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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와 들보
'비판하지 말라'라는 주의 명령의 이유는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입니다. 즉....무슨 뜻입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행하는 그대로 그들도 너희에게 행할 것이라거나 혹은 너희가 보복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들 말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녀이기 때문에 순응해야 할 심판(비판)이 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 성찬식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찌니 주의 몸을 분별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27-29절)라고 한 다음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즉 죽은 자도 많으니)
이 진술은 하나님이 자기 자녀를 이렇게 판단하시며, 만일 우리가 죄를 범하거나 잘못된 삶을 산다면 하나님께 벌받을 것을 명백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벌은 아픔이나 병고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고 바울은 말씀합니다.
자기네 그릇된 생활 때문에 아프고 병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에서 바울은 5장에서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을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더 나아가 기독교인들 가운데 그들의 악한 생활 때문에 죽은 사람들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심판(판단)이 그들에게 그런 모양으로 임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비판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자기 자신들을 판단할 것을 거부하며,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사탄 - 사망의 세력을 쥐고 있는 -에게 내어줄 것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판단(심판)을 피하려면 우리들 자신을 검토해야 합니다.
기독교인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심판(비판)이 자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만사가 OK라고 말하며 경솔하고 결합 있는 삶을 산다면 매우 잘못입니다.
히브리서 12장에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나"(6절).
우리는 시련을 올바른 방법으로 바라보도록 조심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을 완전으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이 영광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이 세상에서 자녀들의 죄와 허물을 심판하십니다.
성도가 아닌 사람들은 '사생아'들이며 하나님은 그들이 번영하게 내버려 두십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눈앞에 있습니다.
죽은 후에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심판이 있을 것을 성경에서 매우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을 로마서 14장 바울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고린도전서 3장에 '각 사람의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날이 그 공력을 밝히리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이 기초 위에 무엇을 세우든 -금, 은, 보석이든, 나무, 풀이든, 짚이든 - 불로 시험을 받을 것입니다. 그 중 어떤 것 곧 나무, 풀 짚은 전적으로 불타 없어질 것이지만 사람 자체는 구원을 받을 것이로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심판은 목사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 분명합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앎으로 사람을 권하노니'라고 바울은 말씀합니다(고후 5:10-11).
이것은 불신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며
기독교 신자들에게 하신 것입니다.
기독교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이 심판대 앞에서야 하게 되어 있으며,
선악간에 우리가 몸으로 행한 것에 따라 비판(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게'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천국에 가는가 지옥에 가는가를 결정하는 심판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영원한 운명에 '영향'을 주게 될 심판인데,
천국인가 지옥인가를 결정함으로가 아니라
영광의 영역에서 우리에게 있을 것을 결정하는 심판입니다.
성경에 이것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없으나
신자들의 심판이 잇다는 것을 매우 분명히, 특별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아야 할 주된 이유는,
우리가 주께 비판받지 않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의 모습 그대로 보게 될 것이요, 그분을 만나볼 것이요, 이 심판이 앞으로 있을 것입니다.
요한이 표현한 대로(요일 2:28) 우리가 그때 부끄럽게 되고 싶지 않으면 지금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심판날'에 담대함을 얻고 싶으면 우리가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비판한다면 이런 심판에 의하여 우리도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이 둘째 절에 들어 있습니다. '너희는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이것을 원칙의 형태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비판하지 말아야 할 둘째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한 비판을 낳게 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비판의 표준을 설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사람은 항상 '보복을 받기 마련이야'고들 말합니다.
로마서 2장 1절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게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으로 보아서 무엇이 옳은 것인지 네가 알고 있음을 너는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만일 네가 옳은 것을 행하지 않는다면 너는 네 자신을 정죄하고 있는 것이라고 바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는 우선, 우리가 바른 판단에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은 점을 지적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른 판단에 관심을 두었다면
그것을 우리들 자신 속에서 처리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실로 진리와 의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이것만이 유일한 관심사라고 우리들 자신을 설득하려 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불공평하기를 원하지 않으며 비판하기를 원하지 않으며 실로 진실에 관심을 가진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너희가 진리에 관심을 가진다면 너희 자신을 비판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너희 자신을 비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희 관심은 실로 진실에 있지 않다라고 말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의 유일한 관심이 의와 진리에 있으며 인신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처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될 것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예술가는 항상 자기를 엄격하게 비판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노래이든, 연극이든, 그림이든, 기타 무엇이든 참으로 위대한 예술가요, 참된 비평가는 다른 사람들의 작품에 대한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 비판적입니다.
그런 사람은 객관적 표준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객관적 표준을 갖고 있지 못하며
너희는 진리와 의에 관심이 없다.
그렇지 않다면 너희 자신은 통과시키고 다른 사람들만을 비판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우리 주는 말씀 하십니다.
이상으로 첫째 진술을 말씀드렸습니다.
이 진술을 한 단계 더 밀고 나아가, 이런 사람은 그런 원칙에 관심이 없고 단순히 사람들에만 관심이 있음을 주께서 보여주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위선의 영은 원칙이 아니라 인신에 관심을 가지는 영입니다. 이점에서 문제 되는 사람이 우리 가운데 적지 않습니다.
우리는 특정 주제나 원칙에가 아니라 우리가 비판하고 있는 사람에게 관심을 가집니다.
