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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들 원문보기 글쓴이: 영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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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헌책으로 시작된 신유
희망교회는 봉천동 현대시장과 시내버스 102번 종점이 있는 지역의 한 상가를 새로 얻어 교회 건물로 사용했다. 그리고 우리 부부는 구암초등학교를 옆으로 끼고 한참을 올라가야 있는 산동네의 한 주택 반지하방을 얻어 생활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우리 식구는 셋이 되어 있었다. 5월 말에 낳은 딸 아이 때문에 식구가 하나 더 늘은 것이다.
우리가 자리를 잡은 이곳 봉천동은 가난한 사람들이 광범위하게 모여사는 동네였다. 이곳에 새로 개척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희망교회는 우선 먼저 전도에 힘썼다. 교회 인근에 산재해 있는 작은 공장에 다니는 젊은이들을 찾아다니며 전도했다. 그러자 젊은이들이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나의 아내는 어린이 전도에 힘을 쓰며 교회학교 교육을 이끌었다. 교회의 재정은 이전에 온 뒤에도 교단 선교국의 지원을 계속받았다.
이렇게 새로운 지역에서 교회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지역사회를 위한 선교사업을 계획하고 있던 1983년 가을, 나는 현대시장 골목에 있는 작은 헌책방에 들렀다. 헌책방에 들르는 일은 내가 전부터 습관적으로 해 온 일로서 그곳 봉천동에 이사간 뒤로는 그 책방을 자주 찾아가곤 했다.
그런데 그 날 다른 때와는 달리 나의 눈에 확 들어오는 한 권의 책이 있었다. 벽에 설치된 책꽂이에 꽂혀 있던 그 책의 제목은 <능력의 증언>이었다. 이것은 내가 거기서 처음 본 책이 아니었다. 몇 년 전 신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 본 적이 있는 책이었다.
신학교 3학년 재학 중일 때 나는 서울 냉천동 감신대 근처에 있는 현신애 권사 복음선교회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몹쓸 병을 갖고 있던 나는 그곳에 신유의 은사를 받은 현신애 권사를 통해 병 치유의 역사가 많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었다. 그런데 내가 처음 찾아갔을 때 그곳은 많은 병자들로 복잡하고 악취도 심해 그냥 구경만 하고 나오고 말았었다. 더구나 의사같은 흰 까운에 흰 모자를 쓴 현 권사라는 사람이 기도해주는 모습에서 또한 실망을 했었다. 심각한 병자를 위해 기도해 준다는 것이 고작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믿으면 믿는 대로 될지어다!"
라고 말하며 가슴과 등과 머리를 한번씩 툭툭 치고 마는 모습에 신뢰감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선교회를 나오면서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의 간증을 묶은 책, <능력의 증언>을 얻어 갖고 나왔다. 그렇지만 나는 그때 그 책을 건성으로 들쳐보고는 내팽개쳤었다.
그러나, 그 책을 봉천동 헌 책방에서 다시 발견하였을 때는 전과 달리 몰입하게 됐다. 그 책의 내용은 앞 부분에 현신애 권사가 하나님으로부터 신유은사를 받은 경위와 그 은사를 받은 뒤의 선교 활동에 대해 기록하고 뒤이어 주의 이름으로 병 고침을 받은 많은 사람들의 간증을 수록해 놓고 있었다.
나는 그 책을 처음부터 정독했다. 한국교회 신유은사 사역의 대명사 같았던 현 권사는 본래 황해도의 불교 가정에서 태어나 성장하여 결혼 생활은 만주 봉천에서 하게 됐는데 어릴 적부터 안고 살아온 여러 가지 병들이 결혼 뒤에도 계속 그녀를 괴롭혔다. 그런데 첫 아기를 낳고 각혈을 하면서 사경을 헤맬 때 봉천, 서탑교회 여전도사의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기 시작했고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그녀를 괴롭히던 폐결핵을 비롯한 온갖 병들이 거짓말처럼 떨어졌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20대 후반에 그만 남편과 사별을 하는 바람에 큰댁이 있는 충남 강경으로 외아들과 함께 옮겨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며 헌신적으로 교회를 섬겼다.
그런데 하루는 교회에서의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느 집 어린아이가 새까맣게 죽어가는 광경을 목격했다. 너무도 가련한 마음에 다가가 그 아이를 들여다보는데 손이 자꾸 아이에게로 갔다. 몇 번을 억제했지만 억제할 수 없어 결국은 아이를 껴안고 간절히 기도했는데 죽어가던 아이가 다시 생기를 얻고 되살아나는 기적적 역사가 일어났다. 이렇게 생각지도 않았던 신유의 은사를 받은 뒤로 그녀는 수십 년 동안 한결같이 수많은 병자를 위해 기도해 주는 사명을 감당하고 있었다.
<능력의 증언>에는 예수 이름으로 병 고침을 받은 많은 사람들의 간증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살아오면서 9차례의 수술을 받았지만 만병을 달고 살았던 소설가 임옥인 씨가 예수 이름으로 기도 받고 고침 받은 간증을 비롯하여 암, 류마치스, 악성 피부병, 간경화, 심장병, 폐결핵, 간질 등 그 수와 그 종류를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한 각색 병으로부터 놓임 받은 간증들이 사진과 함께 실려있었다.
