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
Mozart, Piano Concerto No.20 D minor K.466
특성 : 모차르트가 남긴 피아노 협주곡 중 24번과 더불어 단 두곡 밖에 없는 단조 작품
정보 : 1785년 작곡, 같은 해 오스트리아 빈에서 초연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피아노 협주곡 20번]은 모차르트가 남긴 27곡의 피아노 협주곡 중에서 [피아노 협주곡 24번]과 더불어 단 두곡 밖에 없는 단조 작품이자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모차르트의 작품 중에 D단조는 [레퀴엠], [돈 조반니]를 들 수 있다. 누구나 어릴 적이나 어른이 되어서나 자신의 소유물을, 혹은 자신 자체를 잃어버린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돈이든, 우정이든, 사랑이든 혹은 눈물을 흩뿌리며 길을 걷던 기억이든 간에 그런 깊은 상실감은 아마도 잊기 힘든 기억일 것이다. 모차르트의 단조곡들은 대개 엷은 미소를 띤 얼굴에 눈물이 주르르 흐르는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 [피아노 협주곡 20번]의 1악장은 그야말로 상실의 슬픔을 간직한 깊고 진솔한 표정을 가지고 있다. 이 곡에서 모차르트는 과감하고, 대범하며, 타협할 줄 모르는 자신의 일면을 노출한다. 먹구름처럼 어두운 오케스트라의 색채와 롤러코스터처럼 급격한 분위기의 변화가 일품인 작품이기도 하다. 독주자와 오케스트라는 서로 협력하지만 곡 중간중간 라이벌끼리 벌이는 경쟁의식을 극적으로 펼쳐내기도 한다.
모차르트가 남긴 협주곡 중 흔치않은 최초의 단조 피아노 협주곡
이 곡이 작곡된 1785년의 유럽 문화는 격렬하고 어두운 정서로 대변되는 ‘질풍노도’(Strum und Drang) 문학 운동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이 작품은 빈의 카지노인 멜그루베에서 열린 예약 연주회를 위해 작곡된 모차르트 최초의 단조 피아노 협주곡이다. 단조의 모차르트 음악은 바람에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베토벤의 고뇌어린 표정을 엷게나마 띠고 있다. 이 곡은 얼핏 베토벤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모차르트의 협주곡이기도 하다. 베토벤도 이 피아노 협주곡을 무척 좋아해 따로 카덴차를 작곡해서 남길 정도였으며, 베토벤 외에도 브람스, 훔멜, 부조니, 클라라 슈만과 같은 뛰어난 음악인들이 이 피아노 협주곡의 카덴차를 남겼다.
이 당시 모차르트의 생활은 매우 궁핍하기 짝이 없었다. 모차르트는 출판업자 호프마이스터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급히 필요하니 약간의 돈을 빌려주었으면 합니다. 아무쪼록 빠른 시일 안에 도착했으면 합니다. 이런 폐를 당신은 너그러이 용서하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저도 당신의 힘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부디 저를 위해 편의를 봐주시기 바랍니다.” 이 곡을 듣고 있으면 늘 쪼들리며 먹고살기 위해 뛰었던 모차르트의 펜 끝에서 나오는 음악은 왜 그리도 광휘롭고 한 점의 티도 없을까라는 의문이 떠오르기도 한다. 작품의 초연은 1785년 2월 11일 이루어졌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부친 레오폴트 모차르트가 빈에 도착해 아들의 초연 연주회를 지켜보고 “볼프강 아마데우스의 음악 활동 중 가장 빛나는 연주회”라고 밝혔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1악장 - 알레그로
모차르트 연구가 알프레드 아인슈타인은 이 1악장에 대해 “마치 복수의 여신들이 지쳐 있지만, 여전히 큰 소리를 내며 매순간 다시 충돌하기 위해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고 말했다.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긴장감이 넘치는 악장이다. 위협적으로 상승하는 바순 소리로 시작되는 도입부는 조용하지만 고뇌에 차 있으며, 끊임없이 강해지는 첼로와 베이스의 현악 선율이 이어진다. 이 제시부를 곧 피아노 솔로가 따라 잡으며 긴 악장 전체를 통해 발전해 나간다. 전개부에서는 약간 밝은 분위기가 감지되지만 기쁨에 찬 분위기는 아니다. 팀파니는 카덴차 전의 코다에서의 긴장을 더 증대시킨다. 카덴차에 들어서면 여러 주제에 의해 조용한 여운을 남기면서 악장은 조용하게 마무리된다.
2악장 - 로망스
행복감에 넘치는 우아한 악상이 나타난다. 피아노의 명랑한 테마가 나타나며 후반부는 오케스트라가 멜로디와 반주를 번갈아가며 제시한다. 피아노는 높은 음과 낮은 음이 대화풍으로 진행되다가 후반부에 다시 시적인 풍미를 자아낸다.
3악장 론도 - 알레그로 아사이
1악장의 극적인 성격이 다시 등장하며 급박한 느낌의 피아노 솔로로 시작된다. 근심 가득한 분위기의 선율이지만 피아노의 움직임이 빠르고 역동적이어서 미묘한 느낌을 자아낸다. 어둡고 밝은 악상이 재빠르게 교차되면서 대화를 주고 받는 느낌, 미묘한 표정 변화를 타고 쉼없이 흘러가는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협연이 매력적이다. 화려한 카덴차가 펼쳐진 뒤에는 호른과 함께 발랄한 선율이 나타나게 된다. 피아노 솔로가 다시 앞의 주제부를 반복하면서 어두운 정서에서 밝은 느낌으로 전환되며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서로 화려하게 융합하며 곡을 끝맺는다.
