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 판결문
판결문은 무미건조하고 딱딱한 것으로만 알려져 있는데 간혹 독특하거나 감성이 들어있는 유려한 문체의 판결문을 만나 잔잔한 미소를 머금을 때가 있다.
1955년 여대생 등 70여 명의 미혼 여성을 농락한 혐의(혼인빙자간음)로 기소된 박인수 사건이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을 때, 제1심 재판장을 맡은 권순영 부장판사는 “법은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만을 보호할 수 있다”며 무죄를 선고한 것은 유명한 일화가 되었다. 당시 카사노바 박인수는 자기를 거쳐간 그 수많은 여성 중 처녀는 딱 두 사람뿐이었다고 일갈했다. 혼인빙자간음죄가 헌재의 위헌결정에 따라 형법전에서 사라진 것을 보면 50~60년 전의 권순영 부장판사는 시대를 앞서가는 선각자(?)였다. 이 분의 아들은 군산에서 병원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옛날에 ‘제비판사’가 있었다. 閔文基 대법원판사(대법관의 명칭이 유신시대에는 대법원판사로 격하되었다가 1987년 헌법에서 대법관으로 환원되었다)가 1977년 소액사건 상고 범위에 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15 : 1의 소수의견을 개진하면서 소수의견에 대한 강한 신념을 다음과 같이 판결문에 썼다(대법원 1977. 9. 28. 선고 77다1137 전원합의체 판결).
“한 마리의 제비로서는 능히 당장에 봄을 이룩할 수 없지만 그가 전한 봄 젊은 봄은 오고야 마는 법, 소수의견을 감히 지키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민문기 대법원판사(2003년 작고)는 이 판결문으로 인해 ‘제비판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그 제비가 전한 봄은 영영 오지 않았다. 민 대법원판사는 김재규의 10·26 사건 상고심에서 “내란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며 소수의견을 밝히고 법원을 떠났다. 톨스토이는 “한 마리의 제비가 왔다고 해서 봄이 아니라고 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제비가 봄이 돼야 오는 것도 사실이다. 제비뿐만 아니다. 모든 산천초목이 그저 기다리기만 하고 봄에 대한 준비를 하지 않는다면 봄은 영영 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1996년 12·12, 5·18 사건 항소심에서 한문에 능한 權 誠 당시 서울고법 부장판사(후에 헌법재판관을 거침, 현재 언론중재위원장)는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각각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면서(무기와 징역 17년) 다음과 같이 선고했다(서울고법 1996. 12. 16. 선고 96노1892 판결). 권 성 부장은 '항복한 장수는 죽이지 않는다'는 뜻의 '항장불살(降將不殺)' 등 한문실력을 유감없이 이 판결문에 털어 넣었다. '망동하다 덫에 걸린 민망함이 없지 않다'는 말이 역사에 길이 남을 판결문에 들어있다. 읽을수록 홀로 웃음이 나온다.
“양형이유
1. 피고인 전두환에 대하여
피고인 전두환은 12·12 군사반란을 주도하여 하극상의 방법으로 군의 기강을 파괴하였고, 5·17 및 5·18 내란을 일으켜 힘으로 권력을 탈취하면서 많은 사람을 살상하고 군사통치의 종식을 기대하는 국민에게 큰 상처를 주었으며, 불법으로 조성한 막대한 자금으로 사람을 움직여 타락한 행태를 정치의 본령으로 만들었다. 그 죄가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대통령 재임중 6·29 선언을 수용하여 민주회복과 평화적 정권교체의 단서를 열은 것은 늦게나마 국민의 뜻에 순종한 것이다. 권력의 상실이 곧 죽음을 의미하는 정치문화로부터 탈피하여, 권력을 내놓아도 죽는 일은 없다는 원칙을 확립하는 일은, 쿠테타를 응징하는 것에 못지 않게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일이다. 자고로 항장은 불살이라 하였으니 공화를 위하여 감일등하지 않을 수 없다.
