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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寅年 *정착과 부흥의 해* 5月 ☞가족과 이웃 구원의 달☜ ※보고서를 정직하고 투명하게 기록하여 각 카페에 입력해 놓으면, 6월 30일 복사해갑니다.
창4:16-26절) 세 종류의 삶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세 종류의 사람들이 살았던 삶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 세 종류의 사람들은 우리와 시대가 멀리 떨어져 있는 고대(古代)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어떤 식으로 살았는지 정확하게 재구성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또 그들은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들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특징 있는 삶을 살았고, 그 삶의 모습은 현대의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아주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첫 번째는 가인이 살았던 삶의 방식입니다.
가인이 살았던 삶의 특징은 끊임없는 방랑입니다. 가인은 한 곳에 정착할 수가 없었습니다. 무엇인가 새로운 시도를 하고 끝없이 새로운 곳을 향하여 떠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충동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인은 한평생 방황하고 방랑하다가 삶을 마쳤습니다.
두 번째는 가인의 후손 중 라멕이라는 사람의 삶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라멕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라멕은 그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것을 다 가졌고, 누리고 싶은 것을 다 누린 대표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본인이 탁월했을 뿐만 아니라, 자녀들도 전부 탁월해서 인간 문명의 발달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세 번째는 셋의 아들 에노스의 삶입니다.
에노스는 가인의 자손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죽은 아벨 대신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셋의 아들이었습니다. 에노스의 삶에서는 주목할 만한 것을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는 많은 곳을 돌아다니지도 못했고, 자식에게 덕을 볼 일도 별로 없었으며, 무엇인가를 발명하거나 개발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특징적인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Ⅰ.가인의 삶
가인이 살았던 삶의 특징은 끝없는 방황입니다.
4:16-l7절)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편 놋 땅에 거주하더니.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우리는 가인의 삶에서 이중적인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나는 그가 정처없이 떠도는 방랑자의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런 중에서도 그가 결혼을 했고, 자식을 낳았으며, 더욱이 성(城)을 쌓아서 정착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 생략(省略)된 부분이 많기 때문에 가인의 삶이 어떠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순 없습니다.
젊어서는 정처없이 방황하였지만, 늙어서는 정신을 차리고, 아내에게 돌아와 성(城)을 쌓고, 거기에서 처자식을 먹여 살리면서 같이 살았는지, 아니면 젊어서는 자기 나름대로 정착해보려고 결혼도 시도하고, 성(城)도 쌓아 보았지만, 결국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방황하다 죽었는지 알 순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가인이 끊임없이 방황했다는 것과 그 중에서도 정착하려고 성(城)을 쌓았다는 두 가지 사실만 확인할 수 있을 뿐입니다.
오늘 가인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가 하나님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떠나서 끝없이 하나님 없는 삶을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4:16절)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가인의 삶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는 처음부터 하나님을 몰랐던 사람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의 의식속에는 *하나님 앞* *하나님의 존전*이라는 개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자기 욕심과 자기 죄 때문에 분노를 이기지 못함으로써 하나님의 존전에서 쫓겨나서 하나님 없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물론 가인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하나님의 빛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를 맛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즉 가인은 택함 받지는 않았지만, 성령이 주시는 기쁨을 체험했고, 예배의 소중함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가인에게 *하나님 앞*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농사를 지으라고 주신 땅이었을 것입니다. 항상 불붙어 있는 에덴동산이 바라다 보이는 그곳을 가인은 *하나님 앞*이라고 불렀던 것 같습니다.
거기서 가인은 에덴을 바라볼 수 있었고, 여러 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을 때, 가인은 화를 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면서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벨을 죽였을 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 곳도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즉 에덴을 바라볼 수 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곳, 그곳이 가인에게는 *하나님 존전*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 앞을 떠나서 하나님 없는 삶을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것이 그가 살았던 삶의 전부입니다.
