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회초리
시 아버지께서 곱게
만드신
산죽 회초리 두 자루를 보내
주셨습니다
잡곡을 밥에 섞어
먹으라고
잡곡 자루와 함께 택배로
부치셨는데요
길이 30센티 산죽을 곱게
다듬어
치자물까지 드려
정성을 다해 만드신 회초리 두자루
우리 쌍둥이 남매
곱게
잘키우는데
사랑의 매를
아끼지
마시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손주
사랑은
시부모님께서 더 사랑 하신다는
사랑이야기가 가득 하셨고,,
회초리
사용법을
나름대로 적어 보내셨습니다
우리집 쌍둥이
남매를
곱고 착하고 강하게
키우는것이
부모의 책임이며 아이를 강하게
키워야만
이 풍진 세상을 탈없이 살아간다는
뜻이시란다
그리고 시아버지 세상사는
경험이라시면서
회초리 사용법을
써보내셨습니다
이 회초리
사용법
시 아버지 세상
경험
노하우시라고 보내신
내용입니다
첫째 아이가
세살먹으면
이유없는 나쁜 버릇을
할때
회초리를 들어야
한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말
명심해라
선조들의 기막힌 경험 철학이다
두째 회초리를
사용할때
회초리에 감정을 실어서는
안된다
부모의 사랑으로
회초리를 사용해야
한다
<절대 감정을 실어 매를 들면 아이에게 해가
된다>
세째 회초리 사용은
절대 세대 이상 사용해서는
안된다
세대 이상은 폭력이
된다
회초리를 사용후 반드시 아이에게
그 잘못을 반드시 설명을 해서 이해를 시켜라
<옛말에 채찍과 당근으로 말
안듣는
당나귀를 길들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경험에서 얻으신 시
아버지가
회초리 사용법까지 보내 셨습니다
시 아버지는 아이들 셋을
키우셨는데
비가와도 절대
우산을
학교에 가져다 주는 법이 없으셨고
자기
스스로가
세상 경험을 하게끔 하셨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쌍둥이 아버지가
세상을 사는데 강한건지 모르겠지만요,,
시아버지 친구분이 자녀를
초중고 학교생활 12년동안
자가용 등하교를 시키고
키웠더니
훗날 결혼 생활에도
적응을 못해 애를
먹었다는
이야기를 가끔씩
하십니다
흔한 말이지만 아이들에게
고기를 잡아 주는것
보다
고기잡는 방법을
알려주는게 좋은 방법이라고 하시는 우리 시아버님
아버님!! ~ 백번 천번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며느리 속으로 하는 결심 입니다
"애들을 잘 키워 둬야 너희들 훗날이 편한거라"
두고 쓰시는 시아버님 명언 이시랍니다
^^==^^ 詩庭박 태훈의 해학이있는 아침중에서 ^^==^^
◈실화-조선시대 부부 사랑법◈ 진짜 멋있는 남편은?
진짜 멋있는 남편은 어떤 사람일까? 외모가 준수하고 잘생긴 사람일까? 마음이 푸근하고 자상한 사람일까? 아니면 경제적으로 능력이 뛰어난 사람일까? 내가 보기에 진짜 멋있는 남편은 자신보다 뛰어난 아내를 만났을 때 그것을 빨리 인정하고 고개를 숙일 줄 아는 사람이 아닐까 한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조선후기 강정일당의 남편 윤광연이었다. 그는 아내를 배려하고 존경하는 차원을 넘어 한평생 자신의 부인이자 스승으로 여기며 살았다.
강정일당(1772~1838)은 충북 제천에 있는 외가에서 태어났다. 강희맹의 후손으로 원래는 매우 유명한 가문이었으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단명하여 벼슬하지 못한 탓에 겨우 양반의 신분만 유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16살 때 아버지를 여윈 뒤로는 어려운 집안 형편 탓에 어머니를 따라 삯바느질을 하고 베를 짜야만 했다.
강정일당 사당
정일당은 20살 때 충주에 사는 14살의 윤광연과 결혼했다. 예로부터 금슬 좋은 부부 중에는 연상연하 커플이 많았는데, 그녀 역시 남편보다 6살이나 연상이었던 것이다. 윤광연의 아버지는 선비 윤동엽이었고, 어머니는 호가 지일당이었는데 시문으로 명성이 있었다. 그의 가문 또한 명문가의 후손이었으나, 당대에 이르러 벼슬하지 못해 가세가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
그래서 정일당은 결혼한 후에도 친정에서 계속 머물다가, 3년 뒤 시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짐을 꾸려 시댁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들 부부의 가난은 더욱 심해졌고, 결국 고향을 떠나 경기도 과천에서 남의 집을 빌려 살아야 했다. 또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정일당의 나이 43살에는 한양 남대문 밖 약현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정일당은 삯바느질을 계속하고, 윤광연은 서당을 열어 학동들을 가르치며 조금씩 재산을 모아갔다.
좋은 부인이자 멘토였던 아내
정일당은
남편 윤광연의 부인이자 멘토, 즉 정신적 지주였다. 그의 학문이나 교유관계, 서당일, 일상생활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것의 조언자였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윤광연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충청도와 경상도를 분주히 오가며 장사를 했다. 그러자 정일당은 ‘배우지 않으면 사람의 도리를 다할 수 없다’면서, 자신이 삯바느질과 베짜기로 집안의 생계를 담당할 테니 남편에겐 뜻을 지켜 학문을 닦으라고 권유했다.
