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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 한라산 등반기 & 제주도 기행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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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실 오백나한(오백장군)
한라산 백록담 서남쪽 해발 1천 600여m의 허리에
둘레 3,309m, 계곡 깊이 389m에 2천여 돌기둥 절벽.
하늘 찌를듯 솟구친 2천여 기암계곡에 샘솟는 물소리,
구슬픈 뻐꾸기, 안개 속 온갖 새소리는 심산계곡의 극치.
웅장한 대자연의 교향악
절벽 동쪽은 5백여 개가 넘는
형형색색 모양을 한.,제1 경승지.
1100도로 영실 등반로 입구에서 6.5㎞ 들어온
이곳은 백록담, 물장오리와 함께 한라산 3대 성소.
이 계곡에 0 ~20m 돌기둥들이 울창한 숲에 서 있어
500 장군 같기도 하고 나한불상이 공대하여 서 있는듯.
서쪽벽 역시 1천2백여 바위기둥이 한데붙어 서 있어
마치 장삼으로 예장한 불이 공대하여 서 있는 것 같다.
'병풍바위' 동쪽에 5백여개 바위를 "오백나한", "오백장군",
석가여래가 불제자에게 설법하던 영산과 비슷해.,'영실나한'
'영실'이라고 불리워졌다고 하며,
이들 기암 괴석은 또한 억센 나한들과
같다하여 '오백나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동쪽 암벽에는 흰진달래, 섬바꽃,
어수리, 구상나무, 주목, 제주백회,
고채나무 등 한대성 원시림을 이루고,
서쪽 암벽에 섬매자, 시로미, 주목,
병꽃 등 관목이 주수종을 이루면서
450여 종 희귀식물이 자생하고 있다.
계곡 하나 사이에 두고 온대와 한대가
마주 보고 있는 특수 지역이기도 하다.
지질학적으로도
서쪽 병풍바위는
잘 발달된 주상절리층
동쪽기암은
모두 용암이
약대지층을 따라
분출하다가 굳어진 것으로
용암분출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암석은 조면질안산암이며
이 절리대를 따라 용출된
지하수가 복류하여 강정천의
발원지가 되고 있다. 그리고
영실기암은 금강산의 만물상과
같다하여., '한라의 만물상'.
.....................................
한라의 만물상.,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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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봉개동.,물장오리 오름(937m)
...................물장오리 오름
탐라지(耽羅誌)에 “용이 사는 못이 있는데,
직경이 50보나 되고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사람이 떠들면 비바람이 일어난다. 가뭄이 들어
여기서 기도하면 비가 내리는 영험함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성스러운 곳이다.
물장오리는
‘장오리’라는
이름이 붙은
4개 중 하나,
테역장오리,
불칸장오리,
쌀손장오리
물장오리는 산정 호수를 가지고 있다.
또한 제주도 형성과 관련이 있는 거인인
‘설문대할망’이 빠져 죽었다는 전설의 고향.
부정한 사람이 오르면
갑자기 운무가 낀다고
할 정도로 성스러운 오름.
면적 628,987㎡,
둘레 3,094m,
높이 937.2m
바깥 둘레 1,500m
그 깊이를 알 수 없어
"창터진물"이라고 한다.
'창터진물'이란 '바닥이 터졌다'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는.,의미
.........................................
물장오리는
테역장오리,
살쏜장오리,
불칸디오름,
어후 오름과
이웃해 있으며,
5·16 도로변 물장올교에서
걸어서 40분 정도 소요된다.
...................설문대할망...............
치마에 흙을 담아 와 제주도를 만들고,
다시 흙을 7번 떠놓아 한라산을 만들었다.
한라산을 쌓기 위해 흙을 퍼나르다가 치마의
터진 부분으로 나온 흙이 360개 오름이 되었다.
한라산 봉우리가 너무 뾰족해
그 끝부분을 꺾어 잡아 던지니,
아래가 움푹 패여 백록담이 되고
윗부분은 산방산이 되었다고 한다.
주먹으로 봉우리를 쳐서
만든 것이 다랑쉬오름 굼부리,
성산포 일출봉 기슭의 등경돌은
설문대할망이 바느질을 할 때
등잔을 올려놓았던 받침대.
설문대할망은 키가 워낙 커서
한라산을 베고 누우면 다리가
관탈섬까지 뻗었는데, 관탈섬에 난
구멍은 할망이 다리를 잘못 뻗어 생긴 것.
관탈섬과 마라도를 밟고
우도를 빨랫대 삼아 빨래했는데,
오줌줄기가 너무 세어 지금도 우도와
성산 사이의 조류가 거칠다고 한다.
설문대할망은 제주민들에게
명주로 속옷을 만들어 주면
육지까지 이어지는 다리를
만들어 주겠다고 제안했다.
사람들이 좋아라며
명주를 모으기 시작했지만
99통 밖에 모으지 못했다.
결국 1통이 모자라
속옷을 만들지 못하자
설문대할망도 다리 놓던
일을 그만두었는데, 그때
다리를 놓던 흔적이 북제주군
조천과 신촌 사이에
뻗어나간 엉장매.
설문대할망은 큰키를 자랑
깊다는 물을 다 찾아다녔다.
용담의 용연은 발등까지 왔고,
서귀포 서홍리 홍리물은
무릎까지밖에 차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라산 중턱에 있는
'물장오리'에 들어갔는데,
물장오리 밑이 뚫려 있어
그만 빠져죽고 말았단다.
그런데 또 다른 이야기에는,
할망에게는 설문대하르방과의
사이에 오백 아들이 있었는데,
하루는 사냥 나간 오백 아들에게
먹을 죽을 끓이다 가마솥에
빠져 죽고 말았다.
죽을 먹던 아들들이
할망이 솥에 빠져 죽은 것을
알고는 슬피 울다 영실기암의
오백장군이 되었단다.
설문대할망은 설문대하르방과 함께
성산읍 신양리 섭지코지 앞바다에
들어앉아 고기를 잡고 아들들과
한라산을 누비며 사냥을 했다.