2. 피고인 노태우에 대하여
피고인 노태우는 피고인 전두환의 참월하는 뜻을 시종 추수하여 영화를 나누고 그 업을 이었다. 그러나 수창한 자와 추수한 자 사이에 차이를 두지 않을 수 없으므로 피고인 전두환의 책임에서 다시 감일등한다.
3. 피고인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에 대하여
피고인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은 피고인 전두환의 상관이면서 그 당여가 되어 그 위세를 돕고 불궤의 뜻을 이루게 하였다. 피고인 노태우 보다 원래는 나을 것이 없다. 다만, 나누어 받은 권세와 이어 받은 업이 피고인 노태우에 미치지 못하므로 그보다는 책임을 줄이지 않을 수 없고 그 나이가 이미 높음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피고인 차규헌의 경우에는 반란과 내란에 가공한 정도가 피고인들 중 가장 가볍고, 망동하다 덫에 걸린 민망함이 없지 않다. 법이 허용하는 가장 가벼운 선까지 형을 내리기로 한다.
4. 피고인 최세창, 장세동에 대하여
두 사람은 막중한 공직의 책임을 사당의 은고보다 아래에 두었으니 딱한 일이다. 후인을 경계하기 위하여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피고인 장세동은 이 사건이 일찍 처리되었다면 한 번에 끝낼 수도 있었던 영어의 고통을 세 차례 거듭하는 딱한 점이 있다. 가능한 한도까지 형을 내리기로 한다.
5. 피고인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에 대하여
피고인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은 자시하여 피고인 전두환의 우익이 되고 함께 그 뜻을 성취하였으며 아직도 앙연한 뜻이 은연중 배어나니 이치로 말하면 피고인 전두환 보다 책임이 가벼울 것이 없다. 다만, 피고인 전두환 보다 가벼운 죄로 기소되었고 세 사람 사이에도 그 행적에 차등이 있으므로 차이를 두기로 한다.
6. 피고인 이희성, 주영복, 정호용에 대하여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인 피고인 이희성과 국방부장관인 피고인 주영복은 헌법을 유린하는 내란세력으로부터 정부를 보위하고 국민의 생명을 지켜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오히려 내란세력에 추종하였으므로 그 책임이 무겁다. 다만, 힘에 밀려 내란세력에 끌려간 형적이 없지 않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힘에 밀려 그 소임을 다하지 못하였다고 변명하는 것은 하료(下僚)의 일이고, 피고인들과 같이 지위가 높고 책임이 막중한 경우에는 이러한 변명이 용납되지 않는다. 유죄로 인정되면 집행유예가 불가능하므로 딱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피고인 정호용은 12·12 사건에는 가담하지 않았지만 그 이후에는 더욱 적극적으로 피고인 전두환을 추수하였으므로 책임이 결코 가볍지 않다.
7. 피고인 신윤희, 박종규에 대하여
피고인 박종규는 적과의 전투가 아닌 상황에서 상명하복을 기계처럼 실천하였으니 민망한 일이다. 법이 허용하는 데까지 형을 내리기로 한다. 피고인 신윤희는 승세를 좇아 상관을 포박한 것이므로 비록 외양은 피고인 박종규와 유사하지만 내용은 다른 점이 없지 않다. 그러나 두 사람의 상명하복을 내세울 수 있는 점은 기본적으로 동일하므로 같은 형을 과하기로 한다.”
2006년 박 철 대전고법 부장판사(현재 변호사)가 임대아파트의 퇴거 요구를 받은 70대 노인의 손을 들어주며 언론으로부터 "아름다운 판결"로 칭송받은 다음과 같은 판결문을 썼다(대전고법 2006. 11. 1. 선고 2006나1846 판결). 이 판결은 대법원에서 깨졌지만 인간사를 바라보는 법관의 고뇌를 읽어볼 수 있는 흔치 않은 명문이다.
