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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05. 묵상글 ( 성주간 수요일. - 수치와 모욕을 당하지 않는 법.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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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05. 성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수치와 모욕을 당하지 않는 법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시고,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나는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월요일부터 성주간 독서는 이사야서 ‘주님의 종’의 노래가 이어지는데
오늘은 세 번째 노래로서 제자의 귀와 혀에 관해 얘기합니다.
제자의 혀란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아는 혀인데
하느님께서 그런 혀를 주신다고 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자의 귀에 관한 얘기는 이해하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제자의 귀를 가진 사람은 거역하거나 뒤로 물러서지 않으며
모욕과 수치를 당하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는다는 말이나
더 나아가 수치나 모욕을 당하지 않는다는 말은 설명이 필요할 것입니다.
제자의 귀를 가지면 어찌 거역하지 않고,
어찌 수치나 모욕을 당하지 않는 겁니까?
즉시 떠오르는 말이 귀가 순하다는 뜻으로 공자가 가르친 이순(耳順)입니다.
귀가 순하다는 것은 귀에 거슬리는 말도 거역치 않고 순히 듣는다는 뜻일 겁니다.
오늘 이사야서가 거역하거나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고 한 말과 같은 뜻이겠고요.
물론 아무 말이나 순히 듣는 것이 아닐 것이고,
주님의 말씀만 순히 듣는다는 뜻이겠고,
주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들으려면
어떤 고통도 마다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물론 이것 절대 쉬운 것이 아닌데 그래도 하느님께서 귀를 일깨우시면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고 이해도 되지만,
그다음 단계 곧 모욕과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난해합니다.
주님께서 도와주시면 정말 모욕과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까?
모욕과 수치를 주는 사람을 주님께서 없애주시기 때문입니까?
그런데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다.”라고 하는 것을 보면
그런 자를 주님께서 없애주신 것이 아니고, 그들에게 내맡긴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도와주시길래 모욕과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겁니까?
사랑하면 모욕과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
남편과 일찍 사별하고 이제 어떻게든 자식 먹여 살려야 하는 엄마는
곱던 얼굴이 망가질 정도로 시장에서 장사해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강아지 소리 들으며 딸 고쳐주려던 이방 여인도 수치 당하지 않았지요.
사랑하면 나의 시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 있기에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당하는 모욕과 수치에 개의치 않습니다.
나는 사랑을 한 것이고 사랑으로 한 것이지 모욕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프란치스코는 동냥에 대해 얘기할 때 오늘 이사야서를 인용합니다.
그도 처음 동냥하러 다닐 때는 부끄러워했는데 극복한 다음 이렇게 권고합니다.
“형제들은 부끄러워 말고, 오히려 주님께서 ‘차돌처럼 당신 얼굴빛 변치 않으셨고’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욕을 줄 때,
그 받은 모욕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큰 영예를 받게 될 것이니,
그 일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모욕은,
모욕을 받는 사람의 탓이 아니라 주는 사람의 탓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시선이 모욕하는 사람에게 가 있지 않고, 주님께 가 있는 것이며
사랑하는 주님이 옆에 계시면 부끄러울 것도 모욕당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관건은 역시 사랑이고 사랑이 없는 사람이 모욕당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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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05. 성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새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 13,38)
우리는 <성삼일>을 이틀 앞두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절망과 어둠이 더해가는 이야기입니다. 빛으로부터 떠나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 간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두 개의 밤이 있습니다. 그리고 두 개의 배반이 있습니다. 하나는 유다의 밤이요, 또 하나는 베드로의 밤입니다. 유다의 밤은 캄캄한 어둠이 짙어져가는 밤이요, 베드로의 밤은 닭이 울기 전, 새벽이 밝아져오는 밤입니다.
