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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대사, 훈민정음 창제자인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홍현보
※ 국립국어원 온라인 소식지 <쉼표, 마침표.>(2019년 12월) 573돌 한글날 특별호 ‘오늘의 발견, 다시 보는 한글’에 실린 고려대학교 정광 명예교수의 글 ‘훈민정음 창제의 두 주역, 세종대왕과 신미대사’에 대하여 사실 왜곡과 논리 비약을 밝힙니다. 이를 위하여 정교수님의 글 전체를 차례대로 쪼개어 살펴봅니다.
(정광 1) 한글에 대하여 우리 민족은 대단한 애착을 갖고 있고 누구나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매일 한글을 시용하면서 이 문자의 유용함과 편리함을 스스로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상용하는 이 문자에 대하여 누가 어떻게 제정하였는지, 그 배경 이론은 무엇인지, 주변 문자와의 관계는 어떤지에 대하여 너무 알려진 것이 없다. 그저 학교에서 가르친 대로 “영명하신 세종대왕이 사상 유례가 없는 문자를 독창적으로 만드셨다.”가 한글 창제에 대하여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의 대부분이다. 세종을 창힐(蒼頡)과 같은 신으로 생각한 것이다.
(홍현보 1) ‘이 문자에 대하여 누가 어떻게 제정하였는지, 그 배경 이론은 무엇인지, 주변 문자와의 관계는 어떤지에 대하여 너무 알려진 것이 없다.’라는 전제가 모호합니다. 세종이 제정하고, 사성 칠음과 음양 오행 이론을 바탕으로 입안의 움직이는 형태를 살펴 만들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동양의 여러 나라에서 각기 다른 문자를 만들어 썼다는 것도 늘 교육하는 일입니다. 교수님은 아마도 그런 훈민정음 해례본의 내용이나 당시 다른 많은 집현전학사, 그리고 현대 학자들의 이해를 반박하고 다른 주장을 내세우려는 전제라고 이해한다 해도, 이렇게 전혀 모른다고 보는 생각은 세종의 창제 사실을 뿌리째 흔들어 왜곡한 주장입니다. ‘세종을 창힐과 같은 신으로 생각한 것이다.’라는 주장에 논리의 비약이 있습니다. 세종이 언문을 창제한 것이 사실인데도, 세종을 창힐과 비교함으로써 신적 존재화하여 창제 자체를 부인하거나 틀린 사실로 내세운 것이라면, 다윈이나 아인슈타인 역시 신적 존재가 됩니다. 이런 논리적 비약은 과학자의 자세로 보기 어렵습니다.
(정광 2) 한글을 전공하는 학자들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세종대왕의 독창적인 창제라는 주장은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시작한 우리말과 우리글의 연구에서 특별히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전해져서 한글을 연구하는 분들은 이 문자의 우수함을 자랑하는 것을 자신들의 사명으로 삼고 있어 이를 자랑하기에 급급할 뿐 한글을 세종이 아닌 다른 사람의 도움이 있었다든지 다른 문자와 비교한다든지 하는 것은 생각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홍현보 2) 한글이 우수한 문자라고 주장하는 것이 독립운동의 일환이어서, 오늘날 국내 국어학자들이 이를 사명으로 삼는다고 하셨습니다만, 오히려 우리가 학문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증명해 내지 못한 한글의 과학성을,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훌륭한 학자들이 먼저 주장한 면이 많다고 봅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일제 치하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세종의 독창적 창제를 강조했다’는 말은 근거 없는 주장입니다. 이미 15세기 이후 전 세기를 통해 수많은 학자들이 세종의 문자 창제의 독창성, 융통성을 인정하거나 극찬해 왔으며, 개화기 전후 우리나라에 들어와 한글의 존재를 알게 된 서양인들의 극찬도 있었습니다. ‘한글을 세종이 아닌 다른 사람의 도움이 있었다든지 다른 문자와 비교한다든지 하는 것은 생각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라는 말은 사실과 전혀 다릅니다. 누가 어떤 주장을 가로막고 못하게 하거나 강압적으로 억누른 사실은 없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학자들이 친제설을 부인하거나 다른 여러 제작설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런 주장이 제대로 된 근거나 논리, 사실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빈약한 주장이 되는 것이고, 학계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이지요.
