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어느 초가을날
거실에 누워 TV를 보다 무심코 채널을 돌렸는데, 어떤 뚱뚱한 남자가 방망이를 휘두르자 새하얀 공이 푸른 하늘 위로 쭉 뻗어 갔습니다. 저렇게 작고 빠른 공을 가느다란(?) 방망이로 정확하게 휘둘러 맞출 수 있다는 게 신기해서 한동안 그 경기를 봤습니다. 만약에 그 순간에 내가 채널을 돌리지 않았더라면, 채널을 돌리던 순간에 다른 화면이 보였다면, 그 타구가 좌중간을 궤뚫는 2루타가 아니라 그저 파울이나 내야땅볼이었다면, 만일 그랬더라면 저는 지금 야구팬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1990년 어느 봄날
초등학교 6학년 남자아이들이 잠실 야구장으로 소풍(?)을 갑니다. 아마 그때는 국민학교 였겠죠. 화면으로만 보던 야구를 경기장에서 직접 본다는 생각에 며칠 전부터 설레던 기억이 납니다. 티켓을 사고 언덕을 돌아 경기장에 들어선 후 게이트를 나서던 순간, 갑자기 시야가 확 넓어지며 푸른 하늘과 초록 잔디가 눈앞에 넘실대던 그 순간을 지금도 잊지 않습니다. 만일 거기서 내려다본 풍경이 우중충하거나 답답하거나 이상했다면, 저는 그렇게 야구장을 많이 다니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2000년 어느 가을날
[다음카페 한화이글스 팬클럽]이 잠실구장에서 처음으로 정모를 했습니다. 게시판이나 정팅방에서만 보던 사람들과 야구장에서 만나 같이 응원하고 노는 게 너무 신기했습니다. 다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라 주변에 빙그레팬 친구가 없었고, 맨날 LG팬 OB팬 친구 따라 잠실구장 1루에서 소심하게 이글스를 응원하던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처음으로 '한화팬'이라는 이름으로 같이 만나 여럿이서 야구를 본 것입니다. 아직도 장종훈이 최고라고, 정민철 송진우만한 투수는 어디에도 없다고 그렇게 자랑스레 얘기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만일 그날 한화팬들이 같이 모여 야구장에 함께 가지 않았더라면, 경기 끝나고 신천에서 밤새도록 소맥으로 달리지 않았더라면 이글이글이 창립 16주년을 맞이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2006년 쌀쌀했지만 뜨겁던 가을날
우리 한화가 지금은 리그 최강자가 된 삼성과 한국시리즈에서 맞붙은 시즌입니다. 팔꿈치에 철심을 밖아 공 몇번 던지면 통증 때문에 잠도 못잔다던 지연규가 가을 마운드에서 투혼을 던졌습니다. 전날 4이닝을 던진 구대성은 후배 타자들이 동점을 만들어 내자마자 점퍼를 벗어 던지고 불펜으로 뛰어나갔습니다. 그날 잠실구장 3루에는 우리 카페 회원 수십명이 모여 있었습니다. 우리는 졌고, 06시즌 패권을 삼성에게 넘겨줬습니다. 우리 선수들이 그날 조금만 더 힘을 냈더라면, 선수층이 조금만 더 두꺼웠더라면 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7년만에 맛보는 우승의 기쁨을 만끽하며 선수들과 함께 밤새도록 노래하고 춤추며 놀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약속은 뒤로 미루어야 했습니다.
야구팬으로 29년을 살았고, 그 중 16년을 [이글이글]에서 보냈습니다. '야구 좋아하는 학생' 시절보다 '이글이글 운영자'로서의 경험이 이제는 더 깁니다. 한화이글스 홈페이지 문자중계를 우리들이 맡아 진행하하던 시절, 생수통을 북처럼 치고 꽹과리를 불며 서포터처럼 응원하던 시절, 개막전을 보겠다며 새벽6시 버스를 타고 광주로 원정가던 시절, WBC를 응원하자며 도쿄행 비행기에 몸을 싣던 시절, 한국시리즈는 무조건 현장에서 보자며 관광버스를 빌려 대구로 내려가던 시절의 기억들이 모두 생생합니다. 해운대에서, 전남대학교 앞 먹자골목에서, 군산 앞바다와 대구 동성로에서, 인천 연안부두와 도쿄돔에서 회원들과 함께 보냈던 시간도 바로 어제처럼 기억납니다.
