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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동석동호회 단톡방에서]
[채동석회장님제공]
🔥귀속재산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그 진실을 들여다보자."
귀속재산
(Vested Property)이란
명칭은 미군정이 지은
것이다.
일제가 조선에 쌓아놓은
재산을 미국이 모두 빼앗아 대한민국 정부에 그 소유권을 넘겨준 재산이라는
뜻이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금전적, 비금전적 손익계산서가 존재한다.
그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것이 바로 《귀속재산》(Vested Property) 이다.
2015년 10월, 성균관대
이대근 명예교수는 귀속재산연구: 식민지 유산과
한국경제의 진로(이숲, 682쪽)의 저서를 냈다. 아래에서 그 내용 일부를 요약한다.
일본인들이 놓고 간
국내 기업들
두산그룹, OB맥주, 하이트맥주, 한화그룹, 해태제과, 동양시멘트, SK그룹, 삼호방직, 신세계백화점, 미도파백화점, LG화학, 쌍용그룹, 동국제강, 삼성화재, 제일제당, 대성그룹, 동양제과, 대한조선공사, 동양방직, 한국생사, 한국주택공사, 벽산그룹,
한국전력, 일신방직, 한진중공업, 대한통운, 한진그룹, 대한해운, 동양화재해상보험, 메리츠화재해상보험,
중외제약 등.....
국민 중에서 이 금전적
항목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 귀속재산이 무엇인지
아는 순간, 사람들은 재산을 만든 일본인과 이를 빼앗아 우리에게 넘겨준 미국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다.
1945년 해방 직후, 일본은 그들이 36년 동안 선택의
여지가 없이 조선에서 태어난 조선인들을 고용하여
조선 땅에 건설해 놓은
수풍댐, 철도, 도로, 항만,
전기, 광공업, 제조업 등
여러 분야의 사회간접자본을 고스란히 남겨둔 채
강제로 추방됐다.
아울러 일본인들이 조선에서 운영하던 기업재산과
개인재산 모두를 그대로
두고 <몸>만 빠져나갔다.
북조선에는 29억 달러어치의 공공재산, 남한에는 23억 달러어치의 공공재산이
한순간 횡재로 조선에 굴러 들어왔다.
남한에 쌓인 23억 달러어치의 일본재산은 미군정이
이승만 정부에 이양했다.
당시 이 돈은 남한경제 규모의 80% 이상을 차지했다.
한마디로 이 귀속재산이
없었다면 당시 한국경제는 그 실체가 없었을 것이다.
이로부터 만 20년 후인 1965년, 박정희 정부가
일본으로부터 무상으로
공여 받은 액수는 3억 달러, 위의 23억 달러는 이 3억
달러의 약 8배였다.
이 엄청난 자산을 미국이
일본으로부터 빼앗아
한국에 주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꼭 알아야 한다.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씨 조선 518년을 대대로 통치해온 27명의 조선시대 왕들이 이룩해 놓은 자산이 무엇이었는가를~
도로를 닦아놓았는가?
철로를 건설해 놓았는가?
기업이 생겨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놓았는가?
한글 단어장 하나
마련해 놓았는가?
그 27명의 조선왕들은
길을 넓게 닦으면 오랑캐가 침입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있던 길도 없앴다.
선조는 임진왜란 내내 중국으로 망명할 생각만 했다.
이 27명의 왕들은 조선의
백성, 노예들의 골만
빼먹었다.
조선왕들이 518년 동안
쌓아올린 재산은 초가집,
도로 없는 서울, 똥오줌으로 수놓은 소로, 민둥산, 미신, 거짓과 음모를 일삼는 미개인들이 공존하는 가두리
땅에 불과했다.
급기야 고종과 민비 일족은 부정부패로 나라를 거덜
냈고, 이권이 되는 것은 외국에 마구잡이로 팔았으며,
결국 왕과 왕족, 고관대작, 지방유지들은 일제로부터 한 평생 호의호식할 수 있는 거금의 경제적 혜택과 높은 작위를 받고 묵묵부답으로 묵종하며, <총 한 번 못 쏘고> 나라를 넘겼다.
