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가족의 날
“어이, 아우님 나 왔서~~”
저 멀리 나를 부르며 다가 오는 사람. 비니를 머리에 쓰고 마스크로 얼굴은 가리우고, 두툼한 패딩을 입어 몸의 형체까지 알수 없는 사람이 나를 부른다. 공유사무실 같이 쓰는 이사장인가? 나는 허리를 숙여 잠시 인사를 하고 좁은 통로에서 비켜 지나가려는데, 그 사람이 나를 쳐다보며 말을 건넨다. 평소에도 인사를 잘 안하는 사람인데, 오늘은 이상하다. 그런데 마스크 위로 낯익은 눈이 보였다. 성국이형
“오.. 정사장, 잘 지냈어?”, “여기가 어디라고 와, 이렇게 안 와도 되는데”, “이렇게라도 좀 봐야지, 우리가 또 언제 만나냐?”, “미안하다. 일할 사람이 너무 안 구해져서, 내가 친구들 만날 시간이 없네. 잘 왔다. 차 한잔 줄께. 혁구야, 뭐 마실래?” 40년지기 친구인 재훈이는 천안에서 설렁탕집을 하고 있다. 친구가 하루는 내게 물품을 기증하겠다고 전화를 했다. 아는 동생의 사업을 접는다고, 꽤 쓸만한 완구들이 있는데, 내 생각이 났다고.
“재훈아, 어떻게 이렇게 기특한 생각을 했어?”, “야, 너가 좋은일 하잖아. 마침 내게는 필요없는 물품이 있는데, 너밖에 생각이 안나더라. 물품은 나쁘지 않아. 드론과 피큐어들이 많은데, 다들 좋아할 물품들이지, 한 두개면 내가 그냥 쓰는데, 양이 좀 많거든. 그래도 작동되지 않는 것들도 있을수 있어, 선별해서 사용하면 될거야! 탑차로 보내줄께, 공간을 좀 마련해야 돼”
몇 일전 친구의 전화를 받고 잠시 고민했다. 1톤 트럭에 꽉 찬 물품을 우리가 어디에 쓰지? 설령 받는다고 하더라도 나 혼자 그것을 분류하고 정리하려면, 가뜩이나 한해 사업을 준비도 해야 하는데.. 정기총회도 열어야 하는데..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조각난 퍼즐이 제자리를 찾아가듯 머리의 순서도가 그려졌다. 정기총회에서 장마당을 하자!
장마당은 북한의 시장을 통칭하는 말이다. 북한에서는 원래 시장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들은 철저하게 계획경제안에서 보급을 중심으로 국가가 형성되었다. 1980년대 중후반 계획경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하게 되자 북한에서는 시장화 현상이 나타났다. 1990년대 들어서 국가 경제난이 심화되고 미공급사태라는 초유의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주민은 생존을 위해 거리로 나왔고 암암리에 시장이 형성되었다.
1990년대 북한의 ‘아래로부터의 시장화’현상은 북한 경제에서 제도와 현실 간의 모순을 야기했다. 북한에서 시장을 더 이상 간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며 돈주들이 생겨나고 북한의 장마당은 국가 관리 내로 유도할 필요가 있었다. 2002년 김정일 정권에서 ‘새로운 경제관리 개선 조치’(7.1조치)로 북한이 시장 기능을 부분 인정하는 상설시장화 조치를 시행하게 된다.
몇 일전 평양에서 온 형님과 이런 이야기를 나눴다. “내래 북한과 남한이 통일이 된다믄, 북한동포들에게 돈쓰는 법을 가르켜 주갔서. 그 사람들 돈 쓰는 법을 몰라.”, “ 형님, 북한에도 장마당이 있는데, 왜 돈 쓰는 법을 몰라요?”, “그들은 말이디, 살기위해서 거래를 하는거디. 야, 여기 온 사람들 보라. 어디 돈 모으는 사람 있든? 자본주의에서 살아 남으려면 자본주의에서 돈을 어케 쓰는 지, 어떻게 돈을 모으는지 그 생리알아야 한단 말이디.”
북한은 변화하고 있다. 아직 갈길이 멀어 보이지만, 분명 자본주의 세계와 교류할 수 있는 여건이 이미 만들어져 있다. 그 곳은 중국과의 교류가 인정되는 곳이라 중국의 물건이 통용되고 있고, 서구의 물건들, 그리고 아랫동네의 물건들까지 들어가 있다. 이미 교류는 시작되었다. 이런 상황을 ‘더하다’의 회원들에게 알려줘야 겠다! 마침 물품도 중국제가 많다. 어쩌면 북한에서도 이와 똑같은 물품을 팔고 있을 수도.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다른 곳에서 물품을 보내온다. 창동 아우르네, 공유사무실, 우리의 옆집인 도도에서도 할머니들 털모자라고 후원하시겠다며 물품을 후원해 주시고, 별내 다문화센터에서도 간식거리로 활용해 달라며 빼빼로를 후원해 주셨다. 어느덧 모인 물품이 어마어마하게 쌓였다.
드디어 단체의 정기총회일, 첫번째 가족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행사가 열렸다. 오프닝 이벤트로 북한의 장마당을 소개하기 위해 그동안 모았던 물품도 개방했다. 물품의 수익금을 우리들의 다음세대들, 어린이들의 부산평화역사기행에 사용한다고 하니, 많은 분들이 즐겁게 물품도 사주고, 후원도 해 주신다.
“와~ 여기 장마당이 섰구나! 오라.. 조카들이 몇 살이디? 내 사줄께” 성국이형이 세심하게 조카들을 챙긴다. ‘형님, 우리가 3년전 시작한 모임이 이렇게 풍성해 졌어요.’ 아직 우리가 서로 이해하는데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시작이 없었다면 지금도 없었을 것이다. 시작을 같이 했던, 성국이형, 원영이, 경선이.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첫번째 가족의 날에 다시 함께 모여 가족됨을 누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