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요즘 가장 인기있는 프로그램인 모 방송상의 개그콘서트를 가지고 사회복지를 이야기 해보기로 하겠다.
과연 개그 콘서트는 필자의 어떤 생각으로 변화하여 사회복지와 인연을 맺을 것인지 기대하시라.
난 무엇이든 사회복지와 연관지을 수 있다. 왜냐하면 사회복지는 생활이기 때문에....
자 이제 과제 하나를 준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어떤 소재를 하나만 나에게 던져주라. 그럼 내가 그것을 사회복지와 연관시킬 터이니...
물론 하다보면 안되는 것도 있겠지만... 그대신 생각은 많이 해보도록 하겠다.
그럼 지금부터 이야기로 들어가 보기로 하겠다.
여기엔 개그 콘서트라 해서 개그는 하지 않는다. 오직 최강의 사회복지사 특유의 진지함과 썰렁함이 가득할 뿐이다.
1. 유머 1번지에서 개그 콘서트 까지 그 코미디의 역사를 밝힌다.
분명 사회복지라고 했는데 왠 매체 비평인가 하겠지만 사회복지와 비교를 하려면 그 대상을 분석하는 일은 필수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 필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알 것이다.
1980년대 중반부터 후반까지 그러니까 우리나라는 아마도 군사정권 시절이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코미디가 군사정권의 색을 띠고 있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아는가? 아니 엄밀히 말해서 그 시기의 조류가 대부분 군사정권을 찬양하던 시기에서 이제는 비판하고 고쳐가는 시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때 주로 했던 프로그램 중에서 유머 1번지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이 프로그램은 그때 굉장히 인기있던 코메디 프로그램이었다. 심형래, 최양락, 팽현숙, 임미숙, 김형곤 등 기라성같은 코메디계의 인물들이 다 이 프로그램에 나왔다.
70년대에 이주일의 독식을 깨고 80년대 대표 코메디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은 이 코메디 1번지는 기존의 틀을 완전히 깬 아주 참신한 프로그램이었다. 지금도 생각난다. 최양락의 어눌한 말투가 일품인 도시의 사냥꾼이라던가, 김형곤의 "잘 되야 될텐데"로 유명한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부터 "꽁자 가라사데"였던가 하던 지금의 봉숭아 학당의 전신인 프로그램도 꽤나 유명했던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프로그램은 "영구 없다"로 유명했던 여로를 패러디한 "영구야 영구야"라는 프로그램도 빠트릴 수 없고, "변방의 북소리"라는 프로그램도 정말 인기가 좋았다.
이 각각의 꽁트들은 시청자들을 텔레비젼 앞으로 끌어들이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때 꽁트의 주류는 주로 코메디언이 자기를 자학한다던가 다른 사람이 주인공을 쥐어박는 약간의 엉뚱한 폭력이 주를 이루고, 주인공들은 나가 둥그라지거나, 울상을 짓거나, 바보 흉내를 내는 것이 주류였다. 사람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으며 조금 어리석어 보이면 영구로 불리워지고는 했다.
이후 90년으로 넘어오면서 코메디 공개 프로그램이 생겨났고 불세출의 스타 김한국과 김미화의 일자눈썹이 행국이라는 강아지와 조화를 이루어 또 한번의 코메디 전성기를 누렸다. 또한 이경애와 그 누구더라 아무튼 촉망받는 신인이었던 이경래 그 사람들은 담벼락 위에서 도둑 세레나데를 부르기도 해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 잡았다.
하지만 그들의 시대가 조금씩 기울기 시작한 것은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랩 세대가 나오면서부터였다. 코메디 프로그램은 급격히 가요 프로그램에 밀렸다.
가요 톱 10으로 대표되던 가요프로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가수들과 그 매니아 층이 증가하여 K 방송, M 방송, S 방송이 너나 할것없이 가요프로그램을 늘려나가기 시작해 90년대 중반에는 버라이어티 쇼(일요일 일요일 밤에, 일요 대행진 등등...)로 변화하여 그 명맥만을 유지하다가 결국에는 일요일 시청률이 가장 뜸한 시간에 복권 추첨과 함께 끼어서 방송되는 불운?을 맞게 되었다.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던 코메디 프로그램은 부활을 준비하다 시사적인 코메디 프로그램의 조류가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반짝했지만 그리 큰 빛은 보지 못했다.