Mozart Piano Concerto No.20 in D minor, K.466
Friedrich Gulda playing and conducting, with munich philharmonic orchestra
슈만 피아노 협주곡 A단조
Schumann, Piano Concerto A minor Op.54
특성 :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협주적 완결체를 추구한 작품
정보 : 1845년 여름에 완성, 같은 해 12월드레스덴에서 초연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피아니스트로서, 그리고 피아노를 사랑하는 작곡가로서 로베르트 슈만은 젊은 시절부터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을 작곡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오케스트레이션 작업에 보다 많은 훈련과 노련함을 필요로 했던 슈만은 자신의 꿈을 구체화하는 데에는 꽤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러한 만큼 결혼 무렵까지 슈만은 피아노 솔로 혹은 피아노를 수반한 가곡을 중심으로 작곡을 했고, 다양한 경험과 모진 시련, 사랑의 결실을 체험한 다음인 1841년 라이프치히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기를 작정한 듯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환상곡을 작곡했다.
한 낭만주의자의 꿈
1839년 12월 11일 그는 슈베르트의 [9번 교향곡 ‘더 그레이트’]의 리허설을 보고난 뒤 친구인 베커에게 “나의 모든 이상이 그 안에서 구현현되어 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자신이 작곡하고자 하는 작품에 대해 “교향곡과 협주곡, 그랜드 소나타의 중간 형태”라고 설명하고 있다. 1840년 결혼과 더불어 엄청난 가곡을 쏟아냈던 슈만은 멘델스존이 지휘한 슈베르트의 [더 그레이트] 초연을 들은 뒤 자신의 [1번 교향곡]에 대한 영감을 받았음과 동시에 1악장의 저 장대한 호른의 등장을 자신이 작곡하고 있는 피아노 협주곡의 첫 부분에 차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는 모차르트와 베토벤 이후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유기적인 통합이 배재된 채 독주자의 비르투오시티만을 강조하는 과시형 협주곡들이 나타나는 것에 대해 극도의 불쾌감을 피력한 바 있다. 그의 목표는 고전적 이상에 의거한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일체화된 서사시를 작곡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탄생하게 된 것이 바로 단악장의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환상곡이다. 이후 슈만은 이와 같은 단악장 형태의 콘체르트슈튀크 작품을 1849년 드레스덴에서 인트로덕션과 알레그로 아파쇼나토 Op.92를 작곡했고, 1853년 뒤셀도르프에서 인트로덕션과 알레그로 콘체르탄테 Op.134를 작곡했다.
1841년은 슈만에게 있어서 ‘교향곡의 해’에 해당한다. [교향곡 1번]과 후일 [교향곡 4번]이 된 두 번째 교향곡을 작곡하는 시기에 탄생한 피아노 협주곡은, 당시 슈만의 의도대로 오케스트라의 효과와 구성에 많은 힘을 쏟은 모습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4번 교향곡] 또한 원래는 ‘교향적 환상곡’이라는 타이틀로 출판하고자 했었다. 아마도 전통적인 교향곡에 있어서의 소나타 형식보다는 낭만주의자로서 자신의 기질이 보다 자유분방하고 발전적인 양식을 도입한 환상곡 형식에 슈만은 많은 애착을 갖고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 또한 전통적인 협주곡의 형식에서는 많이 벗어나있는, 오히려 그 변화하는 주제의 모습들은 어딘지 변주곡을 떠올리는 까닭에 환상곡이라는 제목을 붙이고자 했다는 가정에 높은 개연성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1841년 5월 13일에서 20일 사이에 쓴 일기에 따르면, 슈만은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환상곡을 독립된 작품으로 출판할 생각이었지만 마땅한 출판사를 찾을 수가 없었다. 이후 4년이라는 시간을 더 투자하여 2악장과 3악장을 작곡하여 1845년 여름에 이르러 정식적인 피아노 협주곡이라는 제목을 붙인 작품으로 완성했고, 그 해 12월 4일 드레스덴에서 페르디난트 힐러의 지휘와 슈만의 아내인 클라라 슈만의 피아노 연주로 초연되었다. 이어 1846년 1월에는 라이프치히에서 멘델스존의 지휘와 클라라의 협연으로 연주되어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슈만은 비르투오소들을 위한 협주곡에 담긴 자기과시적인 요소를 배재하고 순수 음악적인 효과와 구조적인 맥락을 추구하기 위해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에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는 것을 가장 중요시했다. 이를 위해 그는 비엔나의 고전주의 작곡가들의 작품을 의식적으로 계승하고자 노력했다. 특히 피아니스트와 오케스트라가 대화를 주고받는 형식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이를 뒷받침할 수 있다. 그러나 슈만은 단순히 전통을 답습한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음악언어, 즉 낭만주의적 상상력을 강력하게 발휘하여 새로운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특히 1악장은 ‘환상곡’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하고자 했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그는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라는 양자의 대화보다는 통합이라는 관점에서 이를 다루고자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동시대에 발표된 비르투오소용 협주곡 혹은 형식 파괴에 앞장선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등과 전적으로 구분되는 슈만만의 개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환상곡풍의 협주적 완결체
우선 제시부에서 독주와 관현악의 구분이 희미해졌다. 강력한 하행 옥타브로 시작하는 피아노의 다이내믹한 등장으로 시작한 뒤 제시부가 끝날 무렵에야 비로소 잠깐 피아노가 수반되지 않는 오케스트라 총주가 등장할 뿐이다. 주제가 끊임없이 변형함에 따라 독주는 물론이려니와 오케스트라 또한 서정적인 모습을 잃지 않으며 변화해나가는 모습이 특히 그러하다. 게다가 오케스트라는 피아노와 대립하지 않고 종속하지도 않으며, 가곡에 있어서 성악가와 피아노의 진실된 관계처럼, 서로 조화를 이루며 동반자의 관계를 유지한다. 그 가운데 클라리넷이나 오보에 솔로가 가끔씩 시그널적인 멜로디를 노래 부를 뿐 두드러지는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것은 어떤 경우에는 실내악적인 정교함을, 또 어떤 경우에는 보다 두터운 텍스추어로 음악에 질감과 힘을 더하는데, 외형상의 이러한 효과는 후일 브람스가 오케스트라 작품에서 즐겨 사용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찌되었던 이 1악장은 환상곡풍을 견지하는 작품임이 분명한데, 이러한 모습은 리스트가 자유로운 방식으로 작곡한 헝가리 광시곡과 베토벤이 투철한 계산과 논리적인 발전을 전개시켰던 피아노 소나타의 중간 형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여기에는 바흐에 대한 슈만의 동경 또한 등장한다. 1악장 카덴차 부분에서 등장하는 다성부적인 패시지가 그것으로서, 슈만은 바흐로부터 많은 아이디어의 자양분과 대위법적 상상력을 얻어왔다. 슈만은 같은 시대의 리스트나 바그너처럼 기교주의나 화려한 외면을 꾸미는 방향에는 공감을 갖지 못했고, 오히려 바흐나 베토벤, 슈베르트 등으로 이어 내려온 전통에 입각한 자기 나름의 방향에서 창작하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멘델스존을 높이 평가하고 브람스에게 호감을 가졌다. 이러한 슈만은 멘델스존처럼 바흐의 음악을 끝없이 연구하였으며 젊은 음악가들에게도 그렇게 할 것을 끊임없이 권했다.