유다의 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둠이 제자들을 덮치자,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놓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요한 13,21)
사실, 예수님께서는 배반하는 제자를 마지막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빵을 적셔서 그에게 주었습니다. 빵을 적셔서 주는 것은 애정의 표현이었습니다. 당신을 배반할 제자에게 끝까지 베푸는 충실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사랑을 등지고서 밤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택했습니다. 그는 의도적으로 면밀히 계획한 바를 어둠 속에서 행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겠다고 장담하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새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 13,38)
베드로는 주님을 배반할 의향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약한 순간에 그만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닭이 울면, 어둠은 밝아질 것입니다. 베드로는 지나친 자기 과신으로 넘어졌습니다. 사실, 우리가 넘어질 때는 가장 약할 때가 아니라, 가장 강할 때입니다. 반대로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우리가 약할 때 오히려 강해질 것입니다(2고린12,10).
그렇습니다. 유다의 밤은 어둠과 악으로부터오는 밤이요, 베드로의 밤은 약함과 과신으로부터오는 밤입니다. 또한 유다의 밤은 죄를 깨닫고서도 더 짙은 어둠으로 빠져들어 멸망으로 가는 밤이요, 베드로의 밤은 죄를 깨닫고서는 어둠을 헤치고 빛으로 나아가는 생명의 밤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베드로같이, 유다같이 곧잘 넘어집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넘어지는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두가 일어서는 존재인 것은 아닙니다. 혹 넘어진 사실을 까달아 알고 뉘우치고 성사를 본다고 해도, 일어선 사람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단지, 넘어진 채로 넘어진 자신을 본 것일 뿐, 비록 용서는 받았다할지라도 일어서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일어서서 넘어졌던 자신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빛속으로 건너와서 어둠을 바라보아야 할 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일어선 자만이 빛나는 새벽을 만날 것이요, 일어선 자만이 빛 속에 들 것입니다. 먼저 베풀어진 그분의 사랑을 만난 자만이 그분의 빛 속을 걷을 것입니다.
하오니, 빛이신 주님! 저를 비추소서! 제가 일어나 빛 속을 걷게 하소서.
오늘 제가 비록 넘어지더라도 일어나 빛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 13,38)
주님!
어둠에 휩싸여 넘어지고 또 넘어집니다.
빛을 비추소서.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넘어지기도 전부터 베풀어진 당신의 사랑을 보게 주소서
일어나 빛 속을 걷게 하소서.
구원의 십자가를 지고 사랑의 길 걷게 하소서.
빛을 받아 빛을 밝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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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05. 성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저는 아니겠지요?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에는 미켈란젤로가 세상을 창조하는 창세기 이야기와 이 사건을 알리는 예언들이 그리고 천장 벽화를 마친 뒤 20년이 지난 뒤 정면에 최후의 심판벽화를 그리게 되었는데 모든 인간에게 다가오는 피할 수 없는 운명, 즉 하느님이 인간의 절대적인 심판자라는 운명에 대한 것입니다. 왼쪽 벽에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유대민족의 구원자 모세의 일생이, 오른쪽 벽에는 신약성경에 나오는 전 인류의 구원자인 그리스도의 일생이 그려져 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이 작업을 하였습니다. 특별히 ‘최후의 심판’을 그리면서 단죄받은 이들이 느끼는 극한의 두려움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는데 그가 처음 그린 그림에는 모두가 벌거벗은 채 그리스도 앞에 노출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온몸이 다 드러난 최후 심판의 그림은 당대의 성직자들에게 반발을 불러왔는데 거룩한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그가 황제든 노예든 성직자든 평신도든 주님 앞에서 아담이 몸을 나뭇잎으로 가린 것처럼 남의 눈을 속이는 옷은 없을 것이라 경고했던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 때 나는 걸려 넘어지지 않고 견딜 수 있을까?”, “그날에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고심했습니다. 그런데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벌거벗은 몸은 모두 옷으로 덧칠되었습니다.
아무리 감추어도 하늘의 그물을 빠져나갈 수는 없는 법입니다. 우리는 홀로 있어도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사실, 홀로 있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이지, 우리는 언제나 주님 앞에 벌거벗은 채 있습니다. 혹 다른 사람을 속일 수는 있어도 자기 자신과 주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에 앞서서 제자들에게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하고 말하였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도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마태26,25). 하셨습니다. 너는 네 속을 알고 있지 않으냐? 하는 말씀입니다.