하지만 일본은 불과 36년 동안에 조선 땅에 52억 달러어치의 재산을 쌓아 올렸다.
이 엄청난 재산 중 남한지역의 23억달러를 미국이 빼앗아 보관했다가 대한민국
건국자 이승만에게
선물처럼 주었다.
미국은 스스로 지키지 못했던 땅도 빼앗아 주었고,
조선인들로서는 꿈조차
꾸지 못했던 천문학적 규모의 재산도 빼앗아 주었다.
이 두 가지 구체적 선물에
대해 우리는 빼앗아 준
미국과 돈을 만들어 준
일본 모두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 중요한 사실이 묻혀왔기 때문에 우리는 배은망덕한 국민이 되었고, 좌파정권은 북중러의 지령에 따라 걸핏하면 반일 반미 감정에 불을 지피고 있고, 그 배은망덕의 소치는 순전히 빨갱이들의 역사왜곡에 있었다.
이런 자료들은 국사편찬위 전자사료관에 보관돼 있다. 역사의 진실이 밝혀지길
두려워하며 긴 잠을 자고
있는 것이다.
미군정은 처음, 사유재산을 압류대상에서 제외했다가 매우 다행하게도 곧이어
사유재산까지도 압류했다 (군정법령 제8호, '47.10.6.제정).
공적-사적 재산 목록이 170,605건, 이승만 정부에 넘겨줄 때까지 3년 동안
미군정은 고생했다. 엄청난 관리 인력과 재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미군정에 인수되지 않고
농림부 등에 등록되어 있던 또 다른 일본인 재산이 121,304건에 이른다.
이 모두를 합한 총 재산은 291,909건이었다.
미국은 어느 정도로 일본인을 발가벗겨 보냈는가?
미군은 퇴각하는 일본인들의 주머니를 뒤져 지폐까지도 압수했다.
귀국하는 일본인이 소지할 수 있는 돈의 액수를 극도로 제한했다.
민간인은 1,000엔, 군장교는 500엔, 사병은 250엔
이상 소지할 수 없었다.
미군은 부산항을 통해 귀국하는 일본인의 주머니를
검열했다.
1945년 말까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돌아간 민간인은 47만 여 명이었다.
하지만 주한미군사령부
정보참모부가 1945년 11월 3일에 작성한 (G-2 Periodic Report) 54호에 의하면 일부의 일본인들이 150엔을 주고 밀항선을
이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밀항선을 타고
탈출한 일본인 숫자가
과연 얼마나 되었겠는가?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핵심은 미국이 일본인들을 무산계급으로 만들어 겨우 몸만
돌려보냈다는 사실이다.
조선반도에서 그렇게 빈손으로 본토로 돌아간 일본인들은 전후 일본의 큰 사회문제가 되었다.
일본인들이 남겨두고 간
그 많은 주식회사급 기업들은 그 후 어떻게 되었는가?
대부분 그 회사 직원이거나 관련이 있던 친일 조선인들에게 헐값으로 불하되어
오늘날 대한민국의 대기업들로 성장했다.
오늘의 우리 대기업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일본기업들이었다.
조선인들이 세운 업체는
작은 ‘상회’라는 이름을
단 개인 가게들이었다.
아래의 사례들은 현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해방 이후
맨땅에 헤딩해서 창조한
것들이 아니라는 것을
웅변할 것이다.
'쇼와 기린맥주’는 당시 관리인 이었던 박두병에게 불하되어 두산그룹의 계열사인 ‘OB맥주’가 되었다.
‘삿포로 맥주’는 명성황후의 인척인 민덕기에게 불하되어 ‘조선맥주’가 되었다(1998년에 하이트맥주로 상호 변경).
‘조선유지 인천공장 조선화약공판’은 당시 직원이었다가 관리인이 된 김종희에게 불하되어 ‘한화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삼척의 ‘코레카와 제철소’가 해방 후 ‘삼화제철’로 상호 변경되어, 장경호에게 불하되어 ‘동국제강’이 되었다.
