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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문화유산연구원》에서 <탁본 원문>을 싣고 《한국고전번역원》에 실려있는 《송자대전》에서 《표점정리 원문》을 실었습니다. <번역문>은 네이버 블로그 《개미실 사랑방》에서 옮겼습니다.
중간에 블로그 《개미실 사랑방》에서 옮긴 사진 외는 2017년 8월 28일 직접 찍은 사진입니다.
실지로 이 집안 묘역을 보면 왕릉에 온 기분이고 《이상급신도비》도 생각보다 큽니다.
현판 글씨는 초서(草書)로 쓴 충렬각(忠烈閣)이다.
재실 강의재(剛毅齋) 원경(遠景).
이상급 신도비와 비문.
네이버 블로그 《개미실 사랑방》에서 옮김.
재실 강의재 모습.
문인석과 동자석.
돌이끼가 자라 고풍(古風)스런 모습이다.
증숙부인 전의 이씨지묘
장남 이련의 비석. 부인이 운명했을 때 상심하는 마음이 심해 요절했다고 합니다. 예전에 어떤 분이 이 비석이 묘역과 떨어진 곳에 세워진 것은 당파(黨波)가 달라서였다는 엉뚱한 얘기를 쓴 걸 본 기억이 있습니다. 묘역을 정리하면서 장남 이련의 비만 따로 언덕위에 세웠을 겁니다.
이 묘역에서 누가 빛나야 하는걸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겁니다. 아들 이련이 아니라 아버지 이상급이 빛나야 하니 옮겼다고 봐야 합니다. 도랑 건너에 있다고 하는데, 조그마한 물도랑입니다. 위에서 장남 이련의 묘는 벽진 이씨 묘역에 있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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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문 탁본 조사보고서(2019)』 김영관
贈吏曹判書行兵曹參知李公神道碑銘
有朙朝鮮國 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 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 世子左賓客五衛都摠府都捴管行通政大夫兵曹叅知李公神道碑銘幷序
大匡輔國崇禄大夫議政府右議政宋時烈 撰
玄孫男進士 挺相 篆
進士 挺樸 書
余旣爲李忠肅公尙吉撰其大碑之文矣今又以吾友野叟之托又銘叅知公墓公忠肅之弟也一門之內何其多賢也噫世道衰矣若而數公者何處得來公諱尙伋 字思彥羅季有悤ㅡ言佐麗祖有功拜星州將軍其後世遂爲星州人我朝約東有文武全才諡平靖以淸白名載史官曰佐郞紹元叅奉有蕃郡守碩明敎官 贈贊成 喜善是公高曾祖考贊成公娶都事丁煥女擧四男公其季也早孤力學年三十五以進士登丙午文科入槐院爲正字著作博士以刑曹佐郞充書狀官賀 天申于 帝京未還道拜平安都事盖賊臣爾瞻䓁惡其異己爲枳淸塗也未幾病免由刑曹正郞出爲豐基郡守時隣郡有賊黨破械逃死朝廷以爵賞諸捕賊者仍責金視 其爵有差公恥之上功減其實故得免焉後凶人鄭造爲按使公恥爲屬官卽解歸忠州之別墅耕釣以爲樂諸生挾書請業者甚衆贊畫使李公時發 啓請自從有 醜而貴者來請毋行曰欲將以淸選見處公微哂曰非所敢也時盖奸黨稔惡至廢 母后彝倫晦剝公与忠肅公皆不樂仕進以守素志焉 仁祖反正自諸司官出 爲安東大都護府使諸公 啓留以爲宜寘諫官外補非所當遂拜掌令執義謇然有直臣風采然不悅者稍多矣李适反 上將南幸議者謂安東或將爲趙氏晉陽 求今之尹鐸無如李某於是公以尙衣正出盡除昏朝時逋滯其中豪右有僥倖者公曰如此則 上惠偏於奸猾遂一切徵督以蠲田租之半又與上司爭其是非上 司不能堪遂啓 聞公就廷尉問論遞叙爲寺正遷司諫論 世子嘉禮當求諸莘摯正門不宜使逆家至親叅錯於采擇之列時 上意深有所屬遂觸忤甚重亟 命削官賴大臣力爭只遞免久後因虜變有分閫者 啓爲從事又從賑恤使募粟湖南還朝亦低佪冗散而已已出補端川郡郡出銀貨公曰此利窟也官人少有不 謹則身名可惜遂洗手奉公歲貢外錙銖之剩悉用以代民繇軍丁之逃故者前時皆責於隣族公又縮節私冗以所餘充免其侵擾又北荒不尙文學公爲延其稍秀 者爲之師以敎其人月朔必親謁 夫子廟仍與諸生講論未幾有以文藝偕計者矣其時按使卽公司諫時所指之人固嘗嗛公而亦心服之狀 聞其㝡公去後李 公景曾以 御史至民攔道追顯公德繼爲延安府使治績一如端川時又以爲延於頃歲能以孤城捍禦倭寇况今外憂方殷不可無陰雨之備大修戰具器械整緻 方伯上其事 上嘉賜表裏公有素所鄙者爲亞使公微諷以愧其心其人慚怒謝歸公亦自免去拜輔德 世子知公諳練時務每講訖特問公以軍國重事其所陳 達未嘗不虛心傾聽乙亥 仁烈王后薨公以 國葬都廳論勩陞通政兵曹叅知時 國家已有被兵之釁公每以治軍繕兵修城池選將帥爲言識者韙之而時不 能用及 大駕避寇于南漢公執靮從難觸冒風雪者四十餘日疾病大作一息僅存而惟傷痛 國事日夜涕泣而已 大駕幸三田公痛哭曰和議之害一至於此 忠肅公陪 廟社入江都公聞其陷敗不勝求裒之情遂力疾西行遇零賊被侵犯遂以丁丑二月三日卒于道上春秋六十六葬忠州黃金谷負亥之原公自幼敦確 不苟年未成童伯氏與忠肅公聯袂取苐而歸觀者塞閭公獨閉戶讀書贊成公異而問之曰異日吾自爲之何徒觀彼爲聞者知其終有成也事忠肅公如事父平生 不事生業故無宅於京旣老愈不忍相離遂謀小築於忠肅公側近朝莫相對搢紳傳爲美談自入太學不與人妄交所友皆一時名勝及其立朝也適當羣凶當路勢 焰薰灼而公遇事直前不以禍福有所撓屈其在豐基隣境有爾瞻之黨欲媾歡於爾瞻坐而緩頰公以微辭諷斥深切聞者吐舌有言鄭造有側出女甚好公盍求之 以備掃灑公正色曰吾何以造女爲乎士夫忍濡跡其門乎及際 聖明尤棘棘不阿無分寸私往往有陽若推重而陰實擠排者其終始蹭蹬不獨以逆鱗之嬰也故 前後歴三十七官而只三爲諫官一入 胄筵雖有抱負惡能以展布哉惟屢臨州縣盡其心力常以懷小民抑武斷爲務絶無違道干譽之意猾吏倖民所至側目而 其冰檗之操無可指言故終不敢瑕玷乃反有追思勒頌者㝡於義利之辨言議峻截丙子虜旣僭號洪公翼漢極以大義攻斥和事擧世譁然非之而公主其議甚力 逮至圍城危迫則平日嘗爲正論者無不諱其前言而公所執彌厲不少沮挫盖其言曰與其苟生無寧義死豈神明感公忠憤終誘賊人之衷而俾遂其願耶忠肅公 與仙源金相國諸公效節於江都雖其死少異而其不汚於陸沈之世則仝矣盖公仲季棣萼聯芳而忠肅公慈祥和易與物無忤公固嘗師法而至於樸質堅確不顧 利害則忠肅公自以爲不及也難已 上追錄 扈從功 贈公大司憲後以子原從勳加 贈吏曹判書夫人亦 贈貞夫人夫人密陽朴氏僉樞胄之女常持畏愼 以承公意公守官內外終不以一毫貽累六親皆稱之男長堜夫人之歿以哀喪心未幾而夭次