“가장 세심하고 사려 깊은 사람도 세상사 모두를 예상하고 대비할 수는 없는 법이다. 가장 사려 깊고 조심스럽게 만들어진 법도 세상사 모든 사안에서 명확한 정의의 지침을 제공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법은 장래 발생 가능한 다양한 사안을 예상하고 미리 만들어두는 일종의 기성복 같은 것이어서 아무리 다양한 치수의 옷을 만들어 두어도 예상을 넘어 팔이 더 길거나 짧은 사람이 나오게 된다. 미리 만들어 둔 옷 치수에 맞지 않다고 하여 당신의 팔이 너무 길거나 짧은 것은 당신의 잘못이니 당신에게 줄 옷은 없다고 말할 것인가? 아니면 다소 번거롭더라도 옷의 길이를 조금 늘이거나 줄여 수선해 줄 것인가? 우리는 입법부가 만든 법률을 최종적으로 해석하고 집행하는 법원이 어느 정도 수선의 의무와 권한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의회가 만든 법률을 법원이 제멋대로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법률이 의도된 본래의 의미를 갖도록 보완하는 것이고 대한민국헌법이 예정하고 있는 우리 헌법체제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이상과 같은 점을 참작하여 이 법원을 구성하고 있는 세 명의 판사는, 임대주택법 제15조 제1항 제1호의 ‘임차인’의 의미를 해석함에 있어서 이 사건 사안과 같은 특별하고도 예외적인 사정을 참작하는 실질적 의미의 임차인으로 해석하여야 한다는 점과 피고 B가 그 실질적 의미의 임차인 요건을 갖추었다는 점과 그리하여 피고 B가 이 사건 임대주택에 관하여 우선분양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는 점에 대하여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가을 들녘에는 황금물결이 일고, 집집마다 감나무엔 빨간 감이 익어 간다. 가을걷이에 나선 농부의 입가엔 노랫가락이 흘러나오고, 바라보는 아낙의 얼굴엔 웃음꽃이 폈다. 홀로 사는 칠십 노인을 집에서 쫓아내 달라고 요구하는 원고의 소장에서는 찬바람이 일고, 엄동설한에 길가에 나앉을 노인을 상상하는 이들의 눈가엔 물기가 맺힌다.
우리 모두는 차가운 머리만을 가진 사회보다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을 함께 가진 사회에서 살기 원하기 때문에 법의 해석과 집행도 차가운 머리만이 아니라 따뜻한 가슴도 함께 갖고 하여야 한다고 믿는다. 이 사건에서 따뜻한 가슴만이 피고들의 편에 서있는 것이 아니라 차가운 머리도 그들의 편에 함께 서있다는 것이 우리의 견해이다.”
2008년 베트남신부 살인사건에서 대전고법 김상준 부장판사는 국제결혼정보업체에 1,000만 원을 지급하고 19세의 베트남 여인과 결혼한 후 언어적 소통의 어려움 등으로 결혼생활이 여의치 않아서 신부가 베트남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사기결혼을 당했다고 생각하고 신부를 살해한 남편에 대하여 징역 12년을 선고한 원심을 수긍하면서 다음과 같이 판결문을 썼다(대전고법 2008. 1. 23. 선고 2007노425 판결).
“가. 양형의 조건
피고인의 이 사건 범행 동기에 관한 진술 및 피해자측 사정(피해자가 이 사건 전날 피고인에게 남긴 편지)
피고인은 2007. 6. 26. 21:30경 동료들과 회식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귀가한 후, 피해자가 가방에 여권과 옷을 꾸린 채 외출복 차림으로 있는 것을 보고 피해자에게 베트남어로 ‘결혼’을 의미하는 말인 ‘캐톤’이라고 묻자, 피해자가 ‘아니오’라는 말을 하며 집을 나가려고 하여 피해자가 피고인과의 결혼생활을 끝내고 집을 나가려는 것으로 판단하고, 피해자로부터 처음부터 사기결혼을 당하였다고 생각하고 버림받았다는 생각이 들어 순간적으로 격분하여 피해자를 살해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피해자는 이 사건으로 살해되기 전날인 2007. 6. 25. 다음과 같은 내용의 베트남어로 된 편지를 남겼다. 피고인과의 그간의 결혼생활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피고인이 좋은 사람과 만나 결혼을 하기를 빌면서 자신은 베트남으로 돌아가겠다는 내용이다. 이 편지를 통하여 피해자의 피고인에 대한 정서적 반응과 그들의 결혼생활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과 저는 매우 슬픕니다. 제가 한국에 온 지 얼마되지 않아 아직은 한국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한국에서도 부인이 기뻐 보이지 않으면 남편이 그 이유를 물어보고 책임을 져야 되는 것이 아닌가요, 그런데 남편은 왜 오히려 아내에게 화를 내는지, 당신은 아세요?
