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13
11월18일 [연중 제33주간 금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빨리 무너지고 재건되어야 할 교회의 모습!>
성전은 기도하는 집인데, 오늘 너희는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있다는 예수님의 경고 말씀이 오늘 제게 섬뜩하게 다가옵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 여파로 사무실 직원도 없다 보니, 피정 신청 전화도 직접 받습니다. 씁쓸할 때도 종종 있습니다. 제가 먼저 ‘누굽니다.’라고 밝히지 않은 잘못도 있지만, 전반적인 통화 분위기가 아랫사람 다루는 듯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저런 사무실 직원들, 감정 노동자들의 기분과 마음이 어떠할지 생생히 체험할 때도 있습니다.
피정 비용이 큰 관심사다 보니 정확히 말씀드려야 합니다. “최근 물가상승을 고려해서 1박 2일 세 끼 얼마고 2박 3일 여섯 끼 얼마입니다.”
그런 안내에 깜짝 놀라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래서 또다시 곰곰이 성찰하게 됩니다. ‘그래 누군가에게는 그 돈이 얼마나 큰 돈인데.’, 하는 생각에 즉시 꼬리를 내리고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그렇죠. 너무 비싸죠? 요즘 유류비, 식자재비 폭등으로 저희도 어쩔 수 없이 가격을 인상했답니다. 그렇지만 부담스러우시면 내실 수 있는 만큼만 내시면 됩니다.”
“저희 피정 센터 절대 저희 소유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집이고, 하느님 백성의 집입니다. 특히 가난한 분들의 집입니다. 비용에 대해서는 아무런 부담 갖지 마시고 마음 편히 오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예수님께서 최초로 보여주신 태도는 사뭇 의아합니다. 입성하신 예수님께서는 보통 사람들의 처신과는 크게 차별화됩니다. 당시 제한적이었지만 세속의 권력자였던 헤로데 왕궁을 찾아가지도 않으십니다. 빌라도 총독과의 면담 스케줄도 잡지 않으십니다.
가장 먼저 보여주신 행동은 타락한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는 작업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성소요 하느님을 찬양하는 기도의 장소였던 성전은 당시 완전히 본질을 망각한 채 크게 타락해있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세속화의 극치를 잘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막대한 권리금을 상인들로부터 받고 성전 마당에서 이런저런 물건들을 판매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습니다. 상인들은 성전 마당에 가판대를 쭉 늘어놓고 큰 목소리로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환전상들도 이에 뒤질세라 여기저기서 말도 안 되는 시세로 돈을 바꿔주고 있었습니다. 경건하고 거룩해야 할 성전은 시끌벅적, 티격태격, 옥신각신, 바글바글…. 마치 재래시장 한가운데를 지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우스꽝스러운 성전의 모습에 예수님께서 평소와는 다르게 크게 진노하십니다. 예수님의 분노는 그저 분노에 그치지 않습니다. 밧줄로 채찍을 만드신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 죽치고 있던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을 내리치시며 밖으로 쫓아내십니다. 이어서 던지신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도 뼈아프게 들려옵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루카복음 19장 46절)
오늘 우리 교회의 내면을 들여다봅니다. 혹시라도 예수님의 호된 채찍질을 피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섭니다. 오늘 우리 교회 역시 크게 한번 정화와 쇄신이 필요한 상황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죄인입니다. 저는 하느님 크신 자비 없이 단 한 순간도 홀로 설수 없는 나약한 존재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겸손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여기서 나보다 더 잘 난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 보라 그래!’라고 외쳐대는 교만이 판을 치는 교회는 심각한 쇄신이 필요한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애지중지하셨던 중죄인들, 극빈자들, 상처 입은 자들, 중환자들이 발을 들여놓을 수 없을 정도로 문턱이 높은 교회는 지금 당장 정화가 필요한 교회입니다.
구성원 간의 격의 없고 활발한 소통의 문화가 사라진 교회, 일방통행식, 일인 독재식의 전근대적인 공동체 문화가 아직도 독버섯처럼 자리 잡은 낡은 교회는 빨리 무너져야 할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 시대 또 다른 예수님의 고통스러운 절규에 귀를 막고 그들이 흘리는 피눈물을 외면하면서 우리끼리 높디높은 담벼락을 쌓고 그 안에서 화사하게 웃으면서 지내는 무늬만 성전인 그런 교회는 첫 번째 정화의 대상입니다.
++++++++++++++++++++++
<(2)참된 의미의 성전이란? 예수님 발치 아래 앉아, 그분 말씀을 경청하는 충실한 백성들의 모임입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지속한 파격적이고 혁신적인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거지는 늘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과 구체적으로 보여주신 행동은, 가난하지만 착한 백성들에게는 꿀보다 더 단 말씀, 십년 묵은 체증이 순식간에 싹 내려가는 유쾌·통쾌·상쾌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구릴 대로 구려 터진 노회한 율법학자들과 이미 삯꾼으로 전락한 사제들과 지도자들에게 있어 예수님의 한 말씀 한 말씀은, 그야말로 쌍날칼이요 맵디매운 고춧가루였습니다.
그들은 의기투합해서 조용하고 거룩해야 할 성전, 하느님을 향한 찬미가와 영가가 울려 퍼져야 할 성전을, 장사꾼들과 사기꾼들, 야바위꾼들의 호객 소리가 넘쳐 나는 장터로 훼손시켜놓았습니다.