(土寅)卽野叟登文苐嘗爲臺諫以言事不阿亦齟齬於世女適叅奉尹溟 擧庶子埵僉知坤武科培其季也堜二男志雄志傑皆司馬其長入仕(土寅)三男志述志道志逵三女適李晩成李昌齡兪正基余以孤童常事公以先友公嘗敎余曰乃 叔評事公嘗語余云吾輩須相戒切勿爲防納事吾不敢忘吾友言故未嘗有此䓁事防納盖形勢家牟利之名也噫此豈伊川所謂韓持國服義㝡不可及子路所謂 舊要不忘平生之言者耶亦可以見公之一端也銘曰 於戲惟公渾朴厚堅 如玉在璞誰見栗然 方不至劌泯如幽默 人曰夫公無有白黑 公自秉義展也邫直 在昏如矢矧在有道 不爲骫骳愛我者少 彼 趨而進我退而緩 揖讓名途愧彼巧宦 薇垣柏府我席靡暖 方州巖邑曁乎藩翰 湛盧快剸騏驥平步 奸豪喘汗穉耋舞蹈 莫年朱墨人爲公苦 公曰 噫歟此猶自效 秩祿稍陞時事罔極 卒成道殣命之不淑 雖云不淑其身則㓗 今此矜人生也匪樂 驅令供頓喫罵認喝 校之以公誰失誰得 與化爲 徒閟玆冥隧 奚慽奚憾公應自慰 矧惟家兒克繩風采 亦有孫曾文行不怠 是謂受祉天定不忒 我篆終始百世無泐 崇禎戊辰後二甲午 月 日立 善山金萬聖庶玄孫男挻樑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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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송자대전(宋子大全)
宋子大全卷一百六十六(166권)
碑
《參知 贈判書李公神道碑銘 幷序》
余旣爲李忠肅公尙吉。撰其大碑之文矣。今又以吾友野叟之託。又銘參知公墓。公忠肅之弟也。一門之內。何其多賢也。噫。世道衰矣。若而數公者。何處得來。公諱尙伋。字思彥。羅季有悤言佐麗祖有功。拜星州將軍。其後世遂爲星州人。我朝約東有文武全才。諡平靖。以淸白名載史官。曰佐郞紹元,參奉有蕃,郡守碩明,敎官 贈贊成喜善。是公高曾祖考。贊成公娶都事丁煥女。擧四男公其季也。早孤力學。年三十五。以進士登丙午文科。入槐院爲正字,著作博士。以刑曹佐郞。充書狀官。賀天申于 帝京。未還。道拜平安都事。蓋賊臣爾瞻等惡其異己。爲枳淸塗也。未幾病免。由刑曹正郞。出爲豐基郡守。時隣郡有賊黨破械逃死。朝廷以爵賞諸捕賊者。仍責金視其爵有差。公恥之。上功減其實。故得免焉。後凶人鄭造爲按使。公恥爲屬官。卽解歸忠州之別墅。耕釣以爲樂。諸生挾書請業者甚衆。贊畫使李公時發啓請自從。有醜而貴者來。請毋行曰。欲將以淸選見處。公微哂曰。非所敢也。時蓋奸黨稔惡。至廢 母后。彝倫晦剝公與忠肅公皆不樂仕進。以守素志焉。 仁祖反正。自諸司官。出爲安東大都護府使。諸公啓留以爲宜置諫官。外補非所當。遂拜掌令,執義。謇然有直臣風采。然不悅者稍多矣。李适反。 上將南幸。議者謂安東或將爲趙氏晉陽。求今之尹鐸。無如李某。於是公以尙衣正出。盡除昏朝時逋滯。其中豪右有僥倖者。公曰。如此則 上惠偏於奸猾。遂一切徵督。以蠲田租之半。又與上司爭其是非。上司不能堪。遂啓聞。公就廷尉問。論遞敍爲寺正。遷司諫。論 世子嘉禮。當求諸莘摯正門。不宜使逆家至親參錯於采擇之列。時 上意深有所屬。遂觸忤甚重。亟 命削官。賴大臣力爭。只遞免。久後因虜變。有分閫者啓爲從事。又從賑恤使。募粟湖南還朝。亦低徊宂散。而已出補端川郡。郡出銀貨。公曰此利窟也。官人少有不謹。則身名可惜。遂洗手奉公。歲貢外錙銖之賸。悉用以代民繇。軍丁之逃故者。前時皆責於隣族。公又縮節私宂。以所餘充免其侵擾。又北荒不尙文學。公爲延其稍秀者。爲之師以敎其人。月朔必親謁夫子廟。仍與諸生講論。未幾。有以文藝偕計者矣。其時按使。卽公司諫時所指之人。固嘗嗛公而亦心服之。狀聞其最。公去後。李公景曾以御史至。民闌道追顯公德。繼爲延安府使。治績一如端川時。又以爲延於頃歲。能以孤城捍禦倭寇。況今外憂方殷。不可無陰雨之備。大修戰具。器械整緻。方伯上其事。 上嘉賜表裏。公有素所鄙者爲亞使。公微諷以媿其心。其人慙怒謝歸。公亦自免去。拜輔德。 世子知公諳練時務。每講訖。特問公以軍國重事。其所陳達。未嘗不虛心傾聽。乙亥。 仁烈王后薨。公以國葬都廳論勩。陞通政兵曹參知。時國家已有被兵之釁。公每以治軍繕兵修城池選將帥爲言。識者韙之。而時不能用。及 大駕避寇于南漢。公執靮從難。觸冒風雪者。四十餘日。疾病大作。一息僅存。而惟傷痛國事。日夜涕泣而已。 大駕幸三田。公痛哭曰。和議之害。一至此哉。忠肅公陪 廟社入江都。公聞其陷敗。不勝求裒之情。遂力疾西行。遇零賊被侵犯。遂以丁丑二月三日。卒于道上。春秋六十六。葬忠州黃金谷負亥之原。公自幼敦確不苟。年未成童。伯氏與忠肅公聯袂取第而歸。觀者塞閭。公獨閉戶讀書。贊成公異而問之。曰異日吾自爲之。何徒觀彼爲。聞者知其終有成也。事忠肅公如事父。平生不事生業。故無宅於京。旣老。愈不忍相離。遂謀小築於忠肅公側近。朝暮相對。搢紳傳爲美談。自入太學。不與人妄交。所友皆一時名勝。及其立朝也。適當群凶當路。勢焰熏灼。而公遇事直前。不以禍福有所撓屈。其在豐基。隣境有爾瞻之黨。欲媾歡於爾瞻。坐而緩頰。公以微辭諷斥深切。聞者吐舌。有言鄭造有側出女甚好。公盍求之以備掃灑。公正色曰。吾何以造女爲乎。士夫忍濡迹其門乎。及際 聖明。尤棘棘不阿。無分寸私。往往有陽若推重而陰實擠排者。其終始蹭蹬。