이 점에서 가인은 라멕과 달랐습니다. 가인의 후손 라멕에게는 처음부터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했습니다. 라멕은 하나님의 은혜나 성령의 기쁨 같은 것은 아예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던 사람입니다. 즉 성령의 감동을 체험한 적이 있는 사람이었고, 예배의 기쁨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존전을 떠나서 타락하자 어느 곳을 가도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다가 타락한 사람, 예배의 기쁨을 알고도 타락한 사람은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정착할 수 없습니다. 즉 한 번이라도 하나님 앞에 있어 본적이 있는 사람은 거기에 최고의 것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오직 최고의 것만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면서 경험하는 것은 최고의 것입니다. *예배드리면서 드리는 찬양은 최고의 찬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독생자를 주신 사랑은 최고의 사랑입니다. *저 같은 죄인을 불러서 설교자로 삼으신 것은 최고의 은혜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예배드리면서 경험하는 것은 모두가 최고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사상은 전부가 최고입니다. 그러나 *죄 때문에 이 모든 축복을 잃어버린 사람은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너무나 큰 것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도저히 견디지 못하는 겁니다. 신앙을 버릴 당시에는 그것이 그렇게 큰지 모릅니다. 그러나 일단 잃고 나면, 도저히 다른 것으로는 그 허전함을 메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극단으로 달려가게 되어있습니다. 즉 더 미신(迷信)을 찾든지, 술을 찾든지, 다른 일에 빠지게 되어 있어요.
어떤 남자가 한 여인을 미치도록 사랑했다가 그 여자를 잃었을 때, 어떻게 합니까? 그 여자를 잊기 위하여 계속 술을 퍼마시거나. 다른 대용품을 찾지요. 즉 게임을 해도 미친듯이 합니다.
그러다가 안 되면, 아예 때려부숴 버려요. 아니면 비오는 날 고수부지를 헤매면서 방황합니다. 너무나 큰 것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그런 사람을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이방 선지자 발람입니다. 발람은 드물게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의 신(神)에 감동받아 예언한 사람입니다. 그는 정말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발람은 돈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지 말라 고 했는데도 모압 왕 발락의 요청을 따라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너무 강하게 역사한 탓에 저주 대신 축복의 말을 했던 사람이 곧 발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결국에는 그 돈을 얻기 위해서 여자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음행(淫行)에 빠뜨리는 계략을 전해 줍니다. 일시적으로 성령이 강하게 임하는 바람에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지는 못했지만, 결국에는 돈욕심을 버리지 못해서 계략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망하게 했던 것입니다.
모세는 여호수아를 보내서 이 발람을 죽이게 했습니다. 발람은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의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예언을 했습니다. 그리스도가 태어나셨을 때, 동방박사들은 *별이 뜰 것*이라는 예언에 따라 예수님께 찾아오는데, 이 예언을 했던 사람이 곧 발람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이 예언의 존귀함을 알지 못하고, 돈을 사랑했기 때문에 결국 여호수아의 칼에 죽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성령을 여러 번 체험했습니다. 사울은 도저히 성령을 체험할 것같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는데도 성령을 여러 번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는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는 속담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이것은 *사울도 선지자라고 볼 수 있느냐?*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떠나자 그에게는 심한 우울증과 신경쇠약 증세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결국 거의 반미치광이가 되어서 엔돌의 무당을 찾아갔습니다.
이렇게 최고의 은혜를 한번 맛보고, 타락한 사람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고 다른 극단(極端)으로 달려갑니다.
가룟 유다를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의 존전에서 말씀을 들었던 자입니다. 가룟 유다에게 말씀을 가르친 분은 성자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돈 욕심을 버리지 못해서 예수님을 은 30냥을 받고 팔았습니다.
그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목매어 자살할 때, 배가 터져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경험하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솔로몬의 잔칫상을 보십시오. 거기에는 이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최고의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들을 때, 일어나는 모든 것은 최고의 것입니다. 즉 최고의 사랑, 최고의 찬양입니다. 그것을 능가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상대적으로 좋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절대적으로 좋은 것입니다.
극상품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맛보고서도 돈 욕심과 세상 욕심을 포기하지 못하고, 따라간 사람들은 반대편으로 극단적(極端的)으로 달려갑니다. 우리는 그들이 끊임없이 방황하거나, 다른 대용품을 만들어서 살다가 비참하게 죽는 것을 봅니다.