(정광 3) 그러나 제왕(帝王)인 세종이 혼자서 백성들을 위하여 새 문자를 만들어 주었다는 이야기는 신화라고 볼 수밖에 없다. 한글을 문자학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 특히 외국인 연구자들은 이러한 신화를 믿지 않는다. 한국의 국내 연구에 기대거나 한류에 편승하려는 일부 외국 연구자를 빼고는 대부분의 한글을 연구하는 외국학자들은 거의 모두가 주변 문자와의 관계, 특히 한글보다 170여 년 전에 표음 문자로 만들어진 파스파 문자와의 관계에 관심을 갖는다. 일부 연구자들은 한글이 파스파 문자를 모방한 것이라는 주장까지 서슴지 않는다.
필자가 보다 못하여 2008년 11월에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주최한 국제학술회의에서 “훈민정음 자형(字形)의 독창성”을 발표한 후에는 이러한 주장들이 좀 잦아들었다. 그렇지만 아직도 한글과 파스파 문자와의 관계를 모방으로 보려는 연구자들이 없지 않다.
(홍현보 3) 세종의 지식과 지혜에 관한 역사적 사실은 차고도 넘칩니다. 그가 통치하면서 이루어놓은 업적이나 유물, 유적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자나 로마자가 오랜 시간 변하면서 문자로 성립되기는 하였지만, 한 개인이나 몇몇 사람이 만든 문자도 여럿 있습니다. 문자를 한 사람이 제작할 수도 있다는 것은 신화적인 이야기라고 폄하할 수 없는 근거가 됩니다. 정교수님의 말씀은 문자 제작 원리가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조물주의 창조물이 아니란 것을 강조하였다면 옳은 지적이나, 세종이 한글(훈민정음)의 제작 원리를 어떤 과거의 학문적 성과나 원리에 맞추어 따랐다면 그것은 누구나 가능한 일입니다. 최만리 등의 상소에서 열거한 문자 중, 몽골문자, 서하문자, 여진문자, 일본문자, 서번문자가 각각 그 제작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몽골문자 중 위구르문자는 아람계통 문자로서 오랜 시간을 거쳐 발전된 문자지만, 파스파문자는 원나라 황제 세조(쿠빌라이 칸)가 티베트 승녀 파스파를 시켜 만든 문자입니다. 서하문자는 서하의 초대 황제 경종 이원호가 창제하여 1038년에 공포한 문자이고, 여진문자는 금나라 태조가 희윤에게 명하여 나랏글자를 만들게 하여 여진대자를 사용하다가 희종이 여진소자를 만들었습니다. 일본문자는 잘 알다시피 구결과 같은 원리로 7세기 전후에 만들어졌고, 서번(티베트)문자는 7세기 중반 송첸 감포왕이 재상인 톤미 삼보타를 인도에 파견하여 글을 쓰는 방법을 배워 오게 하여 만든 문자입니다.(김주원 훈민정음(2013, 민음사) 참조)
정교수께서 밝힌 파스파문자와의 관계도 한글 창제 원리에 근원이 되는 이론이나 원리를 밝힌 점에서 훌륭합니다. 그 유연성에 대해 많은 부분 일리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자모의 분리와 초중종성의 삼분법은 파스파문자 제작 원리와 대단히 닮아 있습니다. 그러나 세종이 새 문자를 만들었다는 역사적 사실과 구체적인 증거 문헌에도 불구하고, 신화다 거짓이다라는 주장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제3자가 만들었다는 증거를 찾지 못하였다고 해야 옳습니다.
(정광 4) 외국의 연구자들만 한글이 파스파 문자와 관련이 있다고 본 것은 아니다. 우리의 선학들도 이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예를 들면 유희(柳僖)의 「언문지(諺文志)」(1824)의 ‘전자례(全字例)’에서 “諺文雖刱於蒙古, 成於我東, 實世間至妙之物(언문은 비록 몽골에서 시작하여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졌지만 실제로 세간에 지극히 오묘한 것이다.)”라고 하여 한글이 몽골의 파스파 문자에서 발달한 것으로 보았다. 이어서 같은 책의 ‘초성례(初聲例)’에서는 “我世宗朝命詞臣, 依蒙古字樣, 質問明學士黃瓚以製(우리 세종께서 신하들에게 명하시어 몽골 글자에 의거하고 명의 학사 황찬에게 질문하여 지은 것이다.)”라고 하여 훈민정음이 蒙古字樣(몽고자양), 즉 파스파 문자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주장한 훈민정음의 몽골 문자 기원설을 추종한 것이다.