제주도를 창조한
창조신일뿐만 아니라
생산 활동을 한 생산신
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명주 속옷을 얻지 못하자
육지까지 놓으려던 다리 놓기를
그만두거나 큰 키를 자랑하다
물에 빠져 죽었다는 일화에는
인간적인 면모가 물씬
배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오백 아들을 먹여 살리다
죽었다는 이야기에서는 자기희생의
가난한 어머니상을 제시하는데,
이런 모습이야말로 척박한 땅에서
억척스런 삶을 이어 온 제주 여성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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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대할망 테마공원
...........사라오름(1,338m)................
제주시 '신성한 산' 사라봉과 같은 어원.
‘사라’는 산 이름에 표기되는 ‘술’에서 파생
불교적인 의미로는 ‘깨달음’과 ‘알고 있다’ 뜻말.
불교영향을 받아 범어가 많이 남아있는 제주.
사라오름 분화구는 제주도 6대 명당 중 제1명당.
한라산 동북 중간에 있는 허리부분으로서 형세는
뱀이 개구리를 먹는 생사축와형(生蛇逐蛙形) 형국.
왕후지지(王候之地)로 중국에서 보낸
풍수(風水)의 달인 호종단(湖宗旦)이
지맥을 끊으려 했다고 하는 전설과
"분화구에 수중릉이 있었다."는
전설이 있다.
한라산 정상에서 동북쪽 사면부.
성판악 등산로에서 접근이 가능.
오름 정상부는 분화구를 형성하고 있으며,
정상 분화구내 둘레 약 250m 크기의 호수에
물이 고여 습원을 이루며 한라산 산정호수로서
백록담을 제외하면 제주의 오름 중 가장 높은 곳.
분화구 내 노루들이 모여살며
풀을 뜯거나 호수 물을 마시면서
뛰어노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한라산 정상과 다양한 경관이 아름다워
조망지점으로서의 가치가 있는 명승이다.
성판악 코스에서 백록담까지 9.6㎞ 거리인데,
성판악 코스에서 6㎞ 정도 성날계곡을 따라
형성된 참나무 숲을 지나면 사라대피소 산장이
있는데, 이곳에서 서남쪽으로 1.5㎞에 위치한다.
...............................................................
사라오름.,해발 1300M 산정호수.
제주도는 360여개 '오름의 왕국'이다.
제주도에 올 때 비행기 아래로 보이는
많은 크고 작은 산들을 '오름'이라 한다.
제주도 외에 사용되지 않는
오름의 어원은 '악'을 나타내는
사투리로 '오로음'과 '올음'에서
나온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
해녀들은 물질 하다가 돌고래 무리를 만나면
“물알로 물알로”나 “배알로 배알로”를 외친다.
돌고래 뒤에 상어가 뒤따르기도 하기 때문이다.
바다에서 물질 후 육지에 올라오면 장작더미를 태워 불을 쬔다.
불쬐는 장소를 ‘불턱’이라 하는데, 여기서 화제가 만발하게 된다.
요즘은 불턱이 거의 사라지고 현대식 탈의장이 해녀들의 휴식장소.
얇은 무명 천 하나로 몸을 감싼., 잠녀
깊은 물속에 들어 가는 것은 어려운 일.
잠녀들이 물 속에 오래 깊이 가라 앉기 위해서는
물의 저항을 줄이려 천조각 하나도 생략해야 했다.
그러므로., 겨울 바다에서도 속곳 하나 만 입어야 했다.
물 속에서 나오면 몸이 퍼렇게 얼었고,
모두 떨며 불가로 모여 몸을 쬐야만 했다.
조선시대 정조 재위 당시
대기근에 수만명이 굶어죽고
전염병까지 돌아 제주도 인구의
무려 1/3 가까이 죽은 적이 있었다.
대기근때 굶어죽은
아사자들의 시신에서
제주 전역에 번진 전염병.
이때 자신의 전재산을 털어
도민을 위해 긍휼미를 내놓은
김만덕 객주의 미담이 전해온다.
빌레못 동굴
....................빌레못동굴............................
제주 어음리 빌레못동굴은 어음리 산중턱에 위치.
동굴 주위에 두 개의 연못이 있어서, 평평한 암반을
뜻하는 빌레라는 제주도 말과 연못의 못이 합쳐져
‘빌레못’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총길이는 11,749m로 세계 최장 동굴.
미로가 매우 많으며. 화산활동에 의해
7∼8만년 전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동굴 안에는 높이 28cm의 규산주
(규소와 산소·수소의 화합물 기둥)와
길이 7m·높이 2.5m 공모양으로 굳은 용암.
땅에서 돌출되어 올라온 높이 68cm
용암석순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것.
또한 동굴의 벽면에는 용암이 냉각되면서
밑으로 밀려내려온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빌레못동굴은 세계적인 용암동굴로
동굴 생성 흔적을 다양하게 보여준다.
대륙에서 서식하는 황금곰의 화석이
발견되는 등 학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이는 제주도가 원래 섬이 아니라
대륙과 연결되었다는 사실을 대변.
현재 빌레못동굴은 동굴 생성물 등의
보호를 위해 공개제한지역으로 지정
관리 및 학술 목적 등으로 출입하고자
할때에는 문화재청장 허가를 받아 출입.
4.3 사건 당시 학살지로도 알려져 있는데,
동굴에 깊이 숨어 양식을 구하지 못한 채
굶어죽은 모녀가 있는가 하면, 동굴에 숨은
사람들이 토벌대에 발각당해 끌려나오는 과정에서
난민 일행 가운데 강규남, 송시영의 서너살 남짓 된
아들들을 경찰이 그 다리를 잡아들고는 바위에 거꾸로
메쳐 죽였다고 증언하였다.
끌려나온 주민들은
대부분 토벌대에 폭도로 몰려
일흔 다섯의 노인부터 세 살 된
어린아이까지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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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 고려해양세력을 숙청 직후
조선술 항해술이 절실하게 필요했기에
한강 밤섬으로 이주한 제주민들이 많았다.
그러나, 육지 사람들과 풍습이 달라
섬과 섬을 떠돌며 배위에서 생활하는
선상족 생활을 영위하는 무리도 많았다.