‘조선제련’이 구인회에게
불하되어 ‘락희화학(LG화학)’이 되었다.
’오노다 시멘트 삼척공장’은 이양구에게 불하되어 ‘동양시멘트’ 가 되었다.
‘조선연료, 삼국석탄, 문경탄광’이 김수근에게 불하되어 ‘대성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아사노 시멘트 경성공장’이 김인득에게 불하되어 ‘벽산그룹’이 되었다.
‘경성전기-남선전기-조선전업’이 해방 후 합병되어
한국전력’이 되었다.
‘조선우선’이 직원이던
김용주에게 불하되어
대한해운’이 되었다.
‘선경직물’은 공장의 생산관리 책임자이던 최종건에게 불하되어 ‘SK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SK그룹은 1939년 조선의 일본인 포목상이 만든 조선에서 만주로 직물매매 하던
선만주단(鮮滿紬緞)과 일본의 교토직물이 합작해 만든 선경직물로부터 시작됐다. ‘선경’이란 이름은 선만주단의 선(鮮)’과 교토직물의
경(京)을 따서 지은 것이다.
‘경기직물과 조선방직’이
대구에서 비누공장을 운영하던 김성곤에게 불하되어 ‘쌍용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동양방직’은 관리인이던
서정익에게 불하되었다.
‘아사히견직’은 부산공장장이었던 김지태에게 불하되어 ‘한국생사’가 되었다.
‘가네보방직 광주공장’이
김형남, 김용주에게 불하되어 ‘일신방직’이 되었다.
‘동립산업’이 관리인이었던 함창희에게 불하되었고,
제일제당(현CJ)이 이를
흡수했다.
‘쥬가이’제약은 서울사무소 관리인에게 불하되어
현 ‘중외제약’이 되었다.
‘조선주택영단’이
‘한국주택공사’가 되었다.
‘조선미곡창고 주식회사’가 해방후 ‘한국미곡창고 주식회사’가 되고, 후에 ‘대한통운’이 되었다.
‘조선중공업주식회사’가
해방 후 ‘대한조선공사’가
되었고, 후에 한진그룹에
편입되어 ‘한진중공업’이
되었다.
‘한국저축은행’은 정수장학회의 설립 멤버이기도 한
삼호방직의 정재호에게
불하되었다.
‘조선생명’이 이병철에게
불하되어 ‘삼성화재’가
되었다.
‘조선화재 해상보험’이
동양화재 해상보험’이
되었다가, 지금 ‘메리츠
화재해상보험’이 되었다.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점’은 이병철에게 불하되어
신세계 백화점’이 되었다.
‘조지아 백화점’이 ‘미도파 백화점’이 되었다.
‘나가오카제과
(永岡製菓)’는 직원이던
박병규 등에게 불하되어
‘해태제과 합명회사’가
되었다.
‘모리나가 제과와 모리나가 식품이 해방 후에 동립식품으로 상호 변경되어 운영되다가, 1985년에 ‘제일제당에 병합되었다..
‘토요쿠니제과’가 해방 후에 ‘풍국제과’로 상호 변경되어 운영되어오다가 1956년에 동양제과(오리온)에
병합되었다.
이외에도 내로라하는 한국기업들은 거의가 다 일본인이 설립, 운영 하던 회사라고 생각하면 큰 무리가 없다.
조선인이 설립 운영하던
큰 기업은 김성수, 김연수
집안에서 설립한 ‘경성방직’, ‘삼양사’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 상회(商會)’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다.
화신상회, 개성상회,
경성벽지 등이다.
일본이 팽개치고 나간 회사들을 조선인들이 이승만
정부로부터 ‘불하’란 명목으로 헐값에 인수했다.
그래서 이들 중 일부는 1961년 5.16군사혁명 후 정경유착에 의한 ‘부정축재자’로 몰렸다.
일본인들은 얼마나
속이 쓰렸겠는가?
반면 불하받은 사람들은
어떤 ‘횡재’를 했는가?
그래서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결단계에서 남조선에 두고 간 23억 달러
어치의 재산에 대한
청구권을 요구했다.
