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도 죽지 않은 나무
문희봉
얼마나 지났을까. 한 나무가 자라 땅과 하늘을 연결할 만큼 성장했을 때 인간의 톱에 의해 베어졌다. 또 많은 시간이 지나 그 밑동이 적당히 썩어갈 무렵 솔씨 하나가 그 밑동 위로 떨어져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지피기 시작했다. 죽은 나무 위에서 자라난 새 나무의 푸른 기상은 확실히 생명의 멋진 찬가였다. 그 옆의 바위들도 혼자는 외롭다고 넝쿨을 끌어안아 푸르러 있었다. 죽어서도 새 생명을 키우는 나무, 그러니까 그건 ‘죽어도 죽지 않은 나무’라고 말해야 옳을 것 같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수은으로 닦아낸 듯이 맑고 환희로운 곳이다. 어느 동화에선가 흙덩이가 강아지똥에게 한 말이 생각난다. ‘아니야, 하느님은 쓸데없는 물건은 하나도 만들지 않으셨어. 너도 꼭 무엇인가로 귀하게 쓰일 거야.’ 이 말을 들은 강아지똥은 생각을 달리했다. 얼마나 희망적인 말인가?
생명이란 참 신비하다. 죽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 또 다른 생명을 움트게 한다. 죽어도 죽지 않은 나무가 그것을 말해준다. 다 죽어가는 나무라고 톱질을 했다간 낭패를 본다. 잘려나간 밑동에서 새로운 싹을 틔워내는 것을 많이 보아왔지 않았는가. 세상에 인내와 연습만큼 위대한 재능도 없다. 다 죽어가다가도 끈질긴 생명력을 바탕으로 나무에 불을 켜고, 종을 매달고, 종을 울리는 걸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우리의 삶도 그러하다.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 필연적으로 죽어가고 있지만, 그 안에서 사랑을, 꿈을, 생명을 피워간다. 삶 너머의 꿈과 희망을 품고 살아간다. 그런 희망이 없다면 그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다른 사람들이 가지 않은 길을 기꺼이 갈 때 비로소 성공에 다다를 수 있다. 새로운 길을 닦지 않는 사람에게 성공의 길은 없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기꺼이 가는 사람은 절반은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국어 교과서에 ‘다섯 개의 완두콩’ 이야기가 있었다. 어느 소년이 새총으로 다섯 개의 완두콩을 한 알 한 알 쏘아 보냈는데, 완두콩들은 날아가면서 제각기 자기는 어디에 가서 어떻게 자랄 거란 희망을 말했다.
그중 한 개의 완두콩은 공교롭게도 어느 집 창틈에 흙이 조금 있는 곳에 떨어졌다. 거기서 안착하고 새살림을 차렸다. 싹이 나서 자랐다. 그 흙은 완두콩의 생육을 통해 경직된 몸을 풀고 숨통을 텄다. 그 속에서는 긴 겨울을 이겨낸 생명의 희망찬 속삭임이 들렸다.
다섯 번째 완두콩이 떨어져 자라는 그 집에는 병을 앓고 있는 소녀가 있었다. 그 소녀와 어머니는 완두콩이 싹을 틔우는 것을 보고 더 잘 자라도록 실을 매주어 넝쿨이 타고 올라가게 했다. 그런 완두콩의 끈질긴 생명력을 보면서 소녀도 용기를 얻어 병이 나았다는 이야기가 바로 ‘다섯 개의 완두콩’의 줄거리이다.
‘다섯 개의 완두콩’은 소녀와 어머니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었다. 핏기 잃은 소녀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피어나게 했다. 식은땀을 흘렸던 소녀의 얼굴을 잘 익은 복숭아빛으로 변하게 했다.
소녀와 엄마처럼, 나도 창틀의 틈새에서 자라는 뭔가를 매일 들여다볼 수 있다면 매일매일이 기쁘고 즐겁지 않을까? 별은 따기보다 달기가 더 어렵다. 별을 많이 달아놓으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보다 더 많은 하늘이 강에 빠져들어 나를 기쁘게 할 것이다.
죽어도 죽지 않은 완두콩이다. 인생은 목표점을 향해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것이 아니다. 좌우 살피면서 여행처럼 달려가야 재미를 느끼며 만족한다. 비옥한 땅을 멀리하고 외진 구석 버려진 땅에 자생하기를 좋아하는 억새, 그 억새꽃 수술이 석양에 역광으로 반사되어 황홀하게 빛나고 있다. 흐르는 소리는 들리지 않아도 강물은 여전히 흐르고 있다. 그 옆 바람의 끝을 잡고 누운 풀들이 일어서고 있다.
달빛이 갈댓잎에 사뿐히 내려앉는다. 세상은 옷이 없어서 추운 것은 아니다. 죽어도 죽지 않은 나무가 심어준 가르침을 잊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