하지만 코메디계의 숨은 사람들은 부활을 예고했고 신인 개그맨들을 중심으로 재기의 날개짓을 폈고 이후 2000년대로 들어서면서 개그 콘서트라는 획기적인 프로그램이 만들어지면서 코메디 프로그램은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백제현 외 수십명의 신인 개그맨들이 간단한 꽁트를 가지고 나와 공개 녹화하는 프로그램으로 신세대의 취향에 맞는 개그로 많은 인기를 끌다가 개그 콘서트 2기가 들어서면서 잠시 주춤하는 듯 하더니 강성범, 심현섭이 특유의 입담으로 인기를 끌면서 또 한번의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2. 한국 사회복지의 역사를 밝힌다.
한국 사회복지의 역사는 일제시대가 끝난 광복 후부터라고 이야기 하겠다. 그 이전에도 사회복지의 형식을 띤 부분은 있었지만 아무래도 광복 이후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광복 이후에서 6.25까지는 사실 혼란기였고, 체제가 성립이 안 된 상태였기 때문에 그리 눈에 띄는 사회복지 제도는 없었다. 6.25부터 60년대 초반까지는 전쟁 이후의 전쟁고아들을 돌보는 것과 폐허가 된 나라를 정비하는 상황에서 외국의 구호물자와 선교사들의 노력이 대부분인 시대였다. 옥수수죽으로 대표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각종 사회복지 법안들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고, 이때의 복지의 의미는 삶의 질 보다는 어떻게 하면 굶지 않고 살 수 있는가였으며, 새마을 운동으로 대표된 이 시대에 사실상 복지는 인식이 덜 된 상태였다.
1980년대로 들어서면서 조금씩 복지에 대한 욕구가 확산되고, 민주화 되면서 단순히 먹고 사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풍족하고 편안하게 사는가에 대한 초점이 맞추어졌지만 그러한 욕구를 충족시켜줄만한 어떤 제도도 되어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었다.
80년대 이후로 각 대학에 사회사업학과가 설치되었으며 90년대로 넘어오면서 사회복지학과로 바뀌기 시작하고, 어느정도 사회복지에 대한 이론 정립이 되었으며 90년대 후반에는 대부분의 대학이 사회복지학과가 설치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는 86 아시안 게임, 88 서울 올림픽 이후 국민들의 지적 수준이 높아지고 세계화에 민주화까지 곁들여져 사회복지는 결국 그 빛을 보기 시작했다.
김대중 정권에 접어들어 생산적 복지를 표방하며 민심을 달래기 시작했지만 정책의 부재로 인한 혼선이 더 많은 시기였다. 사회복지를 담당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사회복지 전공자가 아닌 법통 경제통 이거나 행정고시 패스한 공무원 들이었고, 사회복지의 일꾼인 사회복지사들은 아주 낮은 자리에서 박봉에 시달려 가면서 사회복지를 발전시켜 나가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나라의 사회복지는 다른 나라에 비하면 굉장히 낮은 수준에 있다. 일본보다는 20년 미국이나 서구 선진국들보다는 3-40년 정도가 뒤떨어져 있고, 경제적 능력에 비해 사회복지에 대한 투지 비율이 훨씬 낮아 비효율적인 국가이며, 국가의 복지 수준이 40위권으로 밀려나 있는 상태이다. 지금은 국민들의 인식이 좋아지고 있고 나아지는 추세여서 앞으로는 많은 발전이 있으리라 기대하지만 이렇게 발전하려면 몇가지 선결되어야 할 것들이 있다.
이 선결되어야 할 것들에 대한 열쇠는 모두 개그 콘서트에 있다. 지금부터 하나 하나씩 이야기 해보도록 한다.
1. 한국의 사회복지는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지 못한다.
90년대 중반들어 한국의 개그계는 불황을 면치 못했다. 그 이유는 80년대에 통하던 개그의 방식을 90년대에 반복을 했기 때문이었다. 때리고 넘어지며 바보 흉내를 내던 80년대의 방식은 그 시대에 있어 스트레스를 풀어주고 위안을 해주던 역할을 확실히 해주었지만 90년대 후반의 소위 민주화 시대에서는 그런 개그 조차도 시시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은 시청자층이 그만큼 젊어졌다는 사실이었으며, 통키타 음악 시대와 듣기 좋은 발라드 시대가 가고 서태지와 같은 빠른 비트의 음악과 춤을 무기로 하는 신세대들이 전파를 장악하고 있는 시대에 이런 낡은 방식으로는 유행을 이끌 수 없었다.