이 작품은 슈만의 [교향곡 4번]처럼 쉼 없는 유기체적인 흐름을 내세운 작품은 아니지만, 이에 못지 않은 콘텍스트의 연속성과 일관된 흐름을 가지고 있다. 독립된 환상곡에 후일 덧붙인 2악장과 3악장을 보면 이러한 특성을 더욱 강하게 이해할 수 있는데, 무엇보다도 첫 악장과 뒤의 두 개의 악장 사이에 일체의 이질감과 소외감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그러하다. 오히려 1악장에서의 주제에 정당성과 정합성을 부여하기 위해 나머지 악장들 또한 이 주제와 끊임없이 관련을 맺어 나가며 환상곡 본래의 단일주제적 접근에 충실하고자 했다.
2악장은 나긋나긋하고 차분한 톤의 인터메초 악장이다. 단순한 ABA 구성으로서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주도 멜로디에 대해 끊임없이 대화를 나눈다. 특히 첼로와 피아노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대단히 인상적으로서, 이렇듯 느린 악장에서 첼로를 사용하는 기법은 이후 브람스 또한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 2번]에서 보다 특징적이고 발전적인 모습으로 계승된다. 피아노는 첫 주제로 돌아온 뒤 다음 알레그로 악장을 향한 힘찬 약진을 준비한다.
피날레는 규모가 큰 소나타 형식에 있어서의 론도 악장으로서, 소나타 전체의 주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변형한 것이다. 특히 피아니스트로 하여금 고난도의 아르페지오와 8분음표 패시지를 대단히 바쁘게 연주하게끔 하는 부분이 등장하여, 비르투오시티를 자랑하지 않으면서도 음악에 적절한 긴장감과 화려한 효과를 부여하는 모습으로부터 슈만의 작곡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 2주제는 미묘한 교차 리듬으로 확장하며 길거나 짧은 단위로 등장한다. 이후 론도 주제가 다시 등장하고 정통적인 방식에 따라 약간의 푸가토가 포함된 숨가쁜 발전부를 거친 뒤 오보에와 피아노의 대화에서 새로운 선율이 제시된다. 재현부 이후에 눈부신 시성과 우아한 지적 고양감이 충만한 코다에 이르러, 환상곡풍임을 강조하기 위해 슈만이 그토록 집요하게 사용한 협주곡의 첫 주제가 녹아있다는 사실을 거의 깨닫지 못한 채, 낭만주의의 상상력과 고전주의의 엄격함을 결합하여 19세기 피아노 협주곡 장르의 모범으로 일컬어지는 이 작품은 비로소 끝을 맺는다.
1839년 모셀레스의 [피아노 협주곡 Op.93]과 멘델스존의 [피아노 협주곡 Op.40]을 평한 슈만의 한 글에서 협주적 완결체로서의 시도의 한계를 지적하며, 한 천재가 나타나 “새롭게, 멋지게, 피아노가 오케스트라와 하나가 되어 피아노 앞에 앉은 거장은 자기 악기, 자기 예술의 모든 것을 펼쳐보이고 오케스트라도 구경꾼에 그치지 않으며 다양한 소리를 전체 속에 예술적으로 짜넣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피력한 바 있다. 그리고 그 간절한 바람은 바로 슈만 자신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R. Schumann Piano Concerto Opus 54 mov.1
Daniel Barenboim Piano & Müncher Philarmoniker, Sergiu Celibidache Conductor
R. Schumann Piano Concerto Opus 54 mov.2&3
Daniel Barenboim Piano & Müncher Philarmoniker, Sergiu Celibidache Conductor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Tchaikovsky, Piano concerto NO.1
출처 : 네이버캐스트
특성 : 차이콥스키가 남긴 3개의 피아노 협주곡 중 가장 유명한 작품
정보 : 1874년 작곡, 1875년 10월 미국 보스톤에서 초연
아마도 피아노라는 악기가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의 유명세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작품이 초연된 지도 어느 새 150년을 바라보고 있지만, 작품에 대한 애정과 유명세는 점점 더 증폭되어왔지 단 한 번도 줄어든 적이 없기 때문이다. 차이콥스키의 이 대곡은 ‘피아니스트’라면 응당 연주할 수 있고, 연주해야만 하며, 이 곡을 통해 비로소 피아니스트로 인정받을 정도로 프로 연주자로서의 가능성과 예술성을 가늠하는 척도이기도 하다. 차이콥스키는 총 세 개의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했지만 이 가운데 1번 협주곡만이 유독 유명하다. 흥분에 들뜬 회상이든, 괴롭고 즐거운 기억에 대한 체념이든 간에 이 곡의 가장 큰 주제는 ‘향수’다. 이 ‘향수’가 바로 러시아 낭만주의를 지탱하는 뿌리임은 분명하다. 우리가 다른 작품에서도 항상 느껴왔듯이, 러시아인이라면 필수적으로 가지고 있는 능력이 바로 절망 속에서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무엇인가를 뽑아내는 능력이다.
