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사봉 그늘에 둥지를 튼 아늑한 고색의 암자
상도동 사자암(獅子庵)
▲ 사자암 일주문(一柱門) |
상도동의 듬직한 뒷산인 국사봉(國思峰,
186.3m) 북쪽 자락에 포근히 터를 닦은 사자암은 조
계종(曹溪宗) 소속으로
1396년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태조 이성계는 도읍을 개경(開京)에서 서울로 옮기고자 무학을 미리 보내 풍수지리를 살피게
했는데,
만리현(만리동)이
밖으로 도망가는 백호(白虎)의
형상이고, 호암산(虎巖山)은
북쪽으
로 달리는 호량이의 형국이라 풍수상 서울에게는 영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하여 그
기세를 막
고자 호암산에 호랑이를 누른다는 뜻의 호압사(虎壓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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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고
사자 형상인
국사봉에 사자암을 세우는 등 야단법석을 떨었다는 것이다.
허나 무학의 창건설은 딱히 근거와 유물은 없는 실정이며,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가 17세
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다. 하여 빠르면 15세기 정도, 늦어도
16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호압사와 함께 서울을 지키는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일환으
로 세워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만큼 옛 사람들에게 있어 풍수지리는
절대 진리나 다름이
없었다. 참고로 절 이름인 사자암은 국사봉 바위가 사자처럼 생겨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어쨌든 창건 이후 300년 이상이나 적당한 내력을 남기지 못했다가 18세기 한복판에 이르러 비
로소 제대로 된 활자 기록이 등장한다.
1726년 숙종의
6째 아들 연령군(延齡君,
1699~1719)의 부인 서씨가
너무 일찍 죽은 남편의 명
복을 빌고자
극락보전 아미타불(목조아미타여래좌상)에 개금불사(改金佛事)를 했으며, 1846년
에 지장탱과 신장탱을 조성하고 1880년에는 현왕탱을 봉안했다.
1910년 경암(敬庵)이
극락전과 산신각, 요사채를 중수했으며,
1936년 성월이 극락전을 보수했
다. 그리고 1977년 원명이 주지로 부임하여 조실당(祖室堂)을 짓고,
1985년에 극락보전과 단
하각, 수세전, 요사
2동을 중건하여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극락보전을 비롯해 단하각과 수세전, 강당 등
7~8동 정도의 건물을 지
니고 있으며 절이 들어앉은
자리가 협소하여 극락보전 뒤쪽 가파른 언덕에 단하각과 수세전을
닦았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신중도와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지장시왕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00호),
영산회괘불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88호), 현왕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89호), 목조보살좌
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50호) 등 지방문화재 6점을 간직하고 있는데, 이중 신중도와 목조아
미타여래좌상만 속세에 공개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친견이 극히 어렵다. 다만 영산회괘불도(
靈山會掛佛圖, 1909년 작)는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에만 잠깐씩 외출을 나오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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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자암에서 바라본 아담한 천하 (상도동, 대방동, 여의도
지역) |
상도동이 개발되기 이전에는 숲속에 진하게
묻혀있던 산사였다. 허나
1960년대 이후 서울 인
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그로 인해 서울의 몸집이 지나치게 커짐에 따라 변두리인 이곳까지
거친
밀물처럼 집들이 들어찼다. 다행히 개발의 칼질이 사자암 앞에서
그 꼬랑지를 내리면서
사자암과 국사봉 윗도리는 자연의 공간으로 남게 되었고 사자암은 이렇게 자연(국사봉)과
속
세의
경계를 이루게 된 것이다.
비록 옛날만큼의 운치는 아니어도 국사봉의 푸른 숲이 절을 남쪽에서 감싸고
있어 산사(山寺)
의
내음은 변함이 없다.
절을 이루는 건물은 근래에 지어진 것들이라 겉으로 우러나오는 고찰
의 내음은 말라버렸지만 신중도와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통해 오랜 내력을 충분히 가늠해 볼
수 있으며 시내와도 무척이나 가까워 접근성도 괜찮다. 게다가 암(庵)이란
이름에 걸맞게 절
의 크기도 조촐하여 두 눈에 넣어 살피기에도 그리
부담도 없다.
*
사자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3동
280 (국사봉1길 235-14 ☎ 02-825-1046) |
▲ 사자암 강당(講堂, 설법전) |
사자암 경내로 들어서니 조금은 모를 답답함이
밀려온다. 터가 좀 작다보니<그래도
우리집보
다는 오지게 넓음> 그 좁은 공간에 건물을 꾸역꾸역 심어
여백의 미가 좀 떨어지기 때문이다.
극락보전도 강당과
좁은 간격을 두고 자리해 있어 탑이나 석등을 세울 공간도 마땅치 않다.