유대인 중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은 참 드뭅니다. 게다가 그중에서도 목사 집안은 아주 귀하고, 특별한 집안입니다. 니체는 목사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버렸고, 계속 방황했으며, 결국에는 <짜리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통해 철학적인 절대자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마르크스를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의 빛을 한번 경험한 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을 떠나자 다른 이론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결국 *공산주의*를 만들었습니다.
공산주의는 이론으로는 최고의 이론입니다. 실제로 되는지. 안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머리로는 최고의 이론*이지요. 그는 이렇게 다른 대용품을 만들어 내고야 말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예배드리고, 성도들 사이에서 교제하는 것은 내가 그 가치를 깨닫든지. 못 깨닫든지. 간에 극상품의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 욕심이나, 기질로 하나님 앞을 떠나면, 다른 것으로 그 빈자리를 채울 수가 없습니다.
돈이나 명예 같은 것으로는 채울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극단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가인은 무슨 일을 했습니까? 자기의 성(城)을 쌓았습니다. 이 당시에 자기 성(城)을 쌓았다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하나님을 잃고, 끊임없이 방황하다가 결국 마지막으로 가인이 붙든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의 성(城)을 쌓고, 거기에서 군림(君臨)하고, 거기에서 큰소리치다가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한번 알고. 타락한 사람은 끝없이 방황하든지, 아니면 자기 성(城)을 쌓고 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전을 한번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다는 것은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즉 옛날에 신앙생활 하다가 타락해서 방황하던 사람이 돌아왔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축복 중의 축복이요.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탕자가 돌아올 때나 동전을 잃었다가 되찾을 때, 하늘에서는 큰 잔치를 벌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한번 기독교인이 되었다가 실망하고 떠난 사람은 다시 돌아오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돌아왔다는 것은 정말 축복이지요. 즉 자기의 성(城)을 쌓지 않고, 자기의 세계에 갇히지 않고, 하나님께 다시 돌아왔다는 것은 정말 엄청난 축복입니다. 가인의 성(城)은 자기가 절대적으로 군림(君臨)하는 영역(領域)이었습니다.
돌로 벽을 쌓아놓고,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한 채. 자기만 절대적으로 군림(君臨)하는 영역(領域), 그것이 곧 가인의 성(城)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릴 때, 자주 공상(空想)에 빠지곤 합니다. 공상(空想)에 빠질 때, 어디로 갑니까? 자기 혼자만의 세계로 갑니다.
거기에서는 내가 왕(王)이요, 신하(臣下)요, 공주(公主)입니다. 어린 왕자처럼 혼자 별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서 내 맘대로 살 수 있는 곳이 공상(空想)의 세계입니다.
<어린 왕자>를 쓴 생텍쥐페리는 가인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어린 왕자>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 전부 별을 하나씩 차지하고서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으면서 살거든요. 그리고 생텍쥐페리 자신은 야간비행을 하다가 어디선가 추락해서 죽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결국 자기의 세계를 구축하게 되고,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해서 하염없이 가다가 죽고 맙니다.
산(山)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눈 덮인 남미의 산(山)을 가로지르다 죽는 것이 소망*이라고 했습니다. 거기에서 *눈을 밟으며 가다가 죽는 것이 꿈*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그렇게 죽었습니다. 즉 퇴직금 타서 남미의 어느 산(山)을 등반하다가 실종되었는데, 눈 위에 죽어 있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끝없는 외로움입니다.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 외로움과 갈망, 끝없는 그리움, 이것이 가인의 삶이었습니다. 즉 끝없이 방황하다가 결국 자기 세계에 갇혀서 최후를 마치는 삶, 이것이 곧 하나님의 존전을 떠난 가인의 삶입니다.
Ⅱ.라멕의 삶
라멕은 가인의 5대손입니다. 가인과 라멕 사이에 나오는 이름들은 그렇게 주목할 만한 가치를 지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여기에 인용된 것은 라멕이 가상적(假想的)인 인물이 아니고, 실제로 존재했던 역사적 인물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인 것 같습니다.
라멕은 사실로 믿어지지 않을 만큼 탁월한 업적(業績)을 남긴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라멕은 이 세상에서 해볼 수 있는 것은 다 해보았고, 성취하고 싶은 것은 다 성취해 본 사람이었습니다.
첫째로 라멕은 아내가 둘 이었습니다.