대사제들과 사제 가문의 귀족들은 성전 경내에서 이루어지던 매매에서 큰 이익을 얻고 있었습니다. 특히 대사제는 당시 유다 최고의회인 산헤린의 의장이었으니, 그 권한이 막강하였습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상인들이 상행위하는 조건으로 막대한 검은돈을 정기적으로 상납받고 있었습니다. 이건 아니다 하는 생각이 들어, 발을 빼려고 해도 늦었습니다. 속화될 대로 속화된 성전 주변은 이미 자정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그 모든 안타까운 현실을 당신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신 예수님께서, 드디어 거룩한 분노를 터트리십니다. 복음서 그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는 과격함과 뜨거움으로 타락한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렸다.”(루카 복음 19장 46절)
상상을 초월하는 예수님의 초강력 펀치 앞에 백성들은 쌍수를 들고 환호하고 손뼉을 쳤습니다. 반면에 구린 속을 들켜버린 적대자들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정확한 지적이었기에, 뭐라 반박할 여지도 없었습니다. 다만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없애 버릴까, 고민하기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없애 버리려는 그들의 사악한 계략은 현재로서는 불가능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중심에 자리하시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백성들이 그분 주위에 둘러앉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진정한 성전의 개념을 파악할 수가 있습니다. 메시아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여있는 말씀에 충실한 백성들! 그것이 바로 참된 의미의 성전인 것입니다.
성전을 건립할 때, 건물을 짓기 전에 반드시 먼저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사랑의 영적 공동체를 먼저 건설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공동체 중심에 두는 일입니다.
공동체 전체가 그분의 말씀을 진지하게 경청하는 일입니다. 그분의 뜻을 공동체 안에 실현하는 일입니다. 말씀을 중심으로, 친교와 소통과 일치의 공동체를 건설하는 일입니다.
건물은 그 후의 일입니다. 진정한 성전 건립은 영적 성전 건립, 그 위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아무리 휘황찬란하고 웅장한 성전이 건립된다고 할지라도, 그 안에 주님의 사랑과 희생, 헌신과 나눔이 활발히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성전은 진정한 의미의 성전이 아닙니다.
작고 허름해도, 주님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면, 구성원들이 그분 말씀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하다면, 그곳은 주님으로부터 크게 칭찬받을 아름다운 성전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현실을 한번 내려다봅니다. 도를 넘어서는 지나친 상거래는 하느님 집에 결코 어울리지 않습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집, 하느님의 크신 업적을 찬미하는 집, 무한하신 그분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집, 형제적 친교를 나누는 집이어야 마땅합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D-SFnglbQHI
++++++++++++++++++
<<힘들이지 않고 기도 오래 할 수 있으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루카 19,46) 성전은 분명 ‘기도하는 집’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입니다. 오늘은 어떻게 우리 내적 성전에서 기도가 충만해질 수 있는지 생각해봅니다.
어떤 분들은 사는 게 기도이니 특별히 기도 시간을 낼 필요는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틀렸습니다. 아무리 기도하려고 해도 내 안에 세속-육신-마귀의 욕구가 있다면 성전이 강도들의 소굴이 됩니다. 예수님도 이런 욕구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새벽에 기도하는 습관이 있으셨습니다.
먼저 내가 기도의 집이 되려면 우선 기도를 오래 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쇠붙이가 자석에 오래 붙어 있어야 자기에게도 자성이 생깁니다. 쇠를 풀무 불에 잠깐 넣었다 빼면 속까지 뜨거워지지는 않습니다. 기도가 오래가 결국 모든 삶이 기도가 되면 그제야 삶이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주님의 기도로 한 시간을 합니다. 그래도 어떤 때는 시간이 모자랍니다. 그런데 이전의 기도를 생각해보니 내가 하느님의 뜻을 묻는 기도가 아닌 내 뜻을 하느님이 아시게 하는 기도였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들을 청하면 기도가 길어질 수 없습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졌는데 어떤 신자분이 저를 붙잡았습니다. 굉장히 외로운 삶을 사시는 할머니셨습니다. 저와 면담하자며 한 시간을 기다리셨습니다. 성당 직원분은 신부님 식사 시간이 다 되어 면담할 시간은 안 될 것이라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 꾸리아 강복을 주고 점심에 맞춰 올라오는데 그 자매님이 저를 잡았습니다. 면담하고 싶은데 점심을 드셔야 해서 안 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보아하니 특별한 내용은 없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을 해 보시라고 하였습니다. 할머니는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시간으로 치자면 10분도 안 되었습니다.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잘 들어주기만 하면 오래 당신 말씀을 하지 못하실 것을. 고해성사에 들어오셔서 일사 후퇴서부터 말씀을 시작하셔도 가만히 듣고 있으면 오래 하지 못하십니다. 우리 인생에 대해, 우리가 원하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면 이렇게 금방 지칩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에서 여섯 아이를 키우는 부모와 자녀 간의 회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머니가 말하고자 하는 것, 거짓말 안 하기, 음식물 방으로 가져가지 않기, 형제간의 서열 지키기 등 몇 마디 하니 회의가 끝났습니다. 하지만 금쪽 처방받고는 오래 회의가 지속되었습니다. 부모가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들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부모가 자신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줄 수 있을지 눈치를 보며 아주 천천히 말합니다. 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는 데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마음을 받아들이자 오랜 대화가 시작됩니다. 부모와 자녀 간에, 그리고 형제들 간에도.