그 모든 간증들의 공통점은 현 권사에게 '예수 이름으로' 기도 받고 고침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교회 일을 보면서 틈틈이 그 책을 읽은 나에게 책을 읽기 시작한 지 3일 만에 이상한 변화가 일어났다.
"여보, 당신 어쩐 일이에요?"
밥상에 마주 앉아 식사를 하던 아내가 밥 먹다 말고, 놀란 눈으로 나에게 묻는 말이었다.
"왜?"
나는 밥을 먹다 말고 수저를 든 채 아내에게 되물었다.
"당신 벌써 밥 두 그릇째에요. 밥상 갖다 놓으면 밥알을 세는 사람이 이상도 하네."
"그런가?!"
그제서야 나도 나 자신을 생각하며 이상하게 달라진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밥맛을 되찾고 있는 것이었다. 그 날 아침부터가 아니라 이미 그 전날부터 입맛이 돌아 음식을 맛있게 먹은 사실이 마치 비디오 필름을 되돌려 보는 듯이 되살아났다. 그 순간 나의 뇌리를 스쳐 가는 번개같은 영상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능력의 증언>책이었다. 내주하신 성령께서 그 이유가 그 책에 실린 믿음의 글들을 읽은 데 있다는 사실을 생각나게 하신 것이다.
믿음 안에서 치유받은 글들을 보면서 나도 믿음을 얻어 치유받는 조짐이 일기 시작한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일찍이 병자들을 향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선포하신 적이 있다 (눅 17:19).
이런 경험을 한 뒤 나에게는 현신애 권사의 복음선교회를 찾아가서 기도를 받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당시 선교회는 용산 역 근처 철길 옆에 있었다. 넓은 터에 제법 큰 선교회 건물에서는 날마다(주일 제외) 오전 집회가 있었다. 천여 명의 사람들이 매일 참여하고 있었다. 병자들과 그 가족들이었다. 집회는 1부 예배와 2부 기도회 순서로 진행됐다. 1부 예배의 설교는 외부에서 초청된 목사님들이 담당했다. 그리고 2부 기도회는 현 권사가 맡아 인도했다.
전체의 진행에서 특별히 거슬리는 부분은 없었다. 현 권사는 이미 80세를 바라보는 노인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얼굴은 젊은이 피부 같았고 목소리도 아주 맑고 깨끗했다. 그녀는 시종일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말을 했고 자신은 낮추었다. 치료는 예수께서 하시는 일임을 누누이 강조했다. 따라서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예수님을 의지하라는 권고를 많이 했다. 기도 받을 때도 자신의 몸을 붙잡으려고 하지 말고 편안한 자세로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할 것을 그녀는 가르치고 또 가르쳤다. 세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사이비성 신유은사자들과는 유를 달리했다.
기도 받을 사람들은 줄을 서서 기다렸다. 나도 줄을 서서 기다리다 차례가 되어 기도를 받았다. 현 권사의 기도는 예전이나 다름이 없었다.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믿으면 믿는 대로 될지어다!"
어떤 환자라도 이 말을 하며 가슴 치고 머리 치고 등을 친 다음 보내는 것이었다.
이렇게 기도 받기를 2-3주 정도 했을 때 나에게는 또 다른 변화가 일어났다. 기도를 받고 선교회의 건물을 나올 때 그 선교회의 마당에 있는 식당에서 파는 국수 냄새가 그렇게 구수할 수가 없었다. 몸이 아픈 뒤로 나는 국수 냄새를 맡기도 싫어했는데 그곳에서 기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는 희한하게 그 냄새가 구수했다. 국수 한 그릇을 순식간에 먹어 치우고 또 한 그릇을 시켜 먹는 나를 보고 함께 간 아내는 또 한 번 놀랬다. 값도 싼 그 국수는 고작 멸치 장국에 말아주는 것이었고 반찬은 김치뿐이었다.
치유 간증 책을 집에서 읽으면서부터 나의 식욕을 회복시키신 하나님은 여기서 다시 한 번 그 표적을 경험하게 하셨다. 식욕이 회복되는 증상은 병 치유의 신호탄이었는데도 영적으로 우둔했던 나는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현 권사는 한 달에 보름은 서울에서 그리고 나머지 보름은 지방에서 신유 집회를 열었기 때문에 한 달에 보름만 나는 기도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교회 일을 보아야 했기 때문에 그 보름 동안도 다 참여하지는 못했다.
간헐적으로 기도 받기를 얼마 동안 했을 때 나에게는 또 다른 두드러진 현상이 하나 나타났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헛구역질이었다. 집에서 출발하여 그곳에 도착하여 그 선교회 건물로 들어가면서 혹은 기도를 받으려고 줄을 서 기다리는 동안에 나는 헛구역질을 심하게 느꼈다.
헛구역질의 횟수가 늘어나면서 참을 수 없어 화장실로 달려갔으나 그때마다 토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손가락을 목구멍에 넣어 무엇인가 토하려고 시도했지만 그것도 소용없었다. 헛구역질 증세가 처음 생겼을 때 나는 나의 몸에 무슨 이상이 생긴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했지만 그런 것은 없었다. 음식을 잘 못 먹은 것도 없었고 간도 정상이었다.