4:19절)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한 남자가 한 여자와 결혼하여 부부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법칙입니다. 이 당시는 창조된 지도 얼마 안 되고, 에덴동산을 떠난지도 얼마 안 된 때였기 때문에 감히 아내를 두 명 거느리려고 했던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라멕이 얼마나 정욕적이며 용감했는지 *뭐, 대장부 남자가 한 여자에게 얽매일 필요가 있나? 능력이 있으면, 몇 명이라도 거느릴 수 있는 거지* 하면서 두 명의 아내를 취했습니다.
성경의 기록으로 보면, 라멕은 아내를 두 명 취한 최초의 남자입니다. 물론 그 뒤에도 많은 사람이 그렇게 했지만, 그것은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누가 맨 처음 이 짓을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지요. 그러나 또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라멕의 자식들이 모두 탁월했다는 것입니다.
아다는 야발과 유발이라는 두 아들을 낳았는데, 야발은 장막에 거하면서 육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물론 아벨도 양 치는 자였지만, 그 양은 몇 마리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야발은 장막에 거하면서 전문적으로 목축업을 해서 크게 성공한 사람입니다. 즉 기업으로서의 목축으로 성공한 사람이 곧 야발입니다. 그와 이름이 비슷한 동생 유발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에게는 음악의 재능이 있었습니다.
4:21절)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유발을 우습게 알면 안 됩니다. 그는 그냥 심심해서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피리를 만들어 분 사람이 아닙니다. 유발은 음악의 전문가였습니다. 그의 음악은 많은 사람의 인정을 받았고, 그에게 음악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유발은 아마도 많은 음악을 작곡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악기를 만들어 보급하기도 한 것 같습니다. 또 씰라에게는 두발가인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는 대장장이로서 동철로 각양 기계를 만드는 자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대개 오랫동안 석기 문명시대가 있었고, 다음에 청동기 문명이 왔으며, 그 후에 철기문명 시대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증거에 의하면, 두발가인 때, 철기 문명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라멕은 자식 농사에서 성공한 사람입니다. 큰 아들은 유명한 목축업자요, 부자입니다. 작은 아들은 음악의 대가입니다. 또 막내는 유명한 공학도요. 기술자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이윤(利潤)추구나 즐거움을 위하여 이런 일을 하기도 했겠지만, 동시에 인류문명의 발달에 큰 기여를 한 것이 사실입니다.
게다가 두발가인의 누이 나아마는 그 이름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아마가 무엇을 한 여자인지는 모르지만, 이 당시에 아주 유명한 여자였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즉 미모가 뛰어났을지도 모르지요.
이런 의미에서 라멕은 이 세상에서 대성공을 거둔 사람입니다. 일단 결혼에서 성공한 사람은 인생의 절반은 성공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했다면, 인생의 절반은 이미 접고 들어가는 것이지요. 나중에 실패하는 사람들을 보면, 부부 싸움하다가 이혼하고 망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결혼에 성공하면. 인생의 절반을 성공했다고 하는데, 라멕은 두 번이나 성공했으니까 탁월하게 성공한 사람입니다. 게다가 그의 자식들은 보통 자식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하나가 전부 탁월했어요.
자식이 셋 있는데, 하나는 하버드 나와서 국제 변호사를 하고 있고, 하나는 예일대를 나와서 의사를 하고 있고, 하나는 다른 명문대학 공대 나온 기술자인 집이 었다면, 사람들은 입에 침을 튀기면서 *저 집은 정말 복 받은 집이야*할 것입니다. 그런데 딸까지 너무 예쁜겁니다.
라멕은 누구라도 부러워 할 사람이었습니다. 재벌을 보십시오. 재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돈이 많습니다. 아들들은 비싼 사립학교에 유학가서 공부합니다. 딸들은 또 얼마나 신랑감을 고르고 골라서 결혼합니까?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성공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사실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보고 싶어 합니다. 어떤 사람은 가인처럼 끝없이 방황하다가 그냥 눈 위에 쓰러져서 죽고 싶어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이 땅에서 하고 싶은 것 다 해보고 자식들한테도 회사 하나씩 척척 주고 싶어 합니다.