극락보전 맞은편에 자리한 강당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경내에서 가장
큰
집이다. 교육과 행사 공간으로 대방(大房), 설법전(說法殿)으로
불리며 종무소(宗務所)와
선
방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
▲ 연등이 허공을 가르고 있는 강당 뒷쪽
▲ 공양간을 지닌 동쪽 요사와 그 뒤쪽에 자리한 단하각 (오른쪽 건물)
▲ 공양간에 담긴 조왕탱화(竈王幀畵) |
사자암 공양간에는 부엌지킴이인 조왕신<竈王神 = 조왕(竈王), 조왕대신(竈王大神)>이
그려진
조왕탱이
있다.
조왕이란 이 땅 고유의 신으로 부엌을 지키는 존재이다. 부엌을 관리하던 여인네들이 주로
숭
상했는데 불교가 산신과 칠성 등의 민간신앙을 거의 흡수하면서 조왕 역시 호법신중(護法神衆
)의
일원으로 스카웃되어 그 모습도 다른 신과 보살에 못지 않게 화려하게 변신했다. 하지만
기존의
호법신중과 조왕과는 성격이 판이하게 달라 별도의 조왕탱으로 독립했다고 하며 그
성
격을 고려해 주로 요사나 공양간에 둔다.
조왕탱을 보면 제왕(帝王)의
복장을 한 조왕신이 수염을 어루만지며 조식취모(造食炊母)가 바
치는 후식을 기다리고 있는데, 노란 천이 깔려 고급진 이미지를 주는 책상에는 서적과 찻잔이
놓여져 있고, 그의 왼쪽에는 땔감 조달을 담당하는 담자역사(擔紫力士)가
항아리와 도끼를 들
고 서 있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공양간을 관리하는 조식취모라
불리는 여자가 공손히 머리를
숙이며
과일 쟁반을 조왕신에게 바친다.
부엌지킴이가 남자란 것이 매우 눈길을 끄는데, 조왕신이 꼭 남자만 있는 것은 아니며 속세에
서는 조왕할머니를 조왕신으로 많이 받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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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종(梵鍾)의 거처인 사자후(獅子吼)
극락보전 우측에는 범종의
보금자리인 범종각
이
있다.
범종은 1987년에 조성했고, 범종각은 1985년에
미리 지은 것으로 사자암에서는 범종각을 '사
자후'란
꽤
낯선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데, 이
는 모든 사람이
깨달음의 길에 오를 수 있도록
원음(圓音)의
사자후를 토하란 의미라고 한다.
또한 절의 창건 설화와
절의 이름도 그가 사자
후란 이름을 지니게 된
이유
중의 하나이다. |
▲ 극락보전(極樂寶殿) |
강당과 마주하며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극락보전은 사자암의 중심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10년에
중건했으며, 1936년과 1985년에도
손질을 했다.
건물 안에는 극락전의 주인인 아미타3존상을 비롯해 신중도, 지장목각탱 등이 들어있으며 바
깥
벽에는 심우도와 달을 보면서 자신의 본성을 찾아서 본다는 간월견성(看月見性), 그리고
팔을 싹둑 잘라 믿음을 강하게 비췄다는 혜가대사(慧可大師)의
이야기를 다룬 벽화가 있다. |
▲ 극락보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46호 |
극락보전 불단에는 머리가 유난히도 큰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장, 아미타불(목조아미타여
래좌상)이 온후한 표정을 머금으며 중생들을 맞이한다. 그의 좌우로 녹색머리의 지장보살(地
藏菩薩)과
화려한 보관(寶冠)을 눌러쓴
관세음보살이 자리하여 아미타3존상을 이루고 있는데,
그들 뒤로 아미타불이 서방정토에서 설법을 하는 장면을 담은 붉은 색채의 아미타후불탱이 든
든히 자리해 있다.
이곳 아미타불은 사자암에서 가장 늙은 보물로 예전에는 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전해졌다
. 허나 근래 재평가를 해보니 17세기 초에 조각승인 현진(玄眞)이나 그의 제자들이 만든 것으
로 파악되고 있다. 다만 불상의 내력을 밝혀주는 복장 발원문(發願文)이나 유물이 없어 더 자
세한 것은 알 수 없으며, 17세기 초반 현진의 조각적 특징을 잘 갖추고 있고, 보존 상태도 양
호한 편이다.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는 그는 키 108cm로 1726년에
연령군의 부인 서씨가 세상을 떠난
남편과 다시 만날 것을 꿈꾸며 절에 돈을 대어 불상에 금칠을 했다. 1974년에 연화개금을 하
였고, 1980년에 다시 개금(改金)을 했는데,
몸을 가린 대의(大衣)의
옷주름은 배 아래 부분에
서 크게 'U'자형을
그리고 있고 두툼한 옷주름
형태를 나타내고 있으며, 얼굴과 머리 부분이
다소 커 보인다.