해방 직후 북한을 선점한
소련은 군정을 통해 북한에 건설된 발전소, 공장 등을
계속 운영하기 위해 그것들을 건설하거나 운영해온
일본인 기술자들을 확보하는데 공을 들였다.
소련군정은 만주에 주재한 ‘일본피난민단장’과 협의하여 북조선에 있던 모든 기계, 설비를 계속 운영할 수 있도록 일본 기술자들을 북조선에 남게 해달라고 사정했고, 일부는 억류했다.
친일파가 남아 북의 재건을 도운 것이다.
그들이 건설하고 애지중지 운영해오던 기계, 설비들에 대한 엔지니어로서의 애착심에 호소했다고 한다.
그 결과 1946년 1월 현재 총 2,158 명의 기술자들을 일본으로의 즉시 귀국을
막고, 북조선에 잔류시키는데 성공했다.
스탈린은 당초 북조선에 있는 설비들을 소련으로 옮기라고 명령했고, 소련군정은 중요한 기계들을 분해하여 포장한 후 소련으로 반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국경을 넘기 직전 다시 스탈린으로부터 반출을 중단하라는
긴급 지시가 떨어졌다고
한다.
세간에는 당시 소련이 북조선 기계들을 모두 뜯어 소련으로 가져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그럼 스탈린은 왜 마음을
바꿨을까?
전문가의 말에 의하면 스탈린은 이 당시 이미 6.25전쟁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6.25 전쟁을 치르려면 북조선에서 병기를 비롯한 군수물자를 자체 생산해야 하고, 그를 위해서는 기계, 설비들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란 해석이다.
산의 나무도
귀속재산이었다.
또한 조선의 산은
민둥산이었다.
여기에 일본은 과학의 힘으로 경제성 있는 나무들을
심었다.
지금도 일본에 가면 산마다 쭉쭉 뻗어 올라간 경제목들이 들어차 있다.
해방 당시 전국의 산에는
일본이 심은 나무들이
밀림을 이루고 있었다.
지금 광릉(수목원)에
보존된 나무들이 바로
일본의 작품이다.
그런데 이승만 정부가 들어서고, 전후방에 군부대들이 우후죽순식으로 들어서면서 ‘후생사업’ 이라는 것이 활기를 띄었다.
당시는 군대가 판을 치던
시대였다.
역대 사단장들이 너도나도 덤벼들어 군 후생을 빙자해 벌목을 했다.
거목들을 베어내 시장에
팔아 자금을 마련해 여러
가지 목적으로 사용했다.
대한민국 산이 다시
민둥산으로 변한 것이다.
이에 박정희 정부 농림장관인 장경순 씨가 대통령의
명을 받고 나무를 대대적으로 심었지만 그 나무들은
일정시대의 산림처럼
경제림이 아니었다.
포항제철 사례에서 보듯이 공업 분야에서는 일본으로부터 기술지원을 대대적으로 받았지만, 나무를 심는
식수계획에서는 일본기술의 지원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장경순 씨의 이야기로는
수종선택은 토종기술에
의존했다고 한다.
그나마 푸른 산을 푸르게
계속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나무를 대체할 수 있는 땔감의 개발이 필요했다.
1960년대, 19공탄이 산림훼손을 저지하기 시작했다.
강원과 문경 등지의 탄광에서 서울과 대도시로 직행하는 열차에는 석탄이 실렸고, 그 후부터 산은 푸르게 우거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영국에서는
영조시대인 1750년대에
석탄이 나무를 대체했다.
영국이 한국을 210년
정도 앞서간 것이다.
이런 부끄러운 격차를
만들어 낸 주역은 조선의
왕들이었다.
일본이 가꾼 산림, 비록 금전적으로 환산은 될 수 없지만 어마어마한 자산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것도 귀속재산이라
할 것이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일본과 미국의 덕분이다.
제대로 알고나 반일,반미
시위를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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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닭과 꿀벌의
삶이 주는 교훈(敎訓)
새벽이 되면 닭들이
웁니다.
그런데, 그날은 아직
새벽이 되기 전인데
닭들이 웁니다.