기도를 오래 하려면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집중하면 됩니다. 마치 어려운 수학 문제를 푸는 수학자처럼 하는 것입니다. 내 뜻은 이미 다 아시고 계신다고 가정하고 주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그 한마디를 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가 아무리 길어져도 지치지 않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실패요 동시에 성공으로 손꼽히는 어니스트 섀클턴이 지휘했던 남극 탐험대의 이야기입니다. 1914년 8월 섀클턴은 27명의 대원과 함께 남극 횡단에 나섭니다. 인듀어런스호 호는 웨들해의 해류에 밀려 바다 위를 떠도는 얼음 섬에 부딪혀 표류하게 됩니다. 겨울은 점점 다가왔고 이는 곧 죽음이 다가옴을 의미했습니다.
1916년 4월 20일 섀클턴이 대원들을 모아 놓고 발표합니다. 그의 지휘 아래 몇몇 대원들이 제임스 커드 호(작은 구명보트)를 타고 사우스조지아섬에 있는 포경기지로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와일드는 섀클턴 일행이 떠난 후 22명의 대원을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언젠가 섀클턴이 꼭 돌아온다는 희망을 잃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섀클턴이 떠난 지 4개월이 지난 1916년 8월 30일, 누군가 소리쳤습니다. “배가 왔어요!”
갑판에는 섀클턴이 망원경으로 얼음 섬에 있는 생존자의 숫자를 세고 있었습니다. 대원들은 숨을 멈추고 섀클턴이 다가오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이윽고 서로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거리가 되자 그들은 일제히 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모두 무사합니다!”
조난한 뒤 무려 634일 만에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전 대원이 구조되었습니다. 이는 실로 기적과 같은 결과였습니다. 이들이 무사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히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상대의 희망에 내 희망을 걸 때 오래 참을 수 있습니다. 기도는 그래서 깊어질수록 말하는 것에서 듣는 것으로 넘어갑니다. 그래서 오래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은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급해서 자신이 먼저 제사를 지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왕위에서 쫓아내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까지 끝까지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기다리는 동안 내가 그분의 말씀을 들을 사람이 되도록 나의 뜻을 봉헌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은 ‘주님의 기도’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내가 주님의 구체적인 뜻을 알아듣지 못해도 주님의 기도만 바쳐도 굉장히 유익합니다. 내가 이야기하면 금방 끝납니다. 하지만 상대의 이야기에 관심을 두고 한마디라도 들으려고 하면 밤을 새워도 모자랍니다.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한마디는 섀클턴을 기다렸던 선원들이 기다리던 나를 살리는 한마디여야 합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2014년 4월 16일 성주간 수요일에 참 슬픈 뉴스를 보았습니다. 세월호에 탑승했던 많은 승객이, 대부분이 학생들이었는데 세월호의 침몰과 함께 차갑고,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부모님들은 피우지 못하고 떨어진 꽃이 되어 버린 자식들을 가슴에 묻어야 했습니다. 안전 불감증에 의한 사고였고, 안전조치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더 큰 사고가 되고 말았습니다. 세월호 사고 8년이 지난 10월 29일 토요일 또다시 슬픈 뉴스를 보았습니다. 서울 이태원에서 핼러윈 축제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대부분이 20대의 젊은이들이었습니다. 부모님들은 피우지 못하고 떨어진 꽃이 되어 버린 자식들을 또다시 가슴에 묻어야 했습니다. 안전 불감증에 의한 사고였고, 안전조치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더 큰 사고가 되고 말았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분들이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슬픔에 잠겨있는 유족들에게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함께하시어 위안을 얻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또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억울한 죽음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재앙이 아니라 평화를 주노라. 너는 많은 백성과 민족과 언어와 임금들에 관하여 다시 예언해야 한다. 나를 부르면 너희 기도를 들어 주고, 사로잡힌 너희를 모든 곳에서 데려오리라.” 성장과 발전도 필요하지만, 정부는 국민의 행복과 안전을 위해서 제도를 만들어야 합니다.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인디언 할아버지와 손녀의 대화가 생각납니다. “할아버지! 왜 우리의 마음은 착한 생각을 하기도 하고, 나쁜 생각을 하기도 해요? 아픈 친구를 보면 도와주고 싶기도 하고, 배고픈 친구를 보면 나눠주고 싶기도 해요. 그런데 나보다 예쁜 친구를 보면 샘이 나기도 하고, 좋은 걸 가지고 있는 친구를 보면 뺏고 싶기도 해요? 할아버지는 손녀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두 마리의 늑대를 키우고 있단다. 착한 마음을 주는 파란 늑대와 나쁜 마음을 주는 검은 늑대란다. 손녀가 할아버지에게 묻습니다. 그럼 어떤 늑대가 이겨요? 할아버지는 손녀에게 말합니다. 응, 그건 네가 먹이를 자주 주는 늑대가 힘이 세지기에 이긴단다. 착한 마음을 주는 파란 늑대에게 먹이를 주고, 잘 돌보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두 마음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하는 기도의 마음입니다. 다른 하나는 남의 걸 빼앗는 강도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인디언 할아버지처럼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2022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면 좋겠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내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9,45-48: 너희는 하느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성전이 장사치의 소굴이 아니라, 거룩한 집이기를 바라신다. 그분은 사제의 직무가 부정직한 종교적 의무 수행이 아니라, 자발적인 순명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신다. 주님께서는 성전에서 세속적인 교환행위가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신다. 즉 돈 바꾸는 환전상들을 성전에서 쫓아내기까지 하셨다. 주님의 돈으로 이익을 챙기려 하는 자는 바로 환전상이다. 그 주님의 돈은 성경이다.