(홍현보 4) 유희가 펴낸 언문지는 1824년에 나온 책입니다. 이 책에서 유희가 말한 ‘依蒙古字樣(몽골 문자에 의거하였다.)’은 최만리 등이 말한 ‘皆本古字(모두 옛 글자를 기본으로 하였다.)’와 ‘倣古之篆文(옛 전문(篆文)을 본받았다.)’을 닮았습니다. 이 말은 정인지가 말한 ‘象形而字倣古篆(글자의 모양은 옛 전자를 본받았다.)’(훈민정음 서문)에 연유하여 한 말로서, 세종실록 1443년 12월 30일 기록에 실린 ‘其字倣古篆(그 글자는 옛 전서체를 본떴다.)’의 근거가 됩니다. 그런데 유희는 ‘皆本古字’를 ‘依蒙古字樣’이라고 하여, 정인지가 이어서 한 말 ‘倣古之篆文’을 의도적으로 왜곡하였습니다. 정인지는 당시 조선의 생도들이 배우는 잡학 중 ‘자학(字學)’에서 배우던 글씨 즉, 한자의 서체 ‘대전(大篆)과 소전(小篆)’을 가리켰습니다만, 유희는 16세기 성현이 용재총화(1525)에서 ‘其字體依梵字爲之(그 글자체는 범자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라고 주장한 것을 맹신한 것입니다. 18세기 이익이 쓴 성호사설(1740) 「인사문(人事門)」에는 ‘훈민정음의 몽골문자 기원설’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然則與今諺字 不過形別而意同者歟(그러므로 (파스파문자가) 이제 우리나라 언문 글자와는 꼴이 다르지만 뜻은 같았을 것이다.)’라고 하였을 뿐입니다. 참고로 그 앞뒤 글을 제시합니다. 이익의 글은 이미 18세기 이전부터 훈민정음을 알거나 본 사람이 전혀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고, 이익조차도 언문이 언제 창제되었고, 훈민정음이 언제 반포되었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왜 황찬을 만나야 했는지도 모르고, 창제와 반포 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앞뒤로 뒤섞어서 말하기도 합니다.
[언문] 우리나라의 언문 글자는 세종 28년인 병인년에 처음 지었는데, 온갖 소리를 글자로 형용하지 못할 것이 없었다. 사람들은 이를, ‘창힐(새와 짐승의 발자욱을 보고 모양을 모방하여 글자를 만든 사람)과 태사 주(籒, 주나라 선왕 때 사람으로 전자(篆字)를 만들었음)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다.’ 하였다. 원나라 세조 때에 파사파라는 자에게 부처의 가르침을 얻어 몽고 글자를 짓게 하였는데, 평상거입의 네 가지 음운으로써 입술, 혀, 목구멍, 이, 어금니, 반혀, 반잇소리 등 칠음의 모자(母字)로 나누어 무릇 소리가 있는 것은 하나도 빠짐이 없었다. 무릇 중국의 글자는 형상을 주로 하므로 사람들이 손으로 써서 전하고 눈으로 볼 수 있는데, 몽고 글자는 소리를 주로 하므로 사람들이 입으로 전하고 귀로 듣게 되어 있다. 그러나 형상이 전혀 없으니 어떻게 유전하여 사라지지 않겠는가? 이제 그 자세한 내용을 얻어 볼 길이 없는 것이다. 만약 규례를 미루어 문자를 만들었더라면 천하 후세에까지 통용되어 우리나라의 언문과 같은 효과를 얻었을 것이니, 생각건대 명나라 초엽까지는 그 법규가 남아있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언문을 처음 지을 때에는 궁중에 관서를 차리고 정인지, 성삼문, 신숙주 등에게 명하여 책을 찬집[撰定]하게 하였다. 이때에 명나라 학사 황찬(黃鑽)이 죄를 짓고 요동으로 귀양와 있었는데, 성삼문 등을 시켜 찾아가서 질문하게 했으니 왕복이 무릇 13차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추측해 본다면 지금 언문이 중국의 문자와 판이하게 다른데 황찬과 무슨 관련이 있었겠는가? …줄임… 그러므로 이제 우리나라 언문 글자와는 꼴이 다르지만 뜻은 같았을 것이다. 무릇 중국 문자는 소리는 있으나 문자로써 형용할 수 없는 것이 반이 넘는다. 입술과 혀와 목과 이를 여닫아 맑고 흐린 음성이 입에 따라 다른데, 무슨 까닭으로 이를 형용하는 문자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단 말인가? 지금의 우리 언문 반절은 무릇 14모음이고 모음만 있고 절(切)이 없는 것이 또한 4가지이니, 일반적으로 이른바 입성이 이것이다. (…이하 줄임).