신유와 축사(귀신을 내쫓는 일)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신학교 선배 목사에게 이런 증상을 이야기하며 상담을 했더니 축사를 할 때 그런 경우가 종종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미국 교회에서 마귀론과 축사 사역의 권위자로 알려져 있는 프랭크 D. 하몬드 목사도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의 저서 <가정의 축복을 위한 선한 싸움을 싸우라>에서 축사의 사역을 행하는 동안에 목격할 수 있는 모습 혹은 증상으로 팔다리의 경련, 구역질, 울부짖음, 웃음, 비명, 한숨, 으르렁거림, 트림, 하품 등을 들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의 병이 마귀(귀신)과 같은 영적 존재와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성경은 어떻게 가르치는가가 궁금하여 나는 이와 관련이 있는 말씀을 찾아 보았다. 성경은 놀랍게도 육체의 병과 귀신과의 관계성을 많이 언급하고 있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치유 사역을 소개하면서 축사와 병치유의 밀접한 관계성을 말하고 있었다.
마태복음 8장 16-17절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누가복음 4장 40-41절도 그 밀접한 관계성을 말하고 있었다.
'해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질러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또한 마가복음 9장에는 벙어리 아이가 예수님께 나아와 치료받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기서 예수님은 그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냄으로써 벙어리 증상을 없애고 있었다. 물론 모든 병이 귀신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의 경우에는 그 관련성이 충분히 있다고 여겨지는 증상(현상)들이 있었던 것이다.
기도 받으러 다니는 동안에도 옆구리의 피고름은 여전히 줄기차게 나오고 있었다. 하루에 다섯 차례 이상 어린아이 기저귀용 패드를 여전히 갈아줘야만 했다. 무더운 여름에는 고름 썩은 냄새가 코를 들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밤에 잘 동안 피고름이 고였다가 아침에 일어날 때면 이부자리 위로 주루루 새어 나오기도 했다.
병 치유를 위해 그동안 주로 나 혼자 혹은 집에서 기도해 왔지만 신유은사자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다는 생각을 갖고 용산에 있는 그 선교회를 틈이 날 때마다 지속적으로 찾았다. 하나님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교회 안에 여러 은사자를 세우셨다고 성경은 말했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고전 12:28-31).
꾸준히 기도를 받으면서 살펴보았지만 현 권사의 사역에서 특별히 비성경적이거나 상식에 어긋나는 점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자신의 영광을 구하거나 자랑을 하거나 헌금을 강요하는 일도 없었다. 목회자를 존경하며 일하는 모습도 안정감이 있었다. 그녀는 집회에서 1부 순서로 꼭 예배를 드렸고, 그 예배의 설교는 꼭 목회자를 초청하여 맡겼다. 기도할 때도 목사님들이 흔히 강단에서 하는 "축원합니다!" 라는 말을 의식적으로 절대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치유를 위한 기도를 하면서 간혹 소금물로 반죽을 한 밀가루 떡을 환부에 붙여주는 것이 좀 어색했다. 그러나 그것을 팔거나 그것에 무슨 신비한 효험이 있는 것처럼 말하지는 않았다. 그것을 붙이면서 계속 믿음을 갖고 기도할 것을 강조했다.
밀가루 떡 붙이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예수님이 한 소경을 치료하실 때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발라준 일을 기억했다 (요 9장). 예수님이 눈에 발라준 진흙은 믿음의 수단이었을 것이다. 또 눈에 더러운 흙을 침으로 이겨 발라주면 병이 더 악화될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한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의 능력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사람들로 하여금 갖게 하려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했다. 더러운 진흙을 발랐는데도 치유되면 결과적으로 주님의 능력이 더 돋보이게 되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나는 기드온 용사들이 미디안 대군과 맞서 싸워 이긴 기사(삿 7장)를 이해했다. 마치 메뚜기 떼와 같은 많은 미디안 대군이 이스라엘을 침략했을 때 기드온은 함께 싸우러 전장에 나갈 용사 32,000명을 모집했다. 그러자 하나님은 300명으로 그 수를 줄이도록 명령하셨다. 그 이유는 구원이 전능하신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데 있었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삿7:2).
현 권사는 신유은사를 받은 이래 40여 년 그 은사를 잃지 않고 그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고 출석 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측) 충현교회였다.
한동안 지속된 나의 구역질 증상은 얼마 뒤 사라졌다. 그러나 식욕은 점점 더 되살아났다. 그런데 기도를 받던 어느 날, 현 권사의 손이 나의 오른쪽 옆구리에 우연히(?) 닿았다. 약간 야윈 것 외에 겉보기에 멀쩡한 나의 외모를 보고 그녀는 나에게 다정하게 물었다.
"어디가 아파서 왔어?"
젊은 청년으로 보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그동안 기도를 받으면서 신분을 밝힌 적도 말을 한 적도 없었다. 그런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나는 기도를 받는 동안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려고 했다. 치유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신유는 그분 홀로 행하시는 일이다. 은사자는 도구일 뿐이다. 여기서 나의 신분 같은 것은 의미가 없다. 나는 벌거숭이 빈 마음으로 주님 앞에서 기도를 받았었다.
나는 옆구리를 보여줬다. 뚫린 옆구리에 호스를 박고 있는 모습을 본 현 권사는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전도삽니다."