不獨以逆鱗之嬰也。故前後歷三十七官。而只三爲諫官。一入 胄筵。雖有抱負。惡能以展布哉。惟屢臨州縣。盡其心力。常以懷小民抑武斷爲務。絶無違道干譽之意。猾吏倖民。所至側目。而其氷檗之操。無可指言。故終不敢瑕玷。乃反有追思勒頌者。最於義理之辨。言議峻截。丙子。虜旣僭號。洪公翼漢極以大義攻斥和事。擧世譁然非之。而公主其議甚力。逮至圍城危迫。則平日嘗爲正論者。無不諱其前言。而公所執彌厲。不少沮挫。蓋其言曰。與其苟生。無寧義死。豈神明感公忠憤。終誘賊人之衷。而俾遂其願耶。忠肅公與仙源金相國諸公效節於江都。雖其死少異。而其不朽於陸沈之世則同矣。蓋公仲季棣萼聯芳。而忠肅公慈祥和易。與物無忤。公固嘗師法。而至於樸質堅確。不顧利害。則忠肅公自以爲不及也。難已。 上追錄扈從功。 贈公大司憲。後以子原從勳。加 贈吏曹判書。夫人亦 贈貞夫人。夫人密陽朴氏。僉樞胄之女。常持畏愼以承公意。公守官內外。終不以一毫貽累。六親皆稱之。男長堜。夫人之沒。以哀喪心。未幾而夭。次
(土寅)卽野叟。登文第。嘗爲臺諫。以言事不阿。亦齟齬於世。女適參奉尹溟擧。庶子埵僉知。坤武科。培其季也。堜二男志雄,志傑皆司馬。其長入仕。(土寅)三男志述,志道,志逵。三女適李晩成,李昌齡,兪正基。余以孤童。常事公以先友。公嘗敎余曰。乃叔評事公嘗語余云。吾輩須相戒。切勿爲防納事。吾不敢忘吾友言。故未嘗有此等事。防納蓋形勢家牟利之名也。噫。此豈伊川所謂韓持國服義最不可及。子路所謂舊要不忘平生之言者耶。亦可以見公之一端也。銘曰。
於戲惟公。渾朴厚堅。如玉在璞。誰見栗然。方不至劌。泯如幽默。人曰夫公。無有黑白。公自秉義。展也邦直。在昏如矢。矧在有道。不爲骳骩。愛我者少。彼趨而進。我退而緩。揖讓名途。愧彼巧宦。薇垣柏府。我席靡煖。方州巖邑。曁乎藩翰。湛盧快剸。騏驥平步。奸豪喘汗。稚耋舞蹈。暮年朱墨。人爲公苦。公曰噫歟。此猶自效。秩祿稍陞。時事罔極。卒成道殣。命之不淑。雖云不淑。其身則潔。今此矜人。生也匪樂。驅令供頓。喫罵訒喝。校之以公。誰失誰得。與化爲徒。閟玆冥隧。奚戚奚憾。公應自慰。矧惟家兒。克繩風采。亦有孫曾。文行不怠。是謂受祉。天定不忒。我篆終始。百世無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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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송자대전 제166권 / 비(碑)
《참지 증 판서 이공 신도비명 병서 (參知贈判書李公神道碑銘 幷序)》
내가 이미 이충숙공(李忠肅公) 상길(尙吉)을 위하여 그 대비(大碑)의 글을 지었는데, 이제 또 내 친구 야수(野叟: 이인(李(土寅)의 호)의 부탁으로 참지공(參知公)의 묘갈명을 짓게 되었다. 공은 충숙공의 아우이니, 한 집안 안에 어쩌면 이리도 현인이 많은가! 아, 세상의 도리가 쇠퇴하였으니, 이 몇 분과 같은 이들을 어디서 얻어올 수 있겠는가.
공의 휘(諱)는 상급(尙伋)이고, 자(字)는 사언(思彥)이다. 나말(羅末)에 총(悤)이라는 분이 고려 태조를 보좌하여 공을 세워 성주장군(星州將軍)에 임명되었고, 그 후세가 마침내 성주 사람(星州人)이 되었다. 우리 조정 약동(約東)에 문무를 겸전하여 평정(平靖)이라는 시호를 받고 청백함으로 사관의 기록에 남은 이가 있었는데, 좌랑 소원(紹元), 참봉 유번(有蕃), 군수 석명(碩明), 교관으로 증 찬성(贈贊成)에 추증된 희선(喜善)이 있으니, 이분들이 공의 고조·증조·조부·부친이시다. 찬성공이 도사(都事) 정환(丁煥)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을 두었는데 공이 그 막내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힘써 학문에 힘써 35세에 진사로서 병오년(1606) 문과에 급제하였다. 승문원(槐院)에 들어가지 못하고 정자, 저작, 박사를 거쳐 형조좌랑으로서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황제의 탄신일을 축하하러 제경(帝京)에 갔다가 돌아오기 전에 길에서 평안도사(平安都事)에 임명되었다. 대개 적신(賊臣) 이이첨(李爾瞻) 등이 공이 자신들과 의견이 다른 것을 미워하여 청요직을 막으려 한 것이다. 얼마 뒤 병으로 사직하였다가 형조정랑을 거쳐 풍기군수(豐基郡守)로 나갔다. 이때 인접한 군에 적당(賊黨)이 옥쇄를 부수고 도망친 일이 있었는데, 조정에서 도적을 잡은 자들에게 벼슬과 상을 주고, 그에 따라 관작의 차등에 맞추어 돈을 거두게 하였다. 공은 이를 부끄럽게 여겨 공적을 줄여 바쳤으므로 면할 수 있었다.
후에 흉인 정조(鄭造)가 안찰사(按使)가 되자, 공은 그의 속관이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즉시 관직을 그만두고 충주(忠州)의 별장으로 돌아가 농사짓고 낚시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여러 학생들이 책을 안고 찾아와 배우기를 청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찬화사(贊畫使) 이시발(李時發) 공이 상소하여 공을 자신을 따르게 해달라고 청하였는데, 못생겼으나 귀한 자가 찾아와 가기를 청하지 말라고 하며 "장차 청요직으로 대우하겠다"라고 하자, 공이 미소를 지으며 "제가 감당할 바가 아닙니다"라 하였다.
