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작은 키, 볼품 없는 외모, 근시안의 두꺼운 안경, 더듬거리는 말투로 미루어볼 때 드레퓌스 대위가 프랑스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중요한 인물이 되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운명의 장난으로 인해 그는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20세기 프랑스의 역사, 특히 지성인사의 출발점이 될 인물로 하루아침에 돌변해 있었던 것이다. 드레퓌스 대위가 역사의 장에 기록될 자질이라는 것이 있다면, 유태인이었다는 것과 불행하게도 그의 글씨체가 사건의 진범으로 밝혀진 에스테라지 소령의 글씨체와 너무나도 흡사했다는 두가지 사실뿐이었다.
1894년 10월, 드레퓌스 대위는 프랑스 군조직에 관련된 기밀 문서를 독일 대사관에 제공했다는 국가반역죄로 체포되었다. 같은 해 12월, 그는 전쟁위원회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기얀에 있는 저 유명한 ‘악마의 섬’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드레퓌스 대위의 무죄를 확신한 그의 가족들은 유태인 유력인사들의 도움으로 재심 청구를 위한 끈질긴 노력을 벌였다. 그러던 중 1896년 방첩대의 책임자로 새로 부임한 피카르 중령은 빚더미에 올라앉은 헝가리 출신의 육군 소령 에스테라지와 파리의 독일 첩자 사이에 오고간 편지들을 발견했다. 드레퓌스와 에스테라지의 글씨체가 너무나도 닮았다는 것을 인지한 피카르 중령은 2년 전 드레퓌스 대위에게 뒤집어씌운 서류를 작성한 자가 에스테라지였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피카르 중령이 이 사실을 상관들에게 보고하자 반유태주의 상관들은 이 사실을 숨기고, 오히려 진실이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피카르 중령을 튀니지로 전출시켜 버렸다.
드레퓌스 가족으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전해들은 조르주 클레망소는 자신이 편집장으로 있는 일간지 ‘여명’의 지면을 통해 1897년 가을부터 드레퓌스 대위의 무죄를 주장하는 대대적인 구명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작가 에밀 졸라는 1898년 1월13일자 ‘여명’에 ‘펠릭스 포르 공화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를 발표했는데, 이 글의 상단에 편집장 클레망소가 ‘나는 고발한다!’라는 도발적인 제목을 덧붙임으로써 ‘드레퓌스 사건’을 불러일으킨 역사적인 글이 되었다. 이 글에서 졸라는 “내 항의의 불꽃은 곧 내 영혼의 외침 소리일 뿐이다. 그러니 나를 법정에서 심판하기를. 수사가 백일하에 공개적으로 이루어지기를. 나는 기다리노라”라고 단호하고도 장엄한 선언으로 불의를 공격하며 정부당국에 대항했다. 이로 인해 졸라는 재판에 회부되어 15차례의 공판 끝에 추방령을 선고받고 1년 동안 런던에서 유배생활을 해야 했고, 런던에서 돌아온 이듬해인 1902년에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는 지성인들의 지속적인 항의에 프랑스 정부는 1899년 전쟁위원회를 열어 드레퓌스 대위에게 사면령을 내렸다. 드레퓌스파 지성인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진실과 정의의 승리를 위해 끈질기게 노력, 마침내 1906년 프랑스 최고재판소가 “1899년의 판결은 오심이었다”라고 판결함으로써, 드레퓌스 대위는 12년만에 법적으로 무죄를 인정받고 소령으로 진급하여 군대에 복귀했으나 얼마 후 은퇴하고 말았다.
드레퓌스 사건을 흔히 ‘졸라의 사건’이라 부르기도 한다.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가 없었더라면, 진실과 정의의 승리를 위해 대대적으로 동원된 드레퓌스파 지성인들과 모리스 바레스를 중심으로 한 반드레퓌스파의 충돌, 즉 ‘인권연맹’ 대 ‘조국 프랑스 연맹’, 좌파 대 우파, 보편주의 대 국수주의의 첨예한 대결은 없었을 것이다. 졸라가 이 사건에 뛰어들게 된 것은 부당하게 형을 선고받은 한 개인을 변호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 개인으로서 또한 사회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는 공인으로서 장터의 일에 무관심할 수 없다는, 무엇보다도 진실과 정의가 유린되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는 데에 있었다. 바로 이것이 지성인이 지성인으로서 시대와 사회와 역사에 대한 의무와 역할을 다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졸라는 ‘나는 고발한다!’에서 “내가 수행하고 있는 행위는 진실과 정의의 개화를 앞당기기 위한 하나의 혁명적인 수단일 뿐”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