라멕 집 안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수백 년에 걸쳐서 할 일을 한 세대에 끝낸 아주 탁월한 집안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라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 본문은 라멕이 자기 아내에게 남긴 고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4:23-24절)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겉으로는 그렇게 성공했지만, 실제로는 라멕 역시 살인자(殺人者)였습니다. 라멕은 자기가 가진 그 모든 성공으로도 죄의식을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죄가 가인의 죄보다 훨씬 무겁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그는 가인처럼 한 사람만 죽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라멕은 자기 욕심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모두 다 죽이고. 성공한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을 죽이는 자에게 벌이 7배라면, 자기를 죽이는 자에게는 벌이 77배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자기가 그만큼 더 중대한 죄인이라는 것이지요. 즉 그는 자신이 특별한 보살핌을 받아야 할 중죄인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 한 중요한 죄인이 교도소에 들어갈 때, 경찰이 호송차를 타고 그 사람을 뺑 둘러서 경호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는 그만큼 중요한 죄수이기 때문입니다.
즉 어느 누구도 개인적으로 보복해서는 안 되며, 국민 전체 앞에서 판결을 받아야 할 중요한 죄인이기 때문에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을 특별히 보호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는 아주 중요한 죄인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대에 설 때까지 누가 사적인 보복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가인이 사적인 보복을 받고 *이제 내 죄를 다 갚았다*는 오해를 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은 누구든지 가인을 건드리면, 7배나 벌주겠다고 하시면서 가인을 지키셨습니다.
가인은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살인을 저지른 아주 중요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라멕이 등장하면, 가인도 경쟁이 되지 못합니다. 그는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인 무서운 죄인인 것입니다. 문명의 발달에 기여했다 해서 하나님이 라멕을 용서하실 리가 없습니다.
문명의 이기(利己)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원리를 찾아서 응용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람이 개발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즉 탱크 밑에서 도는 무한궤도가 어디에서 나온 겁니까? 뱀이 비늘을 움직이는 원리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까?
사진기라든지, 레이더 같은 모든 발명품들도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원리를 응용한 것입니다. 인간들은 모든 발명품에 대해 하나님께 로열티를 지불해야 합니다. 해 아래 새것이 어디 있습니까? 다 하나님이 만든 것을 응용해서 적용한 것이지요,
세상의 부귀란 부귀를 다 누려 본 사람은 아마 솔로몬일 것입니다. 그가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전1:9절)...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다.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니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멋진 사랑을 전2:8절)..처와 첩을 많이 얻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공부를 많이 했고, 자연을 깊이 연구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세상의 많은 경험을 찾아서 방황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만든 세계의 아주 작은 부분을 발견해서 응용한 것에 불과하며, 결국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라멕이 거둔 성공의 배경에는 분노가 있었습니다. 그가 자신을 극도의 분노에 빠뜨렸고, 그 분노에서 분출하는 힘으로써 보통 사람이 해낼 수 없는 엄청난 일을 해냈습니다.
그는 자식을 몰아쳐서 분노로 양(羊)을 치게 하고, 분노로 피리를 불게하며 분노로 쇠를 녹이게 해서 거기에서 창의적인 것을 끌어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고, 너무 많은 사람들의 피를 흘렸습니다.
라멕이 이렇게 성공하기까지 그 발밑에 짓밟힌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그리하여 라멕은 사소한 죄인은 길을 비켜야 할 정도로 엄청난 죄인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분노 없이 성공할 순 없습니다. 성공하려면 닥달을 해야 합니다. 자식들을 마냥 사랑하면, 성적이 떨어집니다. *때리고 못 살게 굴고 악으로 공부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성공하고 나면, 어떻게 됩니까? *많은 사람을 죽입니다.
분노로 성공한 사람은 모든 사람들을 이용할 줄만 알지, 어느 누구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합니다. 라멕의 삶은 겉으로 보기에는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분노로 살아왔으며, 모든 사람들을 이용하고 짓밟았습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 앞에 무서운 죄인으로 나타나게 되었고, 누구보다 라멕 자신이 그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Ⅲ.에노스의 삶
이제 우리는 또 다른 한 사람의 삶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가인의 후손이 아닌 사람의 삶입니다.