이때 간당(奸黨)이 악행을 쌓아 인목대비를 폐위하는 데까지 이르러 이륜이 어두워지고 깎여 나가자, 공은 충숙공과 함께 모두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고 본래의 뜻을 지켰다.
인조반정 후 여러 관서의 관직을 거쳐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로 나갔다. 여러 대신들이 상소를 올려 언관(諫官)으로 두는 것이 마땅하며 외직으로 보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하여 마침내 장령(掌令), 집의(執義)에 임명되었으니, 강직한 직신의 풍채가 있었다. 그러나 기뻐하지 않는 자들이 다소 많았다.
이괄의 난(李适之亂) 때 상(上)이 남쪽으로 피란하려 하자, 논의하는 자들이 "안동은 혹 조씨의 진양(晉陽)이 될 수 있으니, 오늘날의 윤탁(尹鐸) 같은 이를 구한다면 이 아무개만 한 이가 없다"라고 하였다. 이에 공이 상의원정(尙衣正)으로서 나가 혼란했던 조정 때의 미납된 세금을 모두 탕감해 주었는데, 그중 호강한 자들 가운데 요행을 바라는 자가 있자 공이 "이와 같이 하면 임금의 은혜가 간교한 자들에게만 편중된다" 하고 마침내 일체 독촉하여 징수함으로써 전조(田租)의 절반을 감면해 주었다. 또 상사(上司)와 그 옳고 그름을 다투었는데, 상사가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조정에 보고하였다. 공은 국문(廷尉)을 받고 파직되었다가 다시 서용되어 사정(寺正)이 되고 사간(司諫)으로 옮겼다.
세자의 가례(嘉禮)를 논할 때, 마땅히 좋은 가문에서 구해야지 역적 집안의 지친(至親)을 간택하는 부류에 섞이게 해서는 안 된다고 논하였다. 이때 임금의 뜻이 깊이 쏠린 바가 있어 마침내 크게 노여움을 사 노골적으로 관직을 깎으라 명령하였는데, 대신들이 힘껏 다툰 덕분에 파직되는 데 그쳤다.
오랜 후 오랑캐의 난(병자호란 전의 조짐)으로 진을 나누어 지키는 자가 공을 종사관으로 삼기를 청하였고, 또 진휼사(賑恤使)를 따라 호남에서 쌀을 모아 조정으로 돌아왔으나 역시 시골에서 머물러 한직에 있었을 뿐이다. 나아가 단천군수(端川郡守)로 보임되었는데, 그 고을은 은(銀)이 나는 곳이었다. 공이 "이곳은 이익이 모이는 구덩이이다. 관원이 조금이라도 삼가지 않으면 몸과 이름이 아깝게 된다"라고 하고 마침내 손을 씻고 공무를 봉행하여, 해마다 바치는 공물 외에 지극히 적은 남은 돈까지 모두 백성의 요역을 대신하는 데 썼다. 군정(軍丁) 중 도망치거나 죽은 자들의 부담을 전에는 모두 이웃이나 친족에게 책망하였는데, 공이 또 사사로운 지출을 줄여 그 남은 것으로 충당하여 백성을 침해하고 괴롭히는 일을 면하게 해주었다. 또 북쪽 변방은 문학을 숭상하지 않았는데, 공이 조금 뛰어난 자들을 불러 모아 스승이 되어 가르쳤으며, 매월 초하룻날에는 반드시 친히 문묘에 하례하고 이어서 제생들과 강론하니, 얼마 지나지 않아 문예로 과거에 응시하는 자가 있게 되었다.
그때의 안찰사(按使)는 바로 공이 사간으로 있을 때 지적했던 사람이었는데, 본래 공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으나 역시 마음으로 복종하여 그 으뜸가는 성적을 상소로 올렸다. 공이 떠난 후 이경증(李景曾) 공이 어사로 와서 백성들이 길을 막고 다투어 공의 덕을 드러내었다.
이어 연안부사(延安府使)가 되었는데 치적이 단천 때와 한결같았다. 또 연안은 근래에 단 한 성으로 왜구를 막아낸 적이 있으니, 하물며 지금 외환이 한창 심한 때에 미리 대비가 없어서는 안 된다고 여겨, 전쟁 무기를 크게 수리하고 기계 장비를 정돈하였다. 관찰사(方伯)가 그 사실을 올리자 임금이 가히 여겨 표리를 하사하였다. 공이 평소 비루하게 여기던 자가 아사(亞使: 부사)가 되자, 공이 은근히 풍자하여 그 마음을 부끄럽게 하니, 그 사람이 부끄럽고 화가 나 인사를 하고 돌아갔으며, 공 역시 스스로 물러났다.
보덕(輔德)에 임명되니, 세자가 공이 시무(時務)에 숙련된 것을 알고 매번 강론이 끝나면 특별히 공에게 군국의 중요한 일을 물었는데, 그 아뢰는 바를 허심탄회하게倾听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을해년(1635) 인열왕후(仁烈王后)가 상을 당하자, 공이 국장 도청(都廳)으로서 공로가 논해져 통정대부 병조참지(兵曹參知)로 승진하였다. 이때 국가에 이미 전쟁의 조짐이 있었으므로 공은 매번 군사를 정비하고 무기를 수선하며 성지를 수축하고 장수를 선발하는 것으로 말씀하였는데, 식자들이 옳게 여겼으나 당시에는 쓰이지 못하였다.
대가가 오랑캐를 피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갔을 때, 공은 말굴레를 잡고 난을 따르며 바람과 눈보라를 무릅쓴 지 40여 일 만에 큰 병이 일어나 숨만 겨우 붙어 있으면서도 오직 나랏일을 슬퍼하여 밤낮으로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대가(大駕)가 삼전도(三田渡)로 행차하자 공이 통곡하며 "화의(和議)의 해가 이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하였다. 충숙공이 종묘사직의 위패를 모시고 강화도(江都)로 들어갔는데, 공은 그곳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 구하려는 마음(求裒之情)을 이기지 못하여 드디어 기력에 힘을 내어 서쪽으로 가다가, 흩어진 도적떼를 만나 침범을 당하여 마침내 정축년(1637) 2월 3일 길 위에서 사망하니, 연세는 66세였다. 충주 황금곡(黃金谷) 해좌(亥坐: 북북서)의 언덕에 묻혔다.
공은 어릴 때부터 호탕하고 진실하여 소홀히 하지 않았다. 나이 미처 십 대가 되기 전, 큰형과 충숙공이 함께 과거에 급제하여 돌아오니 구경하는 사람이 마을을 메웠으나, 공은 홀로 문을 닫고 책을 읽었다. 찬성공이 이상히 여겨 물으니 "훗날 내가 스스로 할 것인데 어찌 한갓 저들을 구경하겠습니까?" 하니, 들은 자들이 마침내 성취가 있을 줄 알았다.
