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국민은 그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이 명언은 알렉스 드 토크빌의 것으로 오인되기도 하지만, 사르데냐의 철학자 조제프 드 메스트르가 1811년 남긴 말이라고 합니다.
1859년에는 새뮤얼 스마일스가 그 뜻을 명확히 정리했는데, “정부는 그 나라를 구성하는 개인들을 반영한다. 국민보다 수준 높은 정부도 결국 국민 수준으로 끌어내려지게 마련이다. (중략)… 한 나라의 품격은 물의 높낮이가 결정되듯 순리에 따라 법 체계와 정부 안에 드러날 수밖에 없다. 고상한 국민은 고상하게, 무지하고 부패한 국민은 무지막지하게 다스려질 것이다.”
메스트르의 격언은 글로벌 여론조사에서도 확인된다고 합니다.
미국 퓨리서치가 최근 24개국 3만여 명을 대상으로 벌인 ‘민주주의 개선을 위해 바꿔야 할 것’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발표했는데, 한국 등 고소득 국가 시민들은 ‘정치인 교체’를 가장 시급한 과제로 적시했지만, 국민소득이 낮은 인도와 남아공 사람들은 경제개혁을 1순위로 꼽았습니다. 최근 정권을 바꾼 폴란드 국민들은 ‘리더십 교체’를 1위로 내세웠습니다.
시민들이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비율도 국가별로 차이가 났습니다. 유럽과 일본은 ‘정치인 탓’만큼 ‘시민의식 변화’가 필요하다는 응답이 많았지만, 한국은 정치인을 탓하는 비율(정치인 교체 32%ㆍ시민의식 변화 8%)이 훨씬 높았습니다.
스웨덴(정치인 교체 27%ㆍ시민의식 변화 14%), 독일(26%ㆍ9%), 일본(23%ㆍ11%) 등은 두 이슈 차이가 크지 않았고, 심지어 이스라엘은 ‘시민의식 변화’(14%)가 정치인 교체(11%)보다 높았습니다.
번호가 할당된 후보를 찍는다는 점에서 선거는 객관식 시험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는데, 과학과 상식에 따라 신중하게 정답을 고르듯, 시민들이 교과서 원칙대로 후보를 선택한다면 미래는 융성할 것입니다.
선동과 분노에 휩싸인다면 국운은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4월 총선을 앞두고 미래 지향보다는 복수와 과거, 정책보다 반대를 위한 반대로 표 모으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법 절차 무시와 초법적 정치보복에 대한 일부의 호응도 높아지고 있는 시점에서 메스트르의 격언과 퓨리서치 조사를 종합하면, 우리 정치의 난맥상이 정치인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한국일보. 조철환 오피니언 에디터의 글을 참고했습니다)
<공화국(republic)은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다.
인류 역사를 보면 하늘이나 신을 대리하여 군주가 백성을 지배하는 통치 형태가 아주 일반적이었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한때 공화정을 시행하기도 했으나 노예는 철저히 배제하였다. 다수의 생산직을 배제한 채 ‘그들만의 리그’를 펼치며 고담준론을 논했다. 같은 국가 공간에서 살아가는 다수의 사람을 배척한 반쪽짜리 공화제라 할 수 있다.
공화국이란 공공(public)의 일을 공공에 속한 개개인이 독립 주체로서 함께 협의(共和)하고 결정하는 정치 제도를 갖춘 나라를 뜻한다. 따라서 위계적 사회신분제가 강고할수록 진정한 의미의 공화국은 불가능하다. 왕을 끌어내려 목을 친다고 하여 민주 공화국이 저절로 나오지도 않는다. 왕을 숱하게 죽여 본 경험이 넘치는 중국인데도 자생적 공화제가 등장하지 않은 사실은 좋은 방증이다.
신분 구조의 최정상에 군림하던 왕을 죽이는 일은 실제 효과보다 상징성이 더 강하다. 핵심은 왕을 끌어내린 후다. 왕과 신분제가 사라진 그 국가 공간에서 이제 모든 사람이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갖고, 각자 자유롭게 의견을 내고 조율하고 협의하여 결정을 내리는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는지가 중요하다. 그렇다면 민주 공화국이고, 아니라면 대개 독재 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헌법 1조의 내용이다. 1948년 정부 수립 이래 누구도 바꾸지 못했다. 계엄령으로 유신헌법을 강제하여 사실상 종신 대통령을 보장받은 박정희도 차마 건드리지 못했다. 이 짧은 한 문장이야말로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을 응축하여 잘 보여준다.