유다는 재정을 담당하고 있던 제자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살림을 맡아보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돈 관리는 아무에게나 시키지 않습니다. 신뢰가 있고 현명한 사람에게 맡깁니다. 그렇다면 유다는 특별히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거기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주님을 열심히 따랐지만, 재물에 눈이 멀었습니다. 돈을 만지니까 돈의 편리함에 익숙해지고 재물의 유혹에 빠져들기 마련입니다. 욕심은 화를 가져옵니다. 재물에 대한 집착, 갈증에 시달리고 결국은 은전 서른 닢에 스승을 팔아넘기고 맙니다. 유다는 자신을 속이면서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긴 사람이 어디 유다 한 사람이었을까요? 일상을 살아오면서 오늘도 여전히 주님의 뜻을 외면하면서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말합니다. 주님의 뜻보다도 내 뜻을 고집하면서 저는 유다보다도 훨씬 더 헐값에 예수님을 팔아먹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 저는 아니지요?” 하고 물을 때 “아니, 너 맞아!”라는 답변을 들을까 두렵습니다. 주님의 자비를 간구하는 오늘입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2,15-17). 죽은 믿음을 살리는 부활을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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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승리
개나리, 목련, 진달래, 벚꽃들의 향연이 눈을 즐겁게 할 뿐 아니라 마음을 환하게 열어주고 겨우내 움츠린 우리에게 희망의 기운을 주고 있다. 다양한 꽃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의 고유한 향기와 빛깔을 내며 그 아름다움을 뽐낸다. 서로를 비교하지 않고 시기 질투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드러내며 조화를 이룬다. 그래서 더 아름답다.
아름다운 계절에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마지막에 일어난 사건을 기억하며 예수님의 부활을 준비하는 거룩한 한 주간을 보내게 된다.
예수께서는 유다인들의 선동에 이끌린 빌라도에게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군인들은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고 자주색 옷을 입히고 나서, “유다인의 임금님, 만세!” 하며 빰을 때린다. 철저히 무시당하고 조롱받는 비참하고 무력한 임금의 모습이다. 힘과 권세를 부리는 임금이 아니라 비폭력과 평화의 임금이다. 권력으로 두려움을 조장해 내리누르는 이가 아니라 억울한 이들과 함께 누명을 쓴 임금! 그러기에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고통받고, 슬퍼하는 이들과 함께 슬퍼하며 공명하는 사랑이 충만한 왕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분을 마음을 다해 섬긴다.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결국 권력의 힘에 죽임을 당했지만,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서 믿는 이들에게 희망을 안겨 주었다. 이제 십자가는 단순한 사형 도구가 아니라 다른 이를 살려주는 사랑의 표징이 되었다. 고통을 통해 참 평화를 가져오고 십자가를 통해 부활의 영광이 온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통과 슬픔, 아픔과 불편함이 누군가를 위한 사랑이 되기를 희망한다면 욕심일까?
유다인들의 잘못된 종교적 신념이 예수님의 죽임을 가져왔듯이 세상에는 다툼이 참 많다. 여와 야, 보수와 진보, 노와 사, 세대 간의 갈등과 다툼, 개인의 다양한 가치와 신념에 이르기까지 그 다툼의 원인은 다양하겠지만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다른 이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는 데서 온다. 신념을 갖는 것은 중요하지만, 열려 있지 않으면 함부로 판단하고 강요하며 단죄하게 된다. 자신이 지닌 확신이 때로는 편견이 될 수 있고, 오해가 될 수도 있다. 내 생각과 가치가, 다른 이에게 폭력이 될 수도 있다. 나와 다른 너를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마음을 열어 소통함으로써 다툼을 줄여야 할 것이다. 다툼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기 때문이다.
신념의 벽을 높이 세우고 울타리를 치며 그 속에 자기를 가두어 놓는 사람은 스스로 고립되는 사람이다. 나의 이기심과 자기중심의 골방에 있는 그는 우물 안의 개구리다. 그러나 오그라든 마음을 열어 서로를 갈라놓는 모든 분열의 담을 헐고 불의와 부정, 폭력과 억압, 불평등과 차별, 현실과의 타협을 넘어서는 희생과 헌신의 사랑에 눈뜨게 된다면, 그것이 부활의 삶이라 감히 말할 수 있다. 국가의 지도자와 공직자들은 물론 나부터 해묵은 관행과 편향적인 논리, 기득권, 편견과 선입견, 알량한 자존심과 비판적인 사고방식을 내려놓을 때 주변의 모두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기쁨을 맞이할 것이다. 부활은 ‘해묵은 나’가 죽고 ‘새로운 나’가 탄생하는 것이다. 새로 태어나려면 묵은 생각이나 낡은 틀을 버려야 한다.