충숙공 섬기기를 아버지 섬기듯 하였으며, 평생 사업(生業)을 돌보지 않아 서울에 집이 없었다. 이미 늙어서는 더욱 차마 서로 떨어지지 못하여 마침내 충숙공 근처에 작은 집을 지어 아침저녁으로 상대하니, 벼슬아치들이 아름다운 화제로 전하였다.
태학(성균관)에 들어간 이후로 사람들과 함부로 교유하지 않았으며, 벗한 바는 모두 당대의 명승들이었다. 조정에 서게 됨에 이르러 마침 여러 흉당들이 권세를 잡고 기세가 맹렬하였으나, 공은 일을 만나면 앞으로 직진하여 화복으로 굽히지 않았다. 풍기에 있을 때 이웃 경계에 이이첨의 당여가 있어 이이첨과 친해지고자 앉아서 공을 달랬으나, 공이 은근한 말로 풍자하고 깊이 배척하니 들은 자들이 혀를 내둘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정조(鄭造)에게 서출 딸이 매우 예쁜데 공은 어찌 구하여 청소나 하게 하지 않습니까?" 하자, 공이 굳은 표정으로 "내가 어찌 정조의 딸을 쓰겠는가? 선비가 차마 그 집 문에 발을 적시겠는가?" 하였다.
성명(聖明: 인조)을 만남에 이르러서는 더욱 곧아 아첨하지 않고 한 치의 사심도 없었다. 흔히 겉으로는 추대하고 존경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실로 밀어뜨리는 자들이 있어, 그 처음과 끝이 굴곡진 것은 비단 임금의 노여움을 건드렸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러므로 전후로 37개 관직을 거쳤으나 단지 세 번 언관이 되고 한번 주연(胄筵: 세자시강원)에 들어갔을 뿐이니, 비록 포부가 있었으나 어찌 펴볼 수 있었겠는가. 오직 여러 차례 주현(州縣)에 부임하여 그 마음과 힘을 다하였고, 항상 백성을 품어주고 무단(武斷)을 억제하는 것을 힘썼으며, 도리에 어긋나 명예를 구하는 뜻이 전혀 없었다. 간사한 아전과 요행을 바라는 백성들은 가는 곳마다 흘겨보았으나, 그 얼음과 숯처럼 맑은 지조는 지적하여 말할 수 있는 흠이 없었으므로 끝내 감히 흠집 내지 못하였고, 도리어 추모하여 송덕비를 세우는 자가 있었다.
특히 의리(義理)의 분별에 있어서는 언의(言議)가 준절(峻截)하였다. 병자년 오랑캐가 이미 칭제하자, 홍익한(洪翼漢) 공이 대의로써 화의의 일을 극력 배척하니 온 세상이 시끄럽게 그를 그르다 하였으나, 공은 그 논의를 매우 강력하게 주창하였다. 성이 둘러싸여 위급하고 박박해짐에 이르러서는 평소에 정론을 하던 자들이 모두 전의 말을 숨겼으나, 공이 고수한 바는 더욱 엄격하여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대개 그 말에 "구차하게 사느니 차라리 의롭게 죽겠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신명이 공의 충분(忠憤)에 감동하여 끝내 적들의 마음을 유도하여 그 소원을 이루게 하였겠는가. 충숙공과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상국 등 여러분이 강화도에서 절개를 바쳤으니, 비록 그 죽음은 조금 다르나 그 세상이 오랑캐에 물든 시대에 불후함은 마찬가지이다.
대개 공 형제의 우애가 아름다웠는데, 충숙공은 자애롭고 온화하며 자상하여 남과 다투지 않아 공이 일찍이 스승으로 삼아 법으로 삼았으나, 박질(樸質)하고 견확(堅確)하여 이해관계를 돌아보지 않는 데 이르러서는 충숙공 스스로 미치지 못한다고 여겼다.
난이 끝난 뒤 상(上)이 호종한 공을 추록하여 공에게 대사헌(大司憲)을 증직하고, 후에 아들의 원종공훈으로 인해 이조판서를 더 증직하였다. 부인 역시 정부인(貞夫人)으로 증직되었다.
부인은 밀양 박씨(密陽朴氏)로 첨추(僉樞) 주(胄)의 딸인데, 항상 두려워하고 삼가는 마음으로 공의 뜻을 받들어 공이 내외의 관직을 지킬 때 끝내 한 터럭만큼도 누를 끼치지 않아 육친이 모두 칭찬하였다.
장남은 연(堜)인데 부인의 상에 애통해하여 마음을 다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요절하였고, 다음 인(土寅)은 곧 야수(野叟)이니 문과에 급제하여 일찍이 대간이 되었으나 언사로 아첨하지 않아 역시 세상과 불화하였다. 딸은 참봉 윤명거(尹溟擧)에게 시집갔다. 서자는 도(埵)가 첨지이고, 곤(坤)은 무과이며, 배(培)가 그 막내이다.
연은 두 아들을 두었으니 지웅(志雄), 지걸(志傑)로 모두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 장남은 벼슬에 나아갔다.
인(土寅)은 세 아들을 두었으니 지술(志述), 지도(志道), 지규(志逵)이고, 세 딸은 이만성(李晩成), 이창령(李昌齡), 유정기(兪正基)에게 시집갔다.