농민에게는 논밭이 삶의 터전
어민에게는 어장이 삶이 터전.
조기가 철 따라 어장이 바뀌듯
어민도 철따라 어장을 따라간다.
그러므로, 어민에게는
파시 어장이 삶의 터전.
임진왜란 당시 어민들을 모아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충무공,
조선시대 조운선 뱃사람들도 이들.
조운선 세곡을 턴 해적들도
흉년에 굶주렸던 이들이었다.
.................조선시대 최대 조선소.,밤섬....................
고려 말, '서강(西江)의 하중도' 여의도 곁 밤섬은 귀양지.
도선장은 백사장 건너 영등포~인천 行.,간로<동국여지비고>
'고려 말 귀양지' 밤섬의 출입 도선장 위치는 영등포 방향.,여의도.
홍수 때마다 서강(西江) 한가운데 고립되는 곳.
고려 말까지 귀양지로 적격이던.,잉화도(仍火島).
창살 없는 감옥이었던.,잉화도(인할 仍, 불 火, 섬 島).
조수 간만의 차이로
바닷물이 들락거리고
갈대밭이 우거졌던.,밤섬.
조선 건국 직후에 고려세력을 모두 숙청
조선술이 단절된 조선 조정은 배를 만드는
기술자들 모집, 한강 밤섬에 집단 정착시킨 것.
조선 초, 배 만드는 기술자들이 정착한.,밤섬 마을.
조선시대 배를 만들고 수리하는 공장이 10 여 군데.
개성에서 한양 천도 할때 배만드는 기술자들도 이주.
인(印), 판(判), 마(馬), 석(石), 성(成)씨 등
8도 각지에서 서해와 한강을 내다보고 조선업을
일으킬 희망을 안고 모여든 희성들의 집단 씨족마을.
배를 만드는 기술이 뛰어나
한강 상류로는 단양 영월까지
한강 하류로는 서해 강화도까지
배를 주문하는 사람들이 찾아왔다.
조선 초 한강을 오고가는 배들은
거의 대부분 밤섬에서 만들어졌고
황해도에서도 찾아와 배를 주문했다.
조선시대 대중교통수단.,나룻배.
양반에게 풍류의 대상인.,뱃놀이 배
8도 세곡 소금을 걷어 나르는 조운선 등.
1421년 1월 22일 세종 때 예조 예빈시 보고서.
"양, 돼지, 닭, 오리, 당기러기 등 국영 말목장을
훙제원동 수연(水硯)과 잉화도에서 나누어 길렀다."
"마음을 써서 먹여 기르지 아니하므로
양과 돼지가 날로 파리하므로 수초 좋은 곳에
전구서 전례에 의하여 관청을 짓고 에빈시 관리를 두어
나누어 감독하여 기르게 하소서." 하니 왕이 그대로 따랐다.
1472년 10월 15일 호조에서 (성종) 왕에게 아뢰기를
"이전에는 '전생서'의 염소를 반은 잉화도에 놓아 길렀으나
금년은 홍수로 섬 전체가 모래로 덮여 염소에게 먹일 풀이 없으니
무성할 때까지 본사(本司)에 합쳐 기르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556년 4월 4일 간원이 아뢰기를
"잉화도는 양화진과 율도 사이에 있는
별도의 구역으로 조종조 때부터 돼지와 양을
방목해 가축을 기르는 목장으로 만들어 왔던.,섬.
"'전생서'와 '사축서' 관원으로 하여금 관장해 와
그 전복들이 관원에게 지공할 가축을 기르기 위하여
그 섬에 집을 짓고 살고 있는데 족친끼리 서로 혼인하고
홀아비와 과부가 있으면 마음내키는대로 같이 살고 있습니다."
잉화도 출입을 위해 샛강을 건널때 깊으면 예사로 벗고
얕은 곳에서도 벗은채 남자는 끌고 여자는 붙들고 가는데
그들의 추잡한 행실은 오로지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섬의 인가를 모두 철거 이주시키고
관원에게 제공하는 것과 가축을 기르는 일은
일체 남자가 하게하여 추잡한 폐단을 근절 시키소서."
1788년 10월 16일 한성부가 아뢰기를
"북부(北部) 아현계, 세교리 (1계, 2계)
연희궁계, 가좌동(1계 2계).성산리계, 수색리계
휴암리계, 여화도계를 하나의 방으로 만들었읍니다."
.....................................................................
옛부터 왜구침입과 수탈이 잦았던.,제주.
생리현상을 해소할 때도 방심할 수 없기에
주위를 살피며 볼일보며 망보는 관습이 있다.
아울러, 뒷간 안에
돼지를 키우는 관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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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암이 지하에서 흘러가며
지나간 빈자리에 만들어진 동굴.
제주에는 이런 유형의 동굴이 많다.
하멜 표류기(漂流記)
조선 후기 네덜란드인
하멜(Hamel, Hendrik)이
조선억류 생활을 기록한 책.
‘난선제주도난파기
(蘭船濟州島難破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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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관한 서양인 최초의 저술.
그당시 유럽인들의 이목을 끌었다.
1653년(효종 4) 네덜란드 무역선
스페르베르(Sperwer)호, 영어로는
스페로 호크(Sparrow Hawk)호가
심한 풍랑으로 난파되어 제주 표류.
선원 64명 중 36명이 중상을 입은 채
제주도의 대정현(大靜縣)차귀진(遮歸鎭)
아래 대야수(大也水) 연변에 상륙했던 사건.
그들은 체포되어 13년 28일 동안 억류 후,
8명이 탈출해 귀국했는데, 귀국선의 서기인
하멜이 한국에서 억류 생활을 하는 동안에
보고 듣고 느낀 사실을 기록한 책이다.
저자는 예리하고 세밀한 관찰을 통해
조선의 실상을 정확하고 충실하게 기록.
어떤 내용은 사실과 다른 사례 기록도 있다.
1653년 1월 10일 네덜란드를 떠난
포겔 스트루이스(Vogel Struuijs)호는
6월 1일 자바섬 바다비아(Badavia)에 도착.