스스로 낮추고 상대를 인정하며 이웃과 공명하는 가운데 메마른 마음이 활짝 펴지기를 소망한다. 이웃을 향한 사랑의 승리를 위해서는 희생과 아픔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간판을 내려놓은 자리, 거창한 슬로건을 내걸지는 않지만, 누군가 진정한 사랑과 헌신으로 봉사할 때, 우리 사회는 분명 더 맑고 밝은 환한 사회로 새롭게 성장하고 발전할 것이다.
얼어붙었던 산과 바위틈에서 진달래꽃이 환히 피어나듯, 꽃잎을 떨구는 순간이 끝이 아니라 녹음을 당기는 또 하나의 시작이듯이 우리가 머무는 곳에, 사랑의 꽃이 피어나도록 애쓰는 이가 있는 한 부활의 생명은 계속될 것이다. “꽃은 필 때도 아름다워야 하지만 질 때도 고와야 한다. 지는 꽃도 꽃이기 때문이다. 사람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저마다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까닭이다”(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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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05. 성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구청에서 8년을 지냈습니다. 가끔씩 ‘투서’를 보내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본당 사목자에 대한 비난과 비리를 밝혀달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성전 신축 과정에서 비리가 있다고 하는 경우도 있고, 특정한 단체에 대한 불목과 불화가 있다고 하는 경우도 있고, 여성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경우도 있고, 강론 내용에 대한 비난도 있습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잘못이 있다면 고치도록 해야 합니다. 억울한 이가 있다면 그것도 풀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투서’를 이용한 모함과 비난이 있다면 그것 또한 바로 잡아야 합니다. 투서를 보내는 이들의 공통점도 있습니다. 교회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있습니다. 교회에 대해서 무관심한 사람은 투서를 보낼 일도, 이유도 없습니다. 본당 사목자와 친밀한 관계가 있습니다. 애정이 애증으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본당 사목자와 가까이 있었기에 본당 사목자의 장점과 단점을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본당은 사목자와 교우들이 하느님나라를 위해서 화목하게 지내는 것을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2000년 동안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성주간 수요일입니다. 어제에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의 배반을 예고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그런 유혹은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배반하고, 모함하는 것은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모함과 비난은 기득권을 지녔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위는 하느님에게서가 아니라 악으로부터 온다고 모함하였습니다. 율법과 계명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행위를 단죄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였습니다. 배반의 절정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 이루어집니다. 유다는 은전 서른 닢에 예수님을 대사제들에게 넘겼습니다. 베드로는 만일 예수님을 안다면 천벌을 받아도 좋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었던 제자의 배반, 사랑하는 제자의 배반을 보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는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말하면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목자들이 있습니다. 과도한 음주와 무절제한 생활 습관으로 건강을 해치는 사목자는 그 행위로 주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공동체를 돌보지 않고 성사를 거룩하게 집전하지 않고 개인적인 취미활동에 빠져 있는 사목자는 그 행위로 주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탓으로, 시대의 탓으로 돌리면서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 하는 사목자는 그 행위로 주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돌보지 않고, 주님께서 맡겨주신 포도밭을 황폐하게 만드는 사목자는 그 행위로 주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되었지만 세상의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신앙인도 그 행위로 주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자기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이웃의 눈에 있는 티를 들쳐 내는 신앙인도 그 행위로 주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지금 굶주리는 이를 외면하고, 지금 아파하는 이를 외면하고, 지금 외로운 이를 외면하는 신앙인도 그 행위로 주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저 역시도 “저는 아니겠지요?”라며 애써 저 자신의 허물과 잘못을 감추었던 적이 많았습니다. ‘다음에 하지 머’라고 하면서 지금 해야 할 책임을 뒤로 미루었을 때 저는 그 행위로 주님을 배반하였습니다. ‘남들도 그러는데 머’라고 하면서 저의 잘못을 합리화 했을 때 저는 그 행위로 주님을 배반하였습니다. ‘나는 할 수 없어’라며 현실에 안주하였을 때 저는 그 행위로 주님을 배반하였습니다. 