아직 목사 안수를 받기 전이었다.
"네, 병원에서는 무슨 병이라고 그래요?"
"농흉이에요. 결핵성 늑막염이 악화돼서 이렇게 됐어요."
"수술은 언제 했지요?"
"4년 전에요."
그녀는 지친 내 얼굴에서 몹시 힘들어하고 있는 모습을 본 듯했다. 불치의 병이라고 하는 생각을 헤아리고 있는 듯 했다. 수많은 환자들 속에서 수십 년을 살아 온 그녀는 환자의 마음 속도 들여다보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4년이 아니라 40년이 지났어도 주님이 하시면 능히 고쳐요. 믿음을 가지세요."
그녀는 나의 옆구리에 박혀 있는 호스를 빼고는 그 구멍 안을 들여다 보기도 했다. 그런 다음 그녀는 무슨 결심이라도 한 듯 이렇게 말했다.
"전도사님, 다음 주 월요일 이 호스 뽑아 버립시다."
생각지도 않은 상황이 벌어진데 내가 놀라 멈칫 하고 있자, 옆에 있던 아내를 쳐다보고는 웃으며 묻는다.
"색시에요?"
"네."
아내가 대답을 하며 인사를 하자 안고 있는 애기는 딸이냐고 물으며 아내와 딸을 번갈아 가며 세 번 치는 기도를 했다. 그리고 현권사는 나를 위해 기도했다.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믿으면, 믿는 대로, 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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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교회로 돌아온 우리는 주일을 보내고 이튿날 월요일 아침 다시 용산으로 향했다. 월요일 오전, 역시 많은 병자들이 집회에 참여하고 있었다. 중환자들은 그 선교회에 병원에 입원하듯 계속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이 선교회에 오기 시작 한 뒤로 치유를 받은 사람들을 여러 명을 보았지만 그중에 날 기쁨으로 간증을 한 아저씨는 인상적이었다. 그는 내가 처음 보았을 때 간경화로 그 병세가 심각했다. 나는 그를 처음 보았을 때 '나의 병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샛노란 얼굴에 남산만한 배를 안고 가쁜 숨을 쉬는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으로 보여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기도 받으러 혼자 나갈 수가 없었다. 들것에 실려 앞으로 나아가 기도를 받았다.
그런데 그는 내가 기도를 받으러 그곳에 갈 때마다 눈에 띄게 차도를 보였다. 그도 기도 받기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경험한 현상은 입맛이 돌아온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기도 받은 뒤 화장실에 가고 싶어, 화장실로 급히 가면 변은 나오지 않고 생선 창자 썩은 것 같기도 하고 우동발 같기도 한 것들이 많이 나왔다고 간증했다 (그가 화장실에서 쏟은 분비물은 병에 넣어져 그 선교회 예배당 강단에 전시되어 있었다). 그러면서 부른 배도 차차 내려갔다. 그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면서 남은 여생을 다시는 방탕한 생활을 하지 않고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눈물로 다짐을 했다.
월요일, 그러니까 현 권사가 호스를 뽑기로 약속한 날, 나는 사람들이 기도 받으러 나가는 시간에 아직 자리에 앉아 준비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 날 1부 예배의 설교에서 설교자는 하나님의 치료의 은혜를 받기 위해 우리가 갖추어야 할 조건 세 가지를 가르쳤다.
첫째는 죄를 회개하라.
둘째는 힘써 기도하라.
셋째는 의심 없이 하나님의 치유 약속을 믿으라는 것이었다.
이 말씀을 따라 나는 다시 한 번 생각나는 죄마다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며 고백했다. 그리고 한 번만 살려 달라고 간절히 또 구했다. 그 순간 눈물이 나도 모르게 왈칵 쏟아졌다. 그러면서 나의 마음속에는 지난날들이 회상되면서 하나님이 발걸음마다 나를 크신 능력으로 붙들어 주시고 사랑해 주셨다는 뜨거운 감동이 복바쳐 올랐다.
동시에 기도하고 있는 나를 하나님이 부드럽게 감싸 안으시는 느낌을 받았다. 내 입에서는 복음 성가가 조용히 흘러 나왔다.
얼마나 아프셨나 목 박힌 그 손과 발
죄 없이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
하늘도 모든 땅도 초목들도 다 울고
해조차 힘을 잃고 온누리 비치잖네
아아 끝없어라 주의 사랑 언제나
아아 영원토록 구원의 강물 흐르네
너의 죄 너희의 죄우리의 모든 죄를
모두 다 사하시려 십자가 달리신 주
얼굴과 손과 발에 흐르는 그 귀한 피
골고다 언덕 위에 죄로 붉게 적셨네
아 아 끝없어라 주의 사랑 언제나
아아 영원토록 구원의 강물 흐르네
그런데 이때 환자들에게 기도를 해주던 현 권사가 기도를 중단한 뒤 마이크를 들고 나를 찾았다. 그녀는 환자들을 위해 장시간 기도해 주는 중간 중간 고침 받은 사람의 간증을 대변하거나 혹은 갑자기 어떤 환자를 지명하여 불러 내기도 했다. 그리고 가끔 자기 주변에서 듣는 이야기들을 했는데 그 날은 특히 그녀 특유의 북한 사투리로 인상 깊은 이야기를 했다.
