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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9년 강수연,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여우주연상 수상
▲강수연(왼쪽) 주연의 ‘아제아제바라아제’의 한 장면.
영화배우 강수연이 1989년 7월 18일 폐막된 제16회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임권택 감독의 영화 ‘아제아제바라아제’로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작품상, 심사위원특별상, 주연여우상, 주연남우상 등 본상 4개 부문 중 하나인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따낸 강수연은 1987년 제44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 이어 두번째로 권위있는 국제영화제에서 주연상을 받았다.
강수연은 시상식에서 분홍빛이 도는 한복
을 입고 나와 “영화속에서 보다 실물이 훨
씬 더 아름답다”는 현지 기자들의 표현대
로 독특한 동양미를 과시했다.
모스크바 영화제는 영화예술의 발전과 국제적인 우호증진을 위해 1959년 창설
된 공산권 최대의 영화제이다.
행사기간은 매년 7월경이며 체코의 카를
로비바리 영화제와 격년제로 번갈아 연다.
시상부문은 대상, 심사위원 특별상, 남여
주연상 등 4개부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강수연에 이어 이덕화가 1993년 영화 ‘살어리랏다’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2009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제1회 만델라데이 공식 지정
➡️2004년 봉산탈춤 보유자 윤옥씨 별세
👉🏿 중요무형문화재 제17호 봉산탈춤 보유자인 윤옥 (尹玉·79)씨가 지난 18일 오후 9시 지병으로 별세했다.
황해도 봉산군 흥수 출신인 윤씨는 1942년부터 아버지 윤창석씨로부터 봉산탈춤을 사사했으며, 1970년 봉산탈춤의 상좌무·돌머리집·목중 역의 예능보유자로 인정된 뒤 미국·일본·유럽·홍콩·대만 등에서 순회공연을 했다.
➡️2004년 연쇄살인범 ‘묻지마 살인’ 유영철 검거
👉🏿2004년 7월 18일 서울지역 부유층 노인들을 살해하고 전화방과 출장마사지 일을 하는 여성 등 모두 19명을 무차별 살해한 유영철(34)이 구속됐다. 유영철은 경찰에서 자신의 범행이 우리 사회의 부유층과 여성에 대한 증오감 때문이라고 진술했다.
그는 지난 2002년 절도죄로 수감 중 출장마사지 일을 하던 부인에게 일방적으로 이혼을 당한 후 가진 것이 없어서 아내가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해 부유층 노인들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 이후 전처와 애인의 직업과 똑같은 출장마사지 여성들을 겨냥했다.
유영철의 연쇄살인은 2003년 9월 24일 처음 시작됐으며 지난 15일 새벽 서울 노고산동 그랜드마트 뒷골목에서 만난 출장마사지 여성과 접촉을 시도하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긴급체포됐다.
➡️2002년 5천억원 규모의 삼성 이건희 장학재단 설립 발표
👉🏿 삼성그룹과 이건희(李健熙) 회장·이재용(李在鎔)씨 부자(父子)가 매년 200억원을 장학금으로 지급하는 총 5000억원 규모의 국내 최대 장학재단을 설립한다. 이 장학 재단이 매년 지급할 장학금은 서울대학교 공대 석사 1~2학년생 전원(1567명)의 2년치 등록금(148억원)보다 많은 액수다.
삼성은 18일 “매년 해외 유명 대학·대학원 유학생 100명씩을 선발, 1인당 5만달러(미국 유학생 기준)씩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하는 ‘삼성 이건희 장학재단’을 8월 중 설립한다”고 발표했다.
이를 위해 이건희 회장이 800억원,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보가 700억원 등 1500억원 규모의 삼성전자 주식을 기금으로 출연해 장학 재단을 출범시키고, 내년부터 2005년까지 삼성그룹 계열사가 3500억원을 추가 출연, 총 5000억원의 재단 장학기금을 조성할 계획이다.
삼성은 올해 8월 중 장학생 공모에 들어가 오는 9월 중 1기 장학생 100명을 선발하며, 내년부터는 해외 대학 입학이 결정되는 매년 3~4월에 100명씩 선발할 계획이다. 대상자는 이공계를 중심으로 미래 전략사업 분야인 생명공학을 비롯, 인문·사회·자연 계열 등 전 분야에서 학부(25명)·석사(50명)·박사(25명) 과정 장학생을 뽑을 계획이다.
삼성은 공정한 장학생 선발을 위해 외부 전문가 4~5명을 장학생 선발위원으로 위촉할 계획이며, 장학생으로 선발된 학생에게는 ‘삼성 계열사 근무’ 조건 없이 장학금을 지급한다.