4:25-26절)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인간이 범죄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깰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처음 아이를 낳았을 때, 아담과 하와는 아마도 가인이 그 여자의 후손이 아닐까? 착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호와로 말미암아 아들을 낳았다*는 뜻으로 아이의 이름을 *가인*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약속된 여인의 후손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살인죄를 지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벨이라는 동생이 있었습니다. 이 동생은 가인보다는 못했지만, 열심히 믿음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아벨은 가인의 손에 죽었고, 가인은 하나님 앞에서 쫓겨남으로써 하나님 존전에 있는 자식이 한 명도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 여자의 후손으로 뱀의 머리를 깨리라는 약속은 깨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또 다른 아들을 주셔서 이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그가 곧 셋입니다. 셋이라는 이름의 뜻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이름들을 꼭 히브리어로 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셋을 낳았을 때, *하나님이 다른 씨를 주셨다*고 말한 것을 보면, 아마도 셋이라는 이름에는 *씨*라는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셋은 대단한 믿음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 일하실 때, 계획을 세워서 하십니다. 어떤 일을 할 때, 계획을 세우고 하는 것과 계획 없이 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계획을 세우고 일을 할 때에는 어려움이 와도 끝까지 버텨냅니다.
그러나 계획 없이 즉흥적으로 일을 할 때에는 어려움과 장애가 오면, 금방 포기해 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계획을 가지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이 와도 그 계획을 반드시 성취하십니다.
그러므로 아벨은 죽임을 당했고, 가인은 하나님 앞에서 쫓겨났지만, 하나님은 셋을 주심으로써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구원을 이루겠다는 계획이 중단되지 않게 하셨습니다. *에노스는 셋의 아들*입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이때부터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공식적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생활을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신학자들은 *교회의 시작이 에노스의 예배에서 시작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즉 교회(공동체)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에덴동산도 하나님의 나라이고. 교회이지만, 타락 이후에 나타난 최초의 교회는 이 에노스의 예배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아벨의 죽음은 믿음의 제사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피를 흘리며, 죄를 고백하는 이 제사가 가인의 분노를 일으킴으로써 그의 손에서 아벨이 죽자. 사람들은 감히 피의 제사, 믿음의 제사를 드릴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가인이 언제 또 나타날지 모르는데다가 그의 제사를 다시 시작할 생각을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에노스 시대에 믿음으로 드리는 신앙고백의 제사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 라멕의 삶과 에노스의 삶을 비교해 보십시오.
라멕의 삶은 얼마나 화려합니까? 그는 그야말로 하고 싶은 것을 다 해본 사람입니다. 즉 사랑하고 싶으면 실컷 사랑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여자를 두 명이나 아내로 거느릴 정도로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자식들의 업적은 눈부실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에노스가 한 것은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아벨이 완성하지 못한 믿음의 제사를 다시 시작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얼마나 시대에 뒤떨어진 답답한 삶입니까?
누구는 목축업을 해서 떼돈을 벌고 있는데, 또 누구는 음악을 만들어서 사람들이 기뻐하고 춤추고 잔치를 벌이게 하는데, 또 누구는 계속 무엇을 두들겨서 칼도 만들고, 곡괭이도 만들고, 대포도 만들고, 컴퓨터도 만드는데, 계속 여호와의 이름이나 부른다니 얼마나 썰렁한 일입니까
결국 나중에 에노스의 자손들은 가인의 후예들이 누리는 풍성하고도 멋진 삶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하나님의 존전을 떠나서 같이 목축업을 하고. 같이 노래를 부르고, 멋진 여자들과 결혼하고, 같이 복수의 칼을 갈면서 살다가 결국 모두 홍수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분명히 에노스도 라멕의 이름과 그가 거둔 성공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의 자식들이 얼마나 큰 성공을 거두었는지, 그의 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존전을 떠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이름 부르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첫째로 그는 가장 무서운 심판은 항상 하늘로부터 임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죄인들을 심판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앙이 임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가인이 죽지 않았습니까? 아벨의 피의 호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벨의 피의 호소는 *나의 억울함을 갚아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벨의 피의 호소는 *가인을 죽이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즉 *가인을 지켜 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피를 흘렸으니. 가인은 살려 주십시오*라는 것입니다. 아벨의 피의 호소는 하나님의 심판을 부르는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호소하는 소리였습니다.