"세상에, 여러분 기가 막히는 얘기를 다 듣네요......하였튼 이 현 권사는 일년에 열두 번도 더 죽어요.
요새는 또 이 현 권사가 죽어서 천국엘 갔는데 하나님이 '난 너를 모른다'고 해서 제가 다시 내려왔다는 악소문이 퍼졌대요. 글세. 하여튼 오래 살고 볼 일이야요. 그래서 내가 오래 사는가봐요.
제가 천국에서 '주님 저를 왜 모르셔요'라고 물었더니 '너는 땅에서 사는 동안 영광을 다 받았기 때문에 나는 너를 모른다'라고 해 제가 '그러면 한국의 큰 교회 조ㅇㅇ 목사님과 부흥사 이ㅇㅇ 목사는 아십니까?"라고 물었더니 '그들도 나는 모른다'라고 하셨답니다.
나도 모르는 얘기가 장안에 퍼졌다니 재미있네요. 재미있어! 제가 80살이 다 되도록, 하루도 쉬지 않고 주님 주신 은사 갖고 일하니까 사탄이 별의별 장난을 다해요."
"여러분, 그 전도사님 오늘 오셨지요? 어디 계세요? 옆구리에 호스 박은 전도사님 오셨으면 앞으로 나오세요."
헛소문 얘기를 듣는데 열중하고 있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갔다. 현 권사는 예배당 아래 강단에 앉아서 환자들을 위해 기도를 했다. 그래서 기도를 받는 사람도 앉아야 한다. 나도 그녀 앞에 두 다리를 뻗고 앉아 기도를 받았다. 그녀는 나를 위해 기도하기 전에 천여 명의 사람들에게 합심기도를 부탁했다.
"주여....."
낮으면서도 간절한 목소리로 그녀는 주님을 불렀다.
주님을 부르며 나의 옆구리에 박힌 호스를 조심스럽게 뽑았다. 뽑은 호스를 들어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비벼 밀가루 반죽을 했다. 다음엔 그 밀가루 떡으로 내 옆구리에 뚫린 구멍을 틀어막고는 또 넓적하게 붙여 놓았다. 그녀의 손은 온갖 병자를 다 만진 손이었다. 그러다 말고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전도사님, 수지 맞았네! 야~ 수지 맞았다!"
이 말은 주님의 치료의 능력이 자기의 손을 통하여 나가는 것을 느꼈다는 의미라고 옆에서 돕는 한 집사가 나중에 설명해 줬다. 끝으로 그녀는 여느 때와 같이 가슴과 머리와 등을 치는 기도를 하고 마쳤다.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믿으면, 믿는 대로 될지어다!"
옆구리의 호스를 뽑고 집으로 돌아온 날, 저녁을 먹고 난 뒤 나는 몸이 너무 노곤하여 방바닥에 옆으로 누웠다. 물론 구멍이 뚫린 쪽이 위로 행했다.
그런데 잠(그 상태가 잠이라고 말 할 수 있는 상태인지도 잘 모르겠다)이 들락말락 하는 순간 참으로 이상한 경험을 하였다. 내가 방 천장으로 뜨는 것이었다. 동시에 방에는 또 다른 내가 옆으로 누은 채로 그냥 있었다. 마치 내 영혼이 내 몸에서 빠져 나간듯한 느낌을 받았다.
바울은 자기가 경험한 환상과 계시를 고린도후서 12장에서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셋째 하늘에 이끌려갔었던 신비한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그때 자신이 몸 안에 있었는지 몸밖에 있었는지를 잘 모르겠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가 말한 것이 혹시 이런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나는 했다.
방 천장까지 떠올라간 내가 방 바닥에 옆으로 누워 있는 또 다른 나를 쳐다보고 있는 순간, 내 옆구리에서는 뚫린 구멍으로 흉측한 벌레 한 마리가 기어 나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나는 깜짝 놀랬다. 그 벌레는 까만 색깔을 하고 있었다. 길이는 젓가락 정도만 했다 굵기는 어른 검지 손가락 굵기만 했다. 몸에는 마치 지네처럼 잔 발가락들이 무수히 많이 나 있었다. 처음에는 작게 보이던 벌레가 점점 갈수록 크게 확대되어 보였다. 너무 징그럽고 흉측스러워 나는 쳐다보기조차도 힘들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 벌레는 그 구멍에서 계속 기어 나오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흉측스러운 벌레가 나의 옆구리에서 빠져나가는 환상을 본 이튿날부터 내 몸에는 참으로 놀라운 변화가 뒤따랐다. 옆구리에서 나오는 피고름이 줄기 시작한 것이다. 피고름은 눈에 띠게 줄어갔다. 하루에 보통 다섯 번씩 갈던 패드를 날이 가면서 네 번, 세 번으로 점점 줄여 갈게 되었다. 횟수가 줄면서 나오는 피고름의 양이 줄었을 뿐만 아니라 피고름의 농도도 묽어졌다.
날마다 신기하고 놀라운 경험을 내 몸으로 했다. 피고름이 줄면서 동시에 일어난 또 다른 현상은 옆구리의 구멍이 새살이 나오면서 점점 좁아지는 것이었다. 새 살이 서서히 자라 나오는 것은 전에도 있었던 일이었으나 이전과 달리 그때 특이한 형상은 피고름이 주는 것과 보조를 맞춰 구멍도 점점 접아진다는 것이었다.