남편이 어려운 일 의논해 주고 서로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 아내를 제일 아껴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중략) 저는 당신의 일이 힘들고 지친다는 것을 이해하기에 저도 한 여자로서, 아내로서 나중에 더 좋은 가정과 삶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당신은 아세요?
저는 당신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당신은 왜 제가 한국말을 공부하러 못 가게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저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대화하고 싶어요. 당신을 잘 시중들기 위하여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무엇을 마시는지 알고 싶어요. 저는 당신이 일을 나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것을 먹었는지, 건강은 어떤지 또는 잠은 잘 잤는지 물어보고 싶어요. 제가 당신을 기뻐할 수 있게 만들 수 있도록, 당신이 저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쳐 주기를 바랐지만, 당신은 오히려 제가 당신을 고민하게 만들었다고 하네요. 저는 한국에 와서 당신과 저의 따뜻하고 행복한 삶, 행복한 대화, 삶 속에 어려운 일들을 만났을 때에 서로 믿고 의지하는 것을 희망해 왔지만, 당신은 사소한 일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화를 견딜 수 없어하고, 그럴 때마다 이혼을 말하고, 당신처럼 행동하면 어느 누가 서로 편하게 속마음을 말할 수 있겠어요. 당신은 가정을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큰일이고 한 여성의 삶에 얼마나 큰일인지 모르고 있어요. 좋으면 결혼하고 안 좋으면 이혼을 말하고 그러는 것이 아니에요. 당신이 그렇게 하는 것은 한 사람의 진실된 남편으로서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물론 제가 당신보다 나이가 많이 어리지만, 결혼에 대한 감정과 생각에 대해서는 이해하고 있어요. 한 사람이 가정을 이루었을 때 누구든지 완벽하지 않다는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이해해야 되요. 물론 부부가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의 상처가 너무 많아 결국, 이혼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한 사람의 감정을 존경하고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마음을 닫아버리게 하는 상황들과 원망하게 하는 상황들이 무관심하게 지나가게 되요. 모든 사람에게 각자의 자존심이 있고 자신을 ‘정답’에 서게 하는 것은 알아요. 하지만 부부가 행복할 수 없고 위험하게 만드는 일을 계속 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을 거에요. (중략) 당신은 저와 결혼했지만, 저는 당신이 좋으면 고르고 싫으면 고르지 않을 많은 여자들 중에 함께 서 있었던 사람이었으니까요.
당신은 아세요? 제가 당신과 결혼하기 전에는 호치민 시에서 일을 했어요. 당신이 우리 집에 왔을 때 우리 집은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어요. 저는 가정을 위해서 일을 나가야 했고, 그 일은 매우 힘들었어요. 하지만 봉급은 얼마 못 받았지요. 저는 노동이 필요한 일도 했었어요. 그 일은 매우 힘들었어요. 그것이 가축을 기르는 일이든, 농작을 하는 일이든... 가족들은 노동일로 벼를 심고 베는 일을 했어요. 베트남에서 그렇게 많은 일을 했어도 입을 것과 먹을 것만 겨우 충당할 수 있었지요. 그래서 제가 한국에 왔을 때에 더이상 바라는 것이 없었고, 단지 당신이 저를 이해해 주는 것만을 바랬을 뿐이에요. 저도 일을 해봤기 때문에 일을 어떻게 하고 또 그것이 힘들다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제가 베트남에 돌아가게 되도 당신을 원망하지 않을 거에요. 저는 당신이 저말고 당신을 잘 이해해 주고 사랑해 주는 여자를 만날 기회가 오기를 바래요. 당신이 잘 살고 당신이 꿈꾸는 아름다운 일들이 이루어지길 바래요.