머리 중앙에는 육계(무견정상)가
두툼히 솟아있고 두꺼운 목에는 삼도(三道)가 획 그어져 있
는데 두 손은 중품하생인(中品下生印)의 수인을 취하고 있다.
|
▲ 사자암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87호 |
아미타3존상
좌측에는 신중도가 액자에 고이 담겨져 있다. 이 탱화는 1846년에
조성된 것으로
불교를
지키는 호법신장들이 정신없이 담겨져 있어 그야말로 혼을 빼놓는다.
그림을 살펴보면 금강저(金剛杵)를 든 위태천(韋太天) 동진보살이 그림 상단 오른쪽에
독수리
깃이 달린 투구를 쓰고 있다. 연꽃가지를 든 제석천(帝釋天)과
범천(梵天)은
화면의 상단
좌
측
중앙에 두고 토속신을 곳곳에 배치했으니 이는 기존의 토속신을 받아들여 성장한 우리나라
불교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가로 223cm, 세로 162cm의
크기로 지포(紙布) 위에 그려졌으며,
그림을 그린 이는 송은당 수찬(松隱堂
守讚)이다.
사자암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탱화가 4점씩이나 되건만 속시원히 공개된 것은 신중도가 거의
유일하며 이번에도 신중도 밖에는 친견하지 못했다. |
▲ 단하각(丹霞閣) |
공양간(동쪽
요사) 뒤쪽 언덕에는 이름도 낯선 단하각과 수세전이 높게 터를 잡아 경내를 굽
어본다. 이들은 정면과 측면이 달랑 1칸인
조촐한 맞배지붕 건물로 서로 비슷하게 생겼다.
단하각은 1910년에
중수했다고 하며, 현재 건물은 1985년에
원명이 중건한 것으로 우리에게
꽤
익숙한 산신(山神)과
독성(獨聖, 나반존자)이
봉안되어 있다. 그러니까 산신각과 독성각의
역할을 하는 공간으로 보면 되겠다. |
▲ 단하각 산신탱(왼쪽)과 독성탱(오른쪽)
20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들로 세월의 때가 좀 끼어서 그럴까.
조금은 늙어 보인다.
▲ 수세전(壽世殿) |
단하각과 비슷하게 생긴 수세전은 인간의 목숨과 수명, 무병장수를 관장하는 칠성(七星)의
거
처이다. 보통 칠성(치성광여래)을 봉안한 건물을 칠성각이라 부르지만 여기서는 그 흔한 이름
대신
인간의 수명을 뜻하는 수세전을 이름으로 취해 좀 튀어보이게 했다.
이 건물은 1985년에
지어진 것으로 내부에는 같은 해에 조성된 칠성탱이 있으며, 앞서 산신과
독성이 봉안된 단하각처럼 '각'을
칭하지 않고 '전'을
칭하고 있어 칠성이 그들보다 1단계
높
은 대우를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각'보다 '전'이 격이 더 높음)
|
▲ 단하각 앞에 멋드러지게 솟은 소나무의 위엄
▲ 사자암 마애사리탑(磨崖舍利塔) |
일주문 직전에서 나무가 우거진 산자락(남쪽)을 보면 산비탈에 누운 커다란 바위가 여럿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중 일주문과 가장 가까운 바위를 잘 살펴보면 그 한복판에 네모나게 다져진
홈과 구멍이 마치 바위의 눈 같은 모습으로 시야에 보일 것이니 그가 바로 마애사리탑으로 그
주변에도 1기가 더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마애사리탑이란 바위에 네모지게 홈을 다지고 그 윗도리에 감실(龕室)을 내어 사리나 유골 등
을 넣어둔 것으로 흔히 생각하는 승탑(僧塔, 부도)의 모습과는 크게 차이가 있다. 쉽게 말하
면
바위에 새긴 사리 보관함으로 보면 된다. 이런 사리탑은 18~20세기에 나타나는 양식으로
그럴싸한 승탑(부도)을 짓기 어려운 절에서 절 주변 바위를 이용해 사리탑을 다졌다. 그저 바
위와 그의 피부를 파고 다듬는 도구만 있으면 되니 아주 쉽고 간편하다. (그런 사리탑을 강제
로 문신처럼 지녀야 되는 바위는 좀 고통스러울 듯)
사자암 마애사리탑은 20세기 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승려의 유골함으로 여겨진다. (자세한 정
보가 없음;) 관련 명문이 새겨진 18~19세기 것과 달리 조그만 감실과 홈만 있어 조금은 빈약
하다. |
▲ 가까이서 바라본 조촐한 마애사리탑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인간의 소소한 마음 같다.
▲ 하얀 글씨가 칠해진 또 다른 마애사리탑 (20세기 중~후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