그런 저를 위해서, 사목자를 위해서, 그런 신앙인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오늘도 주님의 식탁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해 내어줄 내 몸이다.” 그렇습니다. 무도한 우리의 행동에도 주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처럼 회개의 눈물을 흘리기를 기다리십니다. 성주간 수요일입니다. 우리는 이제 곧 파스카 성삼일을 지내게 됩니다. 나를 위해서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면서 은혜로운 회개의 때를 거룩하게 보내면 좋겠습니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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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05. 성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결혼 생활 20년이 된 중년의 부인이 있습니다. 남편의 직장 때문에 늘 바빠서 함께 하기 힘들고, 그래도 자녀 때문에 산다고 했는데 자녀 역시 어느 순간 “내가 알아서 할게”라면서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직장 생활도 20년 동안 가정만을 지켰기에 이렇게 오랫동안 경력 단절이 있는 자신을 어느 회사에서도 채용하지 않을 것 같아서 포기했습니다. 무료한 일상 안에서 친구가 여행을 제한합니다. 그것도 한 번도 가 보지 못했던 해외를 말이지요.
남편에게 이 여행에 대해 말하니, “그럼 나는 누가 밥해줘? 애들은 누가 챙겨?”라면서 반대하는 것입니다. 이 말에 화가 나서 무작정 여행을 떠납니다. 자기는 밥이나 해주고 청소, 빨래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서 말이지요.
여행을 통해 이 여인은 자기를 찾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해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남편에게도 휴가가 필요해. 살갗에 햇볕을 느낄 필요가 있어.”
자신을 사랑하면서 다른 사람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행 전에는 자기 생각만 하던 여자가 드디어 제대로 눈을 뜨고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실화가 아닌, 어느 책에 담긴 내용을 정리해본 것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은 사람이 비로소 남도 볼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인상 깊은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을 묵상하게 됩니다. ‘나’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은 이웃 역시 제대로 볼 수 없고 당연히 주님의 사랑도 볼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아야 하며, 이로써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제자들도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잘 알고 계셨지요. 사랑하는 제자들이 어떻게 할지도 당연히 잘 알고 계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라는 말씀에 제자들은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말합니다.
짐짓 자신은 주님을 절대로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이 마음은 유다 이스카리옷도 처음에는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은돈 서른 닢에 예수님을 넘길 마음을 품습니다. 은돈 서른 닢은 당시 노예의 가격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을 믿고 따라야 할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한 명의 노예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자신이 예수님보다 더 높은 존재로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도 다른 제자들처럼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뻔뻔하게 묻습니다.
죄로 쉽게 기울어질 수 있는 자신을 몰랐기에, 세상의 관점으로만 판단하고 있었기에 그는 커다란 죄를 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연히 주님을 사랑할 수도 없었습니다. 자기를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제대로 섬기고,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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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일을 하실 때 조금도 서두르지 않으신다. 시간은 내 것이 아니라 그분의 것이다(카를로 카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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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05. 성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배움의 여정
-우리는 모두 주님의 제자들이다-
한밤중 밤1시 기상하여 숙소문을 열고 나서니 반가운 봄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요즘 들어 온갖 파스카의 봄꽃들이 만발한데 봄비가 내리면 이어 신록의 기쁨으로 빛나는 파스카의 계절, 부활시기가 펼쳐질 것입니다. 봄비하면 즉시 떠오르는, 참 자주 인용했던 “내 딸아이 하나 있다면”이란 짧은 자작시입니다.
“마음을 촉촉이 적시는 봄비!
하늘 은총
내 딸 아이 하나 있다면
이름은
무조건 봄비로 하겠다”-2005.4
무려 18년전 시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같은 심정입니다. 이어 “예수님은 봄이다”라는 24년전에 쓴 시도 생각납니다.