성당에서 세속적인 이익을 취하려고 하는 행위는 모두 다 환전상의 행위이다. 더구나 성경을 가지고 자기 이익을 챙긴다고 한다면, 그는 성경을 파는 사람이 될 것이다.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여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공포심을 주어 재물을 챙기는 많은 사이비 종교를 볼 수 있다. 그들은 모두 환전상들이지 참 목자가 아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성경을 가지고 현세의 이익을 취하고 있다.
성전에는 물건을 파는 사람들과 부끄러운 줄 모르고 돈을 사랑하는 죄인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환전상들, 환전 책상을 지키는 자들, 소나 양을 파는 자들, 집비둘기와 산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것들은 율법에 따라 희생 제사를 지낼 때 쓰는 것이었다. 이것들은 이제 없어지고, 우리 신앙인들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행실, 흠 없는 삶의 영광, 영광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향기로운 예배가 빛을 내야 한다.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성전 정화이다.
주님께서는 성전의 주인으로서 당신의 권한을 행사하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의 임무가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성전의 주인이신 그분을 경배하는 것이었는데도 그들은 어리석게도, 자신들의 의무를 행하기는커녕 오히려 주님을 증오하여 그분을 없애려고 음모를 꾸민다. 그러나 많은 군중이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고 곁을 떠나지 않아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비롯하여 유대인 지도자들 모두의 죄가 더욱 크다. 배우지 못한 백성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고, 그 구원의 말씀을 단비처럼 받아 마셨다. 그들의 마음은 열매를 맺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분의 가르침에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지도하는 자들은 주님을 거역하고 살인을 계획하고 있다. 그들은 모퉁이 돌에 걸려 넘어지고 말 것이다.
주님의 집은 하느님과 우리의 형제들을 만나는 장소이다. 이 만남은 사랑의 만남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 하느님의 집이 어느 개인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장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오늘 복음에서 보여주고 있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몸도 성령의 궁전이라고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셨다. 이 궁전을 인간적인 욕심으로 채우려고 한다면 하느님의 성전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언제나 주님을 모실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그래서 세상을 비출 수 있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는 장면을 소개합니다.
루카 복음서에 따르면, 이 일화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바로 그날에 이루어집니다. 그만큼 성전 정화 사건은 예수님의 메시아 왕권을 재확인하는 중요한 기능을 담당합니다. 그런데 메시아 예수님의 왕권은 세속적 의미에서 가리키는 지배와 통치를 위한 ‘권력 쟁취’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분의 왕권은 오직 하느님 아버지를 올바르게 합당하게 섬기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물건을 파는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이 구절에서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은 이사야서 56장 7절의 인용입니다. 곧 성전의 본래 기능이 기도하기 위함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강도들의 소굴’은 예레미야서 7장 11절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 시대나 예수님 시대나 사람들이 성전의 본래 기능을 왜곡하여 잘못 사용하고 있다는 비판입니다.
마침내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라고 복음은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상인들을 꾸짖으신 일과 성전에서 가르치신 일이 유다교 지도자들에게는 ‘눈엣가시’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내용은 구약과 신약 시대의 이야기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도 ‘기도의 집’인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거나, 왜곡된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
[예수그리스도 고난회 서현승 베드로 신부님]
누군가와 대화를 한다고 할 때, 그 소통 안에는 입으로 하는 말뿐 아니라 상대의 표정과 몸짓, 분위기 등이 포함되곤 합니다. 실상 말을 하지 않고 있어도 상대는 말 없는 것 자체로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많은 대화를 하지만 서로 간에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머무는 때도 있을 테고, 혹은 말로 표현되지 않아도 상대의 뜻을 알아들을 수 있는 이심전심의 소통 또한 있을 수 있겠습니다.