사회복지도 마찬가지였다. 단순히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는 70년대 80년대의 복지 의식은 다양한 국민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사람들은 일하면 돈을 번다는 개념에서 일을 한만큼 돈을 받는 개념으로 변했기 때문에 그만큼 권리주장의 폭이 커졌지만 사회복지에 대한 개념성립이 안된 상태에서 외친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무지와 다를 바가 없었다.
사회복지 실무를 담당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전공자가 아니었고, 기본적의 삶의 욕구충족마져 시켜주지 못했으며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여 사회복지를 한 사회복지사들도 열악한 사회복지 근무 환경에 이기지 못하고 그만 두는 사례가 많았다. 따라서 급격히 변해가는 국민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에는 너무 미약했다고 볼 수 있다.
2. 한국의 복지는 코메디로 따지자면 때리는 코메디?
코메디는 웃기는 것을 말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웃기면 되는 것이다. 말이든, 행동이든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든, 7-80년대의 주류는 만담이라던가, 몸을 던져 웃기는게 주류였다. 즉 머리를 쓰는 것 보다는 몸을 사용하는 일이 많았고, 표정으로 승부했다.
한국의 복지는 지금도 이 수준이다. 즉 어떤 형식이나 체계 없이 주먹구구식인 것이다. 복지 예산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그 부족한 것을 아주 힘들게 메꾼다. 분명 경제는 어느정도 뒷받침이 되어주는데, 그런 이점을 적절히 이용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즉 복지를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복지를 따라간다는 뜻, 다시 말해 복지를 흉내낸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복지는 외국의 예를 차용해 온 것들이다. 우리나라 현실과는 맞지 않는 그런 예들... 하지만 그 예들은 외국에서는 성공한 사례들이었다. 성공한 사례기 때문에 가져들여온 것이었고 우리나라에서는 그게 맞을 리가 없었던 것이었다.
한동안 외국 코메디에서도 가학하는 코메디, 약간 엉뚱한 코메디가 주를 이루었다. 이주일의 일단 한번 보시라니까요? 의 춤은 마치 찰리 채플린을 흉내낸 코메디였고, 90년대로 들어와서 맹구나 영구는 미국의 미스터 빈과 그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우리나라만의 특별한 코메디는 없었다고 본다. 물론 그 안에서 코메디언들은 최대로 노력했다. 우리 스러운 것을 만들기 위하여 노력한 것이다. 쓰리랑 부부 같은 경우는 지극히 한국적이었다. 판소리를 코메디에 접목시켰으니 말이다.
한국의 사회복지는 그 특색이 지극히 미약하고, 지원체계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으며, 국민들의 인식도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니다. 국민들은 아직도 복지를 아주 협의의 의미인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 장애인에 관련된 것, 노인에 관련된 것"정도로 이해하고 있으며, 욕구가 크면서고 그것을 분출해낼 방법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현실이다. 즉 관객과 배우가 따로 노는 격이라고나 할까?
3. 파격적인 코메디 그 시작 파격적인 사회복지 그 시작
90년대 후반으로 넘어오면서 코메디계는 침체로 접어들었다. 아무도 코메디를 보지 않았다. 그냥 어느 프로그램에 약간씩 첨가될 뿐이었다. 즉 코메디란 웃겨야 하는 것인데 너무 옛날 방식을 고집하다보니 실패하고 만 것이다. 몇몇 개그맨이 유학을 시도했고 이는 더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었다.
90년대는 이경규의 개그를 가미한 사회 선도 프로그램이 압도적이었다. 그것은 정말 신선했고 재미있었다. 하지만 코메디계는 한 두 사람의 힘으로 살려지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토대를 바탕으로 코메디계는 시사적인 것으로 눈을 돌렸다.
즉 지금까지 사회 병폐를 실랄하게 비판함으로써 그 돌파구를 찾아냈고 각 방송국마다 성대모사를 잘 하는 개그맨들이 정치인이나 사회 인물을 풍자하며 사람들을 웃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반짝이었다. 하지만 가능성은 충분히 보여주었다.