선원들은 그 곳에서
며칠간 휴식을 취한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총독 명령에 따라 스페르베르호로
대만 안핑[安平]으로 향발, 6월 14일 도착.
이들의 주요 임무는
대만의 신임 총독으로
부임하는 네덜란드인
레세르(Lesser, C.)를
임지로 데려다주는 일.
임무가 끝나자 다시 대만에서
일본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7월 30일 나가사키를 향해 출항.
그러나
풍랑이 심해
8월 11일까지도
스페르베르호는
대만 해협을 빠져
나오지 못했다.
8월 15일 풍랑은 더욱 심해
선미(船尾)의 관망대가 떨어져
나갔고, 탈출용 작은 배도 잃어버렸다.
배 안에 물이 스며들어
어찌할 수 없게 되자,
선원들은 짐과 돛대마저
버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때 한 선원이
육지가 보인다고
외쳤는데 그 곳이
바로 제주도 남해안.
정박을 시도했으나
혹심한 풍랑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는 사이,
거대한 파도가 거듭 선창으로
밀려들어 드디어 스페르베르호는
난파되고 말았다.
64명 가운데
28명은 익사하고,
생존자 36명은 서울로 호송.
서울에서 2년간 억류 생활
1656년 3월 전라도로 옮겨졌다.
그동안 14명이 죽고, 다시 1663년
생존자 22명은 여수·남원·순천으로
분산, 수용되어 잡역에 종사하면서
길고긴 고난의 억류 생활을 계속했는데,
어느 때는 구걸에 나서기도 하였다.
1628년(인조 6)에 표류한 같은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이
Weltevree, 朴燕(박연)를
만났으나 동포를 만난
감격도 잠시일 뿐
고통스러운 생활은
계속되었다.
하멜이 억류 생활을 한 곳은
전라도 여수 좌수영이었다.
다행히 작은 배 한척을 마련해
먹을 것을 구하느라 부근의 섬들을
내왕하면서 조수·풍향 등을 알게 되었다.
탈출 직전까지의
억류 생존자수는
모두 16명이었다.
탈출 비밀이 탄로날까
두려워 전원이 탈출하지 못하고
8명만이 1666년(현종 7) 9월 4일
야음을 틈타 탈출에 성공,
일본의 나가사키를 경유해
1668년 7월 암스테르담에 귀환.
탈출에 가담하지 않았던
나머지 8명도 2년 후
조선 정부의 인도적인
배려로 석방,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책에는 이들의 귀환 사실을 쓰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에서 끝내 죽은 줄로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책은 1668년 암스테르담에서
3개 출판사에 의해 동시에 출간
이때 하멜은 13년 밀린 봉급을
동인도회사에 요구하느라 미처
고국에 돌아오기 전의 일이었다.
『하멜표류기』
정본(正本)은 1920년
회팅크(Hoetink, B.)에
의해 발간되었다.
정본의 내용 구성을 보면,
제1부는 난파와 표류에 관한 기술,
제2부는 「조선왕국기(朝鮮王國記)」
제2부는 한국의 지리·풍토·산물·정치·군사·
풍속·종교·교육·교역 등을 소개하고 있다.
책의 저자가 거의 14년 동안
군역·감금·태형(笞刑)·유형(流刑)·
구걸 등의 모진 풍상을 겪으면서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 접촉을 하였고,
남북의 여러 지역을 끌려 다니면서 당시
풍물과 풍속에 대한 사정을 관찰할 수 있어
우리나라에 대한 깊은 인상과 풍부한 경험을
잘 살려 기록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따라서, 한국에 대한 이해가
그다지 깊지 않았던 서양 사회에
한국을 알리는 최초의 저서로서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책은 프랑스·영국·독일 등
서양의 많은 나라들이
다투어 번역, 간행.
.
우리나라에서도
1934년『진단학보』
1∼3호에 이병도(李丙燾)가
영역본(英譯本)·불역본(佛譯本)을
저본으로 번역, 전재했다.
그 뒤 『하멜표류기』가
일조각(一潮閣)에서
1954년에 간행되었고,
일본에서는
1961년이쿠타[生田滋]가
『조선유수기(朝鮮幽囚記)』라는
제목으로 번역, 간행했다.
1980년 10월 12일
한국과 네덜란드 양국은
우호 증진을 위해 각각 1만 달러씩을
출연해 난파상륙 지점으로 추정되는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산방산
해안 언덕에 높이 4m,너비 6.6m
하멜기념비를 세웠다.
...............
...............
2005년 4월 12일(?) - 세월호.
한라산 등산을 알뜰하게 다녀오기
인천국제무역항 ~제주항 ~백록담~인천
56세때 오랜 지인들과 여행 겸 산행계획.
빠르고 편한 비행기가 물론 제일 좋겠지만
세월호 선실에서 지인들과 마냥 나눴던 담소
,
선실에서 오가는 술잔에 설렘으로 지새운 밤.
졸렸다면 꿈속에서 제주에 도착해도 좋았을듯.
배가 워낙 크다가 보니 나이트 클럽이 있을 정도.
레스토랑 겸
생맥주집 겸
나이트클럽 겸
.
2박 3일 일정으로
한라산을 다녀왔는데
여객선 요금은 9만9천원.
잠자리는 호텔 수준이었다.
'세월호
갚판에서
맞이하는 밤.
은하수 & 일출.'
출발 : 매주 월.수.금 18 :00
인천 연안부두 여객터미날.
요금 : 99.000원(배삯, 입장료,
전용버스비, 도시락, 여행자 보험)
10인 이상 단체 우대.
(등산 안하면, 제주도
1일 자유관광도 가능)
첫날 18 :30 - 오하마나호
승선수속, 숙소배정,19시 출발
둘째날
06시 선상 일출
08 :00 제주 도착
09 :00 성판악 도착.
11 :00 사라악 약수터
13 :00 백록담
17 :00 관음사.
19 :30 제주항 면세점 & 승선
20 :00 제주 출발
셋째날
09:00 인천항
도착 & 각자 해산.