諺文 我東諺字刱於世宗朝丙寅 凡有音者 莫不有字 人稱倉籒以來未始有也 元世祖時巴思八者 得佛氏遺敎 制蒙古字平上去入四聲之韻 分脣舌喉齒牙反脣反齒七音之母字 苟有其音者 一無所遺 凡中國之字以形爲主 故人以手傳而目視也 蒙字以聲爲主 故人以口傳而耳聽也 然全無其形 又何能傳而不泯 今無以得見其詳 若推例爲文字 可以通行於天下後世 與我之諺文同科 意者明初必有其法也 我國之始制也 設局禁中 命鄭麟趾成三問申叔舟等撰定 時皇朝學士黃鑽 罪謫遼東 使三問等往質 凡往返十三度云 以意臆之 今諺文與中國字絶異 鑽何與焉 是時元亡 纔七十九年 其事必有未泯者 鑽之所傳於我者 抑恐外此 更無其物也. …줄임… 然則與今諺字 不過形別而意同者歟 凡中國書 有音而無字字過半 凡脣舌喉齒開合淸濁 隨口異聲 何故或有或無 今諺半切凡十四母 有其母而無其切亦四條 俗所謂入聲也….(성호사설 16권 「인사문」 ‘언문’ 1~2쪽(국역본, 1977, 민족문화추진회, 122~124쪽))
(정광 5) 실제로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에 파스파 문자는 많은 지식인들이 알고 있는 한자음의 표음문자였다. 신숙주는 파스파 문자로 한자음을 표음한 <몽운(蒙韻)>, 즉 『몽고운략』, 『몽고자운』, 증정 『몽고자운』을 인용하였고 그들의 한자음 연구에 이 <몽운>을 이용한 것은 그의 『사성통고』와 이를 전재한 최세진의 『사성통해』를 통하여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역관들의 과거인 역과(譯科)에서는 ‘첩아월진(帖兒月眞)’이란 이름의 파스파 문자를 시험하였다. 따라서 파스파 문자는 당시 지식인들에게 한자음 표음에 편리한 문자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홍현보 5) 신숙주의 연구와 파스파문자의 유입에 대해서는 깊은 연구를 하셨습니다.
(정광 6) 한글 창제에 대한 또 하나의 관심은 누가 한글을 창제하였는가 하는 문제다. 모두에 말한 대로 ‘영명하신 세종대왕의 창제’로 보면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제왕의 일에는 많은 신하들이 참여하여 도와주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누가 어떻게 도왔는지 별로 연구가 없다.
우선 세종의 주변에서 새 문자의 제정을 도운 이가 유학자들은 아닌 것 같다. 원나라 이후에 북경 주변의 중국 동북 방언으로 발음되는 중국 한자음과 당나라 때의 서북 방언을 기반으로 하여 형성된 우리 한자음, 즉 동음(東音)은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따라서 세종은 같은 한자의 발음이 우리와 중국이 서로 다른 “국지어음(國之語音) 이호중국(異乎中國)”의 현실을 직시하고 이를 해결하려고 고심하였다.
그래서 창안한 것이 동국정운식 한자음이었는데 이렇게 인위적으로 새로운 한자음을 정하는 것을 동음으로 한자를 익힌 기성학자들이 달가워할 리가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도움을 주기는커녕 새 문자와 새 한자음의 제정을 극렬하게 반대했다. 또 몽골의 원(元)이 한자 문화에 저항하기 위하여 파스파 문자를 제정한 것처럼 조선이 새 문자를 만드는 것을 명(明)이 좋아할 리가 없었다. 따라서 기성 유학자들의 반대와 명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가족과 일부 젊은 유학자들만을 동원하여 암암리에 창제 작업을 추진한 것으로 보인다. 요동에 유배를 온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에게 한자음을 듣고 이를 새로 만든 문자로 적어 오도록 신숙주와 성삼문을 파견한 것으로 보면, 졸저 『증정 훈민정음의 사람들』(2019)에서 고찰한 것처럼, 훈민정음의 <해례본> 편찬에 관여한 ‘친간명유(親揀名儒)’의 8명이 세종의 가족들과 함께 새 문자 제정에 동참한 것으로 보인다.