또 윤광연의 학문이 어느 정도의 수준에 이르자 정일당은 ‘좋은 스승과 벗을 찾아 함께 배울 필요가 있다’면서, 당시 노론의 대학자인 송치규의 문하에 들어가 배우도록 했다. 윤광연은 항상 부지런히 공부했으나, 안타깝게도 벼슬과는 인연이 닿지 않았다. 정일당은 그런 남편에게 벼슬을 단념하고 안빈낙도의 생활을 하길 권했고, 윤광연도 그녀의 조언을 받아들여 일찌감치 관직을 포기하고 재야 학자로 남아 학동들을 가르쳤다. 그런데 윤광연은 학동들을 가르치기에도 능력이 부족했는지, 정일당이 직·간접적으로 개입하며 서당일에 많은 도움을 주곤 했다.
대표적으로 정일당이 윤광연에게 쪽지편지를 보내 학동들을 선발하는 기준이나 공부를 가르치는 방법에 대해 일러주는 장면을 살펴보자.
평민의 자제들 중에서도 뛰어난 아이들은 중국 고대의 하·은·주 시대에도 버리지 않았습니다. 지금 서당에서 ‘노귀’란 아이는 자상하고 명민하며, ‘이암’은 돈독하고 후덕하며, ‘유철’은 효성스럽고 신중하니 모두 가르칠 만합니다. 미천하다고 하여 소홀히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군자는
예가 아닌 것을 말하지 않는 법입니다. 괴이한 현상이나 현란한 귀신에 대해서는 공자님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근래에 보건대 서당 아이들이 이해득실이나 괴담을 이야기하면서 부질없이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왜 엄하게 꾸짖어 바르게 공부하도록 하지 않습니까?
'풍속도병' 중 서당, 작자 미상 뿐만 아니라 정일당은 윤광연의 의식주를 비롯한 낮잠이나 언어, 술, 흡연 등 생활습관까지도 세밀하게 뒷바라지하고 깨우쳐주었다.
옛날
문중자의 의복은 검소하면서도 깨끗했습니다. 지금 당신의 의복은 검소하기는 하나 깨끗하지는 못합니다. 검소한 것은 당신의 덕이지만, 더러워졌는데도 빨지 못하고 뜯어진 것을 제 때에 깁지 못한 것은 나의 잘못입니다. 삼가 잿물로 씻고 바느질하여 주겠습니다.
낮잠은 기를 혼탁하게 하고 뜻을 해이하게 하며, 말을 많이 하면 원망과 비망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술을 과음하게 되면 성품과 덕을 손상시키게 되고,
흡연을 많이 하게 되면 정신을 손상하고 거만함을 기르게 됩니다. 모두 다 경계해야 할 것들입니다.
이처럼 정일당은 윤광연의 학문과 교유관계, 서당일, 일상생활 등 거의 모든 것들을 일러주었다. 특히 그녀는 척독(尺牘), 즉 쪽지편지를 통해 수시로 남편에게 조언해주었다. 당시는 내외분별이 엄격한 시대요 집안에서 서당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쪽지편지는 내외간의 은밀한 의사소통에 아주 좋은 수단이었다. 또 그것 때문에 부부 사이도 더욱 돈독해질 수 있었다.
아내의 문집을 간행한 이유?
정일당은
1832년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아내를 잃고 난 후 윤광연은 지나칠 정도로 슬퍼했는데, 이에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그대의 슬퍼함이 너무 심하도다. 이제 홀아비가 되어 살자니 신세가 처량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가난해서 빈소를 차리고 제사를 지내는데 예법대로 하지 못해서인가? 어찌 그리도 지나치게 슬퍼하는가?” 그 말에 윤광연이 대답했다.
“그렇지 않다! 내가 어찌 그것 때문에 슬퍼하겠는가? 다만 나의 스승이 죽었으니, 앞으로 의심나는 것이 있어도 누가 그것을 풀어주겠는가?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있더라도 누가 그것을 도와주겠는가? 내게 잘못이 있더라도 누가 그것을 바로잡아주겠는가? 내게 허물이 있더라도 누가 그것을 훈계해주겠는가?
지극히 타당하고 바른 논의와 오묘한 뜻을 어디서 듣겠는가? 심신을 수양하고 품성을 닦는 방도를 어디서 배우겠는가? 내가 큰 과오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부모의 가르침 때문이고, 스승과 벗으로부터 훈도를 받는 것도 있으나, 그중에서도 가장 큰 공은 역시 부인이었다. 이제 부인이 나를 두고 떠나니, 마치 닻을 잃은 배와 같고 길잡이 없는 장님과 같다. 멋대로 흔들리며 의지할 곳이 없고 이리저리 넘어지며 갈 곳이 없다. 이것이 내가 심하게 슬퍼하는 이유로다.”
정일당유고
또한 윤광연은 정일당이 남긴 작품들이 사라질까 두려워서 『정일당유고』라는 문집을 간행하기도 했다. 그와 함께 주변의 이름난 문사들을 찾아다니며 그것을 보여주고 서문이나 행장, 묘지명, 발문 등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그런 정일당의 문집이 더욱 빛날뿐더러 세상 사람들로부터 공인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조선후기엔 여성들이 글을 지어 밖으로 내보내는 건 대단히 옳지 못한 일로 여겼다. 게다가 문집을 간행하면 집안 살림이 거덜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상당히 많은돈이 들어갔다.
그럼에도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던 윤광연이 자신도 아닌 아내의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그처럼 애쓴 것은 과연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만큼 평소 아내를 마음 속 깊이 사랑했을 뿐 아니라 존경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찌 보면 정일당과 윤광연은 부부라기보다는 차라리 모자 관계라 할 정도였다. 쪽지편지들에 나타난 정일당의 모습은 아내라기보다는 엄격한 어머니의 모습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광연은 그런 아내를 자신의 스승으로 여기며 별다른 싫은 기색 없이 잘 따랐으니,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천생연분’이 아니었을까 한다.
^^==^^ 모셔온글 ^^==^^
==^^ 편집//황금개구리(김재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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