피고름의 양이 줄면서 농도도 묽어지더니 4-5개월 정도 되었을 때는 아주 좁아진 실구멍을 통해 맑은 물과 같은 분비물만 나왔다. 그래서 나중에는 하루에 화장지 한 장 정도만 붙여 놓아도 될 정도까지 되었다. 그러다가 피고름이 완전히 멈춘 것은 호스를 뽑고 기도한 지 꼭 6개월 만이었다.
피고름이 완전히 멈추던 날, 그 구멍도 완전히 막혔다. 피고름의 샘이 완전히 마르면서 동시에 피고름을 받아내던 구멍도 닫힌 것이다. 피고름을 받아 내기 시작한지 5년만의 일이었다.
여호와는 과연 치료의 하나님이셨다 (출 15:26). 과연 나사렛 예수 이름에는 권세가 있었다. 예수의 이름이 흉악한 병의 결박을 깨뜨린 것이었다. 그 지긋지긋한 병의 세력을 단번에 날려 버렸다. 병의 포로에서 자유를, 그 눌림에서 해방을 얻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내 속에서 마귀의 일을 멸하신 것이다 (요일 3:8).
"내 이름으로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 고 약속하신 주님의 약속이 내 몸에서 실현된 것이다. 순전히 예수의 은혜요,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나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시는 성령의 역사였다. 구멍은 막혔는데 안에서 피고름이 계속 나왔다면 그것이 기관지를 통하여 목으로 넘어 나와야 하는 것이었지마는 그런 일은 전혀 없었다. 반대로 피고름은 말랐는데 구멍이 뚫려 있다면 온갖 이물질과 균이 몸 속으로 들어갈 위험이 있는 것이었지만 구멍이 동시적으로 막힌 것이다.
피고름이 완전히 마른 뒤 5년 만에 처음으로 대중 목욕탕 가서 목욕을 했다. 비록 옆구리에 흉터는 있었지만 그 감격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내 영혼은 기뻐 뛰었다. 하늘을 날 듯이 우리는 기뻐했다. 아내와 나는 405장 찬송을 부르고, 부르고 또 불렀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아멘.
"생명은 내 것인데 네가 왜 염려하느냐? 염려하는 것도 죄다."?
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나와 결혼하기로 결심한 바 있는 아내는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을 올렸다. 이때 비로소 아내는 이런 말도 했다. 신혼 초 내가 아침에 깔아져 잘 일어나지 못하고 있으면 가끔 혹시 죽은 것이 아닌가 해서 가슴에 손을 대본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온 성도들이 함께 기뻐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피고름이 마른 얼마 뒤 나는 그동안 치료를 받아온 세브란스 병원을 찾았다. X-ray를 찍는 등 여러 가지 검진을 마친 뒤 담당 의사는 감탄을 하였다.
"흠, 신기하네."
나의 X-ray 사진 상에 달걀만한 크기의 빈 주머니 같은 공간이 오른쪽 옆구리 부분에 선명히 찍혀 있는 것을 나의 눈으로도 확인 할 수 있었다. 한참 동안 필름을 들여다보던 의사는 농담이 섞인 말을 하였다.
"우리 기술도 괜찮은데, 이만 하면.... 우리가 이렇게 하고 싶었는데 꼭 그렇게 되었네!"
나는 의사 앞에서 기회를 놓칠세라, 웃으면서 하나님의 행하신 큰 일을 증거했다.
"하나님이 고치셨습니다!"
그 이후로 나는 고침 받은 이 병 때문에 더 이상 병원을 찾은 일이 이제까지 없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미하여라.
하늘에서 그 위력을 찬미하여라.
엄청난 일 하셨다, 그를 찬미하여라.
그지없이 높으시다, 찬미하여라.
나팔소리 우렁차게 그를 찬미하여라.
거문고와 수금 타며 찬미하여라.
북치고 춤추며 그를 찬미하여라.
현금 뜯고 피리 불며 찬미하여라.
자바라를 치며 그를 찬미하여라.
징을 치며 찬미하여라.
숨쉬는 모든 것들아, 야훼를 찬미하여라.
할렐루야.
(시편 150편)
3. 신유의 근거
감옥에 갇힌 세례 요한이 한번은 자기의 두 제자를 예수님께 보낸 적이 있다 (눅 7장).
일찍이 그는 예수가 메시야임을 세상 사람들에게 증거한 적이 있었지만 (요 1장), 이제 다시 한 번 예수의 메시야되심의 여부를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다. 예수님을 찾아간 그 두 제자들은 스승 요한이 분부한대로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때마침 많은 병자들을 치유하시고 계시던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답해주셨다.