내가 고아로 자랄 때 항상 공을 선대의 벗으로서 섬겼는데, 공이 일찍이 나에게 가르치기를 "그대의 숙부 평사공(評事公)이 일찍이 나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은 모름지기 서로 경계하여 절대로 방납(防納)하는 일을 하지 맙시다'라 하였으니, 내가 감히 내 벗의 말을 잊지 못하여 일찍이 이런 일을 한 적이 없다" 하였다. 방납이란 대개 권세 있는 집안에서 이익을 탐하는 이름이다. 아, 이것이 어찌 이천(伊川:程頤)이 이른바 "한지국(韓持國)이 의를 따름이 가장 미칠 수 없다" 한 것이나, 자로(子路)가 이른바 "예전의 약속을 평생토록 잊지 않는다"라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또한 이것으로 공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명(銘)하여 가로되,
아아 오직 공은, 순박하고 두터우며 견고하여, 옥이 원석에 있는 듯하니, 누가 그 우뚝함을 보았겠는가. 모나되 남을 해치지 않고, 그윽하고 정묵함과 같도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저 공은, 시비흑백이 없다" 하였으나, 공은 스스로 의를 잡았으니, 참으로 나라의 직신이었네. 어두운 조정에서는 화살 같았거늘, 하물며 도가 있는 세상이랴. 간사하게 굽히지 않으니, 나를 사랑하는 자 적었도다. 저들은 달려 나아가고, 나는 물러나 완만히 하니, 벼슬길에서 양보함이여, 저 교활한 벼슬아치들에게 부끄럽도다. 사간원과 사헌부에, 내 자리가 따뜻할 날 없었네. 지방의 크고 험한 고을과, 변방의 장벽에 이르기까지, 참로검처럼 시원스레 베어내니, 천리마가 평지를 걷듯 하여, 간사하고 호강한 자들은 헐떡이고, 늙은이와 어린이는 춤을 추었네. 늙은 나이에 행형(朱墨)을 다루니, 사람들은 공을 위해 고통스럽다 하였으나, 공은 말하기를 "아아, 이것도 스스로 제 힘을 다함이라" 하였다네. 벼슬 품계가 조금 오르자, 시사가 극에 달하여, 마침내 길 위에서 죽으니, 운명이 서글프도다. 비록 서글프다 이를 지나, 그 몸은 깨끗하였으니, 지금 이 가련한 사람들은, 사는 것이 즐거움이 아니라, 구류하여 공돈을 바치게 하고, 욕설과 호통을 들으니, 공과 비교해 본다면, 누가 잃고 누가 얻었는가. 자연의 변화와 무리가 되어, 이 그윽한 무덤에 묻히니, 무슨 슬픔과 한탄이 있으랴, 공은 응당 스스로 위안하리. 하물며 집안의 아이가, 능히 풍채를 이어받았고, 또한 손자와 증손이 있어, 문행을 게을리하지 않으니, 이것을 복을 받았다 이르며, 하늘의 정함은 어그러지지 않도다. 내가 그 처음과 끝을 정성껏 새기나니, 백세가 지나도 마멸되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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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문]
증이조판서 행병조참지 이공 신도비명
유명조선국 증자헌대부이조판서겸지 경연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 세자좌빈객오위도총부도총관 행통정대부 병조참지 이공 신도비명 병서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우의정 송시열(宋時烈) 짓고, 현손 진사 정상(挺相)이 전하고, 진사 정박(挺樸)이 쓰다.
나는 이미 이충숙공(李忠肅公) 상길(尙吉)을 위해 신도비[大碑]를 찬했다. 지금 또 나의 벗 야수(野叟, 李(土寅), 이인))의 부탁으로 또 참지공(參知公)의 묘에 명(銘)하니 공은 충숙공의 동생이다. 일문(一門) 내에 어찌 이같이 현사(賢士)가 많은가. 아! 세도(世道)가 쇠락했으니 공 같은 이 여럿을 어찌 구할 수 있겠는가.
공의 휘(諱)는 상급(尙伋)이며, 자(字)는 사언(思彥)이다. 신라 때 총언(悤言)이 있어 고려 태조를 도운 공이 있어 성주장군(星州將軍)의 벼슬을 내렸다. 그 후 세계(世系)가 성주인(星州人)이 되었다. 우리 조선에 들어 약동(約東)은 문무를 갖춰 시호는 평정(平靖)이고 청백리로 이름이 사서에 실렸다. 좌랑 소원(紹元)과 참봉(參奉) 유번(有蕃), 군수 석명(碩明), 교관(敎官)으로 찬성(贊成)에 증직된 희선(喜善)은 바로 공의 고증조고(高曾祖考)이다. 찬성공이 도사(都事) 정환(丁煥)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을 얻으니 공은 그 둘째였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학문에 힘써, 나이 35에 진사로 병오문과(丙午文科)에 급제하였다. 괴원(槐院)에 들어가 정자(正字), 저작(著作), 박사(博士)를 지냈고, 병좌좌랑(兵曹佐郞)으로 천자의 생신을 축하하는 서장관(書狀官)에 뽑혔다. 북경에서 미처 돌아오기도 전에 평안도사(平安都事)의 벼슬이 내려졌는데, 적신(賊臣) 이이첨(李爾瞻) 등이 자기와 다른 것을 미워하여 좋은 벼슬에서 배척한 것이다.
얼마 후 병으로 직을 면하고 형조정랑(刑曹正郞)을 거쳐 풍기군수(豐基郡守)가 되었다. 이때 이웃 고을에 도적 무리가 있어 형틀을 부수고 도망한 것을 죽였는데, 조정에서 적은 잡은 여러 사람에게 포상을 하였다. 이에 뇌물로 그 벼슬에 차등이 있는 것을 보고 공이 수치스럽게 여겨 위로 그 실적을 감해 보고하여 면할 수 있었다. 후에 흉인(凶人) 정조(鄭造)가 안찰사(按察使)가 되자 공은 그의 속관(屬官)이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즉시 벼슬을 버리고 충주 별서(別墅)로 돌아왔다. 밭 갈고 낚시하며 즐기니 여러 문생(門生)들이 책을 끼고 와 배움을 청하는 이가 많았다.
찬획사(贊劃使) 이시발(李時發)이 계문으로 스스로 추한 곳에 있는 귀한 사람을 뽑아쓸 것을 청했는데, 찾아와서 그러지 말 것을 청하며 말하기를, 장차 맑은 이를 뽑아 요긴한 곳에 쓰려 한다고 하였다. 공이 빙그레 웃으며 말하길, 감히 그럴 바가 아니라고 하였다. 이때 간당(奸黨)의 죄악이 쌓여 모후(母后)를 폐하기에 이르그 이륜(彛倫)이 어두워지고 파괴되어, 공은 충숙공과 더불어 모두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즐기지 않고 본디의 뜻을 지켰다.
인조반정 이후 제사(諸司)로부터 뽑혀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가 되었는데, 여러 인사가 계문으로 유임시켜 간관(諫官)으로 마땅하며 외직은 합당하지 않다고 하였다. 드디어 장령(掌令)과 집의(執義)에 제수되었으니 엄연히 곧은 신하의 풍채가 있었으나 기뻐하지 않는 자가 점점 많아졌다. 이괄(李適)이 반역을 일으켜 임금이 장차 남쪽으로 행차하려 하는데, 의논하는 자가 안동(安東)을 일러 혹 조씨(趙氏)가 진양(晉陽)을 구한 것처럼 지금의 윤탁(尹鐸)은 이모(李某) 같은 이가 없다고 하였다. 이에 공이 상의원정(尙衣院正)으로 안동부사로 나아가 혼조(昏朝) 때의 체납 조세를 모두 없앴다. 부호 중에는 요행히 피해간 자가 있어 공이 말하길, 이처럼 하면 곧 임금의 은혜가 간교한 자에게 치우친다고 하고, 일체 엄히 감독하여 전조(田租)의 반을 징수하였다. 또 상사(上司)와 시비를 다툴 때, 상사가 능히 감당할 수 없어 마침내 계문을 올렸다. 공이 조정에 심경을 밝히고 체직되었다. 차례에 따라 시정(寺正)이 되었다가 사간(司諫)으로 옮겼다. 세자의 가례(嘉禮)에 마땅히 신지정문(莘摯正門)에서 구해야 하나 반역 가문의 지친(至親)으로 하여금 채택의 반열에 참작하게 한 점을 부당하다고 논하였다. 이때 임금의 뜻이 깊이 기운 바가 있어 마침내 크게 거슬려 빨리 관직을삭탈하라 명하였다. 그러나 대신들이 힘써 하소연함에 따라 다만 체직을 면하였다. 뒤에 노변(虜變)으로 인해 조정을 나누을 때 계문에 따라 종사관이 되었고, 또 진휼사(賑恤使)를 따라 호남(湖南)에서 군량을 모았다. 조정으로 돌아와 역시 한가한 관직에 머물렀다.