.................다녀 온 일정.................
첫 날 : 19:30 인천 국제여객터미널 출항 (1박)
둘째 날 : 08:30분 제주항- 성판악 - 한라산 - 관음사
7 ~8시간 산행 후 19:30분 제주항에서 출항 (2박)
셋째 날 : 08:30분 인천 항구에 도착후 해산.
<성판악 코스>가 벅차면
<영실 코스> 선택도 바람직.
.....................................
성판악은 진달래 대피소에서
12시 정각에 정상 등정을 통제.
관음사 하산 코스 아름답지만
대부분 체력 열세로 정상 포기.
성판악 코스는 함께 동행한
절반 이상이 중도에 정상을 포기
지루한 관음사 코스로 다시 돌아갔다.
한라산 정상까지 올랐으면,
관음사 코스로 하산이 바람직.
영실 코스 : 왕복 4시간 충분.
여유롭게 산행하기 적당하다.
영실 - 병풍바위 - 노루샘
- 웃세오름 (도보 1시간 30분 )
백록담까지 연결되지 않지만
제주 주민들이 적극 추천한다.
등산 경험이 많지 않은 사람은
영실 코스를 선택하는 것이 좋다.
왕복 총소요 비용 : 총 99,000원
(배삯, 도시락 &식수 1개, 대기차량)
우선 승선하면., 19:30분
저녁시간이라 배속이 출출.
배안 식당에서 파는
<부페식 한식 5,000 원>.
레스토랑
생맥주 500cc
2500원 안주 다양.
갖고 간 소주는
레스토랑에서
마셔도 무방.
레스토랑은
저녁 후 노래방으로..
밤이 점점 더 깊어갈수록
나이트 클럽 수준으로 변모.
100m 길이 유람선
갑판은., 산책 트랙.
일몰 일출 감상하기 적당.
연인들 데이트 장소로도 적당.
'타이타닉 러브 포즈' 가능한 곳.
샤워 실은 저녁 늦게, 아침 일찍 가능.
배 안에 기대못했던 공동탕이 좋았다.
여자 화장실은 오전 07:00부터 밀리는 편.
그래서
가급적이면
좀 더 일찌기
사용할수록 좋다.
.
배안에 침구가 있다.
침대열차 수준부터 호텔급.
선실에는 슬리퍼도 놓여 있다.
배낭은 가벼울수록 좋다.
점심 도시락 & 생수 배에서 줌.
밥 1+ 반찬 1 = 푸짐하고 우수함.
성판악 코스는 서둘러 출발이 관건.
배에서 내리자 마자 대기 버스 탑승.
정상 2/3 지점에 사람 샘에서 물 보충.
한라산 정상이 식사하기 좋다.
백록담 보며 먹으면 더 맛있다.
'정상 ~관음사' 코스.,비경 연속.
겁 먹고 성판악으로 돌아가면 후회.
배시간 놓칠까 걱정은 쓸데없는 기우.
제주항 식당에서 저녁식사
승선 전에 면세품 쇼핑 가능.
국제공항 수준
면세점에 들러
이것 저것 눈요기.
시중 2만원 담배 한보루
면세점 가격은 만 5천원.
제주식당에서 떠온 회안주로
유람선 배안 식당에서 술 한잔.
한잠 푹 자고나서
일출감상을 한후에
아침에 인천항 도착.
배 길이 130 m 규모.
배멀미 걱정은.,기우.
....................................
인천 국제 여객 터미널
찾아가는 대중교통 수단.
.....................................
합정역 또는 신촌역
인천 여객 터미날 행
합정역에서 30분 소요.
지하철 동인천역에서
12번 24번 버스를 타고
1시간 30분쯤 소요거리
..............백록담 전설 -1 ..................
태평양 기압골 운무에 쌓인 백록담(白鹿潭)
둘레 1.7㎞, 화구호 깊이 110m, 넓이 약 6만평.
'흰사슴이 살았다는 호수'라는 전설이 있어 백록담.
'은하수 (漢)'를
손에 '잡을(拏)' 듯
높은 산(山)'.,뜻 지명
.
옛날에 사냥꾼이
흰 사슴을 향해
활시위를 당겼는데
빗나간 화살이 엉덩이에
맞자 화가 났던.,옥황상제.
한라산 정상
봉우리를 뽑아
사냥꾼에게 던졌다.
.
그것도 빗나가 바닷가로
날아가 산방 산이 되었고
봉우리 뽑힌 자리는 백록담.
....................................
산방산은 75만년 전
백록담은 2만 5천년 전에
바다에서 화산폭팔로 솟았다.
.................백록담 전설 - 2................
옥황상제 신임이 두터웠던 산지기 산신령.
그곳 호수는 선녀들이 목욕할때 만 금남성역.
어느날, 선녀들 목욕 끝날 시간에 맞춰간 산신령.
그는 그곳에서 혼자 남아 목욕하는
선녀의 미모에 넋잃고 사랑에 빠진다.
그로부터 그 선녀가 목욕할 때면
몰래 훔쳐보며 홀로 애태운 산신령.
결국, 옥황상제 노여움을 산 산신령.
목욕하는 선녀를
몰래 훔쳐본 죄로
흰 사슴이 되었단다.
흰사슴이 된 산신령은
그후에도 호수가를 맴돌며
오지 않는 선녀를 기다리다가
사냥꾼이 쏜 화살에 맞아 숨졌다.
흰사슴이 죽어가며 흘린 피자국마다
분화구 진달래 꽃 되어 그 혼이 해마다
그리움을 호소하듯이 5월이면 피어난단다.
그 흰사슴이 살았던
곳이라 하여 백록담
이라 부른다고 전한다.
...............................
목포 - 제주 간
배 이용시 KTX 승차권
소지자에 한해서 30% 할인
배 승선권을
가져올 경우애
KTX 25% 할인.
세월호 침몰 사건이 발생한 이후에
'인천 ~제주' 화물선 운항은 되지만
같은 항로의 여객선 운항은 끊어졌다.
우리나라 해운업의 미래를 위해서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듯..