“예수님은 봄이다
봄은 사랑이다
봄은 생명이다
봄이 입맞춘 자리마다
환한 꽃들
피어나고
봄의 숨결 닿은 자리마다
푸른 싹들
돋아난다
예수님은 봄이다
봄은 사랑이다
봄은 생명이다”-1999.4
주님께서 선물하신 파스카의 봄 역시 저에겐 스승입니다.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발견하는 삶의 스승들입니다. 선물임과 동시에 스승입니다. 눈이 닫혀 스승이 없다 탄식하는 것입니다. “저에게 가장 큰 스승은 여기 수도공동체입니다” 고백이 지금도 여전히 저에겐 유효합니다.
나이 불문하고 배움에는 위아래가 없습니다. 배움의 자세에 침묵과 경청, 겸손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사실 겸손해야 배웁니다. 평생 배움터의 인생학교에서 경청과 겸손은 필수입니다. 며칠전 컴퓨터 복구작업에 성공한 안토니오 후배 수사도 저에겐 스승이었고 공동대화란에 올린 격찬의 메시지와 답신이 생각납니다.
-“안토니오 수사님, 컴퓨터에 도사이자 천재입니다! 제 컴퓨터 복구에 성공했고 많이 감사했습니다.”
“컴맹입니다. 강론때 이야기하시는 거는 아니죠? 제 이야기는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에 일어나 강론을 쓰시는 프란치스코 신부님을 향한 하느님의 배려이십니다.”-
주고 받은 덕담에 행복했고, 수도공동체 스승에 감사했습니다. 예수님과 우리 사부 성 베네딕도도 배움에 대해 역설하십니다. 사실 배움의 여정에 우리는 언제나 초보자일뿐입니다. 평생 훈련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만 평생 배움도 얼마나 중요한지요! 기도도 사랑도 겸손도 섬김도...도대체 모든 수행이 훈련이자 배움임을 깨닫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11,29)
친히 제자들인 우리에게 주시는 스승 예수님 말씀입니다. 사부 성 베네딕도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학원을 설립해야 하겠다. 우리는 이것을 설립하는데 거칠고 힘든 것은 아무것도 제정하기를 결코 원치 않는다.”(성규,머리45-46)
우리가 주님의 학원에서 섬김을 배워야 할 평생 스승은 그리스도 예수님뿐입니다. 다음 복음 말씀이 이를 분명히 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다.”(마태23,8.10)
얼마나 좋습니까? 얼마나 감사합니다? 평생 보고 배울 스승이자 선생님인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여기에다 스승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면 당신의 제자이자 친구가 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스승이자 친구인 예수님! 얼마나 멋집니까? 얼마나 행복한 우리들입니까? 제 좌우명 기도중 제가 참으로 좋아하는 대목도 다시 나누고 싶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주님의 전사로, 주님의 학인으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이기적인 나와 싸우는 주님의 전사로,
끊임없이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주님의 학인으로,
끊임없이 수도가정에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그러니 주님의 집 공동체는 전우애, 학우애, 형제애가 조화된 아름다운 공동체입니다. 제대가 없는 평생 현역의 영적 전우들이요, 졸업이 없는 평생 학우들이요 평생 함께 살아가는 형제들입니다. 이 중 오늘 강조되는 부분이 주님의 학인이, 제자가 되어 배우는 신분입니다.
평생 배움의 여정중인 우리 믿는 이들입니다. 도대체 보고 배울 것은 끝이 없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사랑도 믿음도 희망도 평화도 기쁨도 감사도 섬김도 겸손도 침묵도 경청도 기도도 모두가 배워야 하는 수행들입니다. 아무리 배워도 영원한 초보자인 우리들입니다.
새삼 평생학인의 배움의 자세에 경청과 겸손, 샘솟는 열정과 순수가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회개하는 마음이 됩니다. 이런 이들이 참 매력적인 아름다운 참 사람입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오늘 말씀을 대하면 그 이해가 확연해 집니다. 이사야서 주님의 종이 그 모범이요 우리는 그에게서 예수님을 봅니다.
“주 하느님께서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는다.”