사회복지 역시 90년대부터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즉 복지의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하고 국가도 이제는 뒷짐을 지고 볼 수 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각 지역마다 복지관이 생기고 대기업이 복지를 표방하기 시작했다. 아주 작게나마 말이다. 사회복지사들은 뛰고 또 뛰었다. 점차 사회복지의 분야는 점점 더 넓어져 가기 시작했고, 그 시작은 각 대학에 사회복지학과가 설치되었다는 점이다.
지금은 300여 개 대학 중 230개 정도가 사회복지학과가 있고, 매년 1만명의 사회복지사들이 배출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는 질보다는 양에 초점을 두고 있어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고도 다른 일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사회복지의 토대는 아직도 미약하다. 이후 국가는 국민기초생활보호 제도를 도입하여 많은 사회복지사들을 활용하지만 아직도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고 국민연금 등 복지에 관한 사항이 현안으로 떠오름에도 국가는 그것을 적절히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으며 장애인, 노인, 아동, 청소년, 가정복지 등 손을 대야 할 것이 많음에도 손만 대보는 상황이다. 사회복지는 지금도 이 시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4. 사회복지의 가야 할 길은 개그 콘서트에 있다.
왠 엉뚱한 이야기란 말인가? 사회복지의 가야 할 길은 개그 콘서트에 있다고?
- 시대의 흐름을 간파한 코메디
2000년대 처음 선보인 개그 콘서트는 사이버를 표방했다. 개그맨들이 반짝이고 매끈한 사이버복을 입고 나와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로 사람들을 웃기기 시작했다. 때리는 것이 아닌, 말 장난이 아닌 그야말로 머리로, 그리고 지혜로 사람들을 웃기기 시작했다.
소재는 다양했다. 이 시대 젊은이들의 모습, 그 유행 풍속 등을 적절히 섞어냈던 것이다. 대히트였다. 다시 개그맨들은 뜨기 시작했다. 시청자들은 다시 텔레비젼 앞으로 가와 앉았다.
사회복지도 시대의 흐름을 간파해야 한다. 즉 시대와는 상관 없는 70년대 80년대 이론만 가지고 사회복지를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지금 현 상황에 맞는 사회복지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 사람들이 만족하고 호응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을 말이다. 그 시초가 있지 않는가? 텔레비젼에서는 ARS, 방송을 이용한 집 지어주기 등이 그런 시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을 잘 이용하면 분명 한국의 사회복지도 희망은 있는 것이다.
- 대중성이 있는 코메디
하지만 개그 콘서트에도 한계는 있었다. 개그의 주제가 너무 젊은이들로 한정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나이 많은 30대 이후의 사람들에게는 이해도가 떨어졌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런것도 슬기롭게 극복했다. 그것은 바로 개그 콘서트 2기의 모습에서 비롯된다.
지금 방송되고 있는 개그 콘서트는 신세대의 취향을 지향하면서 프로그램마다 옛날 것을 적절히 가미한다.
대표적인 것이 봉숭아 학당, 환장하것네, 수다맨 등이다. 봉숭아 학당은 90년대 초반 김형곤, 김미화 등으로 대표되는 개그 프로그램에서 사용한 30-40년대 야학 교실 풍경을 묘사한 프로그램으로서 옛날 향수를 불러 일으키기에는 충분했다.
그것을 그대로 차용하되 현대적인 것을 섞어 넣음으로써 모두가 공감하는 개그가 된 것이다. 환장하것네도 옛날에 고춘자 장소팔 두 사람이 나와 만담하던 것을 패러디 형식으로 바꾸어 그 추억을 자극하고 있으며, 수다맨도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괴력을 발휘하며 일을 해결하는 슈퍼맨의 모습을 패러디 하고 실생활에 유용한 정보들을 이야기 하여 공감을 하게 만들어 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두에게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중성이다.
사회복지도 마찬가지이다. 사회복지라 해서 대상자들을 앞서나가서는 안된다. 즉 그들과 라포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공감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것들을 적절히 이용한 복지 제도가 필요한데 현 상황에 맞는 복지제도와 적절히 융합한다면 좋은 프로그램을 개발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사회복지가 어느 한계층, 어느 한 분야로 편중되는 것을 막아야 하는 것. 즉 공평하게 수혜가 되는 제도를 펼쳐야 하는 것이다.