'너희가 가서 보고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눅 7:22,23)
우리가 이 이야기를 통하여 분명히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예수의 메시야되심의 증거로서 병의 치유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유는 확실히 예수그리스도 복음의 중요한 주제가 된다. 기독교복음의 중심은 역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인데 성경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자체가 병 치유의 차원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마태는 이에대해 이렇게 증거한다.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마 8:16,17)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 구원(대속) 사역에는 병치유라는 것이 분명히 포함될 뿐만아니라 그것은 이미 구약에서부터 예언되어진 것임을 마태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해당하는 구약의 예언도 직접 들어보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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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심히 좋게 창조하셨다 (창 1:31).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질병과 고통과 저주가 찾아왔다 (창 3:16-17). 때문에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에 병고침이 포함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위 이사야 53장 5절에서 '나음을 입었도다'는 구절은 영혼의 병만이 아니라 육체적인 병의 치유까지 포괄하는 개념으로 봐야한다.
예수께서는 인간을 이분법적으로 이해하여, 그 영혼은 구원받아야하되 육체는 질병 가운데 고통스러운 상태로 있어도 된다는 입장을 결코 취하지 않으셨다. 영혼과 육체를 이분법적으로 양분하고 육체를 천시하는 경향은 이방(헬라)사상적인 것이지 히브리적인 것이 아니다. 본래 히브리적인 인간관은 인간을 영혼과 육체의 통합제로 보는 전인적인 이해를 그 특징으로 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영혼만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육체도 친히 손으로 빚어 만드셨다. 인간의 타락은 육체만을 상하게 한 것이 아니라 영혼도 상하게 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은 상한 영혼과 상한 육체의 회복을 다 포괄하는 전인적인 것이 되어야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부활도 '몸으로의 부활'임을 우리는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영으로만의 부활이 아니라 몸으로의 부활인 것이다. 물론 그 몸은 신령한 몸이다 (고전 15장).
전인적인 구원에 관한 가르침은 다음의 말씀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살전 5:23,24)
예수께서 영혼이 병든 자들이나 죄사함이 필요한 사람들을 상대로 하여 사역하였음은 물론 각색 육체적인 병을 가진 자들을 많이 치유해 주신 일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하나님의 치유는 편의상 크게 자연치유와 초자연치유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바울은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 글을 통하여 포도주를 약용으로 쓸 것을 권고한 적이 있다. 평소 위장병으로 고생하는 디모데에게 위장병의 치유를 위해 그렇게 하라고 권고한 바울을 보면서 우리는 자연치유를 위한 노력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결코 자연치유를 부정하지 않는다. 여기서 자연치유란 하나님이 창조한 자연 만물을 이용한 모든 치유를 의미한다. 양의와 한의를 불문하고 병원의 치료는 자연치유로서 그것도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치유이다. 양약과 한약은 모두 자연에서 채취하거나 추출한 것이 아닌가? 그리고 자연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는 우리의 몸이다. 자연의 일부인 우리의 몸에 자연치유의 능력이 놀랄 만큼 내장되어 있다는 지식은 이미 잘 알려진 바이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다시피 바울은 자연치유만이 아니라 초자연치유를 감당했다. 여기서 초자연치유란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통한 치유를 의미한다. 가령 루스드라에서 전도사역을 행할 때 바울은 태어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인 사람을 일으키는 치유의 기적을 행했다. 물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유한 것이다 (행 14장).
자연치유의 방법으로 불가능한 병을 예수그리스도의 초자연치유의 방법으로 치유받은 사례들을 우리들은 성경에서 무수히 찾아볼 수 있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았던 여인은 그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겠다 (막 5:25;34).
성경에 의하면 그녀는 예수님께 나아오기 전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병이 더 심하여지기만 했었다" 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온갖 자연치유의 방법을 다 써 보았지만 치유는커녕 더 악화되는 안타까운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초자연치유의 방법으로 치유받은 과정을 말해주는 것이다.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자연치유와 초자연치유의 길을 활짝 열어놓으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각처를 다니시며 각색 병자들을 치료하시는 사역을 행하실 때 항상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며 그 제자들로 하여금 치유 행위를 지켜보게하였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는 그들에게 병 고치는 권능을 주시면서 그들도 세상으로 나가 치유 사역을 행하도록 명하셨다.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마10:1)
이 명령에 순종하며 행하는 제자들에게 물론 치유의 열매가 나타났다.
후에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 지상 최후의 명령으로 복음전파의 사명을 주시면서 역시 병고침의 권능을 부여하셨다 (막 16:15-18). 이때 그 사명과 권능은 예수를 구주로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허락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사명과 권능은 세상 종말 때까지 유효한 것이다. 병치유는 예수님 자신만의 일이 아니라 그를 따르는 제자(혹은 신자)들의 일도 되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치유(특히 초자연치유)의 능력을 발휘하시는 매체가 된다. 대부분의 신유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예수께 나아와 눈이 열리는 치유를 받을 때 주님은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막 10:52)고 선포하셨다. 바디매오가 소유하고 있던 믿음은 최소한 2가지 측면을 갖고 있었다.
첫째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믿음이다. 그는 예수께 나아오면서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즉 메시야로 불렀다.