문제는 모든 소통의 관계 안에는 서로의 마음이 열려 있느냐 없느냐에 있겠죠. 하느님과의 소통이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를 향해 열려 계신 하느님의 마음 안에 머물고 그분의 사랑을 떠나지 않는 것이 바로 기도이겠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성전이 ‘기도하는 집’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주십니다. 하느님과의 소통을 방해하는 온갖 거래와 모략들을 일거에 제거하시는 예수님의 분노를 통해 예수님 자신이 얼마나 기도를 중요하게 여기셨는지를 알 수 있을 듯합니다. 기도할 때는 사실 내 청을 아뢰는 것 못지않게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처럼 성전에서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느라고 예수님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것처럼 마음을 열고 내 삶을 통해 전해지는 하느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는 것, 그럼으로써 알아보지 못했고 듣지 못했던 그분의 ‘표현’들을 하나씩 내 삶 안에서 깨우쳐가는 것, 그것이 하느님과의 소통이 이루어지고 기도가 이루어지는 삶의 성전인 것입니다
=====================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맨 먼저 찾아가신 곳은 예루살렘 성전이셨습니다. 그곳은 당신이 열두 살이 되던 해에 잃은 아들을 찾아 온 부모에게 “저는 저의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 49)라고 했던 바로 그 성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면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루카 19, 46)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당신의 집’으로 말씀하십니다. 곧 “성전”을 당신이 머무는 곳이요,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는 곳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성전은 당신과 만나고 당신을 대면하고 마주하는 ‘기도의 집’이요, 성전에 있다는 것은 당신 바로 앞에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성전이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강도의 소굴’이 되었음을 말씀하십니다. 이는 당시에, 성전이 장사와 환전이 행해지는 불결하고 부정한 곳이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결국, 하느님과 만남의 장소가 되지 않고, 오히려 재물과 탐욕의 우상을 만나는 장소로 변해버렸기에,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새롭게 정화하시는 일을 맨 먼저 하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 성당에 오시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리 성당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시고 어떻게 하실까? 대체, 오늘 우리 성당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하느님을 예배하고 기도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예수님의 성전정화는 교회개혁의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교회가 항상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드러내고 주님의 생명과 사랑에 응답해야 함을 말해줍니다. 곧 이러한 예수님의 행위는 은총의 물을 흘려보낼 수 있도록 쇄신하는 표상이 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쪼개시고, 성전의 장막을 두 갈래로 가르셨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성전주의에 갇히지 않으시는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주셨습니다. 또한, 우리를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하느님 현존의 성전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잘 깨우쳐줍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 16)
참으로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은 주님께서 주신 거룩한 품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비록 질그릇 같은 깨지기 쉬운 몸이라 할지라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값진 보화를 간직한 거룩한 몸입니다. 당신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서 현존하시며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 안에 계시고 활동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주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이 ‘강도의 소굴’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몸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몸으로 그분의 영광을 드러냄이란 우리 몸을 잘 보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몸을 다른 이들을 위해 내어주는 것을 말한다고 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 1)
그렇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을 때, 곧 우리 자신을 타인과 세상을 위해 내어놓을 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우리 자신은 ‘기도의 집’이 되고, 우리 안에서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아멘.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는 성전입니다>
루카 19,45-48 (성전을 정화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도를 찾지 못하였다.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성전입니다>
기도의 집이 될 수도 있고
강도의 소굴이 될 수도 있는
나는 성전입니다
나를 여니
기도의 집이 되고
나를 닫으니
강도의 소굴이 됩니다
너를 안으니
기도의 집이 되고
너를 밀쳐내니
강도의 소굴이 됩니다
사랑을 품으니
기도의 집이 되고
증오를 담으니
강도의 소굴이 됩니다
베풂을 즐기니
기도의 집이 되고
탐욕을 좇으니
강도의 소굴이 됩니다
축복을 내리니
기도의 집이 되고
저주를 쏟으니
강도의 소굴이 됩니다
진실을 밝히니
기도의 집이 되고
거짓을 감추니
강도의 소굴이 됩니다
평화를 이루니
기도의 집이 되고
분열을 꾀하니
강도의 소굴이 됩니다
살림을 베푸니
기도의 집이 되고
죽임을 꾸미니
강도의 소굴이 됩니다
강도의 소굴이 아니라
기도의 집이 되어야 하는
나는 성전입니다
=====================
[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성전, 따로 또 같이 하느님을 만나는 곳>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어제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시고 눈물을 흘리신 주님께서 오늘은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그런데 주님의 정화는 빗자루 들고 청소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곳에서 장사하던 자들을 과격하게 몰아내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느님의 집이어야 할 성전을 자기들의 집으로 만들고, 기도하는 곳이어야 할 성전을 그들이 장사하는 곳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이 성전인 이유는 너무도 당연하게 하느님께서 그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전이 우리가 모이는 곳 곧 집회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하느님 없이 우리만 모인다면 성전이라고 할 수 없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어디서나 만날 수 있고 만나야 하지만 성전은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특징적인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에서 하느님과 만남이 없는 우리끼리 만남은 있을 수 없고, 반드시 하느님과 만남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 만남은 두 가지입니다.
그것은 ‘따로 또 같이’ 입니다.
먼저 성전은 따로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어야 하는데 따로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 자기 집이나 한적한 곳일 수도 있지만 특별히 우리가 하느님을 성전에서 따로 만나야 할 이유는 성체조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교회가 개신교와 달리 성당인 이유는 성체가 모셔져 있기 때문이고, 이것이 우리가 교회라는 명칭보다 성당이라는 명칭을 고집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갈수록 성체조배 모습을 우리의 성당에서 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내밀한 친교요 기도인 성체조배 없이 어떻게 가톨릭 신자로 살아갈 수 있을지 의문이고 걱정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성전에서 함께 하느님을 만납니다. 함께 하느님을 만나는 곳을 교회라고도 하고 성당이라고도 하는 거지요.
사실 성전이 있어야 할 더 큰 이유는 함께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성체조배 이외에 혼자 하느님을 만나는 곳은 골방으로도 되지만 함께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교회로서의 성전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란 모임 곧 교우들의 모임이고, 성전은 교우들의 모임 장소라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뿔뿔이 흩어진 양들을 하느님 목장으로 모으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성전은 이 하느님의 목장이요 하느님의 우리인 셈입니다.
이곳에서 주님 중심으로 우리의 진정한 친교가 이뤄지고,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쁨을 우리가 나누기도 합니다.
우리의 모임에는 계모임도 있고, 동호회 모임도 있습니다. 계모임 장소는 식당일 것이고 동호회 모임은 등산의 경우 산이고, 조기 축구의 경우는 운동장일 겁니다.
그런데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모임이 이 계 모임이나 동호회 모임보다 더 기쁘고 즐거운 친교가 이뤄지고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지, 하느님을 함께 찬미하는 기쁨이 세속 합창단의 기쁨보다 더 기쁜지 돌아보게 되는 오늘 우리입니다.