그 기억들 위에 새롭게 얹어질 소중한 야구가, 이제 우리 앞에 옵니다. 올해도 그냥저냥 성적이 별로일 수도 있고 예년보다 더 잘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조용하고 심심한 4개월을 지나 뜨겁고 활기찬 8개월이 시작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8개월을 야구장에서, 그리고 이곳 게시판에서 뜨겁게 함께 보낼 수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고졸 성공신화를 쓴 김태균이, 팀의 진정한 중심타자가 되어 동료들을 더 높은 곳으로 이끄는 모습을,
KS에서 아쉬움을 삼켰던 젊은 안영명과 윤규진이, 이제는 투수조장이 되어 눈부신 투구로 팀에 기여하는 모습을,
손가락에 피가 돌지 않아 공을 던질 수 없을거라던 송창식이, 마운드의 새로운 구세주가 되는 모습을,
뜻밖의 투병으로 마음 고생했을 정현석이, 올해는 그깟 병 따위 훌훌 털어버리고 신나게 치고 달리는 모습을,
대기만성형 파워피쳐 박정진이, 여전한 구위와 담대함으로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는 모습을,
지난 세번의 가을야구에서 소금같은 활약을 펼쳤던 고동진이, 친구 한상훈의 몫까지 훌륭하게 뛰어주는 모습을,
김민우와 김범수 그리고 이태양이, 선배 독수리들의 매서운 구위와 칼날같은 제구를 이어 받아 건강하게 던지는 모습을,
모두의 기대를 어깨에 짊어진 김용주와 하주석이, 지난 2년을 발판삼아 이제는 팀의 주역이 되는 모습을,
팀의 미래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송광민과 김태완이, 오래 묵혀둔 자신들의 능력을 올해는 꼭 터뜨리는 모습을,
젊은 거포와 영건들이, 포텐셜 속 '결정적 한방' 능력을 드디어 터뜨리는 모습을,
정근우와 이용규 그리고 권혁이, 팀에 더 강한 근성과 승부욕을 심어주는 모습을,
로저스와 새로운 멤버들이, 팀에 긍정적인 활력을 불어 넣는 모습을,
늘 기대하고 또 응원합니다.
다시, 야구가 왔습니다.
그들의 야구가
나의 야구가
그리고 여러분의 야구가 눈 앞에 왔습니다.
앞으로의 8개월이 모두에게 뜻깊고 의미 있기를
그 기간 동안 다들 즐겁고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야구장에서 봽겠습니다.
첫댓글 제 업무가 통상적으로 10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가 엄청 바쁜데 바쁜게 지나가자마자 야구 시즌이 돌아오네요~
힘들고 스트레스 받았던 일 마무리하고 야구를 기다리는 지금이 무척이나 설레입니다.
야구가 시작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참 좋네요~ 올해는 11월까지 야구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내일 시범경기에서 뵙겠습니다 입장료가 얼마든지 상관없이 달려아죠~~~@끼약
그 기대에 저도 동참하겠습니다. 부디 모든 선수들 부상없이 완주하는 한해가 되기를....
올해는 아픈선수들 좀 적은 그래서 그동안 준비한것 다 보여줄수 있는 그런 시즌이 되길 기원합니다.
언젠간 떠나시겠지만 감독님에 대한 기대도 표현해 주시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상록수의 작가 심훈이 지으신<야구>란 시가 생각나 옮겨봅니다.
식지 않은 피를 보려거던 야구장으로 오라! 마음껏 소리질러보고 싶은 자여, 달려오라!
6월의 태양이 끓어내리는 그라운드에 상청수(常靑樹)와 같이 버티고 선 점(點)·점(點)·점(點)…
꿈틀거리는 그네들의 혈관 속에는 붉은 피가 쭈 ㄱ 쭈 ㄱ 뻗어 흐른다.
피처의 꽂아넣는 스트라익은 수척(手擲)의 폭탄(爆彈). HOME-RUN BAT! HOME-RUN BAT! 배트로 갈겨내친 히트는 수뢰(水雷)의 포환(砲丸), 시푸른 하늘 바다로 번개 같이 날은다.
아래로 이어집니다
ㅋㅋ
VICTORY! VICTORY VICTORY, VICTORY! 고함소리에 무너지는 군중(群衆)의 성벽(城壁), 찔려 죽어도 최후의 일각(一刻)까지 싸우는 이 나라 젊은이의 의기(意氣)를 보라! 이 땅에 자라난 남아(男兒)의 도량(度量)을 보라!
식지 않은 피를 보려거던 야구장으로, 마음껏 소리질러보고 싶은 자여, 달려오라!
1929년에 발표된 시입니다.
그 뚱뚱한 남자는 누구인가요?
해태 장채근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네요. 투수는기억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빙그레가 아니었거든요.
길게 느껴지던 비시즌이 지나갔네요. 여자다보니 군대는 안다녀왔지만 군대에서 가는 시간이 비시즌과 비슷하지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도 시간은 갔고 야구에 열광 할 수 있는 시간이 다시 되어서 기쁩니다.
길고 지루했던 비시즌이 지나 곧 다시 시즌이 시작된다는게 1번선발님 글을보니 실감이 나네요. 다시한번 한화야구에 미쳐서 보낼 시간이 왔군요. 올해도 신명나게 달려봅시다!
오오 가슴 벅차네요.
시작이네요 멋진글 감사합니다
올 시즌도 부디 재밌었으면, 그리고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작년에 정말 재밌고 행복했지만 이런 저런 사건들 때문에 꼴찌 시절보다 더 힘들기도 했었거든요... 성적도 중요하겠지만 팬들이 진심으로 즐길 수 있는 야구를 보여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