그것도 비명을 질러가며
울고 있었습니다.
화들짝 놀란 주인은
닭장으로 뛰어 갑니다.
그랬더니 무려
600마리가 죽어 있었습니다.
원인은 금방 밝혀집니다.
닭장 저쪽 구석에서
닭들의 천적(天敵)인
수리 부엉이 한 마리가
닭 한 마리를 낚아채
여유롭게 먹고 있었습니다.
수리 부엉이 한 마리가
무려 600마리를
죽인 것 입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수리 부엉이가
죽인 것이 아니라
닭들이 서로 먼저 살겠다고
출구 쪽으로 달려가다
압사(壓死)한 것입니다.
수리 부엉이는
한 마리만 죽이고
나머지 닭들은
동료 닭들이
죽인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희생을 최소화
할 수 있는 길은 없었을까요?
꿀벌은 꿀을
절대 혼자 먹지 않습니다.
밖에 나갔다가
꿀을 발견하면
벌집에 돌아와
동료들 앞에서
춤부터 춥니다.
그런데 이 춤은 사실
소통(疏通)의 수단입니다.
그 벌은 동료 벌들에게
꿀이 얼마나 멀리 있는 지
얼마나 많이 있는지 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날갯짓 으로
알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본 다른 꿀벌들이
어떤 방향으로
몇 마리를 파견해야 할 지
결정합니다.
그렇게 꿀벌들은 협력해
같이 꿀을 모아갑니다.
함께 저장(貯藏)하고
함께 꿀을 먹습니다.
그런데, 이 꿀벌의 집에
천적인 말벌이 침입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
말벌 한 마리는
꿀벌보다 대개 5~6배 큽니다.
일단,
꿀벌들이 말벌 주위를
뺑 둘러가며 에워 쌉니다.
그러고는 열심히
날갯짓을 합니다.
온도를 높이기 위해서죠.
말벌이 (고온)高溫에
약(弱)하다는사실을
꿀벌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45도까지
온도가 상승하면
말벌은 죽고 맙니다.
이 과정에서
꿀벌 중 몇 마리는
말벌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죽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죽는
한(限)이 있더라도
포위망을 풀지는 않습니다.
말벌이 죽고 나면
다시 꿀벌들은
날갯짓을 열심히 해
온도를 낮춥니다.
48도가 되면
자신들도 죽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죠.
닭들과 확연히 다른
DNA를 꿀벌들은
가진 것 같습니다.
닭들은 천적인
수리부엉이의 공격에서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다가
동료 닭도 죽이고
자기도 죽습니다.
그야말로
‘너 죽고 나 죽자’
式(식)으로
공멸(共滅) 합니다.
꿀벌들은 자기 한 몸
희생을 각오한 결과
천적인 말벌을 죽이는 데
성공합니다.
그렇게
‘나 죽고 우리 살자’
式(식)으로 생존해 갑니다.
닭들은 모든 것을
제로섬 게임으로 사고 합니다.
그래서
‘닭대가리’ 라고 하지요 !
꿀벌들은
자신의 행동을 ‘윈윈’하는
관점에서 조율 합니다.
닭들은 개죽음 당하지만
벌들에게는 명분있는
희생이 있을 뿐 입니다.
인간이 지구를
지배하게 된 것은
상호 협력할 줄 아는
논 제로섬 게임의 사고를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먼 거리를
달릴 수 있는
동물이 바로 인간 입니다.
한 번 사냥감을 정하면
가장 빠르게는 아니지만
끝까지 추적해 잡습니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같이 협동해 잡습니다.
인간의 언어도
사냥터 에서 사냥하기 위한
소통의 목적으로
나온 것 이라고 하지 않는가요?
닭 대가리가
되는 것이 나은가요 ?
아니면,
용 꼬리가 나은가요 ?
왜, 우수한 집단에
가장 낮은 자세로
조직을 운영하는
서번트 지도력이
최고이기 때문 입니다.
강한 조직과
약한 조직의 차이는
개개인 한 명 한 명이
자기 희생적 자세로
일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꿀벌은 절대 꿀을
혼자 먹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자기의 몸을
던지기 때문에 천적을
이길 수 있는 것 입니다.