내일과 모레 강론을 올릴 수 없습니다. 양해를 바랍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성전을 지킵시다>
태국의 왕궁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많은 관광객에 떠밀려 겉모양을 보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화려한 수공예 작품으로 꾸며진 왕궁을 보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국왕의 권위를 인정하며 존중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짧은 치마를 입은 사람은 무릎 밑으로 내리는 긴치마를 빌려 입어야 하고 슬리퍼를 신은 사람은 다른 신으로 갈아 신어야 할 정도로 국왕에 대한 예의를 차렸습니다.
왕궁의 곳곳에 그려진 벽화는 규모나 섬세함이 대단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벽화를 복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장인 정신을 생각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들락거려 소란스러운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온갖 정성을 들여 붓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몇몇 한국인들이 눈에 뜨여 아주 반가웠습니다. 한국 사람은 사원이나 왕궁 등 역사적인 장소를 찾기보다는 먹고, 마시고 즐기는 곳을 즐겨 찾는다는 말을 들었기에 그들이 달리 보였습니다.
국왕의 권위를 인정하는 만큼 왕궁은 보호되겠지만 관광객으로 넘쳐 나는 왕궁은 아마도 돈벌이의 장소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잘 포장된 과일바구니를 봉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봉헌한 사람이 자리를 비우기가 무섭게 바구니는 치워지며, 이미, 판매되었던 과일 바구니를 다시 판매하는 모습을 보면서 봉헌의 의미가 무시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왕궁의 덕분으로 백성이 사는구나 하는 마음입니다. 모쪼록 왕궁이 돈벌이의 장소가 되지 않고 백성을 살리는 곳, 곧 기도의 집이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가끔은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 마음에 끌리는 것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상충할 때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마땅히 주님을 따라야 함에도 말입니다. 육적인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면 몸은 고달플지라도 마음의 자유를 누립니다. 그러나 육적인 욕망을 따르면 당장은 즐겁고 기쁘지만, 주님을 따르지 못한 안타까움에 마음이 걸립니다. 사실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한 마음이 강도의 소굴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았고, 하느님의 숨을 받았으며 주님을 모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 몸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상태가 강도의 소굴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루의 끝맺음에 늘 “허물로 누벼놓은 이 날 하루를 주님의 자비로 지켜주소서.” 하고 기도를 하지만, 일관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기엔 여전히 힘에 겹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혀에 감미로운 자는 기도의 집이요, 육의 욕망을 따르는 자는 강도의 소굴이거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애 버릴 방도를 모색하였습니다. 설사 그들의 계획이 성공한다 해도 진리 안에 자유를 누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끝내 ‘강도의 소굴’을 ‘기도의 집’으로 회복시키지 못한 채 죽음을 자초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오늘도 여전히 그들의 전철을 밟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기도의 집을 복구하는 날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신 것은 성전은 이익을 남기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을 예배하고 사람을 섬기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이 장터였다면 그들을 쫓아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밑지고 파는 장사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건을 파는 이들은 당연히 이익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셈을 하고 이권이 살아있는 곳이 세상입니다. 성당에서 운영하는 성물방이나 카페가 물질적 이익의 창구가 된다면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실까요?
우리 삶의 자리는 주님을 모시는 성전입니다. 성전의 아름다움을 잘 지킬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제일 먼저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은 이권과 체면을 지키려 예수님을 죽이려 했지만, 평범한 백성들은 예수님 곁에 있으려 했습니다. 함께하는 행복을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전을 지킵시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파리에 가보고 싶다는 분이 많습니다. 파리의 야경, 센강, 루브르 박물관, 에펠탑…. 볼거리와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파리에 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였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원래 파리는 상하수도 시설이 엉망이었다고 합니다. 왕궁에조차 제대로 된 화장실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길가에 아무 곳에서나 일을 보았습니다. 여성들의 치마가 펼쳐진 우산처럼 되어 있는 이유는 아무 데서나 일을 보기 위해서라는 말도 있습니다. 양산을 들고 우아하게 서 있는 부인이 사실은 일을 보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상하수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파리. 그래서 전염병이 시작되면 계속된 확진으로 언제 그칠지 아무도 예측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런 파리였지만, 나폴레옹 3세 황제 명령에 따라 대대적인 구조 개혁이 시작되면서 현재의 아름다운 파리가 완성되었습니다. 하긴 우리나라도 그렇지 않습니까? 저 어렸을 때만 해도 수세식 화장실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재래식 화장실 이용은 도저히 못 할 정도가 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빠르게 변하는 세상인데 우리 각자는 어떻게 변하고 있을까요? 좋은 쪽으로, 그리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변화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 예수님의 폭력행위를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얼마나 화가 나셨으면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셨던 분이 폭력을 쓰셨을까요? 기도하는 집이 아닌 장사하는 집이 되어 있었고, 사랑이 충만한 곳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향한 불의와 차별이 있는 강도들의 소굴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근본적으로 자기 죄를 숨기려고 합니다. 성전에서 죄를 짓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인정과 지지를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었고,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거짓된 말로써 백성을 속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군중은 예수님께로 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그들의 죄가 점점 환하게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습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속담처럼, 점점 그들의 죄가 확대되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변화를 위해서도 십자가를 피하지 않는 예수님이십니다. 이제 죄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함께하면서 주님 안에서 커다란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전 정화>
- 날마다, 기도와 말씀, 그리고 성사의 수행으로 -
제 주변에는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성인처럼 사는 아름다운 분들이 참 많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저는 주저함 없이 성인이, 성녀가 되라고 격려를 아끼지 않습니다. 어제는 이렇게 성녀처럼 사시는 분이 부탁대로 제 졸저 두 종류의 책을 수도원 피정집에 비치할 수 있도록 충분히 제본해다 주었고, 또 한 권의 책도 제본을 부탁했습니다.