저는 베트남에 돌아가 저를 잘 길러주신 부모님을 위하여 다시 처음처럼 일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저의 희망은 이제 이것뿐이에요. 당신과 전 서로 다른 나라 사람이어서 제가 한국에 왔을 때 대화를 할 사람이 당신뿐이었는데... 누가 이렇게 될 것이라 생각할 수 있었겠어요. 정말로 하느님이 저에게 장난을 치는 것 같아요. 정말 더 이상 무엇을 적을 것이 있고 말할 것이 있겠어요. 당신은 이 글씨 또한, 무엇인지도 모르고 이해하지도 못할 것인데요.
나. 평 가
이 사건 범행은 피고인이 그 경위가 어찌 되었던 간에 피고인과 결혼하여 피고인만을 의지하여 말도 통하지 않는 대한민국에 온 19세의 피해자를 무참하게 살해한 것으로 그 결과가 지극히 무거워 엄중한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피해자가 남긴 편지 내용을 보자. 피해자는 19살의 어린 나이에 피고인과 서로 이해하고 위해주는 애틋한 부부관계를 이루고, 한국어를 빨리 배워 한국생활에 적응하면서 따뜻한 가정을 이루겠다는 소박한 꿈을 품고 한국에 와 피고인과 동거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피고인의 피해자에 대한 배려의 부족, 어려운 경제적 형편 및 언어문제로 인한 의사소통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원만한 결혼생활을 영위하지 못하였다. 피고인의 무관심과 통제로 인하여 피고인과 따뜻한 가정을 이루기는커녕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도 누리지 못하겠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던 끝에 피고인과의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베트남으로 돌아가려고 하였을 것이다. 피고인은 피해자의 이와 같은 반응을 보고 피해자가 처음부터 피고인과 결혼할 생각 없이 사기결혼을 하였다고 오해한 것이 피고인이 이 사건 범행에 이른 주된 원인이 되었다. 거기에 피고인의 피해망상적 사고경향과 음주 중 폭력습벽이 더 해져 피고인이 피해자를 살해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이 사건 범행은 결국, 계획적이거나 미리 의도된 범행으로 보이지는 않으나, 피고인의 타인에 대한 배려의 부족, 피해망상적 사고경향 및 음주 중 폭력습벽에 기인한 것으로서 피고인의 이러한 그릇된 성행을 교정하기 위하여서도 상당한 기간 동안 피고인을 사회로부터 격리하는 형의 선고는 불가피하다고 판단된다.