과거, 해운사고를 일으킨
청해진해운의 범죄사실을
두둔할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그 대안이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단죄가 끝난 이후
그 공백을 메꿀 만한
대안이 없다는 사실이.,
2005년 4월에 '인천 ~제주' 여객선 운항 뱃길로
한라산을 다녀왔던 추억이 아득한 조선시대 같다.
'인천 ~제주' 여객선 뱃길이 끊긴 것이 바람직할까?
어떠한 형태로라도
'인천 ~ 제주' 여객선
운항 뱃길은 열려야할듯.
현재, 국내 해운산업은
침체상황에 빠져 있지만
이 위기를 기회로 삼으려면
희망의 끈을 놓아서 안되기 때문.
기회는 준비된 자 만이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한반도는
삼면이 바다이면서
미래 태평양 전진기지.
..............
..............
제주도는 한라산이 곧 제주도라 할 수 있다.
한라산(1,947.269m)은 남한에서 제일 높다.
옛부터 전설상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다.
한(漢).,은하수(銀河水)
라(拏).,맞당길 나(相牽引)
혹은 잡을 나(捕).,漢拏山.
'은하수를
잡아당길 수
있다.' 뜻 지명.
한라산은 예로부터
부악(釜嶽)·원산(圓山)·
진산(鎭山)·선산(仙山)·
두무악(頭無嶽)·영주산瀛洲山)·
부라산(浮羅山)·혈망봉(穴望峰)·
여장군(女將軍) 등으로 불려왔다.
전설 상, 삼신산(三神山)의 하나.
산 정상에 오르면 멀리 남쪽 하늘에 있는
노인성(老人星)을 볼 수 있었으며, 이 별을
본 사람은 장수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원산이라는 이름은 산의 중앙이 제일 높아
무지개 모양으로 둥글고, 사방 주위가 아래로
차차 낮아져 원뿔 모양을 이루기 때문에 붙여졌다.
맑은 날 해남이나
진도에서 한라산을 바라보면
한라산 전체가 완만한 원뿔로 보인다.
진산이란 보통 도읍 뒤에 위치해
그 지방을 지켜주는 의미를 가진다.
한라산을 진산이라고 불렀던 까닭은
한반도로 밀려오는 남태평양 큰 바람을
막아주어 한반도의 안녕을 지켜 주기 때문.
두무악이란
머리가 없는
산을 의미한다.
,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 한 사냥꾼이 산에서
사냥을 하다가 잘못하여 활끝으로 천제(天帝)의
배꼽을 건드렸는데, 이에 화가 난 천제가 한라산
꼭대기를 뽑아 멀리 던져 버렸다는 전설이 전한다.
이 산정부가 던져진 곳은
지금의 산방산(山房山)이며,
뽑혀 움푹팬 곳 백록담(白鹿潭).
영주산이란 중국 『사기(史記)』에서 유래.
바다 가운데에 봉래(蓬萊)·방장(方丈)·영주 등
삼신산이 있는데, 그곳에는 불로불사(不老不死)
약초가 있어 신선들이 산다는데 진시황(秦始皇)은
기원전 200년경 역사(力士) 서불(徐市)에게
그 약초를 구해 오도록 명하였다고 한다.
부악이란 산정의 깊고 넓은 분화구가
연못으로 되어 있어 마치 솥[釜]에 물을
담아 놓은 것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이 연못은 성록(聖鹿) 흰사슴이
물을 마시는 곳이라 하여 백록담.
『세조실록』에 의하면
1464년(세조 10) 2월에
제주에서 흰 사슴을 헌납
"濟州獻白鹿" 기록이 있다.
정조 연간에 간행된 읍지에 의하면,
한라산을 등산하는 데는 대정현 쪽으로
험한 산길이 하나 있어 사람들이 이를 따라
수목 사이를 헤치며 올라가는데, 위에서
소란을 피우면 곧 운무가 사방을 덮어
지척을 분간하지 못하였다 한다.
또한, 5월에도 눈이 남아 있어
얼음이 필요하면 산에 올라가서
가죽 부대로 운반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녹담만설(鹿潭晩雪)
제주 10경 중의 하나이다.
한라산은 신령스러운 산이라 하여
조정에서 해마다 산정에서 국태민안
산제(山祭)를 지냈는데, 백성들이 동사.
이에 1469년(예종 1)
목사 이약동(李約東)은
지금의 산천단(山泉壇)에
산신묘를 세우고 이곳에서
산제를 지내도록 하여 그
석단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한라산은 약 360개 측화산(側火山)
정상부의 백록담, 해안지대의 폭포.
주상절리(柱狀節理: 다각형 기둥모양)
등의 화산지형, 난대성기후의 희귀식물 및
고도에 따른 식생대변화 등 남국적인 정서를
짙게 풍겨 세계적인 관광자원을 갖추고 있다.
1970년 한라산국립공원으로 지정.
제주시 애월읍 어음리 빌레못동굴유적
긁개·첨기·홈날석기·돌날 등의 타제석기와
갈색곰·순록 등의 화석과 뼈가 발견되었다.
조천읍 북촌리유적에서
삼각형 점렬(點列)무늬토기
원형 점렬무늬토기가 발견되어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청동기시대
무문토기는
전역에서 발견,
고인돌· 옹관묘·
석곽묘·공렬토기
(孔列土器) 등 발견.
삼성신화(三姓神話)
고(高)·양(良)·부(夫) 3신이
모흥혈(삼성혈, 사적 제134호)에서
나와 자손들을 번창하게 하였으며,
그뒤 고을나(高乙那)의 15세 손이
신라에 내조(來朝)했다 전한다.
고려 후기에는 삼별초(三別抄)가
여몽연합군에 밀려 들어와., 분전
항파두리(缸坡頭里)에서 패하였다.
.
'제주에서 군마는
사실(史實) 상으로
언제부터 사육된걸까?'
.
원나라는 1276년(충렬왕 2)에
몽고말 160필을 들여와 성산읍
수산평(水山坪)에 방목하였고,
말사육 전문가인 목호(牧胡)를
파견하여 직접 관리하였다.