피아니스트들의 시작이자 끝인 거대한 협주곡
차이콥스키는 절망과 불행한 상황 속에서 이 곡의 작곡을 시작했다. 그러나 결국엔 감동적이고 성공적인 작품으로 발전되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러시아 작품이라 말할 수 있다. 철인 3종경기에 맞먹을 만한 강인한 지구력과 원자폭탄과 같은 폭발력, 목가적이고 가요적인 정서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러시아적인 멜랑콜리가 이 곡의 매력이다. 무엇보다도 피아니스트의 마법적인 음색과 초인적 비르투오시티를 갖추고 있지 않으면 이 작품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할 수 없다.
그러한 만큼 이 곡은 음반이라는 새로운 미디어가 발매되기 시작할 무렵부터 지금까지, 일반적인 경우 다른 음반사나 자사의 레퍼토리와 겹치는 경우 레코딩을 회피하곤 했지만, 모든 피아니스트들이 상업적 비즈니스의 이해관계와는 상관없이 한 번 이상은 반드시 녹음해야만 할 정도로 융숭한 대접(물론 슈나벨이나 폴리니, 브렌델과 같은 예외의 경우도 있지만)을 받고 있다. CD로 발매된 종류만 해도 무려 150종이 넘는 음반이 발매되었으니(복각되지 않은 LP시대의 녹음까지 합하면 더 많을 듯하다), 단연 최고의 베스트셀러 레퍼토리임을 확인할 수 있다.
레코딩이 발명된 이후 셀락이나 왁스를 재료로 한 디스크들이 상업적으로 널리 판매되기 시작했던 1920년대부터 이 작품은 초미의 관심사였다. 전기녹음이 도입되기 이전인 1925년까지는 녹음 기술에 문제가 많았으나 피아니스트 빌헬름 박하우스(Wilhelm Backhaus)가 어쿠스틱 레코딩을 1921년과 1922년에 각각 남겼다.
그러나 레코딩 테크놀로지의 한계상 이 녹음과 작품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전기녹음이 도입된 이후 처음으로 마크 함부르크(Mark Hambourg)의 녹음이 등장했고, 비로소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은 레코드 필청 레퍼토리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함부르크는 리스트와 더불어 19세기 피아노 교육의 양대산맥이었던 레셰티츠키의 제자였다. 그는 러시아 출신다운 화려한 테크닉과 탁월한 힘, 빼어난 지구력을 자랑하는 피아니스트였다. 1926년 함부르크는 HMV 음반사에서 로얄 알버트 홀 오케스트라와 랜던 로날드의 지휘로 지금의 버짓 프라이스에 해당하는 ‘블랙 라벨’로 음반을 녹음했고, 이 음반은 삽시간에 전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했다. 현재 일본 Greendoor 레이블로 발매되어 비교적 어렵지 않게 감상해볼 수 있는데, 극심한 루바토와 열악한 음질에도 불구하고 불을 뿜는 듯한 테크닉,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터치, 안정된 호흡으로 훌륭한 비르투오시티의 정석을 들려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마크 함부르크 자신이 살았던 19세기 러시아 낭만주의 시대의 열정과 온기를 고스란히 전달해 주고 있다. 그러나 1930년대 전설의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가 등장하고 나서야 차이콥스키의 이 괴물같은 대곡은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불멸의 지위를 얻게 된다.
구제불능의 2류 작품이라는 혹평을 받다
차이콥스키의 얼룩진 삶에 끈질기게 실처럼 따라다녔던 것은 신경쇠약 증세였다. 성공보다는 실패에 더 민감했던 차이콥스키는 그가 음악의 구세주라고 생각했던 모차르트와 자기 자신을 비교하며 형식미와 구성력의 부족함을 특히 한탄했다. 자기 자신에 대해 항상 비판하고 회의했던 그는 이 [피아노 협주곡 1번]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의 스승이자 당시 러시아 피아니즘의 대부로 손꼽히던 니콜라이 루빈스타인(Nikolay Rubinst ein)에게 이 작품을 보냈고 그의 의견을 기다렸으나, 결과는 참담했다. 루빈스타인은 이 작품을 엉뚱하고 기괴하며 거북스럽기 그지 없는, 한마디로 구제불능의 곡이라고 신랄한 평을 서슴치 않았다. 문제는 연주하기에 너무 어렵고 악정들은 너무 잘게 조각 나 있으며 서투르게 취급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덧붙여 이런 2류 작품은 반드시 대대적으로 수정을 해야만 자신이 연주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차이콥스키가 후원자인 폰 메크 부인에게 쓴 편지에 대체적으로 정확하게 적혀 있다.