모두가 사제생활 초창기 90년대 전후에 썼던 강론집에서 좋은 부분을 발췌하여 좋은 분들이 협력하여 내준 책들로 수도원 피정집 방마다 비치했는데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습니다. 새삼 진리는 변함이 없이 늘 반짝이는 빛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30년 전 강론 내용을 중심으로 편집된 책들인데 지금도 끊임없이 찾기에 제본을 실행한 것입니다.
기존의 책보다 책도, 글자도 커서 돋보기 없어도 볼 수 있어 너무 흡족한 마음에 어제는 하루 내내 행복했습니다. 책 세 권의 제목이 근본적 물음에 대한 답같아 잊혀지지 않습니다
1.“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2.“둥근 마음, 둥근 삶”
3.“사랑밖엔 길이 없었네”
바로 다시 피정집에 비치할 책 제목들인데, 참 재미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에 대한 답이 ‘둥근 마음, 둥근 삶’에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가 되기 때문입니다. 혹시 마지막 한 권의 책을 출판한다면 제목은 무조건 제 좌우명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로 하고 싶습니다.
정말 요셉 수도원에 정주하기 만 34년 하루하루 살아왔고, 살고 있고, 살 것입니다. 이렇게 살다가 이렇게 죽을 것입니다. 정말 하루하루 삶을 단순히 집중하여 오늘 지금 여기를 살 때 환상이나 거품은 걷히고 본질적 깊이의 삶입니다. 모두가 하루하루의 삶에 공감을 표하며 동의하곤 합니다. 예수님 역시 하루하루 날마다 평범한 일상에 충실했음을 봅니다. 루가 복음의 예수님 삶에 자주 나오는 말마디가 “날마다”입니다.
‘날마다 일용할 주십사’라는 주님의 기도와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라는 말마디를 기억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라는 말마디가 나옵니다. 성 베네딕도의 규칙에도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희 두고 살라’는 말이 나옵니다. 제 좋아하는 기도문 중, ‘날마다’와 ‘하루하루’ 두 말마디가 들어 있는 대목을 소개합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강론에도 얼마나 많이 인용했는지, 그러나 인용할 때마다 새롭고 좋고 감동적입니다. 사실 고백성사 후 보속으로 이 두 기도문을 소리내어 읽게 하면 많은 분이 읽는 도중 목이 메어 읽지를 못하는 경우도 수없이 목격했습니다. 그만큼 마음이 순수하다는 증거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평범한 일상에 한결같이 충실한 것이 구원의 첩경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예루살렘을 보시며 그 타락상에 우시던 예수님은 나약한 이상주의자가 아니었음이 오늘 삶의 현장에서 입증됩니다. 강렬한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였음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자마자 성전정화의 행동에 돌입합니다.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천둥 같은, 죽비 같은 말씀입니다. 세상의 중심이자 세상의 마지막 보루와도 같은, 세상을 정화하고 성화해야 할 하느님의 집이자 기도의 집, 말씀의 집, 평화의 집인 성전이 속화되는 것보다 큰 재앙은 없을 것입니다.
이어 주님은 구체적 성전정화를 실행하십니다. 본연의 말씀 가르치심에 전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이보다 더 좋은 성전정화의 수행도 없을 것입니다. 말씀을 가르침에 더하여 평생 날마다 끊임없이 기도를 바치는 것이며 성사를 거행할 때 사실 이보다 더 좋은 성전정화는 없을 것입니다.
보이는 성전만이 성전이 아니라 건물 성전의 눈에 보이는 가시적 성전에,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한 몸 공동체의 성전, 그리고 하나하나 각자가 주님의 거룩한 성전이기도 하니 말그대로 성전의 삼중적 차원입니다. 바로 날마다의 말씀수행, 기도수행, 성사수행이 한결같이 동시에 이 세 차원의 성전을 정화하고 성화한다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정화와 성화는 물론 우리 삶자체가 세상의 소금이자 빛같은 존재가 됨으로 저절로 존재론적 복음 선포가 되어 세상을 날로 정화하고 성화해 갈 것입니다. 그러니 성전정화의 최선, 최상의 길은 끊임없는 기도와 말씀, 성사 수행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수행과 더불어 저절로 기도의 생활화, 회개의 생활화도 이뤄질 것이니 성전은 늘 깨끗하고 거룩할 것입니다. 이래서 성전에서의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 수행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예수님은 적대적인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의 반응에는 아랑곳없이 자신의 본질적 사명에 충실하십니다. 빛과 어둠처럼, 인생에는 이런 어둠만이 있는 게 아니라 빛도 늘 우선함을 깨닫습니다. 민심은 천심입니다. 마치 예수님을 보호하는 빛처럼 온 백성이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으니 적대자들도 어찌하지 못합니다.
세상은, 우리 인생은 빛과 어둠, 단맛과 쓴맛이 함께 합니다. 이런 현실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한결같이 평범한 일상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며, 바로 말씀의 힘, 하느님의 힘이 이를 가능하게 합니다. 묵시록의 요한의 신비로운 영적체험이 우리에게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작은 두루마리가 상징하는 바, 바로 말씀입니다. 요한이 말씀의 두루마리를 천사에게 선물로 받을 때 천사의 말입니다.