이 헌법 1조를 바꾸자는 국민적 합의가 없는 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적어도 민주 공화국의 정신에서 벗어나는 언행은 삼갈 수 있어야 한다. 특히 공공의 장에서 그런 말을 서슴지 않는다면 헌법을 외면하고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을 부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작금의 우리나라는 자못 불안하다. 신(新)신분제 사회가 도래했다는 말에 대개는 고개를 끄덕인다. 법적으로는 공화국인데, 사실은 공화국답지 않다는 의미다. 사회경제적 양극화가 날로 심해지건만 공화국에서 그러면 안 된다는 절실한 목소리는 의외로 작다.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의 어이없는 죽음이 이어지건만 그때뿐이다. 정규직을 중심으로 이른바 가진 자들은 경제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별로 없다. 되레 그들더러 당당히 시험을 쳐서 정규직이 되라고 윽박지른다. 개인 탓으로만 돌린다. 자유주의 사회에서 경쟁은 자연스럽지만 그것이 꼭 필요하고도 공정한 경쟁인지는 돌아보지 않는다. 그래서 공화국의 위기다.
각종 차별의 일상화도 심각한 수준이다. 성별·학력·지역·나이·종교·취향·국적·직업 등등 다름을 다양함으로 인정하기보다 틀림으로 간주하여 무조건 적대시하고 배척하는 일이 흔하디 흔하다. 집단 혐오 증세는 아예 중증 수준이다. 다름을 틀림으로 보는 순간 혐오와 차별은 동전의 앞뒤처럼 한몸을 이루어 기승을 부린다.
여성 혐오, 약자 혐오, 지역 혐오, 상대 정파 혐오 등은 모두 공화국의 근간을 해치는 행위다. 공화국은 되도록 타협과 화합을 추구하는데, 집단 혐오는 공화국을 오히려 분열시키기 때문이다. 학교폭력도 넓은 의미로 보자면 공화국에 균열을 가하는 행위다. 학급이란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지닌 구성원들이 각기 주체적으로 어우러지는 공동체, 즉 공화국의 미니어처(miniature) 훈련장이기 때문이다.
한국어를 보면 흔히들 개인주의(individualism)를 이기주의와 동의어처럼 오용한다. 집단 정서가 역사적으로 워낙 강한 문명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한국이 이렇게나마 민주주의를 갖춘 게 기적일 정도로 민주 공화국으로 가는 여정은 아직 멀다.
프랑스 혁명은 루이 16세의 목을 벰으로 완성한 게 아니라,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엎치락뒤치락 숱한 부침을 겪으며 100년이 훌쩍 넘어서야 사실상 공화국을 ‘완성’할 수 있었다. 우리도 헌법에는 민주 공화국을 처음부터 명시했지만 민주 공화국다운 진짜 공화국을 만드는 일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이제 곧 총선이다. 구조적 차별은 방치하고 되레 증오심과 혐오를 조장함으로써 득표하려는 후보자를 투표로 최대한 걸러내는 작업도 민주 시민이라면 눈을 부릅뜨고 실천해야 할 일이다.>국민일보. 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출처 : 국민일보. 오피니언 [국민논단],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인가
제가 요즘에 읽고 있는 책이 오인환 님이 쓴 『이승만의 삶과 국가』입니다. 대여기간이 2주인데 제가 나이가 들었다고 처음에 1주를 더 연장해서 빌려주어 3주 동안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다 읽고 두 번째 읽는데 1948년 제헌국회에서 시작된 대통령에 대한 견제는 한국전쟁 중에도 끊임없이 이어졌다는 놀라운 사실들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걸 단순하게 ‘권력 투쟁’이라고 치부하기는 좀 그렇지만 국가 위기 앞에서도 일치단결을 못하고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여러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인 것은 틀림이 없지만 사법 절차 무시와 초법적 정치보복에 대한 일부의 호응도 높아지고 있는 시점에서 메스트르의 격언,‘모든 국민은 그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는 말이 어쩌면 우리 실정에 가장 정확한 지적이 아닐까 싶습니다. 결국 그말은 국민의 수준이 대통령의 수준을 결정한다는 얘기일 것입니다.
미국의 바이든이나 트럼프를 보면서 우리가 알고 있던 과거의 그 미국이 지금의 미국인지도 궁금합니다.
時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