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전 - 기우가(騎牛歌)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4. 28. 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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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전 - 기우가(騎牛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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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5. 21:06조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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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우가(騎牛歌)
요약 「기우가」는 ‘소타는 노래’라는 뜻으로, 조선 후기 문인인 옥소(玉所) 권섭(權燮)이 지은 시조 75수 중의 하나로 자필본인 『옥소고(玉所稿)』에 전한다.
초장과 중장에서는 중국의 은사(隱士: 숨어사는 선비)였던 소부(巢父)와 허유(許由)의 고사를 들고, 종장에서는 채찍 들고 ‘이럇’하면서 소를 타는 자신이 곧 그들이 아니겠느냐고 하면서, 세속잡사에 달관하며 은사(隱士)로 살아가고자 하는 작가 자신의 삶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시조다.
작품전문
소부불음(巢父不飮) 영쳔수(潁川水)와 긔출관(紫氣出關) 니백양(李伯陽)이 천츄전(千秋前) 노픈 뜻이 긔뉘야 낫닷말고 채들고 이라타(爾懶打) 니 내 긔론가 노라. |
현대어 풀이
영천수(潁川水)도 마시지 않았다는 소부(巢父)와 상서로운 기운이 나타났다고 하는 백양이
천 년 전의 높은 뜻이 그 누구가 낫다는 말인가.
채찍 들고 (소에 올라 타)이랴하는 내가 곧 그들인가 하노라.
단어 풀이
소부불음(巢父不飮) 영쳔수(潁川水) : 소부(巢父)가 영천수(潁川水)를 마시지 않음. 소부는 중국 고대 요(堯)임금 때 나무 위에 둥지를 틀고 살았다는 전설상의 은사(隱士). 요가 허유(許由)에게 임금 자리를 양위하려 하자 그는 귀가 더러워졌다며 영천(潁川)에서 귀를 씻었는데, 이를 본 소부는 영천의 물이 더러워졌다며 자기 소에게 먹이지 않았다는 고사.
긔출관(紫氣出關) 니백양(李伯陽) : 자줏빛의 상서로운 기운이 나타났다고 하는 이백양(李伯陽). 자기(紫氣)는 제왕이나 성현이 나타날 징조. 백양(伯陽)은 중국 고대 순(舜)임금의 일곱 벗 중의 한 사람.
노픈 뜻 : 속세를 벗어나 유유자적하는 은사들의 뜻.
긔뉘야 : 그 누구가.
채 : ‘채찍’의 준말.
이라타(爾懶打) : ‘이랴’하고 때리니. ‘이라(爾懶)’는 곧 ‘이랴’의 가차표기로 말이나 소를 몰 때 내는 소리.
내 긔론가 : 내가 그인가. 곧 ‘그’는 소부나 백양.
작품해설
조선 후기 숙종(肅宗)~영조(英祖) 연간의 문인이자 탐승가(探勝家: 경치 좋은 곳을 찾아다니는 사람)였던 옥소 권섭이 지은 시조 75수 중의 하나이다. 권섭이 지은 국문시가로는 「영삼별곡(寧三別曲)」, 「도통가(道統歌)」 등 두 편의 가사가 더 있으며 자필본인 『옥소고』에 전한다. 이 외에도 2.000여 수가 넘는 한시가 문집인 『옥소집(玉所集)』에 실려 있다.
유고가 뒤늦게 발굴된 관계로 국문학사에서 위치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중이기는 하나, 권섭은 국문작품으로 송강(松江) 정철(鄭澈: 80여 수),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 67수),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75수) 등에 비견할 수 있는 작품을 남기고 있으며, 조선시대 탐승문인으로는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교산(蛟山) 허균(許筠), 난고(蘭皐) 김병연(金炳淵),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과 함께 5대 탐승가에 포함될 만큼 산천경개 탐승에 한평생을 보낸다.
특히 탐승의 측면에서는 다른 4인과 더불어 발견되는 공통점은 아직 벼슬길에 들기 이전의 젊은 시절에 사화·당쟁·국정의 문란 등 약관의 나이로 감당키 어려운 좌절을 경험하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벼슬살이를 외면하고 유유자적 또는 방랑 또는 탐승하면서 일생을 보낸 사람들이란 점이다.