''김영철''
연세대 철학과 교수
============================
♂️ 성 찰...^^
70대를 맞이하며...!
⓵ 말을 적게 해야 한다.
입을 다물고, 남의 말을 들어야 한다.
말을 많이 하면, 품위가 떨어지고, 체신머리가 없어진다. 입은 밥을 먹을 때에만 벌려라.
⓶ 자신이 늙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마음은 28청춘’이라고 몸 따로, 마음 따로 놀면 안된다. 늙은 사실을 모르고 Boxing 대회에 나가면 곧 KO된다.
⓷ 연애는 젊은 사람의 몫임을 인정해야 한다.
로미오도 애들이고, 줄리엣도 애들이다. 베스트셀러가 된 모든 애정소설의 주인공들은 20대다. 6,70대가 주인공인 영화는 서부영화에서 총맞아 죽는 역밖에 없다.
⓸ 이기심을 버려야 한다.
나이들면, 돈밖에 모르고, 제 몸밖에 모른다. 그렇게 살다가 죽으면 욕만 먹는다.
주변 사람을 배려하고, 못사는 친척, 친구에게도 시선을 돌려야 한다.
헌혈도 너무 나이들면 받아주지도 않는다.
⓹ 세상일에 아는척 하지 말아야 한다.
몇십년전에 배운 일, 경험한 것을 금과옥조로 삼고 떠들면 꼴통 소리를 듣는다.
컴퓨터, 인터넷 시대이고, 달나라 가는 시대다. 드론으로 정확하게 IS 요인 공격살해하는 세상이다.
늙은 사람이 정치 경제 외교 안보 군사 문화 스포츠 모든 분야에서
전문가인 것처럼 시끄럽게 떠들면,
애국하는 것이 아니라, 애곡하는 것이다.
⓺ 왕년에 잘나갔다는 이야기는 혼자 있을 때 장독 안에다 머리를 틀어 박고 하는 게 좋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배고픔을 참고 성공했다든가, 피나는 노력을 해서 서울대 갔다든가, 여자를 잘 꼬셔서 미인과 사겼다든가 하는 이야기를 수천번 반복하고 있으면, 그건 공해다.
⓻ 젊은 사람들의 두뇌와 능력을 인정하여야 한다.
우리도 옛날에 붓으로 사무보는 사람을 우습게 보고 살았다. 지금도 마찬 가지다.
젊은 사람들의 지능과 정보력, 신속한 동작은 상상을 초월한다. 젊은 사람들과 경쟁 하려는 것은 사자와 맞짱 뜨자는 것과 같다.
⓼ 성관계는 아예 포기하거나 극도로 절제하여야 한다.
특히 나이든 남자가 젊은 여자와 새로운 연애를 시도하는 것은, 복상사로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비장한 결의로 들린다.
젊은 여자와의 사랑을 유지 관리하는 것은, 곧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 가면서 허망한 구름을 잡겠다는 것이다.
구름을 잡고 있으면, 곧 지상으로 추 락해서 끝이 난다.
⓽ 마지막까지 가정을 지키고, 가장으로서 할 일을 다 해야 한다.
은퇴했다고 운동이나 하고, 술이나 마시고 있으면 안 된다. 정 할 일 없으면, 손자 손녀 학습지도라도 하라.
⓾ 안 하던 일을 새로 하지 마라.
창업을 하든가, 주식 투자를 하든가,
다단계를 하든가, 새로운 아이디어로
돈을 벌려고 하다가 얼마 남지 않은 쌈짓돈 다 날리고 쭈굴쭈굴한 거지가 되면, 아주 비참해진다.
⑪ 황혼이혼은 망하는 지름길이다.
지금까지 참고 살았으면, 앞으로 얼마 남지 않는 인생도 그대로 살아라.
조강지처 버리고 밖에 나가 방황하다가 우습게 된 노년이 한 두 사람이 아니다.
⑫ 뒤늦게 정치하지 마라.