(홍현보 6) 두번째 문장에서는 ‘유학자들이 돕지는 않은 것 같다.’라고 하면서도, 뒤에서는 ‘가족과 일부 젊은 유학자들만을 동원하여 암암리에 창제 작업을 추진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하여 앞뒤가 다르게 말하셨습니다. 그리고 동국정운은 1447년 9월 29일에 다 지어서 1448년 10월 17일에 인쇄가 끝나 반사(頒賜)한 책입니다. 그러나 동국정운식 한자음이 인위적 한자음이어서 최만리 등이 극렬하게 반대했다고 하였는데, 최만리 상소는 1444년 2월에 올렸으니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일부 젊은 유학자들’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훈민정음 제작에 참여한 8인 중 누구도 문자 창제에 세종과 함께 참여하였다는 말을 한 사람이 없습니다. 세종은 1443년 12월 창제 사실을 말할 때 이미 초성, 중성, 종성의 원리와 형태를 소상히 밝힌 상태였습니다. 이를 듣고 난 뒤에 최만리 등이 ‘신기하고 놀랍다.’라고 했고,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여 창제하신 지혜가 천고에 뛰어나시다.’라고 상소문에 밝힌 바 있습니다. 신숙주 등이 황찬을 만난 것은 1445년 1월의 일입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사건의 앞뒤가 뒤섞여 정확한 근거로 보기 어렵습니다.
(정광 7) 이들이 도와서 만든 새 문자는 반절(反切)과 관계가 있다. 반절은 졸고 “반절고(反切考)”(『어문논집』 제81호, 『中國語學 開篇』, 東京: 好文出版, 『國際漢學』, 北京: 外硏社)에서 살펴본 것처럼 서역(西域)의 역경승(譯經僧)들이 불경을 한역(漢譯)하기 위하여 한자를 학습할 때에 한자의 발음을 표시하려고 개발한 것이다. 한자는 표의문자이기 때문에 그 발음을 따로 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반절은 서역의 역경승들이 자신들의 범자(梵字)를 반자(半字)로 나누어 배운 것처럼 한자도 발음을 2자로 표음하여 배우고자 만든 것이다. 리그베다 경전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 즉 범어(梵語)는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진 개음절의 언어로서 이를 표기하는 범자(梵字)는 자음+모음으로 된 음절 문자다. 따라서 고대 인도에서 범자를 교육하기 위하여 자음과 모음의 글자를 각기 반자(半字)로 보아 먼저 이를 교육하는 반자교(半字敎)가 있었다. 반쪽 글자의 교육은 말하자면 알파벳 교육인 것이다. 그리고 이를 결합하여 하나의 완성된 글자를 만자(滿字)라고 하고 이를 교육하는 것을 만자교(滿字敎)라고 하였다. 자음과 모음의 결합으로 완성된 음절 문자는 실담(悉曇)으로 불린다. 실담은 범어 'sidh-(완성하다)‘에서 온 파생명사로서 ’완성된 글자‘ 즉, 만자(滿字)를 말한다. 알파벳 교육인 반자교와 실담의 교육인 만자교는 여러 불경에서 반만이교(半滿二敎)라고 소개하였는데 모두 범자(梵字)의 문자 교육이다.
이러한 범자의 교육으로부터 역경승들은 한자음도 이러한 반자(半字)와 만자(滿字)의 방법으로 학습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한자음은 범어와 달리 음절 구조가 복잡하다. 즉, 자음과 모음만으로 된 것이 아니라 모음 다음의 음절 말(coda)에 다른 자음이 결합된다. 따라서 역경승들은 음절 초(onset)의 자음과 나머지(rhyme)로 구분하고 이들의 결합으로 한자음을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한자음을 첫 자음의 반절상자(反切上字)와 나머지의 반절하자(反切下字)로 구분하여 2자로 표음하였다. 즉, 동녘 동(東)자를 덕(德)의 [t]와 홍(紅)의 [ong]을 결합시켜 ‘덕홍절(德紅切)’의 [tong]으로 발음을 표음하는 방법이다. 이것을 중국에서 그대로 받아들여 반절상자를 성(聲)으로 하고 반절하자를 운(韻)으로 하는 성운학(聲韻學)을 발달시켰다. 그리하여 수나라 때의 『절운(切韻)』 이후에 중국의 모든 운서는 이 반절로 한자음을 표음하기에 이른다.
