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라디오
90년대 중반에는 AM라디오로 중계를 많이 들었습니다. 서울 기준, 주파수가 대략 603 / 711 / 892 그런 정도의 채널이었던 것 같습니다. 고등학생이 거실에서 몇시간씩 TV를 보려면 "숙제했냐, 공부해라"라는 푸시를 피하기 어렵고, 6:30~9:30이면 대개 독서실에 있는 시간인데다, 지금처럼 전경기 중계가 있지도 않은 시대였으니 자연스레 라디오로 몰렸던 것 같습니다.
라디오의 매력은, 야구를 상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축구-배구-농구같은 스포츠와 달리 야구는 라디오로 들어도 상황을 이해하는데 큰 무리가 없고, 역설적이게도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머리로 상상하며 보는 것에서 색다른 즐거움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캐스터가 "레프트 뒤로~ 레프트 뒤로~"하고 외치면 그 타구가 정말 커서 넘어갈 것 같은지, 아니면 좌익수가 뒤로 이동해 쉽게 잡을 수 있는 타구인지 당장은 알 수 없거든요. 중요한 순간에 "홈으로, 홈으로, 슬라이딩~~~" 같은 중계를 들으면 그 순간의 몰입도가 굉장합니다. 그게 나름의 재미를 주었던 것 같습니다.
[2] 700-1600
"안녕하십니까. 한국통신 제공, 프로야구경기 안내입니다. 본 경기 안내는 한국야구위원회에서 제공받고 있습니다"
"4월 27일 수요일, 8시 15분 현재 각 구장 프로야구 경기 안내입니다. 잠실구장 엘지트윈스 대 한화이글스의 경기는, 원정팀 한화가 4:3으로 앞선 가운데 6회말이 진행 중입니다. 엘지 투수는 김태원, 한화 투수는 정민철입니다"
공중전화에 40원을 넣으면 딱 저만큼의 정보만 들려주던 서비스가 있었습니다. 프로야구 상황을 알려주는 ARS가 대부분 '정보이용료'를 받았는데, 1600은 그냥 통화료만 내면 됐습니다. 문제는 업데이트가 느리다는 것이었습니다. 빠르면 15분, 늦으면 30분에 한번씩 업데이트 되기 때문에, 급한 마음에 다시 전화를 걸어보아도 아까처럼 8시 15분 상황이 들려서 마음은 답답하고 돈만 버리는 경우도 많았죠. 리드 중인 구단을 먼저 언급하기 때문에 기계음 여인이 '원'자를 먼저 말하는지, 아니면 '홈'자를 먼저 말하는지 귀를 기울이며 가슴을 콩닥대던 기억이 납니다. 저것 때문에 독서실에 10원 짜리를 몇천원어치씩 바꾸어 쌓아놓던 기억도 납니다.
[3] 문자중계
지금 30대를 넘긴 아재 혹은 아지매들 기준으로, 그 사람이 야구 덕후냐 아니냐를 알아볼 수 있는 기준이 바로 문자중계라고 생각합니다. 컴퓨터 앞에 앉아 3시간씩 마음 졸이며 문자중계를 들여다 보는 마음을 야구 덕후들은 이해하고 추억하는데, 덕후가 아닌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 그건 딱 '어이 없는 일' 이거든요. 아무 움직임도 없고 그냥 1구 볼 / 2구 스트라이크 이런 텍스트가 몇십초에 한번씩 올라오는데 그걸 3시간이나 보고 있다는 게 말입니다.
문자중계는 라디오와 같이 상상하는 효과가 있지만, 이미 영상과 중계에 익숙해진 2000년대 야구팬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완벽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팬들이 문자중계와 꼭 같이 한 것이 바로 [채팅] 혹은 [MSN]입니다. 이곳 회원들도 평일 저녁에 PC앞에 모여 채팅창에 "우와 안타~~~~~!!!!!" 이런 글을 올려가며 몇시간씩 중계를 같이 보곤 했습니다. 어떤 날은 딱히 일이 없는데도 퇴근 후 회사에 남아 자장면 시켜먹으며 문자중계를 보던 기억도 납니다. 혼자 봤으면 재미가 없었을텐데, 회원들 여럿이서 채팅하면서 보면 왜 그렇게 재미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참고로, 2001년 한화이글스 홈페이지 문자중계 알바가 저였습니다)
[4] DMB와 아프리카
먼저 DMB는, 생각해보면 최근 기억 같은데, 막상 따져보면 벌써 10년가까이 된 기억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DMB가 '지상파'였는지 아니면 '위성'이었는지 그것조차 이제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처음에는 나름 획기적인 중계 툴이었습니다. 한강 둔치, 혹은 여자친구네 집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같이 야구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던 기억이 납니다. 다른팀 중계를 보러 가서 우리팀 경기를 보는 재미도, 야구장 관중석에서 리플레이를 확인하는 습관도 이때부터 생겼죠.