갑자기 국회의원 출마하고, 시장 군수, 도의원 구의원 나가지 않는게 신상에 좋다. 정치는 하던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⑬ 쓸데없는 고집을 버려라.
집안에서도 부인과 다투지 마라.
큰일에서는 다투더라도, 작은 일과 사소한 일에서 다투면 사람만 쩨쩨하다고 손가락질 받는다.
⑭ 지금까지 살면서 잘못한 일을 반성하는 기회를 가져라.
부모에게 불효한 것, 아내에게 잘못한 것, 자식들에게 제대로 못해준 것,
본인 자신에게 충실하지 못한 것 등등
반성할 것이 108가지는 될 것이다.
108번뇌라는 말은 바로 꼰대들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⑮ 자식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 하지 마라.
자식들은 스무살 넘으면 알아서 사는 것이다. 부모로서 자식 걱정만 하고 있어야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⑯ 자식들에게 먼저 모든 재산을 증여해주면 안된다.
재산 다 넘겨주면 자식들로부터 구박 받는다. 그건 다 자업자득이다.
집 넘겨주고 쫓겨나서 양로원 가 있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⑰ 죽을 때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믿어라.
혹시 재산이 많으면 죽기 전에 마음껏 쓰고 죽어라. 주변 사람을 위해서도
좋은 일도 조금 하는게 좋다. 선을 베풀면, 악을 행하는 것보다
훨씬 더 행복감을 느낀다.
⑱ 자서전을 쓸 생각을 하지 않는게 좋다.
특히 대필해서 자서전 써놓아야 읽는 사람 아무도 없다. 자식들조차 읽을 시간이 없다. 자식들도 페이스북 해야 하기 때문이다.
⑲ 건강을 챙기는 것은 좋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오직 120세까지 사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삼고 사는 것도 곤란하다.
무엇인가 보람있는 일을 해야 한다.
⑳ 사는 동안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배려하며, 함께 살아가는 자세를 익히는 것이다.
잘난척하면 어디에 가도 왕따 당한다
나이들면 우리가 생각해야 할 일은
한 두가지가 아니다. 나이 들면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고, 조금이라도 지혜로워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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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의 시대 얘기》
박태준(朴泰俊) (1927~2011)과
이병철(李秉喆)
(1910~87)이 본 日本
포스코가 위기에 빠졌을 때
그는 일본에 달려갔다.
과거를 잊지 않은 일본인은 아낌없이 한국을 도왔다.
그 '巨人의 時代'를 읽으면 지금 韓·日은 너무 초라하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낸 철강인 박태준은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을 책에 기록했다.
수영대회에서 1등을 했지만 조선인이란 이유로 야유를 받고 2등으로 강등 당한 일,
그리고 미군의 폭탄이 쏟아지던 날 방공호에서 겪은 일이다.
"방공호는 질서가 정연하다.
이 일에 노인들, 특히 할머니들이 나선다.
'젊은이는 안으로 들어가라. 위험한 곳은 우리가 막는다.
왜 책을 들고 오지 않았느냐? 젊은이는 책을 펴고 공부해라.'
방공호 입구에 천막이 쳐지고
젊은이가 모인 제일 안쪽엔 두 개의 촛불이 켜진다."
박태준은 1등을 빼앗겼을 때
"속이 끓었지만 참고 다스렸다"고 했다.
방공호에서 할머니의 질책을 들었을 땐
"식민지 대학생의 가슴으로 들어와 고국(故國)에 대한 책임감을 일깨웠다"
고 술회했다.
일본이 준 분노는 참고, 감동은 받아들여 조국을 위한 동력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박태준이 훗날 포스코를 세울 때 '恩人'으로 부른 일본인이 몇명 있다.
당대 일본 최고의 思想家로 불리던 양명학자(陽明學者)
야스오카 마사히로(安岡正篤)가 그중 한 명이다.
종합 제철소 프로젝트가 미국·독일·영국·이탈리아에 퇴짜를 맞았을 때 한국은 일본에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모든 책임을 어깨에 지고 도쿄로 간 박태준은 야스오카를 가장 먼저 만났다.