우리가 실제 바라는 것은 그 사람 속에 있는 악을 제거하기보다 그 사람을 정죄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가 다른 사람을 바로 비판할 수 없는 것은 물론입니다. 여기에 편견이 있다면,
여기에 개인적 감정과 개인 의사가 있다면,
우리는 바로 검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율법마저도 이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배심원과 재판받고 있는 사람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음이 증명된다면 그 배심원을 결격시킬 수 있습니다. 배심원에게 요구되는 것은 불편부당인 것입니다. 편견이 없어야 합니다.
재판은 편파적이 아닌, 객관적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비판에 적용시킨다면,
주님은 우리가 아예 재판할 능력이 없다.
주의 분석 4절에 들어 있습니다. '보라 네 눈 속에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주는, 우리 자신의 상태가 이러한즉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사람들과 그들의 허물에 매우 관심을 가지며,
그들 속에 있는 이 사소한 결점으로 괴로워하며 이 티를 제거하려 안달한다고 말들 합니다.
그러나 이 작업은 너무 섬세한 과정이므로 우리는 이 일을 할 수 없다고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맹인이 또 다른 맹인을 인도하려 애쓰는 사람에 대한 매우 우스꽝스런 것이 있는데 이보다 훨씬 더 우스꽝스런 일은 맹인 안과 의사라고 기록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관심을 가지는 다른 사람의 민감한 눈으로부터 이 미세한 티를 빼낼 수 있을 만큼 분명히 볼 수 있기를 원한다면
여러분 자신의 눈이 아주 밝은지 분명히 보십시오.
여러분 눈 속에 있는 들보로 눈이 멀어있는 한 여러분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끝으로, 주는 우리를 위선자로 정죄하고 계십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라' 얼마나 적중하는 말씀입니까?
문제의 사실을 말씀드리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는 실로 관심을 갖고 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를 정죄하는 일에만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의 결점을 발견하는데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위선입니다.
이 사람이 저 사람에게 자칭 친구라고 하며 찾아가서는 '이런 결점이 당신 속에 있다니, 수치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말 이 같은 행동에 나타나는 악의와, 이런 사람이 자주 즐기는 쾌감이라니! 그렇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을 진정 돕고 싶으면, 여러분이 이 문제에 순수하며 참되다면,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에게 해야 할 일들이 있다.
첫째 - 이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 네 눈에서 들보를 빼어라.
만일 여러분이 다른 사람을 돕고 싶으면
그리고 그들에게서 결점과 허물과 단점과 불완전함을 제거하고 싶으면 먼저 여러분의 영과 태도가 잘못되어 있음을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결국 '너희가 범하는 이 비판 정신보다 더 무서운 죄는 없다.
그것은 들보와 같다.
다른 사람이 여기저기 어떤 적은 과오를 범할 수도 있다.
그러나 너희 속에 있는 이 영(비판의 영)과 비교할 때
그것은 눈에 작은 티에 지나지 않다.
이 비판 정신은 들보와 같은 것이다' '너희 자신의 영혼에서 출발하라. 너희 자신을 정직하게 정면으로 대면하고 너희 자신에 관한 진상을 너희 자신이 인정해라!'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여러분 자신에 대한 진상을 정면으로 대면하십시오.
이것은 매우 고통스럽고 괴로운 과업입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의 비판과 우리의 말을 정직하고 참되게 검토한다면, 우리 눈에 들보를 빼내는 일에 성공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너무 겸손해진 나머지 우리는 비판과 혹평의 정신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참 모습을 볼 때는 다른 사람을 나쁜 방법으로 판단하지 못할 때인 것입니다.
사람의 모든 시간이 자기를 정죄하고 자기 손을 씻고 자기를 깨끗하게 하려 애쓰는 일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곧 여러분 자신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입니다.
이 일은 우리의 교만을 꺾어 기회가 되게 합니다.
자신의 눈에서 들보를 제거한 후에야 비로소 다른 사람을 도우며, 그의 눈 속에 있는 작은 티를 빼낼 수 있는 적절한 상태가 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눈에서 티를 빼내는 일은 매우 어려운 작업입니다.
손가락이 와닿는 순간 눈꺼풀이 닫힙니다. 눈은 이처럼 섬세합니다.
눈을 치료하는데 침착과 냉정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 작은 티를 빼낼 수 있습니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 가지뿐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겸손해야 하며 공감적이어야 하며,
여러분 자신의 죄와 여러분 자신의 하찮음을 의식한 나머지,
여러분이 그것을 다른 사람 속에서 발견할 때 그것을 정죄하기는커녕 그것으로 흐느끼는 감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공감과 연민의 정으로 가득합니다. 여러분은 진정 돕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속에 있는 그것을 제거하는 것을 너무 기뻐하는 나머지 그도 같은 기쁨과 유쾌함을 가짐을 원하게 됩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맑은 시력을 갖기까지 영적 안과 의사는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대로 서로 '사랑 안에서 참된 말을 하며'(엡 4:15) 이로써 그를 도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일은 일상생활의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사랑 안에서 참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시 야고보서를 인용합니다만 각자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합시다'(약 1:19).
이상 말씀드린 세 가지 이유를 아셨으니
'비판하지 마십시오'
갈보리와 그리스도의 흘리신 보혈에 비추어서 이 진리를 직면할 수 있음은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그러나 여러분이 이 생에서 징계와 손실의 괴로움을 피하고 싶다면 -이것이 성경 말씀이거니와 -
다음부터는, 여러분 자신을 먼저 비판하기 전에는 비판하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