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4월 27일. 카이-우베 폰 하셀 서독의회 의장이 빌리 브란트 총리에 대한 의회 불신임 결의안 투표결과를 발표하는 순간, 서독 국민들은 무엇에 홀린 듯 멍한 표정이었다. 당시 브란트가 이끄는 사민·자민당 연립정부는 연립정부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자민당 의원 일부가 이탈한 상황이어서 원내 다수의석의 지위를 잃었고, 정권도 더 이상 지탱할 수가 없는 상태. 따라서 투표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러나 야당은 기대했던 과반수 표를 얻는데 실패했고 브란트 총리의 불신임 결의안은 맥없이 부결되었다. 이 수수께끼 배후에는 동독 정보기관 ‘슈타지’(정식명칭 국가안전부·STASI)가 있었다. 서독연방의회 내에 ‘교섭단체를 구성할 정도로’ 많은 의원들을 포섭한 슈타지는 친(親)동독 정책을 펴온 브란트가 불신임 위기에 몰리자 이들을 이용해 브란트를 구출해냈던 것이다. (이는 노무현을 탄핵하자 ,북괴의 하수인들이 통곡하며 ,촛불반역시위를 실시해서 노무현을 탄핵에서 구출한 것과 같다)
2000년 후베르투스 크나베가 쓴 ‘슈타지 문서의 비밀’(원제 침투당한 공화국)이 최근 국내에서 번역, 출간됐다. 서독 역사상 가장 떠들썩했던 간첩사건 ‘기욤 사건’을 비롯해 몇몇 슈타지 관련 스파이 사건들을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저자는 서독 사회 각계에서 슈타지에 협력한 소위 ‘비공식 정보요원’(IM)을 2만~3만 명으로 추정한다. 이들은 조직과 활동에 있어서 소련의 KGB를 모방했고 40여 개의 자체행동단위인 ‘라인’을 구성해 해외첩보활동, 통신감청, 여권통제 및 외환조달, 선진기술탐지 등을 주요활동 영역으로 삼았다.
책 `슈타지 문서의 비밀` 슈타지의 활동은 서독에 선거가 임박했다거나 혹은 동독 공산당정국이 결의한 정치 캠페인을 정보기관의 힘을 빌려 추진하고자 할 때 적극성을 띠었다. 서독 각 정당 선거운동본부들보다 더 일찍 선거준비에 돌입했는데 상대의 지저분한 스캔들을 들추어내거나 유용한 문서들을 빼내고 연립정부의 내부적 갈등을 부추기는 데 열중했다.
슈타지는 또 서독내의 친동독 세력을 동원하여 반공정치 지도자들을 정치적으로 매장시키는 데도 성공했다. 1968년 10월 기민당 소속의 하인리히 뤼브케 서독 대통령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난 것도 슈타지의 집요한 반(反)뤼브케 캠페인 때문이었다.
서독 종교계에 대한 침투에서도 슈타지는 완벽성과 철저성, 뛰어난 조직능력으로 대표되는 프로이센 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슈타지 내의 서로 다른 부서가 서독의 개신교와 가톨릭교회를 분리해 각각 침투했고, 심지어 여호아의 증인과 같은 소규모 종교집단에 대해서도 별도의 부서를 두어 관장케 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서독 평화운동의 중심인물들도 직간접적으로 슈타지의 영향을 받았다. 마틴 니묄러 개신교 목사는 ‘평화’와 ‘화해’라는 두 단어가 화두로 오르는 모임이 있으면 빠지지 않고 귀빈석을 차지하는 인사였지만 이념적 성향은 다분히 친사회주의적이었다.(한국에서도 지금 화해와 협력을 강조하는 자들은 모두 김정일의 첩자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만약 독일인들에게 분단 상태 그대로 살 것이냐, 아니면 소련식 독재체제 하의 통일이냐 하는 두 가지 대안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면 아마도 공산주의의 위험을 감수할 것으로 본다”면서 “가장 나쁜 악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돈”이라고 말했다.
‘평화를 위한 장성들의 모임’이란 좌파단체를 이끌면서 레이건 대통령의 대소(對蘇) 강경정책을 비난하는데 앞장섰던 거트 바스티안도 슈타지로부터 정기적으로 돈을 받았음이 나중에 드러났다. (이는 평군이란 반역단체를 조직한 표명렬과 같다)그는 1992년 10월 연인이던 녹색당 당수 페트라 켈리와 함께 동반 자살했다.
한편 서독 대학은 슈타지의 간부요원 양성소나 마찬가지였다. (현재 한국의 한총련은 전국 대학의 대다수 학생회 조직을 장악한 반역대학생 양성지휘소이다.사실상 한국의 대학은 현재 공산주의자 양성소라고 해야 맞다.활동이 왕성한 학생회 임원 중심으로 전국 대다수의 대학생들이 공산의식화되어있다)
동독 공산당과의 정치적 접촉이 금기시됐음에도 불구하고 서독 사회주의독일학생연합(SDS)은 동독 자유독일청소년단(FDJ)과 일찍부터 상호 교류·협력해왔는데 FDJ 회원들은 1966년 서베를린 대학생들이 ‘더러운 베트남 전쟁’ 반대시위에 이어 서베를린에 있는 아메리카 하우스 앞에 집결, 그곳의 미국 성조기를 끌어내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 1968년 3월 동베를린 훔볼트대학 디터 클라인 교수가 작성한 구체적인 보고서에 따르면 학생운동의 전술·전략과 관련한 소규모 토론회에는 동독 간부들도 초대되었다고 한다.
이밖에도 슈타지는 서독의 문화 예술 언론 경제계에 상당수의 첩자와 비정규 정보원을 침투시키고 있었다. 그들은 섹시한 남자 공작원을 보내 서독 정부 내 여비서들을 ‘이불 속에서 포섭’하여 정보를 빼내는가 하면 가장 강력한 노조세력인 금속노조 뿐만 아니라 부르주아 정당들과 기업인들에게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그러나 우리가 정작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슈타지가 그처럼 종횡무진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와준 서독사회의 정치적·정신적·지적 분위기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1960년대 이후 서독 지식인 사이에서는 동독 편을 들어주고 동독을 인정해야만 ‘진보적’이라는 논리가 팽배해졌다.
(현재의 한국에서도 북괴의 체제를 동의해야 진보라는 의식이 팽배해져 있다)
서독의 각 정당은 동독 공산당 지도부와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서로 경쟁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점차 서독 기본법 속의 통일조항까지 포기할 용의가 있다는 상황으로 발전했다.” 결국 많은 서독인들이 슈타지와 협력함으로써 동독 공산당 독재에 공동책임을 지게 된 상황에서 크나베를 비롯한 독일의 보수 논객들은 전후(戰後) 독일사는 새로 써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까지 내놓고 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지난 40여 년간 ‘슈타지’에 놀아난 서독의 허약한 모습이 오늘 우리의 현실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이다. 언젠가 통일이 되어 북한의 대남정보활동의 실체와 조국을 배반한 자들의 치부가 백일 하에 드러나게 될 때 우리도 광복 이후의 역사를 새로 써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지는 않을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