“이것을 받아 삼켜라. 이것이 네 배를 쓰리게 하겠지만 입에는 꿀같이 달 것이다.”
요한이 천사의 손에서 작은 말씀의 두루마리를 받아 삼키니, 그것이 입에는 달았지만 먹고 나니 배가 쓰렸다 합니다. 이어 요한에게 주어지는 복음 선포의 명령입니다. 바로 단맛과 쓴맛,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인생이요 세상이요 이런 인생을, 세상을 살 힘을 주는 말씀의 힘, 하느님의 힘임을 깨닫습니다. 말씀맛, 하느님 맛으로 살아가는 우리 믿는 이들입니다. 시편의 화답송 고백도 위로와 힘이 됩니다.
“당신 말씀 제 혀에 얼마나 달콤한지! 그 말씀 제 입에 꿀보다 다옵니다.”
달콤한 꿀맛같은 말씀맛이, 말씀의 힘이 인생 쓴맛을 상쇄하며 우리 모두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세상의 성전으로 세상을 정화하고 성화하며 살게 합니다. 말씀을 모시고 말씀과 하나되어 산다해도, 어둠과 쓴맛의 세상은 여전할 것이나 우리는 파스카의 예수님과 함께 말씀의 힘, 하느님의 힘으로 이들을 돌파해 갈 것입니다. 결코 세상에 속화되지 않고 세상을 성화하는 세상의 소금이자 세상의 빛으로, 세상의 성전으로 살게 할 말씀의 힘, 하느님의 힘입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세상의 중심이자 주님의 거룩한 성전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세상을 정화하고 성화하는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세상의 성전으로 살게 합니다. 아멘.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루카45,46)
<기도의 집은 부활하는 곳!>
오늘 복음(루카19,45-48)은 '성전 정화에 대한 말씀'입니다. 성전은 '기도의 집'인데,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고 질책하십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그렇게 질책하시는 예수님을 없애려고 합니다.
'성전은 기도의 집!'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에 대한 묵상을 해 보았습니다. 기도는 단순하게 내가 필요한 것을 달라고 열심히 청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기도의 본질은 하느님과의 대화요 만남'입니다. 이 만남을 통해서 '내가 부활하는 것', '내 생각과 말과 행위가 다시 부활하는 것', 이것이 바로 '기도의 본질'입니다.
애니메이션 영화인 '위대한 기적(The great miracle)'이라는 영화가 이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영화의 내용을 보면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들의 처지가 '지옥의 상태'입니다. 그런 그들이 천사의 인도로 미사에 참석합니다. 천사의 도움으로 미사에 온전하게 참여합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거룩한 성체를 받아 모시고 강복을 받고 완전히 새 사람으로 부활하여 성전을 나섭니다.
우리는 이 부활을 얻으려고 기도하고 미사에 참여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형식적으로 율법적으로 그리고 기계적으로 기도하고 미사에 참례한다면, 그래서 아무 부활도 없는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저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는 의미라고 묵상했습니다.
요즘 우리가 독서로 듣고 있는 요한 묵시록이 전하는 말씀의 요지는 '회개'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3,19) 이 회개로 천상 예루살렘에 들어가야 한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강도들의 소굴이 기도의 집으로 바뀌는 것',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8Wi2kaAd2MA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루카 19, 46)
사고파는
것이 아니라
나누고
감사하는
사랑의
기도입니다.
강도들에게는
강도의
소굴이 있듯이
기도하는
이들에게는
기도의 집이
있습니다.
기도의 몸
기도의 마음이
간절히
필요한 우리
시간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기도의
길입니다.
가장 중요한
기도의 길을
신앙인인
우리가
가로막아서는
안됩니다.
기도의 가장 큰
걸림돌은
언제나
자기중심적인
우리 자신입니다.
먹고 사는
행위도
기도의
영역입니다.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땅에는
기도의 집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삶의 질서를
잡아주며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합니다.
기도의 집에서
기도를 잃어버리면
우리의 삶은
목적지와
방향을
잃어버립니다.
예수님의 몸이
기도의
성전이었듯이
우리의 몸도
우리의 마음도
기도로 사랑을
전하는 삶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위협하고
협박하는
강도들의 소굴이
서로 사랑하고
함께 기도하는
신앙인들의
성전이길
기도드립니다.
예수님의 집은
기도하는
기도의 집입니다.
기도의 집은
우리에게서
시작되는
기도의
시작입니다.
하느님께
우리의 하루를
봉헌합니다.
+++++++++++++++++++
(2)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루카 19, 46)
성전정화는 외부로부터가 아니라 내부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기도와 성전을 분리시킬 수는 없습니다. 삶을 정화시켜주는 기도입니다. 근본으로 돌아가게 하는 기도입니다. 우리의 삶을 달래어주는 성전의 본질은 분명 기도에 있습니다.
삶의 중심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신앙의 삶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가장 힘든 시간에도 기도의 성전과 함께 했습니다. 기도하는 본연의 자리가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고 하느님 뜻을 실천하는 곳이 성전입니다.
성전과 기도는 하느님 안에서 결코 둘이 아닙니다. 성전정화는 기도를 통한 자기 정화이기도 합니다. 기도로 우리의 성전을 새롭게 하는 위령성월 되십시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