(홍현보 7) 여기서 정교수께서 설명한 ‘반절’에 대한 말씀은 수나라 이전의 일이며, 601년(수 문제 21)에 육법언(六法言) 등이 편찬한 책이 절운입니다. 반절의 역사와 한글 창제와는 시기적으로 거리가 멀고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정광 8) 훈민정음으로 불리는 언문(諺文)은 반절로 인식하였다. 즉, 한글의 기역, 니은을 처음으로 보여 준 『훈몽자회』의 「언문자모」에는 부제(副題)로 “반절27자(反切二十七字)”라 하였다. 언문, 즉 훈민정음을 반절로 본 것이다.
(홍현보 8) 그렇습니다. 최세진은 훈몽자회에서 중국 한자의 구분법인 반절로 언문을 설명하였습니다. 매우 큰 실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최세진은 이 책에서 한글의 순서를 정리하면서 훈민정음의 순서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최세진이 훈민정음을 읽었거나 알고 있었다면 최소한 세종의 제자 원리에 따른 순서를 제시하고 난 다음 자신의 주장을 펼쳤을 것입니다만, 단지 한자의 분류법인 반절법으로 언문을 분석하였다는 것은 그의 한계를 드러낸 것입니다.
(정광 9) 또 세조 5년에 간행한 신편 『월인석보』에 첨부된 「세종어제훈민정음」의 협주에 ‘훈민정음’을 “백성 가르치시는 바른 소리”로 풀이하였다. 즉, 임금이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올바른 한자음이란 뜻이니 세종이 새로 만든 동국정운식 한자음을 말하는 것이다. 훈민정음이란 새로운 동국정운식 한자음을 표음하는 기호라는 뜻이다.
(홍현보 9) 언해본의 협주 ‘백성 가르치시는 바른 소리’를 ‘백성 가르치시는 올바른 한자음’으로 해석한 주장은 터무니없습니다. 세종의 서문이나 예의편을 언해한 것이 어떻게 올바른 한자음을 제시한 것입니까? 언해본은 그야말로 해례본에 적은 세종 임금의 말씀을 우리말로 풀어 쓴 것이며, 그 자체가 ‘백성 가르치는 바른 소리’로 문장을 적었음을 밝힌 글입니다. 언해본에서 동국정운식 한자음을 쓴 것은 한자에만 국한된 것이며, 조선의 한자음을 공식적으로 제시하기 위한 것일 뿐, 언문으로 문장을 풀어 쓴 것은 새로운 문자로 우리말을 써 낼 수 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용비어천가와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에서 실험적으로 써내려간 우리말 언문 문장을 볼 때, 새로운 문자를 절대 ‘동국정운식 한자음을 표음하는 기호’라고 정의할 수는 없습니다. 왜곡 중의 왜곡입니다.
(정광 10)신미대사가 새 문자의 제정에 가담한 것은 초기에 반절상자를 언문 27자로 만든 이후의 일이다. 즉, 한글 제정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세종실록』(권103) 세종 25년 12월조에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中略] 是謂訓民正音(이 달에 임금이 언문 28자를 친히 만들었으니 …중략… 이것을 훈민정음이라고 하다.)”라는 기사다. 그러나 바로 2개월 후인 세종 26년 2월의 최만리 반대 상소에는 “언문 27자”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임홍빈 교수는 “한글은 누가 만들었나”(『국어학논총』, 2006)에서 세종 25년 12월의 기사는 나중에 추가된 기사라고 보아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필자는 『증정 훈민정음의 사람들』(2019)에서 세종 25년 12월의 기사는 최만리의 반대 상소에 보이는 것과 같이 반절상자의 초성만을 기호로 만든 언문 27자를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것으로 ‘운회’를 번역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여기서 운회는 <고금운회>를 말하며 이 운서로 『몽고운략』을 수정한 『몽고자운』이 있으니 운회의 번역은, 곧 몽운의 번역을 말한 것이다. 몽운의 파스파 문자를 새 기호로 교체하여 한자를 표음한 것이 바로 훈민정음이다.
그러다가 범자와 고대 인도에서 발달한 비가라론(毘伽羅論)의 성명기론(聲明記論)을 전공한 신미대사가 이 사업에 참가하면서 범자의 모음자인 마다(摩多)에 이끌려 중성자 11자를 추가하였다. 실담장(悉曇章)에서 마다는 12자였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초성, 중성, 종성이 구비되어 이 문자로 우리말도 표기할 수 있게 되었다.