기사년(己巳年, 1629, 인조 7) 단천군수(端川郡守)로 보임되어 나아갔다. 군에서는 은화(銀貨)가 나왔는데, 공이 말하길 이것은 세원[利窟]이라 관리가 조금이라도 삼가지 않으면 곧 신명(身名)이 가히 애석하게 될 것이라고 하고 청렴결백하게 공무를 수행하였다. 세공(歲貢) 외에는 한 치 한 푼의 군더더기도 모두 백성들의 부역을 대신하는 비용으로 썼다. 군정(軍丁)으로 도망하면 예전에는 모두 이웃과 가족에게 책임을 물었는데, 공이 또 사사로운 비용을 긴축 절약하여 그 나머지로 그들을 침해하고 들볶는 것을 충당하고 면해 주었다. 또 북쪽은 거칠어 학문을 숭상하지 않았으나 공이 우수한 자를 가려 뽑아 이끌어 스승으로 그들을 가르쳤다. 매월 초하루 반드시 부자묘(夫子廟)를 친히 참배하고 이어 재생(諸生)들과 강론하니 얼마지 않아 문예(文藝)가 해박한 자가 있었다. 이때 안찰사가 곧 공이 사간(司諫)으로 있을 때 지적을 한 바 있는 인물인데 일찍이 공을 싫어하였으나 역시 심복(心腹)하여 글을 올려 공을 최고로 꼽았다. 공이 떠난 후 이경증(李景曾)이 어사로 이르자 백성들이 길을 막고 공의 덕을 거듭 드러냈다. 연이어 연안부사(延安府使)가 되어 치적이 단천 때와 한가지로 같았다. 또 연안이 몇 해 전 외로이 떨어진 성으로 능히 왜구(倭寇)를 막아 냈는데, 더구나 지금은 외환(外患)이 바야흐로 심한 때라 미리 이러한 위기를 대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고, 크게 전구(戰具)를 수리하여 모든 기계가 정돈되었다. 방백(方伯)이 그 일을 주달하자, 임금이 가상히 여겨 표리(表裏)를 하사하였다.
공은 본디 비루하게 여긴 것은 아사(亞使)가 하는 일로 공이 그 마음을 부끄러이 풍자하였다. 그 사람이 수치스럽게 여겨 노하여 사직하고 돌아갔고, 공 또한 스스로 면하고 떠났다. 보덕(輔德)에 제수되자 세자가 공이 시무에 능숙한 것을 알고 매번 배우기를 마치면 특별히 공에게 군국(軍國)의 중대사를 물었다. 그 진달한 바를 일찍이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인 적이 없었다.
을해년(乙亥年, 1635, 인조 13) 인열왕후(仁烈王后)가 돌아가시자 공이 국장도청(國葬都廳)으로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으니 통정대부 병조참지(兵曹參知)에 올랐다. 이때 나라가 이미 병화의 분위기가 있어 공이 매번 군병을 훈련하고 성지(城池)를 수선하며, 장수를 뽑을 것을 말했는데, 식자(識者)들이 그것을 바르게 여겼으나 때마침 쓰이지 않았다. 대가(大駕)가 적을 피해 남한(南漢)으로 들어가니 공이 말고삐를 잡고 임금을 호종하였다. 눈보라를 무릅쓰고 40여 일을 버텼으나 질병이 크게 일고 한목숨 겨우 보존하였으니 오직 나랏일로 아파하고 밤낮으로 울부짖을 뿐이었다. 대가가 삼전도(三田渡)에 나아가니 공이 통곡하여 말하길, 화의(和議)의 해는 이처럼 한번만이 아닐 것이라고 하였다. 충숙공이 종묘사직의 위판을 품고 강도(江都)로 들어갔는데, 공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구부(求裒)의 정(情)을 이기지 못해 드디어 병을 무릅쓰고 서쪽으로 가다가 남아있던 적을 만나 해를 당하였으니 정축년(丁丑年, 1637년) 2월 3일 노상에서 졸하였다. 춘추 66세로 충주 황금곡(黃金谷)의 동남향(負亥, 亥坐巳向) 언덕에 장사지냈다.(忠肅公陪 廟社入江都。公聞其陷敗。不勝求裒之情。遂力疾西行。遇零賊被侵犯。遂以丁丑二月三日。卒于道上。春秋六十六。葬忠州黃金谷負亥之原。)
※구부(求裒)의 정(情) : 형제가 난리에 죽으면 시신을 찾기 위하여 온 언덕과 들판을 헤맴을 뜻한다. 《시경》 소아(小雅) 상체(常棣)에 “죽음의 두려움에 형제가 서로 걱정하고 생각해 주며, 시신이 언덕과 들판에 쌓여 있을 때에도 오직 형제만이 시신을 찾는다.[死喪之威 兄弟孔懷 原隰裒矣 兄弟求矣]” 한 말에서 나온 것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뜻이 굳세어 함부로 하지 않았다. 15세에 이전에 큰형과 충숙공이 더불어 과거에 급제하여 돌아오니 구경꾼이 큰문에 가득 찼는데, 공이 홀로 문을 닫고 독서하니 찬성공이 보고 괴이하게 여겨 그 까닭을 물었다. 이르기를 다른 날 제가 그와 같이 될 것이니 어찌 헛되이 저것을 바라보기만 할 것인가 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이들이 끝내 크게 될 것을 알았다. 충숙공을 섬기기를 아버지 섬기듯 하였고 평생 생업을 돌보지 않았다. 때문에 서울에 집 없이 늙었는데, 더욱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을 참지 못하고 마침내 상의하여 충숙공의 옆에 작은 집을 지었다. 아침과 저녁으로 마주하니, 진신(搢紳)들이 미담으로 전하였다.