제주도 목장은
조선 시대에까지
이어졌으며 성종 때
100개로 정리되었다.
이 지역은 자연경관과
식물에 관련한 천연기념물과
기념물은 많으나 사적문화재는 빈약.
사찰로는
관음사(觀音寺)·
천왕사(天王寺)·
산방산사(山房山寺) 등
..........
..........
.
제주도민들은 11세기 초에 두 차례
한라산의 화산 폭발로 많은 희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그러한
한라산을 버리지는 못하였다.
화산 폭발 때마다
동굴에 숨거나 잠시
테우(배)를 타고 바다로
피신하였을지언정 그들 스스로
이곳에서의 삶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고난의 역사는
재해뿐만 아니라 인위적인
여건에 의해서도 끊일줄 몰랐다.
몽고의 야만적인
지배생활이 그랬으며,
근세 조선시대 일부 파견
관리 수탈에 시달림 받았다.
그러나,
제주도민들은 이러한 악조건을
오히려 이들에게 내핍과 인고 정신을
심어주는 좋은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타고난 강인함과 근면성 앞에는
어떤 도전도 용납되지 않았던 것.
영산(靈山)인 한라산은
척박한 땅을 주었지만,
정직하고 순박하며
의롭게 살면 마음이
풍요롭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
삼무정신(三無精神).
삼무란
도둑이 없고(盜無),
대문이 없으며(大門無),
거지가 없다(乞無)는 것이다.
도무는
정의 정신,
대문무는
상호 신뢰 정신.
걸무는
어떤 고난이 닥치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부지런하게
살아가는 근면정신을 가리킨다.
제주도민 정신적 지주로서
지켜온 미풍양속 삼무정신,
즉 근면·자조·협동의 정신은
새마을정신의 모체가 되었다.
원나라가 고려 침입때
삼별초를 이끈 김통정(金通精)이
항파두리전투에서 패하고 붉은오름의
싸움에서 전우들을 모두 잃자 산 위로 올라
비분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자결했다고 전한다.
그런가 하면
제주도에서는
유난히도 민란이
역사적으로 많았다.
1168년(의종 22) 양수(良守)의 난.
모두 20여 차례의 민란이 있었으며,
역사적으로 왜구 침입도 빈번하였다.
.
남한의 최고봉인 한라산은
내륙 지방에 대한 바람막이.
'영남과 호남의 곡창지대'는
한라산이 태풍의 방파제 구실.
만약, 한라산이 없다면
이 지역 벼농사는 큰 타격.
한라산은 제주민들 만의 산이 아닌
우리나라 민족의 산으로 정착되었다.
금강산·지리산과 함께 삼신산의 하나.
한말 최익현(崔益鉉)은
삶의 자세를 산행에 비유.
1875년(고종 12) 3월
그의 한라산 등반기록
『한라산기(漢拏山記)』
“산은 도중에서 포기하면
그로 말미암아 뜻을 이룰 수
없게 되는 것이므로, 인간은
좀 더 태연하고 신중해야 한다.”
당시 그와 함께 산행에 오른
15명 중에 정상 등정자는 4명.
.
선조 7남 인성군(仁城君)의
셋째 아들인 이건(李健)이 쓴
『제주풍토기(濟州風土記)』
“한라산에는 곰·호랑이·이리
등과 같은 짐승은 없고, 소나
말이 잘 자라며, 사슴이 놀라울
정도로 번식하고 있다.”
“삼복더위에도 한라산 정상에는
얼음과 눈이 남아 있어 해마다
여름철이면 장정들을 모아
얼음을 날라다 관가에
공물로 바쳤다.”
이건은 1628년(인조 6)
인성군이 광해군의 복위에
가담하였다 하여 전라도
진도(珍島)로 유배되면서
그 자신은 제주에 귀양 와
8년간 유배 생활을 하였는데,
한라산의 모습 등을
풍토기에 남겼다.
한라산을 소재로 한
고전문학이란 대부분이
기행문 형태이며, 그것도
유배인들에 의한 것이 대부분.
그들은 한결같이
한라산의 오묘함과
지리·동물 분포·풍속
등을 생생하게 기록.
유배인이었던 임관주(任觀周)
한라산의 모습은 신비로움의 극치.
1767년(영조 43) 귀양에서 풀려나
돌아가게 되자 한라산에 올라
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였다.
茫茫滄海濶
上擧漢拏浮
白鹿仙人待
今登上之頭
“푸른 바다는 넓고 넓어 아득한데/
한라산은 그 위에 떠 있네/
흰 사슴과 신선이 기다리는/
이제야 그 상봉에 올랐네
현중식(玄重植)의 한시
〈한라산〉에 나타난
한라산의 모습 또한
매우 인상적이다.
徐子當年曾過去
白雲千載獨浮閒
登登若得到危頂
咫尺銀河坐可攀
“서씨(徐氏)는 먼 옛날
이 산그늘을 일찍 지나갔고/
오랜 세월이 되도록 흰 구름
높이 떠 홀로 한가로운데/
오르고 또 올라 그 숭엄한
정상에 다다르면/지척 은하를
앉아서 어루만지겠구나.
불로장생초를 캐기 위하여
한라산에 왔던 진시황의 신하
서불의 행적과 함께 산이 높고
숭고하다는 것을 실감 있게 묘사.
한라산의 모습은 현대문학,
특히 시를 통하여 잘 나타난다.
이은상(李殷相)은 일제의 압박이
심해지던 1937년에 「한라산기도」
라는 시를 통하여 우리 민족의
염원인 광복과 평화를 기원.
“천지의 대주재(大主宰)시여/
나는 지금 두 팔을 들고/
당신이 내리시는 뜻을/
받들려 하나이다/
아끼지 마시옵소서/
자비하신 말씀을……”
“아름답다. 신비하다.
저 한라산. 저 제주도.
뉘가 여기 이 같은
절해운도(絶海雲濤) 속에
한덩이의 땅을 던져
해중선부(海中仙府)를
만드셨나.” 하고 칭송.