그 소리가 하나님께 들렸기 때문에 가인이 산 것입니다. 에노스와 그의 믿음의 식구들은 이 세상에 라멕 같은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지 않게 하려면, 누군가가 피의 제사를 드려서 그 죄를 덮어야 한다는 것, 즉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에노스는 하나님이 가인의 후손을 멸망시키시지 않고, 셋의 후손도 멸망시키지 않도록 계속 피의 제사를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진노가 이 땅에 임하지 않게 한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 무서운 죄가 범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진노가 지연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누군가가 피의 제사를 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이 예배를 받으시고, 이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기다려 주소서. 최후의 심판까지 참아 주소서*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을 보고 계시고, 지켜 주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다 세상 재미를 찾아 달려 나가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곧바로 임할 것입니다. 즉 오늘날 우리가 다른 사람들처럼 먹고 마시고 놀고 떼돈 버는 일에 빠지면, 곧바로 심판이 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남아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지 않도록 피의 제사로 기도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의 예배가 하나님의 진노를 막아 가인도 살게 하고, 셋도 살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셋의 자손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기를 그만두고, 가인의 자손과 같아졌을 때, 노아 홍수가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예배가 진노를 막습니다. 누군가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전쟁이 일어나려고 할 때, 그 전쟁 앞에 막아서서 하나님의 긍휼을 호소하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홍수가 일어나려고 할 때, 홍수 앞에 막아서서 *하나님의 진노를 거두소서. 이스라엘은 이 재앙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경배하며. 범죄 했을 때, 모세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기도한 것처럼. 누군가 목숨을 걸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가 우리를 살리고 가인의 자손도 살립니다. 예배가 싫어서 전부 돈 버는 데 쫓아가고. 즐기는 데 쫓아가고. 새로운 학문과 기술을 배우는 데 쫓아간다면, 홍수가 이 모든 것을 엎어버릴 것입니다. 전쟁이 이 모든 것을 엎어버릴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를 드리는 것이 우리도 살고, 이 세상 사람들도 살리는 길이며. 피의 제사를 믿지 않는 식구들을 살리는 길입니다. 내가 셀(cell)공동체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오늘날 하나님을 미워하고. 핍박하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 빈정거리는 이들을 살리는 방법입니다.
*에이! 나도 이제부터 교회 안 간다*하면서 같이 욕하고 같이 텔레비전 보면 같이 망할 것입니다. 예배가 우리를 살립니다. 아벨의 피가 가인을 살렸듯이 에노스가 드린 피의 제사가 라멕의 아들들을 살린 것을 기억하십시오.
둘째로 이들은 가장 존귀한 것은 모두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의 욕심은 이 세상에 모든 귀한 것이 다 있다는 생각을 자꾸 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새로운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앞으로 과학이 무한히 4차 산업으로 발전한다 해도 그것은 전부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것을 로열티 없이 사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려분, 참된 자유가 무엇입니까? 마음껏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것이 자유입니다. 노예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죄인은 왕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왕의 식탁에서 왕이 주는 것을 먹는다는 것 자체가 자유이고. 진짜 존귀한 자라는 증거입니다. 라멕의 성공은 무엇입니까? 멸망을 앞둔 죄인이 교도소 안에서 일시적으로 위안 받고, 기뻐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라멕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사실은 자기가 얼마나 무서운 죄인인지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 함부로 죽이면 안 돼. 내가 얼마나 중요한 죄수인데.......*한 것입니다.
예전에 본 영화에 독일군이 포로들을 가스실에서 죽이기 전에 그 앞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가스실에 사람을 넣어 죽이면서 겉으로는 음악회를 열어서 아름답게 보이려고 위장한 것이지요.
음악은 우리를 위로합니다. 기술은 우리를 편하게 해주고. 삶의 반경을 엄청나게 넓혀 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제해 주지 못합니다. 어디를 가나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아무리 즐거워도 하나님의 심판은 면할 수 없습니다. 풍요한 삶이나. 아름다운 음악이 인간의 본질을 바꾸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라멕의 아들들이 세운 공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들은 남들이 놀 때 놀지 않고,먹지 않고. 남들이 잘 때, 자지 않고. 여러 가지 많은 것을 만들어 내서 우리가 편안히 살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그 공은 인정해야 합니다. 문명의 이기(利己)를 이용하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이 세상을 보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노력이 인류 발전에 큰 기여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학문과 과학의 발전을 위해서 노력한 사람들이 많고,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존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를 새롭게 한다고 생각한다면, 컴퓨터를 배우고. 운전을 배우고. 많은 곳을 여행하는 것 자체가 나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굉장히 바보요. 미련한 생각입니다.