(홍현보 10) 실록의 기록을 보면, 1443년 12월 30일, 임금이 이달에 언문 28자를 만들었다고 토로하였고, 1444년 2월 16일에 운회(고금운회거요)를 언문으로 번역하라 하였으며, 1444년 2월 20일에 최만리 등 7인이 연명하여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1년 정도 지난 1445년 1월 7일에 신숙주, 성삼문, 손수산을 요동에 보내어 운서를 질문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최만리는 1445년 10월 23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금운회거요는 고려 때부터 줄곧 한자의 운(韻)을 알기 위해 대다수의 선비들이 참고하던 책입니다. 한시(漢詩)를 짓거나 읽을 때는 자운(字韻)을 확인하기 위해 옥편과 같이 반드시 필요한 책이었고, 거기에는 한자말의 뜻이 달려 있어 정확한 낱말의 뜻을 알기 위해서도 언제나 보아야 했던 책입니다. 심지어 태종과 세종도 늘 운회를 찾아 낱말의 뜻을 알아보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런 책을 언문으로 번역하라고 한 세종의 생각은 극히 당연하고 최우선적이었음을 이해하고도 남을 일입니다. 그러나 운서를 번역하려고 보니 홍무정운이라는 새로운 명나라의 운서가 있었고, 그것을 번역하는 것이 시기적절함을 인식하여 홍무정운을 역훈하기로 방향을 돌렸고, 이를 위해서는 조선의 한자음을 먼저 정립해 놓아야 했기에 동국정운을 먼저 편찬하게 된 것입니다. 이 일련의 편찬 사업은 너무도 상식적이고 당연한 절차였습니다. 고금운회가 몽고운략을 참고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은 사성통고나 사성통해에 나오는 말이지만, 이미 1443년 12월 이전에 세종이 언문 28자를 만들었다고 하였음에도, 운회 번역을 한 뒤에야 모음을 만들었다는 주장은 전혀 근거 없는 말이며,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습니다. 중성 없는 글자로 운회를 번역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신미대사가 운회 번역에 참여하였다는 주장입니다. 근거 없는 말입니다.
(정광 11) 신미대사를 세종에게 추천한 것은 효령대군이다. 속리산 복천사에 우거하면서 범자와 성명기론에 정통한 것으로 이름을 날리던 신미를 세종이 수양대군을 보내어 불러 효령대군의 집에서 만난다. 그때는 최만리의 반대 상소로 인하여 세종이 새 문자 제정을 전면적으로 다시 검토할 때였다. 세종과 신미의 만남에 대하여는 신미의 동생인 김수온(金守溫)의 『식우집(拭疣集)』(권2) 『복천사기』에 자세하게 기록되었다.
세종은 신미의 새 문자에 대한 지식을 인정하여 수양대군과 김수온과 더불어 『증수석가보』를 언해하고 『석보상절』을 편찬하게 한다.
새 문자로 한자음만 아니라 우리말도 기록할 수 있는지를 시험한 것이다. 또 자신도 『월인천강지곡』을 저술하면서 스스로 이를 확인한다. 그리고 이 둘을 합편한 『월인석보』의 제1권 권두에 훈민정음의 <언해본>을 붙여 간행하여 언문, 즉 우리말을 표기하는 새로운 문자를 공표한다. 한글은 이렇게 제정된 것이다.
(홍현보 11) 문종의 말에 의하면, - 임금이 영의정 하연·좌의정 황보인·우의정 남지·좌찬성 박종우·우찬성 김종서·좌참찬 정분·우참찬 정갑손을 불러 도승지 이사철에게 명령하여 의논하게 하기를, “대행왕(세종)께서 병인년(1446)부터 처음 신미의 이름을 들으셨는데, 금년(1450. 세종이 돌아가시기 전)에는 효령대군의 사제로 옮겨 거처하여 정근하실 때에 불러 보시고 우대하신 것은 경들이 다 아는 바이다.”라는 기록(문종실록 즉위년(1450) 4월 6일)이 있습니다. 또 다른 기록에는, 신미대사가 1446년 3월 세종의 비 소헌왕후가 타계하였을 때 궁중에서 거대하게 치른 불교 예식을 주관하였다는 기록(세종실록 28년(1446) 5월 27일)이 있습니다. 이 두 기록을 연결해 보면, 소헌왕후의 장례식 때 불교 예식을 위해 처음 궁궐에 들어와 세종에게 그 이름이 알려졌고, 세종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신미가 세종을 알현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종과 신미의 만남에 대한 근거를 식우집 「복천사기」라고 하였습니다. 내용을 보겠습니다.
