학적인 성격을 아주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종말과 묵시적 성격이란 세상이 이제 그 마지막에 직면하여 드러내거나 맞이하게 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을 말한다. 계시(啓示, revelation)라는 개념이 ‘시작’과 관련하여 새로운 것과 감추어져 있던 것이 드러난 것이라면, ‘종말’과 ‘묵시’와 관련하여 드러나거나 맞이하게 될 일들을 대표하는 개념은 현현(顯現, epiphany)과 폭로(暴露, apocalypse)라는 단어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세상의 종말을 선언하는 대변화, 죽음과 부활, 그리스도의 재림, 생자(生者)와 사자(死者)에 대한 그분의 심판, 그리고 종말 후의 내세(來世)에 관한 일 등이다.
성서(聖書)상 종말과 묵시문학적 유형으로는 구약의 다니엘서(BC 160년경)와 신약의 요한묵시록(AD 100년경)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구약시대 말기에 편집된 묵시문학적 작품들은 ‘에티오피아어 에녹서’, ‘희년서’, ‘시빌라의 신탁’, ‘열두 족장의 유언’, ‘모세의 승천기’, ‘솔로몬의 시편’, ‘제2 에즈라서’, ‘시리아의 바룩서’ 등 그 규모가 실로 방대하다. 묵시문학의 발생원인은 이스라엘이 외세의 지속적인 침략에 의해 주권(主權)을 잃고(BC 721년 북왕조 멸망, 587년 남왕조 멸망과 유배생활, 333년부터 헬레니즘의 지배, 63년부터 로마제국의 지배) 의기소침한 가운데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주권회복을 야훼 하느님이나 그분의 사자(使者) 또는 메시아에 의탁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묵시문학은 천지창조부터 세상종말까지의 환란과 난세의 역사를 다루면서 종말사건과 내세를 통한 개벽(開闢)과 역전(逆轉)을 꿈꾸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염원하던 개벽과 역전은 없었고, 한 가닥 독립전쟁(AD 66-70)의 시도마저 여지없이 실패로 돌아갔으며, 그 대가로 70년 8월 29일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고 이스라엘 자존심의 상징인 성전까지 불타고 말았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예수께서도 공생활 마지막 시점에서 세상종말과 관련하여 묵시문학적 가르침을 주셨다.(마태 24,1-25,46; 마르 13,1-37; 루가 21,5-36) 그러나 예수님의 종말교훈은 이스라엘의 염원이나 묵시문학자들의 생각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것은 구약의 묵시문학적 염원과 예언의 성취자로 예수께서 이미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도래는 단지 ‘사람의 눈으로 오는 것을 볼 수 없을 뿐’(루가 17,20)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왔다는 증거이다. 이렇게 임재(臨在)하여 있는 하느님 나라는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끝나는 것도, 가짜 그리스도의 출현이나 반란과 전쟁, 기근과 전염병이나 지진과 우주적 징조로도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참다운 그리스도이신 인자(人子)의 재림으로 오히려 완성될 것이다. 그 날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임재하여 있는 하느님 나라를 무너뜨리려는 온갖 미움과 거짓, 박해와 환란, 고문과 죽음 속에서도 믿음과 용기를 잃지 않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다. 이렇게 끝까지 참고 견디어 내는 사람은 예수를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리신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이다. 결국 우리는 오직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하여 자신의 삶이 다하는 날까지 노력할 수 있기를 바랄뿐이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