한편, 시각을 바꾸어 이 사건과 같은 비극이 발생한 근본 원인을 돌아보고 싶다. 특히,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한국 남성과 제3세계 여성 사이의 국제결혼이 급격히 늘어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이 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이런 국제결혼의 명암을 재조명해 보도록 하고 있다. 배우자감을 국내에서 찾을 처지가 되지 못했던 피고인이 결혼정보회사를 통하여 베트남 현지에 임하여 졸속으로 피해자를 만나게 된 전 과정을 보면서 스스로 깊은 자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피고인은 그저 피해자가 한국인과 비슷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단 몇 분 만에 피해자를 배우자감으로 선택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가 누구인지, 누구 집 자식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아무도 알려 준 바 없었고, 그래서 이를 전혀 알 수 없었을 뿐더러, 또한 스스로 알고자 하지도 아니하였다. 목표는 단 한 가지 여자와 결혼을 한다는 것일 뿐, 그 이후의 뒷감당에 관하여 진지한 고민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지탄을 피고인에 대해서만 집중할 수 없을 것 같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총체적인 미숙함의 한 발로일 뿐이다. 노총각들의 결혼대책으로 우리보다 경제적 여건이 높지 않을 수도 있는 타국 여성들을 마치 물건 수입하듯이 취급하고 있는 인성의 메마름. 언어문제로 의사소통도 원활하지 못하는 남녀를 그저 한 집에 같이 살게 하는 것으로 결혼의 모든 과제가 완성되었다고 생각하는 무모함. 이러한 우리의 어리석음은 이 사건과 같은 비정한 파국의 씨앗을 필연적으로 품고 있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우리는 21세기 경제대국, 문명국의 허울 속에 갇혀 있는 우리 내면의 야만성을 가슴 아프게 고백해야 한다. 혼인은 사랑의 결실로 소중히 보호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가치를 온전히 지켜낼 능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일까.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이 땅의 아내가 되고자 한국을 찾아온 피해자 공소외인. 그녀의 예쁜 소망을 지켜줄 수 있는 역량이 우리에게는 없었던 것일까. 19세 공소외인의 편지는 오히려 더 어른스럽고 그래서 우리를 더욱 부끄럽게 한다. 이 사건이 피고인에 대한 징벌만으로 끝나서는 아니 되리라는 소망을 해 보는 것도 이러한 자기반성적 이유 때문이다.
이 법원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고국을 떠나 말도 통하지 않는 타국사람과 결혼하여 이역만리 땅에 온 후 단란한 가정을 이루겠다는 소박한 꿈도 이루지 못한 채 살해되어 19세의 짧은 인생을 마친 피해자의 영혼을 조금이라도 위무하고 싶었다. 그 전제로 피고인이나 결혼을 알선한 결혼정보업체를 통하여 피해자의 가족들에게 피해자의 죽음을 알리려고 하였다. 결혼정보업체는 피해자의 성장배경, 생활환경 및 피해자의 가족들의 소재에 대한 이 법원의 사실조회에 대하여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고, 관계 당국이나 피고인을 통하여서도 피해자의 가족들의 소재를 확인할 길이 없었다. 피해자의 가족들에게 피해자의 죽음을 알릴 길을 찾지 못한 채 이 사건 판결에 이른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로 인하여 피고인으로서도 피해자의 가족들로부터 용서를 받는 기회를 갖지도 못하였다.
이와 같은 사정에 피고인의 연령, 성행, 전과관계, 범행의 동기, 경위, 결과 및 범행 이후의 정황 등 양형의 조건이 되는 여러 가지 사정들을 종합하여 보면, 피고인에 대하여 징역 12년을 선고한 제1심의 형량이 너무 무겁거나 가벼워 부당하다고 보이지 않는다.”
위 판결은 형사재판이 단순히 범죄자에 대한 징벌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문제점을 다 같이 고민해 볼 수 기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판결이다.
2009년 9월 조병현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친형 노건평의 사건에서 “그토록 자랑스러워 했던 동생이 자살하면서 이제 해가 떨어지면 동네 어귀에서 촌부들과 신세를 한탄하는 초라한 시골 늙은이의 외양을 하고 있다”고 썼다.
2012년 11월 19일 서울서부지방법원 이성철 부장판사는 존속상해 피고사건의 항소심에서 피고인의 양형부당 주장에 대한 판단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서울서부지방법원 2012. 11. 19. 선고 2012노1012판결)
“무릇 부모님은 자식을 낳아주고 길러주신 은인이시다.