둘째는 예수님의 치유의 능력을 믿고 끈질기게 간구한 믿음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람들이 바디매오를 꾸짖었지만 그는 그것에 굴하지 않고 간구하는 믿음을 견지했다. 또 루스드라의 앉은뱅이가 치유받은 사례의 경우 그 사람 자신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치유받는 축복에 들어갔음을 성경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다.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가로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 (행 14:9,10)
그러나 언제나 병자 본인의 믿음으로만 치유받는 것은 아니다. 백부장의 하인(중풍병자)이 치유받은 장면에서 우리는 그 사실을 볼 수 있다 (마 18:5-13). 그 하인이 주님으로부터 치유의 선물을 받은 것은 자신이 아닌 백부장의 믿음 때문이었다. 또 자기의 죽은 딸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온 당장 야이로에게 예수께서는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막 5:36)고 하신 말씀에서 또 다른 사례를 본다. 아버지의 믿음으로 딸이 치유받은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믿음이(그것이 누구의 믿음이던 간에) 신유의 꼭 절대적인 전제조건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옳지 않다. 왜냐하면 사람 쪽에서 믿음을 전혀 갖고 있지 않은 경우에도 자비로우신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은총을 베푸시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가령, 나인성의 과부 외아들을 다시 살려주신 주님의 치유은총 사건에서 우리는 그 사실을 본다. 죽은 외아들의 관을 메고 슬피 울며 장지로 항하고 있는 장례행렬로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다가가심으로 치유는 시작되었다. 죽은 그 외아들이 다시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나기까지의 과정에 그 죽었던 아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어머니나 그 외의 어떤 사람의 믿음도 개입되지 않았다 (눅 7:11-17).
치유는 오직 주님의 주권적인 은총으로 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 신유의 선물은 인간쪽에서 믿음을 갖고 주님께 나아갈 때 주어진다고 말할 수 있겠다. 병 치유를 위해 기도할 때 우리가 흔히 의문을 갖게되는 또 한가지는 죄를 회개해야만 신유가 임하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만난 병자를 치료하신 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고 권고하신 경우를 볼 때 아마도 그 병자는 자신의 죄로 인해 병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가버나움에서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치유에 앞서 죄사함의 은혜를 먼저 베푸신 적이 있다. 죄의 사함과 병의 치유가 관계있음을 암시하는 좋은 사례가 된다고 본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들의 병을 치유하시면서 언제나 치유와 회개를 연결시키거나 치유의 전제 조건으로 죄의 회개를 내세우시지는 않으셨다. 오히려 많은 경우 주님의 긍휼을 믿고 치유를 간구하는 병자들을 그냥 용납하시고 큰사랑과 권능으로 치유해 주셨다.
구약에는 죄와 질병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처럼 언급하는 경우가 많으나(신 28:15-21 등),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치유의 은총과 능력을 더 강조한다. 그렇다고 해서 죄와 회개를 소홀히 해도 된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거룩하신 주님 앞에 나아가 신유를 구할 때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성령이 지적하시거나 생각나는 죄를 낱낱이 토해내야 할 것이다. 본질적으로 모든 질병의 원인은 죄의 저주 때문이다. 그러나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개인적인 죄가 반드시 그 병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는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장차 완성되어질 하나님의 나라에는 병은 없고 오직 생명과 건강만이 충만할 것임을 주님은 이렇게 계시하신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리라' (계 21:4)
그러나 그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다. 그 나라는 지상에서의 통치라는 형태로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다고 선포하셨다 (막1:15). 그리고는 즉시 병든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내어쫓는 일을 시작하셨다. 소경이면서 벙어리인 한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신 후에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마 12:28)
병과 죽음과 사단의 패배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이미 결정된 것이지만 지금 완전히 멸절된 것은 아니다. 이 사실은 '디 데이'(D Day)와 '브이 이 데이'(V E Day)라는 역사적 사실을 비유로 하여 이해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디데이'는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이 펼친 프랑스해안에서의 상륙작전으로 전쟁의 패배가 사실상 이미 결정된 날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유럽에서의 전쟁은 1945년 5월 8일, '브이 이 데이'까지 근 1 년간 종식되지 않은 상태로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예수그리스도의 삽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디 데이'의 승리를 거두고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은 대사건이다. 그러나 '브이 이 데이'는 장차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어 이 세상 전체가 그 분의 영역이 될 때 즉,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고" (빌 2:10), "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게" (고전 15:24)될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여기에' 이루어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아직도' 그 완성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장차 완성될 것이지만 이미 시작되었다.
교회는 오늘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위해 부름받은 공동체이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어 모든 악이 제압될 그날, 즉 '브이 이 데이'가 올 때까지 하나님의 군대로서 사단의 아성을 쉴새없이 공략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통치를 확장시켜나가야 하는 사명을 받은 것이다. 교회가 이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신유는 중요한 한 사역이자 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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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달성 목사님은 1955년 태어나 청주에서 성장하였다.
충남대 의대에 입학하여 예수를 영접하였으며, 감리교신학대학과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서울 사당동 희망감리교회에서 도시빈민목회를 시작하였으며 지금은 평안교회를 담임으로 섬기고 있다.
저서 :'옆구리 뚫린 아담의 기쁨'(1999년), '예수 믿지 않는 기독교인' (2011년)
첫댓글 글을 읽는데 엄청난 기름부음이 오네요 중요한것은 어떤글을 읽느냐가 영적으로 굉장히 중요합니다 글을읽을때도 영적인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아무책인나 읽어서는 안될것입니다 글을 통해서 영적인 메세지가 심령에 변화를 준다는 사실입니다
음악을 통해서도 어둠의권세가 우리심령에 들어온다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