이런 경청과 겸손의 주님의 종이, 주님의 제자가 되어 살 때 저절로 내적 확신에서 터져 나오는 고백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 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분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누가 나에게 대적하려는가? 우리 함께 나서 보자. 누가 나의 소송 상대인가? 내게 다가와 보아라. 보라,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데 나를 단죄하는 자 누구인가?”
그대로 예수님의 모습이요 우리가 소망하는 주님 제자로서의 참으로 자존감 높은 당당함이요 겸손함입니다. 이래야 열등감이나 우월감에서 벗어나 자유롭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종으로서 한결같이 충실하셨기에 만인의 스승이 되신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종으로서 빛나는 예수님의 의연함과 당당함이 이를 입증합니다.
-예수님은 파스카 식탁에서 제자됨의 신원을 다시 확인시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 넘길 것이다.”
제자들은 몹시 근심하며 전전긍긍 저마다 주님께 묻습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예수님의 결정적 말씀에 이어 예수님과 당신을 팔아넘길 배반자 유다와의 대화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이에 대해 배반자 유다는 불안에 가득한 마음으로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묻자 예수님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하고 화두같은 대답을 주십니다.-
이때라도 회개했어야 하는데 유다는 그 기회를 놓쳤고 결코 자기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평소 제자로서 경청과 겸손, 순종의 훈련과 배움이 참으로 부족했기에 이런 불행을 자초한 유다가 주님을 추종하는 우리 제자들에게는 시공을 초월하여 반면교사가 됩니다. 누구나의 가능성이 배반자 유다입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의 제자직에 한결같이 충실할 수 있도록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의 도움을 청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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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05. 성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우리 주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을 팔아넘길 사람과 한 식탁에서 밥을 먹을 수 있으시겠습니까? 밥이 넘어 갈까요? 배신감과 분노에 가득 차서 팔아넘길 사람의 멱살이라도 잡지 않을까요?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그런 그를 바라보시며 한 식탁에 앉아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 주변의 제자들도 조금 이상합니다. 만약 제가 저의 주님에게 오늘과 같은 말을 들었다면 저는 이렇게 물었을 것입니다.
‘누굽니까! 그 사람이 누굽니까! 주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신 것 같은데 제게 알려주십시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제가 돕겠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팔려 가신다는데, ‘저는 아니겠지요?’가 웬 말입니까.
나만 아니면 된다는 뜻으로 들려서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내 고통이 아니면 외면하는 우리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내 일만 아니면 눈감아 버리는 우리 모습 같아서, 뼛속까지 이기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픕니다.
그 한가운데에 주님께서 식사하고 계십니다. 이기적이고 자신밖에 모르는 우리 인간들 한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식사하십니다. 한 식탁에 앉아서 말입니다.
그렇게 주님은 이미 제자들을 용서하신듯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한 식탁에 앉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살아가십니다. 우리는 용서하시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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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았습니다.
예전 생각이 납니다. 외국 생활을 막 시작했을 무렵입니다. 그때는 음식 하나 제대로 못 했습니다. 고작 볶음밥과 라면 정도…. 그때는 빨래, 청소 등도 제대로 못 할 때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학교로 공부하러 간 사이에 제가 지내는 숙소에 들러 집안일을 도와주실 외국인 도우미를 구했습니다.
처음에는 깨끗하게 일을 잘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제 어머니가 매우 아프셔서 걱정입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 또한 함께 걱정해주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지 며칠 후 그분께서는 갑자기 오늘 당장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이 마지막으로 일하는 날이 될 것이라 말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정말 고마웠다고 인사했습니다. 그리고 월급봉투에 차비를 더 넣어 건넸습니다.
학교를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알았습니다. 생활비, 묵주반지, 쓸만한 옷, 신발….
도둑맞았습니다. 지금은 원망하지 않습니다. 급해서 그랬겠거니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너무나 화가 났었습니다. 잃어버린 것이 화 났던 것이 아니라 배신당했다는 마음에 화가 났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제자들을 용서하실 수 있으셨을까요? 잘 모르는 사람이 배신해도 이렇게 불같은 화가 일어나거늘, 우리 주님께서는 어떻게 제자들을 용서하셨을까요? 사순을 지내며, 성삼일을 목전에 두고 다시 한번 ‘주님의 용서’를 묵상하는 하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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