격분한 차이콥스키는 독일의 명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한스 폰 뷜로(Hans Von Büllow)에게 이 작품을 헌정했다. 이 작품의 가치를 인정했던 뷜로는 이 곡을 미국 연주회 도중 1875년 10월 25일 벤저민 존슨 랑의 지휘와 함께 보스턴에서 초연했고, 대성공을 거두었다. 같은 해 모스크바에서도 연주해 호평을 받게 되었다. 결국 3년 뒤에는 루빈스타인이 직접 화해를 구하게 되었고 두 사람의 우정은 다시 회복되었다고 한다.
이후 차이콥스키는 이 작품에 수정을 가하여 모스크바의 유르겐슨 출판사를 통해 세 개의 판본을 발표했다. 첫 번째는 1875년에 완성한 ‘오케스트라 반주의, 혹은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피아노 협주곡’이고, 두 번째는 1879년 9월 개정된 판본, 마지막 세 번째는 1889~90년에 개정된 판본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출발한다.
차이콥스키는 분명 루빈스타인의 비평에 “나는 음표 하나라도 고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지만, 시간이 지난 뒤 결국 고치고야 말았다. 차이콥스키는 다른 사람들의 비판에는 귀를 기울였지만, 이 작품을 최초로 본 루빈스타인의 비판은 무시했다. “진정 하나의 진주와 같은 작품”이라고 극찬한 초연자 뷜로가 어떤 조언을 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1876년 런던 초연의 협연자로 나선 에드워드 댄로이터(Edward Dannreuther)의 수정이 두 번째 판본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댄로이터는 초연 당시 프로그램 노트에 해설을 쓰기도 했다. 1969년 발견된 댄로이터의 가필 판본은 그의 수정이 부분적으로 반영되었음을 확실하게 알려주고 있다. 특히 차이콥스키는 1876년 댄로이터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현명하고 실제적인 제안들’에 감사를 표했고, 재출판될 경우 의견을 반영하겠다고 썼다. 차이콥스키는 루빈스타인의 감정에 찬 비판은 거부한 채, 댄로이터의 건설적인 제안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피아노를 용광로 속으로 밀어넣는 듯한 장대한 스펙터클
최종본에서 가장 창조적인 변화는 바로 1악장 도입부 4분의 3 지점에서 폭발하는 거대하고 자유롭게 낙하하는 ‘화음의 폭포’다. 이는 두 번째 판본까지는 등장하지 않던 대목이다. 이는 리스트의 제자이자 위대한 피아니스트로 널리 알려진 알렉산더 질로티(Alexander Siloti)의 조언이 적극 반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적어도 이 추가된 장대한 화음의 클러스터와 조성은 리스트 피아노 협주곡의 스타일과 비슷한 만큼, 차이콥스키와 막역한 사이였던 질로티의 영향을 배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편, 최종본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피날레 악장의 두 번째 주제인 그란드 몰토 메노 모소(grand molto meno mosso)의 비상하는 에피소드에 앞서 등장하는 두 마디의 이중 옥타브들이다. 첫 번째, 두 번째 판본에서는 이 부분들이 같은 음역대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세 번째 판본에서는 안톤 루빈스타인의 [피아노 협주곡 4번]의 피날레의 예를 따르면서, 전체적으로 페달을 사용해 피아노를 들끓는 듯한 용광로 속으로 밀어넣는 위험한 효과로 변화시킨 것이다. 이 외에도 차이콥스키가 질로티와 주고받은 편지를 통해 이 최종본의 몇몇 부분을 수정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악장 - 알레그로 논 트로포 에 몰토 마에스토소
웅장하고 풍부한 색채로 시작하는 1악장은 소나타 형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조성과 전개가 자유로운 편이다. 오히려 환상곡적인 느낌까지는 이 1악장은 오케스트라의 강렬함과 화려하고 육중한 피아노가 서로 대결하는 듯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특징으로서, 장대한 1주제와 낭만적인 2주제의 뚜렷한 대비가 인상적이다.
Tchaikovsky Piano Concerto No 1/ Georgii Cherkin - piano
1. Allegro non troppo e molto maestoso -- Allegro con spirito
2악장 - 안단티노 셈플리체
느린 안단테 악장과 스케르초 악장을 뒤섞어놓은 듯한 혁신적인 악장.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잠이 드는 아기의 평온함으로 시작하여, 프레스티시모로 질주하는 환상 속의 동화를 꿈꾸다가 첫 자장가로 돌아오는 모습은 지극히 전원적이고 평화로운 모습을 연상시킨다.