그럼에도 피고인은 술을 마시고 별다른 이유 없이 피고인의 부모에게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을 하고 부모의 얼굴을 주먹으로 수회 폭행하여 부모의 코와 광대뼈 등에 상해를 가하였다. 자식으로서 차마 있을 수 없는 행동이다. 또한 피고인은 2007년 존속상해죄와 상해죄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의 형을 선고받은 전력이 있고, 그 이외에 가족내 폭행 사건으로 수사받은 전력까지 고려하면 피고인을 엄히 처벌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피고인이 전처와 이혼하고, 동생의 병환과 어려운 집안 사정에 화가나 술에 취해 우발적으로 이 사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이는 점, 피고인이 원심 판결 선고 후 3개월 이상 구금되어 있는 기간 자신의 잘못을 모두 인정하고 반성하고 있는 점, 피해자들인 피고인의 부모가 오직 자식의 앞날을 걱정하며 피고인에 대한 처벌을 원치 아니하고, 피고인의 동생인 이병남도 피고인의 선처를 탄원하고 있는 점, 그밖에 피고인의 연령, 성행, 범행의 동기와 수단, 범행 후의 정황 등 기록과 변론에 나타난 양형의 조건이 되는 여러 가지 사정들을 종합하되 특히 피고인의 가정의 장기적인 화목과 평안을 고려하면, 원심의 형이 다소 무거워 보이므로 피고인의 양형부당 주장을 신중하게 받아들인다.
{다만 향후 피고인에 대하여 재범의 위험을 방지하고 피고인의 가정의 평안을 위하여 주자(朱子, 朱熹)의 10가지 교훈 중 세가지를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 불효부모 사후회(不孝父母 死後悔)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으면 돌아가신 뒤에 후회한다.
- 불친종족 소후회(不親宗族 疎後悔)
가족에게 친하게 대하지 않으면 멀어진 뒤에 후회한다.
- 취중망언 성후회(醉中妄言 醒後悔)
술에 취해 망령된 말을 하면 깬 뒤에 후회한다.}”
앞으로도 종종 이런 감성 판결문들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첫댓글 12.12사건 권성재판장의 세련된 한문투 판결문 다시 읽으니
마치 악수님 산행기를 대하는 듯 합니다.
(혹시 대문호 악수님에게 누가 되는 표현일지도...)
제 기억으론 정호용등 몇사람의 혐의를 부화뇌동이라 하였던 것 같은데
그 용어는 없었네요.
역시 다른 사람은 이 글을 안 읽어도 히든피크님을 읽어보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판결문에 부화뇌동의 취지는 들어있는데 판결문상 부화뇌동을 쓰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전두환.노태우와 육사11기 동기생인 정호용은 후방의 사단장으로
있어 거사에 직접 참가는 못했으나 이사람 강골이었던 모양입니다.
전통시절 유학성 ,황영시,차규헌같은 군선배들이나 노태우도 깎듯이
존대하는 지존에게 이사람은 반말에 맞담배질이니 문고리 3인방 쓰리허의
견제를 많이 당했답니다.
그런 사람에게 판결문의 죄명이 부화뇌동이었으니
장군출신인 자기에게 내란.반란죄가 아닌 잡범수준의 부화뇌동이 말이 되냐며
분통을 터뜨린 일이 생각납니다 .
정호용이 대구의 향토사단장을 하다가 뒤늦게 거사팀에 합류함으로써 5공 공신반열에 오르지 못한 울분과 컴플렉스때문에 치기어린 행동을 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훌륭하신 판사님들이 많으시네요.
귀한 자료 잘 읽었습니다.
엉터리도 많지만 훌륭한 분들도 많습니다.
훌륭한 말씀들이 있었군요^^
욕도 많이 먹지만 그 동네에 나름 훌륭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판결은 당사자를 설득, 수긍케하는 최후의 수단이므로 감성의 남용이 아닌 활용은 적절한 수단이겠습니다.
특히 값싼 감성이 아니고 법관의 인간적 고뇌가 잘 드러난 고품격의 것이라면 바랄 나위 없을 것입니다.
사회과학을 하는 사람들은 cool head but warm heart, 냉철한 머리와 따듯한 가슴을 겸비해야 합니다.
아직도 돌보다는 쌀이 많다고 믿고 싶네여
돌보다 쌀이 많기 때문에 이 사회가 그런대로 굴러가는 것이겠지요.