태학(太學)에 들어가면서 다른 이들과 망녕되어 사귀지 않았으니 사귄 벗들은 당대에 이름난 이들이다. 조정에 들어가는 마침 흉악한 무리들이 권력을 차지하여 세력이 성한 것을 당해 공은 사건에 휘말리기 직전이었으나 화복(禍福)은 굽힘에 있다고 하지 않았다. 풍기(豐基)에 있을 때는 이웃 고을에 이이첨의 무리가 있었다. 이첨에게 환심을 사고자 마주 앉아 좋은 말로 이끌었으나 공이 은근하게 풍자하여 배척하기를 준엄하게 하니 들은 이가 혀를 내밀었다. 정조(鄭造)가 측실 소생 딸을 심히 좋아한다는 말이 있어 공에게 어찌 딸을 달라고 하지 않냐고 하였다. 공이 정색하여 말하기를, 내가 어찌 정조의 딸을 어쩌겠는가, 사대부가 차마 그 문에 자취를 남기겠는가 하였다. 임금을 대할 때는 더욱 강직하여 아첨하지 않았고 조금이라도 사사로움이 없었다. 때때로 겉으로는 받들어 귀하게 모시는 것 같으면서도 음으로는 실제 배척하는 자는 시종 발 디딜 곳을 잃었고 홀로 임금의 분노를 건드리지 않았다. 때문에 전후 37곳의 관직을 지내고 다만 세 차례 간관이 되었지만 한 차례 주연(冑筵)에 들어가도 포부를 밝히고 의견을 말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오직 여러 번 주현(州縣)에 임명되어 마음과 힘을 다해 항상 소민(小民)을 껴안고 강제로 행하는 것을 억제하는 것을 일로 삼았으니 절대 도리를 벗어나 명예를 구걸할 뜻이 없었다. 교활한 관리와 아첨하는 백성이 곁눈질을
하면 빙벽같은 지조로 가리키는 말이 없어도 끝내 결점을 감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돌아올 때 뜻을 기리고 칭송을 새기는 자가 있으면 의리의 분별을 최고로 여기고 준절(峻截)하다 하였다. 병자년 오랑캐가 이미 천자를 참칭하자 홍익한(洪翼漢)이 극한 대의(大義)로 화의를 공척하였다. 그러나 세상의 번잡함을 받아들여지지 않자 공이 매우 강력히 그 뜻을 주장했다. 성이 포위되어 일이 급박함에 미쳐서는 평일 일찍이 정론을 펴던 자들도 꺼리낌없이 전에 그런 말을 한 적 없다 하니 공이 굳센 심지로 조금도 기탄없이 그 말을 맞추어 말하길, 구차하게 살아 차라리 의롭게 죽는 것이 없으면 어찌 신명(神明)이 감응하여 함께 분한 마음으로 끝내 적의 마음을 이끌어 그 원하는 것을 쫓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충숙공과 선원(仙源) 김상국(金相國) 등 제공이 강도에서 순절하니 그 죽음이 다소 차이가 있더라도 육침(陸沈)의 세상에 썩지 않는 것과 같았다.
대체로 공의 형제가 우애롭고 연이어 과거에 급제하였다. 충숙공이 자상히 화합하여 다스리니 누구에게도 거슬림이 없었다. 공이 진실로 스승으로 삼아 본받아 강직하고 진실하며 확고한 데 이르고 이해(利害)를 생각하지 않았으니 곧 충숙공이 스스로 이르지 않은 것이다. 난이 끝난 후 임금께서 호종한 공으로 추록하여 공을 대사헌에 증직하고 후에 아들의 원종훈(原從勳)으로 더하여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부인 역시 정부인에 증직되었다. 부인은 밀양박씨(密陽朴氏)로 첨추(僉樞) 주(胄)의 딸이다. 항상 두려워하고 삼가는 마음으로 공의 뜻에 따랐고 공이 내외 관직을 지낼 때 끝내 조금도 남에게 누를 끼치지 않았으니 육친(六親)이 모두 칭찬하였다.
큰아들 연(練)은 부인이 운명했을 때 상심하는 마음이 심해 얼마 되지 않아 요절했다. 다음 인(土寅)은 곧 야수(野叟)로 문과에 급제하여 일찍이 대간(臺諫)이 되어 언사(言事)가 아부하지 않으니 역시 세상과 어긋남이 있었다.
딸은 참봉 윤명거(尹溟擧)에게 시집갔다. 서자 타(堉)는 첨지(僉知)요, 곤(坤)은 무과에 급제하고 배(培)는 막내이다. 연의 두 아들은 지웅(志雄)과 지걸(志傑)인데 모두 사마시에 입격하고 큰아들은 벼슬살이 하였다. 인의 세 아들은 기술(志述)과 지도(志道), 지규(志達)이고 세 딸은 이만성(李晩成)과 이창령(李昌齡), 유정기(兪正基)에게 시집갔다.
내가 부친을 여의고 어릴 때 항상 공을 선배로 섬겼는데 공이 일찍이 나를 가르쳐 말하길, 그대 숙부 평사공(評事公)이 일찍이 내게 말하길 우리들이 모름지기 서로 경계하여 절대 방납(防納)하는 일을 하지 말자고 하였으니 나는 감히 내 친구의 말을 잊을 수 없어 일찍이 이같은 일이 없었고 방납은 대개 권세 있는 모리배의 이름이라 하였다. 이것은 어찌 이천(伊川)이 이른바 한지국(韓持國)이 의리(義理)에 굴복함을 가장 얻을 수 없다고 하였고 자로(子路)가 이른바 친구를 평생토록 잊지 않겠다는 말은 또한 공의 일단을 보는 것 같다.
명에 이르길,
아! 공은 혼박(渾朴)함이 두텁고 견고하여 본바탕이 구슬 같아 누가 단단히 생각할까 바야흐로 각박함에 이르러도 사라지듯 그윽하네 사람들이 공을 일러 유무(有無)와 흑백(黑白)이라
공은 의로 살았으니 펼치니 곧은 천하
혼조에 있어 화살 같고 하물며 그 뜻 도(道)에 있어
굽히지 않아 애아(愛我)한 것 적고
저쪽이 달려 나가니 나는 물러서 늦추네
높은 벼슬 사양하고 벼슬 구걸하던 저들이 부끄럽네
사간원에 내 자리 따뜻하지 않으니
척박한 여러 고을 나라의 울타리와 기둥
담로(湛盧)로 시원스레 물리치고 준마로 활보하니
간악한 부호 두려워하고 노소가 춤을 추네
만년의 평가, 사람들이 공의 노고 꼽네
공이 말하길 슬프다. 이것으로 목숨 바치게 하네
벼슬이 점차 올르나 시사(時事)는 망극하고
끝내 길에서 죽으니 운명이야 좋지 않아
비록 시운 좋지 않아도 그 몸 정결하네
이제 불쌍히 여겨 살아도 즐겁지 않네
다그쳐 모두 조아려 꾸짖고 꾸짖어도
공으로 가르쳐도 누가 잘잘못을 따지랴
조물주와 하나 되어 이 무덤 그윽하니
어찌 근심하랴 공이 응당 위안을 찾았으니
하물며 어린 아이도 풍채를 이었고
후손 또한 문행이 게으르지 않네
복 받았다 이르고 정한 운명 어긋나지 않네
내가 처음과 끝을 새기니 백세토록 무궁하리.
숭정(崇禎) 무진(戊辰) 후 둘째 갑오년(甲午年, 1714, 숙종 40) 모월 모일 세우다.
선산(善山) 김만성(金萬聖)과 서현손(庶玄孫) 정량(挺樑)이 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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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진이씨파보(碧珍李氏波譜), 1911년》에서
출처 : 국립중앙도서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