Tchaikovsky Piano Concerto No 1 - 2nd mov
Yuja Wang, piano
3악장 - 알레그로 콘 푸코
피아노 협주곡 역사상 가장 맹렬하고 장대하며 스펙타클한 악장으로 손꼽힌다. 오케스트라의 네 마디 서주 후부터 펼쳐지는 피아노의 굵고 거친 슬라브 무곡풍의 론도 주제와 이어지는 간결한 가요적인 부주제가 잇달아 펼쳐지며 서정과 기교의 긴박감 넘치는 조화와 대비를 이룬다. 특히 마지막 피아노 코다 부분에서의 빠르고 강렬하며 비르투오시티 넘치는 옥타브와 이어지는 오케스트라 총주의 터질 듯 벅차오르는 사운드는 러시아의 호방함과 저력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Tchaikovsky Piano concerto No. 1 Mvt 3 - Allegro con fuoco
Daniel Barenboim Piano & Müncher Philarmoniker, Sergiu Celibidache Conductor
베토벤 -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
Beethoven, Piano Sonata No.8 C minor "Pathetique"
특성 : 빈 고전주의를 넘어서 강렬한 심리적 표현을 최초로 시도
정보 : 1798~1799녀 사이에 작곡, 베토벤 초기 피아노 소나타의 정점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베토벤은 그의 첫 세 개의 피아노 소나타 세트인 Op.2를 하이든에게 헌정했다. 그는 이미 하이든과 모차르트로부터 시작한 빈 고전주의 스타일을 숙지했고, 여기에 자신의 영혼 속에 내재돼 있던 음악적 아이디어와 방법을 얹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베토벤에게 있어서 이러한 중용적인 ‘변주적 발전’은 한 번의 시도만으로 족했다. 그는 32개의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하면서 매 작품마다 엄청난 큰 개별성과 독립성을 부여했을 뿐더러, 작곡 시기상 세 개의 시기(초기, 중기, 후기)로 구분되는 그룹마다 고전주의를 벗어나 낭만주의로 향하는 엄청난 에너지와 진취적인 방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비극적 강렬함을 주제로 삼은 최초의 피아노 소나타
베토벤의 초기에 해당하는 빈 시절에 있어서 피아노라는 악기는 그의 음악적 경험의 중심이었다. 그가 주력했던 작곡 형식인 피아노 소나타들을 초기부터 일별해 보면 하나 하나마다 스타일이 발전하고 있고 기술 또한 날로 세련되어져 갔음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보다 창조적인 방법을 통해 전통을 벗어나기 시작했으며, 그 누구보다도 강렬하게 개인적 심상을 음악 속에 담아냈다. 베토벤의 음악에서는 그 무엇보다도 작곡가 자신이 주역이었다. 이런 모습이 극대화되어 나타난 작품이 바로 [영웅 교향곡]이다. 이 교향곡은 음악미학에 대한 당대의 입장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고 예술가로서 음악가가 갖는 위상 또한 당당히 세운 작품이었다.
[비창 소나타]는 1798년부터 1799년 사이에 작곡되어 그 해 가을 빈의 에더 출판사에서 출판되었고, 베토벤의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칼 폰 리치노프스키(Carl von Lichnowsky)에게 헌정된 작품이다. 이 소나타의 부제로 알려져 있는 ‘비창 Pathétique’은 베토벤 자신이 붙인 것이 아니라 출판시 출판업자에 의해 붙여진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실제로 이 곡은 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작품으로 평가받는데, 무엇보다도 이전 시대의 음악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긴장감과 강렬함이 표출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까닭에 [비창 소나타]는 베토벤이 최초로 드러낸 드라마틱한 자신의 모습이며, 어둡고 침침하며 비극적인 분위기가 지배하는 최초의 심리주의적, 표현주의적 피아노 소나타로 기록된다.
모든 베토벤 작품들이 그렇듯이 음악 주제들의 밀접한 관계 또한 특징적이다. 이 작품의 첫 악장의 2주제는 제2악장의 2주제에서 역전된 형태로 사용될 뿐만 아니라 마지막 피날레 악장에서는 변형되어 다시 주제로 사용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바그너에 의해 활성화 된 순환주제의 개념이 바로 이 작품에서, 작곡가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살며시 엿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또한 혁신적이다. 그리고 하이든, 모차르트가 완성한 느린 서주와 활기찬 알레그로 - 느린 아다지오 - 빠른 론도라는 특징적인 3악장 구성을 채용했지만, 그 안에서 베토벤은 극적인 다이내믹과 비장함의 극대화라는 새로운 심리적 표현력을 만들어냈다. 이 점도 [비창 소나타]를 특징짓는 창조적 에너지의 산물이라 말할 수 있다. 한편 [비창 소나타]의 조성은 [운명 교향곡]과 같은 C단조이다. 베토벤이 좋아했던 이 어둡고 비장한 C단조는 [5번 소나타]와 마지막 [32번 소나타]와 더불어 총 세 곡의 피아노 소나타에서 사용되었다.
Daniel Barenboim plays Beethoven Sonata No. 8 Op. 13 (Pathetique)
I. Grave -- Allegro di molto e con brio 0:19
II. Adagio cantabile 9:46
III. Rondo: Allegro 15:11
1악장 그라베-알레그로 디 몰토 에 콘 브리오 (Grave - Allegro di molto e con brio)
느림 - 빠름이라는 하이든 교향곡의 형식을 인용한 장중한 서주가 붙은 악장이지만, 그 내용의 깊이와 시적 감수성에 있어서 온전히 베토벤의 개성이 발휘된 대목이다. 비장한 무게감과 위력적인 에너지감이 휘몰아치는 1악장은 이후 베토벤이 발전시켜나간 소나타 형식의 설계에 밑거름이 된 역사적인 악장이 되었다. 불안한 분위기의 서주를 거쳐 빠르고 정열적인 1주제와 단음계의 장식적인 효과가 두드러지는 2주제를 거치며 그 비창적 에너지를 더하다가, 제시부 마지막에서는에너지가 고갈된 듯한 침묵이 음악에 긴장감을 더한다. 갑작스러운 종지부는 이 악장에 비극적인 느낌을 배가시킨다.
2악장 아다지오 칸타빌레 (Adagio Cantabile)
슬프지만 아름다운 멜로디가 처연함을 더하는 악장.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4번] ‘월광’ 1악장의 아름다움에 비견할 만한 악장으로서, 영화음악과 팝, 락, 힙합, 재즈를 넘나들며 즐겨 사용될 정도로 친밀성이 강한 악장이다. 하나의 구슬픈 주제가 세 번 반복되는 동안 두 개의 에피소드가 삽입되고, 슈베르트적인 성격이 강한(슈베르트가 여기에서 영향을 받았으리라 예상되는) 여덟 마디의 코다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빠르기인 안단테 칸타빌레가 일말의 동화적 환상을 부여한다면, 이보다 조금 느린 아다지오 칸타빌레라는 빠르기는 여전히 동화적이지만 우울하고 염세적인 느낌이 기저에 깔려있는 절묘한 상상력을 자아낸다.