歲庚午。世宗大王不豫。移御孝寧之第。文宗及我主上殿下侍側。醫藥禱祀。尙未得效。於是。招集淨侶。至誠精勤。果獲靈應。聖躬乃安。諸宗室爭出金帛。乃成阿彌陁,觀音,大勢至三像。慧覺尊者眉公。來相是寺。允爲勝地。乃撤舊以新之。層樓傑閣。飛聳山谷。遂邀安三像於此。初世宗大王聞尊者名。自山召至。賜坐從容。談辨迅利。義理精暢。奏對稱旨。自是。寵遇日隆
(경오년(1450)에, 세종대왕께서 편찮으셔서 효령대군의 집으로 자리를 옮기셨다. 문종과 세조가 곁에서 모셨는데, 약을 처방하고 제사도 지내보았으나 효험이 들지 않았다. 이에 세속에 물들지 않은 승려들을 모아들여서 지극정성을 다하니 병환이 조금 좋아졌다. 모든 종실이 금과 비단을 내어 곧바로 아미타, 관음, 대세지 3상(像)을 만들었는데, 혜각존자 신미공이 이 절에 와서 돌아보고는 ‘참으로 좋은 곳이다. 옛것을 철거하고 새롭게 하였으니 층층이 누각과 걸출한 전각이 산골짜기에 나를 듯이 솟았네.’ 하니, 드디어 이 세 상을 모셔 안치하였다. 처음에 세종께서 신미의 이름을 듣고 산으로부터 불러 담소를 나눈 것이다. 신미의 대답이 모두 이치에 맞고 의리가 정밀하고 넓었다. 아뢰고 답하는 것이 세종의 뜻에 어긋남이 없었다. 이로부터 세종의 대우가 두터웠다.) - 식우집(김수온) 권2, 「복천사기(福泉寺記)」(한국문집총간(1988) 75~77쪽)
(홍현보 결론) 결국 신미가 효령대군과 세종을 만난 때는 문종이 말한 실록의 기록과 같이 1450년 1월입니다. 이때는 언문 창제와 훈민정음 반포가 모두 이루어진 이후입니다. 식우집(1673) 기록이 언문 창제에 신미가 참여하였다는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정광 교수님은 일찍이 수많은 저서를 펴내셨으나 단 한 번도 신미 창제설을 제시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이번 ‘훈민정음의 사람들’ 개정판에서 갑자기 거론하시면서, 그 근거를 정확히 제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제시하신 식우집 복천사기는 신미의 동생 김수온이 지은 글인데, 여기서도 실록의 기록과 같이 1450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근거가 없는 주장을 ‘카더라식, 라고 생각한다식’으로 엄청난 왜곡을 계속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홍현보(세종대왕기념사업회 연구원, 한글문화단체모두모임 사무총장)
*국립국어원이 많은 국민의 오해를 풀기 위해서는 진지한 검토가 선행되었어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을 때는 반박글을 이어서 실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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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 9일. 국립국어원 최혜원 공공언어과장이 전화하여 국립국어원의 잘못은 없다고 함. 김무봉 교수와 정광 교수의 글을 게재하면서 다음과 같이 앞에 밝혔기 때문이라고 함.
한글 창제의 여러 가설 중 하나를 실제처럼 구성한 영화 <나랏말싸미>가 지난여름 많은 논란 속에 개봉되었습니다. 국어원은 한글날을 맞아 일반인의 한글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기 위해 ‘세종 친제설’(김무봉 교수), ‘세종·신미 합작설’(정광 교수)을 독자들에게 나란히 소개합니다. 이 글들은 한글 창제에 대한 학계의 다양한 의견을 소개하는 것으로, 국립국어원의 의견과는 무관함을 알려 드립니다.
그럼에도 많은 독자들은 전혀 근거 없는 글을 실음으로써 정교수의 주장에 날개를 달아 주었다고 생각하니, 국립국어원의 책임론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하면서 반박문을 실어달라고 했음. 원장에게 보고하겠다고 함.
*2020년 1월 16일. 최혜원 과장이 다시 전화하여, 금방은 어렵고 올해 세종 탄신일에 즈음하여 원고 청탁을 할테니 그때 정리하여 원고를 써주면 실어주겠다고 하였음. 그래서 ‘그렇게 알고 기다리겠다’라고 답변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