지금까지 국내 최대 기금 규모의 장학재단은 지난 4월 삼영화학그룹 이종환 회장이 3000억원 정도에 해당하는 부동산과 계열사의 자산, 현금 등을 출연한 ‘관정 이종환 교육재단’이었다.
➡️2000년 조세파 일로일로 피지 새 대통령 취임
➡️1996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제105차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 신임 IOC위원으로 임명
1995년 서울 #삼풍백화점_붕괴사고로 사망 418명ㆍ실종 246명ㆍ
부상 408명(단일사고로는 건국 이래 최대사고)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1994년 박홍 서강대 총장 주사파 발언
👉🏿 서강대 박홍 총장이 1994년 7월 18일 김영삼 대통령과 대학총장간의 청와대 오찬석상에서 "제한된 숫자이기는 하지만 주사파가 대학가에 깊이 침투해 있으며 주사파 뒤에 김정일이 있다"는 발언을 해 파문을 일으켰다. 이 발언은 그동안 땅속에 잠복해 있던 주사파 문제를 지상으로 끌어올려 놓았다.
특히 전남대 김일성 분향소 사건, 경상대 교재 이적성 논란 등 시국사건과 맞물려 뜨거운 공개논쟁으로 확산됐다. 박총장은 일련의 주사파 발언으로 학생과 재야세력의 거센 비판을 받았는가 하면 `뿌리깊은 좌경폭력학생운동에 대항하는 용기있는 지식인`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 논쟁은 김일성 사후 우리사회의 이념적 혼란을 정리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90년 윤보선 전(前) 대통령 별세
👉🏿 제4대 대통령이었던 윤보선 전 대통령이 1990년 7월 18일 서울 안국동 자택에서 별세했다. 93세였다. 윤 전 대통령은 지난 3월 30일 노환으로 서울대 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아오다 이날 오후 8시쯤 퇴원, 자택에 옮겨진 후 별세했다.
윤 전 대통령은 1897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나 일본 도쿄의 경응의숙 보통부와 속성학교인 정칙학교를 다니다 귀국, 20세가 되던 해에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30년 영국 에딘버러대학을 졸업했으며 1954년 5월 3대 총선때 민국당 소속으로 종로갑구에 출마해 원내에 진출했고, 1960년 4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됐다. 그는 5·16 으로 재임 1년8개월 만에 대통령직을 하야한 뒤 박정희정부와 오랜 세월 투쟁하는 등 야당정치인으로서 고난을 겪었으나, 정치인으로서의 성장과정은 순탄한 편이었다.
그의 정치적 컬러는 1962년의 대통령 하야를 분기점으로 확연히 구분된다. 1962년까지의 전반기는 영국신사같은 풍모처럼 온건, 합리주의적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 1970년대 후반까지는 강성민주투사로 다양한 투쟁을 전개했었다. 특히 1963년 하반기의 5대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후보에게 15만표차로 패배한 이후 ‘정신적 대통령’이란 유명한 말을 남기며 계속한 대(對) 박대통령 투쟁과정은 실로 험난한 것이었다.
➡️1986년 침몰한 타이타닉호 수중촬영에 성공
➡️1983년 중미 4국 긴급 정상회담
➡️1983년 일본 중의원 해산
➡️1983년 중국기 납치범 첫 공판
➡️1982년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 사망
➡️1982년 이디오피아 대 소말리아 침공으로 영토분쟁 재연
➡️1981년 폴란드 공산당, 동구권 최초의 직접 비밀투표서 카니아 제1서기 당선
➡️1976년 코마네치, 몬트리올올림픽에서 세계 체조사상 첫 10점 만점 기록
👉🏿 세기의'요정'!에서 공산당의 '노리개'로..
마침내 '역경'을 극복하다!
➡️1973년 미국, 남북한 유엔동시가입 지지 천명
➡️1970년 경북 고령 금산재서 버스 추락. 24명 사망, 44명 중경상
➡️1967년 박춘우 유괴살인 사건 발생
➡️1965년 송추에 무장간첩침투
➡️1963년 한미경제위원회(ECC) 신설협정 체결
➡️1963년 민주당 창당(총재 박순천)
➡️1962년 페루 쿠데타, 대통령 체포
➡️1956년 티토, 네루, 나세르 3자회담 (적극적 평화공존 제창)
➡️1955년 미국-영국-프랑스-소련 4국정상, 제네바회담
➡️1952년 중석불사건, 국회서 말썽 조사위 구성
➡️1949년 쿠바, 대한민국 정식 승인
➡️1944년 일본 도조(東條)내각 총사퇴
1938년 네덜란드의 영화 감독. 흔히 영어식 발음인
#폴_버호벤 으로도 많이 알려져있으며, 대표작으로 《스타십 트루퍼스》, 《토탈 리콜》《#원초적 본능》 등이 있다. - 파울 페르후번.