3악장 론도: 알레그로 (Rondo: Allegro)
노스탤지어를 자아내는 열정적인 1주제의 멜로디(첫 악장의 2주제를 차용한)와 목가적인 청량함을 머금은 중간의 에피소드가 상호 시너지 효과를 고조시키다가, 마지막 짧고 드라마틱한 코드의 하행 아르페지오와 함께 이 작품 특유의 극적인 박력은 최고도에 이른다.
쇼팽, 녹턴 2번 내림마장조
Nocturne Op.9 No.2 in E flat major
출처 : 네이버 캐스트
피아노를 위한 녹턴은 원래 영국 작곡가인 존 필드(1782~1837)가 이탈리아 벨칸토 오페라로부터 영향을 받아 창작한 음악장르다. 그는 1812년경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처음으로 녹턴(몇 곡은 로망스로 이름붙여지기도 했다)을 작곡했고, 이후 약 18개의 녹턴을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음악 장르는 로시니, 벨리니, 도니체티의 벨칸토 오페라를 사랑했던 쇼팽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쇼팽은 청년시절부터 만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21개의 녹턴을 꾸준히 작곡했는데, 쇼팽의 녹턴은 특유의 자기성찰적인 측면으로 인해 19세기를 지배했던 외향적 비르투오소를 위한 음악과는 거리가 있었다. 또한 이전 시대에 존재했던 이탈리아의 노트르노(Notturno) 형식과도 달랐고, 멘델스존에 의해 창안된 [무언가](Songs withoud Words)와도 다른 독특한 정서를 담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피아노의 발달에 따른 악기의 개량의 덕을 가장 많이 본 음악이 녹턴이라고 할 수 있다. 서스테인 페달로 왼손의 효과를 확장시킬 수 있었고 보다 강력해진 강철 프레임으로 인한 장력의 증대 또한 오른손 멜로디 표현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쇼팽은 연주에 있어서 힘이 강하지 않았던 탓에, 리스트와 같은 극적인 연주 효과를 낼 수 없었다. 그대신 쇼팽을 후원했던 플레이엘사의 개량된 피아노는 쇼팽의 섬세한 표현력을 더 정밀하게 재현해내 청중들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다.
신비로운 감성을 담은 밤의 노래
1827년부터 1847년 사이에 작곡된 쇼팽의 19개의 녹턴은 형식에 있어서 존 필드의 그것을 거의 따르고 있다. 단순한 반주와 세련된 선율로 A-B-A’의 가곡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쇼팽은 존 필드의 형식을 그다지 많이 변화시키지는 않았다. A 부분은 항상 멜로디컬하고 리드미컬한 오른손 선율이 지배적으로서 벨칸토적 장식음들이 도드라지며 성악적인 환상과 효과를 배가시킨다. B 부분은 A의 주제와는 다른, 보다 밀도가 높고 긴박한 표현력과 극적인 감수성을 요구한다. A’는 A에 대한 회귀로서 긴장감을 소멸시킴과 동시에 밤이라는 시간대 특유의 무감각함을 상징한다. Op.32-2, Op.72-1, Op.48-2, Op.55-1 등에서 형식적인 변화가 얼핏 보이기는 하지만, 몇몇 부분을 제외한다면 쇼팽의 다른 무곡들, 즉 마주르카나 왈츠에서 사용한 세도막 형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범한 주제와 치열한 발전, 구조적인 응집력을 요하는 전개와 제시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소나타 형식과 비교한다면, 무곡에 기반을 둔 세도막 형식은 간결하고 율동적이며 상징적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특히 쇼팽의 시적 상상력의 표본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새롭고 신비로운 감정이 풍부하게 담겨 있는 녹턴은 그 길이가 짧은 만큼 듣는 이의 내면을 더욱 강렬하게 흔들어놓으며 낭만주의 시대 음악을 대표하는 최고의 아이콘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렇듯 풍부한 상상력과 무언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녹턴은, 쇼팽 사후 가브리엘 포레를 비롯한 일군의 프랑스 작곡가들, 더 나아가 러시아의 스크리아빈이나 보로딘에게도 영향을 준다.
녹턴 연주사에 있어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쇼팽의 제자로서 폴란드를 대표하는 쇼팽 스페셜리스트인 피아니스트 칼 미쿨리의 제자들, 즉 모리츠 로젠탈이나 라울 콕찰스키의 연주를 들어보면 현대에는 기피하는 즉흥적인 장식음을 추가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절대로 같은 곡을 같은 방식으로 연주하지 않았다는 쇼팽의 음악 철학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들은 쇼팽의 후기보다는 전기 작품 연주에 이런 연주법을 적절히 용했다. 물론 템포 루바토와 양손을 어긋나게 연주하여 낭만적인 정취를 고조시키는 연주법 또한 적극 사용하여 녹턴의 서정성과 고급스러움을 강조하기도 했다.
시적 감수성으로 세련된 깊이에 도달하다
1830년부터 31년 사이에 작곡된 녹턴 Op.9는 총 3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쇼팽에게 있어서 처음으로 출판된 녹턴이다. 이 곡에서부터 작곡가 쇼팽은 자신만의 강한 개성을 보여준다. 특히 Op.9의 3번 B부분에서의 쇼팽만의 독창적인 표현력, Op.9-2의 아름다움은 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감동을 준다. 특히 Op.9-2는 쇼팽의 녹턴을 대표하는 명곡으로 영화와 TV를 비롯한 수많은 미디어에서 사랑받고 있는 곡이다.
1 녹턴 1번 내림나단조
2 녹턴 2번 내림마장조
3 녹턴 3번 나장조
쇼팽, 녹턴 2번 내림마장조 (Nocturne Op.9 No.2 in E flat major)
출처 : 위키백과
쇼팽의 녹턴 2번은 전체 녹턴 21개 중 가장 유명한 곡 중 하나로 손꼽히는 곡으로 그의 나이 20세경에 작곡되었다.