일본 정·재계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 통하는 거물이었기 때문이다.
야스오카는 '과거를 반성하고 한국을 돕는 것이 일본의 국익(國益)'이라는
한국관(觀)을 갖고 있었다.
그는 먼저 기술 협력의 열쇠를 쥐고 있던
이나야마 요시히로(稲山嘉寛) 일본철강연맹 회장에게 박태준을 보냈다.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 등 정계 거물과의 연쇄 만남도 주선했다.
박태준의 열정에 야스오카의 성의가 더해져 미온적이던 일본 정부와 기업은 열정적 지지자로 변했다.
다른 선진국처럼 일본도 한국을 외면했다면 포스코는 그런 위용(威容)으로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박태준과 비슷한 기록을 삼성 창업자 이병철도 남겼다.
유학을 위해 탄 연락선에서 1등 선실 근처로 갈 때였다.
일본 형사가 가로막고 막말을 던졌다.
"조선인이 무슨 돈으로 1등 선실을 기웃거리느냐.
건방지게!"
그는
"후일 사업에만 몰두하게 된
것은 민족의 분노를
가슴 깊이 새겨두게 한 그 조그마한 사건 때문"이라고 자서전에 썼다.
이병철은 패전으로 폐허가 된 전쟁 직후 도쿄의 허름한 이발소 이야기도 함께 기록에 남겼다.
주인에게 "이발 일은 언제부터 했느냐"고 물었다.
"제가 3대째니까 가업(家業)이 된 지 이럭저럭 한 60년쯤 되나 봅니다.
자식놈도 이어주었으면 합니다만…."
그는 "일본은 절대 망하지 않고 再起할 것이라고 그때 생각했다"고 썼다.
1983년 8월 이병철이 후배 박태준을 일본 휴양지로 불렀다.
'부메랑 효과'를 내세운 일본 철강업계가 광양제철소 건설에
협력을 거부할 때였다.
휴양지에는 당시 일본 정·재계의 막후(幕後) 거물 세지마 류조, 그리고 10여년 전 포항제철소 건설을 지원한 일본 철강업계의 代父 이나야마가 함께 있었다.
이들에게서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둔 이병철은
"다른 말은 말고, 고맙단 인사만 드리라"고 박태준에게 말했다.
박태준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었다"고 술회했다.
이병철도 비슷한 고비를 넘겼다. 5개월 전 발표한 삼성의 역사적 반도체 투자는
핵심 기술을 제공한 일본 반도체 업체 샤프의 역할이 컸다. 일본이 처음 해외에 반도체 기술을 제공한 사례였다.
이병철은 "샤프의 각별한 호의(好意)였다"고 자서전에 기록했다.
"샤프를 국적(國賊)이라고 혹평하는 업자도 있었다"고 했다.
한·일의 가교 역할을 한 세지마 류조는 회상록에 이렇게 기록했다.
"한국은 통일된다. 일본은 (과거사를) 반성하고
한국의 感情을 포용하면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기둥으로
하는 통일 한국이 탄생할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한다."
박태준은 일본에서 노동을 하며 키워준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일본 총리 후보였던 유력 정치인과의 저녁 약속을 깰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이너스 성장에 허덕이던 1980년 한국은 일본의 도움이 그만큼 절실했다.
그날 박태준이 국익을 위해 약속을 취소하지 못한 일본 정치인은 아베 신타로,
전 일본 총리 아베 신조의 아버지다.
그는 평생 한국과의 우호에 힘을 쏟았다.
다음 날 박태준은 아버지의 이런 유언을 전해 들었다.
"울지 마라. 열심히 살고 간다." 거인(巨人)들의 시대였다.
물론 그때도 갈등이 있었다. 하지만 큰 흐름은
거인들이 가슴에 품은 '대의(大義)'에 따라 움직였다.
풍요를 얻어 절실함이 사라진 탓일까. 나라가 늙어 포용력이 사라진 탓일까.
그 시대를 읽으면 지금 한·일 관계는 작고 얄팍하다.
유치하고 졸렬하다.
산업화 시대의 거인들은 우리의 영웅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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