이효상(李孝祥)
「한라산」
'한라산을 항상
백두산과 마주서서
묵묵히 이 나라를
지켜오는 자(者)로 표현,
언제나 구름 위에 서서
직접 하느님과
단둘이 속삭인다.
서정주(徐廷柱)
한라산 산신여인상(山神女印象)」
“그네 나이는 구백억세/
그 자디잔 구백억개
산도화빛 이쁜 주름살속에/
나는 흡수되어 딩굴어 내려가다. ”
제주도민들에게 있어
한라산은 정신적 지주
詩心을 일으키는 구심체.
이 밖에도 한라산을 소재로
시를 쓴 시인들로는 고은(高銀)·
정지용(鄭芝溶)·김대현(金大炫)·
조병화(趙炳華)·이영걸(李永傑)·
양중해(梁重海)·김시태(金時泰)·
강통원(姜通源)·문충성(文忠誠)·
한기팔(韓箕八) 등이 있다.
문인들은 한라산을 통하여
애향심뿐만 아니라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데에 충실하였다.
그것은 잦았던 민란과
일제의 압정에 이어
4·3사건과 6·25로
이어지는
역사의 소용돌이
자유와 평화가
무엇이라는 것을
체험을 통하여 터득.
그래서 문인들은 이 산을
‘고향’·‘젊음’·‘순결’·‘침묵’의
산으로 칭송하였다.
어느 작가는 "한라산은
식물의 보고(寶庫)로서
신의 은총에 의하여
탄생된 것이 분명."
한라산은 자체가
한 폭의 걸작이다.
녹담만설·
영실기암(靈室奇巖)·
탐라계곡(耽羅溪谷)·
구구곡(九九谷)·
어리목계곡 등
한편
김정희(金正喜)
「세한도(歲寒圖)」
제주 미술의 근원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김정희는 1840년(헌종 6)에
제주에 유배되어 대정현을
적거지(謫居地)로 삼고 9년간
서화(書畵)뿐만 아니라 한시 등
문학에도 정진하여 독특한
서체의 경지를 개척하였다.
역사적으로
한라산 정통
산수 화가는
없었고, 오직
이름 없는 화가들이
그린 민화만이 있었을 뿐.
따라서 제주 미술의 발단은
6·25 후로 보는 견해가 많다.
미술의 불모지였던 제주도에
국내 저명 화가들이 전란을
피하여 들어오게 되었다.
홍종명(洪鍾鳴)·
장이석(張利錫)·
최영림(崔榮林)·
이중섭(李仲燮) 등
중앙 화단의 화가들이
이곳을 피난지로 잡아,
불과 1, 2년에 지나지 않는
체재 기간 속에서도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고,
그들 자신이 한라산 수려한
경관을 화폭에 담았다.
이에 앞서 일제 강점기에는
제주 출신의 김광추(金光秋)·
변시지(邊時志)·양인옥(梁寅玉)·
박태준(朴泰俊)·조영호(趙英豪)·
장희옥(張喜玉) 등이 일본에 유학
하여 미술을 수학하였다.
1950년대에 들어
조영호·장희옥·박태준·
김일근(金一根)·고성진(高成珍)
등은 중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이 밖에 1935년 선전(鮮展)에 입선한
김인지(金仁志)를 비롯한 현승배(玄承北)·
김보윤(金寶潤)·김창해(金昌海) 등도
이 고장의 미술 발전에 기여한 바 크다.
이후 1960년대에 들어
도외(道外) 화단과의
교류가 활발해지고
서울 등지에서
미술 교육을 받은
신진 화가들이
대거 귀향하게 되어
활기를 띠게 된다.
특히, 1970년대에 들어
제주도 미술계는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제주신문사가 1975년부터
해마다 미술전람회를 개최하여
작품 제작의 의욕을 고취하였으며,
지방 미술인을 대거 배출하는 계기.
제주도는 거친 바다와
박토를 유산으로 물려받아
힘든 노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노동요는
생활의 일부가 되어
풍성하게 전하여 내려온다.
“하루 종일 부르다봐도/
부를 노래 수없이 있다/
한라산이 내집이 되면/
부를 노래 다 불러볼까.”
많은 제주민들은
한라산이 닳고닳아서
한 칸의 집이 될 때쯤에야
노래를 다 부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한라산이
담겨 있는
민요로는
「산천초목」
·「오돌또기」
·「이야홍타령」
등이 있다.
「오돌또기」는 제주도의 대표적인
창민요(唱民謠)로 경쾌하고 구성지다.
“오돌또기·저기 춘향 논다/
달도 밝고/내가 머리로 갈꺼나
·……·한로산 허리엔/
시러미 익은숭 만숭/
서귀포 해녀는/
바당에 든숭 만숭(후렴).”
오돌또기는
예쁜 여인이
노는 모습을,
‘저기 춘향 논다’는
저기 예쁜 여인이
나타났다라는 뜻으로,
이렇게 달도 밝은데
내가 앞장서서
놀러나 갈까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야홍타령」도
「오돌또기」와 함께
제주민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이다. 이는 주로 여인들이
부르던 건전한 노동요이어서
리듬이 자유롭다. 「이야홍타령」은
한라산을 신선의 나라로, 또 말들이
살찌는 따뜻한 나라로 찬미하고 있다.
이와 함께 「산천초목」은
경복궁 중수 때 부역으로 간
제주도민들이 불렀던 노래로,
“흰 눈은 왜 내리나/
한라산 선녀들이/
춤을 추며 내려온다.”
눈을 한라산
선녀로 미화.
이렇듯 제주도 음악은
광복 전까지 민요 위주였으며
6·25까지도 현대 음악이 없었다.
6·25로 피난 온
바이올린의 계정식(桂貞植)과
성악의 김금환(金金煥) 등이
학교 교육을 통하여 후진 양성
미군소령 길버트(Gilbert,C.E.)가
여러 학교에 악기를 기증함으로써
비로소 현대 음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한라산을 소재로 한
노래는 없는 형편이고,
다만 각급 학교와 지방자치단체 등이
그 정기와 기상을 우러르는 내용을
교가와 시가 등에 포함하여 부르는 정도.
서복전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