다른 많은 쇼팽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약간의 우울함과 희망감이 곡에 묻어있다.
이 유명한 녹턴은 순환적 두도막 형식(A-A-B-A-B-A-C)으로 되어 있고 마지막 코다인 C부분이 추가된다.
주제 부분인 A,B부분에서는 많은 음이 재현되며 장식적인 음이 많이 가미되었다.
특히 A에서는 여린 음으로 시작하여 부드러운 연주를 중시하며 우아한 음이 많이 내포되어있다.
곡이 끝으로 치닫을 수록 A는 발전을 거듭하여 첫부분보다 트릴과 잇단음표의 사용 빈도가 증가된다.
곡에서 계속된 부드러운 음은 C부분인 코다에서 격정적으로 변화하여 빠르기가 빨라진다.
그 후 화려한 트릴이 전개되고 나서야 고요한 음으로 곡이 마친다.
The Memory Recital of chopin's birth 200th anniversary
Yundi Li - Chopin Nocturne In E Flat Major Op.9 No.2
Pachelbel - Canon Variation 캐논 변주곡
출처 : 네이버 캐스트
파헬벨의 [카논과 지그 D장조]는 독일 바로크 음악가 요한 파헬벨의 작품 가운데 가장 잘 알려져 있다. 3대의 바이올린과 통주저음을 위해 작곡되었으며, 같은 조의 춤곡 ‘지그’가 딸려서 ‘카논과 지그’로 연주되곤 한다. [카논과 지그]는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졌었고 20세기 들어와서야 재발견 됐다. 1919년 처음으로 출판되면서 이 곡의 인기는 급속도로 높아졌고, 오늘날에는 여러 대중 매체의 삽입곡, 클래식음악 컴필레이션 음반에 수록되는 빈도도 높아지면서 그 인기는 가장 대중적인 바로크 음악의 하나인 바흐 [G 선상의 아리아]에 비견될 정도이다.
파헬벨의 [카논](지그를 제외한)은 1919년 음악학자인 구스타프 베크만에 의해 최초로 출판되었다. 베크만은 이 악보집에 파헬벨의 실내악에 관한 글을 함께 수록했다. 베크만의 연구에 영향을 준 사람은 저명한 고음악 학자이자 편집자인 막스 슈타이페르트였다. 슈타이페르트는 1925년 파헬벨의 [카논과 지그]를 편곡해 자신의 ‘오르가눔’ 시리즈로 출판했다. 그러나 이 판본은 오리지널 스코어에는 나와 있지 않은 아티큘레이션 지시와 다이내믹 표시가 상당수 있었다. 슈타이페르트가 정한 곡의 템포는 근래의 연구 결과를 전혀 반영하지 않은 것이었다.
파헬벨의 [카논과 지그]가 처음 음반으로 등장한 해는 1940년이다. 보스턴 팝스의 지휘자로 유명한 아서 피들러가 최초로 녹음했다. 이 곡으로 인기 음반의 반열에 오른 것은 장 프랑수아 파야르가 지휘한 파야르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음반이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카논과 지그]는 여러 차례 편곡되었고 수 없이 많은 앙상블이 이 곡을 연주했다. 비올라의 피치카토 부분은 원래 악보에는 없지만 현악 오케스트라나 4중주 구성일 경우 자주 연주되곤 한다. 하프시코드나 오르간 주자가 즉흥연주로 화성과 베이스 라인을 보완하지 못할 경우에 그러하다. [카논과 지그]의 화성 전개는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헤아릴 수 없는 팝과 록 등 대중음악 작품에 이 곡이 사용되었다.
[카논과 지그]가 쓰인 대표적인 경우로 1980년 로버트 레드포드 감독의 영화 [보통 사람들 Ordinary People]을 들 수 있다. 당시 일시적이었지만 이 곡의 인기는 단숨에 클래식 음악에서 가장 유명한 곡으로 치달아 올랐다. 이후 이 곡은 가사를 붙이는 등 여러 가지 장치와 편곡을 거쳐서 발표되었다. 로드 매퀸의 ‘And To Each Season’이나 우리나라에는 뉴에이지 피아니스트 조지 윈스턴의 작품이 피아노 악보로 보급되면서 [카논과 지그]는 그 대중성을 굳혔다. 또한 일본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 시리즈에도 삽입되어 인기를 끌기도 했다.
첫댓글 저에겐 일년반 동안 들었던 조현영 선생님의 피아노 토크 수업 이었습니다.
처음 수업을 들었을때 신선한 감동과 설레임을 주었었고, 이젠 긴 여운을 남기며 다시 뵈올날이 언제일지 기다려 집니다.
“나의 음악 이야기”를 통해 내면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전해준 인간적인 모습들이 너무 감명 깊었습니다.
어제는 그냥 참지 않고 눈물을 마음껏 흘려도 좋았을것 같았습니다...
<외유!~ 내강> 조현영 선생님 그간 감사했습니다.
다락 오픈때부터 현재까지 3년여 동안 수고도 많으셨지만 가르침도 많은 고마운 시간들이었습니다. 마지막 수업이라 울먹이는 선생님 못지않게 저희들 모두도 숙연한 분위기에 착잡한 마음으로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헤어지게 됐군요.항상 건강 하시고 훌륭한 실력 마음껏 발휘하시는 좋은날에 꽃다발 들고 찾아 뵐게요. 조현영 선생님 수고 하셨습니다.
클래식을 온 몸으로 느끼게 하고 서로의 감정들을 공명하게끔 하는 최고의 수업이었습니다..더욱 큰 날개짓으로 훨훨 날아가세요~~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