➡️1936년 스페인 내전 발발
➡️1925년 히틀러 ‘나의 투쟁’ 출간
👉🏿 히틀러는 1923년, 뮌헨 폭동 실패 뒤 교도소에 수감 되었지만 꽤 호화로운 생활을 한다. 맥주홀 폭동사건의 실패와 자신의 수감으로 당의 해체와 지지자들의 와해를 막고, 낙심한 당원들에게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자신의 철학과 세계관을 집대성한 서적을 출판하기로 결심했다.[1] 이 책은 히틀러가 직접 안 쓰고 수하인 루돌프 헤스를 시켜 받아쓰게 했다.[2] 헤스 뿐만 아니라 한프슈탱글등 나치당 내 식자층도 교정에 관여했다. 형이 출판업자였던 한프슈탱글은 형에게 나의투쟁 출판을 의뢰하러 갔다가 단칼에 거절을 겪었다고 한다. 초판 제목은 '거짓과 어리석음, 비겁함에 맞선 4년 반 동안의 투쟁(Viereinhalb Jahre des Kampfes gegen Lüge, Dummheit und Feigheit)'이었지만, 당시 프란츠 에어 출판사(Franz Eher Verlag)[3] 대표인 막스 아망(Max Amann)[4]이 '이렇게 제목이 길면 아무도 안 읽겠습니다.'라면서 딱 두 단어로 줄여 다시 낸 것이 바로 '나의 투쟁(Mein Kampf)'.
히틀러가 수감되었던 시절에는 판매량이 신통치 않았으나, 히틀러가 집권한 이후 판매율이 급상승했다. 그 가운데 실제로 나치즘에 경도해서 읽은 사람도 있었겠지만, 사회 분위기에 억지로 떠밀려 읽은 사람도 상당수였다라 전해진다. 심지어 신혼부부들이 결혼식을 올릴 때 의무적으로 1권씩 선물했으며, 이 책의 인세만으로도 히틀러는 막대한 수입을 얻었는데 인세 수입의 세금은 한 푼도 안 냈다고 한다.[5]
히틀러도 나중에는 그 책이 좀 창피했는지 집권 중반기에는 나의 투쟁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를 불편해했다고 한다. 특히 레벤스라움(게르만 생활권역)의 확대나 영국과의 동맹[6] 등 일개 당수로써 자유롭게 꺼낼 만했던 말들이 독일 총리로 취임한 뒤에는 구설수에 올라 그를 당혹스럽게 했던 점도 까닭이었다. 그는 집권한 뒤 "내가 총리를 맡을 줄 알았다면 그런 책은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라고도 했다.[7] 뒷날 두번째 책을 쓰려고 생각했고 프란츠 에어로부터 선인세도 400만 마르크나 받았으며, 1928년에 나의 투쟁 2부도 만들어 놨지만 출판하지 않았다. 먼젓번 책이 당 정책이랑 배치되는 내용으로 비웃음을 사고 히틀러도 이에 불만이었기 때문. 게다가 안 그래도 먼젓번 책에서 주장을 체계없이 늘어놓는 바람에 중간중간 논리 붕괴의 요소가 많았는데 2번째 책까지 나온다면 정적들이 공격할 보물단지 컬렉션으로 쓸까 봐 주저한 것 역시 원인이다. 일설에는 세번째 책까지 계획하고 구술까지 끝낸 상태였다고…
출처https://namu.wiki/w/%EB%82%98%EC%9D%98%20%ED%88%AC%EC%9F%81
1925년 한강인도교 최고수위 12.26m로 한강이 범람하여 철교가 유실.
➡️1921년 미국 최초의 지구궤도를 돈 우주비행사 글렌 출생
➡️1919년 경성 남산서 일본인의 신궁 세움
➡️1918년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 넬슨 만델라 출생
➡️1907년 대한자강회. 동우회.기독
청년회원 등 2000여명 대안문 앞에서 양위 반대시위
➡️1907년 내각전원, 고종의 양위를 강권(제3차 어전회의)
➡️1907년 이인직 친일지 `대한신문` 창간(만세보 인수)
➡️1904년 대한매일신보 창간
https://youtu.be/WIkMOYfT1k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