- 관객과 개그맨이 하나가 되는 프로그램
개그 콘서트는 어느새 시청자들은 밤 9시가 되면 텔레비젼 앞으로 불러모으는 괴력을 발휘한다. 시청률도 매우 높다. 그 시간대 뉴스는 찬밥이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을 보면 개그맨만 개그를 하지 않는다. 관객들도 개그를 한다.
개그맨 뺨치게 개그를 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쌍방향 개그이다. 가장 심한 것이 엽기스런 그녀, 동물본부 24시, 봉숭아 학당이다. 이 안에서는 관객이 이구동성으로 그들을 연호한다. 그리고 그들의 대사를 그대로 따라한다. 때문에 개그맨이 애드립을 할 때도 있다. 즉 개그맨 혼자서 웃기는 것이 아닌 관객들과 혼연 일체가 되어서 웃기는 것이다.
이때 시청자들의 흥은 더한다. 가히 폭발적인 것이다. 앞에서 웃기력 노력하는데 썰렁하다면 아마도 그 프로그램은 다된 프로그램인데, 개그 콘서트는 관객을 선동하는 것이 아닌 관객 스스로 광란하는 그런 자발적인 프로그램이 되는 것이다.
사회복지는 이것이 필요하다. 사회복지사의 노력만으로 되는 사회복지가 아니라 사회복지의 주체인 대상자들이 사회복지를 즐기고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찾아가는 서비스가 아닌 찾아먹는 서비스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사회복지가 재미있어야 하고, 진정 대상자들을 도울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의미가 성립될 때 가능하다. 사회복지사들이 그만큼 노력해서 이제 대상자들이 오면 적절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데, 대상자들이 정작 그것을 알지 못하고 이용하지 못한다면 그 노력은 이상하게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기초생활보장 제도를 이용한 범죄이다. 정작 필요한 대상자는 그 제도를 잘 이용하지 못하지만 그 제도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편법으로 그 제도의 시혜를 받고 있는 격이다. 따라서 복지는 쌍방향 소통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복지에 대한 대중적 인식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5. 발상의 전환, 끊임없는 노력 그것이 필요하다.
개그콘서트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사람들을 웃기기 위해 노력하는가를 알 수 있다. 어느정도 지나면 소재가 고갈될 법도 한데 그들은 그 짧은 일주일 동안 두 세편의 놀라운 꽁트를 완벽하게 소화해 낸다.
책 한권 분량의 대사와 동작을 무리없이 해내고 마는 것이다. 분명 밤을 새고 고민을 했을 것이다. 아무리 끼가 있고 개그에 능한 천재들이라 하더라도 어려움은 있는 것이다. 그들이 무대에 오르기까지 그 숱한 노력을 우리는 본받아야 한다.
사회복지사들도 이처럼 노력을 한다. 분명 그렇게 함에도 개그 콘서트만큼의 효과를 얻을 수 없는 것은 바로 방법상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총알이 난무하는 전쟁터에 칼을 들고 나가면 아무리 무예가 뛰어나다 하더라도 지게 되어 있다.
총을 이길만한 무기를 가지고 나가던가 아니면 칼밖에 없더라도 이길 수 있는 전략을 가지고 나가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런 방법을 찾는다는 것은 어렵지만 사실상 모든 일에는 해결책이 있는 것이다.
사회복지는 지금 그런 방법을 찾고 있다. 필자가 생각해 보건데 발상의 전환이 가장 필요하다고 본다. 즉 형식의 틀을 깨고 새로운 것을 찾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했을 때만이 한국에서의 사회복지의 현실은 개선이 될 것이다.
참고로 나의 이 발상은 팝송 패러디에서 만들어졌다.
외국의 팝송을 한국어화시켜 웃긴다는 것이 될 말인가? 그럼에도 잠시 스치는 음악에 대한 청력의 착각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런 특성을 이용해서 논리를 만들어낸다는 것 천재적인 것이다. 그대가 한 번 해보라 과연 하루종일 음악을 들어서 그렇게 찾아낼 것이 몇 개나 있는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