우리를 살리는 것은 아벨에게서 중단된 믿음의 제사, 피의 제사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세상 사람들을 대해야 합니다. 그들은 많은 노력을 했고. 우리는 그 일부를 빌려 쓰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것이 사람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그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여전히 가인의 분노와 죄의식이 있습니다. 오직 에노스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라멕에게 흘러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에노스의 가족이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왕의 성찬을 포기하고. 가인의 집안처럼 되었을 때, 인류는 다 같이 망하고 말았습니다.
교회가 교회다운 것이 세상을 돕는 최선의 길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이 이 세상 사람들을 돕는 최선의 길입니다. 모든 최선의 것이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왕의 진미는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맛볼 수 없는 최상의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최상의 것을 맛보고 있다면, 차선의 것은 다른 사람에게 양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조금씩 양보하십시오.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그렇게 귀한 것이라면, 남보다 승진이 좀 늦어지고, 남들보다 좀 적게 벌고, 좀 덜 인정받는다 해도 그것을 기쁨으로 감수해야 합니다.
말씀도 가지고, 다른 것도 다 가지려든다면, 라멕 보다 더 무서운 욕심쟁이가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멸망한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즉 돈과 하나님을 같이 붙들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고, 성령의 사역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났을 때, 돈을 과감하게 버리고, 말씀과 성령을 붙들었더라면, 그들은 지금 하나님 나라의 주역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때, 오히려 성령의 일을 마귀의 일이라고 하면서 돈을 붙들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어두운 데 쫓겨나서 슬피, 이빨 갈며, 울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파트 값이 오르고, 사회에서 인정받는 것으로 기뻐합니다. 그런 것마저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살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더 잘 알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것에서 기쁨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도 가지고, 하나님 나라도 가지고, 하나님 말씀도 가지고. 떼돈도 벌려고 한다면, 그는 최고의 죄인입니다. 라멕도 깜짝 놀라면서 *나는 여자만 두 명 거느렸는데. 당신은 어떻게 세상과 하나님 나라를 동시에 가지려 합니까? 놀랍습니다* 할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의 역사가 내 마음속에 일어날 때, 이것을 붙드십시오.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내 마음속에 감동을 불러일으킬 때, 세상적으로 손해 보는 것을 전혀 아까워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전부 다 채워 주십니다.
포기하고 포기해도 하나님이 필요한 것을 다 주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지극히 존귀한 자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도 살리고. 나도 살리고. 에노스도 살리고. 라멕도 살리는 일입니다. 여러분, 예배는 할 일 없는 꼰대 늙은이들의 소일거리가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진노를 막아서 이 세상을 살리는 일이며, 왕의 성찬에 참여하여 그 모든 진귀한 것을 맛보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내 마음에 말씀이 임할 때, 세상에 속한 욕심을 버리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직 내 안에서 그리스도만 존귀히 되게 하십시오. 그러면 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긍휼을 베푸실 것입니다. 아-멘
찬송가 401장 *주의 곁에 있을 때*
율법서(모세 오경)
▣ 예배 5월 1일(주일 예배)
☞가족같은 교회. 교회같은 가족☜
주일 예배와 헌금 봉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천국시민된 특권과 은혜감사
요4:23절)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순서 : ☆사도신경으로 시작하여 ☆성경 : 본문 읽기와 생명의 양식 주 중 감동받은 양식 재공유, ☆찬송 : 삽입된 찬송, ☆헌금 : 헌금과 봉헌기도, ☆연구원 설립을 위한 합심기도와 주기도문으로 끝내십시요.
◈후원금 외 헌금은 전체의 10/1을 연구원 설립비로 ▽입금하고, 나머지는 성도간 교제비, 애경사, 새신자 환영, 전도비 등으로 사용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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