독일과 스웨덴에서, 그리고 베트남과 사이판에서 한화야구를 본 적이 있습니다. 화질은 조악하고 그나마 자꾸 끊겨서 복장이 터져 제대로 못 봤습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중계 영상을 재생시켜 주어서 아쉬움을 달랬는데 그게 바로 아프리카였습니다. 카페 채팅창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라 그 곳에 글을 쓰며 보지는 않았으나, 어쨌든 야구 보기 어려울 때 아쉬움을 달래주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야구 중계를 보는 것'이 매우 당연한 일이 됐습니다. 매일, 모든 경기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게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2000년대 초중반 야구 인기는 지금처럼 훌륭하지 않았고, 방송사는 중계를 외면했으며, 운 좋게 중계가 잡힌대도 그게 내 응원팀이라는 보장은 없었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4구장 혹은 5구장 중계를 실시간으로, 심지어 본인이 원하면 한 화면에서 동시에 볼 수 있는 세상이네요.
저도 이제 나이가 많아서 그런가, 라디오로 몰래 야구 듣던 고딩 시절이나, 맘 졸이며 문자중계 창을 들여다보던 사회 초년생 시절이 그립습니다. 그리고 그 시절을 주름잡던 정민철 송진우 이영우 송지만이 그립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내가 그리운 건 그들이 아니라 바로 '그 시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말 저녁이나 빅게임이 아니면 중계보기 어렵던 세상에서, 이제는 시범경기까지 스마트폰으로 볼 수 있는 세상이 되기까지 참 많은 시간이 흘렀으니까 말입니다.
첫댓글 라디오 들으며 플레이를 상상하던 그시절..참 그립네요 700번호도 생각납니다 다 추억이네요
전 3번과 편파중개방이 기억나네요~~
월정료를 내면 삐삐로 스코어 상황이 왔던것도 있었습니다
삐삐 저두 기억납니다!! ㅎㅎ
월정료를 내는거였군요 ~ㅋ
암튼 삐삐 올때마다 술마시다 알려주곤 했었드랬습니다+_+
CBS 라디오에서 야구 중계를 자주 해줬던 기억이 나네요. 라디오로 광주에서 해태 이종범의 끝내기 역전 만루홈런을 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주머니에 들어 있던 마이마이 집어 던질 뻔 했지요.. ㅠ.ㅠ
저는 야구장 근처에 살아서 관중들의 함성소리로 경기를 본것같습니다 함성소리가 십초이상 나면 홈런, 와~~하다 멈추면 플라이아웃 또 빙그레시절엔 경기에서 이기면 불꽃놀이를 해줬던 기억도 있네요^^
반갑습니다. 학교다닐 때 대흥동에서 살았었어요. 아파트 높은 층에 올라가면 전광판도 보여서 가끔 올라가곤 했죠. 7횐가 8회되면 야구장이 들어가기도 했구요
@만화이글스 영진로얄 아파트죠 ^^ 저도 8회에 들어간적 많이 있었네요 반갑습니다^^
운전할땐 TJB 라디오죠.
대전에선....
라디오 죽음이었죠...ㅜㅜ 야자 때 겨드랑이로 들어가 오른쪽 손목으로 나오는 이어폰...!! 그리고 적시타가 터질때마다 불끈 쥔 왼손....!! 야구만 아니었어도 더 좋은 대학 갔을겁니다 ㅎㅎㅎ
지금도 아주가끔은 있긴하지만 전 이원중계가생각이납니다- 우리팀이중계가메인은아니었지만 중간중간 5분여중계되는모습을보기위해 타팀경기를사수하고본기억도납니다^^
라디오의기억은 주말에고속도로에서듣는 카오디오와 박찬호중계였죠~그땐이어폰숨겨듣는 스킬만5가지정도되었으니~ㅋㅋ
야구 시즌 저녁에 운동으로 자전거 타는데 라디오 중계가 그립습니다,^^
80년대 후반인지..90년대 초반인지..초등학교때..
Kbs에서 금요일 저녁마다 해줬던 평일 야구경기 생중계가 일주일중 가장 기다리던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빙그레경기가 아닐때는 타구장 소식 보려고 계속 티비앞에 머물렀던 시절이었죠.
그때 하일성은 신이었는데...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려면 공부를 계속해야하나봐요.
금요라이트 말씀하시는듯합니다^^
라디오 야구가 생각보다 재미져요 ㅋㅋㅋㅋ 저는 시즌에도 tjb라디오중계 자주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