권섭의 경우 특이점은 그가 『유행록(遊行錄)』을 통해서 구체적인 일자와 경유지 및 견문과 감상, 그 곳에서 쓴 시 편수와 제명 등을 빠짐없이 기록에 남기고 있다는 점을 미루어보면 중년 이후의 문필과 탐승은 거의 일상의 대부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계축년(1733년, 나이 63세) 6월 26일자 내용에 ‘맑음. 낮에 집으로 돌아왔으니 하루 동안 25리를 다녔다. 33일 동안 열이틀은 머물고, 스무 하루를 여행하면서 1,152리를 다녔으며, 113수의 시를 지었다.’라는 내용을 보거나, 89세로 타계하기 2년 전인 87세에 함흥과 원산 지역 탐승에 올랐다는 사실은 그가 가히 탐승광(探勝狂)이자 기록광(記錄狂)이었음 알 수 있다.
권섭은 어린 시절 높은 가문의 문벌을 배경으로 유복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14세에 아버지가 별세하고 난 후 그가 정신적으로 존경하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친부나 다름없던 대학자인 백부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 등이 사사(賜死)·유배(流配) 되는 등 임진·병자양난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요동치는 당쟁과, 그 여파로 학계마저 분열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특히 그가 약관 19세에 일어난 기사환국(己巳換局: 1689년에 장희빈의 소생을 원자로 정하는 문제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정권을 장악한 사건) 때에는 권섭 자신이 직접 여러 서인들과 합세하여 소두(疏頭: 연명하여 올리는 상소에서 맨 먼저 이름을 올리는 주동이 되는 사람)로서 상소를 올리고 대궐문 밖에서 통곡까지 한다.
가정적으로는 어머니가 별세하기 전인 42세인 중년기까지는 서울을 중심으로 안주했으나, 모친 사별 이후 충북 청풍을 중심으로 향촌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안주하지 못하고 연이어지는 이거(移居)와 내외친인척들과의 무수한 사별은 그를 자연스럽게 문필과탐승 여행으로 한 곳에 머물지 못하게 하였을 것이다.
「기우가(소를 타고 떠나며 부르는 노래)」 역시 이러한 그의 문필과 탐승으로 유유자적하는 모습과 심회를 술회한 것으로, 그의 『유행록』을 참고하면 영남좌도와 영남우도를 여행하면서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유행록』 중 「남행일록(南行日錄)」에서 신해년(1731년: 61세) 3월 7일 일기에 ‘낮에 비가 내려 늦게 출발해서 지나는 길에 영호루와 서악사에 올랐다.’는 내용이 이것을 뒷받침한다.
이 작품은 작가가 지은 시조 75수 단형시조 중 하나이다. 초장에서는 세상사에 초연달관하며 벼슬하지 않고 기산(箕山)에 은거한 소부·허유고사와 백양(伯陽)의 고사를 들고, 중장에서는 이들 중에서 누가 더 나은 사람인가를 묻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 곧 누가 더 나은 줄은 모르겠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종장에서는 내용상 비약으로 채찍 들고 소 잔등에 올라타 이랴하면서 세상만사 다 버리고 탐승길을 떠나는 자신의 모습이 곧 그들과 같은 것이 아니겠느냐 라고 하고 있다.
이 작품은 초·중장에서 종장으로 건너뛰어 천여 년의 시간을 초월하면서 자신의 이상적 모델과 자신과의 동류의식(同類意識)을 전제로 한다. 곧 세상잡사에 달관 초연하는 기개와 여행과 탐승의 참맛에 푹 젖어 살아가는 모습을 극적이고 동적으로 그려내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이 작품의 묘미라 하겠다.
작품 속의 명문장
초.중장의 선인들의 행적과 대비시켜 현재 작가의 모습을 역동적이고 간명하게 제시.
작품읽기 & 참고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기우가(騎牛歌) (낯선 문학 가깝게 보기 : 한국고전, 2013. 11., 양현승, 강명관, 위키미디어 커먼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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